꿈을 이루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야 - 나는 중졸 작사·작곡가
오카지마 카나타 지음, 정은희 옮김 / 리틀에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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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에는 10대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고통 스러울 때는 고통스러울 때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심심할 때는 심심할 때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마찬가지로, 그때의 감정이 오롯한 흔적이 됐을 때, 그 글에서만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고로 자신의 오늘과 지금의 감정에 충실한 글을 쓰다보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시계 바늘이 어느 순간 하나 둘, 맞아가며 완전히 이기적인 글들이 결국은 강력히 이타적인 글들이 될 것이다.

몇 년 전 썼던, 글에 댓글이 달렸다. 힘든 시기에 위로를 받았다는 글이다. 돌이켜 읽어보니, 내가 썼던 흔적은 분명하나, 시간의 탈것을 타고 한참을 벗어난 지금, 나는 그 생각과 감정, 주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지 오래된 후다.

글 주인도 잊어버린, 주인 없는 글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썼던 지난 5년의 흔적이 광선을 타고 빛의 속도로 뿌려진다. 그것들은 형체없는 클라우드로 두둥실 떠다니다가, 우연하게 누군가의 가슴에 꽂히는 모양이다. 내가 받은 어떤 감동도 주인이 잊어버린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된 발라드를 하나 들었다. 가만히 상념에 젖어든다. 다시 생각해본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과연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을까.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와 작사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가. 나에게 적잖은 감동과 위로를 주던 음악의 원주인들은 아마 그들이 남긴 흔적과 다른 '감정'과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정작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만 보더라도 헛웃음이 나질 않던가. 마치 그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느 귀여운 아이의 일기장인 것 마냥 하지 않던가. 그러고보면 나는 그저 '매순간의 나'로만 존재할 뿐, 지나온 '나'와 마주할 '나'는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일지 모른다. '나'는 무수하게 바뀌어가는 '감정'이라는 점의 연결선일 뿐이다. 고로 과거의 나의 흔적을 밟고 찾아온 누군가의 '비난'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며, 앞으로 다가올 나의 경로를 걱정하는 누군가의 '걱정'도 이미 '나'의 것은 아니다. 나의 것은 오로지 지금이 이순간 여기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지적한 일이 나에게 울림을 주듯, 누군가의 '비판'에도 배움을 갖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걱정하는 일에도 '깨달음'을 얻듯, 누군가의 '걱정'에도 응원의 힘을 받는다. 진로라는 것은 내가 설정한 방향일 뿐이지, 정답은 아니다.

돌을 쥐고 어느 방향으로 던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 방향으로 던지면 좋다. 던져서 목표물을 맞혀도 좋고, 맞추지 않아도 좋다. 쥐었던 돌을 다시 제자리에 두어도 괜찮다. 그 돌을 주어다가 반대 방향으로 던저도 괜찮다. 삶은 그저 내가 설정한 방향으로 진행해 보겠다는 일종의 '놀이'일 뿐이다. 우리는 어제의 내가 던진 지도를 받고 오늘을 움직이며, 내일의 나에게 그 방향을 지도할 뿐이다. 삶은 어제와 오늘 내일이 주고 받는 릴레이 경주일 뿐이다. 그러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내일의 나는 언제나 같지 않으며 그것을 인정한다면 과거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가 사라지고, 내일의 나에 얽매일 이유가 사라진다.

고로, 오늘, 지금, 여기의 나에 대한 글을 써라. 그것은 나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길라잡이이며, 누군게에게는 아주 적절한 위로이며, 누군가에게는 충고가 되고 다시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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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있다는 착각 - 성적의 판도를 가르는 뇌 최적화의 기술
대니얼 T. 윌링햄 지음, 박세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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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억은 무엇을 위해 진화했는가. 그것을 알면 학습에 대한 본질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뇌는 '문자'를 암기하기 위해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은 '공간'을 인식하고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진화됐다. 고로 학습을 위해 가장 기피해야 하는 일은 문자를 그저 암기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이야기'와 '공간'을 기억하도록 진화됐다. 쉽게 말해, 인간의 기억은 '문자'보다 '이미지'나 '서사'가 중요하다. 우리의 정보 처리 방식은 생존을 위한 필수 장치였다. 쉽게 말해 우리 사피엔스 종은 복잡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억'이라는 장치를 진화 시켰으며 이것은 '사냥, 탐색, 물건의 위치'를 기억하는데 필요했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하기 위한 감각은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기억'이다.

사피엔스는 하나의 개체일 때는 매우 연약하다. 이들이 생존하기 위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사회화'를 이루는 일이다. 고로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전달되는 지식과 경험을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하곤 했다. 이런 서사적인 요서들은 감정적 연결을 통해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면 이것을 학습에 적용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의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단순히 문자를 암기하는 대신, 정보를 시작적으로 표현하고 스토리텔링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정보를 기존 정보와 결합하게 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연결한다. 실제로 우리는 문학 작품의 한문단을 암기하는 일은 어려워 하면서 '예술 작품' 하나를 기억하는 일은 비교적 쉽게 한다. 세계의 지형을 알기 위해서, '문자'가 아니라 '지도'라는 표식에 더 효과적인 도움을 얻는다.

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어떤 학습법이 효과적인지 살펴보자.

첫째, 학습목표를 살핀다. 학생들의 대부분은 대체적으로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라는 본질을 놓친다. 가령 어떤 누군가가 '땅을 파세요.'라는 지시를 했다고 해보자. 왜 그 일을 해야하는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업무능력과 효율은 매우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해서 수로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는 사람은 능동적으로 비탈길을 잘 이용할 것이고 어떤 경로로 땅을 파야하는지, 어떤 깊이로 땅을 파야하는지 생각하며 일을 진행한다. 다만 그저 지시에 의해 '땅을 파는 이들'은 막연한 목표에 회의감을 갖게 된다. 고로 '목표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가령 예를 들자면 '미적분'을 예로 들어보자. 단순히 공식을 외우고 거기에 숫자를 넣어서 그것을 풀어내는 이들과, 차후 로켓 공학에서 로켓의 역학, 짧은 거리로 자동차의 속력를 확인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수학적인 접근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의미로 '미적분'을 접근하는 이들은 완전히 다른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낸다.

둘째, 마인드맵을 활용한다. 마인드맵이란 하나의 거대 뿌리에서 시작해서 가지를 치며 세부정보로 연결되는 일을 만한다. 이런 마인드맵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전체 그림'을 살펴야 한다. 전체의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 묶을 수 있는 커다란 뼈대는 어디에 있나. 바로 '목차'에 있다. 즉, 공부를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인 '목차'를 알아야만 한다.

'책의 목차'를 살피면, 목차에는 커다란 대주제 1, 2, 3 으로 나눠져 있다. 교과서를 집필한 필자는 총 세 단계의 절차에 따라 커다란 주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커다란 주제 하위에는 각각마다 1, 2,3의 중간 주제가 있다. 각각의 주제에 다른 주제가 이어지는 것이다. 다시 각각마다 1, 2, 3이라는 세부 제목으로 나눠진다. 이 세부 제목으로 나눠지면, 각 제목마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 키워드'가 있다. 그것을 살핀다. 그것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서 커다란 마인드맵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아~ 이런 식으로 각각의 주제들이 연결되는구나."

하나의 책이 말하고자 하는 전체의 그림이 완전하게 파악되면, 교과서를 소설책 읽듯, 정독해 나가면 된다. 이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다보면 전체적인 흐름이 이해된다. 인간의 기억은 이렇게 정보를 입력할 수 있다. 다만 인간의 진화는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사회화'의 결과물이다. 고로 우리는 받아들이는 일만 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달'하는 일이다. 고로 인풋보다 아웃풋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게 세번째 요소인 '가르치기'가 필요하다.

셋째, 가르친다. 모든 학습 방법 중 가장 확실한 학습방법은 '가르치기'다.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다. 사피엔스는 자신이 경험한 일과 알고 있는 정보를 섞어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인간의 진화는 남에게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진화해 온 것만이 아니라는 의미다. 사회는 대체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하는 이'보다는 '도움을 주는 이'를 필요로 한다. 고로 더 많은 정보를 세세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이들은 사회의 필요 구성원으로 인정되어 꼭 생존에 유리했다. 고로 우리는 남을 잘 가르치도록 진화했으며 남을 잘 가르칠수록 생존 확률이 높고 그러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르치는 과정의 학습능력을 길러왔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공부 방법은 '시간'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아무리 허튼 공부방법이라고 하더라도 무식하게 진득하면 결국은 이기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언어'가 증명한다. 우리의 기억에 모국어를 익히기 위해 '치열하게 학습'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일정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특정 환경에 노출되면 저절로 언어가 익혀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거기에 시간을 쏟는 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습관이 필요하다. 첫째,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계를 멀리한다. 둘 째, 매일 같은 양을 습관화하여 학습한다.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계는 우리의 집중력을 앗아가는 괴물과 같다. 이는 세계적인 '마케터'들의 사냥터이다. 넷플릭스의 최대 적이 누구냐는 질문에 그들은 '사람들의 수면'을 최대의 적으로 꼽았다. 즉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시간을 앗아 광고를 노출할수록 그들은 꽤 성공적인 사업 이익을 얻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이런 모든 것들은 현재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 있다. 어떻게 우리의 돈을 한 푼도 가져가지 않으며 세계적인 수익을 얻어내는 것일까. 그들은 '노출 광고'를 통해 수익을 얻는다. 고로 우리는 거기에 항상 노예처럼 복종할 수 바에 없게 된다. 두 번째의 습관화는 말할 것 없다. 우리의 대부분은 시험기간에 하루 10시간씩 일주일을 공부하면 최선을 다했다는 착각에 빠진다. 다만 시험기간 하루 10시간보다 매일 아침, 저녁 30분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학습에 투자하는 결과를 나타낸다. 매일 아침과 저녁 30분은 꽤 긴 시간은 아니다. 고로 이 노력이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실패에 대한 심리적 데미지를 입지 않는다. 다만 매일 10시간씩, 시험기간에 벼락치기를 하게 되면, '열심히'했다는 과정의 취해, 심리적 데미지를 입게 된다. 고로 적은양을 꾸준히 하는 습관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것은 역시나 환경과 습관이 가장 중요한 듯 하다. 아무리 방법을 찾아 헤매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래 앉아서, 얼마나 했는지에 대한 총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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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사라져도 결과는 남는다 -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을 위해
이해인 지음 / 필름(Feelm)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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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어회'는 가장 좋아하는 회 중 하나다. '광어'는 스스로 회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저 '식품'처럼 보여지는 경우가 있다. 그 외형이 그저 손질되기 편하기 위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잔인한 인식의 오류다. 광어의 표면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식탁에 올라가기 때문에, 그것의 원래 색에 대해서는 자세히 볼 기회는 많지 않지만, 광어의 표면이 모래를 닮았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광어의 표면은 왜 모래를 닮았나. 그것은 인간의 식욕을 자극하기 위한 '데코레이션'이 아니다. 광어 또한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에 의해 최선의 진화를 한 결과물이다. 광어는 대략 5천만 년 간 진화를 거듭해 온 종이다. 고로 고작해봐야 30만 년의 진화의 단계를 거쳐 온 사피엔스에 비하면 조금더 자연선택의 최전선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5천만년 동안 아주 섬세하게 진화해 왔다. 그놈이 그놈인 자연 생태계에서 우연하게 모래와 닮은 놈이 포식자에게 덜 잡혀먹혔다. 다시 살아남은 놈들 중 더 모래와 닮은 돌연변이가 포식자에게 덜 잡아먹힌다. 이런 세대 간의 반복이 거듭되면서 더 '모래' 같은 녀석만 남았다. 이 과정이 5천만 년이니, 그 위장술은 가히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다.

바다 깊은 곳에서 바닥에 바짝 엎드려 모래와 자갈을 닮은 모양을 하던 이들은 간혹 이 진화의 오류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위장은 워낙 완벽 단계에 머물러 있어, 심지어 같은 종끼리의 소통도 어려워진다. 다시말해 짝짓기 시즌이 되면 이들은 모래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바닥을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넓은 바다에 존재하는 것은 '나 하나뿐이구나. 스스로의 등껍질 위에 완벽한 모래의 형상을 쌓고 다른 이들의 위장에 깜빡 속는 것이다. 우리 사회라고 별거 있나. 현대 인간 사회도 이와 유사하다. 인간은 위장술이 부족한 '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만 보면 우리 또한 '자연선택'에 따라 '최선의 위장술'을 선물 받았다.

'당신의 눈동자'가 그렇다. 우리는 홀로 살아남기 어려운 '영장목'에 속한다. '침팬지'나 '카푸친 원숭이'도 같은 소속에 있다. 이들은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 없이 얇고 가벼운 피부만 가지고 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사회화'라는 사회적 진화를 필수적으로 가져야 했다. 즉 다른 이들에게 선택 받아야 했다.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몹시 중요하다. 당신이 어디를 보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대에게 알려주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을 구성원에 합류시켰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이들은 사회화에서 떨어져 생존확률이 줄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진화는 양면을 가졌다. 남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의 약점을 숨겨야 했다. 즉, 우리는 이성을 고를 때, '얼굴'과 같은 외형을 가장 중요시 생각하며 스스로 외롭지 않은 이, 고립되어 있지 않는 이인 척 위장을 해야 했다.

인간의 위장술은 그렇다. 인간의 위장술은 '진정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행복과 성공을 과시하는 사회적 위장술이다. 이것은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 두드러진다.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위장하여 '행복', '성공'으로 둔갑한다. 넙치의 등껍질처럼, 인간의 위장술이 얼마나 위대한가.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종을 속인다. 고로 자신의 위장능력에 대해서는 깜빡 잊고, 남들의 위장술에는 깜빡 속는다. 고로 모래 등껍질을 하고 혼자라는 착각에 빠진 '광어'를 닮았다.

이 외면적인 행복의 표현 뒤에는 역시 너도 나도 공유하고 있는 '영장목' 고유의 숨겨진 외로움과 고립감이 있다. 이런 외로움과 고립감은 다른 위장술의 대가들에 의해 완벽하게 속아 더 곪아간다. '외로움'과 '괴로움', '고통' 이것은 인간류 전반이 가진 내재된 감정이다. 이것을 완벽하게 숨기고 속는 과정에서 우리는 꽤 많은 오류를 범한다. 이 과정을 보면 '발가벗은 임금님'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발가벗은 임금님'에서 모두는 임금님이 발가벗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옷은 '바보'에게만 보이지 않는 옷이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사람들은 발가벗은 임금님을 보며 보이지 않는 옷에 감탄한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만 진실을 말한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옷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아이가 진실을 외치기 전까지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그 최초의 '바보'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서로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그렇지 않은 척하는 사회를 닮았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를 보면 꽤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사실 이 동화의 일부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작가 '루이스 캐럴'의 병와 같은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동화가 가지고 있는 '말장난' 때문이다. 이 동화에서는 영어권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이 몇몇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동화의 그런 재미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 동화를 최고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 속에서 자신을 포장하고 돌아서서 자신만 혼자라고 느낀다. 고로 자신감 넘치는 '소셜미디어' 속 세상과 다르게 모두가 그 안에서 고립되고 외로움을 느낀다. 사람은 워낙 이기적이다. 고로 자기 밖에 모른다. 자신은 속이며, 다른 이들에게 속인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만들어 내나. 인간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지만 그렇지 못하다. 둘이 있을 때는 외롭다하지 않다가, 서로 하나가 되면 자신만 외롭다한다. 실패, 좌절, 우울, 실망, 자책, 두려움, 외로움. 이런 것은 혼자 일때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다만 그것이 유일하게 나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자각만 하더라도 이런 감정에서 꽤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다. 그런 감정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인류의 뇌속에 잠재된 디폴트값이다. 고로, 그것은 당연하다는 인지를 하고 살아가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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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치즈는 어디에서 왔을까? - 아직도 망설이는 당신에게 스펜서 존슨이 보내는 마지막 조언
스펜서 존슨 지음, 공경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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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념' 그 자체가 아니라, 신념을 선택하는 존재일 뿐이다. 신념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선택할 수 있다. 고로 오래된 신념에 묻혀, 그것이 자아 그 자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신념은 우리를 가둘 수 있다. 어떤 신념은 우리를 주저 앉히고 어떤 신념은 우리를 나가게 한다. 과거의 신념이 꼭 그르지도 않지만, 꼭 옳지도 않다. 그것인 변화하는 시계 바늘처럼 어떤 때에는 꼭 맞다가 어떤 때가 되면 반드시 달라진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시간에 맞게 움직이는 일이다. 아침이 되면 아침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저녁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아침이 되어, 저녁의 일을 하고 저녁이 되어 아침의 일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일관적인 어떤 것은 어떤 시기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변하지 않은 어떤 것은 변화무쌍한 우주의 생태에 따라 반드시 오류를 범한다. 세상만사는 모두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것은 연결된다. 고로 달이 지구를 돌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태양이 은하 중심을 돌고 은하가 우주의 중심을 돌고 있는 만물이 움직이는 역학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바뀌게 되어 있다. 우주 역학을 무시한 채, 변하지 않는 신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신의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일지 모른다. 신념은 고로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움직여진다.

나를 움직여 온 어떤 동력이 때르는 제동력의 원인이 되고, 나를 멈추게 했던 제동력이 다른 이유로 동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를 달리게 만들었던 동력의 힘이 거기서 다한다면, 나를 움직일 새로운 동력원을 찾아 언제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가 쌓은 신념 위의 세계가 동력을 다하고 멈춰 있는 순간, 우리는 가만히 그 동력이작동 될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새로운 동력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세계, 그 세계 밖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장한다. 알은 세계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때가 되면 빈방에는 치즈가 채워진다. 그 불확실한 확신의 아래에 거짓된 신념을 갖는다. 그것이 깨어지기 전까지 그것은 '진리'이며 곧 '세계'가 된다. 세계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비록 신념을 깨어버리면, 세상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아도, 깨어진 신념 밖으로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어떤 경우에는 삶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일을 겪어도, 삶은 무너지지 않고 천지가 개벽할 것 같은 경험을 해도 천지는 개벽하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일상과 세계가 펼쳐지며, 새로운 보통이, 기존 보통을 대체하는 '뉴노멀의 시대'가 시작할 뿐이다. 누군가는 퇴사한 이후의 삶을 상상치 못하고, 누군가는 마스크로 사람의 코와 입을 막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으며, 누군가는 거대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공하는 세상을 상상치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현실'은 언제든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이 일어나고 나면 그것은 곧바로, '현실'의 영역에서 새로운 '현실'이 된다.

사람은 진리에 따라 행동의 영향을 받는다. 진리란 변하지 않는 진실이며, 그것은객관적인 무언가처럼 보이지만, 변화무쌍함이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맞는 진리를 갖는다. 태양이 돌고 지구가 돌고 은하계가 돌고 있는 와중에 혼자서 멈춰 있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전속력으로 세상의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던 얇은 막 안으로 세상을 그린다. 보호 받고 존재의 이유를 가늠한다. 반대로 '알'에 의해 고립되고, 가로 막힌다. 우리를 보호하는 어떤 것은 때로는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이 외부에서 깨어지면 세상이 무너지지만, 내부에서 깨어버리면 성장으로 거듭난다. 사실이라고 믿던 신념은 조현병 환자가 환영과 환청을 닮았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완벽한 논리가 무너지지 않으면 병은 치료되지 않는다. 충분하게 관리할 수 있는 조현 증세가 만성적이고 불치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이유는 환자 스스로 그것을 '병'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 갇혀 환상과 착각으로 세상을 창조하는데, 그 벽이 워낙 공고해서 남편과 부모, 자식, 심지어 의사의 말도 모두 거짓으로 받아들인다. 세계가 공고해 질수록 병은 깊어지며 병이 깊어지면 새로운 세계는 멀어진다.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 중 하나를 집어 삼키는 일은 두려움과 호기심의 영역을 넘어 완전히 또다른 진실을 아는 일이다. 어떤 쪽을 집어 삼키듯 그 둘은 모두 진실로 남는다. 우리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빨간 약을 삼킨 이도, 파란 약을 삼킨 이도 모두 자신의 진리 속 세상을 경험한다.

어둡고 텅빈 방안에 우리를 가두고 있던 신념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의 모험을 하락하게 하기 위해선 고로 자신의 자아와 세계를 완전히 무너트려야 하며 단 하나의 신념만이 자리하고 있는 삶에서 벗어는 것이 중요하다. 믿는 것은 세계를 좁게 만든다. 고로 믿음은 때로는 약이며 때로는 독이다. 어떤 면에서 '의심'은 독이고 다시 어떤 면에서 '약'이 된다. 오랜 신념 아래서 끓는 물의 개구리처럼 우리를 삶아지게 만드는 것은 확고한 신념과 믿음일지 모른다. 끊임없는 의심. 자신의 세계가 진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호기심. 나를 이끌어온 동력이 제동력일 수 있다는 의구심. 이런 것들이 진정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새로운 삶은 좋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선택의 영역이며 이 후에는 받아들임의 영역이다. 고로 열어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외벽을 박차고 나아가던, 시기와 때를 기다리며 현실의 세계에 충실하던 그것은 모두 '신념'의 영역이며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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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노멀 - 폭발적 성과를 만드는 평범한 사람들
주언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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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하면 무엇이 생각날까. 모차르트는? 아인슈타인은? 에디슨은?

아마 천재 혹은 비범한 사람의 대명사로 분류될지 모른다. 그럼 이제 이들이 얼마나 많은 흔적을 남겼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아마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알게 되는 몇 가지 대표 업적만으로 그를 평가하지 얼마나 그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 알지 못한다.

피카소는 평생 2만점의 예술 작품을 창작했다. 모차르트는 짧은 생애인 35년 간 600개의 작품을 작곡했으며 아인슈타인의 과학논문은 240편이나 된다. 에디슨은 혁신의 아이콘처럼 그려지지만 1000개의 특허를 냈다. 핸리포드도 마찬가지다. 핸리포드는 생애동안 161개의 특허를 얻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총 30개 이상의 영화를 감독했다. 클로드 모네는 생애 동안 2500점의 그림을 그린다. 이들에게도 성공 확률은 100중 1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지만, 우리는 에디슨의 발명품은 10개를 댈 수 없고, 피카소의 작품 100개를 기억할 수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위대하지만 그가 연출한 작품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다. 범인인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하고 있는가.

그렇다. 시행횟수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천재로 추앙 받는 이들도 이처럼 다작한다. 많은 시도를 하고 실패를 한다. 그러나 범인이라는 우리는 천재를 추앙하면서 몇 번의 시도만으로 성공을 희망한다. 과연 얼마나 오만한가.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범인이라 말하면서, 천재라 믿고 있는 오만함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회적 성공이나 경제적 성취뿐만 아니다. 우리의 삶을 채우는 많은 현상들은 '시행횟수'에 따라 기회가 특정 확률로 주어진다. 취업 면접, 스포츠 연습, 학습과, 시험, 비즈니스와 창업, 예술 창작 등.

이것은 단순히 돈버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성공 확률'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은 '확률'로 존재한다. 그것은 양자역학도 그렇다 말한다. 다시 말해보자. 모든 것은 확률로 존재한다. 지금 당장 편의점으로 뛰어가서 로또 복권을 구매하면 그것이 당첨될 확률은 814만 분의 1이다. 길을 가는 사람을 잡고 '잠시 저의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개중 '알겠습니다'라고 답할 사람의 확률도 숫자로 존재한다. 시행을 한다면 0이라는 것은 없다. 0이라는 것은 오로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만 존재한다. 고로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최소 0.1%의 확률이라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수학에서는 '큰수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는 고등 수학의 '확률과 통계학'에 나오는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어떤 사건을 충분히 반복하면 그 결과는 그 사건이 일어날 이론적 확률에 무수하게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 확률은 50%다. 몇 번을 던졌을 때는 그 확률은 다를 수 있다. 가령 10번을 던지면 7번이 앞면, 3번이 뒷면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시행 횟수를 천 번, 만 번 던지게 되면 대략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같아진다. 즉 다시 말하면 시행횟수가 많으면 그 확률에 비례하여 반드시 원하는 값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성공확률이 1%인 경우 100번의 시행 횟수를 가지면 성공 확률은 100에 수렴한다. 0.1%의 확률인 경우, 1000번의 시행횟수를 가지면 성공 확률은 역시 100에 수렴한다. 확률을 바꿀 수 없는 게임에서 유일하게 그 게임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것은 '시행횟수'다.

세상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확률'을 바꾸는 것을 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의 시행 횟수를 늘리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운'에 의해 성패가 결정되는 일인 경우가 그렇다. 다만 세상만사는 모두 '운'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은 아니다. 세상에는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일도 무수하게 많다. 그렇다면 노력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노력'의 수치를 높이는 일은 이렇다. '시행횟수'를 높이는 일이다. 다시말해 '시행횟수'를 높이는 일은 어떤 일에서도 반드시 중요하다. 이런 미련하고 바보같은 일은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과 닮았다. 우리가 때로는 경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인공지능'은 생각보다 '미련하고 무식한 수준'의 시행횟수를 가진다.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첫째, 대응한다. 둘째, '그렇다'와 '아니다'를 구분한다. 셋째, '아니다'인 경우, 다시 대응한다. 그리고 '그렇다'와 '아니다'로 구분한다. 이것을 무한에 가깝게 시행하며 하나의 표본값을 구하는 일이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시행'하는 일이며,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다시 시행하는 것'이다. 그 뿐이다. 그것이 인공지능이 정답에 수렴하는 대답을 내어 놓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이 '신'이 숨겨 놓은 유일한 '기회'를 찾아내는 일이다.

이렇게 쉬운 일에 우리는 때로 지나친 '감정이입'을 한다. 즉 어떤 일에 대해 '실패'를 했을 때, 단순히 '다시하면 된다'라는 옵션을 우리는 선택하지 못한다. 때로 그것은 경제적인 이유일 수도 있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심리적인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편향'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건보다 부정적인 사건에 더 강하게 반응하고 오래 기억하는 성향을 가진다. 대부분의 주식투자자가 겪는 투자 손실은 이런 심리적인 이유로 발생하기도 한다. 투자자는 요동치는 투자 차트에서 내려가는 차트에 더 큰 반응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시행횟수. 그리고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패에 담담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원대한 꿈'을 매일 같이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뉴질랜드 등반가인 에드먼드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최초로 오른 사람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토록 높은 산을 오를 수 있었습니까?'

이에 그는 답한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올랐다."

유격 훈련이 끝난 뒤, 돌아가는 유격 행군에서 나는 그 거리가 그렇게 멀었다만 아마 중간 정도쯤 좌절 했을지 모른다. 다만 내가 그 고된 훈련을 마치고도 행군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이 다음 고개까지만 가자'와 '아무런 감정없는 앞 녀석의 군화발' 때문이다. 그냥 한걸음을 걷고, 그냥 다음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고로 열심히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냥하는 것이다. 그냥하는 것은 어찌됐건, 하게 한다. 하나의 시행횟수를 더 높이며, 실패시에 심리적 데미지를 입지 않는다. 데미지 입지 않은 심리는 다음 시행을 하도록 독려한다. 그렇게 다음 시행이 이뤄지고 다시 실패하고 다시 실행하는 과정에서, 내가 성공에 닿을 가능성은 100에 수렴한다. 모든 비범은 수많은 평범 위에 쌓여진 결과다. 다시 말하면 모든 평범은 비범의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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