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인간 김동식 소설집 1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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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이면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아이를 보면 한편으로 뿌듯하면서 해방감을 느낀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보내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보았다. 집에서 아이와 함께 책에 관한 좋은 인식을 심어주기에 6, 7세라는 나이는 매우 소중하다.

항상 무언가를 할 때마다 책을 손에 쥐고 있는 편이라, 아이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 모습을 각인 시켜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좋은 점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첫째로, 긴 글을 읽지 못하게 됐다. 가끔은 벽돌책을 잡고 한참을 몰입해 읽는 것이 삶의 낙이었다. 다만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장 먼저 그 부분을 내려 놓아야 했다. 특별히 아이가 독서에 방해가 되는 행위를 하기 때문은 아니다.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이유로 '몰입'이라는 과정이 사라졌다. 아이는 종종 무언가를 물어봤고 어떤 사고를 쳤으며, 아빠가 혼자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에 시기하기도 했다. 시간이 남으면 특히 책을 들고 있으며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같은 부분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으며, 읽고 난 뒤에는 '무엇을 읽었나' 남기지 못했다. 짧게 끊어진 주의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 짧은 영상'에 적합했다. 1분마다 쪼개지는 주의력을 싸매 쥐는 일에 피로를 느꼈다. 고로 남는 시간에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엄지손가락만 까딱거리고 싶었다. 아무 의미 없는 영상을 보고 또보고, 넘기고 또 넘겼다. 이후 다시 책을 들어도 1분 뒤에는 스마트폰으로 손이 갔다. 집에서 육아를 하는 '가정주부들이 건망증'이 빈번하다 하듯, 짧아진 주의력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깡총깡총 이곳저곳에 맴돌았다. 당연히 주의 깊게 몰입하는 것이 없으니 건망증이 높아졌다. 신경은 예민해졌다. 아이에게 '책 읽는 추억'을 남겨 주겠다는 최초의 다짐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되려 아이에게 '버럭'하고 호통치거나 짜증을 내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후 타협해야 할 부분을 찾았다. 탈출구는 '짧은 글'이다. 아이의 질문과 질문사이에 짧게 몰입할 수 있는 소설이다. '김동식 작가'의 단편소설은 아주 짧다. 초단편소설이다. 이렇게 짧은 글을 엽편소설이라고 한단다. 글은 시작과 동시에 몰입 시키고 한호흡에 소설 하나를 마무리 시킨다. 소재는 매우 신선하여 글 읽는 맛이 있다. '김동식 작가'의 글쓰기 방식을 모방하여 짧은 소설은 연재 했었다. 그것이 멈춰진 이유는 '글쓰기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23년은 정말, 바쁜 한해였다. 개인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고 여유가 생겨도 그저 허송세월처럼 흘려보낼 뿐이었다. 이런 핑계로 2023년에 목표했던 '소설출간'은 이루지 못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꽤 매력적인 일이다. 나의 머릿속을 남의 머릿속에 넣는 일이다. 글쓴이가 '태양'을 생각하면, 읽은 이는 '태양'을 떠올린다. 글쓴이가 '바다'를 쓰면, 읽는 이는 '바다'를 읽는다. 최첨단 과학기술이 하지 못할, '생각 이식'을 '독서'는 가능하게 만든다. 꼭 값비싼 기술력이 들어가야만 좋은 기술은 아니다. 앞으로도 '독서'가 가진 '생각 이식 기술'은 그 어떤 과학기술로도 구현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소설은 그렇다. 소설은 허구다. 읽는 이들은 글쓴이의 망상을 읽는다. 그것을 문자화 하지 않으면 망상은 망상일 뿐이지만, 그것을 문자화하면 그것은 '소설'이 된다. 자신의 망상을 얼마나 잘 문자로 구현할 수 있는지, 그 기술에 대해 사람들은 평가한다. 마치 음악을 만들거나 명화를 그리듯, 글쓰기는 전에 없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창조행위'다.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소설'은 '세계'를 창조한다. 저자본으로 지구를 종말로 몰아갈 수 도 있고 배우의 연기력 논란 없이,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결국 그런 능력을 얻기 위한 시도는 할만하다. 그것은 별다른 준비물도 필요없고 대단한 배경도 필요없다. 그저 쓰기만 하면 그만이다. 2024년에는 소설 출간이라는 목표를 다시 가질 예정이다. 벌써 써두고 투고하지 못한 소설과 글이 많다. 2024년에는 하나씩 정리해 출간해 볼까 한다.

몇 일 전, 아이와 책 한무더기를 구매했다. 대체로 짧은 소설, 시, 에세이였다. 아마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 3월 전까지, 천천히 읽을 예정이다. 창작물을 접하다보면, 그 소재에 이어 나만의 결과를 만들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럴때마다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다면 아마 꽤 괜찮은 글들이 됐을 것이다. 김동식 작가의 글은 쉽고 가볍게 읽히지만 몰입력이 좋다. 아마 작가의 다른 책도 구매해 읽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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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교사 위광조
꿈몽글 지음 / 파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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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과 학폭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시기, 나는 학교를 다녔다. 철 없는 시골 아이들의 장난이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도를 넘고도 남는 행위들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학교 복도에 설치된 정수기에 금붕어를 집어 넣었다. 한참을 뒤에서 몰래 지켜보다가 누군가 물을 마시다 '금붕어'를 발견하면 키득거리며 웃곤 했다. 더 심한 경우는 '소변'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담대한 장난을 칠수록 '대단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아이들의 장난은 도를 한참 넘어섰다.

남자화장실은 소변기와 양변기가 구분되어 있다. 양변기 칸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변을 본다는 의미다. 장난기 있는 아이들은 대변기에 들어가면 문을 열거나 위, 아래로 물을 붓기도 했다. 이런 장난이 만연한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냈던터라 어지간한 장난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았고 교사 화장실을 이용하곤 했는데, 그 마저 선생님께 걸리면 뺨아리를 맡곤 했다. 소변 보는 아이에게 물을 뿌리거나 옷자락을 잡아 끄는 것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도 넘은 장난은 당시에도 심하게 느껴졌다. 썩은 우유를 가방에 놓고 발로 밟아 터트리기거나 의자에 압정을 꽂아 놓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장난을 주도하는 쪽은 언제나 일부다. 그 장난의 수위가 도를 넘어섰지만 그것이 '학교폭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확실하건데 상황에 놓여 있는 이들이 '학교폭력'을 '학교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폭력'이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반대로 '신고 사례'가 지나치게 많다. 다른 이유로 학생들은 장난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기도 한다. '사건보고서'나 '진술서' 따위의 글을 읽다보면 놀라운 경험을 한다. 실제 그럴 법한 일들이 서면으로 분위기나 어휘만 바꾸더라도 완전히 터무니 없는 사건으로 바뀌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이들도 생긴다. 바로 실제 심각한 수준의 '학교폭력'을 당하는 피해자다. 너무 많은 사건으로 사건에 대한 심각성이 훼손되면 실제 사건의 주인공들은 묻히게 된다. 고로 신고를 하지 않던 과거도 옳지 않지만 너무 흔히 신고하는 현재도 옳지 않다.

학교는 '배움'보다는 '생존'에 적합한 곳이었다. 선생님들은 '보호'보다 관리'를 목적으로 두었다. 부모는 '우리 아이 때려주세요'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선생님은 각자 자신만의 지휘봉을 가지고 다녔는데, 대체로 몽둥이로 활용됐다. 쇠파이프, 당구규대, 각목 등 남자 선생님들은 꼭 자신만의 아이템처럼 몽둥이를 가지고 다니셨다. 둔탁함, 뼈까지 진동하는 묵직함. 각 선생님들마다 타격감도 달라서 매가 어떤 느낌인지는 지금도 선하다. 매주 월요일마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에 아이들은 뙤약볕에 서 있다가 '픽, 픽' 쓰러졌다. 짝다리를 짚고 서있거나, 조금만 꼼지락거리면 '구령대'로 불려갔다. 구령대로 불려가는 아이를 뒤로하고 피식거리고 웃으면, 얼마 뒤, '짝'하고 뺨아리는 소리가 학교 운동장에 퍼졌다 얼굴이 벌겋게 닳아 옳은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리에 돌아와도 누구도 그것이 폭력인지 몰랐다. 학우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사제지간에서도 너무 빈번하던 학교폭력이었다.

최근 한 인터넷 영상을 봤다. 어린 여고생이 선생님과 말다툼하는 모습이었다. 아버지 뻘 되는 선생님과 딸 뻘 되는 제자가 한참을 싸우는데, 주변에서 학생들은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지 꽤 시간이 지나서 현재 교권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다만 내가 본 영상에서 선생님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기껏해봐야 벌점을 주거나 '위원회'에 보고서를 작성해여 올리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변해버린 탓에 과거와 현재 중 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리는 정도다.

개인적으로 현재 교사의 '교권'은 지나치게 낮다고 여겨진다. '폭력'으로 교권을 올리는 것도 옳지 않지만 아무 힘 없는 무능한 교사의 모습도 옳지 못하다. 사람을 관리하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어렵다. 특히 중고등학생들은 더더욱 어렵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보면 기가 찬 경우를 자주 접한다.

'모든 일에 부정하는 사람', '모든 일에 의욕이 없는 사람', '무책임한 사람', '무례하 사람', "무관심한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이런 이들 수십명을 모아 놓고 관리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신고자가 원하면 무조건 심의위원회를 간다.'

학교 폭력은 분명 옳지 못하다. 다만 '학교 폭력'이라는 경계선이 너무 낮아지면서, '교사'의 업무는 더욱 늘어난다. '신고자가 원하면 일단 심의 위원회를 간다.' 쉽게 말해 '입건'되고나면 '교사'는 교육 외에 신경 쓸 일이 더 많이 생긴다. 가르치고 상담하고 전화해야 하는 등.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 폭력'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는 일이다. 어디부터가 폭력이고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그 선을 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대체로 아이들의 장난이 '폭력'이라고 여기지 못했다. 반대로 누군가는 별거 아닌 장난을 '폭력'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 두 경우는 '진짜 폭력'의 무게감을 가볍게 만든다. 고로 무조건 신고하라, 혹은 신고하지마라,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어떤 수준까지가 폭력이고 어떤 수준까지가 폭력이 아닌지, 모두가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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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꾸물거릴까? - 미루는 습관을 타파하는 성향별 맞춤 심리학
이동귀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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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물거림' 또는 머뭇거림은 일종의 교착상태다. 이런 상태에 빠져 있는 이들은 대체로 '의지박약'이나 '게으름'으로 비춰지지만 실제 반대인 경우가 많다. 마감일에 맞춰 일을 겨우 끝내는 이들은 대체로 '낙관주의자', '완벽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대체로 자신의 능력을 과만하거나 미래를 낙관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에 충족하기 위해, 최대한 결과를 '지연'하는 경우다. 즉, 꾸물거리는 사람들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고 해결법을 알아보자.

값비싼 물건을 선물 받거나 구매하게 되면 나는 그것에 철저한 주종관계를 주입시킨다. 누가 주인인지 물건에게 확실하게 해준다. 즉, 그것을 함부로 대한다.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책임없이' 대하는 것과 다르다. '함부로'라는 부사는 사전적 의미로 '곰곰히 생각지 아니하고 조심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를 의미한다. 나는 새로 산 스마트폰에 지문자국이 남을까봐, 노심초사하지 않는다. 혹 나의 흔적이 남겨질까봐 조심스레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차를 구매해도 '새차'의 감성을 유지하기 위해, '포장지'를 뜯지 않는 행위도 하지 않는다. 한 번 나에게 들어온 물건은 웬만해서 '중고판매'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용불가 상태가 될 때까지 나와 함께 한다. 고로 되팔 때, 좋은 가격을 받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물건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구매한 물건을 중고로 판매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다음 주인의 물건을 '임대 사용'하는 것과 같다. 단연컨데, 임대자와 임차자는 물건 사용 효율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책을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의 차이와 같다. 책을 빌려주는 사람은 자신의 책의 모서리를 접거나 낙서를 하는 등 마음껏 할 수 있지만, 책을 빌린 사람은 그저 눈으로 그것을 볼 수 밖에 없다. 즉, 소유와 경험의 차이에서 그 깊이의 차이가 생긴다.

이렇게 물건을 막 대하기 시작하면, 물건이 편해진다. 물건이 편해지면 대상의 효율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완벽주의는 '노트 한권'을 다 쓸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문방구에서 노트를 구매하면 그것의 첫 장을 깨끗하게 사용했다. 필기를 깨끗하게 하거나 글씨를 최대한 예쁘게 썼다. 그러다보니, 그 완벽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 노트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내가 어린 시절 겪은 '완벽주의'가 '무능력'이 되는 완벽한 사례다.

비슷한 경우는 역시 있다. 중학교 시절 미술 시간이었다. 별 생각 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미술 선생님은 내 앞에 서서 한참을 지켜봤다.

"그림에 감각이 있네, 이렇게 그리면 그림 쪽으로 나가도 괜찮겠어. 지금까지 그린 것을 보건데, 다 보지 않아도 만점을 주고 싶을 정도야. 완벽해."

아이들 앞에서 엄청난 칭찬을 들은 나의 그림을 몇 점을 받았을까. 그때 내가 받은 점수는 C였다. 이유는 이랬다. 선생님의 흡족한 표정을 보고 난 뒤, 나는 더이상 그림을 건들이지 못했다. 친구들은 한마디씩 거들었다.

"내일이 제출인데, 칭찬 받은 상태에서 하나도 안 그렸네?"

그렇다. 나는 이미 완벽하다고 칭찬 받은 결과물을 건들이고 싶지 않았다. 결과물은 친구들이 이미 완성될 때 쯤, 부랴부랴 시작했고 데드라인을 겨우 맞추고 형편없는 미완성 작품을 제출하고 말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내 기억으로 '칭찬'은 되려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롭 무어'의 책 'Start now, get perfect later'는 원서로 읽었다. 이후에 '결단'이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원제목이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일단 시작하고, 나중에 완벽해져라'

이 책의 도입부에는 '꾸물거림'이 '완벽주의자'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들에 대한 예시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모든 신호가 파란불이 됐을 때, 출발하겠다는 다짐"

대체로 '꾸물거림'은 '게으름'이라는 성격의 결과물처럼 보여진다. 이는 인과관계가 잘못된 경우가 많다. 대체로 자존감이 결여되고 마음이 우울해지는 '우울증 환자'의 경우, 의지력이 약해지고 행동력이 둔해진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의지력'이 약하고 행동력이 둔하기에 우울증이 걸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이들에게 생기는 '의지박약'과 '게으름'은 우울증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이들에게 부지런하라고 조언하는 것은 '열이 나지 않아야,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조언과 같다. 이들이 꾸물거리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다. 고로 게으름을 고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심리'와 '마음가짐'을 편하게 두는 것이 먼저다. 현대인은 스스로는 모르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항상 놓여 있고, 끊임없는 마케팅에 노출되어 있다. 세상은 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도파민 중독'을 유도한다. 모두가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며 쇼츠, 릴스, 틱통을 넘기며 시간을 보낸다. 이것은 모두 결정 피로도를 소모해버린 현대인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지런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하고 안정된 심리 상태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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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철학 수업 마흔에 읽는 서양 고전
강용수 지음 / 유노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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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단순히 철학자로 알고 있지만,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의 개인 의사였다. 그는 아카데미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부유한 삶을 살았다. 철학자는 배고프고 속세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을 거라는 편견은 동양의 '유교'와 '도교'의 영향이 크다. 유교와 도교에서는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 완성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이런 동양의 오랜 생각은 물질적 부가 욕망을 증가 시켜서 고통과 불만족으로 이어진다고 여겼다. 고로 간소하고 검소한 생활을 '도덕'과 결부하는 가치관이 생겼다. 그러나 과연 서구에서도 그럴까.

그렇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이자 철학자인 '미켈란젤로'는 꽤 큰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그는 교황과 다른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풍요로운 생활을 했으며 다양한 작품 의뢰를 받아 수익을 올렸다. 그는 자신의 수입에 대해 현명하게 관리하여 부를 더 크게 증식 시켰는데 우리가 '물질적 풍요'를 '탐욕과 집착'과 연결하는 것과는 충분히 다른 시각이다. 되려 이런 풍요는 철학적 사고와 내면의 평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프랜시스 베이컨 은 영국의 철학가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통치 기간에 고위 정치직인 재무장관을 역임한다. 그 역시 정치적 성공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고 상당한 재산과 영향력을 가졌다. 그는 변호사 활동을 하며 법률 사건을 처리하고 명성과 부를 얻었기도 했다. 그의 생의 후반에는 부패 혐의로 공직에서 축출되기도 했으나 그의 삶 전반에는 풍요로움이 가득했다. 그는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 풍요로움을 이용하여 경험주의와 과학적 방법론의 초기 개척자로 현대 과학 방법론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뉴턴 또한 말년에 투자로 인해 전재산을 탕진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생은 영국 조폐국 국장으로 공직생활을 했다. 영국 조폐국 국장이라는 직책은 꽤 수익성이 좋은 공직이었다. 이 역할을 통해 뉴턴은 상당한 수익을 얻었다. 또한 그는 초기 남해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여 거품이 일어나기 전, 단기간에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그는 시장 변동성과 투기적 거품의 위험성을 간과하여 큰 손실을 얻긴 했지만, 그가 삶의 대부분을 부의 증식에 기울였던 것은 사실이다.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 또한 다르지 않다. 그는 젊은 시절, 상업 활동을 했다. 그는 인식론, 윤리학, 종교비판 등 다양한 주제에 저술을 했다. 다만 그는 재정적 안정을 위해 영국 외교관으로써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 머물렀다. 그는 이런 활동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수익을 얻었으며 생애 후반에는 재정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가인 볼테르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작가로써 성공을 이룬다. 그의 부는 대부분 저술활동과 투자, 사업적 기지로 인해 증식된다. 그 밖에 국채와 복권에 투자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이후에는 부동산에도 추자하여 상당한 수익을 얻었다. 그가 소유한 여러 부동산에서 나오는 임대 수입은 그의 주수입원이었으며,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으로 그의 경제적 자유는 그가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자유롭게 말할 수 잇는 독립성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의 재정적 성공 사례도 유명하다. 그는 천문학적 계산을 통해 올리브 수확이 있을 것임을 예측했다. 이를 바탕으로 올리브 압착기를 저렴한 가격에 임대하여 고수익을 얻는다. 그는 철학가가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부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자주 거론된다. 쇼펜 하우어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부모는 부유한 상인 계급에 속했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였고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속 받은 재산의 상당수를 투자하는데 사용했다. 이 투자는 꽤 성공적이어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했고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났다. 이런 경제적 자유는 그들에게 철학 연구와 저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그들의 경제적 상황이 그의 철학적 사유와 별개되어 있다해도, 경제적 압력이 꾸준한 상황에서 철학적 사유가 지켜지기는 힘들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쇼펜하우어까지 꽤 많은 철학자들은 '적잖은 부'를 이루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철학가다. 경제적 자유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쇼펜하우어의 생을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19세기 독일 철학자다. 1788년에 태어나 1860년에 사망했으니 우리로 치자면 정약용 선생이나, 추사 김정희 선생과 비슷한 시대를 살던 사람이다. 쇼펜하우어는 세상 사람들이 자주 불행해지고 슬퍼한다고 봤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이런 불행과 슬픔은 '의지'라는 힘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좌절과 실망이 괴로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제안한 것은 꽤 감성적이다. 감정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의지'의 끊임없는 욕구와 불만족 때문이다. 고로 이러한 욕구와 욕망을 억제하고 줄이는 것으로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이다고 여겼다.

첫째로 그가 제안한 것은 예술이나 자연과 같은 아름다운 것으로의 위안이다. 그는 예술이 인간 고통을 일시적으로 끊어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특히나 그는 음악을 그렇다고 여겼는데, 음악은 순수한 감상에 몰두할 후 있도록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기통제와 절제다. 쇼펜하우어는 욕구와 욕망을 억제하고 자기 통제를 강화하는 훈련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물질적인 것과 외부 세계에 대한 욕망을 줄이는 것으로 고통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

셋째는 명상과 내적 성찰이다. 그는 동양철학, 특히 불교와 힌두교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명상과 같은 훈련이 욕망을 초월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넷째는 철학적 성찰이다. 그는 사유를 통해 인생과 세계를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봤다. 고로 다양한 책을 읽고 깊게 사유하는 것으로 의지가 만들어내는 고통을 끊어낼 수 있다고 여겼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쇼펜하우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욕구와 충동을 말한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의지는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본적인 힘이며, 우주와 생명의 원동력이다. 쉽게 말해 '눈이라는 감각 기관'은 단순히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보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의지'의 표현이며,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신체적, 자연적 현상은 이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 '의지'라는 개념은 19세기에 이르러,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과 닿는다. 그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프로이트'나 '칼 융'에게도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유의 결과물은 '생계'에 대한 꾸준한 압박이 오는 과정에서는 얻어내기 쉽지 않다. 시간적, 정신적, 물질적 풍요는 깊은 사색의 필수 요소다. 우리가 '풍요'에 대해 어째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됐는지를 보면 우리의 마음이 왜 여유가 사라졌는지 또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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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단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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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業報), 불교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인간의 말과 행동, 생각은 '업'으로 쌓여, 그에 상응한 '결과'를 보로 받는다.

붓다는 말했다.

"우리는 생각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지난 생각들의 산물이며, 맑은 생각을 할 때, 기쁨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오늘을 구성하는 것은 모두 '과거'로 부터의 산물이다. 모든 것은 시간을 타고 흐르는 인과관계의 큰 흐름 속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고로 어느 것 하나 독단적으로 존재 할 수 없고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 사건과 사건이 맞물려 끊임없이 이어지며 유동적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업과 보도 붙있다. 그것은 떼어 낼 수 없다. N극에 붙어 있는 S극 같은 것이며, '시작'에 붙어 있는 '끝' 같은 것이다. 겉에 붙어 있는 속과 같은 것이고 표면에 붙는 내면 같은 것이다. 생각에 붙어 있는 신체 같은 것이며 삶에 붙어 있는 죽음 같은 것이고 봄에 붙어 있는 겨울 같은 것이다. 아침에 붙은 저녁 같은 것이고 하늘에 붙은 땅 같은 것이다. 결국 극단과 극단이 붙어 완전히 대립되어 있지만 맞닿아 있고, 떨어져 보이지만 붙어 있다. 다른 것 처럼 보이지만 하나이며 하나지만 다른 것 처럼 보인다. 고로 업을 지으면 보를 받고, 보를 받았다면 업을 지은 것이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이는 일일 뿐이며, 별개의 두 사건이 독자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는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고 결과에는 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업을 쌓지 않고 보를 받을 수 없고, 보를 받고 업이 없을 수는 없다.

붓다는 종교를 만든 적이 없다.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존의 종교 위에 철학 체계를 정리하여 가르침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는 인간 고통의 원인을 탐구하고 극복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해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가 말한 '사성제'를 살피면 우리 모두는 커다란 인과관계 속에서 인을 짓고 과를 기다리는 마음의 원리를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원리는 어떻게 하면 고통이 사라지는지도 알게 한다.

붓다는 '고집멸도'를 통해 사성제를 말했다.

고성제는 생로병사 즉, 원하지 않았던 것을 얻게 됐을 때의 '고통'이다.

집성제는 물질적, 감각적, 심리적 욕망에서 얻게 되는 집착에 대한 '고통'이다.

멸성제란, 이러한 고통들은 '욕망'을 제거하면 고통도 함께 사라짐이다.

도성제는 욕망을 제거하고 고통을 멸하는 수행이다.

욕망을 제거하고 고통을 없애는 수행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어진 세상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둘째,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기

셋째, 진실하고 정직하기

넷째, 해를 끼치거나 폭력적이지 않으며 정직하기

다섯째, 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여섯째, 긍정적인 정신 상태와 삶을 유지하기

일곱째, 오롯하게 마음을 집중하여, 현재와 여기를 살기

여덟째, 깊은 명상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고 이해와 평화 얻기.

붓다의 이러한 가르침은 그 목적을 '종교창설'에 두지 않았다. 목적은 사람들을 각자의 고통에서 구제하는 것이며, 다시말해 '우주적 관점'에서 삶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거기에는 거대한 '제3의 힘' 혹은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인과관계'에 따라 상응하는 이유가 존재할 뿐임을 말한다.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는 발생하지 않으며, 원인을 짓고 결과를 바꿔 달라 때쓰는 것과 다르다.

우주나 신이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를 돕도록 하고 그것에 대한 가르침을 이야기한다. '과'가 원인이 되면, '보'는 '반응'한다. 왼쪽으로 던지면 왼쪽으로 날아가간다. 오른쪽으로 던지면 오른쪽으로 날아간다. 왼쪽으로 던졌음에도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괴상망측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인과응보'란 '권선징악'과는 다르며. 선은 권장하고 악을 징벌하는 주체가 '신'이나 '인간'이 아니라 '자연법칙'이라 설명한다. 즉, 권성징악에는 '상관관계'가 있어도, '인과관계'는 없고 '인과응보'에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가 모두 성립한다.

잘못을 저지른다면,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힘으로던 축적되어 있다가 반드시 상응하는 '에너지'로 분출된다. 그것은 철저하게 '에너지보전의 법칙'을 따르고 있을 것이고 없던 것이 생겨나거나, 생겨난 것이 없어지는 것은 없다. 고로 모든 것은 의식이나 행동의 산물로 과거의 업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고로 이에 상응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더 긍정적인 깨달음을 얻어냄으로써 과거의 업장을 소멸해 내는 것이다. 고로 업장소멸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축적된 부정적 에너지가 소멸하여 발산할 힘을 상실하기에, 정신적 혹은 영적 안정이 높아져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이 올라간다. 누군가에게 죄를 짓고 살지 말라는 의미는 단순히 '권선징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딘가에 쌓아둔 부정적인 에너지를 소멸하라는 의미다.

본 도서는 증오하는 대상에게 3천만원 어치의 불행을 가져다 주는 버튼을 갖고 다니는 '신'에 대한 이야기다. 종교적 불교의 이야기를 따왔으나, 불교철학을 심오하게 따지고보면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 도서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라이트소설이지만 그 속에 불교적 가르침의 일부가 녹아 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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