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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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생각보다 정교하고 섬세히 연결되어 있다. 물질과 원자 단위 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과 생각이 사정없이 연결되어 있다. 선택은 단일 선택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물결처럼 퍼져나가고 그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선택이라는 '원인'은 형태만 변하고 그 본질은 영원히 남아 우리와 우주를 잇는다. 즉, '선택'이라는 입력값에, '결과'라는 '출력값'이 나오는 것이 함수를 닮았다. 예전 '피타고라스'는 수를 우주의 근본 원리로 여겼다. 피타코라스 학파는 수학적 관계가 우주의 질서를 설명한다고 믿었으며, 수를 종교처럼 여겼다.

우리가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역시 수학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규칙과 대응'이라는 이름의 '함수'와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데이터를 무수하게 대입하여 규칙과 대응의 값으로 출력하는 '알고리즘'이 '신'처럼 추앙받는 세상에 과연 '연결'이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치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된다. 원인은 결과에 연결되고, 삶은 죽음에 연결되고, 빛은 어둠에 연결된다. 이러한 상호 연결성 속에서 각각의 요소는 상계처리 되어, 결국 모든 값은 더하면 0이 된다. 이는 각 요소가 서로를 보완하고 상쇄함으로써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는 상태가 된다는 의미다. 회계학에서 '차변'과 '대변'을 정리하여 완전히 균형이 맞는 상태로 유지해야 그 자산의 '본질'을 이해 할 수 있듯, 음수 1은 양수 1을 만나 0이 되고, 출구는 입구를 만나 0이 되고, 시작은 끝을 만나 0이 되며, 만남은 이별을 만나 0이 된다. 자칫 '극'처럼 가장 멀어보이는 것들은 결국 하나의 덩어리로 연결된 아이러니를 갖는다.

까르마라는 말이 있다. 이는 무언가를 심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는다는 단순한 진리다. 이 진리는 우리가 세상에 남기는 모든 흔적이 에너지를 닮아서 결국 소멸하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선택과 생각, 행동에 대한 응답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입자가 상호작용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작은 행동 하나가 우주의 다른 끝에 있는 무언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모든 것이 얽혀 있는 듯하다. 이 얽힘은 우주의 본질을 보여준다. 얽힘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며 이 얽힘이 '연결'이 아니라 '동일성'에 가깝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혼자서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이 우주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 처럼 살아서는 안되는 이유다. 모든 것은 기록된다.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은 파동이 되어 퍼져나가고, 그 파동은 다시 돌아온다. 언젠가 우리가 보게 될 결과는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원인'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삶은 주고받음의 연속이다. 우리가 던진 돌은 반드시 물결을 만들고, 그 물결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때로 그 물결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물결은 사라지지 않으며 크기를 줄이지도 않고, 오로지 모양만 바꾸어 다가온다는 것이다. 모든 행동은 결국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다. 봄은 여름을 떠나 가을을 거치고 겨울에 도달하지만 다시 봄이 되듯, 수레바퀴가 땅을 딛고 굴러 하늘을 향하다가 다시 땅을 딛게 되듯.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주고 받으며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흔적을 남기느냐 하는 것이다. 수레바퀴는 굴러 제자리를 향하는 듯 하지만 결국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지나간 흔적은 바닥에 고스란히 남는다. 이는 피해 갈 수 없는 대우주의 진리다.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 속에서 살아간다.

내가 하는 생각, 행동, 선택, 말 모든 것은 스스로만 속이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곳에 연결되어 기록되고 있으며 그것은 '비트코인'의 블록체인처럼 온 우주가 알게 하며 다시 나에게 돌아와 나를 알게 한다.

혼자 있어도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혼잣말도 혼자하는 것이 아니며, 혼자하는 생각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모든 것을 관찰하듯, 모든 것은 나를 관찰하고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관찰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되도록 한다.

그것이 양자역학이다. 세상이 나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 없이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세상은 나의 창조자이고, 나는 세상의 창조자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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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의 세계 - 우리는 왜 소비하고, 잊고, 또 소비할까
누누 칼러 지음, 마정현 옮김 / 현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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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으면 줄일 수 있는 탄소 배출량은 43톤에 이른다. 이는 상당한 양의 탄소 절감 효과를 가지며 개인의 식습관 변화가 환경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상당하다. 43톤이다. 자그마치 43톤.

이는 2000 그루의 나무가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의 양과 같다. 또한 이는 런던에서 뉴욕까지 스물 일곱번의 왕복 항공편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간단하다. 소고기만 먹지 않으면 된다.

죽을 때까지 비건으로 산다면 120톤의 탄소를 아낄 수 있다. 엄청나다. 앞서 말한 숫자들에 3배를 곱할 수 있다. 대략 6000그루의 나무가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의 양과 같고 런던에서 뉴욕까지 88번의 왕복 항공편을 사용하는 바와 같다.

간단하다. 비건으로 살기만 하면 된다.

간단하다. 평생 옷을 입지 않으면 12톤의 이산화탄소를 줄일 수가 있고 평생 쌀을 먹지 않으면 17톤의 이산화 탄소를 줄일 수 있다. 평생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24톤의 탄소를 줄일 수 있다.

탄소배출을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친환경 에너지를 사용하는 등의 노력을 하는 것은 분명 탄소 배출을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획기적으로 탄소배출을 줄이는 방법은 있다. 바로 '저출산'이다. 인간 하나가 태어나면 태어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대략 1천 톤의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 조금더 극단 적으로 말하면 '자살'이나 '살인'도 '지구를 위한 행동'이 될 수 있다. 가장 지구를 위해 극단적으로 필요한 것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 한 사람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 하나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가장 좋다.

개인적으로 베스트셀러 작품 중에 '지구를 위한 착각'이라는 도서가 있다. 이 책은 주제 만큼 제목이 직관적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지구를 위한 착각을 하고 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환경을 이용하기에 사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 가장 대척점에는 '인권'이 있다. 다시말해서 어떤 극단적 환경주의는 필연적으로 '모순'을 맞이한다.

흔히 'PC주의 사상'이라고 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전세계적 추세가 됐다. '극단적 환경주의자', '극단적 페미니즘', '극단적 동물주의', '극단적 반인종주의', '극단적 반자본주의'는 틀림없이 '모순을 맞이 한다. 극단적 주의자들은 오늘 사회에서 더큰 목소리를 낸다. 이들의 신념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다만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신념을 관철 시키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기존 사회규범과 대치하거나 그 규범늘 뒤엎으려는 시도는 최근에 와서 더 많아졌다. 이들은 필연적 다수와 대립하면서 일종의 쾌감을 갖는다.

어떤 이들에게는 단순히 대세를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소속감과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류의 견해를 반박하고 맞서 싸우며 성취감을 갖는다. 특히 스스로를 '각성된 사람'으로 인지하며 남들보다 '도덕적 우월감'을 갖기도 한다.

이들의 특징은 '나르시스트'인 경우가 많은데, 대중을 '무지한 대중'으로 평가 절하하며 '계몽해야할 대상'으로 여긴다.

'누누칼러'의 '물욕의 세계'라는 도서에서 '현대사회의 물질적 욕망과 소비주의가 우리 삶을 어덯게 지배하는지 말한다. 물질의 소유와 소비는 단순히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과 권력 구조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거나 콩으로 만든 소고기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물욕은 어떻게 형성되고 개인과 사회에는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소비는 때로는 '소품종 대량생산물', '다품종 소량생산물' 혹은 '친환경 생산물'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다.

우리가 소유하는 소유물들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물욕이라는 것, 자신이 무엇에 돈을 쓰고 있고,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가 실제 나를 스치고 지나다 만들어진 '자아'라는 '상'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은 생각보다 큰 책임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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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터월드 - 알고리즘이 찍어내는 똑같은 세상
카일 차이카 지음, 김익성 옮김 / 미래의창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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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아마 200개에서 3,000개의 '좋아요'가 달릴 것이다. 글이 발견된 플랫폼은 '네이버 블로그'일수도 있고 인스타그램 일수도 있다. 한창 계정을 운영하던 시기에는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노출됐었다. 지금은 '글태기', '책태기'를 비롯해 여러가지 일이 겹치며 관리 소흘로 겨우 현상 유지만 하고 있다.

2024년 8월 16일 기준으로 네이버 블로그 14,160명, 인스타그램 8,333명, 스레드 6,153명, 유튜브 1,434명, 브런치에 203명의 팔로워가 있다. 이처럼 다양한 플랫폼을 운영하면서 깨달은 몇가지가 '카일 차이카'의 '필터월드'라는 도서와 오버랩됐다.

글밑으로 어쩌면 댓글로 다음과 같은 해쉬태그가 달릴 것이다.

#필터월드 #미래의창 #카일차이카 #김익성 #Filterworld #KyleChayka #책스타그램 #책그램 #북스타그램 #북그램 #독서스타그램 #독서그램 #생각스타그램 #생각그램 #알고리즘 #인스타그램 #네이버블로그 #인플루언서 #팔로워#페이스북 #넷플릭스

글의 저자인 '카일 차이카(Kyle Chayka)와 출판사인 '미래의창'은 게시글에 태그가 되어 올라갈 것이다. 대상은 '대통령'이건, 대기업 '회장님'이건 상관없다. 글과 연관되어 있으면 태그될 것이다.

태그된 글에는 어쩌면 작가나 출판사가 '좋아요'를 누르거나 '공유하기'를 누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쪽지를 통해 '당신의 도서를 최소 다섯 이상의 플랫폼에 홍보했습니다'라는 쪽지를 보낼 것이다.

블로그, 브런치, 알라딘, 예스24, 유튜브, 인스타그램, 스레드 등의 글에 동시 업로드 된 글은 URL을 첨부하여 작가와 출판사에게 보낼 것이고 운이 좋으면 '작가'와는 개인적인 사담을 나눌 기회가 생기고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의가 오기도 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영향력 3만 미만의 '인플루언서'가 계정을 운영해오는 방식이다. 이렇게 업로드 된 글은 의도치 않게 각 플랫폼에 맞는 방식으로 올라간다. 가령 블로그에 올라가는 도서의 사진은 인스타와 마찬가지로 정방형이다. 하나의 글을 여러 플랫폼에 동시에 올리기 위해 각 플랫폼마다의 특징에 부합하는 중간지점을 찾은 것이다. 사진은 정면, 가운데, 후면으로 찍힐 것이고 이렇게 세 장이 사용되는 이유는 네이버 블로그에서 좋아하는 최소한의 사진 갯수가 세장이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의 글자수 제한은 3,000자 이상인데, 그런 이유로 해당 개시글은 아마 4,000자 정도로 쓰여질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3,000자 이후 글에 대해 "...중략..."이라는 표기가 달릴 것이고 글의 후반부를 궁금해하는 이들은 '네이버 블로그'로 넘어와 나머지 글을 볼 것이다. 그 특성에 맞게 글은 '미괄식'으로 쓰여지는 편이 좋고, 호기심을 강하게 불러 일으키는 소재를 가장 첫줄에 두고, 글에 대한 총정리를 마지막에 둠으로써 시작을 붙잡고 끝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할 것이다.

책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책을 인용하거나 느낀바를 적음으로 비슷한 키워드에서 경쟁하는 일을 없앨 것이고 '네이버 인플루언서'의 '키워드 챌린지'를 덕지덕지 붙여 마치 본인 도서를 판매하듯 상위노출을 시도할 것이다.

책을 읽으며 중간 중간 찍은 문구는 짧고 강렬한 한문장이 바로 담겨질 수 있도록 좌측 45도로 기울여 찍고 소재가 떨어지는 경우마다 노출할 것이고, '읽는책', '읽을책', '읽은책'이라는 이유로 여러차례 노출 할 것이다.

대단히 연구한 결과는 아니며 상황이 변함에따라 조금씩 바꾸어가던 관습이 하나둘 자리 잡았을 뿐이다. 진화론의 '자연선택'이 그렇지 않은가. 살아남은 개체가 진화에 성공하고 후손을 남긴다. 아마 '알고리즘'이라는 환경에 맞는 '유저'가 더 많은 '노출'에 성공하고 더 많은 팔로워와 반응을 얻어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이렇게 자연 혹은 알고리즘에 선택 받은 생존개체는 더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고 이것이 흔히 말하는 '영향력'이라는 형태로 남게 되는지 모른다.

미미한 팔로워임에도 적잖게 그 영향력이라는 경우를 느낄 때가 있다. 손편지를 받거나, 개인 메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점에 책을 고르다가 '인스타그램 팔로워 중이에요'라는 인사를 받는 경우도 적지만 있었다.

이런 긍정적인 반응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반응도 꽤 있다.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대한 지적을 받거나 논리가 어색하다, 글이 산만하다, 비약이 심하다, 근거 중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지적도 받는다.

부정적인 피드백의 경우에는 항상 함께 오는 말이 있는데, '작가라는 분이....', '인플루언서이시면...'이라는 '자격'에 대한 이야기다.

'글에 영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싶다가도 이런 반응이 있을 때면 크지 않지만 책임감을 가져야 하나, 생각하곤 한다.

2017년 11월, '몰리 러셀(Molly Russell)'이라는 런던 북서부 출신 열네 살 여자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여학생은 어린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2022년 북런던 고위검시관인 앤드루 워커에 따르면 '러셀'의 자살은 소셜 미디어에 의한 영향력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의 사망 6개월 전, 러셀은 인스타그램에서 1만 6천 개가 넘는 콘텐츠에 노출이 됐는데, 러셀의 사망을 조사한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그중 2천 개 또는 13%가 자살, 자해, 우울증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이런 이미지를 469개나 모아두기도 했는데, 그녀가 수집하면 할수록 알고리즘은 그녀에게 더 비슷한 소재의 컨텐츠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데, 1만 6천개의 컨텐츠 노출이라면 하루에 하나씩 올리는 내 컨텐츠의 노출 빈도를 봤을 때, 누군가에게도 영향력이 들어 갈수도 있을까, 하는 노파심이 생기기도 한다. 글을 올리는 입장에서 '아무도 글을 봐주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올리진 않는다. 꽤 많은이들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올리는 것이 당연지사다. 그렇다면 알고리즘이라는 환경에 적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 많은 노출을 위해 그에 맞는 변화를 만들어야 생존이 가능한 이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자연'과 '환경'을 조성하는 '플랫폼' 기업은 이 세계의 '신'과 다르지 않지 않을까 싶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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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부처의 말 - 2500년 동안 사랑받은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박재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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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그렇다고 부처가 만든 종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부처는 인간의 삶이 수레바퀴처럼 돌고돌아 '고'와 '락'이 번갈아오는 '윤회'라고 여겼다. 그는 제자들에게 '고락'의 윤회를 끊어내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깨달음을 설명하곤 했다.

싯다르타는 스스로를 우상화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신을 우상화 하지말고 스스로 정진할 것을 독려했다. 그러나 후대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며 결국 그를 숭배하게 되었다. 정보를 전달할 방법이 마땅치 않던 시기,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던 시기. 그들의 이야기는 왜곡이 불가피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 전통에서 사랑과 자비를 가르쳤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많은 제자와 추종자를 길렀다.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은 그의 가르침을 체계화했다. 특히 사도 바울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시초다.

예수와 싯다르타는 각각 기독교와 불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숭배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존경하던 많은 이들의 선한 마음의 불가피하게 왜곡을 만들거나 강요를 만들기도 했다.

불경과 성경은 '종교적 색깔'을 제하고 보면 무교인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발서다. 인류의 스승조차 바라지 않았던 무조건 숭배를 다시 생각해 볼만하다. 왜 주말마다 교회를 나가야 하는가. 왜 부처님 오신 날에는 등을 다는가.

이야기의 개요는 이렇다.

여러마리 원숭이가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위에는 바나나 하나가 달려 있다. 한 원숭이가 바나나를 잡으려 손을 뻗는다. 손을 뻗자 나머지 모든 원숭이에게 찬물이 뿌려진다. 찬물을 맞은 원숭이들은 손을 뻗은 원숭이를 폭행한다. 다시 새로운 원숭이가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 원숭이는 바나나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다. 역시나 다른 원숭이들에게 찬물이 뿌려진다. 찬물을 받은 원숭이들은 손을 뻗은 원숭이를 폭행한다. 이런 절차가 몇 번 반복한다.

반복할수록 새로운 원숭이가 우리에 투입되고 기존 원숭이가 나간다. 결국 우리 안의 모든 원숭이는 새로운 원숭이로 교체됐다. 한 원숭이가 이어코 바나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나머지 원숭이들은 손을 뻗은 원숭이를 구타한다. 찬물 사례가 없어도 그냥 폭행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원숭이가 묻는다.

"왜 때리는거야?"

그러자 한참 구타를 하던 원숭이들이 말한다.

"닥쳐.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본질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만 반복한다면 그것은 진정 숭배의 대상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아무런 비판적 사고없이 하던대로의 관성만 유지한다면 그것은 때로 목적없는 행위를 반복하는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

부처가 죽고 난 뒤, 제자들을 결속하기 위해 마하가사파는 제도를 재정비한다. 깨달음을 얻은 제자만 모아 규율을 확인하고 이를 통채로 암기하도록 시켰다. 이렇게 부처의 말은 제자들에 의해 전해지다가 이를 해석하는 방식의 차이로 분파가 나눠졌다. 부처는 자신을 스스로를 '불상'으로 만들어 숭배하지 말라고 일렀으나, 스승을 그리워하던 제자들은 그를 '불상'으로 제작하고 숭배했다.

조금씩 시간이 흐르며 변해가던 스승의 목소리는 이후 '절차'와 '법도'에 묻혀 어려워지고 중생을 위한 깨달음이라는 목적도 희미해졌다. 어려운 용어는 아는 이들끼리만 사용하는 사회적 방언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스도의 복음 또한 울타리 내에서만 사용하는 언어로 굳어지며 결국 가장 스승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르침이 전달됐다.

중부경전, 사유경에는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을 만든다. 뗏목은 유용하다. 강을 건넌 뒤에는 유용했던 뗏목을 버리지 못하고 짊어지고 간다. 결국 더이상 무거워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뗏목이 짐이 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업적이나 학력, 경력, 가르침 모든 것이 그렇다. 나를 위해 유용했던 어떤 것은 집착이 되면 짐이 된다.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 조차 뗏목과 같아서 그 자체로 쓰임을 다했다면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은 스승이 말하던 가르침이다. 이를 수행하던 제자들이 아이러니하게 스승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붙잡는다. 죽어 없어져야 할 육신은 '불상'이 되어 영생하고 영혼 또한 속세에 잡혀 있으니, 스승에 대한 옳지 못한 존경심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우리는 인류의 스승들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단순한 숭배가 아니라 실질적 배움은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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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이은경 지음 / 서교책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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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작가'의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에는 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작가가는 잠깐의 외출동안 아이에게 약을 먹으라고 주문한 것이다. 다시 돌아왔을 때, 약통의 약이 모두 비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보름치의 약을 모두 삼켜버런 아이와 엄마는 황급히 약사를 찾아 나선다. 해당 구간을 읽으며 느끼는 바가 있었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 준비한 약이 때로는 건강을 위협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좋은 약도 복용량이 정해져 있다. 적은량을 꾸준히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도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와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가 난관에 부딪쳤다. 아이가 꽤 높은 턱을 만나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바구니에는 외출시 항상 챙겨야 하는 동화책이 들어 있었고, 높은 턱을 넘으려다 몇 번을 자전거가 넘어졌다. 자전거가 넘어지며 아이의 다리에도 적잖은 상처가 났다.

가만히 서서 아이가 해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두 손은 자유로웠다.

성큼성금 다가가서 한손으로 안장을 들어 올려주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 아이는 잠시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할 수 없는게 아니라, 하기 어려운 거잖아. 어려운 건 해봐야 쉬워지는 거야."

가만히 서서 기다려줬다.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고 줍기를 반복했다. 다가가서 아이의 가방정도를 들어 주었다.

"왼손으로 손잡이랑 브레이크를 잡고, 오른손으로 안장을 잡고 들어 올려봐."

아이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자전거는 턱을 넘어섰다.

이런 식이다. 자전거 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아버지가 해주는 것은 거기까지다. 가령 자전거를 구매하거나 보조바퀴를 붙여야 하는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뭐든 직접하게 한다.

헬스 트레이너 선생님과 운동을 하다보면 극한까지 운동량을 올리고 마지막 '하나'를 들어올릴 때 손가락 하나로 도움을 준다.

가만 생각해봐도 그게 도움이다.

도와준다는 셈치고 들어올리고 있는 바벨을 모두 들어주는 것이 도움이 아니다. 뭐든 도움은 단 번의 커다란 도움이 아니다. 지켜보면서 가장 극한에 치달았을 때, 성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만 주는 것이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이후 원리를 설명했다. '스티킹포인트' 바벨을 들어 올릴 수 없는 극한의 상태부터가 성장이다. 무하메드 알리가 팔굽혀펴기를 처음부터 세지 않고 고통이 느껴지는 순간부터 세는 이유도 비슷하다.

원리를 듣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스티킹포인트를 겨우 넘어서게 되면, 다음의 스티킹포인트는 한단계 올라선다.

아이의 고통을 무조건 방관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해결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항상 아이에게 그 원리를 설명한다.

"아빠가 도와주면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기 때문이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찌보면 나는 '다정한 관찰자'는 아니다. 냉정하다. 원래 나이랑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생후 몇 개월 된 사피엔스가 겨우 내는 옹아리나 생후 38년 된 사피엔스가 겨우 가질 건물 한 동처럼 말이다. 각 수준에 맞는 난이도는 존재하고 각자마다 그것을 극복하는데 얻게 되는 스트레스의 양은 적잖다.

아이가 등급 하나를 올릴 때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는 얼마나 올릴 수 있는가. 아이가 경쟁자 하나를 이길 때마다, 자신은 비슷한 자와의 경쟁에서 우위에 위치 할 수 있는가, 살펴보면 아이가 처한 주관적 난이도에 대한 객관적 공감을 가질지 모른다.

내가 넘지 못한 벽을 아이가 넘어서길 바라지 않는다. 직접 격고 자신이 생겼을 때, 아이에게도 도전을 권장한다. 그렇지 않은가. 당장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쓰지 말라고 하면서 얼마나 많은 부모는 스마트폰에 눈을 떼지 못하는가.

결국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 부모가 성장해야 한다. 아이가 책을 보기 원한다면 부모가 먼저 책을 봐야 한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신의 한계를 설정한다. 다시말해서 아이가 어떤 벽을 넘지 못해 허우적대고 있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그 부모가 비슷한 수준의 벽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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