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배우는 시간 - 말이 넘쳐나는 세상 속, 더욱 빛을 발하는 침묵의 품격
코르넬리아 토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서교책방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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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의 최악의 적은 '선의(善意)'다. '말'은 '의도'는 좋았으나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선의(善意)는 그런 의미에서 선(善)과 가장 먼 어떤 것일지 모른다.

요즘은 컨텐츠가 넘쳐 말하고자 하는 사람도, 말도 많다. 예전 같으면 귀를 기울여야 할 정보가 흔하다 못해 독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말할 창구가 많아졌고 들을 창구도 많아졌다. 고로 쉬운 인스턴트 말들이 너무 가볍게 오고 간다.

좋은 의도로 입을 벌렸으나 그것은 누군가를 죽이기도 한다. '좋은 의도'를 가장한 '악플'이다. 이것의 가장 나쁜점은 '선의(善意)'를 가졌다는 '의도' 때문이다. 한번은 아이의 교육에 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댓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자란 아이의 미래가 걱정스럽네요. 잘못 키우시고 계신 것 같아서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서 댓글 남겨요.'

아이의 교육에 관한 글은 아이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있다는 글이었다.

해당 글에 댓글 작성자는 말했다. 요즘 시대에 '한자'는 중요하지 않고 한자를 배우는 것은 사대주의적 사고 방식을 강제 주입한다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디지털교과서'가 도입되는 시대에 '스마트 기기'를 하루라도 빨리 사용하게 하는 것이 미래 세대에 좋다는 이야기였다.

진심으로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어 장문의 글을 쓴다는 댓글 작성자의 '선의(善意)'가 느껴졌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형식적인 답변을 달았다. 몇분 뒤에 다시 댓글로 '성의 없는 답변이네요. 안 바뀌실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라고 달렸다.

본문에는 꽤 많은 응원의 글이 달렸으나 '선의'를 가졌다는 하나의 댓글은 집요하게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라는 말로 나를 설득하고자 했다.

사람의 종류는 워낙 다양하여 생각도 다양하겠지만 '누군가의 선의'가 반드시 좋은 의도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고로 내가 믿는 진리가 비록 객관적 진리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할 때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는 나의 교육철학을 비판하며 끝까지 나의 교육관이 바뀌기를 기대했다. 몇번의 대화를 하다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다면 그것은 상대의 의견일 뿐 진실은 아니다. 고로 상대의 말은 상대의 말대로 두고 스스로가 가진 생각을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모든 말에 귀를 닫는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독서의 가장 좋은 점이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독서는 입을 닫고 듣는 행위다. 책을 읽을 때 모든 사람들의 입을 닫는다.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하여 동영상을 채보기도 전에,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스크롤을 내려 '답글'부터 다는 세상이다. 수학자 파스칼 또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오로지 방 안에 조용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했다.

세상의 템포가 빨라지면서 그곳에 함께하는 나의 템포도 조급해짐을 느낀다. 최근들어 '유튜브 영상'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당연히 책을 보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 들었다. 아마 정신적 피로도가 높아져 넋놓고 볼 수 있는 매체를 찾아서 그런 듯 하다. 다만 아이러니하게 그렇게 영상을 찾아 볼수록 점점 정신이 '멍'해짐을 느낀다. 영상이 끝나면 이어지는 다른 영상, 그 영상이 추천하는 다른 영상을 쫒다보면 어느새 꽤 많은 시간이 흘러 버린다. 다시 스마트폰을 내려 놓고 책을 든다.

TV 생방송은 잠시 쉬어가는 그 1분의 짧은 시간에도 '휴식'이 아니라 '광고'를 집어 넣는다. 즉 우리 현대 사회에서 휴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코르넬리아 토프'의 '침묵을 배우는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물론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도 가능하다.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 빵에 잼을 바를 수도 있다. 다만 그때조차 입을 다물면 더 빨리 골고루 잼을 바를 수 있다.'

TV를 보면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거나 스마트폰을 볼 수도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책이 사람을 조용하게 만드는 것은 니체의 말처럼 책이 가진 꽤 괜찮은 장점인 것 같다.

'귀인이론'에 따르면 말이 적으면 더 똑똑하고 교양 있고, 유능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실제로 어떻든 말이다. 게다기 여기에 미소까지 더해지면 20%는 더 지적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최근 머릿속이 꽤 시끄럽고 어지러운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나의 입은 다물어 있었다. 워낙 내향형 인간이라 불필요한 말은 애초에 많이 하진 않지만 그래도 지나고나서 '그 말은 왜 했을까' 싶은 순간들이 있다.

최근 새로운 앨범을 발매한 '지드래곤'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말투가 바뀌었다'라는 댓글이 많다. 이에 대해 그는 '말에 무게'를 알게 되어 조심스러워졌다고 답했다. 그렇다.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에는 '말'의 '꼬리'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이들이 많다. 그러다보면 '본질'이 흔들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고요한 사회가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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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로 살 뿐 1 - 원제 스님의 정면승부 세계 일주 다만 나로 살 뿐 1
원제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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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할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원제 스님'이 하는 말이다. 말에 따르면 영원한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러한 사랑을 찾는 사람의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고 뒤바뀌기 때문이다.

스님의 '세계여행기'라는 꽤 독특한 소재의 에세이를 서점에서 골라왔다. '술술' 읽히다가 어느 순간에는 '스님'이라는 '작가'의 특성과 '세계여행'이라는 소재 때문에 적잖은 의문을 받을 듯였다.인터넷 서칭을 해보니 실제로 그랬다.

수필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모두는 다만 스스로를 살 뿐이다. 다만 직업이 주는 정형화 된 틀에 적확한 인물이 되기를 사람들은 바라는 모양이다. '선생'은 용모 단정하고 바른 삶을 살고 '스님'이라면 '속세'와 '욕'에 먼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강박은 모두 가지고 있다.

물론 그런 모습이 직업의 본질에 가깝다. 다만 과연 '직업적 본질'에 '자아'를 일치하는 삶이 스스로의 선인가는 생각해볼 만하다.

글을 쓰다보면, 우연히 알고리즘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기회를 얻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적잖히 놀란다. 생각보다 생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프로불편러'들도 많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악플'이나 '욕설'도 많다. 그들이 존재하는 바와 같은 이유로 '나' 또한 다만 '나'로 존재할 이유가 된다.

얼마전 지인과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담배피는 학생을 보았을 때, 훈계를 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로 지나가다가 중학생 무리가 담배피는 모습을 보고 훈계한 적은 있다. '훈계'라기보다 '끊으라고는 안 할테니까, 어른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피우라'고 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담배끊어'라고 한다고 그들이 끊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학생의 흡연은 '불법'도 아니다. 그들을 보며 '어짜피 본인 인생'이라고 답한 적 있다. 어른으로써의 무책임일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모든 일에 훈계할 수는 없다.

공부는 왜 안하니, 집에는 언제 들어가니, 집에 들어가면 손은 씻었니, 등

학창시절 친구들과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어른에게 훈계를 받은 적 있다. 늦은 시간도 아니고 친구들과 축구 게임 2시간 했을 뿐이다. 그 훈계를 받았다고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의 인생에 관여하려면 겉으로 드러나는 이상의 책임을 지어야 한다. 대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만큼 묵직한 책임을 갖지 않으면 스스로 질 수 있는 책임 정도까지만 관여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쨌건 삶의 종류는 워낙 다양하다. 고로 '저런 삶'도 '삶이다'하고 관용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통계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하루 한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고로 매일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고 누군가는 살해 가족이나 지인이 된다. 다시 누군가는 당사자가 된다

극단적인 '살인'을 예로 든 것은 그런 극단적인 일조차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라는 일이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여기는 일과 '보통', '평범'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며 움직일 수 있는지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개성있는 스님을 알았다. 세상을 보며 자기 공부를 하고, 세상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자아에 내가 담겨 함께 세계를 여행한 느낌이다.

책에는 '차경'이라는 '모자'가 등장한다. 원제 스님은 여행 중 구매한 모자에 '차경'이라는 한자로 된 이름을 지어준다. 모자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소지품에 모두 이름을 짓는다. 이름이 지어지고 거기에 인격을 부여하면 비로서 관계가 형성된다. 단지 '도구'에서 '관계'가 형성되니 꽤 인간과 닮은 추억거리도 만들어진다. 이를 보며 스스로도 주변 소지품을 '도구' 이상으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본적으로 여행 서적을 좋아하지만 이번 여행책은 꽤 매력적인 소재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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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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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외부의 것들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다. 동시에 스토아 학파 철학자다. 그가 통치하던 로마는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 말년에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으로 제국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어려움 속에서 그는 황제의 의무를 다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쓴 '명상록'에는 '외부의 평가나 물질적 풍요로움'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를 보는 일을 강조한다. 실제로 명상록 자체가 누군가를 위해 썼다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쓴 글의 모음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삶에 대한 접근 방법이 극명히 다르다. '개츠비'는 외부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자 했다. '청교도'가 세운 국가에서 '물질'의 풍요가 주는 가치는 중요했다. 신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청교도인들은 절제와 성실, 금욕과 같은 덕목을 강조하는 경건한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 다만 이런 청교도적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성공'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이후 경제적 성공이 내면적 가치를 넘어서는 지경에 이른다.

청교도의 신념에는 '소명의식'과 '세속적 성공의 표지'라는 개념이 있다. 이들은 '부유함'은 하늘이 주신 사명으로 보았다.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은 신앙적 가치와 일치한다고 봤다. 고로 경제적 성공은 '신'이 준 축복으로 해석하면서 '부유함'이 도덕적 타락이나 탐욕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즉 청교도에서 '풍요'는 내면에서 차고 넘쳐 외면으로 현상이 발현되는 일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여지는 '외면'만이 주목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인지부조화' 같은 혼란을 겪는다. 본질을 잃고 '물질적 풍요'에만 집중하는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를 '위대한 개츠비'는 보여준다.

개츠비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사회적 성공과 부를 강조한다. 당시 그에게 이는 사랑과 인정을 얻는 꽤 그럴싸한 방법이었다.

화려한 저택, 사치스러운 파티는 자신을 포장하는 수단이다. '개츠비'는 이러한 '겉포장'이 '본질'에 닿을 것이라 여겼다. 데이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결국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하고 공허하게 만든다. 그것이 소설의 핵심이다.

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가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내면의 안정과 자아의 충실함을 외부적인 인정이나 물질적 성공보다 더 강조했다. 그는 스스로가 황제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자신을 더 성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면에서 개츠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멀리서 보기에 완벽한, 그러나 가까이 보기에 공허한,

꽤 그럴싸한 모습을 보이며 사는 삶.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대의 우리는 앞서 말한 '청교도'의 이념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웠던 철학적 배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 또한 유교가 만들어 둔 틀에서 '미국'이 발전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적당히 섞으며 살아간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는 처음에는 완벽해 보였다. 그녀는 우아했고 상류층의 품격을 갖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개츠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부와 명성을 쌓는다. 비로소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개츠비'라고 브리기도 한다. 다만 데이지와의 만남이 현실로 다가갈수록 그는 점점 그가 사랑했던 실체가 아니라 허상을 깨닫는다.

데이지는 '인격'으로써 한 여인일지 모른다. 다만 비교해 보건데, 우리가 어쩌면 '세속적 성공' 뒤에 얻게 될지 모른다는 '본질'을 닮았다. '세속적 성공'을 얻고나면 우리는 '그것'에 조금 더 가까워 질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다만 실제 '성공'에 이르면 우리는 '허망함과 공허함'을 느낀다.

멀리서 보기에 완벽한 그것들은 가까이에 다가갈수록 허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현대 SNS를 보고도 느낀다. 개츠비가 그의 전 재산을 걸고서라도 데이지와 진정한 사랑을 하고자 했던 것 처럼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만족감을 위해 하는 행위일 뿐이다.

한 사람의 성공이나 행복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장식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 내재된 의미와 가치를 통해 완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 '외면을 채울 것이 아니라, 차고 흘러 넘쳐서 외면조차 가득 메우는 내면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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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머리 키우는 기적의 독서 습관 - 단 10일이면 저절로 되는 내 아이 독서 습관 기르기
김기용 지음 / 미디어숲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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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요크대학교 심리학자 레이먼드 마 연구원은 말했다.

"우리는 두뇌가 경험한 것과 책에서 읽은 것과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효과는 있을 수 있다. 다만 드라마와 영화는 대체로 3인칭 시점으로 상황을 표현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의 1인칭 시점을 경험 해보지 못하고 죽는다.

작가 레베카 솔닛는 글쓰기에 대해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말하는 행위다.'

즉, 글쓰기는 온전히 혼자하는 행위이면서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위다. 그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는 '비언어적 소통'에 영향을 받는다. 듣는 사람의 기분, 날씨, 그날의 건강상태 등.

다만 글쓰기는 온전히 혼자가 되는 시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 사색하며 나온다. 가장 솔직하고 그 어떤 표면적 대화보다 깊을 수 있는 이유다. 고로 대화를 많이 하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솔직한 감정은 혼자 있을 때만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런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인생을 꽤 다채롭게 사는 일이다. 본인이 직접 경험한 일도 기록하지 않으면 완전히 잊어 버리는데, 남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며 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나'는 지금의 '타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로 '과거'에 경험했던 것만큼 중요한 것이 '지금' 읽는 것이다.

때로 꽤 괜찮은 스토리는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로보트태권V가 서울 한복판에 나타나 63빌딩을 끌어 안고 있다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표현력이 풍부한 작가는 이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으며 이때 필요한 인력은 '작가' 한 사람 뿐이다. 심지어 제작비나 시간도 소요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이야기를 '영상화' 한다고 해보자. 여기에는 꽤 적잖은 제작비가 투여된다. '제작사'는 투자대비 효용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다양한 광고와 장치가 들어가고 그래픽디자이너, 감독, 배우 할 것 없이 너무 많은 인력이 고용되어야 한다. 또한 제작 시간도 적잖게 들어간다. '자본'에 의한 검열이 존재할 수 있고 구현 과정에서 퀄리티에 따라 몰입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혹은 지나친 몰입으로 '기술'에만 집중하고 더 많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

고로 '글'은 더 많은 상상력을 저렴하게 대량 생산해 낼 수 있다. 이러한 태생적 특징으로 'TV나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글'에 비해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부 '만화 영화'는 '경제성'의 이유로 비슷한 유형의 '인형'이나 '장난감'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다.

시크릿쥬쥬나 콩순이, 또봇의 경우에는 '영실업'이라는 완구 제조사의 캐릭터다. 터닝메카드와 헬로카봇은 손오공이라는 제조사의 캐릭터이고 로보카폴리와 베이비버스는 '아카데미과학'이라는 완구 제조사의 캐릭터다. 즉 자연스럽게 '영상'은 제품 홍보 광고가 될 수 밖에 없다.

최근 넷플릭스가 인기가 있는 이유도 사실 비슷하다. PPL이라고 부르는 광고가 때로는 작품의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까지 오고 있기에 다수의 사람들은 이 노골적인 '광고'에 불만을 품기도 했었다.

사실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다수의 플랫폼들은 '무료'인 경우가 많다. TV, 게임, SNS 등 이들이 '무료'로 제품을 이용하게 하면서 세계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 되는 이유는 이들의 영업구조가 '광고'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고로 스마트폰과 TV는 필연적으로 '거대자본'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또한 표현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독서는 이런 면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방 통행적인 다른 매체에 비해 꽤 능동적인 행위다. 언제든 멈출 수 있고 앞과 뒷페이지를 마음껏 오고 갈 수 있으며 읽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거나 앞부분을 훑어 볼 수도 있다. 읽던 도중 작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고 목차를 확인하면서 큰 흐름을 파악할 수도 있다.

결국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꽤 자유도 높은 방식으로 다른 이가 혼자한 사색을 훔쳐보는 일이고 다시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실제 경험과 구분해 낼 수 없다. 10살 아이도 하버드 대학교 교수의 생각을 훔쳐다 볼 수 있고 21세기에 사는 사람도 14세기 전쟁하는 장군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런 완전한 도구를 익히는 것은 꽤 좋은 스승 열댓명과 쪽집개 학원을 소개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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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와 팩트 - 왜 합리적 인류는 때때로 멍청해지는가
데이비드 로버트 그라임스 지음, 김보은 옮김 / 디플롯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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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란 무한한 길 속에 놓인 쉼표와 같다.'

끝없는 길 위에 잠깐의 멈춤 정도. 진실의 위치는 그 정도다. 언제나 '완전'하지 않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는 정도가 '진실'이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밖에 없다.'

'진리'가 변화 무쌍하다는 것은 고대 인도철학에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등장했는데 그것을 담은 글이 '금강경'이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한때, '우주의 법칙'으로 여겨졌다. 또한 수백 년 동안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했다. 더 나아가서는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뉴턴의 법칙은 우주를 설명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 졌다.

진리라고 여겼던 어던 법칙도 때로는 '영속' 중의 쉬어가는 '쉼표'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찾아 다니고 있지만, 절대적이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지식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고로 언젠가는 상대가 맞고 언젠가는 내가 맞는 수레바퀴와 같은 진리의 삶을 살고 있다. 언젠가는 평평한 지구가 맞고, 언젠가는 둥근 지구가 맞다.

다시 말해, 진리란 '하나의 완결한 결론'이 아니다. 진리는 '끊임없는 의심과 탐구, 재고찰의 여정 중에 잠시 도달하는 '찰라'와 가깝다. 가끔 너무 쉽게 가짜 정보에 휩쓸린다. 그리고는 그것이 진리에 가깝다고 여긴다.

다만 진리는 모두에게 주관적인 것이며 모두는 '진리'를 가장한 오류 속에서 속거나 속이고, 때로는 믿거나 신봉하기까지 한다.

고로 상대의 진리가 맞을 수도 있고 나의 진리가 맞을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으되, 나의 진리가 맞다는 나만의 철학이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철학과 상대의 철학을 모두 비판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도 갖고 있어야 한다.

'방사능 공포'라던지, '물이 모든 걸 알고 있다던지', '지구가 평평하다' 던지 하는 착각도 모두 그렇다.

과학적 '진리'라고 부르는 것들은 꽤 진리와 닿아 있지만 그 자체도 '과학적 권위'에 의해서만 '증명'되는 모순을 갖는다. 우리가 스스로 '비판적 사고'를 가져야 하는 이유다.

얼마 전, '지구가 평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관한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분명 현대 과학에서 말도 안되는 오류투성이다. 다만, 뇌로 들어오는 오감 자체가 화학으로 결과로 만들어진 '전기 신호'의 해석 뿐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 자체의 '진위'도 모두 '믿음'의 영역이다.

조현병 환자의 뇌속에서는 '환청과 환시'가 모두 실재한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은 컴퓨터 프로그램 상의 오류처럼 오류 투성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손이 솜뭉치처럼 둥글다고 여긴다. 그것을 확신한다. 어떤 사람은 지하철에 자신의 다리를 두고 왔다고 확신을 하고 어떤 사람은 여든이 된 실제 나이와 다르게 8살까지의 기억만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국정원'에서 자신을 감시한다는 완전한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그 사람들에게 '진실'은 거기까지다.

제3의 시선에서 '병'이 있다고 진단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완전한 세계다.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은 언제든 수정될 수 있다. 때로는 과학이 그것을 속일 수도 있고 정부나 신앙이 그것을 속일 수도 있다. 그것이 수정될 수 있음을 언제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병식없는 망상장애자처럼 완전한 세상을 깨지 못해 치료받지 못하는 것은 때로는 상대적 진리가 절대적 진리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모두 상대적 진리' 속에서 삶을 살며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절대적 접점'을 찾아 '공유 진리'로 설정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에서 모두는 끝없는 질문을 통해 상대가 가진 진리와 지신이 가진 진리를 비교하며 비판적 사고를 갖고 상대의 것과 나의 것 모두 진리일 수 있고 모두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결국 지구가 평평할수도 있다. '누군가의 진리'에 귀를 열고 자신만의 철학과 비판적 의식을 통해, 거짓과 진짜를 판가름 할 수 있는 다양한 사고를 해야 함이 틀림없다.

꽤 잘 만들어진 책이고 생각할 거리가 풍부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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