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인문학 필독서 50 필독서 시리즈 24
여르미 지음 / 센시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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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추천해주세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쉽게 고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간단해지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었으니 '최고의 책' 혹은 '단권'을 꼽아보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그때도 굉장히 난감하다.

책이란 걸 읽다보면 '책과 책'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짐을 느낀다. '책'이라는 단일 출판물이 아니라 활자로 얻은 것들이 유기적으로 합쳐지게 느낌이라 그렇다.

'어디서 이걸 봤나' 싶은 구절은 다른 책에서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인용마저 다른 어딘가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많이 읽으면 빨리 읽게 된다. 그것은 '이해능력'이 발달해서가 아니다. 역사, 철학, 인문학의 내용은 표면이 달라도 본질은 비슷하다. 결국 까맣게 칠한 도화지에 채워지지 않은 빈곳을 덧칠하는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창의성'이라는 것은 없다. 대체로 '창의성'이라는 것은 시기나 장소를 달리한 모방 간의 융합이다. 고로 거의 모든 것은 '모방'의 형태를 띄고 있다.

'거인의 어깨'라는 말이 있다. 아이작 뉴턴은 말했다.

'내가 멀리 보았다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사람들은 '뉴턴의 말'이라고 알고 있다. 다만 이 비유는 1651년 조지 하버트라는 종교 시인이 사용한 표현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는 거인보다 멀리본다.'

뉴턴은 이 말을 빌려썼다. 그러나 조지하버트의 그 말 또한 1621년 로버트 버튼의 이야기를 빌렸다. 로버트 버튼은 1159년 요아네스 사레스베리엔시스의 글을 읽고 그 말을 차용했고 이 표현 또한 1130년 베르나르 사르트르의 글을 인용한 글이다.

고로 모든 글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갑자기 누군가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없다.

이렇게 위대한 인물도 자신의 치적을 선인들에게 넘기곤 했다. 심지어 이때 사용한 표현마저 선인들의 표현을 빌려온다.

그들의 말을 나또한 인용하자면, 거인 어깨 위에 다른 거인이 서 있고, 그 거인 어깨 위에는 또 다른 거인이 서 있다. 결국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거인, 그 거인의 어깨 위에 다시 서 있는 형국이다.

어쨌건 글을 읽다보면 '책 한권의 제목'이 '목차' 수준으로 줄어 들어 버리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역사'라는 항목 아래, '사피엔스'나 '총균쇠'가 있고 '과학'이라는 항목 아래, '이기적 유전자'나 '코스모스'가 있다.

책 읽던 사람에게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드는 목차 하나만 골라보세요'라는 주문을 했을 때처럼의 막연함이 아마 '책을 추천하는 다독가'의 마음일 것이다.

'여르미'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류지아 작가'님은 네이버 도서인플루언서 1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1년에 500권 가량 읽는 대단한 다독가다. 개인적으로 나또한 '다독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정말 감히 비할 바가 못된다. 사실 '도서인플루언서' 활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블로그를 방문하여'책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라고 글을 달면 괜히 서운해 질 때가 간혹 있다. '나의 노고'는 읽을 때가 아니라, 쓰는 것에 있다는 서운함이 들어서다. 읽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사후 그것을 글로 기록하는 독후 활동이 거의 책읽기의 8할은 차지하는 것 같다.

아무튼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책을 읽을까. 어떻게 읽을까'하는 개인적 호기심으로 책을 구매했다. 책의 제목은 '인문학 필독서 50'이라고 적혀 있겠지만, 아마 출판사 컨셉에 맞춰진 이름일 것이고 굉장한 고민을 하며 추천도서를 선정했을지 모른다.

예전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이야기한 글을 본 적 있다. 글에 따르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본업'과 전혀 상관없는 매우 마이너 한 주제로 끝없이 파고들어간 '전공서적'이 하나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렇다. 나의 서재에는 굉장히 쌩뚱맞은 주제의 책들이 있다. 가령 '신발'에 관한 역사라던지,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역사책들도 있다.

'도대체 이런 책은 왜 사는 거야?, 사는게 문제가 아니라 왜 읽는거야'

이런 책들이 쌓여 있게 되면, '아.. 나도 정상은 아니구나..'한다.

그러다가 다른 책에 진심인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보다는 정상이겠구나' 하기도 한다.

이렇듯 고구마줄기 캐듯 따라 들어간 책에서 '유레카'하고 싶은 인사이트를 얻는 경우도 많다. 고로 나중에는 한 권의 책이 엄청났다는 인상은 희미해진다. 잘 섞여 하나의 요리로 탄생한 '독서'의 즐거움이랄까.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가장 맛있는 원재료 하나만 꼽으세요.'와 같은 의미 없는 질문같다.

개인적으로 '누군가가 추천한 책'이나, 베스트셀러 책을 잘 찾아 읽지는 않는다. 책이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영향을 끼치고 바로 직전에 봤던 영화와 소설, 겪었던 이야기와 들은 이야기들이 모두 절묘히 섞여 주인과 궁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누군가가 진중하게 물어본다면 곰곰히 생각해 볼 것 같다. 그리고 '이거 읽으세요'라기보다 '나는 이거 괜찮았아요'라는 식으로 추천을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선택이 몹시 궁금하다. 어쩌면 언급된 도서를 찾아 고구마 줄기캐기를 다시 시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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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의 세계 - 인체의 지식을 향한 위대한 5000년 여정
콜린 솔터 지음, 조은영 옮김 / 해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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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버크와 헤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당시 에든버러는 해부학 연구의 중심지였다. 다만 법적문제로 시신 공급이 어려워며 해부학자들은 인체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그때 버크와 헤어는 '자연사한 하숙인'을 매장하지 않고 한 해부학자에게 판매한다. 그후로도 도굴을 시작한다.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후 산 사람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공급하는 방식을 선택한 둘은 열 여섯의 희생자를 만든다. 이들 대부분은 빈곤하거나 고립된 사람들이었다. 살해 방법으로는 목을 졸라 질식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살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이러한 방식을 버크의 이름을 따서 버킹(Burking)이라 부른다.

1829년 이들의 악행은 발각된다. 헤어는 법정에서 면제를 조건으로 '버크'를 고발했다. 헤어는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고 '버크'는 2만5천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의 몸은 결국 해부되었고 이 장면을 지켜본 에든버러 의과대학 교수 '몬로'는 펜을 꺼내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글은 교수형에 처해진 윌리엄 버크의 머리에서 나온 피로 쓴 것이다."

버크의 유골은 2022년 에든 버러에서 열린 해부학 박람회에 전시 되었다. 또한 버크의 살가죽은 기념 수첩으로 장정되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사람들을 살해하고 해부용 시신으로 판매하던 버크의 스스로가 해부용으로 제공된 것이다. 그의 시신은 해부학 수업에 사용됐고 해골과 피부 조각은 박불관에 전시 됐다.

해부학에 대한 갈망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다. 시신 거래는 윤리적 문제를 재고하게 만든다. 해부학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윤리적 문제가 양립한다. 이에서 인류사는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진다.

'콜린 솔터'의 '해부학자의 세계'에는 적잖은 해부 도판이 수록되어 있다. 무려 1000년 가까이 된 그림부터 현대까지 시기별 해부의 역사와 자료가 전시된다.

'당시에 이것을 그렸단 말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주 오래된 자료들이 너무 말끔한 상태로 보여진다. 책장이 넘어가며 인류사는 현대로 흐른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경이로움은 더 커져간다.

꽤 아쉬운 것은 해당 시기에 우리나라는 어느 시기인가,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는 것이다. 해부학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서양에서 공유되던 시기, 또한 일본으로 넘어가서 일본이 되려 서양 의학 수준을 업치락 뒤치락하던 사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역사가 '유럽'에게 유리하게 흘럭갔던 이유가 대략 납득하게 된다.

과학자들의 지적호기심이 윤리적 딜레마에 걸려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당파에서는 상복을 3년을 입어야 하느지, 1년을 입어야 하느지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수백년이 넘은 시기에 유럽에서 그렸던 그림들은 단순 '의학적 지식'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그들의 그림은 꽤 정교하기도 했고 감각적이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유머러스하기도 했다.

해부된 시체가 자신의 살가죽을 들어 올리며 내부를 보여주는 모습이라던지 잘려나간 자신의 머리를 전시하는 그림 등. 다양한 자세의 그림들도 있었다.

해부된 그림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가 방으로 들어와 그림을 들여다 본다. 아이도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는지, 아버지의 책을 빌려가 한참을 뒤적거렸다. 아이가 보기에도 호기심이 일어날 만큼 그림의 내용은 감각적이었다.

이어 아이는 다음날 서점으로 가서 '해부학'에 관한 만화책 두 권을 구매했다.

유학시절 함께 살던 플랫메이트는 오클랜드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당시 친구와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친구의 전공책을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뼈이름', '근육이름'

그 온갖 이름이 '영어'가 아닌 상태로 적혀 있었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친구는 '동양인'이었다. 당췌 이름을 왜 그렇게 어렵게 지었고 그것을 어떻게 다 외운단 말인가. 요즘 '의대 열풍'이라고 하던데, 알파벳 'x'가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이름들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막막하다.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것은 느끼며 당시 나는 다짐했다. 나에게 '의사'라는 직업은 시켜줘도 못할 일이구나...

참고로 책은 생각보다 쉽고 재밌으며 전공자와 비전공자 모두가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공부한다'는 생각을 빼고 읽으면 뭐든 재밌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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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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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군가에게는 망상적인 이야기이겠지만 혹은 비현실적인, 허황되거나 의미 없는 이야기겠지만, 최근 이 물음이 내 삶의 순간을 함께 했다.

아이와 동네 서점에서 책구경을 하다 가장 얇은 책 하나를 골라 집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죽일 수 있는 가벼운 단편을 집어 든 것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가볍게 첫장을 넘기고, 두번 째 장을 넘겼다.

'톨스토이가 쓴..', '민음사 고전..', '죽어가는 한 남자의 기록..'

그 키워드가 가슴으로 다가왔다. 한 손에 잡히는 가벼운 소설이 갑자기 묵직해졌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면 여기저기 많다. 전쟁이나 범죄 영화에서는 너무나 쉽게 죽음을 묘사하고 그 죽음에 '극'이라는 설정이 자각되면 아무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꽤 현실적이다. 멀쩡하던 한 남자가 병을 얻고 서서히 죽어가는 묘사, 죽음을 맞이하면서 겪는 다양한 생각의 변화, 주변, 그 주변을 바라보는 죽어가는 사람의 질투와 감사함, 반복되는 희망과 좌절.

단 하나의 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시선이 묘사된다.

아이와 정신없이 서점을 나오느라 '책'은 구매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훑었던 책의 이야기가 아른거렸다.

'아직 읽어야 할 책도 많은데...' 하다가도

'그러나 지금 읽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겠다.' 싶어 아침 일찍 서점 문앞을 기다리다가 첫 손님으로 지체없이 책한권 집고 나왔다.

그후 단숨에 읽었다.

안정된 미래와 세속적 성공에 대한 추구, 인정 받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것은 종국에 가서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반 일리치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삶의 터전이 그저 허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혹시 내가 부여 잡고 있는 것들 또한 무너지면 빈 껍데기일 뿐이지 않을까.

이반 일리치는 법조계에서 일하는 러시아 제국의 상류층 관료다. 비교적 평탄한 경로를 밟았고 사회적 성공을 이룬다. 그의 커리어가 전형적인 모범적 공무원의 그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법률 공부를 하고 법관이 된다. 경력을 쌓으며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와 존경을 받는다. 매순간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자신의 업무에 규칙과 절차를 지킨다.

도덕적으로 명백한 '오류'를 저지르지도 않고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충실히 따르며 부정을 저지르거나 불의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되려 법관에 맞도록 규칙과 법, 절차를 중시하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삶의 전반에는 깊은 차원의 도덕적 결핍이나 오류는 없다.

그런 그가 종국에 와서 자신의 삶을 톺아가며 느낀 오류라면 '타인의 기준에 맞춘 표면적 삶',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한 고찰의 부재' 정도일까.

소설의 중반부에 나약해가는 자신을 보며 그나마 놓치 못하고 한평생 모신 '품위'를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모범적 법관이 시간이 지나며 점차 죽음을 맞이하는 그라데이션 된 과정을 지켜보면서 평범한 일상이 '비현실'로 넘어감을 경험한다.

육체보다는 정신이 나약해지고 지독해져 간다. 갖추고 있던 모든 허울이 '스르르' 녹으며 '삶'에서 갖추던 모든 것들이 '태생적'으로 돌아감을 관찰하게 된다.

가끔, 아니면 거의 매순간 우리는 '필멸자'의 숙명을 잊는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주가를 바라보고 비싼 자동차와 그럴싸한 직업을 소유하고자 치열하며, 괜찮은 취미를 가지고 다수의 존경을 갈망한다. 그 놓지 못하는 먼지 같은 것들이 자신을 지탱해 준다고 착각하며 고개를 하늘을 향해 들어올린다.

이반 일리치에게 있어서도 집, 직장, 사회적 성공은 견고한 삶의 축이었다. 다만 죽음이 그의 삶에 문을 두드리는 순간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하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모든 관계가, 모든 성공이, 그가 믿고 있었던 모든 가치가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린다.

'하인'에게 의지하고 싶고 아이처럼 위로 받고 싶어한다. 나약함 앞에 '지위'는 '인간'을 구분하는 선이 되지 못한다. 죽음 앞에 모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빈손이다.

'제일 가벼운 책'이라는 '가벼운 마음'이 선택했던 이 책이 묵직하게 다가와 가슴에 내려 앉는다. 결코 단번으로 끝내서는 안 될 책이다. 스스로가 '필멸자'라는 착오에 빠질 때, 스스로 오만해지고 세속적 좌절과 고민에 쌓여 있을 때.

그때마다 꺼내봐야 할 명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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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인생 - 다정한 고집과 성실한 낭만에 대하여
문선욱 지음, 웨스트윤 그림 / 모모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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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위병소 근무는 지옥 같았다. 아침 일찍 시작해서 저녁까지 위병소를 지켰다.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부대 정문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일이던가.

다른 병사들은 무엇으로 시간을 채웠는지 모른다. 방탄모를 눌러 쓰고 K2 소총을 들고 말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하루를 보낸다. 앞은 심심함 그 자체였다. 구경거리는 흔들리는 나무 밖에 없었다. 기껏해봐야 관리되지 않은 '임야지'가 있을 뿐이었다.

가끔 재밌는 선임을 만나면 '너는 뭐하다가 왔냐?'며 주거나 받았다. 친구와 사업하던 고참, 여친과 동거하던 후임, 연예계에서 활동했다던 이까지.

그들의 인생은 다양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나면 어느새 3시간, 4시간이 지나갔다. 여행 간 일, 이별 이야기, 사랑 이야기, 사기 당한 이야기, 불행했던 가정사 등. 갓 스물이 넘은 청년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흥미로웠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나는 말 없이 '임야'만 바라봤다. 떠올릴 추억이 많지 않음을 깨달았다.

학창시절은 기껏해봐야 '학교', '집'이었다. 가정사는 아쉽게(?)도 화목한 가정이었으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왕따를 시키지도 않았다. 큰 이탈을 하지도 않은 무난한 삶이었다. 일상의 가장 큰 '이탈'이라면 '군입대'를 했다는 것 쯤일까.

함께 '근무' 서던 선임들은 '그 새끼, 참 더럽게 재미없게 살았네...' 했다.

이후부터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그림자를 봤다. 내리 6시간 이상을 봤다. 그러던 것이 나중이 되면 아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 한곡이 3분이면 스무 곡이면 한 시간'

알고 있는 모든 노래를 마음속으로 다 불러도 1시간을 채우지 못함을 깨닫고 머릿속에 무얼 채우고 살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떠올릴 추억도 크지 않다. 아는 바도 많이 없다. 그 후회감에 전역 후를 다짐하게 됐다.

100일 휴가를 받고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무릎이 좋지 않으셨다. 하루종일 방에만 계셨다. TV는 채널 9번을 항상 고정하고 보셨다. 일병 휴가를 받고 할머니를 뵀을 때도 할머니는 TV채널 9번에 시선을 고정하셨다. 가만히 하루를 보내셨다. 상병 휴가 때에도, 전역을 앞둔 말년 휴가 때에도 그러셨다.

부대 복귀를 하고 내무반 천장을 바라봤다. '거참 시간 더럽게 안가네...'하고 푸념을 하는데 문뜩 할머니가 떠올랐다. 아마 지금도도 9번을 고정하시고 계실 것만 같았다.

몇 시간의 근무, 군생활 2년 조차 견디기 무서울 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내성적인 손자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설 향수의 주인공이 '자신의 몸'에는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처럼, 나는 존재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휴가차 할머니댁에 갔을 때, 함께 TV를 말없이 보며 시간 때우고 왔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선임들에게도, 할머니께도 향기 없는 사람인듯 했다. 그만큼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자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병상에 누워 보낼 노후를 생각하면 쓰지 못해 죽을 '통장 잔고'보다 떠올릴 추억이 많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 '스릴러', '코미디'. 뭐든 추억이라면 쌓고보자.

그것이 내 20대의 '철학'이다.

'문선욱'작가의 '저스트 인생'을 보니, 지나치게 '현실'에 몰두하던 30대 후반의 스스로가 보였다. 또다시 '일', '집', '일', '집'하며 재미없는 시간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 보게 됐다.

20대의 나의 선택은 그런식이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을 것을 선택해보자.' 나는 나를 너무 잘안다. 스무 살의 나는 '학교와 집'의 반복이었다. 나는 루틴을 지키며 재미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특별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평범한 사람이 나는 너무 쉽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 뒤로 내가 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습관이 생겼다. 20대에 JYP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노래와 춤을 추고 인기상을 받았다. 과묵하고 내성적인 내가 하지 않을 선택이지 않은가. 난데없이 가방하나 들처매고 유학을 떠나고 구글에 노출된 세계 바이어들에게 메일을 보내 컨테이너 단위의 상품을 수출하기도 했다.

20대에 나를 움직이던 생각은 '언제 해보겠어?' 였다. '언제 해보겠어?'는 꼭 좋은 모습으로 결과를 만들진 않았다.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서른 넘어서 삶이란 '즐기는 것'에서 '생존해 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하다보니 뭘하고 있는줄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김영하 작가가 중국으로 글을 쓰러 갔을 때, 비자 문제로 되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며 '이 또한 소재가 되겠네' 했단다. 번뜩이는 말이다.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은 소재다. 문학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일상을 빼다박은 지지부진한 이야기에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공포', '스릴러'와 같은 '극적인 상황'을 모두는 선호한다. 누군가는 돈주고도 구경하는 그 일을 직접 체험 해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지 않을까.

잊혀졌던 나의 철학이 스믈스믈 살아난다. 삶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재밌고, 보는 것 보다는 해보는 것이 재밌다. 그런 의미에서 희노애락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같은 일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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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주다 - 사이비 종교 전문 탐사 기자의 국내 최초 잠입 취재기
장운철 지음 / 파람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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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철' 작가는 30년간 사이비, 이단 현장을 취재, 분석 보도한 전문기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에 '밥 먹고 X싸는 신'은 50명 가량된다.

스스로 '신'을 자처하는 '인간' 말이다.

과거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 있다. '우리나라가 맞나?' 싶은 이야기가 적잖게 쏟아졌다. 허구를 이야기한 페이크 다큐인가 싶을 만큼 놀라웠다.

가끔 취재 프로그램이나 뉴스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내용이긴 했으나 그토록 적나라하게 보여진 다큐는 처음이었다.

심신이 나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믿음'을 인질삼는 이단 종교는 당사자 뿐만아니라 그 주변을 초토화 시켜 버린다.

비슷한 경험은 여럿있다. 신논현역에서 강남역 방향으로 걸어 가다보면 몇번 씩 길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교보문고가 어디에 있나요?'

직선거리로 수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의 '장소'를 묻는다.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키면 '감사합니다.'하며 이내 본색을 드러낸다.

'혹시 인상 좋다는 이야기 안 들으시나요?'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조상 '덕'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스토리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끝까지 들어 본 적은 없다. 다만 지인에 따르면 그들을 따라 끝까지 가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결국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차림비용'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차림비용은 50만원에서 200만원 정도되고 형편에 따라 더 내거나 덜 낸다고 했다.

'정운철 작가'의 '나는 교주다'에 이 같은 사이비, 이단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개 기독교나 불교의 이단과 사이비를 다룬다. 어쨌건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흔하다.

사이비 이단은 아니지만 혹은 알 수 없지만 비슷한 경험은 있다.

지인을 따라 소규모 교회를 간 적이 있다. 교회는 당구장과 노래방 위와 아래로 위치한 빌딩에 자리했다. 규모는 크지는 않았고 3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설교'를 들었다. 설교가 끝난 뒤, 목사 님은 지하 주차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함께하는 교인들이 함께 했다. 지하 주차장에 억소리나는 검정색 고급 세단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목사님의 고급 세단 자동차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공단 지역으로 갔다.

'흰가운'을 입으라고 하셨다. 가운을 입고 성큼 성금 바닷가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허리까지 잠기는 곳에 이르자, 목사님은 주문했다. 목사님 말씀이 하시고 머리를 밀면 머리 끝까지 바닷물에 담구라는 지시였다.

그 의식을 3~4회를 하고 돌아왔다.

일부는 사진을 촬영했고 얼마 후 내 사진이 해당 교회에 동의없이 걸렸다.

나중에 듣기로 '침례교'라고 했다. 침례교에서는 머리가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의식을 진행한다고 했다.

내가 다녀온 교회가 이단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만나는 교인 중 일부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네'하는 쪽과 '그럴 수도 있어'라는 쪽으로 나눠졌다.

이에 관해 가치판단하지 않겠다. 어쨌건 독특한 경험인 것 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사이비'이건,아니건 개인적 믿음에 관해서는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헌금을 얼마를 하고 종말설을 믿거나 말거나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만 어떤 단체는 '치유'나 '치료'를 행한다. 거기서부터는 분명한 반감이 생긴다.

유튜브 어느 채널을 보니 목사가 '조현병', '정신질환', '자폐', '암'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얼핏 목사가 뭐라고 주문을 외우고 이마에 십자기를 긋거나, 소리를 지르도록 요한다. 규모가 작지도 않다. 이 장면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한다.

개인적으로 그때부터는 강력한 반감이 든다.

단언컨데 '병에 관해서는 '목사'가 아니라 '의사'의 몫이다. 병원을 다니며 영적치유던 믿음치유건 병행하는 것은 괜찮다고 본다. 다만 어떤 목사는 '의사'를 불신하고 '교회'에서 치유하는 것만을 강요한다.

어떤 질병은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치료기간을 놓치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교회' 내에서 이뤄지는 치료는 때로 효과가 있기도 하다. 이는 '플라시보'라고 알려진 '위약효과'와 비슷한다. 플라시보에 해당되는 질환들은 때로 치료자에 대한 강한 믿음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자연치유되는 질병들이 포함된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약은 '플라시보'가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치료는 때로 입소문을 타기도 한다. 다만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에는 강한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장운철 작가의 '나는 교주다'에는 다양한 사이비 이단이 등장한다. 피가 거꾸로 솟는 거짓 사기꾼들의 만행과 이해가 어려운 단체와 사람들이 이야기는 흥미롭게 읽히다가도 강한 호기심이 불러 일어난다. 그러면서 가끔은 몹시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모아보니 먼 이야기 같으면서, 어쩌면 흔한 이야기 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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