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윤여사
최은정 지음 / 자상한시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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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내 문제 상황만이 극단의 크기로 보일 때가 있다. 그냥 고개를 들고 주변만 살피면 되는데, 티끌만한 상처에 시선을 못 떼다보니 자신의 상황이 최악이라고 여겨버린다. 마침 나에게 필요한 적절한 타이밍에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이야기. 귀여운 그림체와 읽기 쉬운 문자체로 이 책은 시종일관 밝고 명랑하다. 책에 담지 못한 감정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보자면 가늠도 되지 않는다. 알츠하이머와 같은 뇌질환은 여타 다른 병과 성격이 다르다. 눈을 들여다보면 어제와 같은 얼굴에서 나와는 다른 시간과 세계로 떠나버린 이를 바라보는 것은 당사자만큼이나 주변인을 힘들게 한다. 어쩌면 당사자보다 더 주변인이 더 힘든 병이다. 상대에게는 모든 기억을 외부에 남겨두고 내면만 홀로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난 이를 바라보면 매일 이별하는 느낌이 든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가족 중, 가장 힘든 일은 바로 '치매'와 함께 찾아오는 '난청'이다. 나긋 나긋하게 말을 해도 부아가 치미는 상황이지만, 대게 환자들의 대부분은 '난청'이 함께 있다. 큰소리로 대화를 해야한다. 언젠가 '치매' 환자의 가족을 본 적이 있다. 환자에게 구박하듯 '반말'과 '고함'을 쳐대는 모습을 보고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것은 내 작은 시선이 만들어낸 오만한 착각이었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기에 '큰소리'로 말해야하고, 그렇게 같은 말을 반복하다보니 뒷말이 짧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다른 병과 같이 서로에게 충분한 대화를 나눌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과 달리 '치매'는 참 가슴 아픈 병이다. 주변인에게 점차 구박받고 무시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병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고통'에 심히 공감하지 못한다. 책을 써주신 작가님의 끝까지 긍정적인 성향에 존경심이 든다.

자기 부모라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제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라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은 아니다. 보살피고 말벗이 되고 또, 상대가 기억하지 못할 기억과 추억을 대신 기억해주는 일... 젊은 며느리가 한다는 것은 대단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상황에 비관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와의 이야기는 멋진 책으로 출판됐다. 보통의 사람들의 기억이 조그만 신체에 갇혀 사라지는 것과 달리, 신세대 며느리와 치매 시어머니와 이 이야기는 출판되어 여러 사람의 기억 속에 함께 이식됐다. '반짝 반짝 윤여사'라는 제목을 집었을 때, 치매 노인에 관한 글일 것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더군다나 그냥 치매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들도, 딸도 아닌 며느리의 글일 것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이런 반전은 되려 읽기 편한 구성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은 만화와 그림이 함께 있다. 상황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섞여 있다. 그 내면을 직접 들여다 보자면 유쾌하지만은 않을 일일 것이다. 다만 명량드라마의 주인공이야기처럼 이 글은 재밌다. '치매'에 걸리신 시어머니가 불쑥 불쑥 던지시는 한마디도 꽤 묵직하다. 그저 '치매노인의 말'이라고 우습게 넘어갈 만한 하지않다. 사람이 시간에 함께 쌓아놓은 철학은 '기억'이 사라져도 '말'과 '내면'에 녹아져 있는 모양이다. 나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어느 날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일. 그것은 그냥 '질환'이라고 보기에 사무칠 정도로 슬프다. 양쪽에서 서로 공유하던 기억 중 한쪽 고리가 끊어졌을 때 느껴지는 공허함과 끊어진 실타래가 의미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허무함은 더욱 그렇다. 나와 다른 기억을 가진 상대를 마주하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사라지는 기억, 왜곡되는 기억' 뇌사 판정을 받는 것처럼 함께 있는 것 같지만 최대한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에는 자세하게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남편(아들)'의 심경 또한 간접적으로 느껴진다. 이제는 갓 6살이 된, 쌍둥이를 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말이 조금 통하는가 싶다가 어떤 날은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 같은 말을 되풀이 해야하고 '당연히 혼자 하겠지...' 기댄다. 어쩐지, '일부러 저러나' 싶은 얄궂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러려니 한다. 아이가 커가면서 '알법한 나이'가 될수록 기대치는 더 높아지고 반대로 일부는 기대고 싶은 마음도 생겨난다. 반대로 외적으로 성숙한 노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마 육아의 감정의 100배를 곱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안타깝게도 치매는 퇴행성 질환이다. 진행을 늦출 수는 있지만, 한 번 진행되면 회복하는 것은 어렵다. 책에서도 뒤로 갈수록 '윤여사'께서 잃어가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나를 보살피던 이를 보살펴야 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가족들은 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치매 환자의 가족에 대한 안타까운 이들도 어렵지 않게 소개 되곤 한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는 참 유쾌하고 기특하고 귀엽게 읽어 내려갔다. 작은 에피소드들의 모음에 괜히 흐믓해지기도 한다. 씻기고 먹이고 벗해주는 여러 일들의 고됨을 생각하자니 느끼는 바는 복잡했지만, 대게 아름다워보이고 유쾌하고 씁쓸하고 안타깝고 귀여운 복합적인 감정이 모두 드는 글이었다. 책의 구성이나 디자인도 독특해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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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미카엘라 르 뫼르 지음, 구영옥 옮김 / 풀빛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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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고 아무것도 새로 생겨나지 않는다." 물질의 성질이 분자나 원자 구조의 변화로 변화하는 것을 연구하는 '화학'이라는 분야에서의 '친환경'이라는 말은 어떤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 화학물'들도 모두 '환경'에서 얻었다고 볼 수 있다. '환경'에 관심은 최근들어 많아졌다. 선진국에서는 친환경 기술 사회를 지향하며 '개발도상국'이 엄두를 낼 수 없는 '성장 전략'을 취한다. 말 그대로 '친환경', '클린 에너지'는 '산업의 한 부류'가 되어 '투자대상'이 됐다. 민간과 공공의 투자는 반드시 성장과 '수익'을 보장해야 한다. 친환경이라는 멋진 프레임에 씌워 있지만 결국 '자본주의'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환경에는 여러가지 맹점이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의 대부분은 '도덕적 비판'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환경보다 개발 우선'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언급마처도 분명 지탄의 대상이 된다. 과연 친환경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냄새가 나는 것은 뚜껑을 덮는다' 본질에 대한 고민보다 먼저 현상을 제거 하는 것은 우둔한 일이다. 환경오염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플라스틱 사용'이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플라스틱'은 사실상 다수의 인류를 편리하게 만들었다. 이 저렴한 고분자 화합물은 소수의 인류들에게만 주어졌던 편의성을 저렴하게 빈곤한 다수에게 보편화시켰다. 플라스틱에 죄를 물어 플라스틱이 '환경 파괴범'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일본의 속담에 따르면, 냄새가 나는 것은 덮는다. 즉 냄새의 본질을 해결하지 않는다. 플라스틱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과 우리 사회가 가진 속성'이다. 자본주의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상 '간편하고 경제적인 방식'으로의 진화는 어쩔 수 없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없애더라도 다른 무언가를 사용할 것이다. 환경 문제에서 우리 인간이 가장 피하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플라스틱 사용'이냐 '육류 섭취' 혹은 '석유사용'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폭발'이다. 산업화 이후에 탄소배출량이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도 환경오염물질을 과도하게 생성해냈던 산업구조의 역할도 있지만 부양해야 할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원인이었다. 인구 증가는 자본주의를 언제나 밑받침해주는 역할을 했다. 언제나 생산보다 소비가 많아지며 적당한 인플레이션을 발생하면 경제는 긍정적인 지표를 만들어내곤 했다. 머지않아 급격한 인구감소를 보일 일본과 한국 등의 탄소 배출량은 산업 구조 변화가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김상욱 교수 님에 따르면 '친에너지'라 부를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조금더 효율적인 에너지 활용은 있을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쓰지 않는 것이 가장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 표면적인 문제 해결을 하려든다. 환경을 위해 원시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가령 세계 최대 부자 100인이 모여 친환경적 농법을 사용한 식물이나 식물이 아니고선 섭취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든다면 어떨까. 인도나 아프리카에 있는 빈민들의 삶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친환경'의 강요는 과연 맞는 것일까.

서구에서 사용한 쓰레기들은 대부분 아시아로 수입된다. 아시아의 빈민들은 이것들을 세척하고 분류한다. 베트남에서는 말랑말랑 덜 굳은 녹은 플라스틱을 맨손으로 만지며 커피 한잔 안되는 일당으로 안전을 담보힌다. '친환경', '재활용'이 '선'에 속한다고 여기는 것에 이런 '맹점'이 있다. 살만한 사람들의 일종의 '기호'이자 '컨텐츠'가 되어버린 '친환경'이라는 타이틀에 의해 또다른 불평등과 계층차이가 발생한다. 경제 성장과 환경보존은 불가능하다. 또한 인권과 환경에 대해서도 공존이 힘들다. 원래 인간은 태어나면서 끊임없이 열량소모를 한다. 신체적 소모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 석탄과 우라늄을 태워 생산 시설을 가동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런 열랑 소모에 동참하는 인류의 숫자가 80억이다. 2067년 세계인구는 100억을 돌파할 예정이다. 즉, 현재 사용하는 에너지 수준을 유지만 하더라도 25%이상의 에너지를 더 소비하게 될 예정이고 25%이상의 플라스틱을 더 사용할 예정이다. 상충하는 두 가지 현상을 모두 해결하는 것을 '모순'이라 한다. 인류는 현재 '모순'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렇다고 더 많은 환경파괴와 오염을 방관해서는 안된다. 다만, 자신이 행하고 있는 철학과 사상이 '선'이라고 믿는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강요 할 수는 없다. '환경 문제'는 자칫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공급조절이 옳을 수 있다는 '정치사상'의 문제와 연결될 수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그렇다. '환경보존', '친환경'은 소비자의 가치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른 또하나의 비즈니스이고 '환경과 에너지'의 본질이 '재활용'된다는 심적 안도감보다 '덜 사용하는 소비 감소'가 우선되야 할 것이다. 수익성 없는 사업은 '자본주의'에서 퇴화된다. 결국 불필요한 과소비, 특히 일회용 플라스틱 등을 줄이는 것이 더 높은 확률로 환경을 살리는 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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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병 - 공감 중독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나가이 요스케 지음, 박재현 옮김 / 마인드빌딩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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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푸틴을 옹호하는 겁니까?'

'그래서 일본이 옳았다는 겁니까?'

'그래서 중국이 맞다는 겁니까?'

적잖이 이런 글을 맞이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올리거나, 한일합방이나 중국의 역사, 문화공정에 대한 어떤 글을 올리면, 이런 글이 달린다. 대중의 생각에 다른 시선을 올리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공감을 강요한다. 글은 차가워 보이지만 논지는 이렇다. 모든 일은 '있을만 해서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즉, 어떤 일이든 있을 법했기에 일어난다. 발생할 확률 49대, 일어나지 않을 확률 51이었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양쪽 균형이 완벽하게 같은 양팔 저울에서 한쪽으로 기울였다면, 단지 한쪽에 어떠한 무게가 더해졌을 뿐이다. 저울이 기울여지는 현상은 한쪽으로 무게가 더 실렸을 때 일어난다. 모든 일은 일어나야 할 필연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것은 선과 악을 따지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중력은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을 따지지 않는다. 그냥 기본적이 일정 원칙을 따를 뿐이다. 그것은 종교, 문화의 용어에 따라 '순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신의 계획'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연에서 존재해서는 안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49대 51의 극미한 차이가 있고 그것으로 현상은 일어난다. 존재할만하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다. 공들인 농사물이 갑작스러운 가뭄에 모두 시들어 버리거나, 존경할만한 이가 허망하게 죽거나, 내가 응원하는 정당이나 스포츠 경기가 이기고 지는 모든 일들, 내가 살고 있는 국가가 누군가에게 침공을 받거나 침공하는 일들, 노력에 대한 실패나 잔혹한 살인범이 무고한 아이를 죽이는 일들. 그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는 '가치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일어날 법한 일들만 일어날 뿐이다.

'공감'은 집단을 결집시킨다. 내부 결집은 다른 말로 외부적 배타성을 갖는 말이다. 자석의 한쪽 극이 강력해질수록 반대쪽 극은 극심하게 강력해진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을 같은 편으로 둔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작게는 '반대편'으로 두기도 하고 극심하게는 '적'으로 간주한다. 역사에서 결집과 공감은 곧 '전쟁'을 야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랬다. 내부가 통일되고 안정되고 결집되면, 이 에너지는 '공감'을 명분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고 '혐오'를 키웠다. 1467년과 1493년 '오닌'과 '메이오'의 반란으로 일본은 춘추전국 시대를 맞는다. 일본 내부에서 분열되어 각기 다른 세력을 갖던 시기는 100년 가까이 지속하다가 일본 전국이 통일되는 시기를 맞이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몽고의 징기스칸 또한 여러 유목민족을 통합하고 결속한 뒤, 세계로 뻗어 나갔다. 2차 세계대전의 히틀러 또한 공감과 유대를 명분으로 '혐오'의 감정을 갖고 밖으로 뻗어나갔다. 안타깝게도 공감은 배타성을 갖는다. 배타성은 혐오감정을 유발시킨다. 이것이 폭력의 원천이다. 어떤 전쟁도 명분이 없지는 않다. 현대 서구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라는 명분으로 여러차례 침략전쟁을 벌인다. 이것에 공감하지 않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배타성의 대상이 된다. 내가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현상에는 이름이 붙는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있을 수 없다', '나쁘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왜곡시킬 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어떤 현상이던 일어날만 했다.'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왜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지, 한국은 왜 일본에 병합됐는지, 중국은 왜 공정을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는 시도는 분명 가치 있다. 그런 시선을 갖는 것 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 그 행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언젠가 '황사'라는 현상에 놀라운 '언어유희'를 발견했다. 황사먼지가 중국에서 부터 날아온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다. 황사 먼지의 입자는 지름 1,000μm정도 된다. 이런 미세한 먼지가 기관지에 들어가면 병을 유발한다고 했다. 얼마 뒤, 황사보다 더 미세한 먼지에 대해 메스컴은 떠들었다. 바로 '미세먼지'다. 미세먼지는 지름 10㎛이하의 먼지를 이른다. 이처럼 미세한 먼지는 아이러니하게도 2.5㎛이하의 초미세먼지보다 크다고 했다. 즉, 더 가는 초미세먼지가 더 작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년부터 '극미세먼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는 0.1㎛이하의 크기라고 했다. '작다', '미세하다'는 것은 결국 '상대적'이다. 어떤 것을 '작다'라고 표현하기 위해선 '기준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애초에 '황사'를 기준으로 비교를 시작했으니, 더 작은 덩어리를 발견할수록 점차 용어가 희귀해진다. 만약, '극미세먼지'를 먼저 비교대상에 뒀다면, 황사의 명창은 '거대입자먼지' 쯤 됐을 것이다. 즉, 미세먼지 자체는 '미세하다'하지 않다. "무언가에 비교했을 때, 미세하다"라고 보는 것이 맞다. 모든 것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커다란 바퀴벌레를 보더라도 '명왕성'과 비교하면 '극미세'하고, 명왕성이라고 하더라도 '은하'에 비교하면 극미세하다. '공감'은 상대적이다. 어떤 것에 공감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가치판단을 요구하고, 공감하지 않는다고 정의하면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공격성을 갖는다. 지난 2022년 2월 24일부터 2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물론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같은 시기, 대한민국 남성 1400명 이상이, 여성 700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망'에 대해 돕지는 못할 망정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시나요?"하는 글에 대답하자면 이렇다. 물론 안타깝다. 다만 메스컴이 어떤 쪽을 비추느냐에 따라 더 극적이고 더 안타까운 것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망자보다 대한민국 자살자가 더 큰 관심이 필요할 수 있다. 모든 것은 '황사'와 '극미세먼지'와 같은 상대적 판단일 뿐이다.

모든 현상은 현상일 뿐이다. 그것에 공감하느냐 공감하지 않느냐를 강요하는 것 또한 다른 방식의 폭력이다. '선'과 '악'을 구분 짓는데, 자신이 '선'이라는 명확한 잣대를 이미 세워두고 상대의 가치 판단을 시험한다. 이런 행위 또한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모든 현상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냉철하게 그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훨씬 더 그 일에 대해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다. 내가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는 어떤 해결책도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일 뿐이다. 간혹 내가 이해범주 내에서 일어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상식불가', '이해불가'라고 말하지만 그 또한 일어날법한 일이들이고 그 문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현상이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내 이해 범주가 그곳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상을 현상으로 바라보는 일은 불필요한 '공감과잉'을 멈추고 세상을 폭력에서 부터 멀어지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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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국어1등급으로 만들어주마 비문학편(독서) - 최신 개정판 너를 OO1등급으로
김범준 지음 / 메리포핀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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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언어 영역 1등급을 받기 위해 읽기는 너무 아쉬운 책이다. 책은 문해력을 키워주는 책으로 더 가치가 있다. 후반부에는 기출문제를 맞출 수 있도록 나와 있지만, 전반부에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에 대한 설명은 너무 좋다. 같은 글을 읽어도 누군가는 이해를 하고 누군가는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다. 글을 읽었음에도 글이 머리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겉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해력의 차이는 '언어영역' 뿐만 아니라, 교과과목 대부분에서 성적차이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교과과목은 교과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서도 문해력의 차이는 다른 능력의 차이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같은 글을 보고도 누군가는 이해를 하고 누군가는 이해를 하지 못한다. 행정의 하달은 '공문'으로 이뤄진다. 규모있는 조직은 업무를 안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결정권자가 있는 위가 좁고 명령을 하달 받는 아래가 넓은 '관료제' 형식을 갖는다. 결국 소수가 다수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인 '문자 전달'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문자해석 능력은 조직관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모든 실무 공무원에게 전화를 통해 행정업무를 내리는 것이 아닌 것 처럼, 명령을 하달하는 자는 '글쓰는 능력과 읽는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상위 계층일수록 문자 이용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하다. 다음은 2022년 3월 고등학교 3학년 언어영역의 지문중 발췌다.

'행위자 인과 인론에서 리드는 원인을 '양면적 능력'을 지녔으며 그 변화에 대한 책임이 있는 존재로 규정하였다. 양면적 능력은 변화를 산출하거나 산출하지 않을 수 있는 능동적인 능력이다. 그리고 행위자는 결과를 산출할 능력을 소유하여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 변화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이다. 리드는 진정한 원인은 행위자라고 주장한다.'

눈으로 스쳐지나가거나 음성신호로 바꿔 놓는 단순 작업이 아니라, 그 의미가 이미지로 들어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마 위 예시를 한 번에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글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 '음독, 묵독, 시독' 등의 읽는 법을 사용한다. 자. 이제 내가 보여주는 3가지 단어를 살펴보자. 1번 'scrupulous', 2번 'precipitate', 3번 'daring'. 3번까지의 글을 여러분들은 눈으로 살폈지만,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있냐고 묻는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혹여 영어 능력이 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4번 'δικαιοσύνη'를 포함해서 들여다보자. 우리는 1번부터 4번까지 그 문자를 들여다 봤다. 다만, 그 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파악하지 못했다. 1번의 뜻은 '세심한', 2번은 '재촉하다', 3번은 '용감한', 4번은 '정의'라는 단어다. 이제 우리는 이 문자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대부분 문자의 활용은 '의미전달'있지 그것의 뜻을 번역해 내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는 신호등에 있는 빨간색 신호를 보고, '저것은 멈추라는 신호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즉시 멈춘다. 우리의 뇌는 '문자'를 인식하는 능력이 애초에 없다. 뇌의 처리 방식은 기본적으로 '이미지화'다. 즉, 빨간 불을 보면 즉각적으로 멈추는 동작을 취하는 것처럼, 'Stop'이라는 표지판을 보고서 즉각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Stop의 스펠링이 Stup!!이라고 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상황에 맞게 끔, 즉각적으로 멈추는 행위를 한다. '사랑한다'라는 단어를 보면 사랑의 감정을 이미지화 시키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보면 그 부정적인 이미지를 이미지화한다. 다만 앞서 말한 1번 'scruplous'를 다시보고도 세심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저 그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래 반복적으로 노출된 것에 익숙해진다. 즉, 자동차 양쪽 측면의 사이드미러를 살피고 왼손으로 기어 조작을 하며 오른 발로 '엑셀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밟는 동시적인 행위도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즉각적'으로 움직인다. '브레이크를 밟아야지'라는 의식보다 먼저 내 몸처럼 차를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자도 마찬가지다. 해외에서 10년을 살고 한국으로 왔을 때, 사람들의 인식은 대부분 이렇다. '영어 잘하시겠어요'. 하지만 나는 대답한다. '제가 사용하던 분야에서는 잘하고 그러지 않은 부분은 못하죠.'

얼마 전, 내 휴대폰 요금 서비스 중에 '선택약정할인제도'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뭔지 잘은 모르지만, 할인을 해준다니 신청했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선택약정할인제도'로 할인을 받고 있다고 상담사는 몇 번의 설명을 해주었으나, 수 년 째 나는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스마트폰을 변경하면서 수차례 내가 '선택약정할인제도'에 대해 읽고 찾아보고 묻고를 반복하다보니, 이제는 그게 뭔지 이해가 가능하다. 그전 까지는 내 머릿속을 겉돌던 '선택약정할인제도'가 나의 머릿속에 장착된 것이다. 이렇게 들어 앉은 단어는 마치 의식없이 여러 조작을 하며 복잡한 운전을 하는 운전자의 뇌와 비슷해졌다. 브레이크를 얼마나 밟아야 하는지, 핸들은 얼마나 틀어야 하는지, 주차 시에 좌측은 몇 번 봐야하고, 우측은 몇 번을 봐야하는지, 수첩에 적어놓고 하나씩 행하던 행동들이 모두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움직여진다. 이제 '선택약정할인제도'는 나에게 쉬운 단어로 인식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선택약정할인제도'처럼, '아 그런가보구나'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왜 그것을 해주고 있는지, 그것의 뜻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음' 정도를 눈으로 읽어 넘어간 것은 '읽음'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책을 읽을 때, 충분한 시간을 갖고 천천히 읽고 이해가 안되면 몇 번을 되뇌라고 말한다. 엄청나게 공감한다. 문장을 읽을 때, 한 번에 들어오지 않은 문장을 여러번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그 문장이 서서히 해체되어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얼마 전, '성경'에 관한 글을 썼던 적이 있다. 이 글에 기존 기독교를 믿는 분들은 되려 '쉬운말'로 바꾼 성경이 더 어렵다고 했다. 더 쉽게 바꾼 글이 더 어려운 이유도 이미 익숙해진 글에 대한 이질감일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는다. 문자를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저 묵독으로 '음'을 숨겼을 뿐, '음독'의 절차를 했을 뿐이다. 이는 구글번역기가 들려주는 영혼없는 '소리'일 뿐이다. 구글 번역기는 문자를 '소리'로 바꿔 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번역기가 읽어주는 글은 '감정'이 없고 '딱딱하며' 어감이 없다. 글을 쓴 사람은, 절실하게 글을 읽는 사람에게 무언가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럼에도 글을 읽는 사람은 그것을 전달받지 않고 구글 번역기 처럼 음성신호로 바꿔내기만 한다. 이것은 책읽기가 아니다. 사실 이것은 수학에서도 적용된다. '원주율'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주율을 이야기 하면 '파이'를 이야기한다. 파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3.14...'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원주율은 원의 지름이 길어질수록 원의 둘레도 함께 길어지는 일정 비율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은 그것을 모른다. 그저 그런게 있다고 겉으로 아는 척하며 넘어갈 뿐이다. 중학교 사회교과서에는 '로컬푸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분 사람들은 '로컬푸드'를 보고 '그냥 지역 식품인가' 하겠지만, 정확한 의미는 반경 50km이내에 생산된 농산물을 의미하며 장거리 운송을 거치지 않아 신선도를 극대화시키고 운송에너지를 최소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도 우리는 대부분 '내가 추측하는 범주'로 해석하고 이해해 버린다.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은 다음으로 넘기고 넘기다 보면 점차 부정확하게 문자를 이해하는 일이 많아지게 된다. 정말 오랫만에 공감되는 책이다. 단순히 수험생뿐만아니라 글과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읽어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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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공부 - 개나 소나 자유 평등 공정인 시대의 진짜 판별법
얀-베르너 뮐러 지음, 권채령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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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없이 어떻게 합의에 이를수 있는가? 갈등은 열린 사회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를 악보로 표현하자면, 주요 테마의 화성은 불협화음일 것이다. 모든 변화는 움직임을, 움직임은 갈등을, 갈등은 열기를 의미한다' -솔 앨린스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 민권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솔 앨린스키는 '민주주의'를 '갈등'과 '불협화음'의 체제라고 언급했다. 누군가는 그를 대중을 선동하는 좌파 선동가라고 불렀지만, 이런 모든 모습을 수용하는 것조차 어쩌면 민주주의일 것이다. 국민의힘 상임고문이자 전 새누리당 대표최고의원인 김무성 전 대표는 당내 계파갈등에 대해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란 원래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민주주의의 불완전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에 완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끊임없이 진보합니다." 이 두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고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것이다. 대단한 정당이 집권하거나 훌륭한 지도자가 탄생한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완성은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항상 다리 길이가 달라 삐끄덕 거리는 의자 위를 조심스럽게 앉아 있는 것과 같다. 마치 어느 쪽 방향으로든 쓰러질 것 같은 곡예사의 막대기 위에 접시가 겨우 균형을 잡으며 돌고 있는 것이다. '국민대통합'이란 말은 사실상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른 여러 '자유의사'들 이곳으로 힘이 왔다갔다 번갈으며 반복한다. 그러나 이런 불완전한 체제임에도 민주주의는 현 세대의 대세가 됐다. 이에 유시민 작가는 민주주의가 대세가 된 이유는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6세기 조선에서 대단히 위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하는 공공의 물건이고, 특정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이다. 그는 '천하가 임금의 것'이어야 하는 대세를 거스렀다. '황해도 관찰사'가 선조에게 올리며 이 '사상 다른 이'를 고발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사건의 시작되자, 정여립은 체포 직전에 자살한다. 그러나 선조는 정여립과 연관된 이들을 모두 제거하기 시작했다. 2년 간 약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생각 다른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체제안정'을 하는 것은 전체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즉, '국민대통합'이라는 말은 자칫 위험하게 해석될 여지도 있다. 민주주의는 효율적이거나 안정적인 제도는 아니다. 5년에 한 번 씩 전임 통치자가 했던 정책을 싹다 갈아 엎어 새로 시작한다. 사회적 비용이나 시간, 노력을 생각하자면 이처럼 비효율적인 정치방식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다. 생각 다른 이들과 공존하며 너 한 번, 나 한 번, 권력을 이양하고 양도 받는다. 이는 스포츠 경기와 비슷하다. 상대방의 골대로 골을 넣는 방법은 상대 선수를 모두 총으로 쏴버리고 터벅 터벅 걸어가 넣는 일이다. 그러나 스포츠 경기의 공은 일정한 규칙을 지키며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바쁘게 왔다갔다 하며 승리를 한다. 심지어 같은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 같은 팀의 다른 포지션 누군가에게 서스름없이 공을 넘겨 준다. 우리 팀끼리도 서로 공을 주고 받길 바쁘게 하다가 결국 한 골 넣고, 한 골을 먹히길 반복하며 경기는 진행된다. 이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 심판, 관중, 선수들이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뉴스에 아름답거나 멋진 이야기는 실리지 않는다. 그들은 보통의 대중보다 더 선한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욕을 먹는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후진적이거나 나쁘다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지만, 그 또한 '민주주의'의 한 조각이다. 지난 2021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워싱턴 DC의회의사당에 난입하는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었다. 이에 주 방위군의 투입됐다. 민주주의는 약속과 합의를 통해 비폭력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그나마 인류가 발견한 가장 선진적인 방식이다. 물론 우리의 과거 민주주의도 '폭력'과 '강요'로 얼룩져 있지만, 최소한 지금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동경해오던 여타 선진국만큼이나 성숙해지고 있다고 믿는다. 지난 민주당 경선에 졌던 이낙연 후보는 상대 경선 후보였던 이재명 후보에 지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불만이 있어도 약속은 약속이고 합의는 합의입니다.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어떤 스포츠 경기더라도 '목적'에 '맹'자가 붙는다면 어김없이 '폭력'으로 이길 수 있다. '축구경기'에 몽둥이를 지참하지 않는 이유는 상대도 나와 같이 규칙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경기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에 의해 감시를 받아야하고 이를 중재하는 심판이 있어야 하며, 경기의 룰을 최대한 따르겠다는 플레이어의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야 한다. 언제든 대통령을 욕할 자유가 있고 실행하는 권력에 반대할 권한을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며 표현과 사상의 자유 등 다양한 다양성을 인정하되 '법치'에 따른 규칙을 지키는 '문명'적인 권력이양 체제다.

도서는 대한민국의 정치보다는 미국 혹은 유럽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책이 말하고자하는 '민주주의'는 특히나 우리에게도 이미 적용되는 이야기들이었다. 포퓰리즘이나 독재와 같이 민주주의는 언제나 경계해야 할 내용들이 분명하게 있다. 지난 브렉시트 때, 나는 투자하던 회사의 주가 하락으로 꽤 큰 손해를 봤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될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지금에서야 그럴 수 있을 법한 일들이지만, 당시에는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거나, 트럼프가 힐러리를 이기는 일이 당연한 일은 아니였다. '설마, 그래도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언제나 틀릴 수 있음은 '민주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국가를 운영하는 '행정가'들은 가끔 '엘리트주의'를 말하곤 한다. 플라톤 역시 포퓰리즘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순수한 엘리트 주의를 이야기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교육'에 의해 가장 잘 정제되어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에 그 원리와 역사 등을 알아보고 살펴보는 것은 우리 대중이 앞으로 어떤 국가와 국민이 되는지 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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