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루츠 판 다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데니스 도에 타마클로에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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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예전부터 광활한 사막과 위험한 질병, 곤충들의 대륙이지만 언제나 유럽보다 위험한 곳은 아니었다. 14세기, 아시아에서 시작한 '흑사병'이 유럽으로 번졌다. 그때 아프리카는 비교적 유럽보다 안전한 대륙이었다. 페스트는 유럽의 인구 3분의 1을 죽었다. 비위생적인 양식과 들쥐는 유럽을 죽음의 대륙으로 만들었다. 유럽 사람들은 대륙을 떠나고 싶어 했다. 그들은 더 나은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5세기 중엽, 포르투갈 사람들이 아프리카 서해안에 도착했을 때, 어떤 점에서는 아프리카 대륙이 되려 평온해 보였을지 모른다. 페스트의 발병으로 유럽의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든 반면, 아프리카는 비교적 그 위험에서 안전했다. 아프리카에는 그 전에도 노예가 있었으나, 그들은 각 가족의 일부였고 다시 해방될 여지도 충분히 있었다. 아프리카 문명은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 문화적 발전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오기 전에 중국 사람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먼저 방문했다. 그들은 아프리카 동해안에 상륙해서 물건을 교환하고 돌아갔다. 중국이 대양을 넘어와 아프리카 대륙인들을 거래 파트너로 여겼을 만큼, 아프리카는 꽤 문화를 발전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입을 시도하진 않았다. 다만 문제는 유럽쪽이었다. 뒤늦게 유럽에서 온 상인과 선교사들은 군인과 함께 내륙으로 진입했다. 흑사병으로 유럽의 노동 인구가 급격하게 줄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있는 '노예'를 매매해 갔다. 노예들은 아랍 혹은 아프리카의 상인들에 의해 거래 됐다. 또한 아프리카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에 협조하므로써 꽤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넘어오는 경쟁은 유럽 내에서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독일 총리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84년에 유럽 열강 지도자들을 베를린으로 소집한다. 이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경쟁이 카오스적으로 치열해지자ㅡ 대륙 분할에 대한 협상을 제안했다. 당연히 여기에는 유럽 지도자만 초대 됐으며, 아프리카의 대표자는 제외됐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해방되는 과정을 보며 사람들은 '인류'가 '문화적인 방식'으로 진화해오고 있다고 믿는다. 아니다. 식민지가 해방된 것은 '인류애'와 '인권'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인도적인 어떤 이유나 문명의 발전에 대한 흐름이 없다. 오로지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 형성과 수지타산만 존재할 뿐이다. 간혹 유럽인들이 인도적인 이유로 식민지를 해방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다만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해방한 것은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인도적인 미안함이나 '문명인의 시선'이 아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통치를 포기한 것은 오로지 경제적 가치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무렵, 유럽 열강들은 고민이 생겼다. 산업혁명이 일어나, 인간의 노동력 일부를 기계가 대체하기 시작했고 기계는 인간보다 더 큰 생산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유럽 인구도 어느 정도 회복했으며 유럽에 저항하는 아프리카인들로 식민정부를 유지하는데 드는 경비가 늘어났다. 이제 유럽의 문제는 '공급'이 아니라 '수요'의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에서 포드를 중심으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면서 세계는 석유의 시대를 맞는다. 자동차와 석유의 시대의 핵심은 '컨베이어 벨트 노동'이다. 이로써 생산력은 극도로 높아진다. 미국에서는 기계는 쉼 없이 돌아가며 창고에는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다. 더이상, 노동자를 통한 '공급력 확대'는 불필요하게 됐다. 언제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던 공급이, 산업혁명을 발판으로 폭발하면서 급기야 수요는 공급을 따라가지 못했다. 생산된 물품이 쌓이자, 물품의 가격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품의 가격이 떨어지자 대략 해고가 일어나 실업률이 급증했다. 이 문제는 '미국'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이를 '세계대공황'이라고 부른다. 유럽과 미국은 경제에서 '수요'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많이 만들어내는 것보다 많이 '소비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서구 열강들은 자국내에서 만들어낸 생산물을 자유무역으로 거래하는 쪽의 이익이 크다고 계산했다. 그들은 종족적 연관성이나 문화, 언어를 염두하지 않고 국경선을 놓고 빠져 나갔다. 그 바람에 아프리카 대륙은 한 세기 가깝게 내전과 빈곤 등의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이로써 한 사람과 한 사람은 인간적일 수 있으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은 '인간성'과 얼마나 별개의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있다.

처음 노예 제도는 이처럼 야만적이지 않았다. 노예제도는 이미 아프리카에서 부터 존재했다. 이들은 빠르게 가족 안으로 통합되었고 시민권도 가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재산권을 가졌고 개중에는 해방되는 방식이 많아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기도 했다. 다만 유럽인들이 남북 아메리카에 플랜테이션 농업을 도입하면서 문제가 달라졌다. 이들은 새롭게 얻은 신대륙에 거대한 농장을 가졌다. 목화나 담배, 사탕수수를 재배하면서 기계가 할 수 없는 노동력의 필요를 느꼈다. 이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낮은 지위와 권리의 노예들을 반입하기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아이러니하게 가장 오랫동안 노예제도를 유지하던 국가는 '미국'이 된다. 따뜻한 남부의 농업은 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으나 북부 지역은 아니었다. 북부지역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같이 수요보다 공급력이 높았다. 고로 만들어내는 사람보다 구매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미국의 북부는 노예를 해방하여 높은 구매력을 갖길 원했고, 미국의 남부는 노예를 통해 높은 공급력을 갖길 원했다. 이렇게 미국의 남부와 북부는 이해관계의 갈등이 발생하고 이어서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따지고 보자면 링컨이 '노예를 해방했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그가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인도적인 정치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많은 사업자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노예 제도의 종말은 아프리카에서 능동적인 쟁취를 한 것은 아니다. 이는 유럽과 미국의 경제적 혹은 정치적 상황에 의해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현대 우리에게 꽤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인간은 '문명'과 '비문명'을 나누어 비교적 현대인들이 '문명인'이라 자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이 비인간성에 근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 '경제' 시스템의 논리가 언제든 '비인간적'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이익을 만들어 내도록 움직인다. 누군가는 인간의 비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 없는 '시스템'의 특성을 따른다. 인간이 만들어낸 시스템에는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다. 그런 이유로 인간의 역사에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비극과 야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도 전혀 다르지 않다. 법치주의는 다수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따른다. 법에는 예외가 없다. 가령 10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술을 먹고 자동차를 탔다고 해보자. 이것을 발견한 경찰은 상대가 적당히 아는 지인이거나 몸이 불편한 노인,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조사를 해야 한다. 그것은 법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따르는 일이다. 이것은 작은 사회에서는 분명 융통성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규모가 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예외도 용인해서는 안된다. 이런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비인간적인 역사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정교해진다. 고로 다시 비인간적인 역사는 지금도 언제든 다시 반복할 수 있다. 역사를 살피면 백인들의 만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을 보곤 한다. 이는 또다른 의미의 인종차별이기도 하다. '백인'이 사악하다는 의미로 역사를 접근하면 이 양날의 칼은 반드시 다시 돌아와 다른 인종에게도 적용된다. 고로 그 죄는 시스템에 있고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 인간은 개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시스템을 개조하는 것은 가능하다. 언제나 가능성이 열리기 위해선, 가능한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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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혁명의 미래 - 반도체를 넘어 인공지능으로
정인성.최홍섭 지음 / 이레미디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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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를 숫자 1이라고 해보자. B를 숫자 2라고 해보자. C는 숫자 3이라고 해보자. 이렇게 알파벳과 숫자를 대응시키는 방법으로 진행해 보면, 개(DOG)는 4, 15, 7이고 고양이(CAT)은 3, 1, 20이다. 문자가 숫자로 변환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색의 3원색이 있다. 흔히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이라고 하는 RGB다. 컴퓨터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은 이 삼원색이 만들어내는 수백만개의 픽셀로 되어 있다. 아주 작은 픽셀 점이 여럿 모이며 배합하여 다양한 색상을 만들어 낸다. 극단적으로 진한 빨간색은 R=255, G=0, B=0일 것이다. 무채색이라면 R=0, G=0, B=0이다. 이 말은 무엇일까. 앞서 문자를 숫자화 했던 것 처럼, 색깔을 숫자로 변환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제 고양이와 개의 사진을 살펴보자. 고양이와 개의 사진을 보면, 사진을 좌표라고 표시했을 때, 어떤 좌표지점에 극단적으로 '검정색'이 몰려 있는 구간이 있을 것이다. 검은색 픽셀이 몇 십 개 뭉쳐 있는 그 구간을 '눈'이라고 설정한다면 인공지능은 고양이와 개 사진에서 눈을 찾아 낼 수 있다. 이렇게 검은 픽셀이 모여있는 두 개의 좌표의 거리를 측정하면 고양이와 개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알고리즘의 대표 주자인 SVM에 대해 이해해 볼 수 있다. SVM이란 Support Vector Machine의 약자로 두 개의 집단을 나누는 적절한 구간을 찾아내는 알고리즘이다. 눈동자를 좌표 평면의 X축에 두고 코의 길이를 좌표평면 Y축에 두면 각자의 데이터는 좌표평면 내의 한 구간에 위치하게 된다. 여기에 개와 고양이의 데이터를 집어 넣는다. 그런 경우에 각 집단을 경계로 하는 평균 직선이 생겨난다. 이 직선은 새로운 데이터가 추가될 때마다 그 기울기 값이 변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학습'이라고 한다. 이 정도 원리로 개와 고양이를 구별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공지능'에 대해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수의 대중은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인공지능'에 대해 어느정도의 불안감은 해소된다.

막연하게 공포심을 갖는 것은 그것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잘 모르는 것에 공포심을 갖는다. 인간이 모르는 분야는 처음에는 자연과 현상이었다. 이것들이 인간의 이해 범주로 들어오면 인간은 그것에 대한 공포감을 상대적으로 덜 갖는다. 날씨나 천체, 질병 등이 그렇다. 그저 '신의 영역'으로 치부하여 이해를 거부하던 시기가 지나가면, 인간은 그것을 되려 안정적으로 이용하고 편안함을 갖는다. 미지(未知)나 무지(無知)는 그렇게 인간의 공포와 맞닿아 있다.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 온 것들은 이제 '안정'의 대상이 됐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과학과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이제는 인간을 편안하게 만들었던 '영역'이 되려 미지의 영역이 됐다. 다수의 인간은 날씨나 천체, 질병을 슬기롭게 바라보고 때로는 이용하기도 하지만 되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됐다. 이제는 인간의 영역 중에서도 미지(未知)나 무지(無知)의 영역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그 대표적인 예다. 전기선을 꼽으면 작동하는 전자장치가 인간과의 바둑 대결에서 승리하고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사물을 인지하면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공포심을 갖는다. 그것들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때로는 인간 위에 군림할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를 갖는다. 날씨가 그랬고, 질병이 그랬고, 천체가 그랬던 것처럼 모르는 것에 막연한 공포심을 갖는 이들 이면에는 그것에 대한 이해를 먼저하고 '안정감'을 통해 그것을 '활용'하는 이들이 있었다. 남들이 공포스러워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용기는 알고 있다는 안정감에서 나온다.

'나보다 똑똑한 누군가가 어떻게든 했겠지.'

막연한 생각은 이해를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어떤 원리로 인공지능 스피커는 정보를 찾고 말하는지, 어떤 원리로 기계는 '개'와 '고양이'를 구별하는지, 어떤 원리로 기계는 사람을 구별하고 인식하는지.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사용은 하되, 대략적인 원리를 모르며 막연히 그것을 두려워 한다.

'반도체 제국의 미래'를 쓴 '정인성 작가'의 책이다. '반도체 제국의 미래'는 정말 손 꼽히는 명작 중 하나다. 누군가는 '외계인의 기술'이라고 이해의 시도를 포기하는 '반도체'라는 분야다. '반도체 제국의 미래'는 이를 '이해'의 범위로 넘겨 주었다. 그의 다음 저서인 'AI 혁명의 미래'는 역시 걸작이다. 묵직했던 '반도체 제국의 미래'에 비해 가볍고 얇다. 그 탓에 조금 더 분량이 많아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복잡한 AI에 대해 일반인이 쉽게 입문할 수 있는 책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원리를 모르고 사용하는 것들이 많다. '전기'나 '스마트폰', '반도체'들이 그렇다. 인류의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가 사용하는 것들은 우리의 범주를 넘어선다. 그 말은 '기술'의 수요자는 거대하고 '공급자'는 한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고도화 될수록, 앞으로 수요자는 더 거대해지고 공급자는 더 한정적이게 변한다. 즉, 아예 이해를 시도하는 것 조차 두려운 이들이 많아 질수록 수요 공급 곡선은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한다는 의미다. 인공지능에 대한 내용을 알면 알수록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수학'에 관한 생각이다. 흔히 교육에서 '영어'는 쓸 일이라도 있는데, '수학'은 졸업하면 쓸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다만 느낀 것이라면 '수학'의 중요성이다. 우주는 수학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을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인공지능에 '수'는 엎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과목이라는 생각이든다. 수학으로 이뤄진 인공지능이 어쩐지 우주와 닮았다. 고로 최초에 인간이 자연과 현상을 두려워하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현재 해외에서는 'ChatGPT(챗지피티)'라는 오픈에이아이가 이슈다. 2022년 12월 1일에 공개된 대화 전문 인공지능 챗봇으로 꽤 수준 높은 질문과 답변이 가능한 프로그램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알파고'가 우리에게 주었던 공포와 비슷한 무게의 공포를 갖는다. 원리는 모르겠으나 무섭게 발전해가는 기술에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를 포기한다.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단순한 빅데이터의 평균치라는 허접한 수준의 정보만 갖고 있던 나에게 'AI 혁명의 미래'는 새로운 이해의 폭을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정인성 작가' 뿐만 아니라 자율주행 로봇 전문업체 '(주)맨드언맨드의 최홍섭 대표가 공동 저자다.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기술을 다루는 이들이 설명하는 '쉽게 설명하는 AI의 이야기다. 고동진 전 삼성전자 대표가 강력추천 할 만큼 책은 훌륭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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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조금 공부되는 만화
노재승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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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신라 시대 대표 향가다. 이름만봐도 머리가 지끈지끈 거린다. 이유는 이렇다. '제목'만 들었을 때, 현대인이 사용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배경지식 없이 '제목'만으로 이 시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다. 고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아이유의 '좋은 날'은 '제목'을 봐도 대략 무엇에 대한 노래일지 유추 가능하다. 다만 '찬기파랑가'는 익숙치 않다. 멜로망스의 'Happy Song'은 행복에 관한 노래일것 같다. Happy가 행복이고 Song이 노래이기 때문이다. '찬기파랑가'를 현대적으로 해석해보자. '찬기파랑가'의 '가(歌)'는 노래를 의미한다. 즉, '찬기파랑 song'이다. 제일 첫 단어인 찬(讚)은 찬양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기파랑을 찬양하는 song'이라는 제목이다. '랑(郞)'은 무엇일까. '랑(郞)'은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다. 흔히 말하는 '낭군(郎君)', '신랑(新郞)'에서도 쓰이는 말로 '~씨', '~군', '~옹'처럼 이름을 부를 때 쓴다. 영어로 굳이 바꾸면 '미스터(Mr)' 정도로 할 수 있다. 즉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현대식으로 굳이 바꾸면, 'Mr.기파를 찬양하는 노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가 무엇을 노래할지 감이 온다. 제목과 전반적인 분위기만 파악하더라도 시는 유용하게 해석이 가능하다. 분위기가 파악이 되면, '어조'가 느껴진다. '어조'가 느껴지면 어떤 표현 방식을 사용했는지 보인다. 교육청이나 평가원은 예전부터 고전시가에서 깊이 있는 문제를 출제하지 않는다. 꼬불거리는 고어와 한자로 3등급 이하의 학생들이 겁을 먹고 포기하기 때문이다. 굳이 문제를 어렵게 내지 않더라도 변별력을 만들 수 있다. 고로 '고전시가'는 의외로 쉽다. 수능에서 '고전시가'는 그래서 중요하다. '비문학'과 같이 끊임없이 '지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형이 아니라, 이미 '출제 되는 지문'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전시가'나 '고전소설', '문법'은 고로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수능 언어 영역 점수를 올릴 수 있는 유형의 문제다. 영어영역에서도 비슷한 유형이 있다. 내용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내용일치' 문제와 '도표', '분위기'와 '주제찾기' 등이다. 또한 '듣기' 영역이 그렇다. 이 문제들은 '단순 반복 훈련'만으로 단기간에 고득점을 올릴 수 있다. 이런 유형의 문제만 모두 맞춘다는 전략으로 접근하면 3등급까지는 무난하게 올릴 수 있다. '그래도 조금 공부되는 만화'는 그런 의미에서 중고등학생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으로 보인다. 단순히 '고전시가'에 대한 문학적 설명을 하고 있지 않고 B급 감성의 만화를 통해 흥미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노재승' 작가는 2006년부터 창신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쳐 오던 국어교사다. 그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하면 이야기를 재밌게 담아볼까 고민을 했다. 그 5년의 결과는 이처럼 만화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학생들에게 고전시가를 설명한다. 책의 제목은 '그래도 조금 공부되는 만화'이지만, 흥미의 물고를 틀어주기는 충분하다. 다양한 책을 읽다보면 처음 들어보는 주제를 접할 때가 있다. 간혹,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역사' 혹은 '양자역학', '유럽의 음악사나 미술사' 등이 그렇다. 처음 그것을 처음 접하면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관련된 유튜브 영상이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찾아본다. 그것들을 하나라도 보면 이후에는 책이 술술 읽힌다. 첫책이 술술 읽히면, 두 번째 책에서는 아는 내용이 조금씩 나온다. 책은 속독이 가능해진다. 세 번 째 책에서는 사색이 가능해진다. 내 생각을 붙여 볼 수 있다. 네번 째 책에서는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나 다른 관점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흥미'다. 대충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대략적인 내용을 알아야 흥미가 생긴다. 처음부터 어려운 책을 읽어갈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준에 맞게 흥미를 먼저 유발 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는 꽤 접근성 좋다.

구지가, 공무도하가, 청산별곡, 관동별곡.. 이런 시들은 '시험 문제'를 위해 만들어진 시가 아니다. 이것은 '학생'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성인'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문학이다. '고전'은 생각의 폭을 넓게 한다. '시' 또한 사고의 폭을 넓게 한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함축성'은 '여백'이 되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쥘 르나르'의 시 뱀은 몹시 짧다. 시는 이렇다. '뱀 너무 길다' 여기에 독자는 '뱀'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해석이 붙는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던 간에, 비어 있는 여백은 이처럼 수 만가지 생각할 거리를 독자에게 던져 놓음으로써 사고의 폭을 넓힌다. '고전시가'는 시간을 초월한 문학이다. 고로 우리가 생각할 거리는 더 할 나위없이 크다. 만화는 '좀비'가 튀어나오고, 각종 만화와 영화를 오마주한 재밌는 스토리를 배경으로 한다. 한 할아버지가 교육과 유머를 번갈아가면서 등장하기 때문에, 쉽고 빠르게 읽고 교육된다. 완독하는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고로 몇 회독도 가능하다. 고전시가가 어렵다면 이 책을 가장 먼저 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찬기파랑가

열치매

나토얀 ᄃᆞ리

ᄒᆡᆫ 구룸 조추 ᄠᅥ가ᄂᆞᆫ 안디하

새파란 나리여ᄒᆡ

耆郞의 즈ᅀᅵ 이슈라

일로 나릿 ᄌᆡᄫᅧᆨᄒᆡ

郞ᄋᆡ 디니다샤온

ᄆᆞᅀᆞᄆᆡ ᄀᆞᆺᄒᆞᆯ 좃누아져

아으 잣가지 노파

서리 몯누올 花判이여

열어 젖히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좇아 떠 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냇물에

耆郞의 모습이 있어라

이에 냇 조약돌에

郞이 지니시던

마음의 가를 좇으련다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를 花判이여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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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 - 생의 마지막 순간, 영혼에 새겨진 가장 찬란한 사랑 이야기 서사원 일본 소설 1
하세가와 카오리 지음, 김진환 옮김 / 서사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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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이라는 거죠. 출생지나 시대, 재해처럼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에 인생을 지배당한다는 건 불쾌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 입니다. 분노나 증오에만 집중하다 보면 직면하는 현실마다 본인만 더 힘들어질 뿐입니다."

하세가와 카오리의 연작소설,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 중, 이와 같은 대사가 있다. '부모'를 탓하는 이에게 하는 조언이다. '발상의 전환'. 어떤 생각을 해내는 일을 '발상'이라고 한다. 생각은 저절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스스로 해내기도 한다.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과 스스로 해내는 생각은 분명 다르다. 영어에서 '보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look'과 'see'가 있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look은 '감각동사'고 see는 '지각동사'다. 영어에서 '감각동사'는 자동사다. '지각동사'는 타동사다. 즉, 둘 다 '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look은 보는 '나'가 '주체성'을 띄고 있다. see는 '목적'을 보고 깨닫는 행위다. 다르다. 뿌옇게 쌓여 있는 먼지 밑 책을 보면, '책'을 'look'하는 동안에, 먼지는 'see'하게 된다. 둘 다 보는 것이지만, 하나는 보고자 하여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여지는 것이다. 인간의 눈이 그렇다. 눈 앞에 무언가를 보고자하면, 그것에 촛점이 맞춰지고 나머지는 흐려진다. 사진에서 이처럼 '피사체'를 선택하고 나머지 배경을 흐리는 것을 '아웃포커싱'이라고 한다. 포커스가 나가 있는 배경도 그러나 보여진다. 보고 있지 않아도 보여진다. 촛점을 옮겨 다른 곳을 바라보면, 옮겨진 촛점을 제외하고 다시 나머지가 흐려진다. 즉 본다는 것은 여러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다양한 것들은 '보여진다'. 책 테두리, 페이지를 잡고 있는 손, 손 등 위에 모공 하나 하나까지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보지 않고 '글자'를 본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글자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본다. 발상의 전환은 없는 내용을 있다고 망상하여 믿으라는 거짓 긍정주의가 아니다. 실재하는 것들 중에 다른 것에 포커스를 두고 나머지를 흐리라는 것이다. 쓰레기장에서도 피어 있는 꽃송이에 포커스를 맞추고, 전쟁통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인간미에 포커스를 두라는 것이다. 그것은 숨어 있지 않다. 그저 다른 것에 맞춰진 포커스 통에 흐려졌을 뿐이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자신이 불행해야만 하는 창의적인 생각들을 없애라. 슬픈 일을 겪거나, 실패한 이들을 보면 오롯하게 세상 모든 것에 포커스를 흐리고 '불평', '우울', '어둠'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날 그냥 가만 놔두시라고 해. 그게 나한테 가장 고마운 일이니까!"

부모님과 화해할 생각이 없는 이는 발악한다. 이에 '발상의 전환'은 소설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음악과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보신 적은 있습니까?"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죽은 사람의 '혼'을 데리러 오는 '신부름꾼을 '사신'이라고 부른다. 이들을 우리는 '저승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동양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비슷한 위치가 있다. 소설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에는 죽은 이의 혼을 데리러 가는 '사신'이 등장한다. 서양인의 외모를 하고 있는 '사신'이라는 소재를 통해 쉽게 '죽는 이들'로부터 주목 받는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쉽게 읽히는 라이트 소설이다.

오래 전에 개봉한 영화인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를 봤다. 꽤 예전에 개봉 했으나, 이제야 봤다.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와 싸우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영화는 '살인자' 없는 '살인'을 보여준다. 시각적으로 꽤 폭력적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 한 작품이다. 다만 예로부터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문화도 있다. 내세관을 가지거나 윤회관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도 했다. 인간은 '모르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인간이 모르는 것 중, 가장 모르는 것은 '죽음'이다. '정치인', '종교인', '기업인'을 비롯해,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해 본 적 없다. 누구나 겪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전무한 정보 덕분에 '죽음'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의 대상이 되곤 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다. '죽음' 뒤에 남아 있는 세계가 그렇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나는 이를 사신은 마중한다. 살면서 그럴 때가 있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나 자책 말이다. 흐려진 배경에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보이나. 마음이 정하는 포커스는 언제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언제라도 그 위치를 옮겨, 위를 향할 수도 있고 아래를 향할 수도 있다. 그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면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 살면서는 뭐든 수정하고 시도해 볼 수 있으나, 죽음 뒤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소설은 가볍에 읽을 수 있는 라이트 소설이었으나, '휘리릭'하고 넘겨 읽는 가벼움 속에 삶의 철학이 묻은 한 구절에 잠시 시선이 머문다. '그날이 마지막일 줄 몰랐다.' 그 말은 사실 우리 모두가 하게 될 말이자, 생각이다. 죽음은 대게 예고없이 다가온다. 그 대상은 '나' 혹은 '가족'이 될지, 그 시기가 당장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른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을 '시한부 선고 받은 이'처럼 대하고, 오늘 하루를 '시한부 선고 받은 이'처럼 살자.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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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한자력 - 1일 1페이지, 삶의 무기가 되는 인생 한자
신동욱 지음 / 포르체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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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기생충에 대한 평론으로 이와 같은 한 줄을 적었다. 예전 같으면, 유야무야 넘어 갔을 테지만 시대가 달라져서 평론은 '논란의 중심'이 됐다. 원래 글이란 읽힘이 쓰임이다. 고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워야 하는게 글의 핵심이라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실제로 '명징'과 '직조'라는 말은 쓸 일도 없고 써 본 적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편한 마음을 보이는 독자들이 더러있었다. 만약 가까운 친구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해보자.

"Kāore te kumara e kōrero mō tōna ake reka."

아마 상대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마오리족 언어로 겸손하라는 의미의 속담이다.

"고구마는 자신이 얼마나 달콤한지 말하지 않는다."

말을 듣는 상대가 '마오리족'이라면 의미를 바로 받아 드릴 것이다. 문화적 혹은 언어적 이질감이 없을 거라는 기대는 언어를 거부감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한자로 구성된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것이 '잘난 척'하거나 '권위주의'를 의미하는 것일까.

한자가 한반도로 전래된 것은 고조선 후기 쯤으로 한민족 건국 초기부터 공문서로 보편적이게 사용됐다. 현대 대한민국 국민의 90% 이상이 한자 이름과 성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명 뿐만 아니라 법학, 경제학, 인문학 등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 한자가 사용된다. 한자를 소통수단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이질감이 없다. 가만히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어 중에 이해하지 못 해야 할 한자어들이 있다.

사면초가(四面楚歌)가 그렇다. 사면초가는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의미다. 굳이 영어로 번역해 보자면 이렇다.

'The song of Cho Dynasty coming from all four directions.'

이 말은 언제 사용하는고 하면,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는 고립된 상태일 때 쓴다. 'The song'으로 시작하는 영문 뜻을 보면 도통 이 말을 사용할 일이 없어보인다. 다만 '사면초가'라는 말은 중학교 수준의 교육수준만 받으면 너무나 흔하게 사용되는 말이다.

'사면초가'가 본래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와 상관없이, 문맥상 주는 어감이라는 것이 있다. '명징'과 '직조'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다고 해도, 대략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문맥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꼭 '명징'과 '직조'가 아니더라도 정확히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사용하는 말들은 수없이 많다. 기독교인의 71%는 '아멘'의 정확한 뜻을 모르고 사용한다. 대부분의 불자 또한 '나무아미타불'의 의미를 모른다. 10대 대부분이 사용하는 용어인 '썸네일', '어그로', '손절', '오타쿠' 등도 모두 정확한 뜻 모르고 문맥에 맞춰 쓴다. 정확한 어원이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역시 많지 않다. 그러나 사용한다. 대략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문자를 읽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그 문자가 닮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실질문맹률'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문맹률은 1% 미만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글자를 읽을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실질문맹률'은 75%나 된다. 문장을 읽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 인간은 의사소통에서 사용하는 '어휘' 수준이 크게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저 문맥상 파악하고 이해한다.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고 있으면 사람들은 묻는다.

"무슨 뜻인지 알고 읽으시는 건가요?"

굳이 말하자면, 책에 있는 단어의 뜻을 모두 알고 읽는 것은 아니다. 문맥상 파악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실제로 '다정한 물리학'이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없는 '명사'들이 나온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하나씩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고 읽을 수는 없다. 앞과 뒤의 문맥을 보면서 그 의미를 유추하는 것이다. 한 때, 나에게 영어 회화 과외를 받던 학생이 물었다.

"'Take a rest, take a picture, take over, take out' 도대체, take를 뭐라고 해석해야 하나요?"

그건 알 수 없다. 그냥 문맥상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문맥상 이해를 위해서는 많이 읽는 수 밖에 없다.

"배가 아프다."

이 말은 신체의 한 부분이 아프다는 의미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전까지, 타이타닉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었다면 '배'는 운송 수단이 된다. 그것은 '단어'의 역할이 아니라 앞에 걸려 있는 수많은 문장들의 역할이다. 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에 제시된 명사를 기준으로 한자어는 우리말의 81%를 차지한다. '한자'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자는 '함축하여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굉장히 효과적인 글자다.' 그것을 공부하는 것은 '중국'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한자의 음과 대략의 뜻만 아는 것으로 효과적인 문맥상 의미를 유추해 낼 수 있다. 한자가 구성된 원리를 뜯어 살펴보면 '역사'는 물론 '철학'과 '인문학'을 배울 수 있다. 문자를 만들어낸 창작자의 해석뿐만 아니라, '사용자'만의 해석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 '여름 하(昰)'로도 사용하는 이 한자는 왜 여름을 뜻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해석하기에는 '해(日)가 바르게(正) 서있는 모양'이라고 해석한다. 실제 그 글이 만들어진 원리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그 의미와 철학을 넣어 볼 수 있다. 과거 한자 선생님은 女(계집 녀)가 들어간 한자는 몽땅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후 女(계집 녀)자는 '계집'이라는 단어 대신에 '여자'라는 단어로 바꿔 사용했고 실제로 '女(여자 녀)'가 들어간 한자가 모두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철학대로 학습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들이 많다. 그것은 부정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으나, 그만큼 주체적인 해석의 여지가 많은 글자라는 장점도 있다.

우리의 한자가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렇다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글자 하나당 하나의 음을 갖는 것이 기본적이 원칙이다. 옆나라 일본의 경우에는 '一日'라고 쓰고 '이치니치'라고 읽어야 할지, '스이타치'라고 읽어야 할지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같은 한 일(一)자가 들어가도 '一人'는 '히토리'라고 읽는다.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일본인들은 '명함'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라고 묻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일본의 한자가 하나의 음으로 소리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어찌됐건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를 '쓸'일은 많지 않다. 그저 음과 뜻을 대략 치환할 수 있는 정도의 문해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대략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흔히 'MZ세대의 어휘력'에 대한 내용이 자주 미디어를 통해서 보도가 되곤 한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사실 가격이라는 것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다수의 사람들의 문해력과 어휘력이 약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자력'이 값어치가 더 올라간다는 의미를 뜻한다. 한자는 앞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 문자'가 아니라, 경쟁력이자 미래 리더에게 필수적인 도구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 신동욱 작가의 '어른의 한자력'은 한자 교재라기보다 '신동욱 작가'가 한자를 보며 집필한 '에세이'다. 거기에는 자기관리에 관한 철학과 자신의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현대인들이 직장과 사회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던진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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