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반짝 에디션)
하야마 아마리 지음,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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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던 1년 뒤에 죽기로 결심한 사람의 이야기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잘 하는 것도 없는 작가가 어느날 갑자기 라스베이거스에서 죽기로 작정한다. 작가 하야마 아마리는 파견 사원으로 계약직 일을 하고 있었다. 이뤄 놓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몸무게 70kg에 3평짜리 조그만 방. 29살 여성은 서른이 되는 생일날을 죽기로 작정한다. 그녀의 삶의 목표는 '죽음'이다. 낮에는 평범한 파견직 회사원이고 밤에는 호스티스로 일한다. 주말에는 누드모델을 한다. 그 와중에 얻게 되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책에 담겼다.

삶이 무한하다는 착각은 누구나 갖는다. 고로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하고 싶은 것을 못하며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기도 한다. 삶의 유한성을 정하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사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조금의 부끄러움만 감수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많다. 예전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은 '한국'기자들에게 질문의 기회를 주었다. 그 행사의 개최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재차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에게 질문 발언권을 주려고 해도 아무도 거기에 질문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간단한 질문도 하지 않고 모르는 것도 잘 묻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질문을 하거나, 조금 큰 소리를 내는 등 '튀는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이 이런 면에서 비슷한 정서가 있다. 사소한 것에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꽤 정신적 피로를 갖는다. 아마리는 실제로 전형인 일본 여성이었으며 내성적인 편이었다. 그런 그는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겪으며 '죽음'에서 멀어진다.

개인적으로 '일본문화'가 조금 낮설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자신이 하지 못할 일을 해냈다는 용기를 얻는 과정과 직업이 '호스티스'와 '누드모델'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낮에는 '파견직 여사원'에서 밤에는 '호스티스'로 일한다.

'호스티스?'

일본에는 '호스티스'라는 접대문화가 발달됐다. 최저임금을 훨씬 웃도는 급여를 조금 더 쉽고 빠르게 벌 수 있다. 일본 소설을 보면 이 '호스티스'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우리나라 보다는 보편화되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혔다고 한다.

'호스티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나 또한 예전 일화가 하나 생각이 났다. 해외에서 학생비자로 체류하던 기간, 주 40시간을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학비는 고사하고 생활비이나 벌어 볼 요량으로 인터넷 카페를 뒤적거렸다. 일자리는 많지 않았는데, 낮에는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밤에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흔히 말하는 '꿀알바'가 있었다. 시급은 적지만 자신의 능력에 따라 하루에 2~300불까지 벌수 있다는 구인공고였다. 연락을 드리고 그곳을 찾았다. 만 스물 정도였는데, 도로변에 있는 건물 뒷편으로 또다른 형태의 건물이 나왔다. 그곳 3층으로 갔다. 거기에는 내 또래 젊은 남성과 여성이 보였다. 사장이 안내하는 곳에 도착하자, '노래방 기계'가 있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면접을 봤다.

사장은 물었다.

"학생, 여기 뭐하는 곳인지 알고 지원했어요?"

사장은 나에 대해서 묻지 않고, 업무에 관해서만 장황하게 설명했다. 업무는 간단하다. 손님이 오면 신나게 같이 놀아주면 된다. 기본급은 7불인데, 잘 하는 친구는 하루 300불까지 가져간다고 말했다.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난생 이런 세계가 있구나.'하고 느낀 날이다. 당연히 그 일은 하지 않았고 '현지 바'에서 '유리잔 닦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만 그때, 그곳의 상호와 분위기. 그것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죽기로 작정하면 무슨 일을 못할까. 작가 아마리의 생각이 그랬을 것이다. 나는 하지 못했다. 그녀는 호스티스에서 일한다. 죽는 날의 '라스베이거스'를 떠올리며 주말에는 누드모델로 일한다. 그녀의 그런 이중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때로는 통쾌하지만 그 목표가 결국 '죽음'이라는 점에서 씁쓸하기도 하다. 하고 싶은 것이 없던 이를 비로소 움직이게 했던 최종 목표가 '죽음'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누드모델이나 호스티스는 하나의 직업이고 법의 테두리에서 일하는 합법적인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뜻 선택하기 힘들다. 생각해보면 삶에는 죽음보다 힘든 것이 있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는 삶보다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다만 따지고 보면 '죽음'보다 힘든 것 조차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벌써 선택할 이유가 없어지기도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게 하는 수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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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잉 - 미래가 이끄는 삶, 보장된 성공으로 가는 길
안도 미후유 지음, 송현정 옮김 / 오월구일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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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스트홀리데이'는 '조지아 버드'라는 소심한 백화점 점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연히 자신의 삶이 시한부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남은 인생을 원없이 즐기기 위해 모아둔 돈을 갖고 유럽으로 초호화 여행을 간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는 언제나 과감했다. 조금의 후회도 하지 않을 탁월한 선택들을 한다. 무미건조했던 그녀는 삶은 그 뒤로 바뀐다. 주변인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주변인들은 그녀를 성공한 사업가나 거물이라 오해한다. 참 재밌게도 주변인들이 다르게 보자, 다른 결과들이 나온다. 이를 교육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 부른다. 타인의 기대나 예측이 현실로 실현되는 경우다. 다른 영화를 한 번 예를 들어보자. 영화 '아이 필 프리티'는 '르네 바넷'이라는 자존감 낮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녀는 외모에 대해 자존감이 았고 불안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우연한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친다. 그 뒤로 그녀는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믿는다. 실제 외모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녀의 자신감과 자존감은 끝없이 올라간다. 이는 타인의 시선을 바꾼다. 론다 번의 책 '더 시크릿'에는 확언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루어 질 것이다.'라고 미래형의 주문할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졌다'라고 현재형 주문을 하는 것이다. 믿는데로 이루어지는 현상은 단순히 '피그말리온 효과'나 '더 시크릿'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현상 중에는 '자기충족적 예언'이라고 있다. 이는 미래에 대한 자신의 기대나 예언이 현실화 되는 것을 말한다. 뇌는 미래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행동을 수반한다. 그리고 현실을 바꿔 나간다. 고명환 작가의 책, '이 책은 돈 버는 법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확언에 이야기가 나온다. 이미 충족됐다는 확언을 통해 미래를 먼저 결정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굉장히 독특한 특질이 하나 있는데, '무지(無知)'를 '지(知)'로 바꾸는 것만으로 차원 다른 실행력을 보인다는 것이다. 1957년 인류 최초로 '스푸트니크 1호'가 우주로 발사됐다. 그전에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우주탐사'를 '가능의 영역'으로 바꾸자, 후발 주자인 미국은 10년 만에 달착륙까지 성공한다. 챗GPT란 오픈AI가 공개되자 구글을 포함한 대기업들이 챗봇서비스를 무더기로 내놓기 시작했다. 전기차 상용화가 성공하겠냐는 질문에 '테슬라'가 답을 내놓자, 전세계에서는 무더기로 전기차를 만들어 냈다.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에 도전하는 것과 가능여부를 알 수 없는 것에 도전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눈과 뇌는 의외로 잘 속는다. 실제 이성과 공포영화를 보면 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뇌가 공포와 사랑의 두근거림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자주 웃으라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뇌는 거짓 웃음과 진짜 웃음을 구별하지 못한다. 자신을 속여 그렇지 않은 것을 '이미 이루어졌다'라고 믿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의미있다.

스티브잡스, JK롤링, 무라카미 하루키, 폴 매카트니, 미켈란젤로, 모차르트 등은 이미 자신의 성공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워렌버핏은 자신이 부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꽤 오컬트적인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심리학이나 뇌과학도 이를 증명한다. 손정의 회장도 자신을 '허풍쟁이'라고 밝혔다. 불가능 할 것 같은 일에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것은은 관념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뇌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별하지 못한다. 고로 미래의 모습을 확언하는 습관은 그것을 현실 세계에서 이루게 할 가능성이 높다. 나이가 많거나, 책을 많이 읽은 사람, 경험이 많은 사람의 선택을 신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래를 알게 되는 일. 그것은 '지식'의 영역이 아니다. 논리, 판단, 추론의 과정이 명확하지 않지만, 상황과 대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를 '직관력'이라 부른다. '여자의 직감은 무섭다', '불길한 예감을 틀린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곤 한다. 이는 언어로 설명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는 꽤 정확하다. 언어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모호한 것이 되려 정확할 때가 있다. 만물을 설명하는 '양자역학'이 정확히 떨어지지 않고 모호한 것도 그렇다. 자신의 직관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할까. 머릿속의 경험과 기억이 잘 융합할 수 있도록 머릿속이 비워져 있어야 한다. 깨끗한 유리병이 그 속을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듯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명상과 기도를 즐겨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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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완성시켜드립니다 - 쓰기의 기술부터 마인드셋까지, 원고를 끝내는 21가지 과학적 방법
도나 바커 지음, 이한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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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30일부터 햇수로 4년간 매일 포스팅을 했다. 어떤 날은 2개, 어떤 날은 3개, 못해도 하나는 무조건 했다. 글자는 2,000자에서 3,000자 정도. 2020년 10월 2일 잠들어 포스팅을 하지 못한 하루를 제외하면 하루도 빠진 적 없다. 스스로 독하다는 생각을 했던 건, 5권의 책 집필 도중에도 멈추지 않았다는 거다. 원고를 완성하고 잠들기 전에 다시 3,000자를 쓰고 잠 들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기간에는 밤 11시 59분 59초에 포스팅을 올리기도 했다. 주간 스케줄 일정이 꽉차면 '예약 발행'을 했다. 스스로 대단한 작가가 되기 위해 들인 습관은 아니다. 그냥 쓰다보니 쓰게 됐다.

중학생이던 시절, 국어 선생님은 '창작시' 숙제를 주셨다. 집필했던 창작시를 선생님께 드렸다. 그때 학교에는 OHP라는 기계가 있었다. 칠판 옆에서 빛을 뿜는 기계였다. Overhead Projector라고 투명 필름 위에 네임펜으로 글을 적으면 위로 향하는 빛이 거울에 굴절되어 칠판에 투사되는 형식이다.

국어 선생님은 이 기계에 'A+' 과제물들을 올려 놓으셨다. 친구들의 창작시가 하나 둘 소개됐다. 이어 마지막에 내 시가 소개됐다.

제목은 '시계바늘'.

시계바늘을 인연에 빗댔다. 앞서나가고 뒷쳐지고 있지만, 때가되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초, 분, 시침'의 관계를 인연에 빗댔다. 선생님은 '참 생각할 거리가 많은 시구나' 하셨다. 이어 "이 시에 왜 A+를 주었냐면..."하고 말을 하셨다. 다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반 친구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기 C-라고 적혀 있는데요?"

그랬다. 선생님이 투사하신 내 창작시에는 'C-'가 적혀 있었다. 아마 'A+' 사이에 실수로 내 시가 들어갔던 모양이다. 얼굴이 붉어졌다. 선생님은 무안함과 미안함을 숨기려고 하셨다.

"얘들아, 이거 A+ 줄까?" 아이들은 "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닥 자랑할 만한 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조용히 잊혀져도 좋았다. 선생님의 실수와 아이들의 반응으로 이 시는 2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시가 됐다.

짧은 순간이 뇌리에 밖혔다. 그해, 내 창작시는 C-를 받고 마무리됐다. 그 시가 'A+'였건 'C-'였건, 성적과 점수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 것이다. 연 소득 10원의 차이도 만들지 못하는 작은 수행평가다. 다만 그 순간이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 '글'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가 있다. 유명한 이들이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남길 때도 있다. 그 때마다 잊혀졌던 중학교 시절이 번뜩 지나간다. 특별히 충격적이거나 트라우마도 아니다. 그냥 불현듯 그 장면이 떠오른다.

어쩐지 A+들 사이에 실수로 올려진 C- 같은 느낌.

점수가 투사되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A+의 감동을 했을까. 운좋게 A의 사이에 속한 가짜의 부끄러움이 불쑥 들때가 있다.

읽고 쓰다보니, '진짜'들을 만날 때가 있다. 오랜기간 글쓰는 일을 동경하고 재능이 있던 이들을 우연히 만난다. 부끄럽게 그들의 글과 한데 섞일 때가 있다. 지금도 서점에는 잘난 사람들의 저서 중 내 글이 섞여 있다. 아주 짧은 순간, 중학교 시절 그 감정이 되살아난다.

언젠가는 '글쓰기' 강연을 부탁 받는 경우도 있다. C-의 강연이지만 나름의 노하우를 전달한다. 크게 대단한 것 없이, '그냥 쓴다. 쓰고 읽고 고친다.' 이것이 전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에게 오른발을 아래로 밀면서 왼발에 힘을 풀라고 하는 조언처럼, 이론적 조언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냥 습관이다. 그냥 매일 쓰면 되고, 형편없고 형편있고를 판단하지 않고 쓰면된다. 대단한 영감도 필요없고 엄청난 자기관리도 필요없다. 꽤 체계적인 시간관리나 글쓰기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필요없다. 그냥 쓰면 된다.

끓는 물에 면사리를 놓고 스프를 털어 넣고, 봉지는 쓰레기통에 던져 놓듯. 거기에는 철학도 이유도 없다. 그냥 '라면 먹어야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설거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제 해야 하는가. 왜 해야하는가도 필요없다. 라면 먹을 때, 냄비가 없을 것 같다면 하면 그만이다.

C-의 조언이 가끔 꽤 괜찮은 A+의 조언과 일치할 때가 있다. 그때는 잊혀진 국어 선생님께 얄미운 복수를 했다는 통쾌함을 갖는다. '도나 바커'의 '어떻게든 완성시켜드립니다'는 투박하지만 현실적인 글쓰기를 말한다. 이 A+작가의 생각이 C-와 닮은 구석이 있다는데서 다시 한 번 통쾌함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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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좋아하게 될 당신에게 - 미술전시 감상에서 아트 컬렉팅까지 예술과 가까워지는 방법 뉴노멀을 위한 문화·예술 인문서 4
김진혁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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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바닥에 총 7,000개의 사탕이 깔려 있다. 사탕의 총 무게 34kg. 누구나 이 사탕을 먹을 수 있다. 심지어 가지고 나갈 수도 있다. 그냥 관람객에게 사탕을 제공하기 위해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탕은 '무제'라는 이름의 설치 미술이다. '무제'는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의 작품이다. 그는 단조로운 설치와 조각으로 유명하다. 토레스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사탕은 그의 애인을 이야기한다. 1991년 그의 애인이 죽음과 가까워 졌을 때 몸무게는 34kg이다. 애인은 참여자들에 의해 죽음처럼 사라져 간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사탕은 여지 없이 다시 채워 진다. 사라진 연인의 존재를 매번 재생시키는 설치 미술이다. '김진혁 작가'는 이런 설치 미술을 '문학적 예술'이라고 말한다. 은유의 특성이 가득 담긴 예술이라는 말이다. 무게, 달콤함, 재생까지. 설치 미술은 단순히 전시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를 배경으로 다양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예술적 가치'는 '작가'가 아니라 '감상자'에 의해 달라진다. 난해하기만 한 현대미술은 어떻게 즐기는 것일까. 설치 미술이 난해한 것은 '작가'가 숨겨 놓은 무언가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기계가 담지 못할 '내면'을 담아야 했다. 사진기보다 정교하게 사물의 겉모습을 표현할 수 없다. 기술은 예술을 더 인간다워지게 바꾸어 놓았다.

일부 사람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공공미술'에 의문을 갖는다. 소중한 세금이 건축비와 설치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을 경제적 손익으로만 따지기에 우리는 인간이다. 공공미술은 환경을 쾌적하게 하고 서민의 정서에도 효과적이다. 파리 한복판에 지어진 볼품없고 쓸모없는 철제 탑을 사람들은 '세금 낭비'이자 '인간의 욕심'의 신물인 '현대판 바벨탑'이라고 불렀다. 다만, 이제와서 이 철제탑은 굉장히 중요한 '파리'의 상징이 됐다. 인간은 '의식주'만 가지고 살 수 없다. 매슬로의 욕구위계이론에 따르면 가장 하단에는 '생리적욕구'가 있다. 그 위로 안전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 '의식주'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 등 결핍 욕구는 충족시키지만 그 상단에 있는 성장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예술은 당연히 생리적 욕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예술은 인간이 의식주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상위 욕구를 충족한다.

꽤 값비싼 스테이크 집을 아이와 먹으러 간 적이 있다. 아이는 자신의 앞에 놓인 한 접시의 가치가 얼마인 줄 모르고 투정을 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계란 후라이에 간장, 밥을 비벼 먹었다. 가치라는 것은 가치를 알아 볼 때 생겨난다. 얼마나 훌륭한 요리사의 작품인지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맛을 얼마나 음미하고 가치를 알 수 있는지다. 단순히 대단한 사람의 작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인다. 가끔 7살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가지고 올 때가 있다. 혼자 보고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때도 많다. 단순히 유추할 뿐이다.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다가와 자신의 그림을 해석해 준다. 무엇을 그렸으며, 무슨 생각을 했고, 무엇으로 그렸는지를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한다. 듣고 있으면 내가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들이 나올 때가 있다. 꿈 이야기를 그렸을 때도 있고 가끔씩은 호랑이를 잡아먹는 토끼도 있다. 그것을 보고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반응한다. 그런 반응을 몇 차례하고 나면, 아이가 어떤 것에 영감을 받고 어떤 걸 주로 그리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아이의 그림에는 유독 의미가 없던 것들이 '내 아이'의 그림일 때는 그 의도와 생각이 궁금해진다.

'의도와 생각을 궁금해 보는 것'. 그것은 몹시 인간적이고 예술을 감상하는 주 포인트다. 건축가 페터 춤토르는 '페터 춤토르 분위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엇이 나를 감동시켰을까? 전부 다 이다. 모든 사물 그 자체. 사람들, 공기, 소음, 소리, 색깔, 물질, 질감, 형태."

조명은 어떻게 비치했고 색깔은 어떤 색을 사용했는지, 주변 음악은 어떤지. 그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그냥 '현상'이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의도를 가지는 행위. 그것이 예술이다. 작가의 의도가 가끔 해석자와 다를 수도 있지만, 그 의도를 생각해보는 행위가 예술이다.

미술 전시 감상에서 아트 컬렉팅까지 예술가 가까워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고로 '관심'이다. 내 아이의 그림이 다른 아이들의 그림보다 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내 아이의 그림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이의 그림에서 의도를 찾아 생각해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미술과 예술에 대한 관심은 작가와 큐레이터, 전시관의 의도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다. 음악과 미술 등 예술은 가끔 아무 말도 없이 사람을 위로 한다. 누구도 정확히 누군가의 마음을 정확히 위로하지 못한다. 다만 오로지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이다. 그 해석은 언제나 자신이 열어 두고 자신을 위로한다. 고로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많은 위로를 준다. 근처를 지나면서 한 번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제주도립미술관'을 아이들과 한 번 방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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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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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던 것을 잃는다. '상실'이라 한다. 상실은 '소유'을 전제로 한다. 소유하지 않으면 '상실'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면 끝에는 언제나 '상실'이 있다.

사람은 나면 죽는다. 극단적으로, '출생'의 방향은 '죽음'이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때와 장소, 이유와 방법만 다를 뿐 목적지는 같다.

태어나면 '하나'가 생겨난다. 죽으면 '하나'가 없어진다. 태어남이 '1'이고 죽음이 '-1'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만남이 '1'이고 이별이 '-1'이 되는 것 처럼 말이다. '태어남'은 반드시 '죽음'을 함께 한다. '만남'은 반드시 '이별'을 함께 한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다만, 모든 인간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었으며, 만나고 반드시 이별했다. 그것은 붙어다니는 두 개의 다른 점이 아니다. 하나의 직선이다. 기하학에서 물체를 늘리거나 구부려 모양을 바꾸는 것을 '위상동형(位相同型)'라고 한다. 쉽게 말해 반지를 양쪽으로 길게 늘려 빨대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빨대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입으로 빨아 들이는 구멍과 빨려지는 구멍이 있다. 분명 위와 아래에 구멍이 있지만 실제로 빨대의 구멍은 하나다. 빨대의 구멍이 '반지'와 위상동형이기 때문이다. 만남과 이별, 태어남과 죽음은 두 개의 다른 모양 같지만 공(空)이라는 비어있음의 위상동형(位相同型)이다. 모든 극단은 하나이지만 둘이고 반대이지만 붙어 있다. 이것이 '음양론'이다.

애초 모든 것은 공(空)하고 무(無)하다. 부처가 공(空)하다 하고, 노자가 무(無)하다한다. 그러함을 깨닫는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즈음에'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대목이 있다. 삶이 끊임없는 이별의 연속이라는 말이다. 이별에 촛점을 맞추니 삶이 온통 이별하는 것다. 다만 빨대의 반댓쪽 역시 하나의 구멍이라는 것을 보자면 삶은 끊임없는 만남의 연속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이처럼 공(空)과 무(無)의 위상동형(位相同型)이다. 전체를 보면 하나의 덩어리다. 그것을 길게 뽑으니 한 쪽만 부각되어 보인다. 태어날 때, 실 한오라기 갖고 나지 않는다. 죽을 때도 그렇다. '무소유'로 태어나고 '무소유'로 죽는다. 고로 삶에서 얻게 되는 것 중 속옷 한 장까지 모두 빌려쓰고 갚아 내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믿던 것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빌린 것들' 투성이다.

그것을 '자연'에서 빌렸든, '신'에게서 빌렸든, '내 것'이 없다. 잘 사용하고 돌려주려면 빌린 기간, 잘 활용하고 깨끗이 쓰다 돌려줘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빨대 반댓쪽 구멍이 여지없이 커진다. 상실감이 그만큼 커진다.

참 오만하고 무지하게 인간은 빠진 물에서 구해주면 '보따리'를 내놓으라 한다. 빈손으로 와서 '인연', '삶', '가족', '사랑' 모든 것을 빌려쓰면서 '감사하다'는 말 한 번 없다. 이러니 세상이 '다신 빌려주나 봐라' 괘씸히 생각해도 싸다. 받을 때의 감사함을 모르니, '상실감'만 커져 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여기서 색(色)은 존재(Thing)을 말한다. 공(空)은 비어 있음을 말한다. 즉 존재하는 것은 비어있는 것이고, 비어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쾌락이건, 사랑이건, 삶이건, 기억이건 모든 것은 현상하고 존재하지만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억울해 할 것도 없다. 빌려 썼으면 불평불만하고 후회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것에 감사하고 만족해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로 '소유'와 '상실'을 이야기했다. 소설이 가슴 먹먹해지는 이유는 후반부에 이어지는 '상실'들 때문이다. 따지고 들자면 소설의 전반부는 온통 '만남'과 '소유'가 이어진다. 누군가를 만나고, 인연이 된다. 그것은 인과관계다. 시작을 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많은 상실은 많은 만남과 인연을 뜻한다. 상실감이 많다는 것은 인생의 색(色)이 풍부하다는 것을 말한다.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하면 뿌린대로 거둔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이를 나쁜 쪽으로만 생각한다. 꼭 나쁜 짓을 하고 벌을 받을 때 사용한다. 다만 인과응보(因果應報)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는 원인이 있으면 그에 합당한 결과가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만남을 하면 이별을 하고, 태어나면 죽음을 맞이한다. 빨대의 윗구멍과 아랫 구멍처럼 이것은 이름을 두 개로 부르지만, 원인과 결과는 하나의 구멍일 뿐이다. 책을 읽고 먹먹하다. 인간의 감정이라 그렇다. 원리를 모른다면 자신만의 상실감에 사로잡힐테지만, 원인을 알고나면 담담하게 받아 드릴 수 있게 된다.

감사하게도 물건을 빌려 쓰게 된다면 비록 주인이 일찍 돌려 달라고 하더라도, 빌린 물건이 아무리 탐난다고 하더라도, 감사하게 썼다고 말하며 돌려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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