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외로움 수업 - 온전한 나와 마주하는 시간에 대하여
김민식 지음 / 생각정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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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면 수월해 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독학을 고집한다. 외로움도 그렇다. 혼자 극복하는 타성에 젖어 그것이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이라는 착각을 한다. 외로움은 일시적인 현상도, 비정상적인 감정도 아니다. 인정하자. 누구나 외로워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한다. 고로 함께 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 다들 괜찮아 보이는데, 나만 이런 감정이 드나 싶다. '외롭다. 공허하다. 쓸쓸하다. 의지하고 싶다.' 등. 인간 감정의 디폴트값이 '외로움'이기 때문에 인간은 발전했다. 외로움은 누군가를 찾게 했다. 함께 하고자 했다. 문명의 탄생이 경이롭다면서 외로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외롭다는 건 고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외로움이 없었다면 야생 동물들처럼 모든 성체가 온전히 자립하고 있을 것이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척척해 낼 것이다. 다른 동물들처럼 수렵괴 채집을 하며 오늘을 맞이 했을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갖고 있다.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다. 대상은 국가가 되거나, 종교가 되기도 했다. 외로움이 없다는 것은 믿고 싶은 이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믿고 싶어 한다. 상대의 이야기에 동화되고, 때로는 상대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결혼했다하여, 아이가 있다하여, 직장을 다니고 있다하여,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허한 마음은 채우면 사라질 것 같지만 다른 빈 공간을 늘리기도 한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극복'과 '해결'의 대상이 아니다. 인정하고 받아드리고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어쩌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인정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독서는 제 입을 닫고 상대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 하는 일이다. 적게는 2~3시간, 많게는 10시간이 넘게 걸린다. 지금 살펴보니 내 블로그도 쌓인 독후감이 800편 가까이 된다. 한 권 당 다섯 시간만 잡아도 5년간 4,000시간을 책 보는데 사용했다. 여기에 1,500편의 글을 적었다. 길게는 2~3시간, 짧게는 30분 시간을 내어 쓴다. 한 편 당, 한시간만 잡아도 1,500시간 사용했다. 햇수로 5년에 5,500시간을 읽고 쓰는데 썼다. '참 할 일 없나' 싶다. '유난히 외로움을 타나보네' 싶다. 1년 1000시간. 분명한 건, 이 긴 시간동안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동시에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상대했다. 그러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찌됐건 내 주변은 적막하고 조용했을 것이다. 조용하고 적막했지만, 수 백 명의 사람과 이야기했고 들었다.

'김민식 PD'의 책을 들었다. 벌써 다섯 권의 저서가 생긴 나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작가도 이 글을 쓸 때, 온전히 혼자였겠구나. 몇 권의 책을 집필하다보니 알게 됐다. 집필하기 위해서 작가는 온전히 혼자여야 한다. 글을 쓸 떼, 입은 다물어야 하고 주변은 적막해야 한다. 작가는 대게 많이 읽는다. 이들은 역시 입을 다물고 주변을 적막하게 둔다. 그런 농도 100%의 적막의 정수가 1인치 책에 쌓인다. 외로움과 적막의 극치가 바로 책이다. 나의 외로움과 고독의 시간은 그들의 그것과 합하게 된다. 사람은 사회적 지위나 상황, 환경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를 가진다.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자리에서 만나느냐, 어떤 위치에서 만나느냐, 어느 시간에 만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사회적 페르소나를 완전히 내려놓고. 오롯하게 스스로가 되는 시간은 유일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다. 글은 그것을 담는다. 평소 나는 농담을 좋아한다. 가볍고 어리숙한 사람이다. 다만 글에서 나를 만나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비성 나'를 소모하고 혼자 에너지를 충전하면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전부 진짜 나와 다르다고 생각할 때가 생긴다.

글로 첫인상을 알게 되면, 실물에서 느낌이 다른 경우가 있다. 아마 나도 그런 부류의 인간이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은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잘 정돈된 글에 비해 긴장해 있거나, 부담을 느끼고 있거나, 어딘가에 신경을 쓰고 있다. 여러 방해되는 감정은 페르소나 뒤에 숨게 한다. 사람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 고로 만남은 적절한 방식이 아니다. 그가 남긴 글과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모습을 읽는다. 책 좋아 하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많은 이유가 어쩌면 겉에서 보여지는 행동이 극일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온전한 나와 마주하는 시간에 대해 '김민식 PD'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딘가 내 이야기를 읽는 것 같다. 나이와 체면, 지위 모든 것을 제외하고 오롯하게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닮았다. 이것은 사실 반가운 부분이다. 서로 착용하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어 보면 같은 민낮을 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외로움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어딘가 좀 모자른 듯 해도, 따지고 보면 세상은 다 외로운 사람들에 의해 굴러갔다. 보와 댐을 짓고 토목공사를 하려면 많은 인간이 힘을 합하고 사회적인 활동을 해야 했지만, 상대성 이론을 쓰거나, 프린키피아를 쓰거나, 훈민정음을 쓰거나 할 때, 이들은 모두 아주 고요하고 적막한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 이제 외로운 것이 조금 모자라거나 불쌍한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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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근대인물 기행 - 한일 근대사 속살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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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년 10월 7일, '김낙순'은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는 부친에 이어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으로 집안은 대대로 명문가였다. 그 역시 스물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 이조판서 등의 관직 생활을 한다. 그는 외모와 능력이 출중하고 왕의 신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장이 뛰어나고 죽화도 잘 그렸다. 공평하고 정직한 성품을 가진 탓에 서인과 남인 양쪽에 신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어느날 정조는 신하들과 대화를 하다가 '김낙순'의 훌륭함을 알게 된다. 정조는 김낙순도 선조들같이 훌륭한 인물이 되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하나 하사한다. 그렇게 낙순은 '낙순'이 아니라 '조순'으로 개명된다. 김조순은 이후로도 정조와 돈독한 관계를 갖게 된다.

1800년, 정조는 세자빈을 간택하기 위해 후보자 명단을 받았다. 그 때, 명단 안에 김조순의 딸이 없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김조순'에게 말하여, 딸의 이름 또한 써서 올리도록 제안한다. 그렇게 김조순의 딸은 세자빈 후보자 명단에 올라가게 된다.

정조가 죽기 전, 그는 세자와 김조순을 불렀다. 그리고 세자에게 말했다.

'김조순의 보필을 받으면 결코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김조순은 항상 낮은 자세로 처신하곤 했다. 정조가 죽은 뒤에도 다르지 않았다. 김조순의 사람들 보고, 정순왕후는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그의 딸이 조선의 왕비가 된다. 그로써 김조순도 '부원군'의 작호를 받게 됐다.

이 때, 왕의 나이 11살,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은 정순왕후가 죽고 실권자가 된다. 그러나 1832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고도로 절제된 처신을 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관직을 모두 사직하고, 설령 관직에 임명된다 하더라도, 그날로 사직 상소를 올려 곧 사직 하곤 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철저하게 명예욕을 절제했던 김조순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멸망의 시작점이라 보여지기도 한다.

그의 가문은 이후로 승승장구한다. 그의 장남인 김유근은 이후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다. 여동생인 왕비에게 정치적 지원을 했고 인사권을 가졌다. 그가 가진 인사권으로 그는 집안 사람들을 주요 관직에 등용하기 시작했다. 왕비의 남동생인 김좌근은 늦은 나이인 마흔 두 살에나 문과에 급제한다. 그러나 4년 만에 이조판서까지 초고속 승진한다. 이는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왕비를 중심으로 오빠와 남동생은 이처럼 조선의 실권자가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키웠는데, 그 가문이 '안동 김씨'다. 안동 김씨는 11살 순조, 8살 헌종, 18살 철종, 12살 고종 등. 어린 왕들을 재위 시키며 세도정치를 이어간다. 그 가문의 성장이 곧, 조선 멸망의 초입이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조순'은 왕의 총애를 받던 충신이자 공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문을 연 인물로써 언급되기도 한다. 한 인물의 성품은 그 인물을 출세케한다. 한 인물이 출세하면 그 가문은 성장한다.한 가문이 성장하면 되려 때로는 망국의 씨앗이 된다. '좋다'와 '나쁘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역사에서 언제나 등장한다.

반대쪽에서는 비슷하지만 다른 일이 있었다. 1837년 일본 에도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태어났다. 12세기부터 일본은 막부체제에 의해 운영됐다. 쇼군이라고 불리는 무인들이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 600년이나 지속된 막부 정치는 19세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요시노부는 사직하게 된다. 그리고 막부는 폐지된다. 일본의 정치는 이후 '메이지 신 정부'로 넘어간다. 메이지 정부는 과거 국가모델을 폐지하고 근대국가를 모델로 개혁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선택이 막부를 폐지하고 신체제를 시작하는 시작점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에야스는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 막부를 열었고, 나는 막부를 없애기 위해 쇼군이 되었다."

'39인의 치열한 삶은 어떻게 양국의 운명을 갈랐나'. 박경민 작가의 '한일 근대 인물 기행'의 표지에 이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절묘하게 이 책을 설명할 문구가 떠오르지 않는다. 흔히 역사는 흐름이라고 말한다. '흐름'이라는 단어에 빠져 들면, 그 속에 담긴 '개인'의 이야기는 가려지곤 한다. 역사는 형태없이 흐름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무수하게 많은 개인의 흥망성쇠가 담겨져 있다. 때로는 누군가의 흥이 결과적으로 망이 되고 누군가의 성이 결과적으로 쇠가 되기도 한다. 이것을 들여다 볼 때, '새옹지마'는 인생사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 같다.

어떤 개인이 성공하고 어떤 개인이 실패를 했느냐, 어떤 집안이 성공을 하고, 어떤 집안이 실패를 했느냐. 문명 발전 단계의 격차는 이처럼 작은 선택과 결과들로 만들어졌다. 조금씩 쌓이고 모여 역사가 됐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이 아니라 연속되는 사건과 현상의 결과들이다. 이 책은 역사를 흐름이 아니라, 서른 아홉의 개인의 이야기로 서술한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그 집안의 비극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정변 실패로 연결된 수많은 개인들이 자살하거나 죽는다. 이런 개인의 비극과 개인의 희극은 때로 역사가 된다. 다만 그 곁가지로 설명되는 개인의 희비들을 모두 쳐내고 나니, 흐름이라는 형태만 남는다. 강이 흐르기 때문에 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물이 움직이니 강이 흐르는 것이다. 역사는 어떻게 흐르는가. 가만히 살펴보니 개인의 운명이 국가의 운명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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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로 삶의 지혜를 얻다 - 그림책 읽는 시간
김수민 외 지음 / 프로방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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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되면서 가장 크게 바뀐 것 중 하나는, 당근을 먹는 일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이렇다. 어린 시절 나는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었다. 숟가락에 흰 쌀밥을 떠올리면 어느샌가 흰밥 위에는 고기나 햄이 얹어 있었다. 부모님이 잽싸게 밥 위에 소시지 반찬을 올리셨다. 당근이나 양파 같은 야채가 올라가는 경우는 없었다. 먹지 않는 나에게 '고기'를 올리는 것이 그나마 회유였던 것 같다. 어느새 아이의 숟가락에 고기를 얹고 나면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은 '당근'과 '양파'다. 부모님은 야채를 많이 먹어야 건강해진다고 했는데, 마흔에 가까워져서야 야채를 먹게 됐다. 따지고보면 부모님이 숟가락에 얹어도 넣지 않던 야채를 아이는 너무 쉽게 넣게 하는 샘이다. 그거 말고 무엇이 있을까.

아침이 되면 어머니의 목소리는 알람보다 먼저였다. 어머니는 알람을 맞췄음에도 항상 그 보다 먼저 나를 깨웠다. '1분만 더'를 몇 번하다가 투덜대며 식사 자리에 앉는 일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지지 않으면 나보다 아이가 늦는다는 생각에 머리끝이 쭈뼛하고 선다.

적당히 지저분해도 좋았던 방도, 아이의 장난감과 간식, 옷가지가 섞여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내것 치우기도 벅찬 생활 습관은, 더러 아이의 것까지 치우며 말끔히 고쳐졌다. 원래 책을 좋아했지만, 아이와 함께 살면서 엄청난 다독가가 됐다. 아이에게 책 읽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더 지독한 책벌레가 되게 했다. 자기 전에 스마트폰을 꺼버리고 아이와 누워서 책 보는 습관은 아이게만 좋은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고보니 사람은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아이에게서 길러지는 모양이다.

아이와 누워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함께 본다. 아이를 위한다는 행동이 꼭 아이만을 위하고 있지 않을 때가 있다. 어릴 때 분명 들어봤던 이야기였는데, 아이와 함께 읽었더니 생소한 이야기도 있다. 어떤 이야기는 순수하게만 읽혀지지 않는 책도 있고, 어떤 이야기는 짜임이 탄탄함에 감탄하기도 한다. 아이에게 읽어주느라 연기력과 발성 연습, 발음 교정이 모두 되기도 한다. 최근에 아이와 읽었던 책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책이다. 분명 이 이야기를 읽었음에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도무지 기억에 나질 않았다. 차근 차근 아이와 이야기를 하며 동화를 진행하자, 이야기는 아이가 아니더라도 빠져 들어가는 이야기었다. 아이와 함께 동거하면 이처럼 아이가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이 나조차 교육시키는 경우가 많아진다. 아이는 '겨울왕국'이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최소 30번은 넘게 봤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겨울왕국의 주요 대사는 이제 완벽하게 외웠다. 주요대사 뿐만 아니라, 주요하지 않은 대사도 거의 암기하다시피 했을 정도다.

아이와 이처럼 동화나 그림책, 만화를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워킹데드', '수리남', '프리즌브레이크',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을 보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좀비가 되어 사람을 죽이고, 마약을 하거나, 감옥을 탈옥하고,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를 머릿속에 채워 놓고 살았을 나의 30대는 아이로 하여금 깨끗하게 리프레쉬 됐다. 오늘의 나는 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하는 동화와 공주님이 왕자님을 구하는 만화를 보고, 오누이가 엄마를 구하거나, 엄마가 아이들을 구하는 영화를 본다. 거기에는 흉측한 좀비나 마약이 아니라, 호랑이나 늑대 정도가 나올 뿐이다.

'작은 이야기로 삶의 지혜를 얻다'는 '김수민, 송진설, 차은주, 최서원' 작가의 수필이 돌아가며 쓰여진 글이다. 이 책은 동화를 읽는 초보 엄마의 사연부터 시작해서 부모와의 이야기 자녀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한 그림책에 대한 애정도 적잖게 담겼다. 어린시절 재밌게 읽었던 '좋은 생각', '연탄길'이라는 잡지와 책에서 처럼 훈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다. 극적이고 반전이 있고 통쾌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잔잔하고 일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사람들은 가끔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더 큰 위로를 줄 것이라고 여길 때가 많다. 다만 성인들도 그림으로 하여금 더 큰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우리를 감상적이게 하는 것은 '백과사전'이 아니라 나무 끝에 달린 빨간 낙엽이다. 그 낙엽은 너무나 단순하고 스스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하게 한다. 아이들과 함께 보는 동화에는 어른들의 책처럼 생각해 볼 거리가 많다. 아이들과 읽어주고 있지 않다면, 잽싸게 메모하고 싶은 아이디어도 적잖게 떠오른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따지고 보면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리석게도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여기지만, 아이는 나의 입에 당근을 넣게 하고, 게을러지지 않게 하기도 하며, 모범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예전 햇님과 바람의 동화가 있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이야기였는데, 이 이야기에서 바람이 벗기지 못한 옷을 햇님은 은은한 볕으로 벗겨냈다. 모양은 다르지만, 어쩌면 우리는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아이에게로 넘겨짐으로써 또다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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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예측, 부의 미래 - 세계 석학 5인이 말하는 기술·자본·문명의 대전환
유발 하라리 외 지음, 신희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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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가 아니라, 마크 주커버그를 존경하고. 십자가가 아니라, 사과 표식을 추앙하며, 신이 아니라 구글에게 묻고, 교회나 성당이 아니라,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서 연결된다. 그들은 신 만큼이나 우리를 이해하고 있으며, 우리를 조종하고 있고, 우리의 정보를 갖고 있다.

과거 인간은 'GOD'에게 의존했다. 다만, 현대 우리는 'GAFA'에 의존한다. Google, Apple, Facebook, Amazon. 이들은 새 시대 종교처럼 여겨지고, 과거 종교가 우리에게 끼쳤던 영향력만큼 영향을 끼친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많이 알고 있고, 주변을 독점하여 '유일신'으로 전지전능하게 됐다.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가. 다섯의 석학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에 이야기를 들어본다. 참 다행이도 언급된 석학들 중 절반 정도의 저서는 이미 읽었다.

미국의 건국이념. 미국은 청교도에 의해 세워진 국가다. 근면과 절약에 의한 부의 축적을 지향하는 국가다. 신에게 그 영광을 돌렸다. 청교도, 그 윤리가 현대 미국 자본주의의 정신을 만들었다. 다수의 백만 장자가 사회의 주류가 되는 공평한 사회. 그것이 미국 건국 이념이다. 다만 이제는 조만장자 한 둘이 나머지 99를 노예처럼 착취하는 사회가 됐다. 이 소수는 지나치게 세금을 적게 내며 다수의 공적 이익을 침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2008년 금융 위기, 그 이후 10년간 월마트가 낸 법인세는 640억 달라였지만, 아마존은 14억 달러 정도뿐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고용창출의 효과와 영향력을 말하기에 앞서 이들은 가장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한의 인력을 착취하는 피라미드 최상단에 섰다.

착취 당하는 99명의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가장 존경한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말했다.

'미국은 보통 인간을 사랑한다.'

현대의 미국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나. 현대의 미국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 '제프 베이조스'를 사랑하지 보통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슬프게도 다수는 99이며 그들은 사랑받지 못한다. 승자 독식 경제에서 성공한 소수가 되지 못한다면, 평범한 이들은 하잘것없는 존재로 전락된다.

GAFA가 성장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자'가 아니라 '상품'이 됐다. 우리가 사용하는 플랫폼 기업들은 이용자들로부터 이용료를 받지 않는다. 이들은 다수에게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광고주들로부터 이용료를 받는다. 즉, 광고주 입장에서는 '이용자'는 상품이다. 그들은 이용자가 많은 플랫폼 기업에 더 많은 광고비를 낸다. '소비자'가 아니라 '상품'이 되버린 다수의 인간은 저도 모르게 플랫폼 안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데이터를 쌓아준다. 인터넷을 통해 메일을 주고 받고, 뉴스를 읽기도 하고, 검색을 하거나 쇼핑을 한다. 동영상을 보거나 음악도 듣는다. 플랫폼 기업들이 필요로하는 정보를 열심히 쌓아주는 무급 노동력 제공자로써의 역할도 충분히 한다. 이렇게 다수의 인간이 쌓아 놓는 데이터는 수십억 달러로 바뀌어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계좌로 들어가나.

글을 쓰거나 사진을 올리고 '좋아요'를 클릭한다. 이 과정에서 스타는 탄생한다. 이런 '인플루언서'들은 조회수와 클릭수, 구독자수를 늘려서 굉장히 성장하기도 한다. 다만 이처럼 유튜버, 인스타그램 스타, 페이스북 인플루언서 들이 얻는 수익은 플랫폼에서만 이뤄진다. 즉 플랫폼 기업은 '카지노', 인플루언서는 '잭팟' 터진 고객 정도다. 실제로 소수의 인간이 잭팟이 터지면 다수의 대중은 꿈과 환상, 기대만으로 플레이한다. 가장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는 쪽은 당연히 카지노다.

대부분의 사람은 경제학자들이 '시장'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라 말한다. 다만 경제학자들이 정작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공익'이다. 공익에 이바지하는 것이 '경제'의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썼으며, 사람들은 그를 '경제학자'라고 규정한다. 사람들은 그의 논리 목적이 단순히 '돈 버는 사회'로 치부한다. 다만 애덤 스미스는 '사회과학자'였고 '철학자'였다. 그는 사회가 공공으로 이익을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스템에 관심을 두었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돈이 최고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멀지 않은 미래, 인간은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현금과 같은 돈의 개념이 달라지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소득이나 돈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오더라도 '경제'와 '자본주의'는 그 모양을 다르게 하고 존재할 것이다.

비트코인의 미래, 기술과 자본의 미래, 문명의 전환, 부와 권력의 지각 변동. 세계 석학들은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대의 종교가 된 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질서를 잡을지, 미래에 대한 흐름을 알 수 없는 우리는 그 안목을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함께 지켜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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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을 헤엄치는 법 - 이연 그림 에세이
이연 지음 / 푸른숲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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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마법의 비행'을 보면 새가 어떻게 방향을 찾는 지를 설명한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본능으로 알겠거니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새는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안단다. 우주나 별, 이런 건 인간 만의 사유물처럼 생각했는데, 철새들도 금성을 보고, 달을 보고, 목성과 토성을 본단다. 그들을 '새 대가리'라고 부르는데, 언어도 글도 없이 별자리를 알아본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보고 방향을 안다는 것이 놀라웠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시내에는 와이테마타 항과 연결되는 하버 브릿지가 있다. 거기를 건넜다. 다리를 건넌 이유는 아르바이트를 위해서 였다. 배고픈 유학생 시절, 알고 지내던 친한 동생과 '정원 정리' 아르바이트를 했다. 정원은 하버 브릿지를 넘어야 했다. 한 번 정리하면 둘이서 100불을 받았다. 빵을 사먹을 돈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유학시절이었다.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면 주중에 식사만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없었다.

그 주간은 10센트까지 탈탈 털어 식비로 사용했다. 수중에 0원이 남은 날이었다. 빈손으로 버스정류장을 갔다. 그곳에서 함께 일할 동생을 만났다.

"너 얼마 있어?" "나? 8불."

녀석은 갈 때 4불, 올 때 4불하여 정확히 8불만 쥐고 있었다. 녀석의 가난도 당연했다.

"가서 50불을 받으면 5불로 줄께. 4불만 빌려 줘."

그렇게 그는 들고 있는 8불 중, 4불을 넘겨줬다. 버스가 출발했다. 하버 브릿지를 지나가던 것까지 기억 났다. 그 뒤로 기억이 없다. 잠깐 눈을 감고 떴는데, 버스는 주택가를 지나고 있었다.

뉴질랜드의 주택가. 동서남북 똑같은 주택, 똑같은 정원, 똑같은 풍경 뿐이다. 동생을 급하게 깨웠다.

"야! 여기 어디야?"

친한 동생은 눈을 겨우 떴다. 그러곤 주변을 살폈다. 지나왔는지, 도착 전인지 가늠이 되진 않았다. 급한 마음, 놀란 마음에 버스에서 황급히 내렸다. 그냥 타고 있었어야 했다.

어딘지 모를 뉴질랜드 어딘가.

잠 깨고 공기 좋고 볕 좋은 어딘가다. 그때의 막막함. 수중는 한 푼도 없는 막연함. 아르바이트하면 생길 100불도 역시 없다. 개운하게 일어난 걸 봐서, 분명 멀리 온 듯 했다. 그 때 함께 내렸던 동생은 주변을 살피며 위치를 가늠했다.

"알면...? 별 수는 있고?"

그는 방향을 알고 걸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내키는 대로 걸자고 했다. 내가 맞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틀렸고 결국 그도 그냥 걷기로 했다. 버스는 아침에 탔는데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봤다. 대략 10시간은 걷지 않았을까. 그때 느꼈다. 생각보다 인간은 똑똑하지 않구나. 이런 일로 인간을 대표해서 송구하지만 바보 같은 두 유학생은 생각도 대책도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건물도, 특별한 지형도 없었다. 있었다고 별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복사 붙이기 한듯 반복하는 뉴질랜드의 어느 곳, 우리 뿐만 아니라 새들도 있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꽤 적당한 타이밍이 아닌 시기와 공간에 기회를 만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것을 마주한다고 해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이 적지 않다. 뉴질랜드에서 무수하게 길을 잃었고, 서울, 싱가포르, 시드니, 태국, 베트남에서도 길을 잃었었다. 그때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냥 걷기'다. 방향을 가늠하지 않기. 그냥 걷기. 일단 그냥 무식하게 걷고 본다. 그려면 최소 10시간이 걸리던, 11시간이 걸리던 집에는 도착했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 어차피 집이다. 여행은 더 멀리가고 더 오래 있을수록 남는 거라고 했다. 과거에는 목숨을 걸고 떠났겠지만 이제는 객사하려고 해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스마트폰도 없고 지도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이 집신발 한 켤레와 요기꺼리, 여벌 옷 정도 들고 나갔을 그들에 비하면 꽤 대단한 것들을 들고 여행하는 편이다. 그렇게 걷다보니 깨닫는 것이 있다.

무식하게 걷는 것이 결국 굉장히 현명한 방법이었다는 사실. 지금도 나는 10시간 헤매던 골목과 골목, 구석과 구석을 안다. 두 발로 그 시공간을 통채로 학습한 거다. 목적지를 향해 최단거리로 가는 것 보다 더 많이 알았다. 최단거리로 이동하면 이동거리가 되지만, 더 길고 복잡하게 가면, 그것은 여행이 된다.

남는 건 시간 뿐, 넘치는 건 체력 뿐. 갔던 길을 몇 번을 돌고, 지난 길을 몇 번을 되돌아가도 괜찮다. 여행의 묘미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지, 도착 시간이 아니다. 어쨌건 여행은 시간을 포획해 머리속에 가두고, 체력을 길러 준다. 15년이 지난 이야기다. 15년이 지나고 보니, 3시간을 걸으나, 10시간을 걸었거나 큰 손해가 아닌 것 같다.

인생은 소름끼치도록 길다. 고통스러울 것 같은 순간도 소름끼칠 정도로 찰나다. 손해나 이익도 인생 전체로 보니, 별반 차이가 없다.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 1호가 처음으로 지구를 향해 몸을 틀었을 때, 우리를 향해 보내온 사진은 광활한 검은 배경에 파란 점 하나였다.

해 보니 별 거 없더라.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 그런 것들을 깨달을 수록 그런 자신감이 생긴다.

'앞으로 더 멀리가도 괜찮겠어'

그것은 이동시간이 긴 사람의 깨달음이 아니라, 여행자의 깨달음이다.

결국 가야 할 길이 60억km라면, 5km던 50km던, 무슨 차이가 있으랴.

'메리츠 자산운용'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 주식이 6만원이던, 9만원이던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50만원에 팔거라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말들이 희화화 됐지만, 그 말은 일리있다. 누군가로부터 듣을 것이 아니라 젊은이가 직접 깨달아야한다. 최단거리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더 멀리 떠나도 사실 별거 없더라'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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