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마켓 - 네 번의 금융위기에서 발견한 부의 기회
러셀 내피어 지음, 권성희 옮김, 송선재(와이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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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이 언제나 기업 마진을 높이는 것은 아니다. 1955년부터 1965년까지 제조업 매출은 연평균 8.6%가 올렸으나 물가상승률은 1975년까지 8%로 낮아졌다. 물가상승률이 올라도 마진이 낮아질 수 있다. 워렌 버핏은 1977년 5월 '포춘지'에 이와 같은 내용을 실었다. 단순히 인플레이션이 높으면 기업 마진이 오르고 자산가치가 상승하는 단순한 수순을 '시장'을 보이지 않는다. 시장이 반응하는데 꽤 다양한 관계사 얽혀 있다. 단순히 과거 가격 변동을 담은 그래프를 살피는 것만으로 미래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까.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이들이 대부분은 그간 미국 주식의 그래프를 보며 '불패의 장'이라고 여긴다. 다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수요와 공급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장 가격의 함정이다. 주식 시장에서의 공급이 현대처럼 보급화 된 것은 오래지 않았다. 실제로 1952년에는 주식을 보유한 성인의 인구 비율은 전체 4%에 지나지 않았다. 1952년에는 주식을 보유한 성인 인구 비율이 28%로 치솟아 올랐고 2023년 현재는 61%의 미국 성인이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자가 많아질수록 한정된 파이를 쪼개야 하는 한정성과 희귀성이 생기므로 가치는 반드시 오른다.' 이것이 비트코인 가격 상승의 논리와 닮았다.

시장 참여 인구가 많으면 당연히 그 가치가 오른다. 인구 비율도 늘었지만 '미국 인구' 자체도 크게 늘었다. 이는 꽤 중요한 의미다. 미국 주식이 꾸준하게 올랐던 이유중 하나는 '인구증가'가 이기 때문이다. 대개 베이비붐 세대는 은퇴를 앞두고 재정적 보장 준비한다. 대체적으로 노동 소득을 대체할 어떤 것을 찾기 위해 그들은 자산투자에 눈을 돌린다. 자본 공급이 많아지면 역시 주식 시장 수익률은 증가한다. 그러나 이런 미국 주식도 끊임없이 오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1880년부터 1949년까지의 S&P는 큰폭이 흐름이 있었지만 제자리 걸음을 했다. 그 기간은 얼핏 작아 보여도 70년이다. 장기투자는 항상 승리한다는 논리가 어긋난다. 1929년 호황의 고점에 팔지 못했더라면 1880년에 주식을 구매한 이는 1950년이 넘어서야 본전을 왁인한다. 스무살에 장기투자를 해도 90세 전에 매도하지 못하는 셈이다. 1962년부터 1982년까지 20년간 다우 지수는 횡보장이었다. 꾸준히 우상향한다는 격언은 틀렸다. 서른살의 청년이 쉰 살까지 꾸준하게 투자를 해도 주식은 수익을 보장하지 않는 상품이다.

그래프는 그러나 미국 주식을 장기로 보유하면 반드시 수익을 만들어 줄 것 처럼 보인다. 이것은 '논리'를 떠나 믿음으로 작용한다. 우상향하고 있는 그래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대체로 미국 시장은 이 추세선을 따라 40년에 한 번씩 고점을 돌파하니 미국 주식 장기 투자는 언제나 이기는 게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주식시장이 약세장으로 들어서면 그것을 '베어마켓'이라 부른다. 곰이 사냥할 때, 머리를 아래로 내리 찍는 자세를 그래프가 닮아서다. 여기서 특징은 이렇다. 급격한 하락이 아니라 곰처럼 '느릿 느릿'이다. 굼뜨고 지겹다. 주식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모두가 팔 때 사라', 이 말은 잘못됐다. 성인 다수가 투자처로 '주식'을 인정하고 있는 지금에서나 격언이다. '모두가 팔 때'가 아니라 '모두의 관심에서 잊혀졌을 때' 사야 한다. 주가는 아주 천천히 싸진다. 개인투자자는 커녕 '기관투자자'들에게까지 투자처로써 매력을 상실하고 관심에서 잊혀졌을 때, 주식은 비로소 고개를 든다. 기업의 시장가치 즉, 수익 가치를 자산 대체 비용으로 나눈 값을 'Q비율'이라고 한다. 'Q비율'은 과거 침체장에서 투자자들이 주가를 평가 할 때 유용하게 사용했다. 아무튼 1929년에서 1932년 침체장을 제외하면 주식의 가치가 조정되는 기간은 평균적으로 14년이다. 미국 증시에 대한 가치가 최고였던 2000년 3월 뒤에 실제로 천천히 저평가 상태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저평가 뒤에 주식은 자체적으로 다시 가치를 찾아간다. 주식은 끊임없이 오르는 것이 아니다. 고로 무작정의 장기투자는 지양해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2009년 워렌 버핏의 헤서웨이는 현금 보유율이 5년래 최저였다. 그의 현금 보유율이 최저라는 점은 '주식 매입 규모'를 뒷걸음질치게 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보도했다. 당시 사람들은 '대형 주식매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꼬집었다. 현금 보유율이 최저였던 당시 다우지수는 우로 횡보하고 있었다. 워렌 버핏이 '대형 주식을 매입'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현금보유율이 떨어졌다는 기사가 있고 얼마 뒤, 주가는 고개를 들고 한 단계로 올라섰다. 2023년 해서웨이 연례 주주 모임에 참석한 워렌 버핏은 무슨 말을 했을까. 그는 '경기침체'를 예견했다. 실제로 그는 2023년 1분기에 17조 6천억을 매도했고 투자는 하지 않았다. 현금 보유를 높인 것이다.

20세기 초기에 주식은 기관투자자들에게도 그닥 매리트있는 투자처는 아니였다. 얼마 뒤에 사람들이 주식투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 역사는 아니다. 고로 주식 투자에 대한 다수의 격언은 섣부르거나 오류인 경우도 많다. 대체로 경기 회복과 증시 회복에 시차가 발생한다고 여긴다. 주가는 선행지수이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주가는 경기를 먼저 반영한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자동차 산업은 증시보다 빨리 회복하는 경향도 있다. 즉 경기보다 보통 6개월에서 9개월 정도는 증시가 선행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경기 사이클의 회복 시점은 분명 대체적으로 이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다만 20세기에 저평가됐던 네 번의 침체장에서는 맞지 않았다. 되려 경기가 증시를 선행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는 경기가 개선되고 긍정적인 기사가 쏟아진다.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격언과는 많이 다르다. 이유를 따지고 들자면 이렇다. 누군가가 주식 때문에 망하거나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고 불행이 사회에 찾아왔을 때, 우리는 대체적으로 그때가 주식을 사야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주식을 사야 할 적기는 시장이 그 모든 존재감을 상실했을 때다. 미국 주식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자산가치는 꾸준한 우상향을 하지 않는다. 꽤 긴 장기침체를 겪고 몇 번의 커다란 상승으로 그 가치가 반영된다. 실제로 주가 바닥을 확인했던 20세기 초의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모든 상황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주가는 거기서 다시 50%가 하락하고 반등했다. 대체적으로 경기침체가 하락세를 멈추면 그것을 침체장 바닥의 신호로 확인한다. 침체장의 역사를 볼때, 현재의 증시에 대한 가치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것이 심하게 저평가 되는 상황이 왔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횡보 혹은 아래로 침체하는 베어마켓은 고개를 든다.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벌써 누군가는 '연준의 금리 인상'이 서서히 멈춰질 기다리며 다름 상승장에 대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벨류에이션에 대한 조정은 적게는 9년에서 길게는 14년정도가 걸린다. 증시의 장기 평균이 되기 위해서 최소 거대한 침체장의 바닥까지는 확인해야 한다. 그는 2005년 6월 수준에서 60~80%가 떨어져야 하나. 이미 만 92세의 나이인 워렌 버핏에게는 지금이 매도의 유일한 순간이며 어쩌면 그가 겪는 마지막 약세장이 될지 모른다. 초중등학생까지 모두 주식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 시기가 지나고 많은 사람들이 '주식'에 대해 미움의 감정도 들지 않을 10~15년 뒤인 2040년 쯤에나 주식이 한 단계 퀀텀 점프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 시장이 오기까지 능력을 키우며 잊혀질 시장에 대한 관심을 꾸준하게 가져야 한다. 진득한 장기 투자도 분명,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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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
오프라 윈프리 지음, 송연수 옮김 / 북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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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데 두려워하는 어떤 것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것은 털어버리면 털려 나가는 먼지 같은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은 나를 건드릴 수 없다. 반대로 나는 고개를 힘껏 흔드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다. 그것은 성가신 파리처럼 썩은 육신과 영혼을 떠도는 존재일 뿐이다. 죽어 있는 사체에 꼬여 있는 똥파리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못한다. 단지 죽어 있는 것 곁에 붙어 있기에 그것이 곧 죽음이라는 '착각'에 빠질 뿐이다. 육신이 썩으면 똥파리가 여지없이 달라 붙지만, 정신력과 영혼이 썩고 부패하면 그 똥파리들은 역시나 달라 붙는다. 머릿속 이리 저리를 돌아다니며 그 썩은 냄새 곁을 돈다. 똥파리 입장에서 안타깝게도 영혼은 언제든 상쾌하게 재생할 수 있으며 이미 그것이 머릿속을 혼잡하게 떠돌고 있다면 단순히 손을 휘둘러 그것을 내쫒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범과 같은 맹수가 아니라 한낫 똥파리일 뿐이다.

시퍼런 칼날을 나에게 세우고 달려드는 살인마를 마주한 적 있는가. 나는 있다. 그는 시퍼란 칼끝을 나에게 향했고 달려 들었다. 그의 표정은 악랄했고 사악한 웃음을 하며 감정없이 나를 향해 달려 들었다. 공포감이 극도로 치솟았다.

'아차'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맥주가 이 공포감을 극대화 시켜 줄 것이다. 살인마의 칼날 밑에 있는 '스페이스바'를 누르고 냉장고로 걸어간다. 차갑게 식혀진 캔맥주를 꺼내들고 목구멍으로 꿀떡 꿀떡 넘겼다.

'아. 이게 휴일이지.'

나는 다시 살인마 앞으로 앉았다. 살인마의 칼끝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달려들 기세다.

'아차'

조금 전 사두었던 육포 하나를 꺼내 먹어야 겠다. 휴일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얼마나 고대했던가. 육포가 빠질 수 없다. 육포 포장지를 뜯고 캔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킨 뒤, '스페이스바'를 눌렀다.

네깟놈이 살인마면 어쩔 것인가. 모니터 화면을 끄면 모습에서 사라지고 스피커 볼륨을 줄이면 '욕지꺼리'도 하지 못하는 것이.

기껏해봐야 내 휴일에 즐길거리다. 현실과 망상은 그렇다. 머릿속으로 쉴새없이 돌아가는 그 망상은 지금 당장 나를 덮쳐 올 것 같은 공포를 유발하지만, 내가 멈추면 멈춰지고 내가 끄면 사라지는 하찮은 것들이다. 현실의 나를 봐라. 그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휴일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현실을 살자'

닥쳐오는 고지서에 공포심을 느끼는가. 다가오는 시험날에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가. 그것은 털어버리면 털려버리는 먼지조각보다 하찮은 것이다. 의식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그 녀석을 털어버리자.

그러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시원한 맥주. 맛있는 육포. 안전한 보금자리. 심지어 지구인의 다수에게 제공되지 않다는 문화생활.

예전에는 악몽을 즐겼다. 악몽은 현실처럼 생생했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실제 포식자에게 쫒기는 감정을 줄 때도 있다. 잡히려는 그 순간, 벌떡 일어나 눈을 뜬다. 냉장고 문을 열고 찬기운에 서서 냉수 한 잔을 들이키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그렇다. '네깟놈이 어쩔껀데'

현실 똥파리 보다 못한 것들. 현실 똥파리는 나를 건들 수라도 있다. 그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걱정, 고민, 불안, 그것은 포호하고 날선 무엇을 들이밀지만 우습다. 여기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호흡을 해본다. 숨을 들여 마시고, 내뱉는다. 그 망상속 그것과 분리된 세계를 명확히 인식한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전류가 빛으로 바뀐 반도체 소자, 발광다이오드 네깟놈은 삼색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가만히 앉아서 울긋불긋 색이 변해가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공포스러움이 나를 찾아오면 다시금 느낀다. 그것은 환영이다. 현실을 봐라. 얼마나 안전하고 포근한가. 차분한 음악을 틀어 들을 수 있고 따뜻한 차를 한잔 마실 수 있다. 아늑한 안락의자에 앉아 한숨을 잘수도 있다. 능동적인 행위를 취하고 '그놈'에게도 취할 수 있다. 나 스스로도, '그놈'에게도 주인은 나다. 내가 주체고 주인이다. 내가 마음 먹으면 언제든 무슨 일이든 취할 수 있다. 그것이 행복이다. 그것이 감사다. 감사할 것이 없다면 돌아가는 비디오 테이프를 일시 정지 누르고 현실로 돌아와, 성큼성큼 냉장고로 걸어가자. 거기에는 시원하고 맛있는 것들이 잔뜩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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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에 대한 모든 것 - 혁신은 어떻게 탄생하고, 작동하고, 성공하는가
매트 리들리 지음, 이한음 옮김 / 청림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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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는 매년 5000만명이 배설한다. 일인당 하루 200그램 정도를 배설하니 어린이와 노약자를 포함하여 보수적으로 100 그램으로 잡으면 1년 동안 대한민국에 쌓여야 하는 '똥'은 1825톤이나 되다. 물론 재미로 계산하니 정확한 숫자로 볼 수는 없다.

1년에 1800톤에 가까운 똥이 대한민국에 생겨난다. 그런데 어째서 대한민국은 똥냄새로 가득차지 않은 것일까. 오늘 하루 아침만 하다더라도 5톤의 똥이 세상 밖으로 빠져 나왔을텐데 말이다. 이유는 이렇다. 원래 도시는 늘 냄새에 잠겨 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하이힐과 파라솔이 똥 때문에 개발됐다. 창 밖으로 똥을 버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니 유럽 여인들이 파라솔을 쓰고다니고 똥을 밟지 않도록 굽을 높이고 덧신을 입힌 것이 '하이힐'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문명 속 비문명을 역설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는 예시다. 다만 이런 사정은 조선이라고 다르지 않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는 '도성의 물이 짠 것은 사람들이 함부로 내다버리는 똥오줌 때문'이라고 했으며 다리 밑에는 인분이 덕지덕지 붙어서 장마가 아니면 씻겨지지도 않는다고 기록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더 심해 보였다. 영국인 여행가인 새비지 랜도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여름에는 비 덕분에 오물이 씻겨져 지낼만하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어서 그나마 괜찮다.'

그는 봄철이 되면 얼었던 오물이 풀리며 냄새가 심해지자 차라리 자신의 코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기록했다.

갑신정변으로 알려진 김옥균은 외국인들이 조선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길에 가득한 똥 오줌 때문이라고 했다. 이처럼 똥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고종황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공중 변소를 만든다는 것이 쓸데 없는 돈낭비라고 여겼다. 고로 길가에 대변을 누지 말라는 칙령을 반포하였으나 따로 공중변소를 만들지는 않았다. 천지가 개벽하고 패러다임을 바꾸는 변화는 멋들어진 첨단공학에서나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멀지 않은 과거에도 사람들은 냄새 나는 낮은 기술의 하수도가 있는 주거 환경에 살았다. 대체로 별거 아닌 것 처럼 보이지만 '혁신'이란 아주 사소하지만 대중적으로 스며든다.

모든 변기 밑에는 U자형으로 굽은 파이프가 있었다. 그전에는 바로 밑으로 내려가는 푸세식 변기었다. 어쨌던 이런 U자형 파이프는 굽은 부위에 물이 고이도록 함으로써 파이프를 통해 올라오는 냄새를 막았다. 아주 간단하고 원초적인 기술이지만 그것은 혁신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화장실은 1596년에 발명되어 리치먼드 궁중에 설치한 것으로 여러차례 시도됐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비쌌고 고장도 쉽게 났다. 혁신이 사람들에게 흡수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편리함'과 '가격'이다. 소비자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여기서 선택을 받아야 혁신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의 시선은 고종이 생각했던 바와 다르지 않았다. '똥 싸는 공간'에 돈을 쓰기 아까운 것이다. 고장이 나기라도 하면 수리하는 것에 번거로움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U자 파이프가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술이 좋다고 무조건 선택받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냥 요강을 밖으로 가져자가 버렸다. 그것이 훨씬 더 깨끗했고 더 편했으며 더 저렴했다. 그러던 중 '알렉산더 커밍'이라는 사람은 새로운 구조의 수세식 화장실 특허를 냈다. 이 화장실은 U자가 아닌 S자형 트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S자형도 문제가 있었다. 변기 아래쪽 S자 트랙의 레버를 써서 열어야 하고 또 닫아야 하는 것이다. 이 장치에서는 물이 새곤 했다. 알렉산더 커밍의 기술도 사람들에게 선택받지는 못했다. 얼마 뒤인 몇몇의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서로 상호 보완되고 개량됐다. 종국에는 슬라이드 밸브 대신에 경첩으로 연결된 플랩을 달고 물이 내려갈 때는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있는 수세식 변기를 만들었다. 기술의 점층적인 발견에 조지프 브라마가 있었다. 그는 회사를 세우고 부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개량한 수세식 변기를 영업했다. 그 뒤로도 배관공 토머스 크래퍼는 발명을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트랩을 S에서 U로 구부려 개선하고 물통의 사이펀 장치와 물통이 넘치는 것을 막는 볼콕 장치를 개선했다. 변기의 구조가 점차 믿음직해지고 단순해지면서 가격 또한 저렴해졌다.

혁신이라면 대개 사람들은 남들이 얻지 못한 영감을 '번뜩'인 천재 한명을 떠올린다. 다만 그렇지 않다.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은 '최초의 전화기 발명가'로 알려졌지만 그렇지 않다. 벨은 1876년 2월 14일 12시에 미국 특허청에 전화기 특허를 시넝해다. 다만 같은 시기 비슷한 연구를 했던 이가 있다. 바로 '엘리샤 그레이'라는 인물이다. 엘리샤 그레이도 벨과 같은 날 특허 신청을 했으나 2시간 늦게 신청을 했다. 벨은 특허로 인해 아주 많은 소송에 직면한다. 전화와 관련된 특허 소송만 600건이 넘는다. 오랜 소송 끝에 미국 대법원이 벨의 손을 들어주면서 결국 사람들의 뇌리에는 '벨'에 대한 이야기만 남았다. 특허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최초의 발명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초로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에는 여러 논쟁이 있으나 그중 '안토니오 메우치'도 하나다. 2002년 6월에는 미국 의회에서 안토니오 메우치의 전화가 최초의 전화기라고 공식 인정했다. 1860년에 옆방에 있는 아내와 통화를 성공한 것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메우치는 임시 특허를 냈으나 특허 비용과 갱신 비용을 감단하지 못하고 끝내 권리를 포기했다.

발명과 혁신은 다르다. 혁신은 대체로 '사업의 성공'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최초인지 아닌지, 과학적 이론을 정립한 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대는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영감을 갖는다. 페이스북은 '마크 주커버그'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행태로 개발됐을 것이며 스마트폰 또한 스티브 잡스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대부분의 혁신은 한 사람의 천재성이 아니라, 대부분 다양한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주고 받아지며 개승되고 보안되며 만들어진다. 개중 사업에 성공한 이들은 다수에게 물건을 사도록 한다. 이로써 '혁신'은 단순히 '발명' 혹은 '아이디어'의 산물이 아니며, 가격, 마케팅, 특허, 운 등 다양한 조건이 결합되어 만들어진다. 번뜩이는 영감과 '유레카'하는 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회를 찾는 과정 중에 만들어지는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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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씽 The One Thing (리커버 특별판)
게리 켈러 & 제이 파파산 지음, 구세희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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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뉴질랜드 출신 탐험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어떻게 에베레스트 산을 올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발씩 걸어서 올라갔지요."

단번에 이뤄지는 것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발'이고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다음 한발'이다. 한번에 하나씩 이뤄가는 수 밖에 없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하겠다는 야욕은 열 발을 한 번에 밟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얼마나 대단한 여정을 떠나던 얼마나 먼 여행을 떠나던 그것은 중요치 않다. 얼마나 대단한 결정을 하던 얼마나 가치있는 일을 하던 그것도 중요치 않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첫 번째 행동은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고, 그 다음을은 두 번째 걸음을 내딛는 행동일 뿐이다. 머릿속에 높은 목적과 험난한 여정에 겁을 먹을 필요없다.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저 지금 닥친 일을 하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은 발걸음을 떼는 일부터 시작한다. 성취는 작은 일의 연속에서 발생할 뿐이다. 커다란 무언가는 도착한 뒤의 해석일 뿐이다. 시작하고 연속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엇일까. 이렇다. 산적해 있는 과중한 일들 중에서 쉽고 작은 일을 그 첫 번째 업무로 정하는 것이다. 노자가 했다는 '천리 길도 한 걸음 부터'라는 말은 시작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시작의 중요성은 지금 닥친 단 하나의 행위에 집중하라는 말과 같다. '단 하나'라는 것이 핵심이다. '단 하나'는 시작을 하게 한다. 다시 그것은 지속하게 한다. 연속으로 이어지는 작은 성취를 쌓음으로써 결국 완성 단계로 나아간다.

리처드 도킨스는 완성된 구조물에는 '하향식 설계'와 '상향식 설계'가 있다고 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흰개미집은 얼핏 그 구조가 비슷하다. 결과가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과정도 닮은 것은 아니다. 흰개미집은 '상향식 설계'다. 즉 각기 다른 개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부분적으로 규칙이 만들어지며 완성되는 완성체다. 반면 사그라드 파밀라아 성당은 다르다. 파밀리아 성당은 설계자가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구조물을 만들어내는 '하향식 설계'다. 날아가는 철새를 보면 안다. 철새는 하늘을 무리지어 날아간다. 이때 특정한 모양을 한다. 이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공중쇼를 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 이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서로 일정한 각도라는 규칙을 따르며 비행할 뿐이다. 여기에는 설계자가 없다. 숲과 나무 중 다수는 '숲'이라는 거대한 덩어리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누군가 설계자의 '설계'에 의해 숲이 이뤄졌다면 설계자는 상당히 복잡한 설계 과정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시작도 전에 지치게 만든다. 완벽한 설계 도면이 나오기까지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천재가 아니라면 섣불리 시작하기 어렵다. 이런 수준의 천재가 되기 전에도 우리는 파밀리아 성당과 비슷한 모양의 구조물을 세우고 싶다. 철새처럼 그럴싸한 공중쇼도 해보고 싶다. 그런 경우 가장 완전하고 안전한 방법은 '상향식 설계'로 움직이는 것이다. 흰개미가 단순히 앞 개미의 행동에 맞게 다음 행동을 하고, 철새가 단순히 옆 새의 행동에 맞게 다음 행동을 하는 것처럼 무지한 첫 번째 발자국을 움직이며 그에 상응하는 다음 발자국을 움직이는 것이다. 매상황이 주어지는 순서에 대응하다보면 완벽하진 못해도 범인의 완성체를 가질 수 있다. 동시 다발적으로 움직여지는 '설계'는 꽤 그럴 싸 해보인다. 이런 '하향식 설계'는 다수가 공동의 목적으로 움직일 때나 가능하다.

중학교 과학시간에 전류를 연결하는 방법으로 '직렬연결'과 '병렬연결'을 배운다. 직렬연결은 전류가 흐르는 길을 하나로 연결한 것이고, 병렬연결은 전류가 흐르는 길을 나눠 연결하는 것이다. 단순히 전지를 나란히 배열하느냐, 나눠 배열하느냐의 차이지만 같은 전지 두 개로 다른 효과가 난다. 직렬 연결한 전구는 전구의 빛을 더 밝게 빛나게 하지만 병렬 연결한 전구는 전지를 더 오래 쓸 수 있게 한다.

어떤 방식으로 전지를 연결하느냐는 무엇이 좋고 나쁘냐의 성질이 아니다. 전구의 빛을 더 밝게 할지, 전지를 더 오래 사용할지에 따라 결정할 뿐이다. 사람 여럿이 다른 공간에서 동시에 작업을 할 때는 병렬 작업이다. 반면 개인의 시간은 직렬로 연결되어 있다. 개인이 완성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방법으로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

직렬연결은 단순하다. 한번에 하나씩이다. 동시에 여럿을 진행하는 것은 공간을 쪼개 쓰는 경우나 가능하다. 인간의 뇌는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 진화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가장 힘든 길을 가려면 한 번에 한 발씩만 내댇으면 된다. 단, 계속해서 발을 움직여야 한다.'

한 번에 하나씩, 단순한 논리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는다. 공부하며 음악을 듣거나, 산적한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을 시도한다. 그것은 능력처럼 보이지만 틀렸다. 멀티태스킹은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망치는 일이다. 많이 갖는 것, 많이 하는 것을 대부분 '욕심'이라고 치부한다. 그러지 않다. 불가에 따르길, 욕심이란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상응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갖는 것을 말한다. 움직이지 않고 달성하거나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동시에 취하는 것을 말한다. 뜨거운 얼음, 차가운 불처럼 당최 상응할 수 없는 두가지를 동시에 취하는 것이 욕심이다. 손이 두 개라면, 둘을 취하고 셋을 갖고 싶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 자신의 그릇이 종지잔이라면 종지잔 만큼만 취하고 자신의 그릇이 호수와 같으면 그 모든 것을 취해도 욕심이 아니다. 결국 핵심은 이렇다. '무언가는 포기해야 한다.'

모든 일은 다 중요하다. 개중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을 나눠야 한다. 모두 중요하다는 착각은 모든 중요한 일을 모두 덜 중요한 일로 만든다. 고로 더 중요한 일을 먼저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후 남은 것들 중 가장 중요한 일을 선택하여 그것에 집중한다. 결국 순서의 차이지, 언제나 행동은 남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것만 취하여 집중하게 한다. 파레토의 법칙은 중력 법칙 만큼이나 현실적이다. 상위 20%가 전체 80%를 해낸다는 의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80%보다 상위 20%가 전체 결과의 80%를 좌우한다. 결국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20%만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다면 나머지 80%의 영향력은 덜 완성하더라도 20% 내외의 영향력을 끼칠 뿐이다. 미국의 작가 프래신 제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목표는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을 적게 만드는 것이다.'

효율은 더 많이 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효율이란 덜 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효율적으로 산다는 것은 '가장 게으른 방법'이다. 현명하게 게을러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시에 모든 것을 처리한다는 환상을 버리고 하나에 한 번씩 만 하자.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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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크크오리지널 1
윤재광 지음 / 부크크오리지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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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윤재광의 책. 글 참 예술적으로 잘쓴다. 기대감 없이 시작했다가 끝나는 줄 모랐다. 인간의 생에 대한 욕망을 다룬 작품. 소설은 현대와 과거를 교차 반복하며 진행하다가 중간 어느지점에서 만난다.

진시황도 소망했던 영생의 욕망. 그것을 소설은 흥미롭게 풀었다. 진시황도 영생을 꿈꿨다. 진시황이 얼마나 영생을 꿈꿨는지는 '제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헤맬 때, 그의 사자였던 '서복'은 한반도 남쪽 제주까지 찾아왔다. 서복은 당시 정방폭보에 정박하고 한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했다. 그탓에 '서귀포'는 '서귀'라는 이름을 가졌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꿈 중 하나다. 하늘을 날거나, 영원히 사는 욕망은 고로 여러 방식으로 만날 수 있다. 그닥 특별한 소재는 아니다. 흔한 소재지만 소설가 '윤재광'은 수려한 문체로 이야기를 전개 한다. 독서를 마치고 난 뒤,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려 했더니, 2021년에 출간된 두 권의 책이 전부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조선 어느 시대 쯤, 서삼이라는 인물이 있다. 인물은 물건을 움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다. 언젠가 값비싼 비녀를 훔쳐 어머니를 드린다. 이 문제로 그의 어머니는 곤장을 맞고 얼마 뒤에는 죽는다. 도둑질로 삶을 연명하던 그는 우연히 한 노승을 만난다. 노승이 전한 말에 서삼은 번뜩인다. 노승의 말은 이렇다.

사람은 날 때, 혼을 갖고 태어난다. 하나는 머리, 다른 하나는 마음이 그렇다. 다만 가끔 혼이 셋인 사람이 날 때가 있는데 서삼의 혼이 셋이라는 것이다. 서삼의 다른 하나의 혼은 '자혼'이라는 놈으로 '쥐'처럼 남의 물건을 탐하고 훔쳐 남을 곪게 만든다. 서삼은 자신도 모르게 어미의 뱃속에서 형제의 혼을 훔쳤다. 그렇게 그의 삶은 날 때부터 일반적이지 않았다.

소설의 두 번째 주인공이 등장한다. 소설의 두 번 째 주인공은 그 시대적 배경이 현대다. 지호는 여섯 살 된 아이다. 그는 의사인 아버지 '진우'와 교육학을 전공한 어머니 '희령' 사이에 영특한 아들이다. 영특함은 차고 넘쳐 '천재'의 면모를 갖춘다. 이런 지호에 관한 설명은 '서삼'의 이야기와 교차 서술된다. 도대체 이야기를 어떻게 풀려고 이처럼 두 시대적 배경을 동시에 끌고 가나 싶다.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스포가 하나만 하겠다.

두 시대적 배경은 따로 진행되지면 막바지에 들어가며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남의 혼을 훔쳐 영생하는 '서삼'이 현대에 이르러 '지호'를 만난다.

더 읽을 다른 독자를 위해 더 이상의 스포는 하지 않겠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것에는 여러 관점이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불교에서는 영원히 사는 것은 없다. 불교에서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을 하나의 '상'으로 규정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반대로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 기독교에서의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명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육체를 벗어난 뒤에 이어지는 세계까지 포함한다. 두 뿌리를 끝까지 이어보면 사실 둘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다. 영생에 대해 생각하기에 이 두 관점은 모두 '육체를 벗어난 영생'을 말한다.

굳이 고대 성인들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죽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육체는 언젠가 모두 썪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해간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을 '영' 혹은 '혼', '얼'이라 한다. 소설을 쓴 '윤재광' 작가는 대체로 이런 세계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책은 매우 쉽게 읽히며 또한 실제로 빨리 읽혀지기도 했다. 바쁜 일상을 살면서 흘러 버리는 아무 의미 없는 생에서 '영생'을 바라는 못난 욕심을 생각해 보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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