텀블러로 지구를 구한다는 농담 - 헛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우아하게 지구를 지키는 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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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화장지 1킬로그램은 3000만 리터의 물을 기준치 이상으로 오염시킬 수 있다. 탄화수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환경을 위해서라면 화장실에서 뒷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터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한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전 세계에서 3300만 톤의 탄소가 매년 배출된다. 이를 두당 나누면 매년 4킬로그램 이상의 탄소를 지구인 한명이 꾸준히 배출하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다. 스마트폰을 한대 생산할 때마다 60킬로그램이 넘는 이산화탄소가 발생된다. 스마트폰으로 10분 짜리 영상을 시청하면 2000와트짜리 전기 오븐을 5분간 최대출력으로 가열하는 정도의 전력이 소비된다. 또한 구글 검색을 한번 할 때마다 0.2그램의 이산화탄소가 방출된다. 대체로 구글은 1분당 380만 건의 검색이 이루어지기도 한다.이것은 1분당 760톤의 이산화탄소가 검색으로 배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로 환경을 위해 친환경 제품을 인터넷으로 발품삼아 찾고 구매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이런 역설을 낳는다. 인간은 살아 숨을 쉬는 자체뿐만 아니라 활동하는 모든 순간 에너지를 만들고 탄소를 배출한다. 고로 인간이 지구를 위해서 그나마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을 최대한 덜 쉬는 일이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조깅이나 운동, 스포츠는 아예 해서는 안된다. 호흡은 최대한 얕게 하고 묽고 미지근한 야채 수프로 하루에 딱 한끼만 식사해야 한다. 환경을 위한다는 착각은 적잖은 모순을 남긴다는 것이다. 조금 타협한다고 해도 환경을 위한다면 스마트폰을 버리고 책을 무지하게 많이 봐야 한다. 사실 누구도 말하지 않지만 환경의 최대 적은 '인구증가'다. 고로 인구 좀 줄어야 환경이 산다. 아이를 최대한 낳지 않고 최대한 적게 숨쉬다가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 환경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다만 우리는 환경과 삶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고자 한다. 다만 극단적인 환경옹호는 이처럼 많은 모순을 낳는다.

탄소 배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이용하고 개인자가용 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까. 아니다. 진정 환경을 위한다면 계단 대신에 엘리베이터를 타야한다. 걷는 것보다 킥보드를 이용하는 것이 에너지 효율면에서 좋다. 장거리를 이동하기 위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보다 테슬라 전기차를 구매하여 타고 다녀야 한다. 풍족할수록 탄소배출량은 많아진다. 고로 소비를 적게할 뿐만 아니라 생산도 적게 해야 한다. 노동을 최소화하고 생산량을 줄여 특별하게 가난해질수록 탄소발자국은 적어진다. 비행기 이용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여행이나 관광은 최대한 해서는 안된다. 대체로 반려견 한 마리당 연평균 2.5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이 반려견이 섭취할 육류를 따지면 연간 2톤의 이산화탄소가 더 배출된다. 고로 지구를 위한다면 탄소배출량이 연간 0.1톤 밖에 배출하지 않는 '카나리아'를 키우는 것이 좋다. 대체로 인간은 어떤 기준으로 애착을 하는 동물에게는 포근하고 안락한 사료와 장난감을 구매해 주고 다른 동물은 도살공장에 가둬 키운 뒤 조리하고 식탁 접시 위에 올려 놓는다. 이것이 모순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도 알고 있다. 미국 심리학자 멜리니아 조이의 저서 '왜 우리는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육류 공장을 일상에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 외딴곳에 위차하고 있으며 입구에서 입장이 허락되지 않고, 육류를 운반하는 트럭은 봉인되어 아무 표시 없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애초에 인간은 자신들의 모순을 알고 있다. 고로 대체로 눈을 가리고 스스로의 악함을 모른 척 할 뿐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이렇게 모순을 낳는다. 대체로 남들보다 도덕적이라고 믿는 이들은 자신의 미덕을 뽐내기 위해 남들에게 죄책감을 강요하고 불필요한 공포심을 조장한다. 그것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사실 조금만 더 살펴보면 알 수 있다. 2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쓰레기'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국어 '쓰레기'라는 어원은 '부스러기'에서 '스러기'가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사용 폐기물과는 거리가 멀다. 대체로 바닥에 떨어진 먼지나 각질 등의 잘게 부스러진 것들을 말한다. 그것은 환경과 관련 없는 어휘였다. 그것이 폐기물로써 환경과 연관이 지어진 것은 100년이 조금 넘는다. 그간 인간은 사용 폐기물을 폐기하지 않고 모두 사용했다. 현재 쓰레기로 분류되는 것들의 대부분은 '플라스틱 폐기물'을 말한다. 다만 플라스틱 폐기물은 정말 인류가 만들어낸 죄악일까. 유럽인의 기준으로 93%의 사람들이 소변에서 플라스틱병과 같은 제품에 포함되는 비스페놀 성분이 검출됐다. 호주 뉴캐슬대학교에서는 '신용카드 한 장'이라는 연구를 했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매주 신용카드 한 장의 무게와 같은 5g의 플라스틱을 섭취한단다. 또한 매년 1000만 톤이 넘는 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가면서 2050년이 되면 바다에는 어류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아질 전망이다. 그렇다고 플라스틱은 과연 죄악일까. 실제 플라스틱이 '사망'에 이르게 한 인류보다 플라스틱으로 '생존'하게 된 인류가 훨씬 많다. 플라스틱은 가격이 저렴하고 변형이 쉽다. 플라스틱 등장 이전에 인류는 비슷한 물질을 얻기 위해, 고래를 사냥하여 그 뼈와 수염을 이용했고, 코끼리의 상아나 야생동물의 뼈 혹은 뿔을 사용했다.

인류는 코로나 백신을 위해 '투구게'의 피를 이용했다. 투구게를 산채로 잡고 그것을 묶어 그것의 피를 대량으로 채취한다. 이것들은 인도적인 이유로 다시 자연방생되지만 사실 자연 방생이 아니라 폐기 수준이다. 이들의 20~30%만 생존하고 나머지는 곧 죽는다. 코로나 백신을 위해 우리가 '투구게의 피'를 이용한 이유는 그들의 피에 있는 '헤모시아닌'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고나면 나머지는 그저 폐기해버린다. 한때, 초등학생들이 포켓몬 빵에 들어있는 스티커를 모우기 위해, 빵을 버린다던 뉴스가 떠오른다.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틀림없이 그것의 어떤 것을 위해 대량 생산을 할 것이며 나머지는 폐기할 것이다. 다만 최근처럼 환경에 대한 이슈가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이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장은 이미 극도로 포화상태다.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생산되며 생산자들은 이 치열한 경쟁의 압력을 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 다이어트, 친환경, 관광 등은 최근 산업으로 규모를 키우며 꽤 성장했다.

미국이 셰일 혁명으로 에너지 패권에 대한 전쟁이 2000년 대 들어서며 시작됐다. 그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에너지를 수입하는 방식으로 사우디의 안보를 책임지고 원유 결제를 '달러'로만 가능하도록 해왔다. 그러다 셰일 혁명으로 인해 미국에게 '사우디'와 '러시아'가 불필요해지자, 미국은 에너지 독립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유럽, 러시아, 중동, 미국이 각자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행보를 이어간다. 플라스틱은 화학연료 산업의 부산물이다. 99%의 플라스틱은 석유와 가스에서 나오는 화학물질로 생산된다. 고로 자동차 에너지를 '석유'에서 '전기'로 바꾸었다고 친환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석유는 근현대 화학의 기반이다. 그것은 단순이 태워서 에너지원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화장품, 샴푸, 컴퓨터, 스마트폰, 자동차 등 거의 모든 것에 사용된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이 에너지 패권을 위한 원유의 수요 공급 전쟁을 위해 아마 '친환경'이라는 이슈는 앞으로도 꾸준하게 나오지 않을까 싶다. 환경을 위한다는 것은 꼭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이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극단적인 불안감과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경옹호보다는 조금 더 현명하고 현실적인 친환경의 의미를 갖는 것이 우리와 다음 세대를 위해 중요한 듯 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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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MBTI 테마소설집 1
정대건 외 지음 / 읻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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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이 넓다. 쓸데 없는 생각이 많다. 현실보다 이상을 추구한다. 일상적인 대화보다는 심오하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일상에서 대체로 입을 다문다. 살아 있는 옆사람보다 누군가가 혼자 사색한 글을 읽는 것이 더 공감된다. 현실에서 대체로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준다. 고민을 들어주면 그 감정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나가지 못하고 좌뇌와 우뇌의 구석구석을 훑고 마치 자기 일처럼 착각한다. 스타벅스의 종이빨대가 지구 환경을 구하는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한다. 그들이 건내는 리유저블 컵이 진정 환경을 위한 것인지, 다시 그곳을 찾게 하는 마케팅적인 요소인지 그 진심에 골똘하게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나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고 스스로의 답을 내놓는다. 글을 쓰면 글이 어려워진다. 말을 하면 말이 겉돈다. 생각하면 생각이 깊어진다. 글을 쉽게 쓰고 싶고 말을 간결하게 하고 싶오 생각을 단순하게 하고 싶다. 그런 욕망이 끊임없이 내면과 부딪치며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 좌절한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인가'

그 고민이 한참이 이어진다. 친한 누군가의 전화가 온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감정은 각 시간마다 고요함과 요동침의 파동을 갖는다. 그 주파수에 맞는 행동과 생각을 하고 싶다. 갑작스럽게 걸려 온 전화가 나만의 감정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방해금지 모드로 스마트폰을 변경하고 쌓여 있는 미확인 메시지를 내 감정이 용납하는 시간에 확인한다. 그것들이 나의 영역으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장벽을 쌓는다. 갑작스러운 불청격을 싫어한다.

"어. 미안해. 뭐 좀 하느라 이제 확인했어."

'여보세요'보다 먼저 하는 인사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누군가는 '그려려니'한다. 극도로 외로움을 느껴도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저절로 진짜들만 진득하게 쌓여간다. 그들은 소중하지만 그래도 내 영역을 침범해 올 수 없다.

"지금 잠깐 볼 수 있을까?"

특별하게 하는 일이 없어도 배꼽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불편함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일단 거절하고 본다. 나중에 연락을 준다고 일러준다. 잊지 못하고 '언제 연락을 주면 될까' 고민한다. 연락을 먼저 준 것은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왜 지금 보자고 했을까', '왜 잠깐 보자고 했을까', '왜 하필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전화를 한다.

"그래. 어디야? 지금 갈께."

그 귀찮은 내부의 목소리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그냥 나가기로 결정한다. 대충 차려입고 나간다. 그러나 그냥 연락했다는 이야기에 허탈함을 느낀다. '그냥 잡담이구나.' 그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깜빡 거리는 스마트폰의 배터리 표기처럼 '뇌용량 방전'을 알리는 신호들이 여기저기서 온다. 집으로 들어온다. 분명 즐거웠으나 후회가 밀려온다. 이런 비생산적인 대화였으면 그냥 집에서 쉴 것을...

최대한 편한 옷을 갈아입는다. 스마트폰 SNS를 켠다. 너무 많은 정보가 눈으로 쏟아져 온다. 꺼버린다. 생각은 SNS의 유해함으로 이어진다. 저것은 뇌에 어떤 작용을 할까. 저것을 사용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까. 흔히 말하는 쓸데 없는 생각이 머리를 마구 어지럽힌다. 영화를 보기로 한다. 넷플릭스 영화를 켠다.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예전에 봤던 영화 중 흥미롭게 봤던 영화를 선택한다. 마음이 놓인다. 나 스스로의 검증이 끝난 영화를 켠다. 이미 몇차례 본 영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본다.

"감독은 이 장면을 만들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배우는 이 역할을 찍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배역은 당시 무슨 생각이 었을까?"

배우 얼굴에 나타난 미세한 근육 떨림, 머릿카락 흔들림까지 모두 포착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지나가는 역할을 하던 엑스트라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불현듯, 예전에 봤던 '프렌즈'라는 시트콤이 떠오른다. 거기에 비중이 작은 배우를 하나 떠올린다. '건터'라는 카페 주인이 떠올랐다. 그의 이름을 검색해본다.

'James Michale Taylor' 이것이 '건터'라는 배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이었다. 그는 수 년 전에도 그의 이름을 비슷한 경로로 검색했다. 그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좋아요를 누르기도 했다. 기억이 났다. 그가 우연히 지나가는 배역인 '건터' 역을 했다가 정식 배우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스토리가 궁금했다. 조금을 더 검색해보니, 2021년 5월 전립선암 투병 중 그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아. 그럴 줄 알았으면 예전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도 달았으면..."

그의 인생에 대해 궁금했다. 30년이나 된 성공한 시트콤에 출연한 그의 이후 삶에 대해 알기 쉽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끈다. 한 참을 멍하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본다. 대체로 비현실적이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다시 그것의 꼬리를 생각이 물었다. 그 생각은 꼬리를 내밀고 다음 생각에게 여지를 주고 있었다. 그것을 걷어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쓸데 없는 생각. 그것을 없애고 싶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 단순하게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하다 내 안에 있는 가장 단순하고 냉철한 그 어떤 자아를 꺼내어 다시 MBTI 검사를 해본다. 최대한 외향적이고 최대한 냉철하고, 최대한 비계획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검사를 한다. 결과가 나온다.

또...

INFJ...

침울해진다. 그러나 비슷한 유형이 세계 1퍼센트나 있다. 스스로의 불쌍함을 잊고 그들이 참 불쌍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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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의 역사 - 금융 위기 200년사에서 미래 경제의 해법을 찾다 CEO의 서재 40
토머스 바타니안 지음, 이은주 옮김 / 센시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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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부터 2020년까지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일어나 파산한 은행의 갯수는 2만 개다. 같은 기간 캐나다에서는 은행 파산이 두 차례 밖에 일어나지 않았으며 미국보다 은행업 위기가 많이 발생한 국가는 아르헨티나 뿐이다. 이처럼 미국에서만 지나치게 금융 위기와 공황이 잦은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은 지난 200년간 9번의 금융 공황이 일어나고 위기가 일어났다. 물론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토마스 바타니안'은 그것이 미국 정책의 과도한 개입과 잘못된 감독, 규제 때문이라고 봤다. 토마스 바타니안은 커터 행정부에서 통화감독청 수석 고문의 특별 보좌역을 맡았고 레이먼 행정부에서는 연방주택대출은행 이사회의 법무자문의원을 맡았다. 이후 정부 단체와 금융회사, 투자자를 대표하는 일을 하며 미국 행정부에 비공식적인 자문역을 담당한 작가다. 그는 미국 역사에 등장하는 50번의 대형 금융 기관 실패 사례 중 30건을 자문한다. 또한 합병, 규제 등의 문제에 관한 다양한 소송을 진행하기도 한 변호사다. 이처럼 미국 행정부에서 금융에 관해 다양한 시각을 접할 수 있던 그가 생각한 미극 금융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원인은 이렇다. 미국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은 물론 좋은 의도로 시작을 했지만 그 결과가 좋지 못한 경우도 많다.

2023년 3월 10일 실리콘밸리은행인 SVB가 파산했다. SVB는 미국 내 자산 기준 16위 정도 되는 은행이다. 이 은행은 어떻게 파산하게 됐을까. 2023년 이전까지는 미국의 화폐발행으로 인해 유동성이 증가하던 막바지 시기다. 이 시기에 SVB는 고객의 예금을 대출이 아닌, 국채와 주택저당증권을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이들은 대체로 장기 자산에 속한다. 빠르게 현금화하기 어려운 이 자산들을 잔뜩 들고 있떤 이 은행은 2022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2022년 미연방준비제도인 FED가 금리인상을 급격하게 진행하면서 부터다. 금리 인상이 진행되자, 고객들의 예금은 줄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출은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SVB의 잔고가 급격히 줄어든다. 이에 고객 예금을 돌려주기 위해, SVB는 가지고 있던 미국 국채를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2022년 채권 가격이 하락하면서 손실액이 커졌다. 그 과정중 미국 정부가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고 결국 은행은 파산했다.

2008년 금융 위기도 비슷하다. 2008년 금융위기를 알기 위해선 2002년으로 먼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02년, 미국에서는 커다란 이벤트 하나가 발생한다. 바로 911테러의 발생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세계 무역 센터가 무너져 내린 것 이상의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 주식 시장은 거의 일주일 동안 폐장된다. 이는 미국 투자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주었다. 주가는 크게 하락했고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받았다. 이때 연준은 경기 부양을 명분으로 금리 인하를 단행한다. 2001년까지 6%였던 금리는 1.25%까지 낮아졌다. 저금리 시대가 열리자,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대출을 받기 시작한다. 정부는 이에 주택소유장려정책을 펼치고 주택 담보 대출에 대한 규제를 철저하게 완화한다. 정부의 정책은 분명 경기를 부양하고자 했던 좋은 의도였다. 다만 이는 꽤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투기성 자본이 부동산으로 몰려 드는 것이다. 당시 더 많은 대출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은행으로 몰리자, 은행들은 자금 마련을 위해 주택저당채권을 금융회사에 판다. 주택저당채권이란 은행이 주택을 대출해 줄 때, 집을 담보로 받게 되는 권리다. 이것으로 은행은 대출금 상환을 보장 받을 수 있고, 대출 받은 사람은 주택을 구매할 수 있게 되다. 그러나 이 채권을 산 회사는 이것을 담보로 다시 투자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 투자은행은 이 채권을 묶어 신용상품을 발행한다. 이처럼 여러 개의 채권을 묶어서 하나의 새로운 금융 상품을 만드는 것을 CDO라고 부른다. 이 CDO는 당연히 구조적으로 투명하기 힘들고 투자자가 그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고 여러 개의 채권을 가지기 때문에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하다.

어쨌건 저금리와 주택담보대출 장려라는 정책변화는 미국 부동산 시장을 활발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 당연히 부동산 투자의 수익성이 높아지고, 이에 묶여 있는 CDO가 미국 밖에서도 팔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CDO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자 은행은 대출 허가를 늘리기 시작한다. 미국의 모기지는 대체로 세 단계로 나눠지는데, 신용도가 높은 고소득을 대상으로 하는 프라임 등급, 그 다음으로 알트 A등급, 마지막으로 신용도가 가장 낮은 서브 프라임 등급으로 나눠져 있다. 미국은 늘어난 수요을 맞추기 위해 저신용자들인 서브프라임 등급까지 대출 허가를 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대출을 허가한 이유는 부동산 가격이 꾸준하게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에하나 서브프라임 등급자들이 대출금 상환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은행은 부동산을 차압하는 방식으로 손실을 충당할 수 있었다. 다만 최근 있었던 SVB은행 사태와 마찬가지로 은행의 부실해진 시기에 급격한 금리 인상 정책이 실행된다. 0.02%까지 낮아진 금리는 5.25%까지 높아지게 된다. 대출금리는 최초 2년 간, 고정금리로 진행하다가 나머지 기간은 변동금리가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출 금리가 6% 이상이 되어가자, 상환 능력이 부족한 서브프라임 대출자들의 채무불이행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상환하지 못한 대출자들은 집을 차압당하고 부동산 매물은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에 연동되어 있는 CDO의 가치도 함께 폭락하며 미국 내외로 수많은 은행과 금융사가 도산 위기에 놓인다. 여기서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며 그 영향력이 전 세계로 확산된다.

분명 이런 금융 위기가 하나의 이벤트로 인해 일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대체로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미국의 중앙의 금융정책이 다른 역효과를 내며 커다란 위기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토머스 바타니안은 공황의 요소 중 대부분이 정부가 관리를 잘못하여 시장이 과열되면 일어난다고 봤다. 여럿 차례의 금융 위기는 모두 다른 모양으로 일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대응과 관리에 대한 미흡에 대해서는 일관성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는 '블록화 현상'이다. '세계화'에 익숙한 우리가 마주한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만 낮선 것은 아니다. 경제와 정책을 담당하는 의사 결정자들 또한 조금 더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기축통화를 둘러 싼 다양한 이견과 전쟁, 중국의 성장, 무역전쟁을 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독립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좋은 인사이트를 갖게 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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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가는 인생 수업
장재형 지음 / 미디어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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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똑똑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옷'을 '임금'에게 판매한 아주 똑똑한 마케터를 알고 있다. 벌거 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제단사들이다. 이들은 어느날 임금에게 나타나 똑똑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옷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신하들은 중간 중간 제단사를 찾아가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멍청이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고로 옷이 보이는 것처럼 임금에게 보고한다. 다시 같은 이유로 다른 신화들이 찾아왔고 그들도 역시 옷이 보인다고 거짓말을 한다. 시간이 지나고 임금이 그 옷을 받게 된다. 모든 신하의 눈에는 보인다는 '이 옷'을 임금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임금의 체통이 있어, 임금은 그것을 보인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신하들이 아름답다고 말한 옷이다. 모든 신하들이 극찬을 했다. 임금도 그 옷이 반드시 보여야했다. 제단사들은 임금에게 옷을 입히는 시늉을 한다. 임금 또한 옷 입는 시늉을 한다. 이후 옷을 입고 임금은 거리를 나선다. 시민 그 누구도 그 옷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모두가 보이는 옷을 자신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근엄한 표정으로 보이는 것처럼 시늉하다가 한 어린 아이가 소리친다.

"임금님이 벌거 벗었데요!"

그제서야 사람들은 옷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전을 읽으면 '벌거벗은 임금님'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증명된 책. 과연 그 책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 그것을 읽고 커다란 감명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것이 임금님의 '똑똑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옷'과 같은 것은 아닐까. 만인에게 검증된 책이니,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멍청이'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임금님이 벌거 벗었다'고 외친 어린 아이와 닮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할 수는 없다. 내가 읽었던 책 중 그런 책들이 있다.

첫째,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고전을 읽으며 어떤 사람들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왜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 받았는지 이해가 된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 이야기를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실제 이상했다. 사람들은 여기에 상징주의를 담아 다양한 해석을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이상했다. 대사도 전여 개연성 없이 이어졌다. 그것을 많은 사람이 인정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책에 대해 조금 더 심도 있게 살펴보려고 했지만, 나의 턱 없는 문해력으로 그 책은 그냥 이상한 책이었다. 책에서 앨리스는 커지고 작아지고 물체가 왜곡되는 것을 경함한다. 이런 형태 왜곡 인식 현상을 실제, 소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은 경험했는데, 그는 의식변조 약물을 복용한 경험이 있었고 심한 편두통을 앓고 있었다. 1955년 영국 외과의사인 J. Todd에 의해 논문으로 다뤄졌는데 이는 '이상한 나라의 증후군' 혹은 '토드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영미권에서 흥미로운 소설인 이유는 다름 아닌, 언여 유희 때문이다. 가령 대사중에는

"내가 본 것은 고양이었어?"라는 대사가 있다. 당췌 그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이 대사를 영어로 바꿔보면 이렇다. "Was it a cat I saw?"

이 대사의 영어 스펠링을 거꾸로 쓰면 "Was it a cat I saw?"로 같은 말이 완성된다. 이 대사를 한국어로 보고 소설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면 그것은 '벌거벗은 임금님'과 다르지 않다. 뿐만 아니라 차를 뜻하는 "Tea"와 발음이 비슷한 "T"를 이용한 언어 유희도 나온다. 이것을 한국어 버전의 소설로 읽고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에 공감하기 힘들다.

둘 째, 신곡.

이탈리아 작가 단테의 신곡은 이름이 무시무시하다. 인류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내가 그것을 읽고 그렇게 느꼈느냐 묻는다면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단테의 신곡은 역시 어렵다.'고 말하지만 내가 읽은 단테의 신곡은 어렵지 않았다. 이유는 이렇다. 단테의 신곡에는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일단 인물의 이름이 어렵다.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보다 모르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고로 어렵게 느껴진다. 그것은 당연하다. 1300년에 지어진 책에 등장하는 인물을 '상식'으로 모두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에 등장하는 인물에는 단테의 개인적 라이벌이 꽤 나온다. 우리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그들 인물 정보를 검색해 보면 역사적인 정보가 나오지만 정보가 그렇게 문서화 되어 있으면 역시 무시무시해 보일 뿐이다. 이 책은 지옥을 묘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단테는 지옥을 갔다 온 적이 없다. 그가 묘사한 것은 상상일 뿐이다. 신곡에는 시대에 맞지 않는 등장인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플라톤이나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고, 소크라테스나 카이사르도 등장한다. 그들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런 이름들을 그저 가볍게 받아들이고 읽으면 단테의 신곡은 생각만큼 묵직한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묵직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나뉜다." - T.S 엘리엇.

"인간이 만든 최고의 작품"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모든 문학의 절정"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무시 무시한 사람들이 '극찬한 이 '신곡'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과연 '바보'가 될 것이다. 나는 확실히 '바보'이기에 '신곡'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겠다.

참고로 'T.S 엘리엇,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분명 대단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인물 중 괴테의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책도 읽어 본 적 없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작품인 '노인과 바다'가 여러 방법으로 해석되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그의 소설을 그저 노인과 바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노인과 바다'에 들어가는 '상징주의'에 대해 그저 독자의 몫으로 두었을 뿐이지 깊은 문학적 상징을 염두하고 쓴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떠오르는 감독과 뮤지션이 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대사는 '밥은 먹고 다니니?'다. 이 대사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두었지만, 실제 이는 송강호 배우의 애드립이었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는 당시 서울대 사회과학대 출신의 가수의 노래라는 이유로 '청년 실업에 대한 사회 비판과 풍자'로 알려졌으나 정작, 작사할 때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고 직접 해명했다. 그 밖에도 '양희은' 가수의 '아침이슬'은 '민주화 운동'과 전혀 관련 없었음에도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로 알려졌고 가수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노무현 대통령 추모곡'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라는 영화의 테마곡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고전을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가령 '대체 그 많은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은 이 글을 사랑했을까'

하며 그 글이 내포하는 많은 해석을 찾으려 든다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책속에 작가는 내용을 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책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사색하는 것은 독서를 풍요롭게 한다. 고전을 읽는 습관은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통해 다양한 사색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좋은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을 모두 담고 있는 듯하다.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 이유가 나의 지성 탓인지, 혹은 그것과 그것을 평가하는 권위자의 권위에 의해, 없는 것을 찾아보겠다고 나섰기 때문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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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록 - 내 인생을 바꾸는 작은 기적 기록
안예진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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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패권 다툼이었다. 농경민족은 커다란 공동체를 이루고 막대한 부를 쌓았다. 정착하고 자리잡고 문화적 번영을 하는 이룬다. 덩치가 크고 잃을 것이 많다. 비옥한 토지를 선점한다. 나아가기 보다 지키는 것을 우선시 한다. 대체로 분업이 잘 되어 있다.

유목민족은 반대다. 대체로 기민하게 움직인다. 척박한 땅에 거주한다. 덩치가 작고 잃을 것이 없다. 지키는 것보다 나아가는 것을 우선시한다. 대체로 분업보다는 개인이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대표적인 유목민족은 몽골이나 여진이 있다. 이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대체로 가난했고 전문적 능력도 갖추지 않았다. 날아가는 새처럼 최대한 몸집을 가볍게 해야 했다. 언제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도록 중요한 것이 아니면 덜어 냈다. 이들의 특징은 '기동력'과 '자유', '다재다능'이다. 몽골족은 이민족의 침략에 재빠르게 도망 다녔다. 활동을 위해 소지품을 최소화했다. 중요한 무언가를 제외하면 모두 버려야 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본능적으로 파악해야 했다. 이는 본질 파악 능력을 향상 시켰다. 한 곳에 머무르다보면 불필요한 잡동사니가 쌓인다. 살아가며 꼭 필요한 것들을 쌓아 두다보면 무엇이 중요한지 결국 모른다.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잃을 것이 많은 농경민족과 잃을 것 없는 유목민족의 결정적 차이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초원을 유랑하는 유목 민족도 있지만 바다를 유랑하는 유목 민족도 있다. 대체로 일본이나 영국과 같은 섬나라가 그렇다. 이들은 떠돌아 다니다가 약탈을 했다. 스스로 음식을 지어 먹었고 전쟁에도 참여했다. 농사를 짓거나 사냥도 하기도 했다. 전문 분야를 나누지 않고 개인의 여러 분야에 다재다능해야 했다. 세계를 보면 농경민족들이 번영하다가 쇠퇴와 부패가 시작하면 잽싸게 유목민족들이 패권을 앗아갔다. 몽골, 일본, 영국, 여진 등 갑자기 세계사에 중심으로 우뚝 서버린다. 경제에서도 이와 같다. 덩치가 커지면 기동성이 줄어든다. 지나치게 커저버린 덩치 때문에 줄어든 기동성을 '프리랜서'들은 잽싸게 채워나간다. 공무원이나 대기업보다 더 선호 되는 것이 '유튜버'라는 직업이다. 커다란 덩치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지만 사람들은 자유를 담보로 내놓아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커다란 공동체가 지나치게 둔해지고 비합리적이게 되면 사람들은 권태감을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 유목민족처럼 자유롭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잽싸게 유목민들이 패권의 자리를 채워나간다. 지금 현재가 그 과도기라 보여진다. '디지털노마드', '경제적 자유'. 이런 것들이 유행했다. 사람들은 소속감보다는 개인의 정체성을 중요시 생각했다. 경제와 사회, 문화분야에서 '인플루언서', 즉 유목민들이 떠오른 것이다. 이들은 농경민족의 자리를 빠르게 꿰찬다. TV를 켜면 대형 유튜버들이 나온다. 이들은 스스로 연출가이자 음향감독이고 카메라 감독이자 출연자이자 작가이고, 편집자이기도 하다. 혼자서 모든 역량을 다 해낸다.

사람들이 '유목민'에 대한 환상을 갖는 이유다. 이들은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한다. 스스로 컨텐츠를 제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기도 한다. 이런 유목민에게 가장 큰 원동력은 사실 '결핍'과 '불안'이다. 초기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이들의 경우, 공동체가 지시한 업무를 처리하기 바쁘다. 대체로 인플루언서들의 상당수는 항상 겉돌다가 기회를 발견한다. '도서 인플루언서' '안예진' 작가는 '꿈꾸는 유목민'이라는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한다. 그녀의 이름에 따라 그녀는 '유목민'을 꿈꾼다. 유목민처럼 그녀는 안정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도전'과 '자유'를 희망한다. 그녀가 이처럼 유목민을 지향하면서 꿈을 꾸는 것은 어쩌면 현대 많은 사람들도 원하는 삶이지 않을까 싶다.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유행했다. '돈'에 대해 조금 자유로운 사고를 하고 사는 삶을 말한다. '농경민족'에게는 사실 '경제적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대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꾸준하고 보장된 수확물만 존재할 뿐이다. 유목민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은 기회를 틈타 높은 기동성으로 커다란 성장을 할 때가 있다. 대체로 이들은 꾸준하지는 못해도 경제적 자유를 얻을 만큼의 기회가 충분하게 있고 흔히 말하는 '대박'의 꿈도 가질 수 있다.

주식투자에 실패하거나 자유롭게 여러 나라를 여행하거나 여러 지적 호기심을 탐구하는 것으로 보아 '안예진 작가'의 삶은 유목민을 닮았다. 내 성향도 비슷하다. 역사, 경제, 양자역학, 풍수지리, 관상, 필체, 뇌과학, 동양철학, 소설, 서양철학, 종교, 미술, 음악, 뭐든 상관 없다. 닥치는 대로 읽는다. 그렇게 읽다보니 얻는 게 많다. 개인이 여러가지 일에 다재다능해야 한다는 '유목민의 특성'에도 맞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다보니 어떤 것을 볼 때, 다면적이게 보인다. 가령 현대미술을 보면서 역사와 기술이 떠오른다.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서양미술은 사실적인 그림에 권태를 느끼고 일본에서 찾은 '자포니즘'이 성장한다 던지. 노자를 읽으면서 양자역학과 닮은 부분을 찾아 본 다던지. 국부론과 종의 기원을 섞어 생각해 본다던지.

현상과 사물이 기존에 알고 있던 '관념'이 아닌 다각화된 시선으로 보게 된다. 그것은 분명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게 하고 그것이 다른 선택들을 하게 한다고 믿는다.

네이버 '도서인플루언서', '논술 부분 엑스퍼트'로 나 또한 등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크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많은 것을 얻는 부분이라면 지식적인 부분이다. 분명 농경으로 남들이 곡간을 채워가는 기간에, 여러 분야에 지식을 채워 놓고 있다고 본다. 실패를 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고 훔쳐갈수도 없는 멈추지 않는 샘물을 내부에 만든다고 본다. 그것은 언젠가 화수분이 되어 채우고도 넘칠 것이다. 개인적 소통은 없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그런 신뢰가 있다. 단순히 '도서 인플루언서가 되는 기술'을 떠나, '저 사람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지식들이 녹아져 있을까' 떠올리면, 이들의 미래가 기대되고 때로는 때로는 자극받기도 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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