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연대기 - 조선을 뒤흔든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건 80
유정호 지음 / 블랙피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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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 될 상인가?"

세조는 자신의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다. 영화 '관상'으로 유명한 '계유정난'이다. 그는 '성공적인 반역자'로 역사에 기록된다. 반정의 성공 이후, 그는 자신의 반정에 대한 역사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그래서 그런지 세조는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한다. 그렇게 역사는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세조의 이야기는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조의 '성공적인 반역'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의 공과 과를 모두 알고 있으며, 그 평가가 각각의 개인마다 다를 수 있음도 알고 있다. 세조 뿐만 아니다. 선조의 몽진, 광해의 폐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해석은 일방향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대체로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조선왕조실록'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원치 않는 기록이나 불리한 기록이 있을 수 있다. 하물며 왕의 기록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실록은 왕명에 반하는 내용까지 기록한다. 시대가 흘러 가치관의 차이가 발생해도 우리가 그 사건을 오해없이 바라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객관성 때문이다.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정도전과 새 국가를 건설했을 때부터 순종시대의 '경술국치'까지 500년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보면 꼭 잘 짜여진 한편의 드라마 같다. 만들어지고 흥하고 쇠하고 망하기까지의 전 과정이 한 사람의 인생과도 닮았다.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부분이 많다. 육아는 사람이 완성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 일부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사람이 성장 과정을 배우며, 느끼는 바는 우리 모두는 환경도 어찌할 바 없는 '내재적 성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기본 '시스템'은 그게 DNA에 각인이 되었는지 어쩐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설정된 시스템에 따라 같은 환경에서도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배운다. 쌍둥이를 키우며 같은 환경에서 자라는 두 아이의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에 '내재적 시스템'의 역할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처럼 어찌할 바 없이 정해진 무언가를 '숙명'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초에 조선의 건국부터 짜여진 '숙명' 같은 시스템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떤 연유로 조선의 흥망성쇠를 이끌었을까.

조선이 건국되기 전, 고려는 봉건주의 국가였다. 군사적 공로에 따라 토지를 수여하고 토지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공로자가 취하는 구조다. 그러다보니 귀족이라는 강력한 권력이 탄생했다. 귀족과 무인은 점차 세력이 확장되며 중앙 정부보다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조선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폐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하다보니 지방 호족의 세력이 강해졌고 각각이 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도도 낮았다. 그 결과, 국제적 이벤트에 대한 대응이 약하고 비효율적이었다. 이성계는 이런 봉건제도의 폐해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런 폐해에 대해서는 최근 방영하고 있는 '고려거란전쟁'을 보면 알 수 있다. 외침에 대한 대응 전략 부재, 귀족 간의 권력 다툼, 내란 등 고려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시스템의 한계는 혼란스러운 사회를 야기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전 후, 고려의 군사력은 명과 큰 차이가 있었다. 이성계의 눈에 해당 출정은 비합리적인 봉건제도의 결정판이 었을지 모른다.

이로써 태조는 중앙집권된 체제를 꿈꿨다. 군사력을 효율적으로조직하고 지위하는데에는 중앙집권 체제가 필수적이었다. 봉건국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이후의 왕들은 짜여진 시스템에 걸맞는 성장을 촉진한다.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토지 관리를 정비하며 세수를 확보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유교를 받아들인다. 이처럼 사회가 통합하면서 조선은 '안정적인 국가'로 거듭난다.

파편적인 '불교'의 성향을 벗어버리고, 질서정연한 '유교'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조선은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장려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유교의 이념에 따라 조선은 왕과 신하 사이의 도덕적 관계와 책임을 강조한다. 즉, 왕은 신하의 조언을 경청하고 정치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이 강조됐다. 그 결과 조선은 '신하'들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게 됐다. 현대의 민주주의가 삼권분립에 의해 국가 권력을 분산하고 약화시키는 것처럼 왕권과 신권은 서로 견제하고 화합하며 국가를 운용해 나갔다.

정도전이 제시한 이념은 당시 혁신적이었는데,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명명하며 국왕은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대표라는 인식을 갖는다. 이런 인식은 조선 500년 간 꾸준했다. 중종반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종은 스스로 반정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신하들에 의해 왕이 된 인물이다. 또한 조선 후기 철종은 정치란 아무것도 모르는 가난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신하들에 의해 왕위로 추대된다. 그런 의미에서 제아무리 '왕'이라 하여도, 신하에 의해 제거되고 추대되기도 했다. 반대로 왕들은 왕위에 있으며 신하들의 반정을 언제나 견제하고 경계했다. 이런 시스템은 조선의 전근대까지 잘 이끌어 왔다. 다만, 중앙집권 체제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국가 운영은 가능했지만 외부적 환경과 내부적 변화에 대응하는 유연성은 부족해싸. 경직된 중앙집권 체계는 사회 내부적으로 다양한 정치 세력에 대한 투쟁을 더 중시하게 됐다. 즉, 내부적으로 살아남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국가가 되어 결과적으로 외부 위협에 대한 효과적 전략을 갖지 못했다. 중앙집권적 체계는 외부 세계와 교류를 업격하게 통제했다. 통제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통제 하다보면, 새로운 지식이나 아이디어에 대한 유입, 새로운 세력과 부에 대한 견제가 따라온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 '무역'은 '사형'에 처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중범죄다. 이런 조선의 '내재적 DNA'는 산업혁명을 저해했다. 그저 조선의 정책 결정자들은 '산업'보다 '농업'을 중시했으며, 이는 '변화'보다 '유지와 질서' 그리고 '안정'에 더 촛점을 맞추게 되는 '조선의 태생적 DNA'였다.

결론적으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의 협력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탄생에 결정적이었으나, 봉건적 국가인 고려가 중앙집권적 국가인 조선에 멸하고, 다시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이 시대에 다시 흥하는 것 처럼, 모든 것에는 흐름이 있으며 절대적이고 완전한 정답도 오답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 역사 500년을 살피면 하나의 왕, 하나의 세대, 하나의 시대가 스치듯 지나가지면, 결과적으로 인생 100년과 너무도 닮아 있다. 고로 삶을 살 때, 우리는 그것을 떠올릴 수 있다.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 즉, 나를 흥하고 망하게 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그것이 맞나게 되는 시대와 타이밍이다.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언젠가, 나를 흥하게 할 무기가 되어 줄 어느날을 기대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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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이루어주는 감사의 힘 - 감사는 파동, 힘, 에너지다!
뇔르 C. 넬슨.지니 르메어 칼라바 지음, 이상춘 옮김 / 한문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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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의 목표는 뇌와 컴퓨터를 연결에 있다. 생각만으로 마우스 커서를 조작하고 타자를 칠 수도 있으며 간단한 게임도 즐길 수 있다. 지난 실험에서 일론 머스크는 '페이저'라는 이름의 9살 원숭이를 대상으로 도구 없이 비디오 게임을 하는 초기 실험을 진행했다. 원숭이는 막대를 조종하여 공을 받아내는 '퐁'이라는 비디오 게임을 학습했고 게임에 대한 보상으로 바나나 스무디를 제공했다. 이후 '페이저'는 조이스틱 없이 뇌에서 발생하는 신경 정보만으로 비디오 게임을 하도록 했고 생각만으로 게임을 즐기는 이 실험을 '멍키 마인드퐁'이라고 명명했다. 먼 미래의 SF영화 같은 이 실험은 이미 수 년 전에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얼마 전에는 사람의 뇌에 칩을 이식하는 수술도 성공했다.

이 기술은 어떻게 가능할까. 사람들은 일론 머스크가 사람의 뇌속에 '컴퓨터'를 이식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맞지 않다. 일론 머스크가 사람 뇌에 이식한 것은 '컴퓨터'가 아니라, 일종의 '리모컨'이다. 즉 뇌에 '리모콘'을 넣어서 외부 세계와 소통하고 조작하는 방법인 것이다.

뉴럴링크는 뇌의 특정 부위에 아주 작고 유연한 전극을 삽입한다. 이는 뇌파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 뇌가 일으키는 전기적 활동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지된 활동은 무선으로 외부 장치에 전송된다. 마치 우리가 먼거리에서 리모컨으로 TV의 전원을 키고 끄는 것처럼 말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 뇌의 무엇이 외부적 무언가와 연결하여 작동된다는 것은 상상속 무언가가 아니다. 종교적인 무언가도 아니다. 뇌는 생각과 감정에 따라 각기 다른 패턴의 전기적 활동을 한다. 즉, 떨림을 만든다.

떨림은 무엇인가. 떨림은 모든 것이다. 떨림은 우주의 근본적인 언어다. 이 우주에서 모든 것은 진동하는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한다. 소리에서부터, 빛, 물질까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형상은 궁극적으로 떨림의 다양한 표현이다.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종교'가 아니라, '물리학'의 영역에 있다.

소리는 떨린다. 솔리는 물체의 진동에서 시작한다. 진동은 주변 매질을 통해 전달된다. 이 파장은 뇌에 도달하여 우리 신체를 자극한다. 이때 이 떨림은 전기신호로 전달되여 우리의 뇌로 보내진다.

빛은 떨림이다. 빛은 전자기파의 형태로 진동한다. 이 진동은 전기장과 자기장의 변화를 통해 공간을 건너 전파된다. 이 파장의 크기에 따라 색이 결정되며 이 파장이 우리 시신경을 자극하면 전기신호로 변환되어 뇌로 보내진다.

물질은 떨림이다. 물질은 원자와 분자 수준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떨림은 그 물질이 고체인지, 액체인지, 기체인지까지 결정한다. 또한 물질의 온도와 밀도도 결정한다.

모든 것은 떨고 있다. 이 덜림은 우주의 기본적 작동 원리이자, 우주의 언어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의 전파도 역시 떨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뇌파를 가진다. 뇌파는 떨림이다. 얼마나 떨리는지에 따라 델타파, 세타파, 알파파, 베타파, 감마파로 부른다.

우리가 깊은 수면 상태에 빠지면 뇌는 1초에 0.5에서 4번 사이로 떨린다.

우리가 명상을하거나, 창의력을 요하는 활동을 할 때는 1초에 4번에서 8번 사이로 떨린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거나 평온한 마음을 가지면 뇌는 1초에 8번에서 12번 사이로 떨린다.

적극적으로 사고하거나 집중할 때,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우리 뇌는 12번에서 30번 사이로 떨린다.

이렇게 1초에 몇 번을 떠는지를 세는 단위를 '헤르츠'라고 부르고 각각 떨림의 횟수에 따라, 델타파, 세타파, 알파파, 베타파, 감마파라고 부른다.

과학적으로 아직 연구가 진행중인 부분이기에 과학과 유사과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드는 것이 있다. 바로 '공명현상과 뇌파'의 상관관계다.

공명현상이란 하나의 물질이 진동을 하면 주변의 다른 물질이 비슷한 진동을 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두 개의 종을 옆에 두고, 하나의 종을 때리면, 때리지 않은 옆에 있던 종이 함께 울리는 현상이다. 이처럼 떨림은 서로 주고 받으며 같은 진동수를 갖는다. 그것이 공명현상이다.

일부 이론에서 뇌파 역시 공명현상을 갖고 있다고 본다. 이는 또한 주변 환경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랑, 분노, 감사, 공포, 우울과 같은 인간의 감정은 각각 다른 뇌파 패턴을 갖는다. 사랑은 알파파, 분노는 델타파, 감사는 세타파, 공포는 감마파 활동을 증가시킨다. 우울은 굉장히 특이하게도 좌뇌와 우뇌의 비대칭적인 패턴을 갖는데, 전반적으로 뇌활동이 저하로 이어진다.

어떤 분위기에서 사람은 차분해지고, 어떤 분위기에서 사람은 흥분하며, 어떤 분위기에서 사람은 영감을 받기도 한다. 반대로 어떤 생각을 가질 때,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어떤 감정을 가질 때, 어떤 영향을 주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떨고 있고, 이 떨림은 단순히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 확산되며 주변의 어떤 것에 영향을 주고 그것과 공명현상을 가져 함께 떤다. 결국 나는 무언가에 영향을 주고 무언가에 영향을 받는다.

어떤 생각을 해야할지, 매순간 결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감사하고 즐겁고 긍정적인 감정을 유지함으로써 그 주파수가 갖는 다른 공명현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심리학을 너머, 아직 연구 중인 물리학의 일부분에 속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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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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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160페이지의 얇은 소설이다. 1959년 작품으로 '프랑수아즈 사강'의 24세 작품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집필했음에도 감정 표현이 훌륭하다. 비교적 어린 나이라는 수식어는 소설의 특징을 보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소설 속 감정은 단순 감정으로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 '폴'은 39세 여자 주인공으로 6년 사귄 남자친구 '로제'와 '시몽'이라는 25살의 잘생긴 변호사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갈등에 '나이'는 꽤 중요한 핵심이다.

소설의 큰 뼈대를 말하자면 이렇다. 39세 여성인 '폴'은 '로제'와 연인 사이다. '폴'은 몇 번의 이혼을 경험한 여성으로 이후 로제와 꽤 오랜 연인사이가 된다. 이들의 관계는 꽤 편안한 상태로 '폴'은 '로제'가 없는 시간을 익숙해지고, 외로움의 감정에 익숙해진다. 반대로 '로제'는 이미 익숙해진 '폴'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일과 새로운 인연에 대한 갈망을 갖는다.

개인적으로 '폴'은 남자의 이름, '로제'는 여자의 이름이라고 여겼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남자와 여자를 헷갈리곤 했다. 이 소설은 은연중 남녀에 대해 사회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말하고자 하는 듯 보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폴은 14세 연하의 잘생긴 남성과 감정이 생겨난다. 폴은 자신의 남자친구인 '로제'와의 관계 때문에, 이 잘생긴 남자 시몽과 깊은 관계로 이어지는 것에 죄책감을 가진다. 반면 로제의 경우 꽤 어린 다른 여성과 육체적, 정신적 관계를 가지면서 자책감을 갖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여성과 남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분명 존재하는 듯 보인다. 어린 여성을 만나는 남성을 보는 시각, 어린 남성을 만나는 여성을 보는 시각, 그 나이 차이가 무려 열 네살이나 난다면 사회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설령 진실이 무어가 됐던 사회가 바라보는 편견은 여전하다. 마음이 편한 연인 관계인 '폴'과 '로제'는 그 편안하고 소원해진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었다. 흔히 우리 속담에 '다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간혹 구애가 끝난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비유로 사용된다. 이 비유가 정확히 들어 맞듯, 로제는 폴을 편안하게 대한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로 그녀를 생각한다.

폴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관계에 대한 빈자리를 크게 느낀다. 혼자 남겨지는 외로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이렇게 오랜 연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있으니, 서로가 서로가 아닌 새로운 연인을 만들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르게 한다. '로제'는 젋고 예쁜 여성과 만남을 하며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여기지만, '폴'은 잘생기고 멋진 남성과의 만남에 대해 꽤 묵직한 존재감을 부여한다.

소설의 중반부에 잘생긴 시몽이라는 남자가 폴에게 구애를 시작한다. 시몽의 구애는 또렷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 포인트는 '브람스를 좋아하느냐'는 질문부터다.

실제로 '요하네스 브람스'는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클라라 슈만'이라는 여성을 사랑했다. 안타깝게도 '클라라 슈만'은 로베르트 슈만이라는 동료의 아내였다. 그녀는 역시 브람즈보다 14살이나 많은 연상이었다. 결국 누군가의 아내인 연상의 연인을 사랑하는 '브람스'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으로 상대의 마음을 떠본다.

작가는 책의 제목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같이 물음표를 던지지 않는다. 작가가 강조한 것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같이 점점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 그럴까. 아마 브람스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이 답을 구하는 물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복잡한 삼각 혹은 사각 관계는 소설이 이어지며 깔끔하게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들이 겪는 다양한 감정은 소설을 읽는 내내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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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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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의 갯수는 3천에서 5천 단어 사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 몇 가지를 돌려가며 쓴다. 그러다보면 당연스레 '어휘력'은 줄어든다. 소설이나 전문교양서를 읽게 되면, 사람이 만나게 되는 어휘는 1만에서 2만 범위를 만나게 되는데 일상 어휘에서 사용하지 않는 어휘를 만난다. 일상 언어만 사용하게 되면 모든 감정과 상황에 대해 모호한 표현만 사용하게 된다. 즉, 표현력이 준다. '표현력'은 소통력과 직결된다. 사회에서 '소통'의 결함이 생기면 그야말로 치명적이다.

김영하 작가는 한예종에서 강의하던 시절, 학생들에게 금지한 말이 있다. '짜증난다'는 표현이다. 가령, '서운하다', '억울하다', '속상하다' 등의 표현이 모두 '짜증난다'로 통일된다. 주로 사용하지 않는 어휘는 망강된다. 이런 '언어 퇴화'는 소통 능력의 부재로도 작용되지만, 자신의 감정에 대한 객관적인 직관도 어렵게 한다. '마음공부'에는 '감정에 이름 붙이기'라는 것이 있다. 감정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정명명'을 하면, '스트레스, 불안, 우울'에 대해 면역이 생긴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명확히 하는 이들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대해 더 잘 인지한다. 이들은 자신감과 자기결정력, 자기객관성이 높다. 또한 타인과 의사소통이 뛰어나고 타인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한다. 고로 사회적 상호작용, 갈등해결능력, 리더십 능력 등 여러 영역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비슷한 예로 '대박'이라는 표현이 있다. '대박'이라는 표현은 오래 전 부터 사용해왔을 것 같지만, 의외로 '신조어'에 해당한다. 이 신조어는 너무 무분별하게 사용된다. 놀랐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화나거나, 당황할 때, 모든 상황에서 '대박'은 통용된다. 이처럼 하나의 단어가 가지는 포옹성이 넓어지면, 단어의 의미는 점차 모호해진다. 또한 구체적 뉘앙스나 감정 전달에도 한계를 갖는다. 의미가 확장되고 희석되면 사건과 감정 전달에 있어서 정확성이 떨어진다. 소통의 명확성을 인지하기 위해서 다양한 어휘 표현은 중요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필'이라는 작품을 보면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주인공의 성격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주인공이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월감'에 기인한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신의 지적능력과 사회적 비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는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심리 어떤 곳에서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끊임없이 실패하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무능, 무가치를 느낀다. 이런 내면의 자기모순과 갈등 속에서 그는 내적 고뇌를 겪는다. 사람을 정의하기에 수학이나 도표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2 곱하기 2는 4라는 자연의 법칙과 다르게, 인간의 본성에 있어 때로 계산하거나 예측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부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2 곱하기 2는 5이거나 8일 수 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임이 틀림없으나 멀리 보기에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행한다. 아주 도덕적일 것 같은 누군가도 결국 타락한 채로 말로를 좋지 못하게 마무리 짓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적확하지 않는 모호한 '내면적 갈등과 표출'은 간혹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된다. 이런 갈등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일상적 언어로 이런 모순적이고 허세 가득한 감정을 '찌질하다'고 표현한다.

지난 인연에 대한 애착과 증오가 함께 공존하며 '미련'이라는 모호한 상태가 된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증오심과 다시, 아련하게 떠오르는 추억은 사랑과 증오라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도록 한다. 때로는 폭력적이고 때로는 그렇지 않은 많은 연인들이 갖는 감정이 그렇다.

아이에게 사랑을 듬뿍 주겠다는 마음은 다시,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욕심과 더불어 사랑과 그렇지 않음의 중간 지대에서 아이에게 혼란을 주기도 한다.

때로 우리는 상대적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더 나은 어떤 모습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그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의 모순에 빠진다. 이런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 분열은 때로 명확히 하나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하면 자신의 열등감과 우월감이 복합적인 캐릭터다. 그는 호아금 핀으로 자기 여자 노예들의 젖가슴을 찌르는 걸 좋아했다. 여자 노예들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거나 몸을 비틀면 그로써 쾌감을 갖곤 했다. 아주 오래된 인간의 '우월감'은 사실 깊은 내면의 '열등감'에서 비롯한다. 히틀러나 스탈린의 과거를 살펴도 그들의 원동력이 됐던 우월감 아래, 열등감이 항상 아래로 있었다.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1편과 2편으로 나눠져 있다. 난데없이 인간에 대한 고찰을 독백으로 읊어대는 1편의 심오함은 소설에 대한 접근성을 어렵게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난해한 철학적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긴 장문들은 따지고보면 2편에서 주인공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단서가 된다.

2편이 되면 소설은 본격적으로 외부적인 사건들을 나열해 나간다. 주인공은 자신의 찌질함의 자기 모순 속에서, 보다 나은 이에게 열등감을 갖고, 그 열등감의 연료를 이용하여 우월감을 가지려한다. 다만 그 우월감의 본질은 열등감에서 비롯하기에, 결국 겉에서 보여지기에 그는 모순적이고 우스운 사람처럼 행동한다. 때로는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누군가를 가르치고, 자신의 처지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비웃거나 욕하기도 한다. 다만 열등감은 내면에 숨어져 있고, 우월감은 겉으로 표출되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허세 가득한 찌질함으로 사회를 쌓아가고 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칠 수 있으며, 누가 누구의 위가 되고 아래가 될 수 있는가. 열등감을 연료로 삼아 우월함을 느끼는 주제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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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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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네틱 플로우'의 '몽환의 숲'은 '이루마' 반주에 독특한 가사가 매력적이다. 한때, 이 노래를 무한 반복으로 들었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슬플 때는 멜로디가 들리고, 즐거울 때는 가사가 들린단다. 가사는 제목처럼 몽환적이다. 몽환의 숲은 오감을 초월한 곳으로 묘사도니다. 화날일도 아픔도 없다. 이 노래에서 주인공은 소설과 같이 한 남자다. 새벽을 비추는 초생달 밑 술취한 도심을 걷는 남성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도심의 남성이 갑자기 '몽환의 숲'으로 들어가며 시작된다. 몽환의 숲에서는 모든 것이 초월적이다. 거기서 '그'는 '그녀'를 만난다. 오감을 비롯한 모든 것을 초월한 그곳에서의 초월적 교감을 나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

4분짜리 짧은 이 음악은 2006년에 발표한 '키네틱 플로우'의 데뷔 앨범 수록곡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는 내내, 이 음악이 떠올랐다. 물론 음악이 주는 분위기와 소설의 주는 분위기는 완전 다르다. 소설은 가까이 보기에 방향없이 감정의 흐름만을 전개한다. 그렇게 세계관을 확장한다. 다만 소설을 멀리서 보면, '몽환의 숲'이 떠오른다. 음악을 먼저 알아서 그럴까. 마치 이 노래를 소설화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루키'가 말하고자 했던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 싸인 도시는 분명, '몽환의 숲'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술 파는 곳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취할 수 있고, 나뭇잎는 하늘색, 하늘은 연두색, 눈빛은 보라색, 모든 것이 정반대이고 오감을 초월해 버린 그곳. 하루키는 도시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읽기에 그렇게 그려진다. 그곳에서 나오면 회색빛 현실이 나오고 다시 몽환의 숲으로 들어가면 알록달록한 세계가 펼쳐진다. 소설이 그렇게 읽힌 이유는 음악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 소설의 줄거리를 딱히 읊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루키는 '줄거리'가 아니라 '감정묘사'와 '심리묘사'를 섬세하게 하는 작가다. 고로 소설의 줄거리가 어떤지는 하등 중요치 않다.

줄거리가 의미를 상실하면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매우 몽환적인 이야기를 담아도 어색하지 않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비현실의 묘사는 매우 현실같았고, 비현실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매우 비현실 같았다. 이야기가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심리와 감정을 묘사하는 동안 나는 여지 없이 주인공에 이입했다. 하루키의 묘사가 이입되어 반쯤 내게 이식됐다. 감정을 읽으며 주인공과 동화되는 것은 꽤 매력적인 경험이다. 그의 글을 다 읽고나면 이 기억은 나의 기억이 된다.

하루키의 글은 '내면'의 중심으로 읽힌다. 고로 밖으로 어떤 행동이 일어나는지가 가려진다. 주인공은 생각해보면 꽤 비현실적인 행동을 한다. 다만 감정묘사가 탁월하다보니, 비현실적인 행동이 현실적으로 보인다. 누군가에게 유령의 이야기를 한다거나, 벽으로 둘러 쌓인 알 수 없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모르는 여자에게 말을 걸어 단숨에 연인관계로 발전한다는 설정은 서술 방식에 따라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비현실적이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설득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어쨌건 책을 읽으며 느꼈다. 분명하건데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의 MBTI는 INFJ일 것이다. 하루키의 MBTI도 INFJ일 것 같다. 최근 MBTI에 심취해 있어,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읽게 된다. MBTI 검사를 하면 INFJ와 INTJ가 반반씩 오고 가는 1인으로써, 이번 글을 읽으면 나의 MBTI도 한동안 INFJ가 될 듯하다. 근래 읽는 책의 여운에 따라 내 성향이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연초부터 심한 독감에 시달렸다. 기운은 지금도 남아 있다. 마른 기침이 한 달도 넘게 멈추지 않는다. 아이 입학 준비에 이것저것 신경 쓸 것도 많다. 그밖에 다양한 일들이 쉴새없이 몰아쳐 정신없다. 와중, 700쪽이 넘는 벽돌 소설책을 읽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나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새벽 1시, 침실에서 이 책을 읽는 일은 새로운 감각으로 샤워를 하는 느낌이 든다. 2024년, 꽤 다난하게 시작한 한해지만, 이 책으로 꽤 위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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