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고백 김동식 소설집 4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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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에 너무 맞는 책이다. '양심고백'은 사실 제목이 의미가 없다. 그저 '김동식 작가'의 단편 모음집 시리즈 중 하나다. 김동식 작가의 책이라면 '회색인간'을 이미 읽었다. 대략 어떤 도서인지 그로 이해가 된다면 그 뒤로부터는 도서의 이름이나 순서는 상관 없어진다.

이책은 아주 짧은 단편 여럿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편보다 더 짧은 이런 짧은 소설을 '엽편소설'이라 부른다. 요즘처럼 빠른 컨텐츠 소비가 시대적인 흐름이 된 세상에 '김동식 작가'의 엽편소설은 제격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긴 장편을 소화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와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나면 흐름이 묵직한 장편소설을 꺼내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인지를 알게 된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마다 발생하는 단편적인 사건들은 극의 흐름을 몰입하지 못하게 한다. 단 짧으면 두 세장, 길면 그 두 세배가 되는 소설은 짧게 몰입하고 짧게 쉴 수 있어 좋다.

사람의 죽음에 평점이 매겨지는 소설은 이 소설집의 첫 작품이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평점'이 매겨지며 사람이 이로써 어떻게 행동양식을 바꾸는지는 꽤 흥미롭다. 이런 룰을 만든 '악마' 중 '악마'는 다시 규칙을 '태어나면서 평점'으로 바꾸면서 더 악마스러운 결과가 생긴다는 내용도 그렇다.

자동차나 물건, 빌딩 등의 것들이 아기로 바뀐다는 설정도 너무 흥미롭다. 어떤 소설은 예측불가고 어떤 소설은 예측 가능한데도 재미있다. 소설을 한참 읽다가 '김동식 작가'의 다른 소설도 검색해보게 됐다.

개인적으로 시기마다 잘 읽히는 책들이 있다. 어떤 시기에는 '철학책'에 관심이 있어, 고구마 줄기 캐듯 줄줄이 그런 책만 읽고, 어떤 경우에는 '역사책', 어떤 경우에는 '추리소설'만 줄줄이 찾아 읽는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최근에는 딱히 꽂혀 있는 주제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지나치게 바쁜 탓도 있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개인적으로 무언가에 골똘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심리적, 물리적 시간도 절대적으로 줄어 들었다. 요즘은 다시 잡식성으로 독서의 방향이 생겼다. 개중 짧게 읽을 수 있는 '김동식 작가'의 책을 찬찬히 더 읽어 볼 것 같다.

Calm 어플을 다시 결제했다. Calm 어플은 '코끼리 어플'과 더불어 내가 결제하고 있는 명상 어플리케이션이다. 결제한 이유는 아이에게 '명상 습관'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오늘부터 세션을 시작했고 하나씩 매일 시작하기로 했다. 사람은 하루를 보내면서 굉장히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되는데 그로인해 신경이 예민해지는 경우가 있다. 한창 싸우고 떠들 때이긴 하지만 아이에게 '명상'을 가르쳐서 자신의 스트레스나 감정을 다를 수 있는 습관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이 생각은 오래전 부터 하던 생각인데, '김동식 작가'의 소설을 보다가 문뜩 다시 하게 됐다.

직접적으로 명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지만 소설의 후반부에는 '자살'이나 '우울'에 관한 키워드가 등장한다. 짧은 소설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와 아이에게 가장 위험한 부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영어를 가르치고, 수학을 가르치고,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것중요하다. 건강한 신체를 만들기 위해 뛰어놀게 만들고 운동을 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아이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 무엇보다도 '자살'로 죽을 확률이 그 어느 질병보다 많다.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생존'하는 것 아닌가. 우울증은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다. 어떻게 행복해져야 하는가. 그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배우는 것이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생존력을 키우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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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을 보면 신이 가장 먼저 만든 것이 '천지'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빛과 어둠'이 만들어진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는 '노자 사상'과 맥락이 같다. 노자는 세상을 '음양'으로 보았다. 어떻게 세상을 딱 둘로 나눠서 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노자'가 말한 '음양'은 '정확히 양분된 음과 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나눠지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다.

찬물에 더운 물을 부으면 찬물과 더운물은 섞인다. 이를 '대류현상'이라고 말한다. 밀도가 높은 물은 위로 올라가고, 밀도가 낮은 물은 아래로 내려간다. 고로 분자 단위에서 '섞임'이 발생한다.

찬물은 밀도가 높고 더운물은 밀도가 낮다. 고로 더운물은 위로 올라가고, 찬물은 아래로 내려간다. 분자 단위로 섞이는 이런 대류 현상에 정확한 구분점은 없다. 어디서부터 찬물이고 어디서부터 더운물인지 알 수 없는 층이 생기고 그 층은 미세하게 '그라데이션'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섞이지 않은 '극도로 차가운 부분'과 '극도로 뜨거운 부분'이 존재한다. 고로 '물'이라는 '전체'를 볼 때, '물'은 '하나'이면서, '찬물'과 '더운물'로 양분되어 있다. 더운물과 찬물은 정반대의 성질이지만 서로 맞닿아 있다. 정확히 반대 성질로 분류됐지만 섞이고 있다. 하나이지만 둘이다.

태극의 모양을 보면 위로 붉은색, 아래로 파란색의 모양이 보인다. 태극은 커다란 두극으로 이뤄진 형태다. 정확히 양분되지 않고 들어간 부분과 나온 부분이 존재한다. 서서히 섞임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던 '석빙고'를 보면 돔형 만들어졌다. 그리고 가장 윗부분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여름에 시원한 얼음을 먹을 수 있도록 고안된 이런 디자인은 '음양'의 성질을 잘 이용한 예시다.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찬공기는 아래로 내려간다. 석빙고의 작은 구멍은 위로 올라가려는 더운 공기를 배출하는 곳이며 찬공기는 아래로 떨어진다.

물은 본래 아래로 흐르고, 불은 위로 올라간는 성질이 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촛불을 켜면 불꽃은 위로 얇게 솟구쳐 올라간다. 반대로 강과 계곡은 아래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불의 올라가려는 성질과 물의 떨어지는 성질 또한 '음양'의 원리로 볼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수승화강'이라는 의미가 있다. '수승화강'은 물과 불이 가진 이 성질을 의도적으로 균형있게 다루어 몸의 에너지를 순화시키는 상태를 말한다. 아마 '한의학'에서 말하는 개념 중에 '머리는 차갑게, 발은 따뜻하게'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지 모른다. 이는 '대표적인 수승화강(水昇火降)'을 적용한 사례다.

양자역학에서 '음과 양'이라는 개념은 꾸준하게 등장한다. 음과 양은 하나를 이루지만 둘이다. 둘이지만 하나이고 섞이지만 분리되어 있다. 분리되어 있지만 섞인다. 가장 먼 두극인 '음극'과 '양극'의 모양을 아주 길게 늘리면 우리는 결국 그것이 하나라는 인지를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다. 서로 강한 응집력을 갖고 있다.

전자와 양성자도 서로 끌어당기며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다. 전자는 마이너스, 양성자는 플러스의 성질을 갖는다. 다만 이 둘은 서로 하나를 이루어 원자의 형태가 된다. 이 둘을 억지로 떼어 놓으면 마치 자석처럼 강하게 다시 붙으려는 성질을 갖는다. 이때 이 둘의 질량이 아무리 가볍더라도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 달려가는 속도가 빛에 가까워지면 E=MC^에 의해 무한대의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것이 핵에너지다.

원자를 다시 말하자면 마이너스인 전자와 플러스인 양성자가 있다. 이 둘이 적정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안정적인 상태다. 그러다 두 개의 원자가 서로 달라 붙다가 하나의 마이너스를 공유한 두 개의 플러스가 될 때가 있다. 다시말해 '마이너스'는 플러스와 결합하는데, 마이너스가 꼭 각각 하나씩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로 어떤 원자는 둘이 결합하며 하나의 마이너스를 공유하는데, 이 과정에서 원래 역할을 하던 '전자'가 이 결합에서 소외된다. 이 전자는 이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를 '자유전자'라고 부른다. 이 자유전자는 당연히 '음'의 성질을 갖는다. 고로 이는 '양'으로 이동하려고 흐른다. 이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다.

'음양론'에 의하면 모든 것은 이처럼 '음과 양'의 조화로 구성되고 이로써 세상이 규칙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규칙이라는 것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언어란 인식할 수 있는 단위로 대상을 일반화하고 쪼개어 표현한다. 인간의 언어가 가진 한계다. 인간의 언어는 매우 불완전하다. 빗방울이 바다에 떨어지면 어느 순간부터 빗방울인지, 바다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강물이 바다와 합쳐지면 어디서부터가 바다고 어디서부터가 강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는 흐르고 섞이고 구분된다.

이처럼 음과 양의 성질은 명확하게 '언어화' 할 수 없다. 고로 이를 언어화 한다면 더이상 이 '성질'은 이 '성질'이 아닌 것이 된다. 이 성질을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라고 부른다. 우주의 이치, 만물의 성질. 즉 '도'이다.

'도가도 비상도'

노자의 첫문장이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는 더이상 도가 아니다.'

방금 나는 불완전한 우리의 언어로 '도'를 정의했다. 고로 이 '도'는 '도'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대략의 형태를 일반적인 모습으로 인지했다.

우주는 이처럼 '도'라는 '원리'와 '성질', '방식'으로 작동된다. 모든 것은 조화로운 상태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인간은 다른가. 그렇지 않다. 노자는 '도'라는 기본 원리를 통해, 인간의 행동양식을 규정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남자에 끌리는 것, 왕과 노예는 서로가 극에 위치하지만 섞이고 분열되어 있으며 흐른다는 내용.

이처럼 인간 사회나 인간의 성질이 도를 닮아, '자연스러운 무위의 상태'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봤다. 이처럼 '자연의 도'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덕'이라고 부른다. 노자는 '도'에 관한 글과 '덕'에 관한 짧은 글을 남겼는데 이를 도경과 덕경이라고 부른다. 이 둘을 합쳐 '도덕경'이라 부른다.

도덕경은 '우주'의 이치를 설명하고 모든 것은 우주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기에 '도덕경'을 읽는 것은 '경제, 사회, 사랑, 우정, 사업, 가족, 공부, 운동, 건강' 등 모든 일에 도움이 된다. 이렇게 도를 알고 적용하는 일을 '덕'이라 한다.

고로 '덕'이 많은자는 '도'를 아는 자이다. '도'를 아는 자는 '덕'이 많다. 덕이 많은자는 우주의 원리와 이치를 알고 있으며 이들은 그 작동방식에 맞게 순리적인 삶을 산다.

우주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알고 있다면 세상에 황당한 일은 하나 없고, 불합리한 일도 없으며 발생하는 모든 일에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최초 3분의 1까지 너무 재밌게 읽다가 그 이후로는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을 읽고 있나... 하는 생각으로 읽었습니다.

인식이 확장되도록 하는 아주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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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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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완주하지 못했지만 '모던패밀리'라는 미국 드라마의 컨셉을 좋아한다. '모던패밀리'를 알게 된 것은 유학 시절이다.

시트콤 '프랜즈'를 완주하고 비슷한 프로그램을 찾던 중이었다. 함께 유학 중인 친구가 '모던패밀리'를 추천했다. 얼마보다 멈췄다. '배경 웃음 소리'가 없어서다. 시트콤을 보면 웃음 포인트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다. '모던패밀리'의 경우에는 이 소리가 없다. 고로 어디에서 웃어야 할지 포인트 찾기 어려웠다. 당시 배경에 깔리는 '웃음 소리'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나오던 참이다. 강제 웃음을 유도 한다는 이야기부터 '웃음'이라는 주관적인 포인트를 공급자가 결정한다는 꽤 철학적인 이유도 있었다. 다만 웃기 위해 보는 프로그램에 '철학'은 좀 빼고 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공급자가 '웃음 포인트'를 결정해주는 드라마를 선호하긴 했다.

그 뒤로도' 모던패밀리'는 한참 내 관심 밖이었다. 단순히 배경으로 깔리는 웃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당시 드라마의 소재가 상식 밖이라고 여겼다. 드라마에는 일반적인 가족이 나오지 않는다.

젊은 이민자 여성과 나이든 미국 남편. 동성커플. 입양. 이혼 등 다양한 가족의 형태이 소개된다. 당시 드라마가 짜놓은 독특한 가족의 형태가 참 '미국스럽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가정'의 형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인 가정'이란 어떤 형태일까.

아마 중형 세단 자동차를 소유한 4인 가족.

아버지의 직업은 화이트컬러에, 어머니는 전업주부.

수도권 30평 대 아파트.

거실에 커다란 쇼파 그리고 TV.

저녁이 되면 가족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과일을 깎아 먹으며 웃음꽃이 피는, 주말에는 온 가족이 근처 공원으로 나들이가는 그런 가정일까.

학창시절 만화, 드라마, 책에서 보던 가정은 다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우리집은 아니었다. 해가 지면 아버지, 어머니는 땀과 흙이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고 돌아오셨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 좌식 식탁에 앉아 어제 먹던 찌개를 데워 먹었고 후식으로 '요플레'를 따먹었다. 아버지는 다먹은 밥사발에 보리차를 담아서 드셨고 요플레 뚜껑을 핥아 먹으며 된장찌개가 대충 묻은 수저를 핥아 먹고 '요플레'를 마저 먹었다.

우리집은 할아버지께서 소유하셨던 '감귤보관 창고'를 개조한 집이었다. 꽤 벌레가 자주 출몰하고 가끔 물이 새기도 했다. 변기에 앉을 때는 귀뚜리마, 바퀴벌레, 민달팽이가 변기에 붙어 있지는 않은지 항상 살펴야 했고 할머니댁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했다.

우리집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여겼다. 아버지께서 양복을 입고 출근 준비를 하시면 어머니께서 넥타이를 고쳐주는 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없다. 집은 꽤 화목한 편이었고 나름 모자람 없이 자랐다.

아마 '공자'가 말한 주어진 위치와 역할이 있다는 철학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사람'과 '지방사람'은 원래 다르다는 인식.

고로 나와 서울 사람은 철저히 다른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일반적인 가정은 일반적인 가정답게

우리가족은 그냥 우리가족답게.

고등학교를 올라갔다. 우리집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인식을 한 채 다른 아이들을 바라 보았다. 나처럼 특수한 사람은 적고 모두 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여겼다. 모두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입을 닫고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 모두가 평온해 보였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살 한살 나이를 먹으며 알게 됐다. 생각보다 편부모가 많았고, 생각보다 동성애가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폭력적인 아버지, 폭력적인 어머니도 판타지 속 이야기가 이었다.

아이를 버리고 도망간 어머니, 재혼한 아버지의 자녀, 재혼한 어머니의 자녀와 형제 자매가 되는 일, 서로가 꽤 불편한 관계가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유학 시절에 알고 지내던 형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냥 작게 회사를 운영하시는 평범한 집'이라고 했다

그 '작게'라는 모호한 '부사'가 직원 300명이었다는 사실을 보고 적잖게 놀랐다.

'직원 300명이 작아?'

형은 나의 놀람에 놀랐다. 왜 그런 포인트에 놀라는지를 모르는 눈치였다.

'일반적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말하는 평균을 닮았다. 우스께 소리로, 동네 마을 버스에 빌게이츠가 타면 그 버스는 평균적으로 억만장자들이 탄 버스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저 환상뿐인 '일반적인'이라는 이야기.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이라는 소설은 '알콜중독 아내', '동성애자 남편'과 그의 애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재로 보면 자극적인 듯 보이는 것이, '모던 패밀리'를 닮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어떤 누군가에게는 현재의 나의 삶이 굉장히 특수한 삶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특수한 삶을 살아가며 그 평균을 내어 '환상'을 만들어낸다. 누군가는 역시 '동성애'를 느끼고, 누군가는 편부모를 가졌으며, 누군가는 이혼이나 사별을 겪고, 누군가는 아이를 잃는다.

최대한 가장 그럴싸한 겉모습만 보여주며 민낯은 이렇듯 혼자만 가지고 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스스로를 위로한다.

'저 사람은 과연 어떤 민낯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을까'

마치 아무리 잘나고 멋진 사람이라도 그런 동정심이 생기면, 질투나 부러움, 미움 등의 감정이 사라진다.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나. 나나 너나.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러고 나면 생각한다.

다 고만고만한 인간등리 만드는 세상이다, 연민이 들고나면 누군가를 미워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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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 - 삶의 무기가 되는 멘탈, 심리의 열쇠
김원우 지음 / 모모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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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을 것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용감하다는 의미다. 반대로 잃을 것이 많으면 '겁'이 많아진다. 잃을 것이 많다와 적다는 것은 '소유'의 유무를 말한다. 소유한 것이 많으면 겁이 많아지고 소유한 것이 없으면 겁이 없어진다.

무소유한 자가 가장 용감하고 겁이 없다.

어디서 포식자가 나타나 자신을 위협할지 모르는 상태에 놓인 초식동물은 언제나 불안감을 느낀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자는 초원 어디에 누워서나 낮잠을 자지면 초식동물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대상을 경계하느라 항상 걱정하고 불안해 한다. 우리 사회가 '자연'을 닮아, 우리 사회에서도 '포식자'와 '피식자'가 있다. 어떤 누군가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어떤 누군가는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소유한 것이 적은 사람을 사람들은 가장 두려워한다. 무소유한 사람이란 '가진 것이 없는 가난뱅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뱅이는 단순히 물질적 빈곤상태일 뿐이지, 무소유한 사람은 아니다. 진정한 무소유란 '욕구'를 초월한 인물이다. 즉 100억을 갖고 싶은 가난뱅이는 실질적으로 무소유한 자가 아니다. 차라리 100억을 잃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부자'가 훨씬 더 무소유한 사람이다.

관계욕, 수면욕, 물욕, 성욕, 식욕을 포함해 모든 욕구에 초탈한 사람이 가장 무소유한 사람이며 인간은 이런 이들에게 경외감과 두려움을 갖는다. 자식이 있으면 자식에 연연해 하지 않고, 연인이 있으면 연인에게 종속되지 않으며 돈이 있어도 돈에 소유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어떤 누군가는 상대의 눈치를 살핀다. 관계가 끊어져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과 관계가 끊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두 관계에는 '소유욕'이라는 차이가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많이 소유한 사람을 동경한다. 다만 모든 욕구에 초탈한 인물을 두려워한다. 동경의 대상과 두려움의 대상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동경은 '환상'의 영역이다. 반대로 두려움은 '현실'의 영역이다. 인간의 기본 욕구는 '생존'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유전자는 무조건 '생존'을 우선시 한다.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는 생존의 가능성을 올려주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고로 '동경'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인간이 타인에게 느끼는 가장 '상위의 감정'이다.

사람은 자신을 기준으로 타인을 바라본다. 그 차이에 따라 여러 감정이 마음속에 일어난다. 자신보다 훨씬 못난 사람은 종처럼 여긴다. 우월감을 느낀다. 자신보다 조금 뒤처진 사람에게는 하찮음을 느껴, 무시하게 된다. 자신보다 약간 부족한 사람에게는 동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는 공감을 가진다.

이제 자신을 넘어 자신보다 조금 앞서 나가는 사람에게는 시기심을 갖는다. 자신보다 멀리 앞선 사람에게는 존경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 차이가 지나치게 커져서 넘을 수 없는 벽, 초격차가 되면 더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그 대상에게 '두려움'을 갖는다.

동경과 두려움은 그런 차이가 있다. 무소유한 자들은 자유로움 속에서 살아간다. 그 어떤 유혹이나 관계, 물질에서도 자유로은 그들은 어떤 외부적인 대상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따. 소유가 많을수록 사람은 이를 지키기 위해 타협하고 대로는 자아와 양심을 잃기도 한다. 반면 무소유한 자는 외부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내면의 용기를 갖는다.

모든 걸 잃어도 괜찮다는 마인드를 가슴에 품고 있을 때 인간은 자존감과 자신감, 용기가 생기고 외부에서는 그런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생기는 법이다. 우리는 종종 소유가 많은 삶이 성공의 척도로 여기지만 그럴수록 잃을 것이 많아지고 불안이 커진다. 진정한 용기는 많고 적음이 아니라 집착을 내려놓음에서 비롯된다. 무소유란 단지 물질적인 소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려움과 욕망, 사회가 부여한 기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을 살아가는 상태를 뜻한다.

이론 머스크는 창업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젊은 시절, 그는 단돈 1달러, 대략 1300원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는지 실험했다.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였다. 그는 주로 핫도그, 오렌지, 파스타, 녹인 치즈 값은 싸구려 음식을 먹으며 생활을 했고, 자신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도 살 수 있겠다는 것을 확인하고 창업에 뛰어 들었다.

모든 걸 잃었을 상황도 감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 이후, 그가 벌이는 사업은 꽤 도박적일 만큼 위험했다. 때로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것을 다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주저함이 없었다. 이유는 모든 걸 잃어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나.

모든 걸 잃어도 감당할 자신을 가지면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걸 얻을 수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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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짓기
김시래.김태성.최희용 지음 / 파람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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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가의 기적, 34번가의 기적, 7번방의 선물.

모두 비슷한 이름이다. 이처럼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을 '극의 제목'에 사용하는 경우는 적잖다.

'택시운전사', '택시운전수', '택시운전기사'

이런 제목은 익숙한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해 빠르게 전파되고 제목을 몇번을 더 되뇌는 효과가 있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라는 제목은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더니', '핸드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핸드폰을 떨어뜨렸더니'와 너무 비슷하다. 이처럼 비슷한 제목은 틀린 제목을 몇번 되뇌는 과정에서 저절로 각인되는 효과가 있다.

자고로 '외우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떠오르게 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이 둘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답하기도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은 쉽게 각인되는 것이 가장 좋다.

예전 한 정치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욕을 먹더라도 많이 알려지는 것이 좋다.' 그 말의 저의는 이렇다. 100명에게 알려지고 100% 지지받는 정치인보다 100만명에게 알려지고 0.1%에게만 지지 받는 정치인이 결과적으로 더 낫다는 의미다. 그렇다. 100명에게 알려지고 100% 지지를 받아봐야 결국 100명이다. 다만 100만명에게 알려지고 0.1%에게만 지지를 받으면 결국 1000명이다. 결국 만인에게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인지도'가 높은 쪽이 무조건 이득이다.

사람에게 '기억이 나도록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도쿄대 의대 명예교수 요로 다케시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웃으면서 생각을 바꾸지만 설득되어 생각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

예전 동화 중 '바람'과 '햇님'의 나그네 외투 벗기기 시합과 닮았다. 결과적으로 느리다고 생각되는 방법이 가장 빠른 법이다. 얼핏 내가 살던 동네에는 재밌는 이름의 음식점들이 있다. '오리전문점'인 '탐관오리'나 '고기전문점'인 '육값하네'가 그렇다. 이런 이름들은 '헛'하고 헛 웃음이 나오지면 결국 각인되는 효과가 있다.

이처럼 반복적인 변주를 통해 기억에 각인시키는 방법은 광고와 정치, 미디어에서 자주 활용된다. 특히 반복된 노출과 유사한 변형은 처음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데 어느 순간 인식 속에 스며들어 결국 자연스레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사람의 기억 속에 남기 위해서는 단순 반복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소위 '감정의 고리'를 활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순 정보보다 자신의 감정에 연결고리가 있는 요소에 집중하고 집착한다. 고로 아무리 비슷한 제목이라도 그 속에 특정한 감정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면 그만큼 강하게 각인된다.

앞에서 언급한 '요로 다케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웃음'이나 '유머'는 꽤 적잖은 감정의 반응이다. 우리 인간은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 상대를 기억한다. 이처럼 우리의 감정을 사용하고 반복적이고 기억나게 하는 작명법을 '퓨즈'라고 한다. 퓨즈(FUSE)는 Fun(재미있고), Unique(독특하고), Story(스토리가 담긴) 그려먼서도 Easy(쉬운) 이름을 뜻한다. 이러한 것들이 퓨즈처럼 결합되어 빛을 만드는 법이다.

나의 블로그 이름도 그렇다. 블로그에는 천문학에 관한 이야기, 양자역학에 관한 이야기, 시사에 대한 이야기, 역사에 관한 이야기, 자기계발에 대한 이야기, 경제나 주식에 관한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가 있다. 대체로 책을 읽고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뱉는다. 보통 먹고 소화하면 먹은 모양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무엇을 먹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의 글이 그렇다. 나는 책이 주는 영양분을 삼키고 소화시켜 블로그에 배출한다.

고로 나의 블로그는 화장실이고 글은 똥이다. 다만 사찰에서 화장실을 이르는 '해우소'라는 이름을 지어서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다시 내가 먹고 소화하고 배출한 양분은 다시 누군가의 양분이 된다. 그것은 다시 돌고 돌아 나에게 온다. 예전에 언급한 적 있지만, 열역학 제 1법칙과 제2법칙에 위배되어 불가능하다는 무한동력이 먹고 싸지르는 이 블로그 내에서 가능하다고 여긴다. 내가 먹고 배설한 무엇이 온라인 이곳 저곳에 거름이되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배출을 공개적으로 싸질러도 충분하고 배변을 참을 필요도 없다. 실컷 먹고 마음껏 배설한다.

예전 '먼 곳에서' 라는 소설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스웨덴 농장 감자에 떨어진 빗방울도 언젠가는 호랑이 방광 속에 있었다'는 대목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자' 사상과 불가 사상을 닮았다.

이야기는 꽤 돌고 돌았지만 결국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는 전체를 함축하는 대표 '문장'과 '단어'를 선출하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를 대표하는 이를 신중하게 선거하든 '이름'을 선출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책을 읽다보면 제목에 이끌려 읽되, 결국 이름과 달라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또한 일단 '선택'됐다는 점에서 '선택받지 못한 다른 도서들보다 더 낫다.' 결국 이름은 본질을 담은 또다른 본질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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