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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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군가에게는 망상적인 이야기이겠지만 혹은 비현실적인, 허황되거나 의미 없는 이야기겠지만, 최근 이 물음이 내 삶의 순간을 함께 했다.

아이와 동네 서점에서 책구경을 하다 가장 얇은 책 하나를 골라 집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죽일 수 있는 가벼운 단편을 집어 든 것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가볍게 첫장을 넘기고, 두번 째 장을 넘겼다.

'톨스토이가 쓴..', '민음사 고전..', '죽어가는 한 남자의 기록..'

그 키워드가 가슴으로 다가왔다. 한 손에 잡히는 가벼운 소설이 갑자기 묵직해졌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면 여기저기 많다. 전쟁이나 범죄 영화에서는 너무나 쉽게 죽음을 묘사하고 그 죽음에 '극'이라는 설정이 자각되면 아무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꽤 현실적이다. 멀쩡하던 한 남자가 병을 얻고 서서히 죽어가는 묘사, 죽음을 맞이하면서 겪는 다양한 생각의 변화, 주변, 그 주변을 바라보는 죽어가는 사람의 질투와 감사함, 반복되는 희망과 좌절.

단 하나의 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시선이 묘사된다.

아이와 정신없이 서점을 나오느라 '책'은 구매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훑었던 책의 이야기가 아른거렸다.

'아직 읽어야 할 책도 많은데...' 하다가도

'그러나 지금 읽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겠다.' 싶어 아침 일찍 서점 문앞을 기다리다가 첫 손님으로 지체없이 책한권 집고 나왔다.

그후 단숨에 읽었다.

안정된 미래와 세속적 성공에 대한 추구, 인정 받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것은 종국에 가서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반 일리치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삶의 터전이 그저 허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혹시 내가 부여 잡고 있는 것들 또한 무너지면 빈 껍데기일 뿐이지 않을까.

이반 일리치는 법조계에서 일하는 러시아 제국의 상류층 관료다. 비교적 평탄한 경로를 밟았고 사회적 성공을 이룬다. 그의 커리어가 전형적인 모범적 공무원의 그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법률 공부를 하고 법관이 된다. 경력을 쌓으며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와 존경을 받는다. 매순간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자신의 업무에 규칙과 절차를 지킨다.

도덕적으로 명백한 '오류'를 저지르지도 않고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충실히 따르며 부정을 저지르거나 불의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되려 법관에 맞도록 규칙과 법, 절차를 중시하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삶의 전반에는 깊은 차원의 도덕적 결핍이나 오류는 없다.

그런 그가 종국에 와서 자신의 삶을 톺아가며 느낀 오류라면 '타인의 기준에 맞춘 표면적 삶',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한 고찰의 부재' 정도일까.

소설의 중반부에 나약해가는 자신을 보며 그나마 놓치 못하고 한평생 모신 '품위'를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모범적 법관이 시간이 지나며 점차 죽음을 맞이하는 그라데이션 된 과정을 지켜보면서 평범한 일상이 '비현실'로 넘어감을 경험한다.

육체보다는 정신이 나약해지고 지독해져 간다. 갖추고 있던 모든 허울이 '스르르' 녹으며 '삶'에서 갖추던 모든 것들이 '태생적'으로 돌아감을 관찰하게 된다.

가끔, 아니면 거의 매순간 우리는 '필멸자'의 숙명을 잊는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주가를 바라보고 비싼 자동차와 그럴싸한 직업을 소유하고자 치열하며, 괜찮은 취미를 가지고 다수의 존경을 갈망한다. 그 놓지 못하는 먼지 같은 것들이 자신을 지탱해 준다고 착각하며 고개를 하늘을 향해 들어올린다.

이반 일리치에게 있어서도 집, 직장, 사회적 성공은 견고한 삶의 축이었다. 다만 죽음이 그의 삶에 문을 두드리는 순간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하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모든 관계가, 모든 성공이, 그가 믿고 있었던 모든 가치가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린다.

'하인'에게 의지하고 싶고 아이처럼 위로 받고 싶어한다. 나약함 앞에 '지위'는 '인간'을 구분하는 선이 되지 못한다. 죽음 앞에 모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빈손이다.

'제일 가벼운 책'이라는 '가벼운 마음'이 선택했던 이 책이 묵직하게 다가와 가슴에 내려 앉는다. 결코 단번으로 끝내서는 안 될 책이다. 스스로가 '필멸자'라는 착오에 빠질 때, 스스로 오만해지고 세속적 좌절과 고민에 쌓여 있을 때.

그때마다 꺼내봐야 할 명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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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인생 - 다정한 고집과 성실한 낭만에 대하여
문선욱 지음, 웨스트윤 그림 / 모모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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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위병소 근무는 지옥 같았다. 아침 일찍 시작해서 저녁까지 위병소를 지켰다.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부대 정문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일이던가.

다른 병사들은 무엇으로 시간을 채웠는지 모른다. 방탄모를 눌러 쓰고 K2 소총을 들고 말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하루를 보낸다. 앞은 심심함 그 자체였다. 구경거리는 흔들리는 나무 밖에 없었다. 기껏해봐야 관리되지 않은 '임야지'가 있을 뿐이었다.

가끔 재밌는 선임을 만나면 '너는 뭐하다가 왔냐?'며 주거나 받았다. 친구와 사업하던 고참, 여친과 동거하던 후임, 연예계에서 활동했다던 이까지.

그들의 인생은 다양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나면 어느새 3시간, 4시간이 지나갔다. 여행 간 일, 이별 이야기, 사랑 이야기, 사기 당한 이야기, 불행했던 가정사 등. 갓 스물이 넘은 청년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흥미로웠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나는 말 없이 '임야'만 바라봤다. 떠올릴 추억이 많지 않음을 깨달았다.

학창시절은 기껏해봐야 '학교', '집'이었다. 가정사는 아쉽게(?)도 화목한 가정이었으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왕따를 시키지도 않았다. 큰 이탈을 하지도 않은 무난한 삶이었다. 일상의 가장 큰 '이탈'이라면 '군입대'를 했다는 것 쯤일까.

함께 '근무' 서던 선임들은 '그 새끼, 참 더럽게 재미없게 살았네...' 했다.

이후부터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그림자를 봤다. 내리 6시간 이상을 봤다. 그러던 것이 나중이 되면 아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 한곡이 3분이면 스무 곡이면 한 시간'

알고 있는 모든 노래를 마음속으로 다 불러도 1시간을 채우지 못함을 깨닫고 머릿속에 무얼 채우고 살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떠올릴 추억도 크지 않다. 아는 바도 많이 없다. 그 후회감에 전역 후를 다짐하게 됐다.

100일 휴가를 받고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무릎이 좋지 않으셨다. 하루종일 방에만 계셨다. TV는 채널 9번을 항상 고정하고 보셨다. 일병 휴가를 받고 할머니를 뵀을 때도 할머니는 TV채널 9번에 시선을 고정하셨다. 가만히 하루를 보내셨다. 상병 휴가 때에도, 전역을 앞둔 말년 휴가 때에도 그러셨다.

부대 복귀를 하고 내무반 천장을 바라봤다. '거참 시간 더럽게 안가네...'하고 푸념을 하는데 문뜩 할머니가 떠올랐다. 아마 지금도도 9번을 고정하시고 계실 것만 같았다.

몇 시간의 근무, 군생활 2년 조차 견디기 무서울 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내성적인 손자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설 향수의 주인공이 '자신의 몸'에는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처럼, 나는 존재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휴가차 할머니댁에 갔을 때, 함께 TV를 말없이 보며 시간 때우고 왔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선임들에게도, 할머니께도 향기 없는 사람인듯 했다. 그만큼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자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병상에 누워 보낼 노후를 생각하면 쓰지 못해 죽을 '통장 잔고'보다 떠올릴 추억이 많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 '스릴러', '코미디'. 뭐든 추억이라면 쌓고보자.

그것이 내 20대의 '철학'이다.

'문선욱'작가의 '저스트 인생'을 보니, 지나치게 '현실'에 몰두하던 30대 후반의 스스로가 보였다. 또다시 '일', '집', '일', '집'하며 재미없는 시간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 보게 됐다.

20대의 나의 선택은 그런식이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을 것을 선택해보자.' 나는 나를 너무 잘안다. 스무 살의 나는 '학교와 집'의 반복이었다. 나는 루틴을 지키며 재미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특별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평범한 사람이 나는 너무 쉽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 뒤로 내가 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습관이 생겼다. 20대에 JYP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노래와 춤을 추고 인기상을 받았다. 과묵하고 내성적인 내가 하지 않을 선택이지 않은가. 난데없이 가방하나 들처매고 유학을 떠나고 구글에 노출된 세계 바이어들에게 메일을 보내 컨테이너 단위의 상품을 수출하기도 했다.

20대에 나를 움직이던 생각은 '언제 해보겠어?' 였다. '언제 해보겠어?'는 꼭 좋은 모습으로 결과를 만들진 않았다.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서른 넘어서 삶이란 '즐기는 것'에서 '생존해 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하다보니 뭘하고 있는줄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김영하 작가가 중국으로 글을 쓰러 갔을 때, 비자 문제로 되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며 '이 또한 소재가 되겠네' 했단다. 번뜩이는 말이다.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은 소재다. 문학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일상을 빼다박은 지지부진한 이야기에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공포', '스릴러'와 같은 '극적인 상황'을 모두는 선호한다. 누군가는 돈주고도 구경하는 그 일을 직접 체험 해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지 않을까.

잊혀졌던 나의 철학이 스믈스믈 살아난다. 삶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재밌고, 보는 것 보다는 해보는 것이 재밌다. 그런 의미에서 희노애락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같은 일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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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주다 - 사이비 종교 전문 탐사 기자의 국내 최초 잠입 취재기
장운철 지음 / 파람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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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철' 작가는 30년간 사이비, 이단 현장을 취재, 분석 보도한 전문기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에 '밥 먹고 X싸는 신'은 50명 가량된다.

스스로 '신'을 자처하는 '인간' 말이다.

과거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 있다. '우리나라가 맞나?' 싶은 이야기가 적잖게 쏟아졌다. 허구를 이야기한 페이크 다큐인가 싶을 만큼 놀라웠다.

가끔 취재 프로그램이나 뉴스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내용이긴 했으나 그토록 적나라하게 보여진 다큐는 처음이었다.

심신이 나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믿음'을 인질삼는 이단 종교는 당사자 뿐만아니라 그 주변을 초토화 시켜 버린다.

비슷한 경험은 여럿있다. 신논현역에서 강남역 방향으로 걸어 가다보면 몇번 씩 길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교보문고가 어디에 있나요?'

직선거리로 수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의 '장소'를 묻는다.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키면 '감사합니다.'하며 이내 본색을 드러낸다.

'혹시 인상 좋다는 이야기 안 들으시나요?'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조상 '덕'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스토리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끝까지 들어 본 적은 없다. 다만 지인에 따르면 그들을 따라 끝까지 가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결국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차림비용'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차림비용은 50만원에서 200만원 정도되고 형편에 따라 더 내거나 덜 낸다고 했다.

'정운철 작가'의 '나는 교주다'에 이 같은 사이비, 이단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개 기독교나 불교의 이단과 사이비를 다룬다. 어쨌건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흔하다.

사이비 이단은 아니지만 혹은 알 수 없지만 비슷한 경험은 있다.

지인을 따라 소규모 교회를 간 적이 있다. 교회는 당구장과 노래방 위와 아래로 위치한 빌딩에 자리했다. 규모는 크지는 않았고 3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설교'를 들었다. 설교가 끝난 뒤, 목사 님은 지하 주차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함께하는 교인들이 함께 했다. 지하 주차장에 억소리나는 검정색 고급 세단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목사님의 고급 세단 자동차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공단 지역으로 갔다.

'흰가운'을 입으라고 하셨다. 가운을 입고 성큼 성금 바닷가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허리까지 잠기는 곳에 이르자, 목사님은 주문했다. 목사님 말씀이 하시고 머리를 밀면 머리 끝까지 바닷물에 담구라는 지시였다.

그 의식을 3~4회를 하고 돌아왔다.

일부는 사진을 촬영했고 얼마 후 내 사진이 해당 교회에 동의없이 걸렸다.

나중에 듣기로 '침례교'라고 했다. 침례교에서는 머리가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의식을 진행한다고 했다.

내가 다녀온 교회가 이단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만나는 교인 중 일부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네'하는 쪽과 '그럴 수도 있어'라는 쪽으로 나눠졌다.

이에 관해 가치판단하지 않겠다. 어쨌건 독특한 경험인 것 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사이비'이건,아니건 개인적 믿음에 관해서는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헌금을 얼마를 하고 종말설을 믿거나 말거나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만 어떤 단체는 '치유'나 '치료'를 행한다. 거기서부터는 분명한 반감이 생긴다.

유튜브 어느 채널을 보니 목사가 '조현병', '정신질환', '자폐', '암'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얼핏 목사가 뭐라고 주문을 외우고 이마에 십자기를 긋거나, 소리를 지르도록 요한다. 규모가 작지도 않다. 이 장면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한다.

개인적으로 그때부터는 강력한 반감이 든다.

단언컨데 '병에 관해서는 '목사'가 아니라 '의사'의 몫이다. 병원을 다니며 영적치유던 믿음치유건 병행하는 것은 괜찮다고 본다. 다만 어떤 목사는 '의사'를 불신하고 '교회'에서 치유하는 것만을 강요한다.

어떤 질병은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치료기간을 놓치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교회' 내에서 이뤄지는 치료는 때로 효과가 있기도 하다. 이는 '플라시보'라고 알려진 '위약효과'와 비슷한다. 플라시보에 해당되는 질환들은 때로 치료자에 대한 강한 믿음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자연치유되는 질병들이 포함된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약은 '플라시보'가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치료는 때로 입소문을 타기도 한다. 다만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에는 강한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장운철 작가의 '나는 교주다'에는 다양한 사이비 이단이 등장한다. 피가 거꾸로 솟는 거짓 사기꾼들의 만행과 이해가 어려운 단체와 사람들이 이야기는 흥미롭게 읽히다가도 강한 호기심이 불러 일어난다. 그러면서 가끔은 몹시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모아보니 먼 이야기 같으면서, 어쩌면 흔한 이야기 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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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배우는 시간 - 말이 넘쳐나는 세상 속, 더욱 빛을 발하는 침묵의 품격
코르넬리아 토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서교책방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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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의 최악의 적은 '선의(善意)'다. '말'은 '의도'는 좋았으나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선의(善意)는 그런 의미에서 선(善)과 가장 먼 어떤 것일지 모른다.

요즘은 컨텐츠가 넘쳐 말하고자 하는 사람도, 말도 많다. 예전 같으면 귀를 기울여야 할 정보가 흔하다 못해 독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말할 창구가 많아졌고 들을 창구도 많아졌다. 고로 쉬운 인스턴트 말들이 너무 가볍게 오고 간다.

좋은 의도로 입을 벌렸으나 그것은 누군가를 죽이기도 한다. '좋은 의도'를 가장한 '악플'이다. 이것의 가장 나쁜점은 '선의(善意)'를 가졌다는 '의도' 때문이다. 한번은 아이의 교육에 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댓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자란 아이의 미래가 걱정스럽네요. 잘못 키우시고 계신 것 같아서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서 댓글 남겨요.'

아이의 교육에 관한 글은 아이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있다는 글이었다.

해당 글에 댓글 작성자는 말했다. 요즘 시대에 '한자'는 중요하지 않고 한자를 배우는 것은 사대주의적 사고 방식을 강제 주입한다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디지털교과서'가 도입되는 시대에 '스마트 기기'를 하루라도 빨리 사용하게 하는 것이 미래 세대에 좋다는 이야기였다.

진심으로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어 장문의 글을 쓴다는 댓글 작성자의 '선의(善意)'가 느껴졌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형식적인 답변을 달았다. 몇분 뒤에 다시 댓글로 '성의 없는 답변이네요. 안 바뀌실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라고 달렸다.

본문에는 꽤 많은 응원의 글이 달렸으나 '선의'를 가졌다는 하나의 댓글은 집요하게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라는 말로 나를 설득하고자 했다.

사람의 종류는 워낙 다양하여 생각도 다양하겠지만 '누군가의 선의'가 반드시 좋은 의도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고로 내가 믿는 진리가 비록 객관적 진리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할 때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는 나의 교육철학을 비판하며 끝까지 나의 교육관이 바뀌기를 기대했다. 몇번의 대화를 하다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다면 그것은 상대의 의견일 뿐 진실은 아니다. 고로 상대의 말은 상대의 말대로 두고 스스로가 가진 생각을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모든 말에 귀를 닫는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독서의 가장 좋은 점이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독서는 입을 닫고 듣는 행위다. 책을 읽을 때 모든 사람들의 입을 닫는다.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하여 동영상을 채보기도 전에,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스크롤을 내려 '답글'부터 다는 세상이다. 수학자 파스칼 또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오로지 방 안에 조용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했다.

세상의 템포가 빨라지면서 그곳에 함께하는 나의 템포도 조급해짐을 느낀다. 최근들어 '유튜브 영상'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당연히 책을 보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 들었다. 아마 정신적 피로도가 높아져 넋놓고 볼 수 있는 매체를 찾아서 그런 듯 하다. 다만 아이러니하게 그렇게 영상을 찾아 볼수록 점점 정신이 '멍'해짐을 느낀다. 영상이 끝나면 이어지는 다른 영상, 그 영상이 추천하는 다른 영상을 쫒다보면 어느새 꽤 많은 시간이 흘러 버린다. 다시 스마트폰을 내려 놓고 책을 든다.

TV 생방송은 잠시 쉬어가는 그 1분의 짧은 시간에도 '휴식'이 아니라 '광고'를 집어 넣는다. 즉 우리 현대 사회에서 휴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코르넬리아 토프'의 '침묵을 배우는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물론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도 가능하다.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 빵에 잼을 바를 수도 있다. 다만 그때조차 입을 다물면 더 빨리 골고루 잼을 바를 수 있다.'

TV를 보면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거나 스마트폰을 볼 수도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책이 사람을 조용하게 만드는 것은 니체의 말처럼 책이 가진 꽤 괜찮은 장점인 것 같다.

'귀인이론'에 따르면 말이 적으면 더 똑똑하고 교양 있고, 유능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실제로 어떻든 말이다. 게다기 여기에 미소까지 더해지면 20%는 더 지적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최근 머릿속이 꽤 시끄럽고 어지러운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나의 입은 다물어 있었다. 워낙 내향형 인간이라 불필요한 말은 애초에 많이 하진 않지만 그래도 지나고나서 '그 말은 왜 했을까' 싶은 순간들이 있다.

최근 새로운 앨범을 발매한 '지드래곤'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말투가 바뀌었다'라는 댓글이 많다. 이에 대해 그는 '말에 무게'를 알게 되어 조심스러워졌다고 답했다. 그렇다.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에는 '말'의 '꼬리'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이들이 많다. 그러다보면 '본질'이 흔들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고요한 사회가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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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로 살 뿐 1 - 원제 스님의 정면승부 세계 일주 다만 나로 살 뿐 1
원제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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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할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원제 스님'이 하는 말이다. 말에 따르면 영원한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러한 사랑을 찾는 사람의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고 뒤바뀌기 때문이다.

스님의 '세계여행기'라는 꽤 독특한 소재의 에세이를 서점에서 골라왔다. '술술' 읽히다가 어느 순간에는 '스님'이라는 '작가'의 특성과 '세계여행'이라는 소재 때문에 적잖은 의문을 받을 듯였다.인터넷 서칭을 해보니 실제로 그랬다.

수필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모두는 다만 스스로를 살 뿐이다. 다만 직업이 주는 정형화 된 틀에 적확한 인물이 되기를 사람들은 바라는 모양이다. '선생'은 용모 단정하고 바른 삶을 살고 '스님'이라면 '속세'와 '욕'에 먼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강박은 모두 가지고 있다.

물론 그런 모습이 직업의 본질에 가깝다. 다만 과연 '직업적 본질'에 '자아'를 일치하는 삶이 스스로의 선인가는 생각해볼 만하다.

글을 쓰다보면, 우연히 알고리즘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기회를 얻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적잖히 놀란다. 생각보다 생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프로불편러'들도 많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악플'이나 '욕설'도 많다. 그들이 존재하는 바와 같은 이유로 '나' 또한 다만 '나'로 존재할 이유가 된다.

얼마전 지인과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담배피는 학생을 보았을 때, 훈계를 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로 지나가다가 중학생 무리가 담배피는 모습을 보고 훈계한 적은 있다. '훈계'라기보다 '끊으라고는 안 할테니까, 어른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피우라'고 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담배끊어'라고 한다고 그들이 끊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학생의 흡연은 '불법'도 아니다. 그들을 보며 '어짜피 본인 인생'이라고 답한 적 있다. 어른으로써의 무책임일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모든 일에 훈계할 수는 없다.

공부는 왜 안하니, 집에는 언제 들어가니, 집에 들어가면 손은 씻었니, 등

학창시절 친구들과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어른에게 훈계를 받은 적 있다. 늦은 시간도 아니고 친구들과 축구 게임 2시간 했을 뿐이다. 그 훈계를 받았다고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의 인생에 관여하려면 겉으로 드러나는 이상의 책임을 지어야 한다. 대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만큼 묵직한 책임을 갖지 않으면 스스로 질 수 있는 책임 정도까지만 관여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쨌건 삶의 종류는 워낙 다양하다. 고로 '저런 삶'도 '삶이다'하고 관용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통계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하루 한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고로 매일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고 누군가는 살해 가족이나 지인이 된다. 다시 누군가는 당사자가 된다

극단적인 '살인'을 예로 든 것은 그런 극단적인 일조차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라는 일이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여기는 일과 '보통', '평범'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며 움직일 수 있는지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개성있는 스님을 알았다. 세상을 보며 자기 공부를 하고, 세상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자아에 내가 담겨 함께 세계를 여행한 느낌이다.

책에는 '차경'이라는 '모자'가 등장한다. 원제 스님은 여행 중 구매한 모자에 '차경'이라는 한자로 된 이름을 지어준다. 모자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소지품에 모두 이름을 짓는다. 이름이 지어지고 거기에 인격을 부여하면 비로서 관계가 형성된다. 단지 '도구'에서 '관계'가 형성되니 꽤 인간과 닮은 추억거리도 만들어진다. 이를 보며 스스로도 주변 소지품을 '도구' 이상으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본적으로 여행 서적을 좋아하지만 이번 여행책은 꽤 매력적인 소재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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