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 - 무던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예민한 HSP를 위한 심리학
최재훈 지음 / 서스테인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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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검사를 하면 INFJ와 INTJ가 반반씩 나온다. 조금 우울해지면 INFJ가, 조금 예민해지면 INTJ가 나온다. F와 T성향이 반반 정도 나오는데 이렇게 나오나, 저렇게 나오나 피곤한 성격은 마찬가지란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은지,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가장 많은 조회수가 나온 주제도 MBTI다.

예민하다고 하면 특히 '성격이 더럽다'와 연결되는데, 그것은 외부적으로 '짜증'을 표출 할 수 있는 예민성에 한정된 말이다. 그보다 더 예민하다면 '짜증'마저 삼키는 것이 상황을 둥글둥글 넘어 갈 수 있다는 지혜를 얻게 된다.

Highly Sensitive Person은 말 그대로 '매우 예민한 사람이란 뜻으로 HSP라고 줄여 부른다. HSP는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이 정의한 개념이다. 보통 사람보다 외부적인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그게 완벽한 나다,'

평소 무던한 성격이라고 자부하고 살았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되면서 조금씩 예민해지고 민감해지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그 아이들의 특징이 말 많은 쌍둥이라 더욱 그렇다.

오죽하면 나의 최대 관심사는 '책 읽을 장소', '시간', '환경'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살기 위해 발악하듯 그런 환경을 찾아 다녔다.

키즈카페, 수영장, 카페, 도서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 '수다쟁이'들과 '각각'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 헤매다보니 조금씩 아이들이 성장해간다. 주변에서는 '말 많이 할 때가 좋은 거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튼 이런 환경에서 가장 예민해지는 것은 '청각'이다. 가끔 부모님댁을 가면 아무도 보지 않는 TV를 켜놓는 경우가 있다. 집안에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야 마음이 편하다는 부모님의 집에는 항상 TV가 켜져 있다.

그러면 '귓속으로 들어온 소리는 빠져 나가지 못하고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정신적 방전을 시켜 놓는다. 그런 이유로 주변에 TV가 켜져 있다면 반드시 꺼버린다.

이 예민함이 점차 극에 달한다. 단순히 소리를 줄여주는 '노이즈캔슬링' 고가 해드셋을 구매하고, 귀마개는 필수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그냥 평소에도 귀를 막고 살고 싶은 심경이다. 사회 활동에 큰 문제가 없다면 맥스 귀마개를 24시간 착용하고 살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루프'라는 귀마개인데 꽤 고가다. 착용하고 나면 외부에서 귀를 막고 있는지 보이지 않으며 일상 소음의 데시벨을 낮춰준단다. 고가의 제품이라 아직 구매하진 않았지만 몇 달째 구매를 망설이는 제품 중 하나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청소기 소리', 심지어 형광등에서 미세하게 들리는 전자기적 소리까지 각종 소음이 정신적으로 고단하게 한다.

뭔가 품격있는 취미를 갖고 싶었던 욕망은 없으나 특히 가사 없는 '클래식 음악' 혹은 '빗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틀어놓고 심지어 나중에는 그것마저 꺼버린다. 2개의 유료 명상 어플리케이션을 구독하고 있고 아주 극단적으로는 '개인적인 이유'로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가 적다.

최재훈 작가의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를 보니 HSP의 특성 중 사람을 만나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쉽게 지친다고 한다.

사람을 만나면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가. 그 사람의 표정, 목소리, 말투 등을 파악하고 그 상황과 사람에 맞는 말을 하는 것은 아주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HSP 성향의 사람들은 꽤 이타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편이라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HSP의 사람들을 사람들은 원하고, HSP 사람들은 사람들을 멀리하고자 한단다.

사람을 어떻게 딱 열 두가지 성향으로만 나눌 수 있겠냐만 MBTI에서 내향, 직관, 계획형인 것만은 분명하다. 거기에 사고와 감정이 것이 딱 절반인 만큼 다른 성향보다 더 복잡하고 예민한 듯하다.

T와 F를 구분하는 방법에서 '우울해서 빵 샀어'라는 질문을 던지면, '무슨 일 때문에 우울한데?'하는 감정형 반응과 '무슨 빵을 샀어?'하는 사고형 반응이 있단다.

나의 경우는 '우울한데 왜 빵을 사지?'하고 생각하면서 '근데 무슨 일있어?'라고 답할 듯하다.

책에서보니 '타고난 성향'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말은 즉, 생긴대로 살라는 의미다. 가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하면서 살라는 의미다. 그러하다. 나름의 내면적 고통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살고 있다. 그러고보면 HSP로 태어난 걸 피할 방법은 없고 받아 들여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고민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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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대전환 -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역사의 시그니처 4
김혜숙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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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한 친구가 해줬던 말이 있다. 자기는 10살이 넘을 때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과 같이 '세상을 보고 있다고 믿었단다.

친구의 당시 시력은 마이너스 였다. 꽤 엄청난 근시를 갖고 있는 '친구'에게 모든 세상은 '흐릿'했으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세상'을 보고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칸트는 여기서 말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즉, 세상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한 안경'이란 생각의 틀 혹은 규칙같은 것이다.

앞서 우리의 '감각기관'의 한계를 확인했다. 즉 우리가 왜곡없는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을 넘어선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했다. 즉,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 따위들이 있다. 가령 당신이 들고 있는 사과와 내가 들고 있는 사과를 합하면 사과가 두 개가 된다는 사실은 '현상'을 바라보고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보여지는 현상 없이도 머릿속으로 답이 2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이지 않지만 머릿속으로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성'이라는 도구다.

즉, 보여지는 진실에 왜곡을 인지하고 나면 우리는 '이성'이라는 도구에 의지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인식'을 더 명확하게 해주는 '도구'의 성능은 매우 중요하다. 고로 '칸트'는 생각했다. 우리가 '본질'을 바라 볼 수 있게 해주는 '이성'이라는 도구는 과연 완전한가.

그렇게 칸트는 '이성'이라는 도구의 효용을 위해, 그 도구를 시험해보기로 한다. 그것이 '순수이성비판'이다. 칸트는 '이성'을 비판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더 가까울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자, 이제 칸트가 보고자 했던 세계에 대해 더 깊게 알아보자.

칸트는 세계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고 봤다.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세계가 있다. 이것을 '현상'이라고 부른다. '현상'에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다시 사과를 예로 들면 사과는 빨갛고 둥글다. 또한 맛있다. 이것이 밖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세계, 즉 현상이다.

두 번째는 '물자체'다. '물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사과를 다시 예로 들어보자. 빨간색이라는 것은 사과 표면에 부딪친 광자 중 일부가 특정 파동으로 우리의 시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이는 인지감각이 만들어낸 해석의 결과다. 둥글다는 모양 또한 우리가 공간을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맛도 미뢰 세포가 화학적 전기신호를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그로 이러한 것들은 사과라고 하는 것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사과가 만들어낸 그림자와 같다. 그저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물자체'란 무엇인가. 해석의 여부와 상관없이, 사과가 가진 그 본질 자체를 말한다. 본질은 우리가 느끼고 해석하기 전에 '사과' 그 자체에서 이미 존재한다.

손으로 벽에 그림자를 만들어 동물의 모양을 만든다고 해보자. 벽에 보이는 그림자는 우리가 보는 '현상'이다. 손의 실제모습이 바로 물자체다. 사과가 빨갛고 맛있고 둥글다는 것은 사과가 만들어낸 그림자와 크게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과 자체가 아니라 사과의 껍데기를 해석한 우리의 감각기관의 해석일 뿐이다. 즉 그것은 사과 본질이 아니다. 고로 우리가 '사과'를 '물자체'로 보기 위해서는 '경험적 이지 않은 '사유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고로 '감각기관'을 넘어서 볼 수 있는 '이성'이라는 렌즈가 잘 닦여 있는지 의심을 통해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만 '진실'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양계를 벗어나서 수십 광년이나 떨어진 별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아직 내리지 않은 비를 예측하기도 한다. 즉 경험적으로 혹은 '현상'으로 얻은 정보만 가지고는 우리의 인식 세계를 확장할 수 없다.

즉 각자 개인은 모두 제3의 현상을 동시에 바라보지면 사실상 '물자체'를 통찰하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각자 끼고 있는 안경이 다를 수 있다. 고로 우리가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는 몹시 중요하다. 그것은 순수이성을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서로가 모두 다른 안경을 끼고 있고 스스로도 다른 안경을 끼고 있다. 어떤 사람은 연필을 보고 지우개로 보고, 어떤 사람은 연필을 보고 노트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호 착오적인 세계 인식관에서 우리가 '물자체'를 집중한다면 '현상'을 넘어선 본질을 같이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방법이고 안경의 여부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같은 '세상'을 바라본다는 믿음의 출발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 한 것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경험적 관측'을 통한 발견이 아니다. 실제 당시 학계에서는 '천동설'에 대한 더 많은 귀납적 논리가 있었다. 다양한 관측과 기록이 지구가 아니라 하늘이 돌고 있음을 말했다. 이렇 듯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며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귀납추론'을 내린다. 이는 '현상'을 통한 인식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경험'을 통해 발견한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이성'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연역추론한 결과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상'이면의 '물자체'를 보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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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 강한 아이의 비밀 - 공부가 쉬워지는 문해력 성장 로드맵
최지현 지음 / 허들링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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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에서 '뚜렷한 자기만의 생각 없이 많이 읽기만 하는 것은 환자가 약국을 다 뒤져서 온갖 약을 다 먹어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양을 늘리는 '독서'가 무의미 하다는 것을 말한다. 몇권의 책을 읽었는지 산술적인 만족을 위해 '활자'를 '음성신호'로 바꿔내는 작업은 독서의 본질이 아니다. 독서의 본질은 '호기심'을 탐독하는 일이다.

과거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책을 고르는 일'부터가 '독서'라고 정의했다. '독서'는 사전적 의미로 '책을 읽는 행위'임에 틀림 없으나 실제로 그 활동의 영역을 정의하자면 '호기심'에서 출발할 것이다.

독서는 단순히 문자를 읽는 행위가 아니다. 독서는 '정보를 탐닉'하는 행위다. 즉 불러 일어난 호기심을 알아차리고 그 호기심을 충족할만한 정보를 찾는 것, 그리고 그 정보를 저자의 논리 구조에 맞에 이해해 나가는 것이다.

독서가 삶에서 무의미하다는 것은 '다른 어떤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이 다하는 날, '저 사람은 몇권의 책을 읽었는가'는 '몇 시간' TV 앞에 앉아 있었느냐 만큼 무의미하다. 독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즐기는 행위이며 그 과정 자체가 굉장히 '능동성을 요구' 한다.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도입부를 펼칠 때와 마지막 커버를 덮는 순간의 짧아짐을 느낀다. 즉 어떤 누구에게는 '책 한권'이 꽤 먼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다독하다 보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이 단순히 '책'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소득이다.

새학기에 '교과서'를 새롭게 받은 학생 중 상당수는 '교과서 수준의 글밥'을 완독한 경험이 극히 적다. 이런 환경에서 학생들이 마주쳐야 하는 교육상황은 '국어, 수학, 영어' 등 꽤 많은 과목의 교과서를 1년 간 학습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1년에 10권의 책을 읽었던 아이에게 10과목의 교과서를 1회독 하는 것은 적절한 수준이다. 다만 1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이들이 겨우 교과서 정도를 읽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주말이나 평일 주말에 가만히 앉아서 교과서 이상의 글밥을 꾸준하게 읽은 아이에게 '교과서'는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책 중 한 권일 뿐이다.

한달에 10권의 책을 읽은 아이에게는 책의 첫장에서 마지막장까지의 기억이 큰 거부감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는 책을 받아온 첫날 교과서의 1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독해낼지 모른다.

이런 기억은 비단 '학생'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전공 서적도 사실 정독으로 읽었을 때, 숫자적으로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덤벼보기도 전에 책이 주는 묵직함과 두려움. 그것을 없애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도서의 종류나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300페이지의 책을 읽을 때, 8시간 정도 걸린다고 해보자. 산술적으로 계산한다면 1000페이지를 읽는데 24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협찬'을 받다보면 흔히 말하는 벽돌책을 받을 때가 종종있다. 누군가는 펴보기도 전에 기겁할만한 분량이지만 나의 경우네는 아침에 눈뜨고 딱 100페이지씩만 읽는다. 그렇게 열흘을 읽으면 웬만한 벽돌책도 부담없이 2주내로 끝이 난다.

어떤 책은 생각보다 안넘어가는 책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전문적인 지식'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과학책의 경우에는 표면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이 비슷하여 빠르게 읽히지만 전공자를 위한 책의 경우에는 사용하는 명사 자체가 너무 여럽고 관념도 복잡하다. '노자'나 '칸트'의 철학에 대해 분석한 책을 읽을 때는 도대체가 사용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사전을 찾으며 읽고 한다.

이런 경우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그냥 읽는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명사 정도는 사전으로 급하게 찾아보지만 문맥상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그냥 넘어간다. 꾸역구역 넘어가다보면 책의 중반부를 읽을 때는 '대략의 요' 정도가 파악이 가능하다. 이후 더 정확한 이해를 원하면 '재독'하면 그 속도나 흥미가 훨씬 빨라진다.

아마 이는 '학습'에서도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어떤 일이든, '할만하다'하고 접근하는 것과 '언제 다하지'하고 접근하는 일은 천차만별이다. 또한 대부분의 학습은 평가를 위해 '범위'를 쪼갠다. 다만 이렇게 쪼개진 범위에서 주어진 '명사'만 암기하는 것은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게 만들고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를 잃게 만든다. 이는 '본질'을 잃는 것이다. 본질을 잃어버린 학습은 '호기심'을 줄게 만든다.

'수헬리베 붕탄질산플네나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앞글자만 따서 외우는 행위는 실제로 원소주기율 표에서 1주기와 2주기 원소의 배열 순서를 나타내고 이는 '양성자의 수'에 따라 원소가 정렬됐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 순서가 뒤로 갈수록 원자의 질량도 대체로 증가한다.

즉 다시말해서 '수헬리베..'라고 정보를 암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앞에서 설명한 '미시 세계의 대략적인 구조', 이후 미시세계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모두 파악할 때, 더 쉽게 암기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다. 즉 독서는 단순히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를 조망하게 하고 심리적 두려움을 없앤다는 점에서도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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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힘 - 읽지 않는 시대에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은주 옮김 / 데이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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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가 어떤 글은 '육성'으로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문장이 그랬다.

'생각할 거리가 없으면 글을 읽고, 생각할 거리가 많으면 글을 써라'

머리가 텅 빈 것 같을 때에는 글을 읽어, 생각 거리를 채워두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글로써 해소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읽는 행위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고 쓰는 행위는 배설하는 행위와 같다. 나의 블로그 명칭이 '해우소'인 이유는 '온갖 배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배설의 행위는 '걱정'과 '근심', '불안', '다짐', '계획', '일상', '정리' 등 다양한 내용들이 있다.

원래 모든 것이 그렇다. 모두가 고귀한 척하고 살아도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배설물을 먹고 산다. 우리가 먹는 식물은 흙 속의 양분을 빨아들여 자란다. 그 양분은 지렁이와 같은 미물의 배설에서 시작한다. 질소, 인, 칼륨과 같은 식물에게 필수적인 영양소는 이처럼 지렁이의 배설에서 비롯되고 산소조차 이 식물이 내뿜는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호흡하고 먹는 것이 '동물'이고,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섭취한다.

순환은 끝이 없다. 죽은 동물과 식물의 잔해는 또다른 생명의 양식이되고, 우리가 배설한 모든 것도 누군가의 생명을 키운다. 우리가 마시는 물조차 한때 누군가의 몸을 지나간 흔적이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다. 고귀함이란 고로 착각이다. 깨끗함이란 것도 착각이다. 우리는 결국 배설의 순환 위에 서 있을 뿐이며 먹고 싸고 먹고싸는 순환의 일부일 뿐이다.

글을 읽고 쓰는 행위는 이런 먹고 싸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로 많이 먹으면 많이 쓸 수 있고, 많이 쓰면 많이 읽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독서파만관 하필유여신'이라고 했다. 이는 책 만권을 읽고 붓을 들면 신들린 듯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 글을 쓰면 큰 걱정 없이 장문의 글이 쏟아져 나온다. 일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창작물이 고통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는 '창작하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속 창작'에서 비롯된다. 머리가 복잡할 때 다양한 생각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펜과 종이로 그것을 받아내면 꽤 괜찮은 창작물들이 된다. 고로 많이 읽으면 많이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읽기만 한다고 저절로 양질의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책을 읽을 때, 조금더 능률이 높은 방식으로 책을 읽는 나만의 방식이 하나 있다. 바로 '쓸 것'을 염두하고 읽는 것이다. 그저 흘려 보내듯 읽는 습관은 음식을 흘리며 먹는 것과 같다. 음식을 소화하지 않으면 배설할 수 없다. 고로 음식을 소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쓸 거리'를 염두하며 읽는 것이다. 글을 읽다고 좋은 문구를 찾아간다. 실제로 나의 글 중 일부는 '인용구'로 도입을 시작한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구가 나오면 그 문장으로 운을 뗀다. 이후 문구에 대한 나의 생각을 쏟아낸다. 그러다보면 '책 저자'의 바톤을 이어 받아 함께 추가 창작해내는 듯한 생각에 빠진다. 그렇다보면 '작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연결 시켜 볼 수 있다.

어떤 책의 경우에는 저자와 생각이 다른 경우도 많다. 다독을 하다보면 생각이 다른 저자들의 글을 읽게 되는데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만의 철학이 만들어진다. 즉 양쪽의 논리를 모두 읽어보고 더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쪽의 방향으로 사고가 정리된다.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철학이 만들어지면 다음 도서를 읽을 때는 그 철학을 기반으로 작가의 생각과 비교해가며 읽을 수 있다. 고로 어떤 경우에는 옳다가, 어떤 경우에는 그르다는 모순적인 관점이 만들어진다.

환경 문제에 관한 관점도 그렇다. 환경에 대해 우려하는 관점의 책을 읽고, 이후에는 그에 반하는 책을 읽는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책을 읽고, '보수'적인 책을 읽는다. 그러다보면 글의 리뷰가 왔다갔다 하며 자기논리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모순 조차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 들인다.

세상에 '정확한 한쪽'을 취하는 것은 반드시 더 큰 모순을 만들어낸다. 이는 흔히 정치에서도 볼 수 있는 어떤 논리는 단지 '진영 논리'에 의해 '반대'하거나, '찬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 서 있는 쪽이 '보수'라고 하더라도 '진보'적인 정책에 공감할 수 있고, '진보'라고 하더라도 '보수'적인 정책에 공감할 수 있다.

즉 모순을 피하려다보면 어차피 모순을 맞이한다. 고로 독서를 할 때는 '그럴 수 있다.'라는 마음과 '정말 그러한가'라는 두 가지 시선을 모두 가지고, 믿는 것을 의심하고 의심스러운 것 믿어보는 용기도 필요하다.

과거 한 강의에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달 정도를 글을 쓰니,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렇다. 보통 자신의 인생을 글로 쓰면 책이 몇권이 나온다는 사람들도 실제 글을 써보면 한 권 분량을 채우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또한 글에 대한 소재가 고갈됐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을때가 매일 글쓰기 습관을 가진지 3달즈음 됐을 때다. 그럴때는 모든 것을 글감으로 보고 접근하면 좋다. 봤던 영화, 읽은 책, 겪은 이야기 등이 그렇다. 즉 많은 인풋이 많은 아웃풋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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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번째 교과서 x 궤도의 다시 만난 과학 나의 두 번째 교과서
궤도.송영조 지음, EBS 제작팀 기획 / 페이지2(page2)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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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번째 교과서'

사실 따지고 보자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어쩌면 중학교에서 혹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이야기다.

'뉴턴의 운동법칙'이라던지, '멘델의 유전법칙', '다윈의 진화론' 등

이 재미있는 '과학'을 지금 당장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보여준다면 기겁을 할지 모른다. 어쩌면 성인이 된 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스트레스'였을 과학을 즐기는 이유는 '컨텐츠' 자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어떤 책을 읽을 때, 내가 가장 먼저하는 일은 '그 주제'에 강력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해부학자의 세계'라는 책을 보기 전에 간단한 '서칭'으로 해부학에 관해 찾아본다거나, '매너의 역사'를 읽기 전에는 관련 글이나 영상을 찾아본다.

이렇게 호기심이 한번 작동하고 나면, 글을 읽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글이 뇌속으로 '사르르'하고 녹아드는 경험을 한다. 책에 한껏 몰입하면 관련된 호기심이 더 일어나고 그러면 조금더 다른 시각을 찾아 비슷한 주제의 글을 쉽게 읽게 된다.

어쩌면 학창시절에 과학이 재미없었던 이유는 '호기심'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호기심'이 발생하면 '하지말라!'라고 명령해도 하게 된다. 반면 '하라!'라고 하는 것에는 '호기심'이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 교육의 '하라!'는 명령은 너무 어린 시기에 찾아오고 거기에 대한 반발심으로 '호기심'이 어린 시기에 사라진다. 성인이 되고 아무도 '하라!'라고 명령하지 않는 시기가 오면서 어른들은 결코 하지 않았던 '과거의 추억'을 취미로 갖곤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당장 원리를 모르면서 사용하는 것들이 많다. 당장 사용하는 '배터리'도 그렇다.

'왜 그렇게 되는 거지?' 하는 작동원리를 궁금해 하기도 전에 그것이 주는 달콤함에 중독되어 버린다. 아이들은 어째서 배터리가 방전되고 충전되는지, 그 원리를 궁금해 하지 않고, 스크린 터치는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 궁금해 하지 않으면서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고구마 줄기 캐듯, 한 호기심은 다른 호기심으로 전이되기 마련이다. 그 첫 호기심을 발동시키고 그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과학은 '원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사고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 더 중요하긴 하다.

'왜 그런가'를 생각하지 않고, '원래 그런거야'하고 생각하는 방식은 '맹신'을 낳는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비판적 시각도 갖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에 대한 흥미는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작가 '궤도'는 그런 의미에서 '과학'을 대중적으로 쉽게 재밌게 소개한다. 책은 여백도 많고 쉽게 읽힌다. 그의 책을 한참 읽고 있는데 8살 아이가 본인도 읽고 싶다고 처음 세 장을 읽었다. 꽤 어려운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놀랍게도 책의 내용을 '대략'은 알고 있었다.

뉴턴이 누구이며 어떤 걸 발견했는지를 책을 읽고 나에게 묻는다. 그 뒤로 어떤 일을 보면 '뉴턴'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닐스보어 등의 이야기가 간혹 나오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들의 발견한 과학적 발견에 둘러 쌓여 살면서도 한 번도 아이들에게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아마 학교에서 '가르치겠지'하는 방관이 있을지 모른다. 다만 과학은 '학교'에 갇혀 있기에 너무나 그릇이 크다. 과학은 '학교'나 '교과서'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곳곳에 있다는 것을 '궤도의 다시 만난 과학'이라는 책을 접하고 아이와 이야기하며 많이 느낀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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