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완성시켜드립니다 - 쓰기의 기술부터 마인드셋까지, 원고를 끝내는 21가지 과학적 방법
도나 바커 지음, 이한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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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30일부터 햇수로 4년간 매일 포스팅을 했다. 어떤 날은 2개, 어떤 날은 3개, 못해도 하나는 무조건 했다. 글자는 2,000자에서 3,000자 정도. 2020년 10월 2일 잠들어 포스팅을 하지 못한 하루를 제외하면 하루도 빠진 적 없다. 스스로 독하다는 생각을 했던 건, 5권의 책 집필 도중에도 멈추지 않았다는 거다. 원고를 완성하고 잠들기 전에 다시 3,000자를 쓰고 잠 들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기간에는 밤 11시 59분 59초에 포스팅을 올리기도 했다. 주간 스케줄 일정이 꽉차면 '예약 발행'을 했다. 스스로 대단한 작가가 되기 위해 들인 습관은 아니다. 그냥 쓰다보니 쓰게 됐다.

중학생이던 시절, 국어 선생님은 '창작시' 숙제를 주셨다. 집필했던 창작시를 선생님께 드렸다. 그때 학교에는 OHP라는 기계가 있었다. 칠판 옆에서 빛을 뿜는 기계였다. Overhead Projector라고 투명 필름 위에 네임펜으로 글을 적으면 위로 향하는 빛이 거울에 굴절되어 칠판에 투사되는 형식이다.

국어 선생님은 이 기계에 'A+' 과제물들을 올려 놓으셨다. 친구들의 창작시가 하나 둘 소개됐다. 이어 마지막에 내 시가 소개됐다.

제목은 '시계바늘'.

시계바늘을 인연에 빗댔다. 앞서나가고 뒷쳐지고 있지만, 때가되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초, 분, 시침'의 관계를 인연에 빗댔다. 선생님은 '참 생각할 거리가 많은 시구나' 하셨다. 이어 "이 시에 왜 A+를 주었냐면..."하고 말을 하셨다. 다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반 친구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기 C-라고 적혀 있는데요?"

그랬다. 선생님이 투사하신 내 창작시에는 'C-'가 적혀 있었다. 아마 'A+' 사이에 실수로 내 시가 들어갔던 모양이다. 얼굴이 붉어졌다. 선생님은 무안함과 미안함을 숨기려고 하셨다.

"얘들아, 이거 A+ 줄까?" 아이들은 "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닥 자랑할 만한 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조용히 잊혀져도 좋았다. 선생님의 실수와 아이들의 반응으로 이 시는 2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시가 됐다.

짧은 순간이 뇌리에 밖혔다. 그해, 내 창작시는 C-를 받고 마무리됐다. 그 시가 'A+'였건 'C-'였건, 성적과 점수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 것이다. 연 소득 10원의 차이도 만들지 못하는 작은 수행평가다. 다만 그 순간이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 '글'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가 있다. 유명한 이들이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남길 때도 있다. 그 때마다 잊혀졌던 중학교 시절이 번뜩 지나간다. 특별히 충격적이거나 트라우마도 아니다. 그냥 불현듯 그 장면이 떠오른다.

어쩐지 A+들 사이에 실수로 올려진 C- 같은 느낌.

점수가 투사되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A+의 감동을 했을까. 운좋게 A의 사이에 속한 가짜의 부끄러움이 불쑥 들때가 있다.

읽고 쓰다보니, '진짜'들을 만날 때가 있다. 오랜기간 글쓰는 일을 동경하고 재능이 있던 이들을 우연히 만난다. 부끄럽게 그들의 글과 한데 섞일 때가 있다. 지금도 서점에는 잘난 사람들의 저서 중 내 글이 섞여 있다. 아주 짧은 순간, 중학교 시절 그 감정이 되살아난다.

언젠가는 '글쓰기' 강연을 부탁 받는 경우도 있다. C-의 강연이지만 나름의 노하우를 전달한다. 크게 대단한 것 없이, '그냥 쓴다. 쓰고 읽고 고친다.' 이것이 전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에게 오른발을 아래로 밀면서 왼발에 힘을 풀라고 하는 조언처럼, 이론적 조언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냥 습관이다. 그냥 매일 쓰면 되고, 형편없고 형편있고를 판단하지 않고 쓰면된다. 대단한 영감도 필요없고 엄청난 자기관리도 필요없다. 꽤 체계적인 시간관리나 글쓰기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필요없다. 그냥 쓰면 된다.

끓는 물에 면사리를 놓고 스프를 털어 넣고, 봉지는 쓰레기통에 던져 놓듯. 거기에는 철학도 이유도 없다. 그냥 '라면 먹어야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설거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제 해야 하는가. 왜 해야하는가도 필요없다. 라면 먹을 때, 냄비가 없을 것 같다면 하면 그만이다.

C-의 조언이 가끔 꽤 괜찮은 A+의 조언과 일치할 때가 있다. 그때는 잊혀진 국어 선생님께 얄미운 복수를 했다는 통쾌함을 갖는다. '도나 바커'의 '어떻게든 완성시켜드립니다'는 투박하지만 현실적인 글쓰기를 말한다. 이 A+작가의 생각이 C-와 닮은 구석이 있다는데서 다시 한 번 통쾌함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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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좋아하게 될 당신에게 - 미술전시 감상에서 아트 컬렉팅까지 예술과 가까워지는 방법 뉴노멀을 위한 문화·예술 인문서 4
김진혁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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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바닥에 총 7,000개의 사탕이 깔려 있다. 사탕의 총 무게 34kg. 누구나 이 사탕을 먹을 수 있다. 심지어 가지고 나갈 수도 있다. 그냥 관람객에게 사탕을 제공하기 위해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탕은 '무제'라는 이름의 설치 미술이다. '무제'는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의 작품이다. 그는 단조로운 설치와 조각으로 유명하다. 토레스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사탕은 그의 애인을 이야기한다. 1991년 그의 애인이 죽음과 가까워 졌을 때 몸무게는 34kg이다. 애인은 참여자들에 의해 죽음처럼 사라져 간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사탕은 여지 없이 다시 채워 진다. 사라진 연인의 존재를 매번 재생시키는 설치 미술이다. '김진혁 작가'는 이런 설치 미술을 '문학적 예술'이라고 말한다. 은유의 특성이 가득 담긴 예술이라는 말이다. 무게, 달콤함, 재생까지. 설치 미술은 단순히 전시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를 배경으로 다양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예술적 가치'는 '작가'가 아니라 '감상자'에 의해 달라진다. 난해하기만 한 현대미술은 어떻게 즐기는 것일까. 설치 미술이 난해한 것은 '작가'가 숨겨 놓은 무언가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기계가 담지 못할 '내면'을 담아야 했다. 사진기보다 정교하게 사물의 겉모습을 표현할 수 없다. 기술은 예술을 더 인간다워지게 바꾸어 놓았다.

일부 사람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공공미술'에 의문을 갖는다. 소중한 세금이 건축비와 설치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을 경제적 손익으로만 따지기에 우리는 인간이다. 공공미술은 환경을 쾌적하게 하고 서민의 정서에도 효과적이다. 파리 한복판에 지어진 볼품없고 쓸모없는 철제 탑을 사람들은 '세금 낭비'이자 '인간의 욕심'의 신물인 '현대판 바벨탑'이라고 불렀다. 다만, 이제와서 이 철제탑은 굉장히 중요한 '파리'의 상징이 됐다. 인간은 '의식주'만 가지고 살 수 없다. 매슬로의 욕구위계이론에 따르면 가장 하단에는 '생리적욕구'가 있다. 그 위로 안전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 '의식주'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 등 결핍 욕구는 충족시키지만 그 상단에 있는 성장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예술은 당연히 생리적 욕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예술은 인간이 의식주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상위 욕구를 충족한다.

꽤 값비싼 스테이크 집을 아이와 먹으러 간 적이 있다. 아이는 자신의 앞에 놓인 한 접시의 가치가 얼마인 줄 모르고 투정을 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계란 후라이에 간장, 밥을 비벼 먹었다. 가치라는 것은 가치를 알아 볼 때 생겨난다. 얼마나 훌륭한 요리사의 작품인지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맛을 얼마나 음미하고 가치를 알 수 있는지다. 단순히 대단한 사람의 작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인다. 가끔 7살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가지고 올 때가 있다. 혼자 보고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때도 많다. 단순히 유추할 뿐이다.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다가와 자신의 그림을 해석해 준다. 무엇을 그렸으며, 무슨 생각을 했고, 무엇으로 그렸는지를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한다. 듣고 있으면 내가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들이 나올 때가 있다. 꿈 이야기를 그렸을 때도 있고 가끔씩은 호랑이를 잡아먹는 토끼도 있다. 그것을 보고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반응한다. 그런 반응을 몇 차례하고 나면, 아이가 어떤 것에 영감을 받고 어떤 걸 주로 그리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아이의 그림에는 유독 의미가 없던 것들이 '내 아이'의 그림일 때는 그 의도와 생각이 궁금해진다.

'의도와 생각을 궁금해 보는 것'. 그것은 몹시 인간적이고 예술을 감상하는 주 포인트다. 건축가 페터 춤토르는 '페터 춤토르 분위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엇이 나를 감동시켰을까? 전부 다 이다. 모든 사물 그 자체. 사람들, 공기, 소음, 소리, 색깔, 물질, 질감, 형태."

조명은 어떻게 비치했고 색깔은 어떤 색을 사용했는지, 주변 음악은 어떤지. 그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그냥 '현상'이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의도를 가지는 행위. 그것이 예술이다. 작가의 의도가 가끔 해석자와 다를 수도 있지만, 그 의도를 생각해보는 행위가 예술이다.

미술 전시 감상에서 아트 컬렉팅까지 예술가 가까워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고로 '관심'이다. 내 아이의 그림이 다른 아이들의 그림보다 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내 아이의 그림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이의 그림에서 의도를 찾아 생각해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미술과 예술에 대한 관심은 작가와 큐레이터, 전시관의 의도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다. 음악과 미술 등 예술은 가끔 아무 말도 없이 사람을 위로 한다. 누구도 정확히 누군가의 마음을 정확히 위로하지 못한다. 다만 오로지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이다. 그 해석은 언제나 자신이 열어 두고 자신을 위로한다. 고로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많은 위로를 준다. 근처를 지나면서 한 번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제주도립미술관'을 아이들과 한 번 방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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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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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던 것을 잃는다. '상실'이라 한다. 상실은 '소유'을 전제로 한다. 소유하지 않으면 '상실'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면 끝에는 언제나 '상실'이 있다.

사람은 나면 죽는다. 극단적으로, '출생'의 방향은 '죽음'이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때와 장소, 이유와 방법만 다를 뿐 목적지는 같다.

태어나면 '하나'가 생겨난다. 죽으면 '하나'가 없어진다. 태어남이 '1'이고 죽음이 '-1'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만남이 '1'이고 이별이 '-1'이 되는 것 처럼 말이다. '태어남'은 반드시 '죽음'을 함께 한다. '만남'은 반드시 '이별'을 함께 한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다만, 모든 인간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었으며, 만나고 반드시 이별했다. 그것은 붙어다니는 두 개의 다른 점이 아니다. 하나의 직선이다. 기하학에서 물체를 늘리거나 구부려 모양을 바꾸는 것을 '위상동형(位相同型)'라고 한다. 쉽게 말해 반지를 양쪽으로 길게 늘려 빨대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빨대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입으로 빨아 들이는 구멍과 빨려지는 구멍이 있다. 분명 위와 아래에 구멍이 있지만 실제로 빨대의 구멍은 하나다. 빨대의 구멍이 '반지'와 위상동형이기 때문이다. 만남과 이별, 태어남과 죽음은 두 개의 다른 모양 같지만 공(空)이라는 비어있음의 위상동형(位相同型)이다. 모든 극단은 하나이지만 둘이고 반대이지만 붙어 있다. 이것이 '음양론'이다.

애초 모든 것은 공(空)하고 무(無)하다. 부처가 공(空)하다 하고, 노자가 무(無)하다한다. 그러함을 깨닫는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즈음에'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대목이 있다. 삶이 끊임없는 이별의 연속이라는 말이다. 이별에 촛점을 맞추니 삶이 온통 이별하는 것다. 다만 빨대의 반댓쪽 역시 하나의 구멍이라는 것을 보자면 삶은 끊임없는 만남의 연속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이처럼 공(空)과 무(無)의 위상동형(位相同型)이다. 전체를 보면 하나의 덩어리다. 그것을 길게 뽑으니 한 쪽만 부각되어 보인다. 태어날 때, 실 한오라기 갖고 나지 않는다. 죽을 때도 그렇다. '무소유'로 태어나고 '무소유'로 죽는다. 고로 삶에서 얻게 되는 것 중 속옷 한 장까지 모두 빌려쓰고 갚아 내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믿던 것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빌린 것들' 투성이다.

그것을 '자연'에서 빌렸든, '신'에게서 빌렸든, '내 것'이 없다. 잘 사용하고 돌려주려면 빌린 기간, 잘 활용하고 깨끗이 쓰다 돌려줘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빨대 반댓쪽 구멍이 여지없이 커진다. 상실감이 그만큼 커진다.

참 오만하고 무지하게 인간은 빠진 물에서 구해주면 '보따리'를 내놓으라 한다. 빈손으로 와서 '인연', '삶', '가족', '사랑' 모든 것을 빌려쓰면서 '감사하다'는 말 한 번 없다. 이러니 세상이 '다신 빌려주나 봐라' 괘씸히 생각해도 싸다. 받을 때의 감사함을 모르니, '상실감'만 커져 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여기서 색(色)은 존재(Thing)을 말한다. 공(空)은 비어 있음을 말한다. 즉 존재하는 것은 비어있는 것이고, 비어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쾌락이건, 사랑이건, 삶이건, 기억이건 모든 것은 현상하고 존재하지만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억울해 할 것도 없다. 빌려 썼으면 불평불만하고 후회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것에 감사하고 만족해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로 '소유'와 '상실'을 이야기했다. 소설이 가슴 먹먹해지는 이유는 후반부에 이어지는 '상실'들 때문이다. 따지고 들자면 소설의 전반부는 온통 '만남'과 '소유'가 이어진다. 누군가를 만나고, 인연이 된다. 그것은 인과관계다. 시작을 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많은 상실은 많은 만남과 인연을 뜻한다. 상실감이 많다는 것은 인생의 색(色)이 풍부하다는 것을 말한다.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하면 뿌린대로 거둔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이를 나쁜 쪽으로만 생각한다. 꼭 나쁜 짓을 하고 벌을 받을 때 사용한다. 다만 인과응보(因果應報)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는 원인이 있으면 그에 합당한 결과가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만남을 하면 이별을 하고, 태어나면 죽음을 맞이한다. 빨대의 윗구멍과 아랫 구멍처럼 이것은 이름을 두 개로 부르지만, 원인과 결과는 하나의 구멍일 뿐이다. 책을 읽고 먹먹하다. 인간의 감정이라 그렇다. 원리를 모른다면 자신만의 상실감에 사로잡힐테지만, 원인을 알고나면 담담하게 받아 드릴 수 있게 된다.

감사하게도 물건을 빌려 쓰게 된다면 비록 주인이 일찍 돌려 달라고 하더라도, 빌린 물건이 아무리 탐난다고 하더라도, 감사하게 썼다고 말하며 돌려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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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클래식 1포옹 - 하루를 껴안는 음악의 힘 1일 1클래식
클레먼시 버턴힐 지음, 이석호 옮김 / 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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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는 '바스켓볼(Basketball)'이다. 직역하자면 '바구니에 공 넣기 게임'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농구에는 바구니가 없다. 농구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캐나다 출신의 29살 미국 체육 강사, 제임스 네이스미스(James Naismith)가 1891년 미식축구 실내 버전으로 만들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복숭아 바구니 2개를 3미터 높이에 못으로 고정한다. 고정된 바구니에 축구공을 집어 넣으면 된다. 농구는 그렇게 시작했다. 다만 문제가 발생했다. 골이 들어가면 사다리를 타고 3미터를 올라가 바구니 속 축구공을 꺼내와야 했다. 이로써 경기의 흐름이 끊겼다. 바스켓볼은 지금처럼 대량 득점이 가능하지 않은 게임이었다.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됐다. 바로 바구니 밑을 뚫어 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농구는 조금 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클래식이 이렇게 확장될 수 도 있구나'

누군가의 간단한 아이디어는 이처럼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고정된 관념을 깨부수는 간단한 아이디어는 때로는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어렵고 복잡한 것들을 수월하게 하는 것은 '클래식'에서도 있다. 품격있는 사람들만 즐기는 '저들만의 리그'라는 '클래식'의 이미지는 위와 마찬가지로 '고정관념'이다. 바구니에 공을 집어 넣는다는 '바스켓볼'에 '구멍'을 뚫어 '바스켓'을 없애 버린다. 스포츠의 본질은 '시작'이 아니라 '즐김'이다.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신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었거나, 인간의 본성과 감정을 노래 했거나, 자연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왜 꼭 바구니어야 하지?'

간단한 질문은 바구니 없는 농구를 만들었다. 클래식은 반드시 '클래식'할 필요 없다. 영어에서 Classic은 '일류의', '최고의', '고전, 명작', '모범' 등의 뜻이 있다. 그것이 주는 강박관념과 고정관념이 클래식에 대한 접근성을 어렵게 한다면 바로 그거부터 버려도 괜찮다.

'테세우스의 배'에 관한 역살이 있다. '테세우스의 배'에 있는 부품을 하나씩 고쳐나가면서 사용하다보니, 어느새인가 원래 '테세우스의 배'를 구성하던 부속품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테세우스의 배'인가?

'바스켓볼'에 바스켓이 없다면 그것은 '바스켓'인가. 클래식이 클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는 이미 정답이 내려졌다. 그렇다. 바스켓볼은 바스켓없이도 바스켓볼이고 클래식은 굳이 클래식하지 않아도 클래식이다.

교회에서 신과 자연을 찬양하지 않아도 클래식이다. 비교적 최근에 작곡되어 과학과 여성, 흑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클래식이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모든 것이 바뀌고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만 남았더라도 그것은 '테세우스의 배'다. 인간도 매일 3300억 개의 세포가 태어나고 죽는다. 고로 모든 인간은 7년마다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것이 테세우스의 배와 무엇이 다를까. 클래식이 더이상 클래식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나아간다. 이 클래식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비백인'를 이야기 한다. '테세우스의 배'는 그럼에도 '테세우스의 배'이고 이 클래식은 그럼에도 '클래식'이다. 뿐만 아니라 '바스켓볼'처럼 이름을 벗어나 더 많은 것을 포옹한다. 무엇을 담을 수 있는가. 단순히 이름에 갇혀 더 많은 것을 포옹하지 못하는 것은 그 본질적 의미를 상실하게 한다.

운동, 음악은 즐기는 것이 본질이다. 이름에 갇혀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더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더 평범하고 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클래식'을 듣고자 한다면 '클레이먼시 버틴힐'의 '1일 1클래식 1포옹'을 들어보는 것이 좋다. 너무 많은 정보를 공부하려 들기 보다는 차근 차근히 하루에 하나 정도를 즐기며 그 배경을 알아가는 재미를 갖는 것이 나와 같은 비주류 인간도 꽤 즐겁게 클래식을 즐길 수 있는 노하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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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학교 폭력 일기 쿤룬 삼부곡 2
쿤룬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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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다만 남이 나를 괴롭히면 배로 갚아준다."

한강 몸통 시신 살인사건의 피의자 장대호의 말이다. 그는 언론에 얼굴이 공개되면서 일관적인 말을 했다.

"유족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다. 상대방이 죽을 짓을 했다."

내성적이고 주변인들과 마찰을 빚은 적 없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범죄 전력도 없었으며, 정신과 치료 기록도 없다. 되려 하는 일에 성실한 편이었다. 그가 자수를 하고 인터뷰를 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이번 사건은 흉악범이 양아치를 죽인 사건입니다. 나쁜 놈이 나쁜 놈을 죽인 사건이에요."

피해자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다음 생에 또 그러면 넌 또 죽어"

평소 사회면 뉴스를 굳이 찾아보지 않기 때문에 해당 사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스치듯 지나갔던 인터뷰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복수는 왜 더 잔인해지는가.

1968년 발표된 '박태순'의 '무너진 극장'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는 4월 25일과 26일의 풍경을 이야기한다. 4.19 혁명 당시 시민들의 저항을 이야기 한다. 소설 주인공은 시위 과정에서 군중 심리를 말한다. 초점은 '폭력'과 '무질서'다. 군부독재에 저항한다는 명분이지만 시위는 폭력적이로 무질서했다. 명분이 있으면 행위는 정당화 되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대부분의 전쟁과 테러, 범죄는 명분이 있다. 학대 피해자가 모두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가능성으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학교 폭력'이 위험한 이유다. 보복성 학폭으로 받은 것을 배로 돌려준다. 이 악의 순환고리 때문에 폭력은 더 잔인해지고 무자비해진다. '따돌림'은 대체로 '공감부족'에서 생긴다. 대상의 심리를 공감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따돌리는 이들은 그렇다면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 일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공감 부족은 '공감 능력' 때문에 생긴다.

자석에서 S극이 강하면 반대로 N극도 강해진다. 이는 상대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개인으로서의 정체성 뿐만아니라, 집단을 형성하면 집단에서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 경기가 있다고 해보자. 한국 선수가 경기력 좋기를 바랄수록, 일본 선수의 경기력이 나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다수'와 '다수'가 대립하는 것은 '따돌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체로 따돌림의 경우에는 '다수'가 '소수'에게 향한다. 인간은 비슷한 이들끼리 몰려 다닌다. 취미가 비슷한 이들끼리 몰려 있거나, 성격이 비슷한 이들끼리 몰려 다닌다. '취미, 성향, 말투, 성격' 등. 자신과 비슷한 이들이 다수가 되면, 이들의 입장에서 '소수'는 '비정상'이 된다. 소수에 대한 증오는 '청소년'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인간 다수에게 일어난다.

각자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지역과 나이에서 무작위로 섞여 언제든 자유롭게 상하좌우로 이동하는 '성인'과 다르게,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집단 선택이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에서는 '골프'를 좋아하는 이, '테니스를 좋아하는 이', ' 포켓볼을 좋아하는 이' 등 자신과 비슷한 이들을 찾아 뭉칠 수 있다. 다만, 그저 '나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뭉쳐진 '무작위 집단'에서는 소수가 '따돌림'의 타겟이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넷플릭스의 드라마 '더 글로리'라는 영화를 봤다. 꽤 재밌게 봤다. 다만, '선생님이 알아서는 안되는 학교 폭력 일기'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몰입해서 봤던 것 같다. 학교 폭력을 당하던 여중생의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과 드라마는 모두 이를 '통쾌한 복수'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두 작품을 볼 때, 통쾌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학교 폭력 가해자들이 더 처참하고, 더 불쌍해지기를 바라게 된다. 다만, 명분이 있다고 행위가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학교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도 가해자가 되는 서로가 피해자가 되는 구조다.

개인적으로 학교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밈'으로 돌아다니는 '학교 폭력 멈춰!'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반편성이 아니라, 특정한 '다수'가 생기지 않도록 '고교학점제'를 확대하여 학생이 자율적으로 과목을 선택하여 이동 할 수 있는 교육과정 편성이 낫지 않을까.

한 번 읽기 시작하니, 몰입도가 너무 좋았던 책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하드코어'해지고 잔인해지기는 한다. 한 편의 고어 공포물을 본 것 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시리즈로 알고 있는데,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 할 듯 싶다. 몰입하여 재밌게 읽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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