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1일 1명상 1평온 - 오직 나만을 위한 하루치의 충만함
디아 지음 / 카시오페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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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생불이라 추앙받던 '숭산 스님'을 대표하는 두 가르침이 있다. 다음과 같다.

'오직 할 뿐', '오직 모를 뿐'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는 이 둘을 정확히 영상으로 보여줬다. 영화에서 주인공 포레스트를 제외하고 모든 주변인물들은 그보다 똑똑했다. 다만 공통적으로 그들은 모두 불행했다.

영화에서 포레스트는 같은 말을 꾸준하게 반복한다.

"Stupid is as stupid does."

'바보는 바보짓을 해야 바보에요'

사람들은 '포레스트'를 '바보'라고 불렀지만 결과적으로 바보짓을 하는 이들은 '포레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옭아 매고 자신을 학대하며 인생을 소비했다.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포레스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Stupid is as stupid does."

'바보는 바보 짓을 해야 바보에요.'

자신을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포레스트'를 '바보'라고 확신한다. 다만 포레스트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결국 바보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포레스트를 제외한 주변 인물들이다. 우리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 깨지지 않는 다이아몬드 같은 '인식'은 자신의 판단이 바보 같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결국 포레스트 검프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 미군에 입대하여 꽤 괜찮은 스펙을 얻는다. 사업에도 성공하고 주식투자로 큰 돈을 벌기도 한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꾸준하게 바보 같은 선택을 한다. 그 어리숙함에 관객을 웃는다. 영화의 흐름 상, 포레스트는 사회적 성공과 개인적 행복에 이른다. 그를 비웃던 주변 인물과 관객은 바보가 된다.

'오직 할 뿐', '오직 모를 뿐'

'오직 모를뿐이다.' 어차피 우리는 미래를 모른다. 될지 안될지 알 수 없다. 세상이 어떤지도 모른다. 고로 걱정과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고민해도 결국 모른다. 포레스트 검프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성공이나 돈을 위해 움직이지도 않는다. 단지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오직 할 뿐이다.' 그것은 바보 같지만 가장 바보 같지 않은 결과를 만든다. 다만 그 뿐이다.

가장 단순한 기본이 중요하다.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돈', '성공', '관계' 아니다. 그것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다. 음식은 없으면 3주를 버틸 수 있다. 물 없이는 3일을 버틸 수 있다. 호흡이 없으면 3분도 버티지 못한다. 수면 없이 인간이 최대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공식적으로 11일이다. 매슬로의 욕구 위계이론은 점차 아래로 넓어진다. 상위에는 자아실현과 존중, 소속과 애정의 욕구가 있지만, 그 근본에는 안전 욕구와 생리적 욕구가 있다. 하위 욕구는 상위 욕구를 다단하게 떠받든다.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서는 안전 욕구가 충족될 수 없고, 안전이나 애정욕구를 충족하지 않고서는 존중이나 자아 실현 욕구를 실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모든 욕구의 하위에는 '호흡'이 있다. 가장 기본은 '호흡'이다. 중국 최고 의서로 꼽히는 '황제내경'에는 사람이 하루 1만 3천500번의 호흡을 한다고 되어 있다. 다만 현대인들은 하루 평균 2만 5천 번 호흡한다. 즉, 현대인들은 과거인들에 비해 2배 이상 많은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호흡이 많다는 것은 호흡이 잦다는 것을 말한다. 호흡이 잦다는 것은 호흡이 짧다는 것을 말한다. 호흡이 짧으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RSA라는 용어는 호흡 주기 동안 발생하는 심박수 변화다. 그 이름은 듣기만해도 무시 무시 해지는 'Respiratory sinus arrhythmia'다. 어쨌건 이에 따르면 인간은 숨을 들이 쉬면 심박수가 증가하고 내쉬면 감소한다. 심박수는 지나치게 높아도, 지나치게 낮아도 문제가 되지만 기본적으로 현대인들은 호흡이 짧고 심박수는 지나치게 높다. 감정의 변화,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자율 신경계의 균형을 흐트러트린다. 또한 교감신경을 흥분시킨다. 현대인들은 항상 맹수에게 쫒기듯 긴장된 상태로 살아 간다는 의미다. 고로 의식적으로 호흡을 천천히 낮게 하는 편이 좋다.

호흡은 모든 것의 기본이다. 하단을 단단히 쌓지 않고서 높은 탑을 쌓을 수 없듯. 가장 기본이 단단해야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아래는 빈약하고 위로는 거대한 역삼각형 구조물을 쌓으려 한다. 아래로 피라미드는 아래로 넓고 묵직할 때 안정감이 있고 그것을 뒤집에 세우면 언제나 넘어진다. 어떤 스트레스적인 상황에 처할 때, 상사에게 꾸지람을 당할 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저절로 호흡을 짧게 한다. 이는 심박동을 높힌다. 그것을 그대로 두기보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천천히 느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숨을 끝까지 내뱉고 있는지. 그것을 안다면 감정 절제가 가능하고 이성적 판단에 유리하다. 장 폴 샤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다"

인생이란 태어남(birth)와 죽어버림(death)사이에 선택(choice)이라는 말이다. 즉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은 앞서 말한 욕구에서 하나씩 이뤄 나갈 수 있다. 좋은 선택은 잦고 짧은 호흡이 아니다. 느긋하고 깊은 호흡, 잔잔한 심박동에서 나온다. 호흡을 깊고 길게 해보자. 이 과정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있다. '나'는 호흡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호흡하는 신체를 지켜보고 조절할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화가 났을 때, '나'는 화가 난 '감정'을 바라보는 주체다. 슬픈 감정이 생겼을 때, '나'는 '슬픔'을 바라보는 주체다. 결국 '내'가 슬픈 것도 '내가' 화난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존재다. 이런 자아 객관화가 이뤄지면 감정에 따른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그 기본 중 기본은 호흡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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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흔들린다 - 경제, 정책, 산업, 인구로 살펴본 일본의 현재와 미래,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정영효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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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이타현 미야하라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여느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관을 갖고 있다. 이 마을에는 아스팔트 도로가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어 접근성도 나쁘지 않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니시 야스코 씨는 한 달에 한 두번 병원 정기 검진을 위해, 혹은 2주치의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 읍내로 나간다. 니시 야스코 씨의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마을의 유일한 주민이다. 2015년에서 2019년 총 4년간 주민이 0명이 되어 소멸된 마을은 일본 전국적으로 164곳이다. 앞으로 이 속도는 더욱 가속화 될 예정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일본의 안타까운 실정이 아니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 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충남 서천군 시초면 봉선리, 이곳 전체 주민은 95명이다. 이중 절반 이상인 52명은 60대 이상이고 4~50대는 23명이다. 이 봉선리는 백제인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천제단'이 처음으로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가까운 미래에 소멸을 맞이할 마을은 우리나라에만 1067곳이나 된다. 일본이 흔들린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은 독특한 나라였다. 어린 시절, 일본의 위상은 엄청났다. 어른들은 '일제'를 곧 '명품'으로 인식했고 어른들은 일본제국의 만행을 욕하는 동시에 현대 일본인의 선진의식을 부러워 했다. 그 오묘한 국가가 내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던 곳이다. 첫 인상은 그랬다. '질서, 청결, 예의' 어른들에게 들었던 일본의 이미지가 그대로 있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을 견주는 것은 어느 분야든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천지가 개벽한 듯 하다. 일본은 저렴한 여행지 중 하나가 됐고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는 뉴스 기사는 적지 않게 나온다. 내가 어린시절 어른들과 내가 가졌던 일본에 대한 열등감 혹은 컴플렉스는 현재 청소년들에게는 없다.

언제부터 이렇게 일본이 가난해지기 시작했을까.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경제 위기를 보고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용어를 썼다. 그러나 2010년이 지나도 일본의 경기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2020년도 벌써 3년이나 흘렀다. 일본이 잃어버렸다는 그 시기는 20년을 지나, 30년, 40년을 훌쩍 넘었다. 이 정도라면 '잃어버렸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맞는가 싶다. 일본이 경제 호황 시절보다 더 긴 불황 시절이라면 '잃어버렸다'는 표현이 다소 어색하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일본 국민의 1인당 GDP는 칠레나 터키 보다 적었다. 어쨌건 두 세대 만에 일본이 엄청난 경제 성장을 통해 미국을 위협하는 경제 대국으로 오른 것은 사실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일본은 이미 엄청난 경제 대국이었기에 내 또래가 갖는 일본에 대한 환상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최근 나이 어린 친구들과 대화를 해보면 일본에 대한 인식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대체적으로 나이 어린 친구들은 일본인에 대한 감정 인식이 나쁘지 않으며 되려 무감각하다는 느낌마저도 든다. 삶의 질에서 어느 나라와 굳이 비교해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앞으로 일본의 미래는 더 어둡다고 본다. 일본의 미래가 더 어두워질 것이라는 예상은 '역사적 감정'이 아니라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전 세계가, 특히 미국이 돈을 찍어내는 '양적완화'를 앞다투어 하기 전까지,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한다는 생각은 터무니 없었다. 그것은 지금은 조금만 경제에 관심을 가져도 자주 듣게 되는 '양적완화'지만 일본 경제를 부양하겠다며 시작했던 '양적완화'는 언발에 오줌누기 같았다. 경제를 부양하는 방법치고 유래가 없는 방법이었다. 당시 일본을 다시 부활하겠다는 아베 신조 총리는 '아베노믹스'라는 용어를 만들어 일본 경제 부활을 확신했다. 아베의 야심찬 경기 부양책은 아베의 세가지 화살이라는 이름으로 신문에 오르내렸다.

'양적완화', '재정지출확대', '기업 체질 개선'. 이미 마이너스 금리인 일본이 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돈을 찍어내는 일 밖에 없었다.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과 경기 부양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일은 크게 기준금리 조절, 지급 준비율 조절, 재할인율 조절이다. 여기서 일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넋놓고 시장의 흐름을 지켜봐야 하는 꼴이 된 것이다. 이때 아베는 무제한적으로 돈을 찍어 시장에 푸는 '양적완화'를 시작했다. 엔화가 풀리면 엔화가치가 떨어져, 수출이 살아나고 기업 수익이 높아지면 체질 개선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다만 이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논리다. 준기축통화라는 엔화의 지위를 이용하여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다. 이런 양적완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의 성장에 큰 발판이 되기도 했다. 과거 일본 은행이 발행한 자금의 반 이상은 국제 금융 시장으로 흘러갔다.이 자금의 다수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중국은 낮은 비용으로 일본 은행이 공급한 자금을 운용했다. 일본의 민간 은행이 중국에 직접 투자나 융자를 한 적은 업지만 중국은 국제 금융시장이라는 중개거점을 이용하여 달러채를 발행하고 투자금을 마련하여 홍콩과 상하이 증시에 투자했다. 결국 2021년 9월 말까지 일본 은행 자금은 488조엔, 일본 대외금융채권은 524조엔 이 늘었다. 반면 중국의 대외금융채무는 232조 엔 늘었다. 일본 중앙은 경제적으로 돈을 찍어내는 일 말고는 시장에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거른데 위험한 것은 일본 중앙은행의 일본 국채 보유율은 50%가 넘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있다. 일본 중앙은행은 도쿄 증시를 부양하기 위해 주식을 매입한다. 특이한 일이다. 일본은행의 상장지수펀드 보유액은 도쿄증시 1부 시총의 4%인 24조원에 해당된다. 일본은행은 신탁은행을 통해 니케이와 도쿄증시 1부종목 지수인 토빅스를 사들이는데 중앙은행이 직접 시장에 개입하여 대주주가 되는 상황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동안 일본은행은 ETF 매입을 늘려온 효과로 대기업을 중심으로 34개사의 기업에 10% 이상을 보유 중이다. 이는 자유 시장 법칙을 크게 흔들어 놓는다. 일본 은행이 대주주인 회사들은 경영 감시의 우려가 있고 기업의 가치가 왜곡될 우려가 있다. 또한 시장에 참여 중인 투자자들은 중앙은행의 이런 투자 성향을 믿고 단기 투자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일본 경제의 가장 큰 위기는 더 이상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손을 써도 역사상 있어 본 적 없는 특이한 방식을 꾸준하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발의 오줌누기로 곪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지연시키는 일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일본의 미래는 아주 어둡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도 어렴풋 보여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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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돈의 미래 - 세계 3대 투자자 짐 로저스가 말하는 새로운 부의 흐름
짐 로저스 지음, 전경아 옮김 / 리더스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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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상반기 기준 중국 내 인터넷 사용자수는 9억 8900만명이다. 이는 미국, 유럽, 한국, 일본 등의 총 인구를 합한 수보다 많다. 중국판 '우버'로 아려진 '디디추싱'은 차량 공유 모바일 앱 서비스다. 디디추싱의 이용자 수는 5억 5000만 명으로 미국 전체 인구 보다 150%나 많다. 중국판 '유튜브'로 알려진 '비리비리'의 한 달 동안 해당 서비스를 이용한 순수 이용자는 1억 7200만명으로 유튜브 전세계 이용자 8억 6840명의 20%나 된다. 중국판 카카오톡으로 알려진 '위챗'의 사용자는 12.6명으로 이또한 미국, 유럽, 한국, 일본의 총 인구보다 많다. '디디추싱'이나 '비리비리', '위챗'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경제를 좋아하는 이가 아니라면 얼핏 들어보지도 못한다. 대체로 우리가 접하는 매체는 서구 중심적이다. 대체로 중국과 러시아에 부정적인 보도를 하는 편이다. 이는 꼭 정치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언론은 대체로 공익성을 가진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언론은 자본투자에 의해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시장지배적 합리성을 따른다. 뉴욕타임즈를 예로들어보자. 뉴욕타임즈의 경우 종이나 온라인으로 구독한 이들에게 나오는 매출은 13억5천만 달러, 광고매출이 5억 달러 정도된다. 결국 이들 또한 광고주에게 선택 받아야 하고 구독자에게 선택 받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기사를 쓸 수 밖에 없다.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에 언론은 원래 중립적이기 힘들다. 다양한 신문을 읽으라는 이유가 이런 이유에서다.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 혹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존 구독자들의 성향에 맞는 기사를 작성하다보면 정치적으로 편향된 색깔이 나오기 마련이다. 고로 어느 나라의 언론 매체든 '좌'와 '우'의 성향을 보인다. 최근 얼마 간 나왔던 뉴스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관해 긍정적인 글을 본 적 없다.

'푸틴' 대통령이 정신병에 걸렸다던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던지, 중국의 코로나 정책 실패로 시진핑 주석의 리더십이 위기를 겪고 있다던지 등의 이야기가 연이어 나온다. 이런 이야기는 줄 곧 부정적인 기사만 나올 뿐 긍정적인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형편 없는 러시아 군인과 화난 중국 시민들의 장면이 연이어 나오지만 그것이 곧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때로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답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분명 인류가 찾아낸 훌륭한 정치 체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일당독재'가 언제나 오답이었던 것은 아니다. 옆나라 일본만 보더라도 '다당제 민주주의 국가'라고 보기 힘들다. 일본은 자민당의 일당 우위 체제다. 이를 '일당 우위 체제'라고 순화하여 말하지만 일당 독재로 표현할 수도 있다. 싱가포르 또한 독재 국가다. 알고보면 부자 나라 중 독재 국가가 있다. 대한민국의 고도 성장 구간 또한 독재 체제 하에 이루어졌다. 고로 민주주의가 곧 고도 경제발달에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짐 로저스'는 대체로 중국과 러시아의 미래를 밝게 보는 편이다. 나 또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단순히 감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다수가 그렇다고 믿는다고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우리는 '진실'을 '믿음'의 영역으로 두고 다수의 믿음을 진실로 강요한다. 1884년부터 1885년까지 독일 제국의 베를린에서 독일 제국 비스마르크의 주도하에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통해 결정된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이후 아프리카를 가난과 분열의 대륙으로 만들었다. 다만 현재 서구 언론이 아프리카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중국의 일대일로'는 그렇지 않다. 둘다 아프리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일대일로는 물리적 폭력을 취하지는 않는다. 이는 정치적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중국의 경제적 미래를 보기에 아주 중요한 문제다. 러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고립되는 러시아의 상황만 보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는 최근 밀 수출이 5배로 급증했다. 사람들의 기대에는 러시아가 전세계로부터 고립되고 경제제재를 당하며 곧 파산되길 기대하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최근 유럽이 가스 비축량을 늘리며 탈러시아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쏟아졌지만 이는 말 그대로 '비축량'이다. 천연가스는 '생산'되자마자 파이프라인을 타고 공급되면 비교불가의 가격경쟁력을 갖는다. 그것이 유럽이 아시아보다 '친환경'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돈은 대세를 따르지만 다르게 보는 습관도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들이 모두 '친환경'을 이야기 할 때, 워렌버핏은 '석유회사'의 주식을 구매했다. '친환경'이라는 말은 듣기 좋지만 현실성이 부족하다. 당장 석유를 통해 얻어지는 '플라스틱'을 없애자는 주장이 그렇다. 플라스틱이 환경에 좋지 않다는 것에 인정할 수 있지만 그 대체재에 대해서는 누구도 제안하기 쉽지 않다. 석유는 단순히 자동차를 굴리고 공장을 운영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 흔히 '선동'과 '세뇌'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정치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다만 경제적으로는 여기서 자유로워야 한다. 선동과 세뇌는 일종의 교육이다. 노출빈도를 높여 사람들의 뇌리에 키워드를 심어 넣는 일이다. 고로 세상이 말하는 모든 것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개인적으로 '존 디어'라는 회사를 좋아한다. 존 디어는 미국 농기계 제조업체다. 미국 주식 중에 '존 디어'를 이야기하면 많이 낮설어 한다. 미국 주식하면 '페이스북', '넷플릭스', '애플', '테슬라' 등을 꼽지만 나는 지금도 '존 디어'만을 관심있게 바라본다. 존 디어는 '농업'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한국인들이 저평가한다. 다만 존디어의 시가총액은 총 151조원으로, 현대자동차의 3배 규모다. 2080년이 되면 세계인구는 100억을 넘어간다. 새로운 인구는 대체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태어날 예정이다.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식량 공급이 필요하다. 이들이 모두 애플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을 하고, 테슬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좋겠지만 이들은 빠르면 12개월 뒤부터 곡물을 빠르게 소비하며 그 섭취량도 점차 늘릴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다. 앞으로 기후변화가 다가오면 지리적, 기후적 장애를 극복할 농업 기술이 필수적이다. '짐 로저스'는 '돈의 미래'라는 책에서 여러가지 제안과 예견을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맞고 상당수는 틀렸다. 그러나 남들과 똑같이 생각하면 안된다는 거의 철학은 나와 닮았다. 보여지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치가 원하는 바에 의해 세뇌되고 선동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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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 지혜를 찾아 138억 년을 달리는 시간 여행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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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맑은 하늘에 태양이 떠있다. 태양은 존재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태양 중심부에서 만들어진 광자가 지구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8분. 우리는 8분 전 태양의 모습은 알 수 있어도 그것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본질을 두고 날아 오는 것은 '빛' 뿐이다. 태양에서 출발한 빛은 우주를 날아와 우리 안구 조직인 망막에 닿는다. 망막은 1억개가 넘는 광수용체 세포를 갖고 있다. 광수용체는 빛을 검출한다. 검출된 정보는 1백만 개가 넘는 시신경 세포로 전달 된다. 모든 신경 세포는 시냅스에 의해 다른 신경 세포와 연결된다. 신경세포는 정보에 의해 자극을 받으면 전기적 신호로 재빨리 바꾼다. 초당 120m의 속도로 축색돌기를 거쳐 시냅스에 보내진다. 시냅스에서는 이를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화학적 신호로 바꾼다. 다시 이것을 옆 신경세포에 전달하면 다시 이는 전기 신호로 바꾸어 다른 세포에 전달한다. 빛이 보낸 신호를 화학과 전기적 신호를 주고 받으며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가 '시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로 '보인다'는 것은 '존재'의 여부를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다. 심지어 이 전기적, 화학적 신호들은 자는 동안에도 활성화되어 '꿈'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꿈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하지만 그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꿈'에서 확신하기 어렵다.

만약 눈앞에 빨간 사과가 있다고 해보자. 그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빨간 사과가 있다는 사실도 같은 원리로 확인한다. 일단 사과를 보기 위해서 '광원'이 있어야 한다. 광원이 없는 상태에서는 사과는 보이지 않기에 존재하는지 알길이 있다. 사과를 본다고 해보자. 태양광이나 형광등 불빛에서 나오는 광원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광원에서 쏟아져 나온 광자들은 사과 표면에 부딪친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사과에 흡수가 되고 일부는 튕겨져 나온다. 이 팅겨진 일부가 나의 망막에 들어온다. 이후 과정은 앞과 같다. 감각 기관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여부는 그것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지 않는다. 모든 정보는 '빛의 속도'라는 딜레이를 갖는다. 빛은 1초에 30만km를 날아가지만 그것이 '동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로 '광자'가 전달해주는 '정보'만 있을 뿐 세계가 존재하는지 알길은 없다.

만약 그것을 만져서 확인하면 어떨까. 그러나 그것도 확인할 수 없다. 만진다는 것은 실제로 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로 이뤄져 있다. 양성자는 입자다. 그러나 전자는 입자가 아니다. 파동이다. 아니다. 파동이 아니다. 입자다. 이것이 무슨 말 인고 하면, 전자는 입자일 수도 있고 파동일 수도 있다. 전자는 마이너스 전하를 가자고 있다. 만약 사과를 만진다고 해보자. 그러나 우리는 사과를 만진 적 없다. 이유는 이렇다. 사과를 구성하는 원자 속 전자와 손가락에 있는 원자의 전자는 서로 마이너스 전하를 갖는다. 고로 이 둘은 반발력을 가져 결코 닿지 않는다. 사과의 전자와 손의 전자는 전자기력을 갖는다. 결국 이 둘은 반발하여 서로 접근할 수 없고 일정 근접거리에서 멈춘다. 이때 우리의 피부에는 압력과 온도 등 진동을 인식하는 수용기가 있다. 이 수용기를 통해 물리량이 측정된다. 이들은 다시 전기적 신호로 바뀌어 옆 신경세포를 전달하며 '뇌'까지 가서 닿는다. 결국 모든 것은 우리 내부의 전기적 신호가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 이것은 외부의 존재와 관련 없다. 오감을 통해 존재라고 확신하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전자신호'다. 그렇다면 컴퓨터 속에 존재하는 빨간 사과 또한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둘다 '전자신호'의 해석으로 이뤄진 것이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실재인가. 알 수 없다. 양자 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만난 적 있다. 양자 역학은 '관찰자'의 중요성을 말한다. 고로 관찰자가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은지 알 수 없다. 실제로 앞서 말한 것처럼 전자는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관찰자가 관찰하면 그것이 입자로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관찰하지 않으면 그것은 파동이 된다. 이 말을 아인슈타인은 이해하지 못했다. 전자는 또한 양성자를 돌고 있지 않으며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가 관찰자가 관찰하면 그때서야 입자가 된다. 고로 전자가 어느 곳에서 관찰될 지는 확정 지을 수 없으며 어느 곳에서 발견될지 확률로만 존재한다. 고로 사과는 여기에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없을 수도 있으며 중국이나 미국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오로지 확률로만 존재한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네." 이에 닐스보어는 말한다. "신에게 이래라 저라래 하지 마시오." 모든 것은 확률적 가능성으로만 있다가 그것을 관찰하면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존재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알 수 없다. 가장 작은 입자라는 '원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양성자와 전자로 이뤄졌다. 전자는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백번 양보하여 전자를 입자라고 보더라도 원자는 '물질'이라고 보기 힘들다. 원자를 구성하는 원자핵과 전자는 그 둘을 제외하고 나머지 99.999%가 텅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하면 원자핵 하나의 크기를 축구공이라고 해보자. 그 경우 전자는 고작 먼지 크기 밖에 되지 않으며 그 거리는 서울 시청에서 수원쯤 된다. 고로 원자는 서울 시청에 있는 축구공 주변을 부유하는 먼지이 공간 비율을 갖는다. 결국 '사과'는 공간이다. 사과를 구성하는 99.999%는 빈공간이며 그것은 나의 손, 나의 발, 달, 지구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세상은 이처럼 모두 비워져 있다. 또한 물질이라는 것도 굉장히 불안정적이다. 빈 공간이라는 것은 물질과 반물질의 쌍입자가 순간적으로 생성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현상이다. 즉 멀리서 지켜 보기에 그저 0일 뿐이지만 그 0을 확대하면 무수한 1과 -1이 순간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다시 0이 됐다가 다시 1이 됐다가 -1이 되길 반복한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 총합은 0이다'라고 했다. 엄청나게 출렁거리는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 사이에서 우리는 아주 가까스로 양의 에너지를 움켜 쥐고 그것을 존재한다고 믿고 사는 것이다.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끓는 물의 거품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보며 그 거품은 존재하는 실체인지를 따져 묻는다면 알 수 없다고 답할 것이다. 그것은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환영일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신호로만 존재한다. 그것은 관찰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과연 가상 현실과 다를 바는 무엇인가. 이에 일론 머스크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상현실이 아닐 확률이 10억분의 1이라고 했다. 많은 과학자들 또한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모든 정보로만 존재하는 혹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채워진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모든 것이 '무'하다는 노자, 모든 것이 '공'하다는 붓다, 모든 것이 확률이라는 양자역학, 모든 것은 0이라는 스티븐 호킹. 왜 모든 현자는 모든 것이 공간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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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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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 프랑스 종교전쟁, 30년 전쟁 등 역사적으로 전쟁과 분쟁은 종교를 표면상의 이유로 갖는다.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을 바꿔 놓은 사건들도 보면 대체로 종교적인 이유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 선언을 하면서 인류 역사는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세계사에서 종교는 이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지만 중국, 일본, 한국에서는 '종교전쟁' 혹은 '분쟁'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리를 보면 동양은 아래로 태평양과 인도양을 갖고 있다. 서양은 아래로 아프리카 대륙을 갖고 있다. 태양광이 지구를 가장 가깝게 내리쬐는 부근은 적도다. 적도 부근은 복사열을 가장 많이 받는다. 동양 대기는 고로 습하고 수증기를 많이 함유한다. 서양의 대기는 아프리카로 건조 기후에 영향을 받는다. 아프리카 북부는 강수량 보다 증발량이 많으며 일교차가 심하다.

1그램당 밀의 열량은 3.5~4.0칼로리, 쌀의 열량은 3.5~3.7칼로리다. 일반적으로 열량의 차이가 크지 않다. 다만 1헥타르 당 수확량을 비교하면 다르다. 1헥타르당 밀은 820kg가 생산되는 반면 쌀은 1헥타르 당 1440kg가 생산된다. 농업 방식의 차이도 있다. 쌀과 밀의 가장 큰 차이는 '이어짓기'다. 쌀의 경우 이어짓기가 가능하다. 반면 밀의 경우 새로운 경작을 위해 농지를 갈아 앞어야 한다. 종자대비 수확량도 다르다. 종자 1kg을 뿌리면 밀은 10배를 수확할 수 있다. 같은 무게의 종자를 뿌렸을 때 쌀은 120배를 수확할 수 있다. 결국 같은 면적에서 쌀은 압도적으로 생산성이 높다. 다만 문제가 있다. 강수량이다. 연간 강수량이 1000mm가 넘으면 벼농사가 가능하다. 다만 그 이하일 경우 벼농사가 어렵다. 고로 이하의 지역에서는 밀농사가 유리하다.

여기서 차이가 발생한다. 벼농사는 물이 어느 정도 고여 있는 논에서 자란다. 고로 관개 물대기는 벼농사의 필수요소다. 적절한 물이 꾸준하게 공급되기 위해서는 땅에 물길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한다. 여기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길 주변에는 사람이 살아간다. 벼농사는 앞서 말한 것 처럼 이어짓기가 가능하다. 한해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하여 경우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수확량을 반복적으로 얻는다. 이 지역에서는 당연히 운반을 위해 '인간'과 '소'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집단을 형성하면 적잖은 수확량을 보장 받는다. 최초의 쌀농사는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다. 한반도에서 쌀농사가 이루어진 것은 대략 2만년 전 정도 된다. 집단에서 이탈된 이들은 대체로 굶어 죽거나 영양상태가 좋지 못했기에 자연선택적으로 걸러진다. 집단생활에 최적화 된 이들이 자연선택적으로 후손에 유전자를 전이 했음으로 결국 동양은 '관계형성'이 대체로 고대부터 형성됐다. 친족관계의 여성을 부르는 말이 서양에서는 'aunt' 하나인 반면 한국에서는 고모, 이모, 숙모 등으로 분류된다. 이들을 이어주는 가장 큰 매개는 '피'다. 고로 낳고 길러준 이가 아니더라도 '어머님', '아버님',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보편화되고 같은 핏줄이 아닌 이들에게 '누나', '오빠' 등의 호칭이 일반화된다.

서양은 다르다. 밀농사의 경우 자연 강우에만 의존하면 된다. 혼자서도 관리가 가능하다. 수확량이 폭발적이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노동력이 필요치 않다. 누군가에게 '인간'에 비해 '소'는 크게 중요치 않다. 소를 신성하게 여기는 '쌀농사' 지역에 비해 '밀농사'지역에서 '소'는 노동력이 아니다. 다만 쌀에 비해 영양가가 낮은 이유로 이들은 소를 통해 우유와 고기를 얻었다. 건조한 기후탓에 밀은 대체로 가루화 하여 장기간 보관할 수 있었다. 밀가루는 우유와 적당히 섞어 불에 구우면 먼 거리로 이동이 가능하여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먼거리를 이동하여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 '동양'의 경우, 농지로부터 '보급'이 필수적이다. 서양의 경우 언제든지 먼 거리를 이동하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 수행이 용이했다.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위해 동원했다는 200만의 군사중 100만은 보급병으로 추산된다. 다만 유럽인은 보급없이 바다에서 수 개월을 항해하면서도 생명유지가 가능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단체 생활을 하던 동양은 고대부터 빠르게 중앙집권 국가체제를 형성했다. 서양은 다르다. 서양은 동양과 유사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수립해 본적이 없다. 타인을 결집하기 위해서 연결성 없는 다수를 하나로 연결할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대체로 동양은 이것이 필요없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결집을 이미 해결했기 때문이다. 서양은 다르다. 서양인들을 결집하기 위해, 공통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공통적인 믿음은 '하나'라는 결집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어떤 의미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애초에 로마는 외래신을 받아들이기도하고 독자적인 신을 만들기도 하는 다신교 국가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거대한 제국의 결집 부족을 봤다. 그는 시간이 흐르며 '동부'가 경제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로마가 워낙 거대한 제국이다보니 점차 제국의 동부과 서부지역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차이가 벌어진다. 결집이 잘된 동부지역은 도시화가 쉽게 이루어졌으며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반면 서부지역은 찾은 분쟁과 갈등, 전쟁이 있었다.

그 시기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작은 유대인들의 종교를 유심하게 지켜봤다. 기독교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유대인들만의 작은 종교는 동과 중앙, 서로 빠르게 확산됐다. 애초 유대인들의 토착종교였던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분화된다. 시기를 서기 1년으로 본다. 유대교가 시작된 중동에서 서기 600년 쯤 '무함마드'가 나타나다. 이것이 이슬람교의 시작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같은 성경을 기본으로 같은 신을 믿는다. 연필을 두고 일본에서는 '엔삐쯔'라고 부르고 미국에서는 '펜슬'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명명의 차이이지, 하나님과 알라는 같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지만 굉장히 다른 차이가 있다. 이슬람에서 '신'은 하나다. 유일신이다. 이슬람을 창시했다는 '무함마드' 자체도 인간이다. 그는 예언자일 뿐이지, 인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신성'과 '인성'을 둘 다 가졌다고 본다. 이는 이슬람교에서 극도로 경계하는 '다신교 논리'다. 성당과 교회를 가면 그 앞에는 '성모마리아 상' 혹은 '예수 상'이 있다. 이슬람 사원에는 '무하메드 상'이 없다. 이슬람에서 보기에 오롯이 유일신만 숭상하겠다는 믿음을 유럽인들은 저버린 것이다. 이 갈등은 대체로 뿌리가 깊다. 대체적으로 우리의 시선은 '서양'에 맞춰져 있다. 이슬람인들에 대한 '이슬라모포비아'가 우리에게도 만연하다. 테러와 차별, 전쟁 등 좋지 못한 공포심이 있다. 이는 상대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다.

프랑스는 대표적인 카톨릭 국가다. 대체적으로 동쪽으로 갈수록 결집에 유리한 유전인자가 남아 있다. 우리가 대체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는 '반유대주의'도 있다. 우리의 경우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지만 서양으로 가면 반유대주의는 적잖게 들리는 차별용어다. 이들은 대체로 잘 결집하는 성향이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분산된 표보다 결집된 표에 유리하다. 민주주의는 고로 프랑스를 이슬람화한다는 설정의 소설이다. 프랑스에서는 꽤 사람들이 공감하는 주제다. 다만 종교가 일상생활과 크게 연결되지 않은 우리에게 '종교 갈등'라는 이야기가 조금 이색적으로 보여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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