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 밤의 우주 - 잠들기 전 짤막하게 읽어보는 천문우주 이야기 Collect 22
김명진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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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미니블랙홀'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말에 따르면 '미니블랙홀'의 질량은 에베레스트보다 무겁고 크기는 원자보다 작다. 혹여 '미니블랙홀'이 증발하거나 폭발하면 전파 신호를 방출할 것으로 봤고 그 신호를 통해 빅뱅과 초기 우주, 블랙홀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 이론을 호주 전파 천문학자인 '존 오설리번'은 흥미롭게 지켜봤다. 이어 이 전파 신호를 관측하고자 했는데 그 과정에서 잡음과 신호 왜곡을 제거해야 했다. 결국 오설리번 박사는 미니 블랙홀 관측에 실패했지다. 다만 이 기술이 무선 네트워크 통신 기술에 적용될 것이라 봤다. 당시 무선 네트워크에는 큰 문제가 있었는데 가구나 벽에 전파가 반사되어 신호가 왜곡되는 것이다. 오설리번 박사는 데이터를 한 번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작은 신호 조각으로 나누고 여러 차례 복제하여 병렬로 전송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기술이 오늘날 무선 통신 표준 기술인 와이파이가 됐다.

스티븐 호킹이라는 영국 이론 물리학자의 가설을 호주 전파 공학자가 넘겨 받아 실생활에서 아주 쓸모 있는 새로운 기술로 재탄생했다. 대체로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에 눈을 박고 천체를 관측하는 직업으로 안다. 다만 실제 천문학자는 눈을 박고 천체를 관측하지 않는다. 보다 규모 있는 관측도구로 별을 올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바라본다. 대부분의 전문가가 관련 분야에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것에 반해 천체물리학자 대부분은 우주를 나가보지 않고 우주의 전문가가 된다. 사회와 동떨어진 무언가를 탐구하는 듯 하지만 그 기술은 생활 속에 아주 치밀하게 스며들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증명하고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먼 거리에 대해 예측하는 일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과학은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은 아니다. 다만 확률을 계산하고 대비하는 학문이다. 가령 인공위성이 떨어지지 않고 지구 궤도를 돌기 위해 얼만큼의 연료가 필요하고 그 높이와 무게는 얼마나 둬야 하는지 계산한다. 역시 미래를 예견하진 않지만 실패 확률을 줄인다. 물리학은 실행 중 얻게 될 실패를 종이와 모니터로 대신하니 시간과 비용 면에서 경제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독일로 나아갈 때 일이다. 나폴레옹 군은 강 넘어 독일군의 진지로 포를 쏘았다. 다만 나폴레옹 군이 쏜 포탄은 독일 군 진지로 떨어지지 않고 강으로 떨어지거나 진지를 넘어가곤 했다. 이에 대해 포병대장에게 묻자, 포병대장은 강폭을 알 수 없어 정확히 포를 쏘기 힘들다고 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어떻게 했을까. 직접 강을 건나 강의 폭을 재었을까. 아니다. 나폴레옹은 직각삼각형의 합동조건을 이용하여 강폭을 알아냈다. 이처럼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물리학'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주선을 지구에서 화성으로 보낸다고 해보자. 몇 번의 우주선을 쏴보고 실패를 경험해야만 할까. 아니다. 화성으로 가기 위해서 물리학자들은 '스윙바이'라는 기술을 생각해 냈다. 단순히 연료를 이용하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화성 사이에 있는 행성들의 중력을 이용하여 던져지는 것이다. 이 과정을 이용하기 위해 행성의 공전과 자전 주기를 파악해야하고 그 각도를 계산해야 한다. 출발 전 이렇게 완전한 행성 간 초고속도로를 확인하면 비용과 시간적인 측면에서 크게 이득을 볼 수 있다. 천체물리학은 수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의 집합체다.

우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꽤 경제적인 이들이 늘어난다. 반드시 해야 할 실패를 종이 위에 하고 나폴레옹과 같이 건너보지 않은 강의 폭을 재며 스티브 호킹 박사의 이론으로 시작된 '와이파이' 기술의 영감도 얻게 된다. 이런 이들이 많아지는 과정은 엄청나게 많은 교육이 아니다. 우주에 대한 관심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공군장교였던 '생텍쥐페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튼튼하고 좋은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먼저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

누구나 인간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몽상에 잠긴다. 넓은 우주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갖고 있다. 대체로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지만 그것에 대한 강렬한 동경심은 어릴수록 더 많은 것을 하도록 한다. 매일 밤 아주 잠시라도 '창백한 푸른점' 지구에서 복작거리는 일에서 벗어나 넓고 큰 세상에 동경심을 갖는다면 단순히 과학, 수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미에서 더 많은 깨달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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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사의 신이다 - 일단 돈을 진짜 많이 벌어봐라 세상이 달라진다!
은현장 지음 / 떠오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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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유재석은 무한도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느린 것이 가장 빨라요."

'호아킴 데 포사다'의 '마시멜로 이야기'에는 '만족지연 이론'이 나온다. 4~6세 어린이들에게 마시멜로 1개를 주고 15분동안 먹지 않으면 2개를 주겠다는 실험의 일부다. 이 실험에서 2개의 마시멜로를 받아간 이들은 마시멜로를 먹어버린 이들에 비해 이후, SAT성적, 학업 성취도가 우수했다. 성인이 되서는 더 높은 소득을 가졌다. 즉각적인 보상에 길들여진 사람은 장기적 성취가 더 낮을 수 있다는 의미다. 대체로 학생들은 공부보다 게임에 관심을 보인다. 게임은 공부에 비해 즉각적인 보상을 한다. 반면 공부나 훈련의 경우, 보상이 즉각적이지 않고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쉽고 빠르게 편한 방법을 찾지만 그것은 장기적 비효율이다.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성공을 쟁취한 이들은 진짜인 경우가 많다. 체력을 기르는 방법은 약과 주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운동장을 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것은 주사나 약보다 비효율처럼 보이지만 가장 효과적이다. 개인적으로 '경제적 자유', '파이어족'을 지향하는 이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최대한 빨리 성공하여 은퇴하는 것이 삶이 목적인 방식 말이다. 인생의 목적이 '은퇴'라면 꽤 슬픈 일이다. 단순히 돈을 위해 움직이면 결과적으로 본질을 놓친다. 사람들은 아둔하지 않다. 최대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자신의 주머니를 노리는 이에게는 주머니를 더욱 당차게 잠근다. 햇님과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동화가 떠오른다. 세차게 바람으로 외투를 벗기려 들면 들수록 나그네는 외투를 고쳐 잠근다. 가장 비효율적이고 느린 방식은 때로는 가장 빠르게 목적에 성취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주머니는 자신이 이득이 될 때 열린다. 고로 이득을 주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맞다.

100만원 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면 100만원 너치만 일해서는 안된다. 100만원 짜리 아르바이트에서는 120만원 너치를 일해야 한다. 가격은 언제나 가치에 비해 느리게 형성된다. 가치이 먼저 오르고 가격은 가치를 따라간다. 이는 워렌버핏이 말하는 '가치투자' 방식을 닮았다. 워렌버핏은 적정가치에 미치지 못하는 저평가 주식을 매수하고 그것이 제가격을 찾아갈 때까지 기다린다. 자본주의에서 이 둘에 시차는 있지만 가격은 반드시 가치를 찾아 맞춘다. 현대 정주영 회장은 자수성가의 대표 명사다. 그는 농사꾼 장남에서 대한민국 최고 부자로 우뚝섰다. 처음부터 창업을 하고 사장의 위치에 앉았을 것 같지만 그는 젊은 시절 취업을 먼저했다. 그가 취업한 곳은 '쌀가게'다. 그곳에서 가게 사장과 인연이 된다. 가게 사장은 언제나 성실한 그를 보게 된다. 배달 직원이던 그는 점차 자신이 해야 할 몫보다 더 일을 한다. 경리를 맡고 청소, 회계, 창고 정리도 도맡아 했다. 그는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했다. 받은 만큼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과 상관 없이 일했다. 어지러운 장부를 정리하고 물품을 품목별로 정리했다. 재고, 현금, 외상 기록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새벽 3시 30분에 가게로 나가서 마당을 쓸고 물을 뿌렸다. 가게 사장보다 더 지극 정성으로 일을 돌본 끝에 쌀가게 주인은 이 가게를 아들이 아니라 '정주영'에게 인계한다. 이런 신뢰는 보이지 않듯 쌓이다가 언제든 보상된다. 받은 만큼만 일한다는 생각은 얼핏 똑똑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사회는 언제나 이로운 일을 하는 이들에게 기회를 연다. 고로 댓가는 언제나 형평성을 따지기 보다 적게 받는 것이 우선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득이 되는 상황이면 지갑을 열고 달려든다. 고로 상대가 이득을 보고 있다고 믿게 해야한다.

미련한 방법은 때론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자신을 똑똑하다고 믿을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반드시 찾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을 천재라고 믿는 이들은 대체로 '반복'을 기피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려 든다. 학창시절 수학문제를 풀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같은 책을 여러 번 풀어보는 것이다.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고 얼마 지나고 다시 풀어보는 것이다. 그것은 얼핏 비효율이다. 몇 번 정도 썼을 때 효과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틀렸다. 때로 가장 똑똑한 방법은 가장 무식한 방법이다. 간혹 단순 암기보다 '이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때로는 '이해'보다 '단순암기'가 더 중요한 순간도 있다. 헬스장이나 도서관에는 가장 비효율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이들은 내려 놓을 무거운 짐을 겨우 올렸다 내려 놓는다. 어차피 잊어버릴 무언가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읽고 쓴다. 앞으로 가지 않는 자전거를 타고 당장 몰라도 굶어죽지 않을 정보를 머릿속에 넣기 위해 발악한다. 이런 비효율은 결국 최대효율을 낳는다. 김연아 선수는 대회에 참여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같은 동작을 수 천 번 반복했다. 한 번을 보여주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은 상당한 비효율이다. 김연아 선수는 '파이어족' 혹은 '경제적 자유'를 위해 훈련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빠르게 목적에 달성한 이들이다. 돈이 목적이 아닐 수는 없다. 돈은 분명한 목적이 중 하나다. 다만 그것만이 오롯한 목적이 된다면 모든 것은 수단이 된다. 상대하는 손님, 가르키는 학생 때로는 관객, 청중이 될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수단이 되면 수단은 목적에 의해 변형된다. 스티브 잡스는 성공적인 기업가지만 세상에 굉장히 선한 영향을 남겼다. 그의 발견으로 많은 사람들이 편리함의 혜택을 누린다. 삼성, 현대, 롯데 등 모든 기업들에게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들은 우리에게 굉장히 이득이 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향해 지갑을 연다. 고로 사업 혹은 장사를 하는 일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고 그것은 곧 부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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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사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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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단은 있다. 다만 두 극단은 무수하게 많은 점으로 이어진다. 고로 하나의 덩어리다. 수학에서 '위상동형'이라는 말이 있다. 위상동형은 본질적으로 같은 형태다. 위상동형이란 늘리거나 줄이는 정도의 차이만 존재하는 모형을 말한다. 다시 말해 덧붙이거나 잘라내는 것 없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정도의 차이만 있는 모형이다. 여름철 수영장 튜뷰를 예로들면 적절하다. 튜뷰는 겨울이되면 바람을 빼어 종이처럼 얇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튜브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름이 되면 그것에 바람을 다시 넣어 도너츠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일부를 부풀리고 늘리고 줄이는 등의 변화로 그 도너츠 모양은 '컵'모양으로도 변한다. 고로 위상동형은 본질적으로 같다. 손에 착용하는 반지를 살펴보자. 반지에는 손가락을 집어 넣을 수 있는 구멍 하나가 있다. 이 반지를 길게 늘여 빨대처럼 만든다고 해보자. 빨대는 입구와 출구라는 두 개의 구멍이 생긴다. 그러나 새로운 구멍을 뚫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빨대도 반지와 같이 구멍은 하나다. 이것이 위상동형이다. 결국 구멍이 두 개가 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길게 늘리기만 해도 인간은 하나의 구멍을 두 개의 구멍으로 착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본질은 하나다. 다만 그것의 여러 위상동형의 형태를 를 보면 그 모양이 각각 다른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은 각각 입구와 출구의 다른 이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없음'이라는 모양의 위상동형이다. 비어 있는 값에 마이너스 1과 플러스 1을 넣는 것이다.

수학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라고 정의했다. 그가 말하는 '수'라는 것은 자연수를 말한다. 인간의 눈으로 하나, 둘, 셋하고 셀 수 있는 단위의 수라고 여긴다. 그는 바닥에 깔려 있는 타일을 보며 직각 삼각형에 어떤 규칙이 있음을 발견한다. 세 개의 정사각형 타일로 가운데 직각삼각형을 만든다고 해보자. 이때 가장 큰 정사각형 한 변의 제곱은은 다른 두 정사각형 한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등식이다. 이것을 '피타고라스의 정의'라고 한다. 이 발견은 역시 위대했으나 그의 제자중 '히파수스'는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직각 삼각형에서 짧은 두 변의 제곱의 합이 긴 변의 제곱이라고 하면 한 변이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를 구하기 위해선 제곱해서 2가 되는 값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제곱해서 2가 되는 수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최초의 무리수가 발견되지만 '히파수스'는 이 수를 발견한 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결국 제곱해서 2가 되는 수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루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처럼 수학은 등호의 양변에 같은 값을 더하고 뺀다는 규칙으로 수의 개념을 확장해 나간다. 결국 무엇을 더하거나 무엇을 빼도 등호가 성립된다면, 양변에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다음으로 발견한 수학의 법칙은 이렇다. 0을 제곱하면 0이다. 또한 0이 아닌 수를 제곱하면 0보다 크다. 그렇다면 마이너스 1은 무엇을 제곱한 값일까. 논리대로라면 이 값은 루트 마이너스 1이 된다. 양변이 같다는 등호는 절대적 규칙이다. 그것을 해치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음수의 제곱도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음수의 제곱을 궁리하다가 우리는 '허수'라는 개념을 찾았다. 허수는 가상으로만 존재하는 값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i'라는 기호를 쓰고 실수로 표기한다. 이것은 복소수다. 복소수는 존재하지 않는 '허수' 때문에 다루기 힘들다. 고로 계산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켤레복소수'라는 것을 활용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하고 빼는 관계다. 이를 활용하면 허수는 사라지고 실수만 남는다. 이렇게 우리는 관측 불가능한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쨌건 우주는 하나가 더해지면 하나가 빼지는 관계다. 여기서 절대규칙이 있다. 등호는 바꾸지 않는다. 우주의 절대값은 바뀌지 않는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처럼, 반드시 에너지의 총량은 유지된다. 우주가 최초로 폭발하는 빅뱅으로 돌아가면 우주는 '양'과 '음'의 두 극단으로 폭발해 나간다. 고로 우주에는 물질과 반물질의 쌍입자들이 순간적으로 생성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다시말해서 우주의 텅 빈 시공간이 0이라고 하면 그것을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0이지만 그것을 양자 단위로 확대해서 보면 쌍입자는 플러스 1과 마이너스 1을 무한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양자 요동 상태다. 그것이 도가에서 말하는 '무', 불가에서 말하는 '공'을 닮았다고 해도 좋다. 스티브 호킹 박사가 했던 말 처럼 우주의 모든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 값을 모두 합하면 0이 된다. 우주는 결국 '무'와 '공'의 위상동형이다. 고로 '삶'과 '죽음'은 '없음'이라는 상태를 100년의 시간과 공간으로 늘린 위상동형이다. 단지 길이만 길어졌을 뿐이지 '없음'의 위상동형이다. '남자'와 '여자' 또한 무한대로 요동치는 양극단의 공간일 뿐이다. 거기에는 무수한 점들이 있으며 있고 없고의 사이에 중간 값도 존재한다. 다시말하면 이렇다.

남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상태,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상태.

남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상태,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상태.

신체적으로는 남성, 정신적으로는 여성인 상태

신체적으로는 여성, 정신적으로는 남성인 상태

신체적으로 남성이고 정신적으로 여성인 자가 여성을 좋아하는 상태.

신체적으로는 남성이고 정신적으로는 여성인자가 남성을 좋아하는 상태 등.

이처럼 정확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 무수한 점도 역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음양적으로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어디까지가 남성이고 어디까지가 여성이라는 것인가. 그것은 윤리의 문제를 포괄하여 복잡해진다. 뇌사와 식물인간은 살아 있는 상태인가 죽어 있는 상태인가. 정신이 남성이고 신체가 여성이면 남성인가 여성인가. 신체가 정신보다 중요한 것인가. 또한 정신적으로 여성이라면 어느 경계부터 여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 양자 요동의 상태 중 멈춰지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정의한 것은 정의한 이후에도 끝없이 변하지 않는 진실 남는 것인가. 흐르는 물에 손가락을 가리키고 거기에 이름을 정한다면 그 물의 이름은 그것이 되는가. 그 강물은 멀리서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가리킨 순간의 물은 이미 흘러가고 없지 않은가.

결국 촛불하나 켰을 때 어디서 부터가 빛이 끝나는 지점인지를 지정하는 것처럼 그것은 아주 미세한 그라디에션이며 무엇이 무엇이라고 칼처럼 단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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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 - 수도원에서 띄우는 빛과 영성의 그림 이야기
장요세파 지음 / 파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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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드의 'The Holy Family'라는 그림은 책을 든 엄마가 아이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이 모습은 너무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다. 다만 그 앳된 엄마가 '마리아'라고 알고 보면 다르다. 흔히 성숙한 모습으로 기억하는 '마리아'가 앳된 소녀 엄마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른손는 '구약'으로 보여 지는 책이 들려 있다. 아이를 비추는 빛은 그 위치가 다르다. '벽난로'가 있는 측면이 아니다. '상향'이다. 앳된 마리아와 어린 예수의 모습이라고는 보여지지 않을 이 그림은 '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의도가 있다. 빛 통해 평범하지만 비범하게 보여지는 효과다.

이탈리아 초기 화가, 카라바조 역시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그림을 표현한다. 그의 그림만큼 자신도 빛과 그림자가 분명한 이름이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뒷골목을 전전한 사람이다. 또한 신학적으로 해석했을 때 깊은 의미가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므로써 스스로도 빛과 그림자의 극명함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 카라바조의 그림 중 'The taking of Christ'라는 작품은 어둠 속에서 예수의 얼굴에 빛이 드리워져 있다. 다만 그의 표정은 역시 어둡다. 예수 그리도가 잡혀가는 상황을 묘사한 이 그림은 매우 역동적으로 보이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고작해봐야 여섯이 전부다.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서 인물 한명 한명이 강한 서사를 드러낸다. 예수를 잡으러 온 병사들은 과도한 복장을 착용하고 있다. 번쩍 거리는 갑옷을 착용하여 사납게 덤빈다.

대체로 예수를 표현하는 그림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빛'이다. 이 빛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어둠이다. 고로 예수와 마리아의 그림에는 빛과 어둠이 함께 있다.

일본에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타다오는 오사카, 아바라키 가스가오카 교회를 직접 설계했다. 이 교회는 평범한 주택가 안에 있는 교회지만 그 애칭은 '빛의 교회'다. 그는 교회를 콘크리트로 지었는데, 예배당 제단 뒷편에 쉽자겨 형상으로 창을 만들어 밖에서 빛이 세어 들어오도록 설계했다. 이 교회는 주변이 어두워 그 빛이 선명하게 보여질 뿐 만아니라 아름답기까지하다. 반면 교회의 외부로 가게되면 정확히 그 빛은 반전된다. 밝은 주변에 비해 검은 십자가가 나있다. 고로 밝음은 어둠을 낳고, 어둠은 밝음을 낳는다. 성경 구약에 따르면 창세기 1장 3절는 다음과 같다.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이 있었다."

얼핏 창조주는 빛을 가장 먼저 창조했을 것 같지만, 빛이 생기기 위해 먼저 존재해야 하는 것은 '어둠'이다. 고로 어둠은 '빛'에 선행한다. 또한 빛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 할 수 있다. 세상을 모두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창세기에 따르면 빛과 어둠은 극명하게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또한 둘이 맞닿아 있고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와 모네가 빛의 화가라고 불려지는 이유는 이 빛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밝음과 어둠은 단순히 빛과 그림자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은 빛의 방향과 표정 상황, 분위기, 색체 등을 이용하여 다양하게 빛과 어둠을 표현한다.

사람에 따라 그림을 보는 행위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예술 작품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료일 수도 있다. 다시 누군가에게는 기법과 기술일 수도 있다. 다만 '장요세파' 수녀에게 그림은 기도와 닮았다. 기도라는 것은 특별히 어떤 동작에만 이름을 붙이는 성격의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것과 세상의 모든 것에서 신의 숨결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는 종교에 다르지 않다. 단순히 미술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을 통해 구도자의 길에 대해 묵상하고 생각해보는 것은 단순히 눈을 감고 손을 모으는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림은 분명 불투명 하지만 분명 관통하여 무언가를 또렷하게 보게하는 '창'과 닮았다. 단순히 여러 색깔의 집합체가 아니라 거기에는 인문학적 정보와 신학적 정보가 함께 담겨져 있다. 이런 인류학적인 압축파일은 풀어내는 이가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중세 유럽에서 종교의 의미는 특별하다. 그 시기에 그려진 그림을 해석하는 이가 종교인이라는 것은 그 시대적 배경과 생각해 봤을 때 굉장한 매력이 있다. 우리는 글이라는 것에 굉장히 큰 의미를 둔다. 그러나 원래 인간이 최초에 남긴 정보는 글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인간이 당시 남겼던 정보가 글이 아니라 그림이었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 우리는 그림을 통해 직선적인 정보가 아닌 공간적인 정보를 받아들이고 추상적인 관념에 대해 폭넓게 추측하게 됐다. 이것이 아마 우리의 인지 발달에 직선 정보보다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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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들 - The Places
류성훈 지음 / 시인의 일요일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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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모르지만 최초의 언어를 사용한 인간은 '명사'부터 썼을 것이다. 무언가에 이름을 짓는 행위로 그것을 정의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의를 좋아하는 인간의 특성이 자신에게도 '이름'을 짓고, 상대에게도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이름 지어진 자신과 상대는 아이러니하게 그 이름에 갇혀 본질을 잃을 것이다. 언어는 본질을 멋대로 가둬 놓는 행위다. 피어 오르는 아지렁이를 아지렁이라고 부른다면 그 옅어지는 가장자리를 무어라 부를 것이며 그 가장자리의 가장자리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인간이 존재를 형용하려는 순간 대부분의 것들은 가차 없이 난도질되며 멋대로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칼로 잘려 나가진 본질의 외곽 부분은 부스러기가 되어 이름 조차 없이 무존재로 존재할 것이다. 고로 언어를 만진다는 꽤 날카로운 면도날을 다루는 일과 같다. 무언가 잘못 그어버리면 한뿌리 한뿌리가 동강나 버린다. 글을 쓰는 사람의 글의 칼날과 같으니, 시인의 글은 수술대에 올라선 외과의사의 상대를 닮았다. 미세한 감각으로 덜어낼 것과 그러지 않은 것들을 건들어내는 것이다. 물리학은 시공간이 관찰자에 의해 존재하거나 변용된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관찰자'로서 공간과 시간을 존재케 하고 변용케 한다. 그 위대한 업적을 매순간 매장소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라는 존재고 그 모호한 것을 대상을 수술대에 올려 놓고 섬세한 칼날로 본질을 들어내게 하는 것이 시인이다.

장소(場所)는 흙 위로 태양이 빛추는 글자, 장과(場), 도끼로 나무 찍는 소리를 의미하는 글자 소(所)가 합쳐진 글자다. 그것이 빛과 떨림을 모두 의미하니 조금더 깊게 보자면 양자역학처럼 존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어떤 장소를 단순히 면과 면이 만나는 3차원으로 기억할 수 없다. 우리는 거기에 시간이라는 1차원을 덧되어 4차원을 산다. 거기에 시간을 제거하면 단순히 그곳은 장소가 아니라 '공간'이 되어 버린다. 비어있는 사이. 아무런 의미를 상실한 비어있는 곳. 그것은 아무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어떤 장소를 보면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이 함께 머릿속에 그려질 때가 있다. 고로 장소에서 시간을 뺀다는 것은 모든 것을 비워 버리는 것과 같다. 등호를 사이에 두고 양변을 저울질해 보건데 그 값이 0이 된다면 장소는 곧 시간이 된다.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다. 단순히 공간으로 보이지 않고 시간으로 보이는 장소 말이다. 남들보다 꽤 다양한 곳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오죽이나 넓은지 지구를 몇 번을 돌았을지 모른다. 비행기의 속도로 12시간은 움직여야 도달하는 곳에도 나의 기억은 묻어 있다. 내가 공간을 이동하며 했던 생각은 그곳을 비어 있는 곳에서 가득찬 곳으로 바꾸었다. 비로소 장소가 됐다. 고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명사를 동사화하여 사용했다. Place라는 장소는 동사 위치에 두어, '두다. 놓다. 배열하다'의 의미로 사용했다. 나는 공간에 시간과 기억을 두고 왔다. 내가 그곳에서 했던 모든 행동들은 빛의 형태로 우주 전체로 산란되어 수백억 광년 우주 끝에 죽지 않고 정보로 도달할지 모른다. 그것은 우주 끝에 있는 누군가가 정보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그저 내 머릿속에서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가 사라질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있고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다.

'장소들'을 집필한 '류성훈' 시인의 글은 이미 출발지에서 광속으로 우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정보를 언어화하여 종이 위에 담아 두었다. 그 아련한 기억은 그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추억으로도 남아졌다. 작가는 아주 복잡한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함수를 짜놓은 상자와 같다. 어떤 값이 입력되면 작가의 시간과 공간, 기억은 아주 세밀하게 작동하여 완전히 새로운 것을 토해 놓는다. 안타깝지만 작가가 가지고 있는 함수는 그의 고뇌와 슬픔, 기쁨, 우울함, 즐거움의 다양한 감정에 기인한다.

고흐는 스스로 엄청난 고뇌를 지니고 살아가다가 정신병원에서 권총자살을 했지만 그의 고뇌는 현대인들에게 작잖은 인사이트를 남겼다. 모짜르트도 스스로 엄청난 작품을 남긴 작가지만 엄청난 빚을 지고 가난에 허덕였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30대에 도박으로 부모의 유산을 모두 날렸다.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 많은 빚을 졌고 성욕과 도박의 유혹에 쉽게 현혹됐다. 그의 젊은 시절은 쾌락과 그 뒤에 찾아오는 환멸감의 윤회였다. 그는 질투심이 많고 타인의 존경과 세상의 찬사를 갈망했다. 이런 세속적인 인생을 살던 이력이 그의 글을 '그의 글'답게 한다. 그는 결혼 이후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의 아내와 맞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다만 그 또한 스스로에게는 여러 고통을 주었겠지만 결국 자신을 더 자신스럽게 만들었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스께 소리로 하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있다.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결국 작가는 좋음과 나쁨의 어떤 선택에서도 글의 성향이 결정될 뿐이다. 류성훈 작가가 자신의 눈과 경험으로 소화하고 글로써 만들어낸 모든 경험들은 아주 미묘한 그만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찬찬히 읽다가 문뜩 누구의 글이었는지 기억이 가물한 나의 옛추억과 만나 완전히 새로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시인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시인의 글은 시인의 삶으로 완성된다. 고로 그의 글은 이미 쓰여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이고 앞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나아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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