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말 - 작고 - 외롭고 - 빛나는
박애희 지음 / 열림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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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하나 마디를 한 치(寸)라고 한다. 한 치(寸)는 3cm 정도되는 길이인데 다른 음으로 '촌(寸)'이라고 한다. 단위에서 가장 짧은 단위에 속하기 때문에 '한 치(寸) 앞도 모른다', 혹은 '세 치(寸) 혀가 사람 잡는다' 등의 속담으로 사용된다.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하는 '치(寸)'가 곧 '촌(寸)'이니 1촌(寸)을 뜻하는 부모 자식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부모 자식만큼 가까운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혀 끝도 세 치나 밖으로 나가 있으니, 한 치라면 내 몸보다 가깝다. 비유적인 표현이겠지만 그만큼 가까운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다. 요즘은 아이를 잘 낳지 않는 추세지만 보통 아이를 낳는다면 서른쯤 아이를 갖는다. 그 정도부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라는 하나 자아로 살아가는 듯 하지만 아니다. 어린 시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전혀 다르다. 개구진 아이가 조용해지거나 조용한 아이가 야무진 아이로 바뀌기도 한다. 외형만큼이나 내형도 바뀌는 것이 사람인지라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과거를 잊는 일에는 인간도 다르지 않다. 아이를 키우면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마치 시험 문제에서 틀린 오답노트를 들춰보는 것 같다. 잊어버린 기억이 새록 새록 떠오른다. 어느 날 편의점에서 아이가 불량식품 하나를 골랐다. 성인이 되고 결코 사먹어 본적 없던 불량식품이었다. 사실 성인이 된 뒤에 그 존재를 잊고 지냈다. 항상 들리는 편의점인데 나에게는 그 불량식품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그것을 가져오니 그것이 다시금 상기하게 했다. 어린 시절 나는 그 불량식품을 좋아했다. 아이가 아니라면 잊혀졌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면서 바쁘게 지나 온 과거를 그제서야 떠올리게 됐다.

부모는 자신이 결핍했던 부분을 아이에게 투영한다. 때로는 그것이 아이에게 부담이기도 한다. 이런 욕심은 아이가 부모의 과거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이를 보면 과거의 내가 보인다. 아이에게 나무라거나 혼내키는 것은 어찌보면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나에게 상처를 남기는 행위와 같다. 아이와 나의 관계가 한 치 밖에 되지 않으니, 나에게 묻은 똥이 같이 묻고, 나에게 묻은 겨가 같이 묻었을 뿐이다. 한 번은 출강을 나가서 아이에 대한 이야기 중 큰 후회를 하는 분을 뵌 적 있다. '교육'에 관한 내용이었다. 좌우 반전되어 있는 아이의 글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이의 그림은 종종 좌우 반전된 혹은 위와 아래가 반전된 경우가 있다. 다만 그것은 교육으로 바로 잡을 수 없다. 키가 다 자라지 못하고 몸무게가 늘어나지 않은 것 처럼 아이는 미성숙한 상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이의 뇌 또한 완전히 자란 상태는 아니다. 아이의 뇌가 성숙하지 못한 것은 단순히 신체의 미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인지능 능력이 성인처럼 완전하지 못하다. 고로 뒤집어 있는 컵과 바로 서 있는 컵을 바라보고는 구별하지 못한다. 우리와 똑같은 것을 보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완전히 다르다. 교육을 하겠다고 아이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아이는 몹시 당황해 한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구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잘못했다고 지적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의 인지능력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부모의 공감능력을 문제 삼아야 한다. 영화 '사도'를 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한 아버지와 그것을 못견뎌 하는 아들 사이의 갈등이 나온다. 이 갈등이 현대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돌의 숫자는 늘어나더니 TV를 켜면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 늘어났다. 마치 안면인식 장애가 생긴 것처럼 '누가 누구던가' 하는 시기가 나에게 온 것이다. 어린 학생들은 이런 나를 보며 '어른'으로 생각할 것이다. 결국 아이라서 미성숙한 부분도 있지만 어른이라서 미성숙한 부분도 존재하는 것이다. 노화의 기준은 성장 이후부터라고 한다. 성장은 절정으로 치솟아 오르는 과정이고 노화는 절장에서 내려가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에는 비슷한 '미숙'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결국 아이의 미숙에 답답해 하는 모습은 이제 닥칠 자신의 미숙을 받아드리는 자세와 다르지 않다. 한 번은 아이와 미로찾기책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연필을 꽉 붙잡고 미로를 따라 줄을 긋고 있었다. 아이는 뻔하게 막혀 있는 미로의 끝까지 갔다. 벽에 부딪친 뒤에야 아이는 돌아나왔다. 아이에게 물었다.

"막혀 있는데 왜 끝까지 가?"

아이는 말했다.

"그게 나는 보이지가 않아. 그러니까 일단 가보는거야. 아빠는 답답해도 기다려줘."

그냥 봐도 막힌 벽인데 아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예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제가 아직 영어가 완전하지 못해요'

이렇게 말하고 다니던 유학시절이 떠올랐다. 아이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상대에게 인지 시켰다.

''그렇구나. 아이가 부족한 것을 보느라 내가 부족한 것을 보지 못했구나.' 아이에게 배웠다.

막 성인이 되어 성장이 완전하다고 착각하는 시기에 아이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이의 말은 아이의 입에서 나왔기에 무심코 놓칠 뿐이다. 때로 아이는 어른 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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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OUT 유럽예술문화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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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재주가 열 두 가지면 굶어 죽는다."

시대가 달라졌다. 다방면에 박학다식한 이들이 살아 남는다. 과거에는 다양한 재능과 지식이 있는 사람은 굶어 죽는다고 했다. 알맹이 없고 앞가림을 못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지금은 아니다. 판단하는 잣대가 과거에 한 가지 였다면 지금은 다양하다는 의미다. 폭넓은 지식이 새로운 생각을 융합하고 다양한 사람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에 와서 굉장한 무기라는 것은 사람들은 안다.

교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의미한다. 교양이란 여러 분야에 일정 수준의 지식과 상식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음악, 미술, 문학, 역사 등이 그렇다. 이런 교양은 상황과 사람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준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전공을 배우기에 앞서 '교양'을 배운다. 대학교 첫 해에 교양을 배움으로써 다른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한 사람들과 섞인다. 전공에 앞서 교양을 배우는 이유는 역시 교양의 중요성 때문이다. '음악'이라던지, '미술'이라던지, '기술'이라는 과정들은 초등학교 시절 중요하게 다뤄지다가, 점차 수업 일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 교양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는 이미 알고 있다.

교양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화는 유럽에서 왔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귀족사회다. 이들 상류 계층은 사교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영감을 얻고 사업과 권력을 나누고 확장시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대화 능력'이다. 만난 사람과 즐겁게 대화하고 배우고 나누는 과정은 사회 생활의 필수 요소였다.

현대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유럽을 배워야 한다. 유럽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우리의 뿌리가 동쪽에 있어도 실생활 문화는 대체로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이 어쩌면 '잉글리쉬 호른'을 닮았다. 클래식 악기 중에 '호른'이라고 있다. 호른은 길기 늘어난 나팔이 안으로 둥글둥글하게 말려져 있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 악기다. 이 금관악기는 대체로 '호른'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의 전체 이름은 '프렌치 호른'이다. 이 호른이 프렌치 호른이라고 불린 이유는 '프랑스'의 역할이 대단히 많이 작용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호른이 현대의 모양을 형성하는데 독일의 공로가 더 컸다. 현대 프렌치 호른은 1720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신생악기에 속한다. 호른의 정체성은 매우 모호하다. 호른은 동물의 뼈인 혼(horn)에서 나온 말이다. 현대의 호른에 동물의 뼈는 없다. 모양과 재질이 완전히 다른 악기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의 뿌리가 한국이라고 하지만 대체로 현대인들은 유럽의 역사에서 더 공감력을 가질 수 있다. 굽이 높은 힐을 신거나 양복을 입는 등.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잘 알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의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해졌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묘하게 섞여 뿌리와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그것이 호른을 닮았다. '프렌치 호른'은 그나마 납득이 가능한 수준에 있다. 놀라운 것은 '잉글리쉬 호른'이다. 일단 잉글리쉬 호른을 보면 그것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호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 외형은 '호른'이 아니라 '클라리넷'을 닮았다. 더욱 재밌는 것은 '호른'은 금관악기인 것에 반해 '잉글리쉬 호른'은 목관 악기다. 더 가관인 것은 이름이다. 잉글리쉬 호른 역시 '영국'과 전혀 관련 없다. 영국은 '잉글리쉬 호른'에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았다. 이 호른 역시 '독일'인들이 발명하여 사용한 학기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를 닮았다. 우리는 뿌리를 이야기한다. 유럽을 우리와 다른 곳으로 취급한다. 다만 우리는 5000년 간 틀었던 상투를 틀지 않는다. 피아노 베이스 음악을 듣고 면으로 된 옷을 입는다.

유럽을 이해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우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앞서 말한대로 교양이란 사람과 사람을 융합 시키는 매우 좋은 매질이다. 과거의 사람들도 비슷한 교양을 가졌다. 가령 사서오경이나 한시를 읊고 난을 치는 노하우를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가 왜 영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한 작품만 남기고 방문해 보지 않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열 작품을 남겼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상대의 호기심을 더 자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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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 - 나폴레온 힐, 부와 성공의 원칙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
나폴레온 힐 지음, 빌 하틀리 엮음, 이한이 옮김 / 반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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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을 주로 하고 사는가. 어떤 감정을 주로 갖고 사는가. 그것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거대하다.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오컬트적으로 보일 수 있다. 2002년부터 우주배경 복사지도를 수차례 작성한 윌킨스 '초단파비등방탐사선(WMAP)'에 따르면 우주는 4%의 가시물질과 22%의 암흑물질, 74%의 암흑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눈에 보여지는 가시 물질은 되려 우주 전체에서 4%밖에 안 되는 희귀 현상이다. 우주는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

'생각은 곧 현실이 된다.(Thoughts become things)'

2600년 전 붓다가 한 말이다.

종교적으로 보여지는 이 말은 생각보다 종교적이지 않다. 파동이 실물로 변환되는 일은 이미 생활 곳곳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무선으로 연결된 프린터와 컴퓨터가 있다고 해보자. 원거리에서 출력 버튼을 누르면 프린터는 물리적으로 작동된다. 너무 일상적이기에 거기에는 '오컬트'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방에 누워 스마트폰 터치 몇 번이면 집 앞으로 피자가 배달되기도 한다. 전자기파가 정보를 주고 받으며 그것이 정보를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물리적 연결 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면 사람들은 '온라인'이라는 말을 할지 모른다. 그것은 초능력이나 초자연현상이 아니다. 온라인은 이미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분명 과학의 영역에 있다.

세상 모든 것을 떨고 있다. 소리와 빛은 모두 떨림 현상이다. 물론 소리와 빛은 성질이 다르다. 소리는 음파, 빛은 전자기파다. 소리는 매질을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 반면 전자기파는 전기장과 자기장의 진동으로 진공 상태에서도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빛의 속도로 정보는 전달되며 빛과 라디오파가 여기에 해당된다.

라디오와 인터넷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정보를 송출하고 받는다. 아무런 매질도 필요없다. 그것은 전자기파의 성질이며 고로 물리적 매질이 없다고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놀랍지만 '뇌파'는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뇌파는 뇌에서 발생하는 전기신호다. 뇌는 발전기도 아닌데 어떻게 전기신호를 만들어 낼까? 미키 마우스 모양의 분자모형을 본 적 있을 것이다. 중간에 원자핵이 있고 주변으로 전자가 돌아다니는 그림 말이다. 이런 분자가 전자를 주고 받는 과정이 전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분자들은 다른 분자와 섞이면 전자를 주고 받는다. 그 와중에 서로 공유하는 전자가 생기고 서로 전자를 공유하다보니 남게 되는 잉여 전자가 생긴다. 이 잉여전자는 원자에 결합되지 않고 떠돌아다닌다. 이것을 '자유전자'라고 부른다.

자유전자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닐 수 있다. 이처럼 자유전자의 흐름을 '전류'라고 부른다. 그것이 뇌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뇌속 뉴런에는 '세포막'이 있다. 이 세포막은 양성과 음성으로 얇게 구분되어 있는데 외부적인 자극을 받거나 내부 화학변화가 생기면 그 균형에 균형이 생긴다. 이로써 내부적인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역시 이 과정에 자유전자가 생기고 자유전자는 뉴런의 돌기를 따라 전파된다. 그것은 정보를 전달한다. 그것이 뇌가 작동하는 원리다.

고로 뇌파는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이 전자기파는 역시 1초에 몇 번 진동하고 진폭은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다. 이것이 뇌파다. 뇌파 역시 뇌에서 발생한 전기 신호이기 때문에 진공이나 매질을 통해 전파된다.

다시말해 전자기파인 뇌파도 전도체 없이 전달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마법처럼 모든 것을 이뤄주진 못한다. 피자를 생각하면 피자가 배달되고 프린터에 강력한 전자기파를 만들어내면 종이가 출력되는 일따위는 하지 못한다. 그것은 적정 주파수가 형성된 송신기와 수신기 사이에서만 벌어진다. 다시말해 제주에서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부산에 있는 아무개씨가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내가 보낸 송신정보를 수신하는 수신기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비슷한 파장을 인식한 것만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할 때와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 만들어내는 뇌파의 헤르츠가 다르다.

서울에 전화를 걸고 부산에 있는 사람이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허무한 것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온통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것들이 수신하길 바라는 것은 허무한 일이다. 반드시 생각은 현실이 된다. 타겟을 정확하게 둔 송신장치와 수신장치가 아니니,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언제 오는지 알 수 없으며, 그것이 수신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1950년 이후로 인간은 꾸준히 외계 문명에 통신 시도를 하고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꾸준히 통신을 시도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대답은 오지 않는다. 이처럼 누군가가 송신한 정보는 아무도 수신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아주 뒤늦게 수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보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0%인 것과 0.1%인 것은 확연히 다르다. 불가능과 가능이 구별되는 틈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 볼 때,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바라봐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밑지지 않는다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나마 가능성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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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혁신 - 혁신을 원한다면 반역자가 되라
이주희 지음 / EBS BOOKS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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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불리는 '재상'은 원래 음식을 요리하는 자다. 본래 노예적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었으나 진나라 이후로 '최고 행정관'을 의미하게 됐다. 주인의 지위가 오르면 노예의 지위도 오른다. 혁신과 개혁은 개인의 권력을 향하기도 하지만 넓게는 주변과 사회를 부흥시킨다. 구글과 애플, 메타의 혁신은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미국의 성장을 이끌었다. 미국 젊은이들이 만든 이 회사들은 혁신으로 시작했다. 혁신은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한다. 가진 것에 만족하라는 사회의 가르침은 때로 정답이 아니다. 때로는 불만족하고 불평하고 불편해 하는 이들이 혁신을 만들어낸다. 꾸준하게 주지만 혁신은 '불만족'에서 시작한다. 혁신은 난세에 난다. 태평성대 시절에는 모두 불만이 없다. 만족함이 가득한 시기에는 혁신은 불필요한 행위일 뿐이다. 명나라 후기는 말 그대로 태평성대였다. 큰 전쟁이 없고 국가는 부유했다. 이때 중국을 방문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중국 축제에서 크게 놀랐다. 유럽에서 1년 전쟁 물자로 쓸 화약이 하룻밤 불꽃놀이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보면 태평성대한 시기가 있다. 중국 명나라 시기와 반도의 조선이 그렇다. 두 국가는 큰 전쟁 없이 수백 년을 보냈다. 이런 태평성대 기간은 혁신의 적이다. 아이러니하게 두 국가는 비슷한 시기에 큰 전쟁에 휘말린다. 한 쪽은 국가가 멸했고 다른 한 쪽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더이상 나아질 필요가 없는 상태에는 누구도 나아지려 하지 않는다.

"Too good to be the best (최고가 되기에는 너무 좋은 상태)"

적당한 불만이 해소되는 괜찮은 상태는 사람을 태만하게 한다. 자산가들은 월급여를 달콤한 마약과 같다고 말한다. 더 나아갈 필요를 못 느낄 정도의 충분함이 느껴지는 행복감이다. 그 정체감은 장기적으로 존망을 결정하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같은 시기 일본과 여진은 내부 전쟁을 겪고 있었다. 시끄러운 내부는 결핍이었고 결핍은 에너지로 쌓인다. 에너지에는 좋은 에너지와 나쁜 에너지가 있다. 결핍, 불안, 증오와 같은 나쁜 에너지도 에너지다. 그 힘이 같는 파급력은 같다. 음과 양의 차이일 뿐 힘은 같다. 결국 전쟁과 결핍으로 쌓인 에너지도 동력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일본과 여진은 내부의 불만이 외부로 바꿨다. 그것은 혁신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비슷한 시기 유럽도 그랬다. 유럽은 전쟁과 가난, 전염병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은 기존 시스템에 불만을 갖게 했다. 관습과 풍속, 방식을 모조리 갈아 엎어야겠다는 의지는 에너지로 충분히 쌓였다. 그것은 혁신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일본 열도는 내전 끝에 전국통일을 한다. 이후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고 일본도 명과 조선처럼 화약 무기에 대한 혁신이 후퇴하기 시작한다. 위기감이 사라지면 의욕은 사라진 것이다. 오랜 평화가 시작 후 일본 막부는 화약 무기의 필요성이 느끼지 못했다. 일본의 혁신도 예전만 못하게 된 것이다. 평화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다. 시사경제용어 중에는 '메기효과'라고 있다. 운송 과정에서 자꾸 죽어버리는 미꾸라지를 살리기 위한 방식에서 시작했다. 메기는 미꾸라지의 천적으로 미꾸라지가 있는 수족관에 메기를 풀면 개체수가 줄어 들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미꾸라지가 있는 수족관에 메기를 풀어놨더니 미꾸라지의 생존력이 높아진 것이다. 적절한 위기는 생존에 필수적이다. 그것은 혁신의 탄생과 닮았다. 동아시아가 평화로운 시기 유럽은 끊임없는 전쟁 중에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와 싸웠고 프랑스는 모두를 상대로 싸웠다. 유럽인들은 무기를 개발하고 연마했다. 1800년대가 되면서 동아시아는 유럽에 비해 뒤쳐지기 시작했다.

전투력을 상실한 평화가 가져다 준 달콤한 유혹 때문이다. 17세기 이후 군사혁신은 동아시아에서 사라졌다. 대항해시대를 말하는 15~17세기는 유럽의 전유물로만 알려졌다. 다만 비슷한 시기 명나라에서도 대항해시대는 열릴 뻔했다. 명나라 황실의 환관 출신이던 '정화'라는 인물이 해양사절단을 꾸린 뒤 바다로 나갔기 때문이다. 이때 정화가 타고 나간 기함의 크기는 길이가 최소 55미터에서 최대 75미터에 이르렀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다며 타고나간 산타마리아호가 18미터인데 반하면 엄청난 규모임을 알 수 있다. 정화의 해양사절단은 62척의 배를 갖고 있었고 2만 7800명이 항해를 했다. 다만 청나라의 배는 동남아시아와 수마트라 섬에서 잠시 머물다고 인도 정도를 방문하는 것으로 그쳤다. 반대로 국토 대부분이 땅으로 이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했던 유럽의 소국인 포르투칼은 스페인이라는 대국에 가로막혀 빈곤한 국가로 머물러 있었다. 이 포르투칼은 자신들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갈구 했고 엄청난 무역흑자를 이루고 신대륙을 선점하는 등의 횡보를 한다. 이 두 차이는 앞서 말한 '최고가 되기 너무 좋은 상태' 때문이다. 혁신은 이미 좋은 상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혁신은 멋진 비즈니스맨의 깔끔한 옷차림과 프리젠테이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련되거나 아름다운 방식으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되려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빈약하고 불편함으로 시작한다. 때로는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훔치기도 하고 배반하기도 한다. 제록스의 팰로앨토연구소는 첫 번째 GUI를 개발했다. GUI란 Dos와 같이 불친절한 운영체제가 아니라 그래픽을 통해 쉽게 정보를 확인하는 작업환경이다. 이것을 제록스로부터 가지고와 만든 것이 맥OS의 시작이다. 고로 혁신은 날것이며 야성적이고 때로는 야만적인 방식으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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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빛
마이클 온다치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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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차대전 직후 14세 너세니얼은 두 살 누나와 싱가포르로 간다. 부모는 그들을 범죄자 비슷한 두 남자에게 맡기고 떠난다. 어떠한 정보도 없이 소설은 그렇게 시작한다. 부모는 왜 그들을 맡겨야 했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전혀 언급도 없다. 아이를 싱가포르로 불쑥 던지고 떠난 부모의 행동처럼 소설은 느닺없이 빠르게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소설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라고 기대하고 읽는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포탄이 쏟아지고 총알이 오가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전쟁에 관한 기억은 스펙타클하거나 긴박감이 넘치기보다 낯선 사람과 세계에 대한 경험과 기억들이다. 남매는 나방과 화살이라는 낯선 사람들의 세계에 속하여 다양한 경험을 한다. 개 밀수 사업을 하거나 템스강을 누비며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아이들은 특별한 배경에서 독특한 경험을 쌓는다. 글은 조용히 다가와 가슴으로 적시어진다. 그것이 마치 나의 오랜 기억처럼 말이다. 남매에게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일들이 벌어진다. 강렬한 첫 문장처럼 강렬한 문장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범죄자 같은'이라는 형용사 때문에 소설 한참을 보호자를 의심한다. 그것이 아마 소설 속 주인공들이 보호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져 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불안해 하는 상황에서 10대들은 다양한 생각과 경험을 한다. 개중 한 사건을 맞이한다. 남매가 납치 당할 뻔한 것이다. 이후 남매는 이 사건으로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주인공은 성인이 된 이후 정보국 기록보관소에서 일하면서 지난 흔적을 찾아 나선다. 거기에는 전쟁과 관련한 서류가 많았다.그중 일부는 분류되고 폐기됐다. 주인공은 어머니의 기록에 호기심을 갖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엿보게 된다. 전쟁 이후 비밀스럽게 활동해야 했던 요원들에 대한 이야기. 개인사를 넘어선 역사에서의 개인이 흔적으로 남는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운은 남는다.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은 시간이 지나며 이해된다. 납득않는 경험도 차츰 지나며 이해된다. 그것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감을 못한다. 경험한 뒤에야 결국 이해한다.

이해 없는 전쟁은 잔혹하다. 비밀 요원들은 비밀스럽기에 인간다움이 없다. 다만 인간이 행한 모든 일에는 인간다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회사 일정에 아이를 맡기는 부모의 심정과 이곳 저곳에 맡겨지는 어린 시절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어린시절 부모님은 농사를 지셨다. 농사일이 바쁜 철에 나와 동생은 항상 사촌네 맡겨졌다. 외가 쪽으로, 친가 쪽으로 번갈아가며 맡겨지던 어린 시절 추억이 소설과 중복된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비인간적이다. 다만 인간의 일이다. 이 소설은 추리물도 아니고 액션물도 아니다. 어떤 결말을 향해 달려 나가지도 않는다. 로맨스도 아니고 스릴러는 더 더욱 아니다. 소설은 다양한 기억이 혼재되어 있다. 차근 차근 과거의 회상을 떠올릴 뿐이다. 그것이 제목인 '기억'에 적합한 이유다.

소설의 제목 '워라이트(Warlight)'는 무슨 뜻일까. 이는 전쟁으로 만들어진 빛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폭탄이나 총탄에서 나오는 빛이다. 이런 전쟁이 만든 '빛'. 그것은 아름답지만, 아름답지만은 않다. 워라이트에는 또다른 뜻이 있다. 바로 투지를 보여주는 눈빛, 전쟁으로 사라진 빛을 안내하는 빛이다. 중의적 의미를 제목은 가진다. 사라진 빛를 보조하며 희미하게 그것을 안내하는 빛. 동시에 반짝 거리는 눈빛이며 전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흔적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전쟁을 일상과 철저하게 분리된 현상으로 여긴다. 다만 전쟁은 일상과 분리할 수 없다. 일상과 혼재되어 있다. 특수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삶을 이어 나간다. 소설은 지나간 일상에 대한 기억과 흔적이며 그것의 배경이 희미하게 전쟁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사람과 기억에 대한 오묘한 빛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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