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다 -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NASA의 8가지 마인드셋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리더스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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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탈 때 생기는 불안감은 착각이다. 실제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보다 자동차를 타고 있을 때 사망할 확률이 100배는 더 높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할 때가, 하지 않을 때 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착각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는 장소는 대개 집이다. 대부분의 살인 사건은 남이 아니라 지인에 의해 일어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동차보다 비행기에 더 공포심을 갖고 집보다 밖에서 더 공포심을 가지며 지인보다 낯선 이에게 더 공포심을 갖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업이나 투자를 꺼려한다. '손실회피'다.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얻게 되는 손실에 사람들은 민감하다. 반대로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을 때 얻게되는 손실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거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이익보다 손실에 더 크게 반응하는 경향도 있다. 2022년 기준 최저임금이나 공무원 임금 인상률은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행위에 의한 손실을 크게 기억하지만 무행위에 의한 손실에는 무감각하다. 부동산, 주식, 코인을 비록한 자산 가치, 소비자물가를 모두 따져 봤을 때, 돈의 가치는 심각하게 떨어지며 이렇게 떨어진느 돈의 가치는 임금인상률을 크게 웃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행위에 의한 손실에 무감각하다. 아무 일도 하

지 않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날아가는 공을 안전하게 잡기 위해서는 공의 속도에 버금가는 정도로 달려 주어야 한다.

1961년 5월, 케네디는 의회에서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발표한다. 이런 야심차고 대담한 비전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였다. 이런 목표설정을 하는 것은 자칫 스스로 리스크를 만들어내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리스크가 사실 가장 안전한 길인 경우도 상당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말했다.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가올 미래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실상 현상을 유지하고자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일이며,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실패를 준비하는 일이다.

마크 트레인은 이에 대해 '개구리 식단'을 예를 들었다. 만약 개구리를 꼭 먹어야 한다면 언제 먹어야겠는가. 이에 대해 마크 트레인은 말했다.

"만약 개구리를 꼭 먹어야 한다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는 게 좋다. 또 개구리를 두 마리 먹어야 한다면 큰 놈부터 먹어라."

같은 맥락으로 나는 학창시절, 가지무침을 가장 먼저 먹었다. 이유는 가지무침은 내가 가장 싫어하던 반찬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산적해 있는 일 중에 가장 쉬운 일을 첫 번째 과제에 두는 일이고 시작한 이후, 일의 부담을 줄이는 가장 훌륭한 일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가장 먼저 해치워 버리는 일이다. 고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이라는 것은 아침에 넷, 저녁에 셋과 전혀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 모호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꿈이란 너무 모호하고 포활적인 개념이다. 누군가의 꿈은 '세계 평화'이고 누군가의 꿈은 지구인 1등 부자다. 이런 모든 꿈을 응원해 줄 수는 없다. 꿈이란 이루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그저 꾸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꿈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꿈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사람을 달로 보내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졌다. 이후 그가 나사를 방문하여 한 청소부를 만난다. 이때 케네디는 청소부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청소부가 답했다.

"인간을 달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꿈이란 그런 것이다. 만약 청소부가 사람을 달로 보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청소부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괴로움에 빠질 것이다. 다만 청소부가 꿈을 이루는 대상이 아니라 꾸는 과정으로 두었기에 그는 그 일에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행동은 목적을, 가슴은 꿈을 행해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청소부라 하더라도 인간을 달로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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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터 - 좋은 이별을 위해 보내는 편지
이와이 슌지 지음, 권남희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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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일본소설은 좋아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 특유의 '감성' 때문인데 뭐라 정확하게 표현하긴 힘들다. 이것은 취향의 영역인데, 언어 특성상 목소리톤이 대체로 높고 연기가 비교적 과하다고 느껴진다. 실제 일본인들을 만나면 그렇지 않은데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유독 그렇게 느껴지는 걸 보면 각 국민들이 극을 보는 취향의 차이 때문에 연기 방식에도 차이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 드라마도 가끔 어색한 부분이 있어 집중하기 힘든 경우가 있긴 하다. 현실과 꽤 다른 말투와 제스처들은 현실적으로 너무 괴리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연기 방식이 어쨌건 분명한 것은 일본어 자체가 한국어 감성과 꽤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영상을 보다 보면 간혹 남녀를 불문하고 고개를 90도로 숙이는 장면이 나온다. 꽤 비슷한 감성을 가진 이웃국가지만 그 장면만 나오면 완전한 문화적 이질감이 생긴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 취향이고 주관적인 생각이다. 일본 소설로 어떤 작품을 먼저 접하면 전혀 문화적 이질감이 없다가도 영상으로 접하면 꽤 느껴진다. 고로 원작이 소설인 일본 영화는 언제나 실망하곤 했다.

1999년 영화 '러브레터'의 원작소설을 구매했다. 영화는 당시 꽤 유명했다. 설원에서 '오겡끼데스까'하며 외치는 영화 속 모습은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꽤 유행했던 걸로 안다. 매번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추리하는 추리소설만 보다보니, 꽤 잔잔한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읽게 된 소설, '러브레터'는 읽으면서 영화로 어떻게 구현했을까, 호기심이 일어났다. 1999년이면 벌써 24년이나 넘은 영화다. 개인적으로 이 시절 감성을 좋아한다.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 우체통이 온전하게 자신의 역할에 바쁘던 그시절에 대한 향수도 일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이름과 나이 정도만 알면, 그 사람의 사생활은 물론 생각까지 모조리 훔쳐 볼 수 있는 시대에 '잘못 전달된 편지' 한통으로 시작되는 묘한 인연은 매력적이다. 그것은 소설이 매력적인지,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그것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 그 시절 우리는 헤어지고 나면, 다음에 보기까지 실제로 헤어지는 것이었으며,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실제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성을 가지고 살았다. 지금은 함께 있으면서 헤어지면서, 헤어지고 나서도 1분 단위로 상대의 행동을 알 수 있기에,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예전에 비해 많이 퇴색됐다. 심지어 죽은 이에 대한 과거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세상에서, 빈 공간, 빈 시간에 홀로 앉아 상대의 빈 시간과 빈 공간을 상상해 보는 일은 이젠 판타지 영역이 됐다.

'러브레터'는 죽은 애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한다. 죽은이에게 보낸 편지는 장난으로 시작했으나 죽은 이의 이름으로 답장이 오면서 반전을 맞이 한다. 죽은 이의 이름과 성이 같은 누군가와 갑작스럽게 시작된 펜팔. 죽은 이를 사이에 두고 추억을 끄집어내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 다시 오지 못하는 감성이 됐다. 모르는 이들과 너무 쉽게 소통하고 심지어 그들에 대해 뭐든지 알 수 있는 시대. 심지어 자신의 신상정보까지 모두 공개해두고 살아가는 시대에서 조심스럽게 묻고, 조금씩 떠올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워져가는 이야기. 그때의 감성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일본 소설을 읽다가 너무 만족하면 앞서 말한 이유로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원작의 감성이 파괴될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다만 이 소설에 대한 영화의 평을 보니 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로 오늘 자기 전, 꼭 영화를 보고 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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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 소설 시리즈
신카이 마코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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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서 감성이 변한 탓일까. 어릴 때에는 만화영화를 좋아했는데 좀처럼 보기 어렵다. 20대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수 차례 돌려봤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다시 그것을 재해석 하는 재미는 같은 작품을 수십, 수백 번 보게 했다. 그러고 보니 20대 중후반에는 영화에 푹 빠져 살았다. 지금도 영화는 내 여가를 책임진다. 남들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같은 영화를 여러번 돌려보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그런 것들에 푹 빠져 지낸 시간이 길다. 그 긴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같은 것을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려는 습관일지 모른다. 만화는 영화와 다른 부분이 있다. 쉽게 말하면 장면의 모든 부분의 의도된 연출이라는 점이다. 영화의 경우, 모든 것은 연출이 아니다. 우연하게 발생한 바람, 배우의 머리카락 흘림, 지나가는 배역 등이 복합적으로 다양한 우연을 만든다. 다만 만화는 하나 하나가 모두 작가의 의도에 배제되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의 머릿카락 하나까지, 작가가 의도해야만 움직인다. 작가의 의도는 '영화'보다 '만화'에 더 많이 담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 정형화된 의도는 때로 갑갑함을 줄 때도 있다. 해석의 주체가 '작가'가 아니라 '독자'라는 점에서 '열린 해석'은 때로 그 작품을 더욱 재밌게 하는 순기능을 한다. 언젠가 이런 만화와 영화의 장점과 단점이 서로 단점과 장점이 되어 무엇을 멀어지게 만들고 무엇을 가까워지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만화에 빠져 산 것은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제는 이 둘에서 더 발전하여 연극처럼 직접 해석자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에 매력이 느껴진다. 존 케이지의 4'33""는 아마 가장 유명한 쉼표로만 이루어진 음악일 것이다. 이 음악은 존 케이지가 1952년에 작곡한 작품으로 연주자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4분 33초 동안 무기력하게 앉아 있기만 한다. 이 음악에 참여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청중이다. 청중의 숨소리, 발소리 등 환경 소리를 포착하는 것에 중점이 있다. 실시간으로 과거의 것을 재연한다는 설정은 현대와 과거를 동시에 존재하게 하는 시간여행을 간접경험하게 한다. 그렇다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자주 보러 다니는 것은 아니다. 기껏 해봐야 아이와 함께, 혹은 간혹 기회가 됐을 때 몇 번 정도 보는 것이 전부다. 어쨌건 OTT나 극장에서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에 선뜻 끌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색을 즐기던 과거의 여유가 사라진 탓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주변에서는 '그거 봤어?'로 알게 된 작품을 만났다. 바로 서점에서다. 이미 사람들은 전부 애니메이션으로 봤다는 작품이다. 당시에는 끌리지 않아 보지 못한 작품이지만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자꾸 노출되니, 결국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주 방문하는 서점에서 몇 차례 같은 책을 들었다 놨다. 아무래도 한참 바쁜 시기라 무언가 하나를 보면 오래 걸리는 '독서'의 특징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다 윌라 오디오북에서 한 작품을 알게 됐다.

소설로 접한 '스즈메의 문단속'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평은 이렇다. 갑작스러운 전개, 너무 빠른 감정 변화. 그 진도를 따라가기에 나는 오롯하게 애니메이션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표현을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구현했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그만큼 소설로 이미 완전했다. 다만 처음 만난 사람과 급격하게 사랑에 빠지는 일과 그 감상에 쉽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볼 때, 8시간의 오디오북에서도 느껴지는 당황감이 2시간 러닝 타임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애니메이션 중에 가장 인생에 깊은 것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유학 시절에 처음 접했는데 그 분위기가 좋아서 꽤 여러번 본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을 좋아한다. 간결한 문체와 직관적인 표현이 마음에 든다. 이 소설을 처음 접하고 난 뒤부터 '신제주 북앤북스'에 들려 일본 소설 몇 편을 더 빌렸다. 예전에 한참 좋아했던 일본소설이 었는데 이런 저런 여유가 없어서 소설을 많이 보고 있진 못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워낙 다이나믹한 상황에서 본 책이라, 정확하게 집중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사실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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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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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에는 특이한 일화가 있다. 1491년 로마 교황청이 새로 지어진 수도원 벽화를 그릴 때 일이다. 로마 교황청은 이 벽화를 그릴 화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부탁하게 된 것이 '다빈치'다. 그는 예수 님과 제자들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그림에 들어갈 인물 모델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1492년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는 19세의 선한 청년을 찾게 된다. 이후 6년 간 이 그림에 들어가는 11명의 제자를 모두 완성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얼굴을 찾지 못했다. 한참을 찾지 못하자 로마 시장은 다빈치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로마의 지하 감옥에는 사형을 기다리는 수 백의 사형수가 있으니 그곳에서 찾아보시오."

그 제안으로 다빈치는 잔혹한 사형수들을 만나게 됐다. 거기서 배반자 유다의 모습을 한 죄수를 발견하고 유다의 모델로 결정한다. 작업이 진행되고 유다의 그림 또한 완성됐다. 이어 다빈치는 죄수에게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한다. 그때, 그는 다빈치에게 되묻는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다빈치는 이에 '당신과 같은 사람은 내 생애 만난 적이 없소'라고 답한다.

이때, 그 죄수는 말한다.

"저 그림 속에 6년 전, 예수 모델이 바로 나였소."

예수와 유다의 차이. 선과 악의 차이. 모든 것은 동양의 철학과도 닮았다.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도교의 도,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유교의 대이, 모든 존재는 상호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며 '무'라는 것의 '양극형'이라는 '불교.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일까. 혹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큰 흐림일까.

마가복음 14장 3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베다니'라는 여인이 '나드'라는 향유 오일을 가져온다. '나드'는 자연에서 추출되는 식물성 오일로 매우 값비싼 향유다. 브랜드나 상품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도 아마존에서 구매하려면 1ml당 최소 7불, 많게는 수십 수백 불은 주어야 구매할 수 있다. 여인은 예수의 머리에 이 향유를 붓는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그 가치가 300 데나리온이라고 한다. 300 데나리온이면 당시 일반적인 노동자의 연봉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다. 이렇게 값비싼 나드를 예수의 머리에 붓자, 곁에 있던 누군가는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낭비한다며 몹시 화를 냈다.

"어찌하여 그 향유를 낭비하느냐?"

그때 예수는 말한다.

"가만히 두라. 어찌 그녀를 괴롭히느냐. 그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주변에 있으니, 언제든 도울 수 있지만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다. 그녀는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나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다. 다만, 해석이 다를 수 있는 만큼 고개가 갸우뚱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것은 여인의 존경심과 가르침에 대한 보답일 수 있다. 그 헌신과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다만 자신의 장례를 위해 사용하는 일이기에 나무라지 말라는 부분, 예수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나드를 보며 주변인이 '낭비' 혹은 '허비'라고 말하는 부분. 가난한 사람은 언제든지 도울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는 부분에 의아함이 생기기도 한다.

'유다'에 대한 해석도 여럿으로 볼 수 있다. '누가복음 22장 36절'에는 예수의 이런 말이 있다.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가 이루어져 감이라."

이 부분은 기존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예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여긴다. 이 과정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고 구원하는 역할을 강조한다고 본다.

기독교 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인류 구원과 관란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님과의 화해와 구원을 가능케 한다. 고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없었다면 인류는 죄의 상태에서 구원 받지 못하고 영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머물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커다란 맥락에서 볼 때, 유다가 예수를 은화 30에 배반한 것이 그 큰 흐름중 하나가 된다.

다시말하면 유다는 예수를 로마 정부에 넘겼다. 이로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형을 받는다. 성경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으로 여긴다. 다시말해 자신의 아들 예수를 희생함으로써 인류를 구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유다의 배반과 로마 정부의 결정 등의 여러 사건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신의 계획을 실현했다. 유다의 배반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필수적인 사건이라면, 유다 또한 예수와 마찬가지로 '희생'이라는 성격 다른 두 개의 모습은 아닐까. 세상에는 참 하나가 보여주는 극적인 두 모습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예수와 유다의 모델이 같은 사람이었던 것 처럼 말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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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혼자 던져졌다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강명순 옮김 / 바다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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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제에 해결책이 있다는 착각은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다만 인생이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지향점이 삶의 목표일 필요는 없다. 각자 자신만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해 나가는 일종의 놀이와 닮았다. 스스로 목적의 본질을 지우면 모든 것은 행위만 남는다. 행위만 남은 행위는 본질이 없기에 그저 행위일 뿐이다. 쉽게 말하면 1891년 YMCA 훈련학교에서 한 교수가 복숭아 바구니에 축구공을 던져 넣는 게임을 발견하지 않았다더라면 '마이클 조던'의 재능은 그저 빨래통에 빨래를 기가 막히게 집어 넣는 사람의 능력과 하등 다르지 않게 된다. 삶이란 그렇다. 그것에 이렇다 할 철학과 명분을 집어 넣어야 그것은 본질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본질의 유무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김춘수'의 꽃이 떠오른다. 그것에 '그것'이라는 이름을 정의하기에 '그것'은 '그것'으로 정의된다. 흘러가는 강물을 가르키며 강물에 이름을 짓는다면 그것은 정말 그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한강' 혹은 '소양강'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그 찰라의 순간, 그것에는 다른 것들이 채워져 있을 것이고 어느 한 순간도 같은 모양과 위치였던 적이 없다. 모든 것은 빠르게 흘러가 버리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대상은 사라지고 대상을 닮은 흔적에 관념만 남아, 그것은 우리의 '인식' 상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들어가는 순간부터만 '문제'다. 그것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걷어내면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중국 고사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되는데,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앉고 살아가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고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실제 문제인지를 화두를 던져보면 '문제 해결'의 수준을 넘어 '문제 소멸'이 된다. 가장 완벽한 문제 해결 방법은 때로 문제 소멸이다. 그것을 누군가는 '정신승리'라 부를지도 모른다. 가령 해결할 능력이 없기에 그것을 외면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이 '도피성' 혹은 '외면', '무능', '무책임'이라 불려질지도 모른다. 다만 다시 돌이켜봐라. 누가 가장 완벽하게 문제를 없앴나.

인생은 다양한 문제를 직면하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능력을 키우고 다음 문제 해결을 하는 방식으로 성장한다. 다만 생각해보면 이렇다. 문제를 해결하는 이보다 때로 문제를 소멸시키는 것이 현명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천붕지괴를 걱정하던 '기우'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에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땅에는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스스로는 어떤 대비책을 가져야 하나.

그렇다. 모든 문제는 정답이 필요하지 않다. 때로 문제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다.

과거 '조현병'을 앓고 있는 이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적 있다. 조현병을 앓고 있던 그는 스스로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의 크기는 그 무엇보다 강렬했다. 스스로 가장 커다란 부자가 될 것이라 믿었고 그 믿음에는 확신이 있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던지, '잠재의식'이라던지, 하는 이론들을 보면 이런 조현병 환자가 꿈꾸는 세상이 세상에 펼쳐질 확률도 적잖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되려 세상과 단절되어 고립을 선택한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삼은 문제가 합리적인지 판단하고 그것에 해답이 필요한 경우. 그것의 해답이 가능과 불가능의 구분점을 갖고 있는지, 혹은 '난이도'의 구분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때로 그것은 해결 가능한 영역에 있기도 하지만 해결 불가능한 영역에 있기도 하다. 가장 이상적인 연애 상대를 나의 반려자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일도 그렇다. 그들을 원하는대로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은 때로 '로맨스'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범죄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 쌓여 살기도 한다. 무언가에 정답이 있다는 착각에 빠져, 정답 없는 것에 정답을 짓고 그것에 삶을 맞추기도 한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사랑에 빠져, 그 문제를 해결해 내고자 하는 열망이나 사형수가 죄를 짓고도 처벌을 피하기 위해, 그 문제를 해결해 내고자 하는 욕망, 너무나 보고 싶은 자녀를 잃은 부모가 딱 한 번만 자녀를 보고 싶다고 여기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내고자 하는 욕심.

그것에는 '문제 해결의 방법'이 아니라 '문제 소멸의 방법'이 필요하다. 모든 것에는 정답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경우가 그것을 소멸하는 것이 그 첫번째 단계이다. 세상에는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해결법이 아니라, 소멸법을 찾는 것이 문제를 더 빠르게 잊어버리게 한다. 잊혀진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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