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 - 영국, 작은 도시에서의 일 년
노현지 지음 / 있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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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크리스마스는 햇볕이 따갑고 공기는 찼다. 눈을 뜨고 있으면 눈이 아팠다. '찰싹' 내리쬐는 햇살에 피부는 따끔 거렸다. 들여 마신 공기는 콧구멍으로 들어와 몸 구석 구석을 돌고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남극 빙하의 냄새를 품은 것만 같았다. 그것이 '오세아니아'의 첫 인상이다. 신발 밑창이 더러워 지지 않는 나라. 정갈한 카펫을 깔아 놓은 것처럼 잔디가 덮여 있고, 그 어디를 봐도 그림과 같았다. 마치 사진촬영을 위해, 강한 조명을 켜놓은 것처럼 모든 것은 '모델' 같았고 그림 같았다.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여유가 있었다. 비가 내려도 그들은 뛰지 않았고 맨발로 거리를 걸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선글라스가 필수품인 그곳은 '뉴질랜드'라는 곳이었다. 친구에게 '뉴질랜드'를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길어졌다. '풍차'가 있는 나라가 아니며, 유럽에 있지 않다고 알려줘야 했다. 국기에는 하얀색이 아니라 빨간색 별이 있다고 알려줘야 했고, 별의 갯수와 모양, 위치가 다르다는 부가 설명도 해야 했다. 그곳은 매우 '영국'과 닮았고 그러지 않기도 했다. 뉴질랜드의 전통음식을 묻는다면, 현지 친구들은 '피쉬앤 칩스'를 답하곤 했다. 다른 음식을 물으면 '스테이크앤 칩스'를 답하기도 했다. 영국 여왕의 생일은 국경일이 었으며 국기 자체에도 '유니언잭'이 있었다.

별것 아닌 것들이 뭐든 새로워졌다. 배경이 바뀌었다. 어쩌면 배경이 바뀌었다는 믿음이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행동에도 여지없이 그랬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니, 뭐든 것은 신기했고 새로웠고 흥미로웠다. 애초에 '언어'에서도 그랬다. 날마다 '배움'이 가득했다.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지, 카페나 병원, 식당에서 언제나 배웠고 언제나 실수했고 실수한 흔적은 기억이 되어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됐다. 그것들은 나의 머릿속 '메모리 공간' 어느 한 켠을 차지하고 완전히 새로운 자아가 될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말을 할 때, 그들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봤고, 그들의 입술 모양과 혀의 움직임 목젖이 떨림까지 느리게 보였다. 어제 들은 말을 오늘 써보고, 오늘 써본 말을 다시 들어가며, 그들이 사용하는 말에 어감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떠난 이유는 '여행'은 아니었지만, 여행이 일상을 새롭게 한다는 것에는 어느정도 동의한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경험은 반드시 필요하다. 원래 사람은 환경에서 배우는 터라, 맹자의 어머니도 세번이나 이사를 떠났다고 하지 않던가. 환경이 바뀌면, 사람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 '관계'가 바뀐다. '관계'가 바뀌면 결국 '자아'가 바뀐다. 과거에 내가 쌓아 올린 흔적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다시 새로운 환경을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매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까닭은 오늘 아침 먹었던 식사 메뉴가 기억나지 않는 까닭과 완전히 상반된다. 그것이 기억나는 이유는 그것이 새롭기 때문이고, 그것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반복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어떤 것을 '일반화'하여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고로 반복된다는 것은 이미 흘러 넘치는 호수에 빗물을 뿌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충분히 적셔도 티나지 않는 충분함. 삶이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한 번도 적혀진 적 없는 땅 위에 비를 뿌리는 것도 한몫이다. 어린시절, 선생님들은 '외국'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외국인들은 '개인주의'가 심하다거나 '정' 많은 국가는 한국 만한 곳이 없다거나, 이들은 자신감이 넘친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렇다. 내가 본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10년을 겪어보니,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더라. 그곳에도 말 한마디는 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내성적인 백인 여자애들이 있었고, 다들 배우처럼 잘생기거나 예쁜 것도 아니였다. 중학교 때, 배운 영어 문법을 현지애들이 틀리는 경우는 허다했고 연애에 대한 고민, 취업에 대한 고민,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거기에서도 그대로 있었다.

정도가 다르지만,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 아버지는 내가 군입대를 예정하고 있을 때, 그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사는 것 다 똑같다'. 실제 아버지는 '특전사'로 군활동을 하셨지만, 그곳의 사람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어디에도 이상한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다. 비율의 차이라면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 '외국인 친구'들은 점차 그냥 '친구'가 되어갔고, 사용하는 언어나 생김새의 경계는 희미해져서 '사람'으로 보였다. 어떻게 보면 '언어', '비즈니스', '마케팅', '경제', '경영' 그 따위 것들이 아니라, 내가 가서 얻은 가장 소중한 배움은 '그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다는 것. 그 시선을 얻었다는 것은 꽤 엄청난 것이다. 사람을 상대하다보면, 나쁜 사람과 멍청한 사람, 이상한 사람, 좋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보여지는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누구나 사연이 있고, 누구나 자신만의 역사가 있다. 그것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역사를 배워야 하고, 그들 각각의 역사가 5000년 된 한반도의 역사를 배우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그것을 배운다기보다 그냥 수용하는 것이 맞다고 깨닫게 됐다.

'그런가보지,', '뭔가 이유가 있나보지', '그럴만 하니까 그런가보지'

그런 자세로 삶을 살아간다. 결국 나에게도 비슷한 시선이 생긴다. 나의 역사를 설명하기에 상대는 그 지리한 것에 호기심도 없을 것이고 시간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나의 온전체에 대해 충분한 설명과 이해를 줄 여지가 없을 때, 나는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노현지 작가'의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은 중장기 해외 생활을 한 젊은 부부의 일상이 담겨져 있다. 이 글을 읽으니, 20대의 나의 생각들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맞아. 그랬지'

지금은 조금씩 잊혀져 가는 그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는 걸 보니, 내가 겪은 기억들은 '신기루'나 '환상'같은 것은 아니었나보다. 가끔 현실에서 현실로 돌아온 지금에서야 '그것들이 너무 환상같은 경험'이라 그것이 진정 나의 기억속에 존재하는지 의심됐다. 그러나 기억은 먼지에 뒤덥힌 사진처럼 먼지만 걷어내면 언제든 되살아나는 것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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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 붙잡힌 살인귀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시가 아키라 지음, 김진환 옮김 / 아르누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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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말했다. 와이파이를 이용한 해킹이었다. 와이파이를 사용하는 곳이면 누구든 해킹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카페나 도서관, 식당, 학원 등에서 공유하는 와이파이를 이용하면 같은 와이파이를 이용하는 이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내부로 접근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었다. 기자는 원리를 설명했다. 방법도 함께 설명했다. '통신사별' 와이파이 기본 비밀번호도 알려 주었다. 기자는 범인들의 해킹 방법을 알려줬다. 주의하라는 의미겠지만 깜짝 놀랐다. 그 방법이면 누구나 쉽게 해킹할 수 있다. 초등학생도 가능하다. '뉴스에서 말해 줘도 괜찮은가.'생각이 들었다. 그 뉴스를 접한게 10년도 훨씬 전이다. 그러니 이 정보는 뉴스 뿐만 아니라 유튜브나 네이버 지식인에서도 쉽게 알아 낼 수 있다.

실제 사건을 본 적이 있다. 함께 일하는 동료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해킹 사건은 분명했다. 내용은 이랬다. 함께 일하는 모든 동료의 카카오톡으로 '동영상'이 뿌려졌다. 이에 대해 그는 말했다.

"해당 영상의 사람, 저 아닙니다. 경찰 신고도 완료했습니다!"

나에게는 영상이 오지 않았다. 고로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성'과 관련한 내용임은 틀림 없다. 그 사건이 있고 며칠 뒤에 뉴스에 기사가 떴다.

"스마트폰 해킹을 이용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범인들은 피해자들의 사진과 영상을 이용하여 협박한다고 했다. 이번에도 역시 '기사'가 사실을 인정해 줬다. 뿌려진 영상 속의 인물은 '동료'였던 것이다.

뉴스에 따르면 범죄 방법은 이렇다. 상대의 스마트폰에 '랜섬웨어'를 설치한다. 방법은 다양하다. 어떤 영상을 보게 하거나, 무언가를 다운로드 받게 하면 된다. 그러면 다운로드 되는 파일 내부에 '백도어 프로그램'이 함께 설치된다. 이후 상대의 스마트폰에 있는 모든 정보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영상과 사진 속에 있는 내용을 가져와 그를 이용하여 상대에게 협박한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원격 작동을 통해 열고 녹화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다. 이 판타지 같은 내용은 판타지가 아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친구와 '해킹' 프로그램을 이용해 장난을 했던 적이 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질 않는다. 어려운 것은 아니고 이미 프로그램이 다 짜여져 있는 것에 상대에게 백도어만 옮겨 넣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원격 조종으로 CD룸을 열거나, 컴퓨터 전원을 끄는 등을 할 수 있었다.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직접 친구의 집에 그 프로그램을 까는 행동을 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해킹의 전부였다.

어쨌건 이렇게 랜섬웨어가 설치되어 사생활 정보를 꺼내오면 금전 요구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100만원을 요구를 한다. 100만원을 입금 시키면 원본을 삭제해 준다고 약속한다. 이후 입금이 완료되면 200만원을 요구한다. 200만원도 입금이 완료되면, 400만원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가 임계점에 차서 '마음대로 해라'라는 식이 되면, 그들은 실제로 영상을 카카오톡의 모든 지인에게 뿌려 버린다. 그 동료도 수차례 입금 요구에 입금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 '멋대로 해라'라는 식으로 대응했고 상대는 모든 영상을 카카오톡의 지인에게 뿌려 버렸다. 신고가 이어졌다. 그러나 경찰에서 범인을 잡기는 힘들어 보였다. 또한 범인을 잡는다고 해도 망가져 버린 사회생활은 복구하기 힘들다. 비슷한 사건은 많다. 해킹 사건은 아니고 '보이스피싱'이다. 이들은 불특정인에게 마구잡이로 전화를 건다. 전화를 걸다가 성인 남성이 전화를 받으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불법 성매매 업소 방문했던 적 있지 않느냐?"

그때 영상이 촬영됐으니 금전을 입금하라는 요구다. 물론 이는 거짓말이다. 뉴스에 따르면 성인 남성 중 상당수가 실제 방문 경험이 있어서, 꽤 많은 이 요구에 응한다고 한다. 슬쩍 찔러 본 요구에 상대가 응하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의 보이스피싱이다.

실제 나에게 비슷한 전화가 왔었다. 상대는 모르는 번호로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보이스피싱임을 확신했다. 한 업소에서 나의 영상이 찍혔다는 것이다. 이런 쪽으로는 꽤 깔끔한 삶을 살았기에, 나는 '어느서'인지 물었다. 상대는 '창원경찰서'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제가 제주 거주하는데, 창원에서 찍혔나요?'하고 물었다. 그럼에도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꼭 조사에 출석하라고 말했다. '제가 다시 창원서로 전화 드릴께요'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꽤 재밌는 해프닝이다. 이런 보이스피싱은 종종 걸려 올 때가 있다. 한 번은 카카오뱅크를 사칭하여 전화가 왔다. 깜빡 속을 뻔 했으나 금방 알게 됐다. 전화 온 이에게 역으로 계속 전화를 했던 적도 있다. 상대는 한 두번은 받다가, 나중에는 받지 않았다. 실제 이런 범죄는 생각보다 죄가 가볍지 않다. 이 범죄를 주도하는 이들은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거나 명의를 사서 이용하기도 한다는데, 가령 통장을 빌려주면 그 댓가로 한 달에 얼마를 준다는 식이란다. 이제는 '보이스피싱'이 아니라, '광고' 문자와 전화가 너무 많이와서 전화를 무음으로 설정해 둔다. '디지털 디톡스'라고 하여, 최대한 디지털 기기에서 멀어지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정말 공감되며 현실적이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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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조장희 엮음 / 책만드는집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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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시대라면, 탈무드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느껴진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에서 사망자는 개전 수일 만에 1만명을 넘었다. 이 중 3분의 1이 어린이다. 도덕 교과서를 암기 했다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결국 '구약'과 '신약', '코란', '토라', '탈무드'는 모두 '중동' 지역에서 나왔다. 구약을 기반으로 유대교, 거기에 신약이 붙으면 기독교, 인질(Injil)이 붙어서 '코란'이다. 세계 3대 종교가 모두 이곳에서 출발했으나 그 뿌리는 점차 뻗어 나간다. 그것이 생물의 진화 과정과 같이 다양해진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국 '공감' 때문이다. 공감할수록 갈등이 생긴다는 말은 얼핏 모순 같다. 그러나 그러지 않다.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대부분 하나의 뿌리를 갖는다. 그것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언젠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고로 다르다는 것은 실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다르다는 착각은 그것을 다시 하나로 합해야 한다는 착오를 하게 된다. 내부적으로 비슷한 것끼리 뭉친다. 결론적으로 모든 것은 비슷하지만, 분파를 달리한 다른 것끼리 뭉치면 그것은 결국 닮지 않은 것을 미뤄 낸다. 고로 공감할수록 적이 많아진다. 다양성은 생존 전략의 필수 요소다. 다양성을 지키는 것은 생존력을 높힌다. 생물의 진화를 보면 매 시기마다 대멸종기가 발생한다. 이때, 모든 생물이 전부 멸종하는 것이 아니다. 많게는 97%의 지구 생물종이 멸종하더라도 일부는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일부가 다시 환경에 적응하며 번식한다. 만약 모두가 똑같다면 생물의 진화는 거기서 멈췄을 것이다. 분화하고 멸종하고, 소수가 다시 분화하는 이런 과정을 겪었기에 우리는 공룡이 멸종한 자리를 채우며 살아가고 있다. 결국 생물종은 하나에서 분화해 뻗어나간다.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오고 그것은 양서류가 되고, 파충류가 되고 포유류가 되고 영장류가 되듯. 분화는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하여 여럿으로 나눠진다. 이스라엘은 유대교지만, 하마스는 이슬람이다.

우주의 형성 과정을 보면 그렇다. 우주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적용되기에, '뉴턴'은 그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끌어 당긴다는 것은 때로 모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로 완전히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서로 밀어낸다는 '전자기력'이나 '척력'과는 다르다. 쉽게 말해 이렇다. 지구의 궤도에는 인력이 발생한다. 이 인력은 주변의 것을 끌어 당긴다. 그것을 중력이라고도 표현한다. 이 중력은 작게는 사과, 크게는 '달'과 같은 위성도 끌어 당긴다. 반대로 목성의 주변에는 '유로파'라는 위성이 있다. 이것은 '목성'의 중력에 끌린다. 쉽게 말해, '달'은 지구에 끌리고, '유로파'는 목성에 끌린다. 한쪽으로 끌어당겨진다는 것은 다른 쪽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과 같다. 고로 유로파는 목성의 외부에서부터 밀려나고 있다. '달' 또한 지구의 외부에서 밀려나고 있다. 즉, 궤도에 있는 것끼리는 끌어 당긴다. 다만, 그것을 벗어나면 모든 것은 그것을 밀어낸다. 그렇다고 유로파와 달이 완전히 다르냐 묻는다면 아니다. 이 둘은 '빅뱅' 초기에 아주 가까웠을 것이다. 그것은 빅뱅 직후 서로 멀어지기 시작하며 분화되다가 비슷한 것, 가까이에 있는 것끼리만 모여진다. 그리고 그것의 모양을 형성한다. 다시말해, 그것은 오롯하게 '그것' 같지만, '그것'은 '이것'과 같은 것이며 우주, 생물, 문화, 사회는 전부 비슷 한 매커니즘으로 번영해 나간다.

유대교는 '아브라함', '모세'와 같은 구약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유대교의 핵심 성경은 '타나크'로 성경의 구약에 해당된다. 이는 토라를 비롯한 여러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유대교는 역시 단일신을 섬긴다. 그리고 그에 맞는 율법과 윤리, 가르침을 갖는다. 다만 이 종교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라는 유대교 법학자가 구약을 중심으로 '예수'라는 인물의 가르침을 설파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을 '신약'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갈등의 시작이 발생한다. 바울의 편지 중 일부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메시아로 인식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으로 묘사된다.그것이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교리로 발전한다. 그러나 반대로 무하매드는 스스로를 '신'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무하매드는 '유일신'를 훼손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성당에는 '마리아'가, '교회'에는 '예수'의 상이 존재한다. 다만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에는 '신의 형상'이 없다. 이슬람에는 '태허'라는 아주 중요한 원칙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오직 유일하기에 그것을 형상화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해서 안된다는 원칙이다. 이런 신의 불가시성을 강조하는 원칙은 '코란'에도 기록되어 있다. 코란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를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 들어간다. 고로 어떤 조각상이나 이미지가 들어갈 수 없다. 이 원칙은 신의 존엄을 의미하고 순수성을 보존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을 묘사하는 형상은 우상 숭배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시자인 모하매드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두었다.

이렇게 서로가 같은 뿌리를 갖고 분파가 달라진다. 고로 이 네 종교는 정통성 문제가 생긴다. 모두가 같은 것으로 시작했으나, 모두가 달라졌으니 개중 하나만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모두 같은 성지를 갖는다. 고로 이들에게 영토는 단순히 거주지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이 모든 종파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아브라함을 만난다. 아브라함을 거슬러 올라가면 '테라'라는 그의 부친을 만난다. 그의 부친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홈'이라는 그의 조부를 만난다. 그를 거슬러 올라가면 '스룩'을 만나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르엘'을 만난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루시'와 만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어떤 물고기의 뱃속에서 만나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우리 모두는 '초신성' 혹은 '빅뱅'의 한점에서 만난다. 그것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종교의 뿌리가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이 있었다'처럼 '창세기'의 시작점을 갖고 있으니, 우리의 모든 뿌리는 하나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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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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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드'라는 소설을 알게 된 것은 영화를 보고 난 부터다. 어떻게 영화를 보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종말의 세계'에 꽂혔던 적 있다. 모든 것이 다 죽고 사라진 디스토피아에서 느껴지는 적막감과 적당한 긴장감. '생존'과 '삶'의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묘한 쾌감. 그런 것들이 느껴지게 한다. 이 영화는 어떤 이유에서 종말된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종말한 세계에 살아남은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다. 유일한 혈육이된 부자지간은 서로를 의지하고 생존해 간다. 그 적막감이 '아내'가 죽기 전까지 꽤 버틸만한 적막이었다. 다만 아내가 죽고 난 뒤의 적막감은 정말 세계가 무너져 버린 종말과 같다. 영화를 본지 꽤 지나서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설은 세 번은 본 것 같다.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적막감이 더 극하게 다가왔다. 영화에서 '아들'로 나오는 아이는 '창백'하고 '연약하다. 목소리와 피부, 그 눈빛까지 얼음장 같다. 금방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그 모습은 중성적이다. 목소리와 외형만 보고서, 아들인지 딸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 차갑고 연약한 아들과 점점 까맣게 초췌해지고 지저분해져가는 아버지는 완전 극적이면서 닮았다. 영화 속에서 뇌리에 강하게 때려와 박힌 장면이 있다. 우연히 아버지와 아들은 '캔 콜라'를 발견한다. 종말한 지구만 기억하는 아들에게 '콜라'의 맛을 알려주고 싶던 아버지는 '콜라캔'을 따다가 아들에게 건낸다. 아들은 그 톡쏘는 이상한 맛에 재미를 느낀다.

'그 장면'

그 장면 하나 때문에 나는 콜라를 몹시도 좋아하게 됐다. 모든것이 끝이 난 '회색빛 색깔'에 빨간색 콜라캔은 너무 매력적이고 독보적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희망'을 닮았다. 모든 것이 망해버린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희망. 그것은 달콤하고 톡쏘고, 새빨갛다. 그 장면은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고 전부였다. 나는 그 장면 하나만으로 그 영화를 사랑하게 됐다.

아버지와 아들은 온갖 고생을 하다가 우연히 음식이 가득 있는 벙커를 발견한다. 그때 느껴지는 대리 만족감은 그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다. 그곳에서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아주 짧게 보내다가, 다시 그들은 그 벙커를 버리고 고행을 한다. 그 아쉬움. 다른 대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그것이 인생을 닮았다. 이 영화는 손꼽는 명작 중 하나다. 그런 탓에 이 책도 그렇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가 있다. 대체로 그것은 짜임새가 있고 훌륭한 편이 많았다. 되려 원작을 읽을 때, 그 감성이 온전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물론, 빨간색 콜라 캔을 따며 들리는 소리, 그것을 삼키는 소리 등 영화가 나에게 남겨 주었던 강한 임팩트는 없다. 그러나 잔잔하게 흘러가는 서사가 그에 합하는 매력을 준다. '더 로드'라는 소설은 가끔 한 번씩 떠오른다. 가끔 복에 겨워, '삶' 이외의 무언가를 더 원하게 될 때가 그렇다. 무언가를 더 원할 때, 이미 모든 것이 종말한 세계와 그 결핍이 가져다주는 감사의 마음은 삶을 다시 살게 한다. 마치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세계를 겪고 난 뒤, 시간을 돌려 과거로 온 것 처럼, 이런 디스토피아적 소설과 영화는 삶을 두 번 살게 만든다. 오랫만에 읽은 '더 로드'라는 소설. 잔잔하지만 임팩트있고, 적막하지만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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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의 잭 설산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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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보통 온전하게 그 자리에서 모두 읽어야 몰입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 하나를 읽으려면 대략 6시간은 있어야 하는 듯하다. 그러나 6시간이 온전하게 붙어 있기는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잠에 들기 직전에는 갈등한다.

'지금 시작해 버리면 흐름이 끊길 텐데...'

흐름이 끊이면 온전하게 몰입하여 읽을 수 있는 작품 하나를 놓치게 된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하면 최단시간 내로 책을 읽고자 한다. 대략 3일 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연히 들게 된 책이다. 책을 읽고 몇 장을 넘기고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어. 재밌네."

읽기 시작한 시간이 10시. 분명 완독을 하지 못하고 잠에 들 것이고, 끊어 읽으면 그 몰입이 떨어진다. 역시나 이 책은 3일에 걸쳐 읽었고 책은 충분히 재밌었고 다만완전하게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최근 읽었던 '백은의 잭'은 단순히 '재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키장에 묻혀진 폭탄으로 금전을 요구하면서 벌어지는 서스펜스다. 이는 자칫 뻔한 소재일 수 있다. 다만 흔한 소재라는 것이 때로는 흥행을 보장하기도 하고, 보장된 흥행은 재미를 보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번 소설이 여타 뻔한 소재의 이야기와 흐름을 같이 하진 않는다.

소설 중간에 '게이고'는 너무나 뻔한 '범인'을 설정해 놓고 독자에게 그 미끼를 대놓고 물기를 기다린다. 너무나 뻔하게 흘러 갈듯 싶은 전개지만, 그 뻔함 때문에 의심스럽고 때로는 대안이 없음에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결국 게이고는 역시 완전히 다른 류의 결말로 이야기를 뒤집어 놓는다.

최근 아이들과 도서관을 다니며 읽었던 소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역시 재밌다고 생각한다. 그의 책을 처음으로 본 것은 '군시절'에 읽었던 , '편지'라는 소설부터다. 편지는 그 뒤로 한 번을 더 읽었다. 편지라는 소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느낌이 많이 나지 않는 소설이었다. 그때 그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이 지금도 선한다. 그 소재의 신선함. 그와 더불어 그때 내가 어떤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는지, 어떤 시간에 어떤 일을 하다가 읽었는지,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의 풍경이 어땠는지도 모두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의 향수가 항상 떠올라서 게이고의 소설을 언제나 집는다.

게이고는 다작하는 작가다. 고로 그의 소설이 전부다 재밌다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공장에서 찍어내듯 비슷한 식으로 흘러가는 소설도 있다. 물론 이 책도 완전하게 신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춘분히 시간을 삭제할 만큼 재미있었으며 소설로써 그것이면 충반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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