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마인드 - 무의식이 이끄는 부의 해답
하와이 대저택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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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로또 명당자리에서는 1등 당첨자가 많이 나온다. 고로 사람들은 로또 명당을 찾는다. 그리고 여지 없이 그 자리에서 1등이 나온다.

이것은 그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좋기 때문이 아니다. 특정 장소에서 로또 판매량이 많을 경우, 자연스럽게 그 곳에서 더 많은 당첨자가 나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확증편향'이 있는데, 특정 장소에서 당첨자가 여러 번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이유로 그 곳이 '행운의 장소'라는 인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만, 이런 관찰은 일반적인 확률 분포와 무작위성의 일부일 뿐, 실제 그 장소가 다른 장소보다 더 높은 당첨 확률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저 무작위성과 관련된 통계적 우연이며 사회적, 심리적 요인들의 복합적 결과일 뿐이다. 로또 당첨 확률은 구매장소와 상관없이 동일한 확률을 갖는다.

대치동에서 서울대학교 합격 비율이 높은 현상에도 비슷한 이유가 있다. 대치동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교육 열풍의 핵심 지역이다. 이곳은 다양한 학원과 사설 교습소가 많다. 입시 컨설팅과 학습 자료 구입에 용이하고 이 곳에 학생을 보내는 학부모의 평균 소득과 학력도 평균적으로 높은 편이다. 이들의 다수는 서울 혹은 경기권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고 학업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다. 고로 대치동에서 서울대학교 합격비율이 높은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 때문'이지, 공부에 관심 없는 이들이 대치동으로 이사를 간다고 자연스럽게 학업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현상들이 꽤 많은데, 아마 다수의 집단 심리에 의해 벌어지는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들어 실리콘 밸리는 기술 기업들이 다수 포진되어 혁신의 중심지로 인식될 수 있지만, 이는 투자 환경과 인재 풀, 네트워킹 기회, 정부 정책 등의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결과이지, 실리콘밸리라는 '지역'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는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무작위적이고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특정 컨텐츠가 이 산발적인 사람들 중 관심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으면 당연히 그곳에서는 네트워크가 발생하고, 다른 장소에 비해 '성공'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이것은 마케팅에서 자주 활용되는 방법이다. 가령 로또 명당은 최초에는 타의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이후에는 '자의'에 의해 홍보된다. 이렇게 홍보되면 이곳의 로또 판매량은 더 높아지고, 판매량이 높아지면 로또 1등 당첨자 비율 역시 더 높아진다. 학원의 경우에도 몇몇 합격자생이 배출되면 더 많은 학생들이 그 학원을 다니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많은 학생이 학원을 다니면 명문대 배출 비율은 더 높아진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행하는 사람, 100명을 모아서 이들에게 성공 확률을 물어보자. 이들의 성공확률은 일정 비율을 가질 것이다. 다만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목표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비교군에 비해 더 많은 '성공 비율'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내부에서 선순환적인 네트워크와 정보공유가 이뤄지며 그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다만 이것은 '끌어당김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 관심사가 비슷한 이들의 집단이 더 높은 확률의 성공률을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집단에서는 반드시 성공하지 못하는 집단도 생긴다.

'니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행운에 속지마라'라는 책을 보면, '생존자 편향'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쉽게 말해, 러시안 룰렛이라는 게임을 예로 들 수 있다. 러시안 룰렛은 한 개의 총알을 리볼버의 여섯 개 총실 중에 넣고 무작위로 회전 시킨 후, 사람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이다. 러시안 룰렛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도의 운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만 이는 생존자 편향의 예다. 즉, 살아남은 사람만이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생존자의 이야기는 실제 위험성에 대해서는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당연하다. 실패한 이들은 이미 총을 맞고 죽었기 때문에 '발언의 기회'가 사라진다. 고로 생존하는 사람의 경험만 전승된다. 또한 생존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그 게임에서 이길 확률은 100%다. 고로 그 게임의 위험성에 대해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경향이 생긴다.

생존자가 자신의 생존 노하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게임자에게 말한다고 해서, 게임의 확률은 변하지 않는다. 즉 살아남은 한 사람의 '스타'는 일정 확률로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생존자가 의도적인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생존한 '스타'의 발언에 주목하는 일에 조심해야 한다.

과거 조현병에 걸려 있던 '스트리머'가 이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자산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을 것이고 이어 세계 유명인들과 어깨를 나란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매일 같을 읊고 읽고 쓰기까지 했다. 책이 말하는 바와 같이 '확언'을 했다. 이미 이루어진 것 처럼 말하고 다녔다.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분명, 믿어 좋을 컨텐츠는 분명하다. 그러나 수많은 조현병 환자의 망상이 그들 앞에 실현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증명할 방법이 없다. 망상증 환자의 경우는 정상인에 비해 자신의 망상을 확고하게 한다. 그러나 어째서 그들에게만 '끌어당김의 법칙'은 냉혹한 것일까. 일론 머스크나 워렌버핏, 빌 게이츠가 자리에 앉아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싶어요.', '빨리 은퇴하고 싶어요. 자산이 10배가 늘었으면 좋겠어요.', '주식이 30%는 올랐으면 좋겠어요.'를 쓰고 읊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됐다. 이들의 대부분은 '목표의식'을 분명히 한다. '상태'가 아니라 '행위'에 집중한다. 즉, '고급차와 저택을 갖고 싶어요'가 아니라, 오늘은 어떤 목표를 이뤄야 겠다.는 다짐을 한다.

혹시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더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의 다른 성공작에 대해 알고 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지 않다. 성공하는 방법을 판매하여 성공에 이르는 이들이 간혹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스티브 잡스', '아인슈타인', '뉴턴', '빌 게이츠'의 이름을 빌린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성공에 이른다. 다큐멘터리와 책의 판매수는 급격하게 올라간다. 다만 생각해보면 이렇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사'를 창업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정리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저술했고 빌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 사를 창업했다. 누구나 쉽게 말과 글이면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성공에 이를 수 있는데 왜 그들은 그 쉬운 길을 돌아가야만 했을까. 어째서 스티브 잡스는 투병생활 중에서도 출근을 했고 아인슈타인은 논문을 쓰면서 특허청 직원으로 일해야 했을까.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착각은 언제나 '우상'을 만든다. 김연아 선수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로 세계 최고가 됐을 것이고 스티브 잡스나 워렌버핏, 일론 머스크, 핸리포드 또한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항상 '숭배 대상'을 만든다. 우리는 어떻게하면 살을 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돈을 벌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 모두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더 쉬운 '시크릿'을 찾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더 쉬운 길이 아니라, 더 많이 하는 길이다. 일론 머스크는 지금도 주당 80에서 100시간은 일한다. 빌게이츠 또한 주당 80시간과 100시간을 일했으며 토마스 에디슨은 잠자는 시간을 극도로 줄였다. 마르코 피사노는 JP모건의 고의 투자 은행가로, 주당 100시간을 일했으며, 제너럴 모터스의 CEO인 메리 바라는 주 80에서 100시간을 일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수면을 최소화하고 더 많은 시간을 작업에 할애하기 위해 폴리파식 수면을 했다. 니콜라 테슬라는 하루 15시간 이상을 작업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끌어당김의 법칙이고 상상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성공을 위한 노력에 대한 폄하다. 예전 백종원 대표가 한 자영업자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필요하다면 발품 팔아서, 음식의 무게도 측정하고 분해도 해보고 맛도 보고, 수 백, 수 천 번을 만들어 봐야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기분 좋은 상상'이나 했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꾸준한 상상이 행동으로 발현되는 '상관관계'를 따지고 들자면 그럴 수 있다. 개인적으로 '파이어족'을 좋아하진 않는다. 최대한 빨리 벌어서 일을 때려 치우는 것이 목적인 것에 응원하진 않는다. 백종원 대표의 '자산' 때문에 가려진, '요리'에 대한 철학, 박진영 프로듀서의 '자산'에 가려진, '음악'에 대한 철학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다. 그저 자신의 일에 철학 없이 '자산에 집중하세요.'는 장기적이지 않다. 돈이란 다수에게 흩어져 있는 '영향력'을 모으는 일이다. 즉, 뭘 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무엇을 사회에 남겼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자산'을 가늠하기에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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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는 세 번 시작된다 - 30대 배달 알바에서 100억 사업가가 된 초성장의 비밀
유근용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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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불여일성 천사여불여일행(百技不如一誠 千思不如一行), 백 가지 기술도 한 번의 지극한 정성만 못하고, 천 번의 생각도 한 번의 실행만 못하다.

5년 간, 책을 읽고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 날짜로 889권의 도서 목록이 블로그에 기록되어 있다. 2020년에는 236권, 2021년에는 226권, 2022년에는 231권이다. 2023년이 다 저물어가는 12월 오늘을 살펴보니 184권이 기록되어 있다.

나의 블로그는 오롯하게 '나만을 위한 기록'이었다. 2019년에도 그랬고, 2020년에도 그랬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부터, 댓글에 이런 내용이 올라왔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시면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는 사람들이 불편합니다. 개선해주세요."

나의 글은 '무더기'처럼 쌓여 있다. 적당하게 사진을 섞고 알록달록 색상을 넣지도 않는다. 친절하게 '말하는 투'로 쓰여 있지 않다. 그저 생각한 것을 '무더기'로 쌓아 올려져 있다. 그러니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쓰여진 글은 '퇴고'도 없다. 그저 '일필휘지' 자리에 앉아서 '후다닥'하고 PC를 꺼버린다. 그러니 어느 날, 원서를 읽은 뒤의 글을 썼을대는 이런 댓글도 달렸다.

"작가라는 사람이 맞춤법, 띄어쓰기도 못하나요? 책임감 좀 가지세요. 영어 전에 국어부터 공부하시죠."

얼굴이 붉어졌다. 이유는 실제 나의 무지로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이 들었다. 나의 글을 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언젠가 블로그에 유입하는 경로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독알림'을 통해 들어 왔다. 일부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문장을 가끔 필사한다고도 했다.

참으로 희안한 것이 나의 블로그는 특별하게 꾸미지도 않고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슈성이 강한 글은 일부러 시기를 놓쳐서 쓰기도 한다. 내 블로그의 제목이 '개인 해우소'인 것을 있어 보이게 말하면, '걱정을 해소하는 곳'이고, 말 그대로 하면 '똥을 싸질러 놓는 곳'이기도 하다. 블로그 이름을 지을 때에는 특별한 철학을 담은 것도 아니다. 그냥 '막 싸질러 놓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나를 알았다. 나는 깨끗한 책을 보존하기 위해, 책을 깨끗이 보려는 편이었고, 새로 산 연필, 지우개, 공책도 모두 깨끗하게 사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다가 중학생 정도에 '아차'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공책'을 깨끗이 사용하기 위해, 첫장부터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글씨체가 흐트러지면, 처음 몇 페이지를 찢고 새로운 공책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멍청한 일이던가. 나는 그 이후로 '새것'을 사면 그 바로 첫날, 일부러 막 다룬다. 새 옷을 사건, 새로운 스마트폰을 구매하건, 새책을 사건, 새차를 사건 그렇다. 그것의 본질이 사용이라면, 그것을 편하게 사용하기 위해 '길들이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대상에게 '주종' 관계를 확실하게 잡아주고 그것을 편하게 사용하길 바랐다.

블로그에 '똥간' 같은 이름을 지어 놓은 이유도 그렇다. 아마 조상들이 자신의 아들 이름을 '개똥이', '소똥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막써야 편해지고, 편해야야 막쓰게 된다. 그런 시작으로 나의 글에는 언제나 똥을 싸질러대는 마음으로 쓴다. 그것이 내가 블로그를 5년 간 유지할 수 있던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열심히 하면 안된다'라는 이상한 철학을 갖게 됐다. '열심히'라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단어 때문에, 간혹 우리는 그 자체에 심취한 자신에게 기대와 이상을 심는다. 그 자아도취가 완전하게 자아의 형상을 만들어내면 언제나 그에 합당하지 않은 결과를 받아 들인다. 모든 것은 '지속적인 우상향'이다. 고로 자신의 '열심히'하는 모습에 '도취'되어 '열심히'라는 착각에 빠지면, 결과라는 현실의 잣대에 몽둥이질을 당한다. 결과가 어찌됐던, 그냥 아쉬울 것 없이,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냥 결과가 주는 몽둥이가 '매값'이 없어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던, 그냥 아무런 심리적 데미지 없이,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냥 해야 한다. 그냥 변소간을 드나들 듯,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도취 없이, 그것이 커다란 변화를 줄 것이라는 기대도 없이, 그저 해야 한다.

인일능지 기백지 인십능지 기천지(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남이 한 번에 잘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한다. 이는 중용에서 나오는 말이다. 남들과 비교할 것도 없다. 결과에 연연할 것도 없다. 남들이 화장실 한 번 더 갔다고 기를 쓰고 화장실을 더 가지 않는 것처럼, 나의 생체적 리듬에 맞게 그것을 해내면 그만이다.

그것을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대단하지 않게 여기던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하는 일을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던, 하찮지 않게 여기던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똥간을 갔다오듯 해 낼 뿐이다. 그저 읽고 그저 쓴다. 그저 먹고 그저 싸는 것처럼 말이다.

블로그에는 읽은 책만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을 기록하는 '메모장'이기도 하고 다짐을 다잡는 다짐장이기도 하다. 감사일기를 쓰는 '감사일기장'이기도 하고 스스로 긍정적이도록 독려하는 확언장이기도 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상을 적는 육아 일기이자, 나만의 육아 노하우를 공유하는 육아컨텐츠이기도 하다. 내 투자에 대한 공부를 하는 '투자일지'이기도 하고, 사회 현상과 경제를 분석하는 '컬럼'이기도 하다. 출판사가 출간 문의를 해오면 사용할 '컨텐츠 출처'이기도 하고 나를 홍보하는 브랜딩 홍보장이기도 하며 유튜브의 대본이자, 출간 도서의 원고이기도 하다.

블로그에는 어렵게 얻게 된 노하우와 기술, 정보를 가감없이 기록한다. 여기에는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인 '선행'이 1도 없다. 다만 누군가가 도움을 받으면 좋은 일이고 오직 스스로를 위할 뿐이다. 성장하는 이는 아무리 막아서도 어떻게든 성장하고, 정체할 이들은 아무리 끌어내도 정체하게 되어 있다. 나만의 노하우와 비밀을 아무리 틀어먹아도 성장할 이들은 성장해 낼 것이며, 멈춰 있으려는 이들을 아무리 밀어도 그들은 정체할 뿐이다. 여기서 나의 역할은 감사하게 성장하는 이들의 자양분으로써 사용될 뿐이며, 그것이 좋게 쓰여지는 '퇴비'이자 '똥'의 선순환이지 않을까 싶다.

나의 독후감은 '책'의 요약이 없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없다. 책에 대한 내용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을 때도 있다. 그저 나는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꼈는지를 기록할 뿐이며, 그저 잘 씹고 소화하여 뱉어버린 똥 같은 글일 뿐이다. 고로 나의 글을 욕하더라도 나의 글에 대해서는 단 1의 정신적 데미지도 입지 않는다. 내가 싼 똥들이 좋게 사용되어 세상에 거름이 된다면, 다시 그것이 나를 키워내는 퇴비가 된다면, 이 얼마나 순도 높은 효율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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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부아 에두아르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이혼했다 프랑스 책벌레
이주영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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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딱히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렇게 된 일들 투성이다. 어차피 계획하고 의도하는 바대로 되는 것이 없다보니, 계획이나 의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회의감이 마구 들다가 문뜩 다시 떠오른다. 문제는 계획과 의도가 아니다. 그 결과까지 완전하게 자기화하고 싶어했던 욕심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결과를 초월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다시 계획을 세우고 의도를 채운다. 원하는 결과를 위해 계획과 의도를 갖고 결과가 원하는 바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초탈한 마음을 가지려 한다. 다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다면 세상 어떤 사람이 좌절을 경험하고 미련이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장하게 되나.

역시 인생은 끊임없는 배움의 연속이고 배움이라는 것은 '뇌'라는 신체기관에 '인'을 새기는 작업이다. 같은 자리를 수 백 만 번 떨어져 자리에 '인'은 새기고 나면 그것은 딱 새긴 기간만큼만 인이 박혀 있다. 고로 중요한 것은 이 말랑거리는 '뇌'라는 신체에 얼마만큼의 '인'을 새길 시간과 정성이 있느냐다.

모든 그렇다.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그렇다. 20대 초반, 해외로 유학을 떠났을 때, 그곳에서 10년을 살게 될 거라고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얼마 정도를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싶었다. 역시나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첫 직장을 얻었다. 단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은 점차 '직업'으로 굳어졌다. 그러려고 그랬던 것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영주권'을 신청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런 이유로 갈등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그 나라에 갔던 이유는 '이민'을 위해서가 아니다. 어머니께, '3개월 영어 좀 공부하고 올께요.' 4년을, 다시 일주일 휴가를 왔다가 나머지 수 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생각보면 황당할 노릇이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이 얼마 뒤에는 해외생활과 그렇게 몇번의 인연을 갖다가 지금은 다시 '제주'로 내려와 있다.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영어에서는 'fortune'이라고 부른다. force라는 말이 '힘'이라, 어원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운'이라고 부르는데, 흔히 우리는 그것을 '행운'과 같은 의미로 상용한다. fortune이 아니라 luck에 가깝다. luck은 라틴어에서 기원한 빛, 즉 light와 어원을 같이 한다. 다시말하면 luck은 반짝이는 것이고 fortune은 거대하게 무더기 같은 것이 웅장한 움직임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거기에 그래서 동양에서는 이런 운에 '움직이며 돌아다니다'라는 의미의 글자를 사용한다. 그러한 '운'의 거대한 목적, 그것이 '운명'이다.

살다보면 만나고 스쳐지나가는 무수하게 많은 인연들이 있다. 한때는 그들과 영원할 것 같아, 미워했고 극성 맞았고, 시기했고, 안달했다. 그 순간이 영원이라고 여기던 그 당시의 그 모습은 지금 돌이키면 풋내기 어린 아이의 치기 같은 것이다. 마치 '돌아오는 길에 사줄께'라는 말로도 견디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고집 같은 것이다. 그때보다는 몇 시간 정도 더 성숙한 내가 그때의 나를 봐도 그리 어린데... 라고 여기다가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더 성숙할 시기가 남았기에, 결국 언젠가 생각은 돌고 돌아 그때가 맞다는 더 깊은 성숙의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 같다. 가장 멀어지면 결국은 다시 가장 가까워지는 원형의 시계 바늘 같은 것이다.

'끝'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끝'이라는 것이 '시작'과 가장 멀리 있는 지점이라 여겨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끝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끝은 '마무리'다. 아무리 좋은 책도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출고되지 않는다. 어떤 음악도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이름'이 붙어지지 않는다. '펜'을 잡으면 '펜'을 놓으며 작가의 글이 완성되고 잠자리에서 일어서면 다시 잠자리에 누으며 하루는 완성된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마무리'다. 마무리의 어원은 '끝 말'이라는 한자에 '무리'라는 순 우리말이 붙은 단어다. '무리'는 다시 말하면 '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다시 말해, 끝은 '시작'을 포함하여 모든 과정을 '모은' 완성체다.

'위상동형'이라는 말이 있다. 복잡한 공간이나 네트워크를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DNA라던지, 단백질 구조, 서울 지하철 노선처럼 실제 구조가 복잡한 것에서 형태와 공간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실제로 강남역과 양재역은 노선도 상에서는 매우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 그 두 역 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 홍대입구역과 신촌역도 노선도에서는 가깝지만 걸어 이동하기 쉽지 않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과 종로3가역도 그렇다. 정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실제를 왜곡하여 거리를 늘이고 줄인다. 그래도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위상동형'에 따르면 강남역과 양재역의 거리가 축소된 것처럼 간소화하고 축약하고 직선화하는 등 바꿀 수 있다. 즉 붙이거나 자르는 행위없이 늘이거나 줄이는 등의 행위만으로 모양을 바꿀때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따르면 반지와 빨대의 모양은 서로 같다. 반지를 길게 늘이면 빨대와 같아진다. 즉 반지일 때는 하나였던 구멍이 빨대가 되면 2개의 구멍인 것처럼 보이는 일이다. 영국과 프랑스에 연결된 해저터널을 보면 흥미롭게도 켄트 주 폴크스턴에 있는 영국측 입구와 노르드파드칼레 지방의 코켈에 있는 프랑스 측 입구가 두 개 있지만, 이것은 그 길이만 늘였을 뿐 실제 구멍은 하나다.

만남과 이별이라고 다르지 않다. 만남과 이별은 별개의 무언가처럼 보여진다. 시작과 끝처럼 보여진다. 다만 이는 '과정'을 늘였을 뿐 결국 하나의 구멍이다. 입구가 출구이고 출구가 입구일 뿐이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가지 못하는 구멍은 없다. 나가기만 할 수 있고 들어갈 수만 있는 구멍은 없다. 결국 모든 것은 1과 마이너스 1사이의 길이를 늘이고 줄이는 0의 위상동형이다.

사람이 그렇다. 길이가 짧을 때는 하나로 여겨지는 무언가가, 길이가 길어질수록 둘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것은 그것의 본질이 아니라 '길이'의 차이일 뿐이다. 고로 이별이 있는 이유는 만남이 있기 때문이고, 만남이 크다면 이별도 크다. 이별이 크다면, 그 상처로 견디지 못할 아쉬움과 그리움이 사무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이만큼의 사랑을 이미 받았었구나..."

하고 말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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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남은 시간 -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는 시대, 인류세를 사는 사람들
최평순 지음 / 해나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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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피아노 건반 아랫부분은 검정색이었다. 윗부분이 흰색이었다. 초기 피아노에서 흰색 건반은 반음을, 검은색 건반이 전음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흰건반이 아래로 내려오고, 검정 건반은 위로 올라갔을까. 초기 피아노에서 흰색 건반의 재료는 '코끼리 상아'다. 그 당시에도 코끼리 상아는 꽤 비싼 재료였다. 이는 귀족들의 부와 지위의 상징이었다. 품질과 가공기술의 차이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코끼리 한 마리를 잡으면 대략 20개의 피아노 건반을 만들 수 있었다. 고로 코끼리의 상아는 희소성 있는 재료였다. 코끼리의 상아는 일단 자르고 나면 다시 자라지 않는다. 물론 상아를 잘랐다고 해서 코끼리가 생명을 잃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욕심에 따라 너무 밑기둥부터 잘라낼 경우, 코끼리는 심한 출혈로 인해 죽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인간이 코끼리의 상아를 잘라내고 다시 방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상아를 채취하기 위해 코끼리를 죽인다. 상아는 코끼리의 두개골에 깊숙하게 박혀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상태의 코끼리에서 상아를 채취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 힘들었다. 그것을 살려두고 방생한다고 하더라도 코끼리 상아는 코끼리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신체부위다. 코끼리는 상아를 이용하여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식물을 파헤친다. 방아와 공격에도 상용한다. 그런 상아가 사리지 코끼리 개체수는 점차 줄어갔다. 개체수가 줄수록 희소성의 가치는 더 높았다. 흰색 상아를 이용한 건반 피아노는 '부와 지위'의 상징이었다. 상아색의 흰색 건반이 고급의 상징으로 자리잡자, '상아색' 건반의 수요를 불러 일으켰다. 이후에는 건반의 다수를 상징하는 아랫부분이 흰색으로 자리잡는다. 19세기가 되면서 피아노 제작은 산업화되고 대중화 되었다. 피아노 제작자들은 더 경제적이고 지속가능한 생산 방식이 필요했다. 코끼리를 죽이지 않고 더 많은 인간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14세기 이후, 당구는 유럽의 귀족 문화였다. 이 문화는 19세기 미국 상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당구는 유럽 귀족들과 미국 상류사회에서 각광받았나. 물론 이 이유만으로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당구는 꽤 고급진 스포츠다. 이유는 당구공의 주재료가 '코끼리 상아'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피아노 건반과 같이, 코끼리 상아의 수요는 코끼리 개체수 감소 대비되며 가격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역시 수요 공급에 따라 높은 가격을 만들어냈다. 코끼리 상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당구공의 갯수가 고작 6개 내지 8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상아를 채집하기 위해, 인간은 코끼리를 죽인다. 당구와 피아노 건반으로 코끼리를 죽이는 일을 막기 위해 1863년 뉴욕타임즈는 다음과 같은 광고를 실었다.

"상아를 대체할 당구공 물질을 가져오는 이에게 1만 달러를 주겠소."

당시 1만 달러면 우리돈으로 대략 2억 5천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는 상금이었다. 이렇게 '존 하이엇'은 '셀룰로이드'라는 물질을 만들어냈다. 셀룰로이드는 열을 가하면 모양을 변형할 수 있다. 식으면 이것은 단단해지고 탄력 있어졌다. 이처럼 '변형가능한 물질'은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충격을 받으면 폭발한다. 이런 이유로 '존 하이엇'은 상금의 일부만 받게 된다. 이렇게 폭발하는 셀룰로이드의 단점을 보완한 사람은 '베이클랜드'라는 화학자였다. 그는 1909년 포름알데히드와 페놀을 이용하여 최초의 합성수지를 만들고 폭발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었다. 그로써 상아를 상용하지 않는 당구공을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변형가능한 물질'은 그리스어의 '변형가능한'이라는 단어인 '플라티코스'에서 이름을 따서, '플라스틱'이 됐다. 결국 '코끼리를 살리자'라는 구호와 '북극곰을 살리자'라는 구호가 정확하게 대치점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인간의 편의성의 최정점인 '플라스틱'은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오죽하면, 현대 시대를 '석기, 청동기, 철기' 이후인 '플라스틱기'로 정의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다. 플라스틱의 발명은 이처럼 '환경'에서 먼저 시작했다. 다만 이것이 다시 돌고 돌아 '환경 위협'의 상징이 됐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환경을 위해 뻗은 인간의 손이, 환경의 목을 조르는 형태로 바뀐듯 보인다. 사실 환경에 있어서 사람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다. 누군가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입장이 있고, 누군가는 인간의 산업화가 만든 변화가 환경에 재앙적 위험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두 주장이고 의견이다. 실제로 인간이 자연환경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믿는쪽의 입장은 이렇다. 지구의 기온은 '태양의 흑점활동과 화산활동'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탐보라 화산이 폭발했을때, 지구 기온은 급격하게 내려갔다. 이런 기후 하락으로 역사적 입장에서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쟁의 패배가 있었고, 전 지구적으로는 농작물 재배의 실패와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조선 순조 당시에는 흉작으로 인한 대기근과 역병 창궐로 인한 인명피해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로 지구 기온이라는 것은 내려가서도 문제고, 올라가서도 문제라는 의미다. 지금에서야 산업화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기후 변화에 대해 많은 세계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기후변화를 줄이기 위해 각국에서는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문제는 다만 각국의 '이해관계'와도 얽혀있다. 우리 대부분은 '기후변화'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지만, 사피엔스 출현 이전에도, 이후에도 지구의 기온 변화는 다양한 원인에 의해 꾸준하게 있어왔다. 따뜻한 기온으로의 미래가 기정사실화 되는 현재, 우리는 물론 기후변화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다만 변화의 속도를 줄이는 것만이 미래를 대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지구가 따뜻해졌을 때, 과연 인간에게는 재앙만 되는가. 분명 그렇지 않다. 최근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러시아의 일부 동토에서 농사가 가능해졌다는 뉴스기사가 떴다. 다시말해서, 기존 산업국에게는 재앙이 일부 국가에서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는 일부 지역에서 농업 기간을 연장하도록 한다. 일부 냉대 지방에서는 더 긴 선장과 생산성 증가를 갖게 된다. 또한 현재 비옥하지 않은 지역에서 농업이 가능한 형태로 또다른 의미의 개간이 가능하고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사용하던 '에너지 비용'이 줄어든다. 쉽게 말해,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했던 '탄소배출'이 따뜻해지니, 줄어든다는 의미다. 간혹 북극곰의 살 곳을 지켜달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우리를 자극하지만, 사실 기후변화는 새로운 종에게도 기회를 준다. 생각해보면 기후가 따뜻할수록 더 번식하는 종이 많아진다. 우리는 매년 몇 종과 몇 목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는지를 듣고 있지만, 반대로 새롭게 생겨나는 종과 새롭게 생겨는 목은 그 자리를 열심히 채우고 있다. 물류 이동에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 현재 인간은 물류를 이동하기 위해 불필요한 해상 교통 경로를 이용한다. 다만 기후변화 이후의 세계에는 북극 해빙의 감소로 인해 북극항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북극 항로의 개발은 무역에 긍정적인 영향이 되고, 아주 극적으로 에너지와 시간 효율을 줄여준다. 물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모든 지정학적 이로움이 특정국가에게 귀속된다는 위험성은 있다. 다만 이는 이해관계의 충돌일지 모른다. 우리는 간혹 '환경'을 위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실 더 근본적으로 갔을 때, '환경'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일이다. 공룡이 살던 시대, 즉 중생대 시대에는 현재보다 훨씬 더 높은 기온이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지구의 원래 기온으로 회기한다고 말장난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인간의 기술 변화는 꽤 환경에 긍정적인 편으로 진보한 부분도 있다. 앞서 말한 플라스틱의 발견도 그렇다. 다만 문제는 '폭발하는 인구'와 성장하는 경제다. 그렇다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인구를 강제로 줄일 수도 없고 잘 나가는 경제를 일부로 제동 걸수도 없다. 이 모든 것은 다양한 이해관계로 충돌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철학'을 만나게 된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환경을 생각하는 이유는 이 또한 '우리'를 위한 일이다. 고로 사람마다 처한 위치와 상황,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이해관계, 입장의 차이가 발생한다.

즉, 환경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너무 감성적이어서도, 너무 무관심해서도, 때로는 지나치게 이성적이어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전 인류가 대적해야 하는 커다란 '과제'에는 댜앙햔 생각과 의견, 경제적, 정치적, 지정학적 입장차이가 있다. 심지어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이자, '산업화 국가'인 시대, 모든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할 때에는 하나의 답론을 내리기 참 어렵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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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영어 문법 2 - 주민혜 선생님과 함께 만화로 쉽게 공부한다! 고등 생강 시리즈
주민혜 지음, 해뜰날 그림 / 스터디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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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한마리가 있다. 원숭이가 타자기를 두들긴다. 'qwdf' 임의로 두들긴 알파벳의 조합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알파벳 조합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your', 'is', 'name', 'what'처럼 말이다. 이처럼 의미가 있는 알파벳의 조합을 '단어'라고 한다. 이 최소 단위의 알파벳 조합은 각기 의미가 다르다. 'your'가 하는 역할은 그 소유주를 밝히는 역할이다. name은 그것의 '이름'이다. 즉, 알파벳이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하는 역할이 달라진다. 동작을 가르키면 '동사', 상태를 설명하면 '형용사', 이름을 가르키면 '명사'다. 이렇게 단어가 어떤 역할은 다르다. 단어가 하는 역할로 분류한 것이 '품사'라고 한다. 영어에는 8개의 품사가 있다고 배운다.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 그리고 '부사, 전치사, 감탄사, 접속사'가 있다. 눈치를 챘겠지만 모두 '사'로 끝난다. 또한 나열하는 과정에서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사용했다. 접속사 '앞'에 있던,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는 축구로 치면 '선수'에 속한다. '그리고' 뒤에 있는 '전치사, 접속사, 감탄사, 부사'는 선수로 뛰지 않는다. 다만 축구 경기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즉, 치어리더나 심판, 관중 같은 걸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품사'는 '사람'이다. 개중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만 축구선수다. 이들은 팀을 이뤄 경기를 뛴다. 이렇게 특정 단어들이 팀을 이루면 그것을 '문장'이라고 한다.

단어를 만들다보면 단어의 갯수는 끝도 없어진다. 고로 우리는 이미 있는 단어를 재활용한다. 예를들어 '아름다움'을 가르키는 beauty는 명사다. 이 명사의 뒤에 ful이라는 접미사를 붙어 beautiful이라는 형용사로 재활용하는 것이다. 다시 여기에 ly라는 접미사를 붙어 beuatifully라는 부사로 재활용한다. 이처럼 원래 단어에 뒤나 앞에 무언가를 붙여서 새로운 품사로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그 시작점이 '동사'라면 우리는 이것을 '준동사'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work라는 동사가 있다고 해보자. 이것은 '일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이 뒤에 ing 나 ed를 붙이면 형용사가 된다. 'working 일하는', ' worked 일이 되어진', 처럼 말이다. 동사의 뒤를 붙여 형용사로 바꾼 것을 '분사'라고 부른다. 앞에 to를 붙이기도 한다. to work처럼 앞에 to를 붙이면, '일하는 것, 일할, 일하기 위해서', 처럼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정해지지 않고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처럼 정해지지 않은 to로 시작하는 단어를 to부정사라고한다. 정해재지 않아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ing를 붙여 'working 일하는 것' 이렇게 명사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것은 동명사다. 다시말해, 동명사, 분사, to 부정사, 이 셋을 통틀어 준동사라고 부르는데, 영어는 문장의 순서가 어떻게 배열되느냐, 문장이 어떻게 앞과 뒤의 형태가 어떻게 변화되는냐, 극서으로 품사와 성분을 구분해낸다.

축구 팀에는 반드시 골키퍼가 한 명 들어간다. 한 명도 없을 수도 없지만, 두 명이 나올 수도 없다. 축구장에는 '명사, 형용사, 대명사, 동사'가 들어간다. 이 선수들은 간혹 정해지기도 했지만 다른 포지션에 들어 갈 수도 있다. 다만 동사는 무조건 동사의 위치에만 들어간다. 모든 축구팀에서 한 명의 역할을 하는 '골키퍼'를 '동사'라고 해보자. 골키퍼는 다른 포지션에서 뛰지 않는다. 무조건 골키퍼 포지션에서 뛴다. 그래서 골키퍼가 들어갈 자리는 '골키퍼 자리'다. 모든 선수는 공격수, 수비수 등의 포지션에 배치 받는다. 명사는 공격수, 형용사는 수비수 이런식이다. 이처럼 공격수, 수비수처럼 팀에는 '포지션'이 있다. 이 자리이름을 '성분'이라고 부른다. 문장의 성분에는 '주어, 동사, 목적어, 보어'가 있다. 눈치를 챘겠지만, 모두 '어'로 끝이 난다. 간혹 품사와 성분을 헷갈리는 경우가 있지만 품사는 '사'로 끝나고, 성분은 '어'로 끝난다. 이제 의문이 있다. 어째서 다른 품사는 모두 '사'로 끝나는데, '동사'는 '사'로 끝날까. 이유는 이렇다. 동사의 자리에는 무조건 '동사'만 들어가기 때문이다. 굳이 다른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간혹 축구 해설 위원들은 '골키퍼'를 '골키퍼'라고 부른다. 대체로 다른 선수들은 이름을 불러주는 반면, 골키퍼는 '골키퍼'라고 부른다. 고로 골키퍼의 자리는 골키퍼가 들어가는 것처럼 동사의 자리는 동사가 들어간다. 지금까지 축구를 예로 영어 문법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어문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말에는 '조사'라는 것이 있다. 흔히 말하는 '은, 는, 이, 가, 을, 를'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단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해준다. 쉽게 말해서 '철수'라고 하는 명사 뒤에 '는'이라는 조사를 붙이면 '주어'라는 의미다. '영희'라는 명사에 '을'이라는 조사를 붙이면 '목적어'라는 의미다. 이런 조사의 역할 덕분에 우리는 문장을 뒤죽 박죽 섞어도 의미를 전달하는데 문제가 없다.

"영희는 철수를 사랑한다."

"철수를 영희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 영희를 철수는"

심지어 우리말은 '조사' 덕분에 더 다양한 어감을 조정할 수 있는 이점을 얻게 됐다. 다만 영어에는 '조사'가 없다. 즉 어떤 단어가 어떤 성분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저 '어느 위치'에 있는지로 파악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영어는 문장을 뒤죽 박죽 섞으면 의미가 바뀐다.

"영희 loves 철수"

"철수 loves 영희"

"love 철수 영희"

"love 영희 철수"

고로 영어는 문장의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쉽게 말해 우리말의 문법에서는 '조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또한 이 명사 뒤에 어떤 조사를 붙이는지 그 구분도 굉장히 다양해진다. 명사가 '할아버지'라면 여기에는 '께서'라는 조사가 붙는다. 반면 영어의 문법은 조사에서 자유로워진다. 그저 어떻게 단어를 배열하는지가 훨씬 중요해진다. 이렇게 영어 단어를 어떤 순서로 배열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문법'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your', 'is', 'name', 'what'라는 단어는 그저 나열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이것이 문법 구성에 맞는 순서를 배열하면 비로소 '문장'이 된다. "What is your name?"

이렇게 완전한 자리배치가 완성된 단어 배열을 '문장'이라고 부른다. 문장은 두 단어 이상이 붙어 문장의 구성을 이루는 것이다. 즉, 거기에는 문장의 위치만으로 '조사'와 같은 '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최소단위로 형태를 이룬 문장을 '절'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단어가 둘 이상이 배열되어 있으면서 의미는 있지만 '형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라고 부르나.

"Oh my god!"

우리는 이렇게 구성된 영어 단어를 만난다. 이것은 분명 문장은 아니다. 다만 둘 이상의 단어가 붙어 있고 의미가 있다. 이런 문장의 조합을 '구'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언어는 '구'와 '절'로 이뤄져 있다. 이것을 '구절'이라 한다. 구와 절은 번걸아가며 최소단위의 의미를 전달하고 그것이 일관성 있는 하나의 소주제를 갖게 되면 그것은 '문단'이 된다. 문단은 대체로 작은 하나의 단위를 갖고 있다. 수능에서 나오는 짧은 지문들은 대게 '도입, 본론, 결론'처럼 세단계 문단으로 나눠진다.

수능에 나오는 지문의 경우에는 꽤 짜임새 있는 방식으로 여러 형식의 글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대체로 18번 문제의 경우는 '편지글', 19번 문제의 경우, '수필'이나 '일기문' 그 밖에 주장문, 설명문, 알림문, 통계문 등이 나온다. 글을 많이 읽다보면 대체적으로 이런 글의 종류에 따라 중요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편지글'의 경우에는 목적없이 쓰는 경우는 없다. 고로 편지글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편지를 썼는지를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일기문의 경우에는 '필자'의 감정과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주장문의 경우에는 필자가 주장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반드시 있다. 주장문은 '팩트'가 아니라, '의견'이 등러간다. 설명문은 독자가 모를만한 사실에 대한 설명을 한다. 고로 대부분 어려운 명사를 도입에 던지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는 방식이다. 대체로 첫문장을 접하고 좌절하는 경우는 그것의 도입이 당연히 모를만한 단어로 시작하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통계문은 당연히 도표를 보고 비교한다. 알림글은 정보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는지를 살핀다. 여기서 도표와 알림과 같은 글들은 '내용이 일치하는지'를 묻는다.

수능이나 모의고사에 나오는 영어 지문은 대체로 '좋지 못한 글'이 많다. 문법이 어그러져 있고, 불필요하게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다. 쉽게 Think라는 단어로 '생각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suppose'라는 가정하다 혹은 'deliberate' 혹은 'consider' 등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이 단어가 더 세밀한 어감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밖에도 불필요하게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어휘를 집어넣는다. 뿐만아니라 괜스레 수동태 문장이 많거나, 간혹 아예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도 많다. 고로 모든 문장을 정확하게 문법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대체로 '문해력'은 언어를 통해 말과 글의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해내는 능력을 길러낸다. 우리는 언제나 완전하게 다듬어진 글만 만나고 사는 것은 아니다. 특히 '논문'과 같은 글은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다. 고로 영어에서 중요한 것은 '번역'하는 능력이 아니라, 글을 읽고 글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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