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치즈는 어디에서 왔을까? - 아직도 망설이는 당신에게 스펜서 존슨이 보내는 마지막 조언
스펜서 존슨 지음, 공경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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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념' 그 자체가 아니라, 신념을 선택하는 존재일 뿐이다. 신념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선택할 수 있다. 고로 오래된 신념에 묻혀, 그것이 자아 그 자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신념은 우리를 가둘 수 있다. 어떤 신념은 우리를 주저 앉히고 어떤 신념은 우리를 나가게 한다. 과거의 신념이 꼭 그르지도 않지만, 꼭 옳지도 않다. 그것인 변화하는 시계 바늘처럼 어떤 때에는 꼭 맞다가 어떤 때가 되면 반드시 달라진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시간에 맞게 움직이는 일이다. 아침이 되면 아침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저녁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아침이 되어, 저녁의 일을 하고 저녁이 되어 아침의 일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일관적인 어떤 것은 어떤 시기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변하지 않은 어떤 것은 변화무쌍한 우주의 생태에 따라 반드시 오류를 범한다. 세상만사는 모두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것은 연결된다. 고로 달이 지구를 돌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태양이 은하 중심을 돌고 은하가 우주의 중심을 돌고 있는 만물이 움직이는 역학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바뀌게 되어 있다. 우주 역학을 무시한 채, 변하지 않는 신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신의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일지 모른다. 신념은 고로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움직여진다.

나를 움직여 온 어떤 동력이 때르는 제동력의 원인이 되고, 나를 멈추게 했던 제동력이 다른 이유로 동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를 달리게 만들었던 동력의 힘이 거기서 다한다면, 나를 움직일 새로운 동력원을 찾아 언제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가 쌓은 신념 위의 세계가 동력을 다하고 멈춰 있는 순간, 우리는 가만히 그 동력이작동 될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새로운 동력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세계, 그 세계 밖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장한다. 알은 세계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때가 되면 빈방에는 치즈가 채워진다. 그 불확실한 확신의 아래에 거짓된 신념을 갖는다. 그것이 깨어지기 전까지 그것은 '진리'이며 곧 '세계'가 된다. 세계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비록 신념을 깨어버리면, 세상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아도, 깨어진 신념 밖으로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어떤 경우에는 삶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일을 겪어도, 삶은 무너지지 않고 천지가 개벽할 것 같은 경험을 해도 천지는 개벽하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일상과 세계가 펼쳐지며, 새로운 보통이, 기존 보통을 대체하는 '뉴노멀의 시대'가 시작할 뿐이다. 누군가는 퇴사한 이후의 삶을 상상치 못하고, 누군가는 마스크로 사람의 코와 입을 막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으며, 누군가는 거대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공하는 세상을 상상치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현실'은 언제든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이 일어나고 나면 그것은 곧바로, '현실'의 영역에서 새로운 '현실'이 된다.

사람은 진리에 따라 행동의 영향을 받는다. 진리란 변하지 않는 진실이며, 그것은객관적인 무언가처럼 보이지만, 변화무쌍함이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맞는 진리를 갖는다. 태양이 돌고 지구가 돌고 은하계가 돌고 있는 와중에 혼자서 멈춰 있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전속력으로 세상의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던 얇은 막 안으로 세상을 그린다. 보호 받고 존재의 이유를 가늠한다. 반대로 '알'에 의해 고립되고, 가로 막힌다. 우리를 보호하는 어떤 것은 때로는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이 외부에서 깨어지면 세상이 무너지지만, 내부에서 깨어버리면 성장으로 거듭난다. 사실이라고 믿던 신념은 조현병 환자가 환영과 환청을 닮았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완벽한 논리가 무너지지 않으면 병은 치료되지 않는다. 충분하게 관리할 수 있는 조현 증세가 만성적이고 불치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이유는 환자 스스로 그것을 '병'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 갇혀 환상과 착각으로 세상을 창조하는데, 그 벽이 워낙 공고해서 남편과 부모, 자식, 심지어 의사의 말도 모두 거짓으로 받아들인다. 세계가 공고해 질수록 병은 깊어지며 병이 깊어지면 새로운 세계는 멀어진다.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 중 하나를 집어 삼키는 일은 두려움과 호기심의 영역을 넘어 완전히 또다른 진실을 아는 일이다. 어떤 쪽을 집어 삼키듯 그 둘은 모두 진실로 남는다. 우리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빨간 약을 삼킨 이도, 파란 약을 삼킨 이도 모두 자신의 진리 속 세상을 경험한다.

어둡고 텅빈 방안에 우리를 가두고 있던 신념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의 모험을 하락하게 하기 위해선 고로 자신의 자아와 세계를 완전히 무너트려야 하며 단 하나의 신념만이 자리하고 있는 삶에서 벗어는 것이 중요하다. 믿는 것은 세계를 좁게 만든다. 고로 믿음은 때로는 약이며 때로는 독이다. 어떤 면에서 '의심'은 독이고 다시 어떤 면에서 '약'이 된다. 오랜 신념 아래서 끓는 물의 개구리처럼 우리를 삶아지게 만드는 것은 확고한 신념과 믿음일지 모른다. 끊임없는 의심. 자신의 세계가 진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호기심. 나를 이끌어온 동력이 제동력일 수 있다는 의구심. 이런 것들이 진정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새로운 삶은 좋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선택의 영역이며 이 후에는 받아들임의 영역이다. 고로 열어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외벽을 박차고 나아가던, 시기와 때를 기다리며 현실의 세계에 충실하던 그것은 모두 '신념'의 영역이며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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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노멀 - 폭발적 성과를 만드는 평범한 사람들
주언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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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하면 무엇이 생각날까. 모차르트는? 아인슈타인은? 에디슨은?

아마 천재 혹은 비범한 사람의 대명사로 분류될지 모른다. 그럼 이제 이들이 얼마나 많은 흔적을 남겼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아마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알게 되는 몇 가지 대표 업적만으로 그를 평가하지 얼마나 그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 알지 못한다.

피카소는 평생 2만점의 예술 작품을 창작했다. 모차르트는 짧은 생애인 35년 간 600개의 작품을 작곡했으며 아인슈타인의 과학논문은 240편이나 된다. 에디슨은 혁신의 아이콘처럼 그려지지만 1000개의 특허를 냈다. 핸리포드도 마찬가지다. 핸리포드는 생애동안 161개의 특허를 얻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총 30개 이상의 영화를 감독했다. 클로드 모네는 생애 동안 2500점의 그림을 그린다. 이들에게도 성공 확률은 100중 1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지만, 우리는 에디슨의 발명품은 10개를 댈 수 없고, 피카소의 작품 100개를 기억할 수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위대하지만 그가 연출한 작품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다. 범인인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하고 있는가.

그렇다. 시행횟수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천재로 추앙 받는 이들도 이처럼 다작한다. 많은 시도를 하고 실패를 한다. 그러나 범인이라는 우리는 천재를 추앙하면서 몇 번의 시도만으로 성공을 희망한다. 과연 얼마나 오만한가.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범인이라 말하면서, 천재라 믿고 있는 오만함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회적 성공이나 경제적 성취뿐만 아니다. 우리의 삶을 채우는 많은 현상들은 '시행횟수'에 따라 기회가 특정 확률로 주어진다. 취업 면접, 스포츠 연습, 학습과, 시험, 비즈니스와 창업, 예술 창작 등.

이것은 단순히 돈버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성공 확률'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은 '확률'로 존재한다. 그것은 양자역학도 그렇다 말한다. 다시 말해보자. 모든 것은 확률로 존재한다. 지금 당장 편의점으로 뛰어가서 로또 복권을 구매하면 그것이 당첨될 확률은 814만 분의 1이다. 길을 가는 사람을 잡고 '잠시 저의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개중 '알겠습니다'라고 답할 사람의 확률도 숫자로 존재한다. 시행을 한다면 0이라는 것은 없다. 0이라는 것은 오로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만 존재한다. 고로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최소 0.1%의 확률이라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수학에서는 '큰수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는 고등 수학의 '확률과 통계학'에 나오는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어떤 사건을 충분히 반복하면 그 결과는 그 사건이 일어날 이론적 확률에 무수하게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 확률은 50%다. 몇 번을 던졌을 때는 그 확률은 다를 수 있다. 가령 10번을 던지면 7번이 앞면, 3번이 뒷면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시행 횟수를 천 번, 만 번 던지게 되면 대략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같아진다. 즉 다시 말하면 시행횟수가 많으면 그 확률에 비례하여 반드시 원하는 값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성공확률이 1%인 경우 100번의 시행 횟수를 가지면 성공 확률은 100에 수렴한다. 0.1%의 확률인 경우, 1000번의 시행횟수를 가지면 성공 확률은 역시 100에 수렴한다. 확률을 바꿀 수 없는 게임에서 유일하게 그 게임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것은 '시행횟수'다.

세상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확률'을 바꾸는 것을 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의 시행 횟수를 늘리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운'에 의해 성패가 결정되는 일인 경우가 그렇다. 다만 세상만사는 모두 '운'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은 아니다. 세상에는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일도 무수하게 많다. 그렇다면 노력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노력'의 수치를 높이는 일은 이렇다. '시행횟수'를 높이는 일이다. 다시말해 '시행횟수'를 높이는 일은 어떤 일에서도 반드시 중요하다. 이런 미련하고 바보같은 일은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과 닮았다. 우리가 때로는 경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인공지능'은 생각보다 '미련하고 무식한 수준'의 시행횟수를 가진다.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첫째, 대응한다. 둘째, '그렇다'와 '아니다'를 구분한다. 셋째, '아니다'인 경우, 다시 대응한다. 그리고 '그렇다'와 '아니다'로 구분한다. 이것을 무한에 가깝게 시행하며 하나의 표본값을 구하는 일이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시행'하는 일이며,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다시 시행하는 것'이다. 그 뿐이다. 그것이 인공지능이 정답에 수렴하는 대답을 내어 놓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이 '신'이 숨겨 놓은 유일한 '기회'를 찾아내는 일이다.

이렇게 쉬운 일에 우리는 때로 지나친 '감정이입'을 한다. 즉 어떤 일에 대해 '실패'를 했을 때, 단순히 '다시하면 된다'라는 옵션을 우리는 선택하지 못한다. 때로 그것은 경제적인 이유일 수도 있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심리적인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편향'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건보다 부정적인 사건에 더 강하게 반응하고 오래 기억하는 성향을 가진다. 대부분의 주식투자자가 겪는 투자 손실은 이런 심리적인 이유로 발생하기도 한다. 투자자는 요동치는 투자 차트에서 내려가는 차트에 더 큰 반응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시행횟수. 그리고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패에 담담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원대한 꿈'을 매일 같이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뉴질랜드 등반가인 에드먼드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최초로 오른 사람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토록 높은 산을 오를 수 있었습니까?'

이에 그는 답한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올랐다."

유격 훈련이 끝난 뒤, 돌아가는 유격 행군에서 나는 그 거리가 그렇게 멀었다만 아마 중간 정도쯤 좌절 했을지 모른다. 다만 내가 그 고된 훈련을 마치고도 행군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이 다음 고개까지만 가자'와 '아무런 감정없는 앞 녀석의 군화발' 때문이다. 그냥 한걸음을 걷고, 그냥 다음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고로 열심히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냥하는 것이다. 그냥하는 것은 어찌됐건, 하게 한다. 하나의 시행횟수를 더 높이며, 실패시에 심리적 데미지를 입지 않는다. 데미지 입지 않은 심리는 다음 시행을 하도록 독려한다. 그렇게 다음 시행이 이뤄지고 다시 실패하고 다시 실행하는 과정에서, 내가 성공에 닿을 가능성은 100에 수렴한다. 모든 비범은 수많은 평범 위에 쌓여진 결과다. 다시 말하면 모든 평범은 비범의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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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고 불편하지만 성교육을 시작합니다 - 자녀가 건강하고 행복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포괄적 성교육’
류다영 지음 / 모모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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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적으로 보면 원래 원숭이는 사족보행했다. 이는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다. 고대 유인원의 서식지는 숲이었다. 고로 나무가 많은 지역에서 나무 위 생활을 하던 원숭이는 환경이 급작스럽게 변하면서 나무에서 내려와야 했다.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지역을 위해 이동해야 했다. 그 결과, 원숭이 중 척추가 곧고 이족보행이 가능한 돌연변이들의 생존가능성이 더 높았다. 생존한 종들이 세대를 거치면서 인류는 점차 이족보행을 하게 된다. 척추가 곧게 펴졌다. 오래 걷기 위해 '털'은 얇고 짧아졌다. 이런 털없는 원숭이는 기존 원숭이와 아주 확연하게 다른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성기 노출'이다. 이는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은 '데즈먼드 모리스'의 대표작 '털없는 원숭이'에 나오는 동물학적 인간론이다. 직립보행으로 인해 인간 성기에 일어난 변화는 주로 남성의 성기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간 남성의 성기는 다른 대형 유인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고 뚜렷한 형태를 가지는데, 그로인해 번식과 인구의 증가가 뚜렷해진다는 가설이 있다. 초기 인류에게 '번식'은 꽤 커다란 리스크를 갖는 일이다. 인간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바로 걷기 시작하는 다른 포유류와는 다르게 종일 울기만하고 먹기만 한다. 또한 어두운 밤, '포식자'에게 위험을 노출하는 일이고 여성의 노동력을 무한대로 소비시킨다. 고로 인간의 성행동은 복잡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됐다. 이어 옷을 만들어 입고 중요부위를 가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필수 생존전력과 닮았다. '성'이 '사회적 수치심'이라는 것은 동서양 할 것 없이 꽤 보편적이다. 초기 인류에게 '성'은 '위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성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책임'을 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난자와 정자가 어떻게 만나는지, 아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공부하는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자연계에서는 '난자'와 '정자'의 개념은 물론 아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지 못하는 모든 생명체가 있다. 그것을 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면 '성교육'은 그저 지적 호기심의 영역의 일부분일 뿐이다. 앞서 말한대로, 초기 인류에게 '성'은 '위험'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을 가만할 책임을 질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고로 무분별한 번식은 '사회 전체'에 '악'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현대 우리 사회라고 다르지 않다. 사회가 복잡해 질수록 '성'에 대해 숨긴다. 가령 아프리카의 다양한 국가들은 여성의 첫 결혼 연령이 20살이다. 중앙 아프리카의 차드 또한 결혼 평균 연령은 19세로 매우 낮다. 19세기 한국의 결혼 평균 연령도 여성이 17.5세, 남성이 17.9세로 매우 낮았다. 21세기 오늘날 한국의 평균연령은 33.2세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이는 아이 가지는 것이 사회가 복잡할수록 '위험'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교육은 물론 중요하다. 다만 그것은 단순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연령대에 걸쳐 필요한 교육이다. 그것의 책임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해야 한다. 모든 어른들은 '아이들의 성지식'을 걱정하지만 따지고보면, 어른들의 '성지식'도 그닥 훌륭하지 못하다. 그런 어른이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성'에 대해는 아주 학문적인 지식까지는 필요치 않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은 '성교육' 없이 자라고 번식한다. 인간계에 그런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앞서말한, '성'에 의해 발생하는 제도와 법률, 윤리적 문제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에 대해 모르고, 여성이 남성에 대해 모르는 것은 '자연 질서'에서 당연하다. 인간 사회는 자연과 다르게 이성이 섞이고 다양한 구조의 조직도 만들어 낸다. 뿐만 아니라, 각 나이마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사회의 자리가 있다. 자연계에는 없는 윤리적, 사회적 질서도 있다. 그것을 넘어서지 않기 위해 적당한 규제다. 아이들의 성은 나쁘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른에게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 사회의 출산률이 낮은 이유도 비슷한 이유다. 책임지지 못할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고대 시대에 인류에게 있던 심리적 위협이 사회가 복잡해진 현대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 날씨 문제로 실내에서 체육활동을 한 적 있다. 당시 선생님은 갓 장가를 갔던 젊은 남선생님이셨다. 수업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에 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체육'에 관한 혹은 신변잡기적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한창 진행하다가 학생 중 한명이 '성'에 관한 농담을 했다. 남자 선생님은 갑자기 수업을 멈추고 말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네."

갑자기 수업은 '성교육 시간'으로 바뀌었다. 수업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성인이 된 지금 돌이켜 보건데, 위험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이야기였다. 당시 선생님은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칠판에 그려놓고 그 구조를 설명했다.

'이곳은 이렇고, 저곳은 저렇다'

앞뒤 상황에 전혀 기억에 나질 않는데, '딱' 그 부분만 기억에 선명하게 난다. 아마 그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남들보다 사춘기가 늦게 왔다. 얼마나 무지했던지 마치 '에어로졸'처럼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서 잠만 자더라도 공기를 통해 '아이'가 덜컥 생겨나는 줄 알던 시기다. 그때도 '가정'이라는 과목이 있었고, 교과과목에는 '성교육'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교육'의 이름으로 포장된 '성'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같이 '성'은 현실이 아닌 어딘가에 있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성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선생님들은 얼마 뒤 '시청각 자료'를 들고 왔다. 남 선생님이 수업은 '위험한 선'에 근접했고, 여 선생님의 수업은 '선'에 근접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민감한 질문에는 둘러 표현하기 급급했다. 어른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더 즐기는 듯 보였다.

성에 대해 다양한 생각이 존재한다. 물론 부모로써 아이에게 쉬쉬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다만 불필요한 간섭 또한 필요치 않다. 부모가 아이를 꽤 늦은 나이까지 끼고 사는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불협화음일 뿐, 원래 성에 대해 인지를 할 때부터, 자연계는 성인이다. 어느 포유류도 자녀에게 성교육을 시키진 않는다. 성은 그 나이에 맞춰 본능적으로 알아가게 되어 있다. 다만 앞서 말한대로, 거기에 따른 책임과 역할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성교육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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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의 실종자들
한고운 지음 / 모모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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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게 MBTI에 꽂혀 있다. 남들은 이미 관심이 시들해진 이들도 있지만 요즘 한참 심취해 있을 때가 있다. 별자리나 혈액형별 성격유형, 이런 류의 것을 잘 믿지는 않지만 어쩐지 MBTI는 사람을 파악하기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검사를 하면 딱 두 유형이 나온다. INFJ, INTJ. 이 두 유형은 번갈아가며 나온다.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나오곤 한다. 실제로 이 두 유형의 성격을 모두 내가 갖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읽는 책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철학'이나 '종교', '사회', '에세이', '시'와 같은 글을 심취해 읽을 때는 감성적으로 변했다가, '과학', '추리', '인문학'을 읽으면 이성적으로 변한다. 어떻게 70억의 인구를 모두 16개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어떻게 100년의 삶 중 일부만 떼어다가 그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남이 아닌 자신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누군가와 함께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최근 겪었는지와 무관하게 일관적일 수 있겠는가. 그런 물음을 갖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정도 나를 남에게 소개하는데 간편한 방식은 맞다는 것이다. 장황하게 MBTI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책을 선정하는 기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을 매우 좋아한다. 이것이 INTJ가 좋아하는 도서라는 글을 보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분명 그러하긴 하지만, 나는 철학적이고 사유적인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감성적인 글을 좋아하기도 한다. 고로 나는 INFJ와 INTJ 유형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는 아무개라고 보여진다.

지난 이틀은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쏟아지다가 맑게 개이기를 반복한다. 하늘을 보아도 구름은 희다가, 검다가를 층층이 쌓고 있다. 회색층 없이 층층이 쌓인 하늘에 따라 눈은 내리다가, 그러지 않다가를 반복한다. 날이 싸늘하게 추운데, 가장 좋아하는 가수 '성시경'의 음악을 틀고 '헤이즐넛 커피'를 내린다. 커피가 내려가면 안락 소파에 앉아 책을 잡는다. 꽤 감성에 젖어 그럴싸하게 폼잡고 커피와 책을 들고 마신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니, 자세는 완전 엉망이다. 무거운 머리는 대충 삐딱하니 두고 다리 한 쪽은 의자 밖으로 꺼내어 꼼질 꼼질 거린다. 그러다 지나가는 아이의 머리에 발을 콩콩 찧는다. 아이가 덤벼들만 한참을 놀다가 다시 책에 집중한다. 어제 오늘 읽은 책은 '규슈의 실종자들'이다. 소설은 꽤 가볍다. 쉽게 말하면 인물의 성격도 평면적이고 서사도 단순하다. 고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주제는 흥미롭다. 갑자기 사라진 이들에게 오는 분홍색 편지. 그 편지의 발신이가 이미 죽은 이라는 설정이다. 최근 읽었던 '러브레터'나 드라마 '더 글로리'를 닮았다. 배경은 '일본'이다. 등장인물은 '일본'과 '한국'의 중간 쯤 되는 재일교포다.

소설의 내용과 별개로, 중간의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조예가 깊다. 앞서 말한대로 나는 INFJ와 INTJ의 중간 쯤 되는 인간이다. 불경에서 철학적 사유를 깨닫고 성경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길 즐긴다. 그렇다고 신을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성별은 남성이지만 보통의 남자와 대화 주제가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느낀다. 해외에서 외국인도, 현지인도, 그렇다고 영주권자도 아닌 모호한 지위로 10년이나 살았다. 한국을 잘 모르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한국에 대해 잘 아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안다. 영어를 잘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고, 영어를 못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다. 그런 모호함이 결국 나의 명확한 정체성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소설에 등장 인물 일부는 '일본 이름'이다. 일본 추리를 좋아하는 편이라, 거부감 없고 오히려 집중이 된다. 이 소설이 조금 각별하게 읽혀지는 이유는 '작가소개'에 있다. 한고운 작가는 이 작품이 첫 작품이다. 일본 여행에서 이 소설을 쓰고자 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설은 읽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오탈자가 보인다. 인간적인 습작의 흔적이다. 2년이 넘도록 묵혀 놓은 '소설'이 한 편있다. 그 전에 10년이 넘도록 묵혀 놓은 작품도 있다. 다만 나의 글은 출간하지 못했다. 이유라면 글이 조금 어려워진 탓일 것이다. 어려운 글은 때로 좋은 글처럼 보여지지만 좋은 글은 쉬운 글이다. 고로 이미 써내려간 글을 어떻게 쉽게 바꿔야 하나가 나의 숙제다. 개인적으로 '소설 출간'에 동경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나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작가의 글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 사람들은 어떤 노래를 들으면 잠깐을 듣고도 '누구의 노래'인지 알아 맞힌다. 김훈 작가의 글처럼 담백한 글 종류라면 몇 문장을 읽고도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이고'나 '하루키' 또한 자신만의 명확한 색채를 가진 작가다. 책을 고를 때, 단순히 '작가'만 보고 고른다는 것은 꽤 징명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이를 찾았다는 의미다.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동경하게 되는 것은 독자로써도 뿌듯함이 생기는 일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가 숨겼던, 그렇지 않던 의미있는 바를 찾을 수 있다. 정의로운 가면 뒤에 있는 과거, 누군가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선택했던 어떤 잘못, 그 위로 쌓여지는 진짜와 가짜의 겹겹이 때로는 눈을 뿌리고 때로는 햇살을 내리는 오늘의 날을 닮은 것 같다. 소설은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추리를 좋아하는 이들이게 가벼운 '스낵' 같은 글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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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코치도 커리어 고민을 합니다 리얼커리어 시리즈
남상은 지음 / 리얼러닝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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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한석규 님은 손석희 뉴스룸에 출연하여 직업과 나이에 대한 자신의 철학에 대해 말했다.

"배우의 좋은 점은 나이 먹는 것을 기다리는 직업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나이에 따라 자신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 60이 되어서, 70이 되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이 있고 그때를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는 직업이라고 했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 앞으로 더 나이 많은 사람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배우'의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배우 한석규는 20대에 영화 '닥터봉'으로 데뷔한다. 그 뒤로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종횡무진한다. 이제 환갑의 나이가 된 그가 다시 그런 역을 맡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그가 맡게 될 역은 무수하게 많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이다. 그 시기마다 맞는 옷을 차려 입는 일이다. 고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옷을 입는다은 쉬운 일도 아닐 뿐더러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 대부분은 그를 '배우'로 기억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렇게 일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배우가 되기 전, '성악가'가 꿈이었다. 실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중창단 활동을 했으며 학창시절에 그 재능를 주변에서 인정 받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배우의 꿈을 꾸었으나 실제로 그는 배우가 되기 전까지 1년 6개월 간, 성우로 활동한다. 사람이 다변적인 이유는 '삶'과 '세상'의 모양이 다변적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단 하나로 정의하는 것은 고로 의미가 없다.

우리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미국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다만 링컨이 대통령으로 기억하지만, 링컨은 1861년 3월 4일부터 1865년 4월 15일까지 4년 1개월만 대통령으로 임기를 보냈다. 그는 어린 시절 부터 가족 농장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잡역을 했으며 뉴세일럼에서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1833년에는 일리노이주 새그몬 카운티에서 측량사나 우체부로 일하기도 했다. 그가 가장 오랫동안 한 일은 '대통령'이 아니라, '변호사'다. 그는 1836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무려 24년 간, 변호사로 활동한다. 그러나 '링컨'의 정체성에 대해 떠올리기에, 우리는 '변호사'보다는 '대통령'이 먼저 떠오른다.

'바루흐 스피노자'하면 우리는 '철학자'가 떠오른다. 다만 그의 직업은 '렌즈 연마사'였다. 그는 망원경용 렌즈를 연마하는 일로 소득을 얻었고 그 전에는 가족의 무역 사업을 돕기도 했다. 그가 렌즈 연마사로 일한 기간은 생각보다 짧지 않은데, 대략 20년 이상 일한 것으로 추정한다. 아이작 뉴턴도 그러하다. 뉴턴은 우리에게 물리학자로 유명하지만 그가 가장 오랫 동안 일한 곳은 '영국 조폐국'이다. 그는 1696년 영국 조폐국 감독관으로 일을 시작했으나, 이후 관장으로 승진였다. 뉴턴은 사망 전인 1727년까지 약 30년 이상 이 직책에서 화폐 위조를 막는 책임자로 일했다. 이런 예시는 너무 많다. '진화론' 하면 떠오르는 '다윈'은 '지질학자'였다. 전화기 발명가로 유명한 '그레이엄 벨'은 청각 장애인을 위한 교육원이었다. 그렇다. '사람'의 정체성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커리어'라는 것은 '무'를 잘라내듯 동강낼 수 있는 어떤 성질이 분명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한다. 남들은 명확한 진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자신에게만 그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부분 우리가 누군가의 '정체성'이라고 알고 있는 모습은, 실제 그의 인생에서 아주 극한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일관적인 진로로 커리어를 쌓지 않는다. 누군가는 축구선수를 하다가 장사를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교사를 하다가 작가가 되기도 한다. 고로 사람의 정체성을 '직업'으로 한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그것이 불안정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싶어한다. 아마 이것이 우리 사회를 '전문직 선호 사회'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다만 자신의 미래와 커리어는 죽기 직전까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 고민은 나에게도 꽤 숙제였다. 농사를 짓기도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기도 하고, 글을 쓰거나, 사업을 하기도 한다. 모든 정체성이 나를 포함한다. 과거에는 명확한 무언가의 색체를 갖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다. 다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꽤 다면적인 삶을 살았다. 고로 기회란 다양한 경험과 도전을 겪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커리어 코칭' 또한 '커리어' 고민을 한다. 누군가를 '코칭'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완전한 이'가 아니라, 비슷한 고민을 해 본 이들이어야 한다. 만약 '커리어 코치'가 '커리어'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더라면 누군가를 코치할 자격이 없다. 다만 '코칭'은 분명하게 '도움'을 주는 역할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자신의 내면 속에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가르쳐보면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모두 스스로 갖고 있다. 떠먹여 입속으로 쑤셔 넣어도 소화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능동적인 자세'는 몹시 중요하다. TV를 보면 알아서 정보를 뇌속으로 꽂아준다. 다만 '책'은 그렇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는 이들이 조금더 능동적인 자세를 갖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찾아야 하고, 읽어내야 하며, 그것을 사색해야 하는 일이다. 광부가 금을 캘 수 있는 것은 금이 찾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금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서 '스스로 찾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다만 먼저 고민해 본 이들이 고통을 공감해주는 것은 새로운 길을 안내해주는 것만큼이나 커다란 힘이 될 때가 있다. 커리어 코치는 고로 공감능력과 경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어쨌던 진로 고민은 특별히 당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로 고민이 든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말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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