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의 이동 경로
김화진 지음 / 스위밍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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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장점은 살아보지 않은 삶을 겪어보는 것이다. 2006년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라는 소설을 읽었다. 책은 인식의 변화를 줬다. 주인공은 '살안자'의 동생이다. 살면서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입장이다. 게다가 '살인'이라면 어떤 변명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가 아니던가. 다만, 선과 악은 그렇게 칼로 무자르듯 잘라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악마'라기 보다 매우 인간적이었다. 느낀바는 이렇다.

'살아보지 않고서는 그 입장을 알 수 없다.'

사람은 보는 만큼 성장한다. 조선 시대의 누군가가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을 갖고 있더라도 '화성이주'를 생각해 낼 수는 없다. 결코 알지 못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각을 할 수는 없다. 모두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를 확장할 뿐이다. 고로 사람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은 매우 각별한 경험이다.

2022년 한해 동안, 대한민국에서는 585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585건의 사건이다. 이는 '피해자'뿐만아니라 '가해자'도 만들어 낸다. 즉, 한해 1000명이 넘는 살인 피해자와 살인 가해자가 만들어진다. 성폭력은 3만건, 그러니까, 6만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매녀 만들어진다. 절도는 27만 건이다. 이또한 50만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들어진다. 고로 그 만큼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1922년 소련 최고 위원회에서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 백 명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다."

숫자는 비극의 크기를 함시하지만 그것은 깊이를 말하진 못한다.이 비극에는 감정이라는 깊이가 철저하게 배제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선을 행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에도 여지는 존재한다. 비록 많은 이들을 설득할 수는 없을 지라도 각자 자신만의 이유를 가진다. 고로 이유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는 그렇다. 최초에는 사건을 다룬다. 다음에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이후부터 명확한 '선과 악'이 등장한다. 명확하게 '나쁜 사람'과 명확하게 '좋은 사람'이 나눠 등장한다. 다만, 진행하면서 작가는 각각의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모든 인물의 과거나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그 인물이 행동한 이유의 인과관계가 펼쳐 보여진다. 비로소,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한다. 물론 여기서 '그럴수도 있겠구나'하는 것은 '상황상'을 말한다. 모두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선과 악은 존재한다. 다만 이것은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개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선한 인물도 수없는 살상을 해치는 악인이다. 농장주는 어떤 면에서 '선하고 근면한 인물'로 보여지지만, '환경' 혹은 '자연'의 측면에서 사악한 인물로 보여진다.

고로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이처럼 다면적인 것이 인간이다. 고로 현상이나 상황을 그려내는 것보다 '내면'을 그려내는 것이 훨씬 복잡하고 흥미롭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 그럴싸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도 이를 알려준다. '악의 평범성'은 유대인 말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며 제시한 개념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그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공무원일 뿐이다. 다만 그 결과는 '악'이 된다. 고로 악의 근원은 평범한 곳에 있다고 '한나 아렌트는 주장했다. 이는 악의 근원을 찾는 과정에 제시된 개념이지만 더 깊게 따지고 보자면, 본래 '악'은 외부적으로만 보여질 뿐이다.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민의 29.8%가 전과자다. 다시 말해, 국민 세 명 중 한 명은 전과자다. 현재 대한민국 교도소 수감자수는 5만명이다. 다시말해, 지금 이순간 교도소에서 수감 중인 사람은 1000명 중 한 명이다. '전과자'를 나쁜 사람이라고 정의하면 대한민국에 선한 인물은 셋 중 둘 뿐이다. 수감자를 1000이라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1000명 중 한명은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을 모두 나쁜 사람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범법 혹은 범죄와 '악'은 같지 않다.

모든 '악'을 '악'으로 정의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악'과 '선'이 공존한다. 우리는 내면을 보지 못하기에 그의 겉모습으로 '악'과 '선'을 구분한다. 그 사람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우리는 그 내면을 보지 못한다. 그저 가늠하거나 넘겨 짚을 뿐이다. 각자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느 순간, 이느 공간에서 만나게 된 단면끼리 그 역사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나를 보더라도 그럴 것이다. 예전 미국의 TV광고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한쪽은 우울해 하는 인물이 있고, 한쪽은 스포츠를 관람하고 소리를 지르며 평범한 삶을 즐기는 사람의 모습이 대조되어 있었다. 그 광고는 결국 '우울증으로 자살한 인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스포츠를 관람하고 소리를 지르며 평범한 삶을 즐기던 사람이 갑자기 삶을 떠났다는 이야기었다. 그렇다. 내면은 모른다. 고로 소설의 가장 특장점이라고 한다면, 누군가의 복잡한 내면을 아주 잠시라도 훔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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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수학 3 - 2015 개정 교육과정 고등 생강 시리즈
김민재 외 지음, 해뜰날 그림 / 스터디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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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보자. 우리의 앞에 마법의 상자가 하나 있다. 이 상자는 꽤 특혈한 상자인데, 우리가 이 상자 안에 무언가를 넣으면 그 상자는 그것을 다른 물건으로 바꾸어 버린다. 예를들어 상자 안에 사과를 넣으면, 상자는 그것을 바나나로 바꿔 버린다. 그것에 규칙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로 마법의 상자다. 다만 그것에 규칙이 주어지면 그것은 '함수'라는 수학 용어가 된다.

수학에서 함수는 이 상자와 같다. 우리가 '입력'으로 무언가를 넣으면, 상자는 그것을 '출력'으로 뱉는다. 결국 그 상자는 출력에 따른 결과값을 도출해주는 장치다. 불교 철학에서는 이것을 인연과보(因緣果報)라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의미다. 원인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아무것도 넣지 않았음에도 결과값이 출력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히 '우주의 규칙'이라 할 수도 있다.

다시 함수로 돌아가보자. 어떤 숫자를 입력하는 '상자'가 있다. 이 상자에 숫자 2를 넣으면 상자는 곧 4를 출력한다. 다시 4를 넣으면 이 숫자는 다시 8을 출력한다. 여기서 일정한 규칙을 발견한다. 넣은 값에 2배를 출력한다는 것이다. 함수는 규칙을 따른다. 그렇다. 함수는 항상 일정한 규칙이나 방법에 따라 작동한다. 그저 마법과 같이 어떤 일이 그저 출력되는 것은 없다. 어느 순간에는 3이 출력되고 어느 순간에는 -2가 출력되고, 다시 어떤 순간에는 20억이 출력되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상자에 몇 번의 값을 입력해보고 대략적인 함수의 규칙을 알아차린다. 함수에서 중요한 것은 그 규칙을 알아내고 입력값에 어떤 출력값이 나오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무한한 가능성의 함수로 시작한다. 시작과 동시에 우리는 환경, 가치관, 교육 이라는 초기 조건이 설정된다. 이는 우리 인생 함수를 형성하는 기본 매개 변수가 된다. 인생에서 변수는 변화를 의미한다. 경험이나 관계 직업, 건강 등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리고 각각의 흔적은 하나의 점이 되어 좌표평면에 그려진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 곡선을 만들어낸다. 반면, 상수도 존재한다. 우리의 핵심 가치와 신념이다. 이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일관성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 함수에 균형을 잡아주고 방향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함수. 이것은 왜 중요한가. 어떤 현상이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은 분명 존재한다. 가령 물이 끓는다던지, 물이 얼어버린다던지, 그것은 분명 어떤 변화지점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임계점'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모르고 있을 때는 막연한 자연현상이었지만, 그것의 정확한 수치를 숫자로 알고 있는 순간부터 그것은 무한대로 이용가능한 재료로 변신한다. 원래 '무지'는 공포의 영역을 확산하고, '앎'은 안정의 영역을 확산한다. 이처럼 임계점을 구하는 하나의 과정을 '극한'이라고 한다.

극한에 대해 살펴보자. 마냥 1과 가까운 숫자에 대해 살펴보자. 누군가는 2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1과 가장 가까운 숫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1.5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1과 가장 가까운 수는 아니다. 다시 누군가는 1.1을 말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1.01을 말할 것이다. 이처럼 1과 가까운 숫자를 무한대에 가깝게 생성한다고 해보자. 극한은 우리가 얼마나 1과 가까워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숫자들은 함수에 넣었을 때, 그 출력값의 변화도 함께 일어난다. 그 값이 얼마나 특정값에 가까워지느냐.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극한'이다. 극한을 사용하면 우리는 변화지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다리를 건설할 때, 그 다리가 견딜 수 있는 최대 하중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막연한 공포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다리를 건너는 것과는 꽤 큰 차이를 만든다. 극한은 숫자를 이용하여 그 값을 계산케 한다. 우리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지 않은 음식을 먹기에 망설여진다. 우리의 심리적 마지노선은 불분명한 아지랑이일 때, 더 줄어드는 법이며 그것이 적당히 '보임'의 영역으로 존재할 때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결국 우리의 삶도 비슷하다. 우리의 삶에서도 중대한 전환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혼인일 수도 있고, 직업일 수도 있다. 사업상의 실패일 수도 있고, 출산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것ㄷ르은 우리 궤적에 대한 극적인 변화를 만든다. 이 전환점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가치를 갖게 될지 결정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 값에 모호한 태도를 가지는 것과 규칙을 파악하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함수처럼 인생은 끊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우리의 인생함수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앞서말한대로 '공포'의 영역이 된다. 다만 그 공포는 '일정부분 예측 가능한 공포'다. 무지한 것을 모르는 것과 무지한 것을 아는 것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고로 이런 불확실성은 불확실성을 아는 확실성으로 전환하므로 공포에 대한 공포를 상실케 할 수 있다. 고로 우리는 공포를 아는 영역으로 만들어 그 변화의 공포를 호기심으로 바꿀 수 있다. 이는 인생을 흥미진진하고 가치있는 게임으로 만들어낸다. 결국 복잡한 수학은 결국 얽혀 있는 여러가지의 문제 덩어리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 모두가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다. 결국 '문제'를 많이 접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해결 능력을 많이 갖고 있다는 의미다. 삶도 공부도 모두 함수를 닮아, 어떤 값을 입력해야 특정값을 얻게 된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어떤 값도 도출하지 않으면, 어떤 값도 나오지 않는다. 고로 수학은 '대학 입시'만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게 하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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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야 - 나는 중졸 작사·작곡가
오카지마 카나타 지음, 정은희 옮김 / 리틀에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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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에는 10대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고통 스러울 때는 고통스러울 때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심심할 때는 심심할 때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마찬가지로, 그때의 감정이 오롯한 흔적이 됐을 때, 그 글에서만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고로 자신의 오늘과 지금의 감정에 충실한 글을 쓰다보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시계 바늘이 어느 순간 하나 둘, 맞아가며 완전히 이기적인 글들이 결국은 강력히 이타적인 글들이 될 것이다.

몇 년 전 썼던, 글에 댓글이 달렸다. 힘든 시기에 위로를 받았다는 글이다. 돌이켜 읽어보니, 내가 썼던 흔적은 분명하나, 시간의 탈것을 타고 한참을 벗어난 지금, 나는 그 생각과 감정, 주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지 오래된 후다.

글 주인도 잊어버린, 주인 없는 글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썼던 지난 5년의 흔적이 광선을 타고 빛의 속도로 뿌려진다. 그것들은 형체없는 클라우드로 두둥실 떠다니다가, 우연하게 누군가의 가슴에 꽂히는 모양이다. 내가 받은 어떤 감동도 주인이 잊어버린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된 발라드를 하나 들었다. 가만히 상념에 젖어든다. 다시 생각해본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과연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을까.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와 작사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가. 나에게 적잖은 감동과 위로를 주던 음악의 원주인들은 아마 그들이 남긴 흔적과 다른 '감정'과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정작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만 보더라도 헛웃음이 나질 않던가. 마치 그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느 귀여운 아이의 일기장인 것 마냥 하지 않던가. 그러고보면 나는 그저 '매순간의 나'로만 존재할 뿐, 지나온 '나'와 마주할 '나'는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일지 모른다. '나'는 무수하게 바뀌어가는 '감정'이라는 점의 연결선일 뿐이다. 고로 과거의 나의 흔적을 밟고 찾아온 누군가의 '비난'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며, 앞으로 다가올 나의 경로를 걱정하는 누군가의 '걱정'도 이미 '나'의 것은 아니다. 나의 것은 오로지 지금이 이순간 여기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지적한 일이 나에게 울림을 주듯, 누군가의 '비판'에도 배움을 갖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걱정하는 일에도 '깨달음'을 얻듯, 누군가의 '걱정'에도 응원의 힘을 받는다. 진로라는 것은 내가 설정한 방향일 뿐이지, 정답은 아니다.

돌을 쥐고 어느 방향으로 던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 방향으로 던지면 좋다. 던져서 목표물을 맞혀도 좋고, 맞추지 않아도 좋다. 쥐었던 돌을 다시 제자리에 두어도 괜찮다. 그 돌을 주어다가 반대 방향으로 던저도 괜찮다. 삶은 그저 내가 설정한 방향으로 진행해 보겠다는 일종의 '놀이'일 뿐이다. 우리는 어제의 내가 던진 지도를 받고 오늘을 움직이며, 내일의 나에게 그 방향을 지도할 뿐이다. 삶은 어제와 오늘 내일이 주고 받는 릴레이 경주일 뿐이다. 그러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내일의 나는 언제나 같지 않으며 그것을 인정한다면 과거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가 사라지고, 내일의 나에 얽매일 이유가 사라진다.

고로, 오늘, 지금, 여기의 나에 대한 글을 써라. 그것은 나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길라잡이이며, 누군게에게는 아주 적절한 위로이며, 누군가에게는 충고가 되고 다시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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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있다는 착각 - 성적의 판도를 가르는 뇌 최적화의 기술
대니얼 T. 윌링햄 지음, 박세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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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억은 무엇을 위해 진화했는가. 그것을 알면 학습에 대한 본질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뇌는 '문자'를 암기하기 위해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은 '공간'을 인식하고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진화됐다. 고로 학습을 위해 가장 기피해야 하는 일은 문자를 그저 암기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이야기'와 '공간'을 기억하도록 진화됐다. 쉽게 말해, 인간의 기억은 '문자'보다 '이미지'나 '서사'가 중요하다. 우리의 정보 처리 방식은 생존을 위한 필수 장치였다. 쉽게 말해 우리 사피엔스 종은 복잡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억'이라는 장치를 진화 시켰으며 이것은 '사냥, 탐색, 물건의 위치'를 기억하는데 필요했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하기 위한 감각은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기억'이다.

사피엔스는 하나의 개체일 때는 매우 연약하다. 이들이 생존하기 위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사회화'를 이루는 일이다. 고로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전달되는 지식과 경험을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하곤 했다. 이런 서사적인 요서들은 감정적 연결을 통해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면 이것을 학습에 적용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의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단순히 문자를 암기하는 대신, 정보를 시작적으로 표현하고 스토리텔링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정보를 기존 정보와 결합하게 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연결한다. 실제로 우리는 문학 작품의 한문단을 암기하는 일은 어려워 하면서 '예술 작품' 하나를 기억하는 일은 비교적 쉽게 한다. 세계의 지형을 알기 위해서, '문자'가 아니라 '지도'라는 표식에 더 효과적인 도움을 얻는다.

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어떤 학습법이 효과적인지 살펴보자.

첫째, 학습목표를 살핀다. 학생들의 대부분은 대체적으로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라는 본질을 놓친다. 가령 어떤 누군가가 '땅을 파세요.'라는 지시를 했다고 해보자. 왜 그 일을 해야하는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업무능력과 효율은 매우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해서 수로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는 사람은 능동적으로 비탈길을 잘 이용할 것이고 어떤 경로로 땅을 파야하는지, 어떤 깊이로 땅을 파야하는지 생각하며 일을 진행한다. 다만 그저 지시에 의해 '땅을 파는 이들'은 막연한 목표에 회의감을 갖게 된다. 고로 '목표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가령 예를 들자면 '미적분'을 예로 들어보자. 단순히 공식을 외우고 거기에 숫자를 넣어서 그것을 풀어내는 이들과, 차후 로켓 공학에서 로켓의 역학, 짧은 거리로 자동차의 속력를 확인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수학적인 접근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의미로 '미적분'을 접근하는 이들은 완전히 다른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낸다.

둘째, 마인드맵을 활용한다. 마인드맵이란 하나의 거대 뿌리에서 시작해서 가지를 치며 세부정보로 연결되는 일을 만한다. 이런 마인드맵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전체 그림'을 살펴야 한다. 전체의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 묶을 수 있는 커다란 뼈대는 어디에 있나. 바로 '목차'에 있다. 즉, 공부를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인 '목차'를 알아야만 한다.

'책의 목차'를 살피면, 목차에는 커다란 대주제 1, 2, 3 으로 나눠져 있다. 교과서를 집필한 필자는 총 세 단계의 절차에 따라 커다란 주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커다란 주제 하위에는 각각마다 1, 2,3의 중간 주제가 있다. 각각의 주제에 다른 주제가 이어지는 것이다. 다시 각각마다 1, 2, 3이라는 세부 제목으로 나눠진다. 이 세부 제목으로 나눠지면, 각 제목마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 키워드'가 있다. 그것을 살핀다. 그것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서 커다란 마인드맵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아~ 이런 식으로 각각의 주제들이 연결되는구나."

하나의 책이 말하고자 하는 전체의 그림이 완전하게 파악되면, 교과서를 소설책 읽듯, 정독해 나가면 된다. 이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다보면 전체적인 흐름이 이해된다. 인간의 기억은 이렇게 정보를 입력할 수 있다. 다만 인간의 진화는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사회화'의 결과물이다. 고로 우리는 받아들이는 일만 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달'하는 일이다. 고로 인풋보다 아웃풋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게 세번째 요소인 '가르치기'가 필요하다.

셋째, 가르친다. 모든 학습 방법 중 가장 확실한 학습방법은 '가르치기'다.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다. 사피엔스는 자신이 경험한 일과 알고 있는 정보를 섞어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인간의 진화는 남에게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진화해 온 것만이 아니라는 의미다. 사회는 대체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하는 이'보다는 '도움을 주는 이'를 필요로 한다. 고로 더 많은 정보를 세세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이들은 사회의 필요 구성원으로 인정되어 꼭 생존에 유리했다. 고로 우리는 남을 잘 가르치도록 진화했으며 남을 잘 가르칠수록 생존 확률이 높고 그러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르치는 과정의 학습능력을 길러왔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공부 방법은 '시간'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아무리 허튼 공부방법이라고 하더라도 무식하게 진득하면 결국은 이기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언어'가 증명한다. 우리의 기억에 모국어를 익히기 위해 '치열하게 학습'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일정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특정 환경에 노출되면 저절로 언어가 익혀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거기에 시간을 쏟는 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습관이 필요하다. 첫째,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계를 멀리한다. 둘 째, 매일 같은 양을 습관화하여 학습한다.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계는 우리의 집중력을 앗아가는 괴물과 같다. 이는 세계적인 '마케터'들의 사냥터이다. 넷플릭스의 최대 적이 누구냐는 질문에 그들은 '사람들의 수면'을 최대의 적으로 꼽았다. 즉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시간을 앗아 광고를 노출할수록 그들은 꽤 성공적인 사업 이익을 얻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이런 모든 것들은 현재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 있다. 어떻게 우리의 돈을 한 푼도 가져가지 않으며 세계적인 수익을 얻어내는 것일까. 그들은 '노출 광고'를 통해 수익을 얻는다. 고로 우리는 거기에 항상 노예처럼 복종할 수 바에 없게 된다. 두 번째의 습관화는 말할 것 없다. 우리의 대부분은 시험기간에 하루 10시간씩 일주일을 공부하면 최선을 다했다는 착각에 빠진다. 다만 시험기간 하루 10시간보다 매일 아침, 저녁 30분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학습에 투자하는 결과를 나타낸다. 매일 아침과 저녁 30분은 꽤 긴 시간은 아니다. 고로 이 노력이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실패에 대한 심리적 데미지를 입지 않는다. 다만 매일 10시간씩, 시험기간에 벼락치기를 하게 되면, '열심히'했다는 과정의 취해, 심리적 데미지를 입게 된다. 고로 적은양을 꾸준히 하는 습관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것은 역시나 환경과 습관이 가장 중요한 듯 하다. 아무리 방법을 찾아 헤매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래 앉아서, 얼마나 했는지에 대한 총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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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사라져도 결과는 남는다 -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을 위해
이해인 지음 / 필름(Feelm)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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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어회'는 가장 좋아하는 회 중 하나다. '광어'는 스스로 회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저 '식품'처럼 보여지는 경우가 있다. 그 외형이 그저 손질되기 편하기 위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잔인한 인식의 오류다. 광어의 표면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식탁에 올라가기 때문에, 그것의 원래 색에 대해서는 자세히 볼 기회는 많지 않지만, 광어의 표면이 모래를 닮았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광어의 표면은 왜 모래를 닮았나. 그것은 인간의 식욕을 자극하기 위한 '데코레이션'이 아니다. 광어 또한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에 의해 최선의 진화를 한 결과물이다. 광어는 대략 5천만 년 간 진화를 거듭해 온 종이다. 고로 고작해봐야 30만 년의 진화의 단계를 거쳐 온 사피엔스에 비하면 조금더 자연선택의 최전선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5천만년 동안 아주 섬세하게 진화해 왔다. 그놈이 그놈인 자연 생태계에서 우연하게 모래와 닮은 놈이 포식자에게 덜 잡혀먹혔다. 다시 살아남은 놈들 중 더 모래와 닮은 돌연변이가 포식자에게 덜 잡아먹힌다. 이런 세대 간의 반복이 거듭되면서 더 '모래' 같은 녀석만 남았다. 이 과정이 5천만 년이니, 그 위장술은 가히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다.

바다 깊은 곳에서 바닥에 바짝 엎드려 모래와 자갈을 닮은 모양을 하던 이들은 간혹 이 진화의 오류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위장은 워낙 완벽 단계에 머물러 있어, 심지어 같은 종끼리의 소통도 어려워진다. 다시말해 짝짓기 시즌이 되면 이들은 모래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바닥을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넓은 바다에 존재하는 것은 '나 하나뿐이구나. 스스로의 등껍질 위에 완벽한 모래의 형상을 쌓고 다른 이들의 위장에 깜빡 속는 것이다. 우리 사회라고 별거 있나. 현대 인간 사회도 이와 유사하다. 인간은 위장술이 부족한 '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만 보면 우리 또한 '자연선택'에 따라 '최선의 위장술'을 선물 받았다.

'당신의 눈동자'가 그렇다. 우리는 홀로 살아남기 어려운 '영장목'에 속한다. '침팬지'나 '카푸친 원숭이'도 같은 소속에 있다. 이들은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 없이 얇고 가벼운 피부만 가지고 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사회화'라는 사회적 진화를 필수적으로 가져야 했다. 즉 다른 이들에게 선택 받아야 했다.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몹시 중요하다. 당신이 어디를 보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대에게 알려주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을 구성원에 합류시켰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이들은 사회화에서 떨어져 생존확률이 줄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진화는 양면을 가졌다. 남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의 약점을 숨겨야 했다. 즉, 우리는 이성을 고를 때, '얼굴'과 같은 외형을 가장 중요시 생각하며 스스로 외롭지 않은 이, 고립되어 있지 않는 이인 척 위장을 해야 했다.

인간의 위장술은 그렇다. 인간의 위장술은 '진정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행복과 성공을 과시하는 사회적 위장술이다. 이것은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 두드러진다.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위장하여 '행복', '성공'으로 둔갑한다. 넙치의 등껍질처럼, 인간의 위장술이 얼마나 위대한가.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종을 속인다. 고로 자신의 위장능력에 대해서는 깜빡 잊고, 남들의 위장술에는 깜빡 속는다. 고로 모래 등껍질을 하고 혼자라는 착각에 빠진 '광어'를 닮았다.

이 외면적인 행복의 표현 뒤에는 역시 너도 나도 공유하고 있는 '영장목' 고유의 숨겨진 외로움과 고립감이 있다. 이런 외로움과 고립감은 다른 위장술의 대가들에 의해 완벽하게 속아 더 곪아간다. '외로움'과 '괴로움', '고통' 이것은 인간류 전반이 가진 내재된 감정이다. 이것을 완벽하게 숨기고 속는 과정에서 우리는 꽤 많은 오류를 범한다. 이 과정을 보면 '발가벗은 임금님'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발가벗은 임금님'에서 모두는 임금님이 발가벗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옷은 '바보'에게만 보이지 않는 옷이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사람들은 발가벗은 임금님을 보며 보이지 않는 옷에 감탄한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만 진실을 말한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옷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아이가 진실을 외치기 전까지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그 최초의 '바보'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서로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그렇지 않은 척하는 사회를 닮았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를 보면 꽤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사실 이 동화의 일부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작가 '루이스 캐럴'의 병와 같은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동화가 가지고 있는 '말장난' 때문이다. 이 동화에서는 영어권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이 몇몇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동화의 그런 재미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 동화를 최고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 속에서 자신을 포장하고 돌아서서 자신만 혼자라고 느낀다. 고로 자신감 넘치는 '소셜미디어' 속 세상과 다르게 모두가 그 안에서 고립되고 외로움을 느낀다. 사람은 워낙 이기적이다. 고로 자기 밖에 모른다. 자신은 속이며, 다른 이들에게 속인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만들어 내나. 인간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지만 그렇지 못하다. 둘이 있을 때는 외롭다하지 않다가, 서로 하나가 되면 자신만 외롭다한다. 실패, 좌절, 우울, 실망, 자책, 두려움, 외로움. 이런 것은 혼자 일때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다만 그것이 유일하게 나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자각만 하더라도 이런 감정에서 꽤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다. 그런 감정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인류의 뇌속에 잠재된 디폴트값이다. 고로, 그것은 당연하다는 인지를 하고 살아가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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