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생물 Ⅰ 1 - EBS 장호 선생님 고등 생강 시리즈
장호 지음 / 스터디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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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몸에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비교적 최근이다. 고대 의사하면 우리는 '히포크라테스'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서기 150년 경, 로마에는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갈레노스가 있었다. 그 또한 서양 의학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며 17세기까지 사양 의학의 기반을 이루었다. 또한 그의 영향력은 근대까지 지속됐다. 갈레노스의 연구에 따르면 혈액은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서 소비되어 사라진다.

그는 우리 몸에는 4가지의 액체가 있고 이것이 균형을 이루면 건강이 유지된다고 믿었다. 이 네가지 액체는 '혈액, 점액, 노란색 담즙, 검은색 담즙이다. 이중 혈액은 당연 중요한 역할이었다. 이것이 생명의 근원이자 건강의 원천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대 의학에서 혈액은 어떻게 사용된다고 봤을까. 그 생각에 따르면 혈액은 각 신체 부위로 옮겨진다. 옮겨지며 영양분과 에너지를 가지고 다니는데, 이러한 혈액이 특정 신체 부위에 도달하면 혈액은 사용되고 사라진다. 말 그대로 소모품이다. 그러던 것이 17세기에 이르러 '윌리엄 하비'라는 영국 의사가 현대적 의미의 '혈액순환'을 정의한다. 하비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심장이 혈액을 펌브질하고 있으며 이것이 혈액을 신체 전체로 도달하게 한다고 봤다. 펌프질 된 혈액은 산소와 영양분을 각 신체 부위에 제공하고 이산화탄소와 다른 대사 산물을 수거한다. 이런 매커니즘은 연속적으로 작동되는데 그로써 혈액이 재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순환하고 재사용 되는 혈액중 일부는 신장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된다. 또한 수거된 이산화탄소는 폐를 통해 밖으로 나온다. 즉, 혈액은 '영양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운반하고 수거하는 매개체라는 의미다.

현대적 의미의 '순환'을 정의했지만 혈액에 대한 연구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1665년에는 혈액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몸속에 있는 혈액을 외부의 혈액으로 공급한다는 발상은 당시 굉장히 획기적이었다. 실험 대상은 강아지였다. 먼저 개 한 마리를 죽기 직전까지 피를 흘리게 만든다. 이후 그 개가 과다 출혈로 죽기 직전이 되면 다른 개의 동맥과 개의 정맥을 연결시켜 개가 살아나는지 확인했다. 이 실험으로 개가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것을 확인한 의사들은 즉시 인간에게도 같은 실험을 재개한다.

1667년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드니는 15세 소년에게 양의 피를 수혈한다. 이후 그 소년은 실제 회복했다고 보고되기도 한다. 다만 이 수혈 실험은 항상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 실험에서 다수는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고 일부 환자는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혈액은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구분할 수 없지만 내부적으로 분명히 종류가 다르다.

우리나라의 홍범도 장군이 태어난 시기. 오스트리아에서 '란트슈타이너'라는 인물이 태어난다. 그는 수혈 후 심각한 후유증과 사망사고가 일어나는 일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겉으로는 똑같이 보이는 피라고 하더라도 그 종류가 달라 서로 호환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혈구의 표면에는 적혈구가 서로 달라 붙게 하는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이 있다. 이를 '응집원'이라고 한다.

응집원에는 A응집원과 B응집원이 있는데 각각 A응집원만 가진 적혈구, B응집원만 가진 적혈구, AB를 모두 가진 적혈구, 둘다 없는 적혈구가 있다. 이것을 ABO로 구분한다. 즉 응집원에 따라 다른 혈액이 엉키면 피는 굳어버린다. 다만 분명 같은 혈액형인데도 그 둘을 결합했을 때, 응집이 되는 현상을 목격한다. 왜 그런고하니, 혈액은 단백질에 따라 그 종류가 다르다. 쉽게 말해 '혈액'은 그 '혈액'이 자기의 혈액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태그'나 '이름표' 같은 것을 각각 가지고 있다.

1940년대에 과학자들은 혈액 응고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붉은털 원숭이(Rhesus monkey)라는 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작은 원숭이를 사용했다. 이 원숭이에게서 혈액의 특별한 항원이 발견된다. 이 항원은 사람의 적혈구에도 발견될 수 있었는데, 이 항원이 존재하면 원숭이의 이름을 따서 RH+(양성), 없을 때는 RH-(음성)라고 한다.

이처럼 RH는 일종에 혈액에 붙어 있는 '이름표' 같은 것이다. 즉, 자신의 이름표가 있는 혈액은 RH+(양성), '이름표'가 없는 혈액은 RH-(음성)이다. 이는 우리가 태어나면서 결정되는데 이름표를 가진 이들은 이름표가 없는 혈액을 수혈 받아도 문제가 없지만, 이름표 없는 이들이 다른 이름표가 있는 혈액을 수혈 받으면, 이름표가 없는 이들은 '다른 이름표'를 '외부의 침입자'로 규정한다. 외부의 침입자를 공격하기 위해 항체를 생성하고 이 과정에서 적혈구가 파괴되기도 한다. 이 반응을 용혈 반응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수혈받게 되면 혈액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빈혈이나, 신장손상, 심한 경우네는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혈액형은 결국, 항원의 차이에 의한 구별이다. 다만 인종차별과 민족주의가 왕성하던 20세기 초반, 굉장히 독특한 주장이 생긴다. 동물과 사람에 대한 혈액형 조사가 한창을 이루던 시기, 국가별 혈액형 분포도 함께 이어졌다. 이 시기는 '골상학'과 '우생학' 등이 유행하던 시기다. 이런 유행은 '흑인 노예'와 '아시아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동양 국가들에서 B형 혈액형이 유럽과 북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에서는 B형 혈액형의 비율이 20에서 30%로 추정되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에 '원숭이에게는 B형이 많다.'는 연구가 진행되며 이것이 새로운 인종 차별의 재료로 사용된다. 실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에밀 폰 던게른 교수는 1914년에 Handbuch der Rassenhygiene라는 책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의 혈액형 차이를 언급한 적 있다. 이 언급에 따르면 동양인의 혈액형 분포는 서양인과는 확연하게 다르며, 특히나 B형 혈액형이 많은 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것이 동양인의 행동과 성격 차이에 대한 새로운 지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이는 당시 '일본'에 대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직접적으로 'B형이 많은 동양인은 야만적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인종차별적 소재가 될 수 있었고 실제로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에 1927년 '후루카와 다케지'라는 교육자가 자신의 주변 인물과 친척 열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혈액형에 의한 기질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연구에 따르면 A형은 소극적이고, B형은 개성이 강하며, O형은 적극적이다. 또한 AB형은 A형과 B형의 특색을 모두 갖는다. 다시 1970년에는 노미 마사히코라는 작가가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을 출간하고 혈액형별 성격 유형은 '연예인과 유명인'들에서 TV와 방송매체, 뉴스, 잡지로 '일반인들'에게도 전파되며 큰 유행을 갖는다. 다만 일본에서 혈액형별 성격 유형을 정리한 자료는 표본이 지나치게 적고 과학적 근거가 전무하다. 또한 대체로 '과학자'가 아니라 '작가'와 '교육자'에 의해 조사된 내용이라 그 근거를 찾기 더욱 어렵다. 이렇게 일본에서 유행하던 혈액형별 성격 유형은 일본의 경제 호황시기 한국으로 넘어가 한 차례 더 유행을 했고 MBTI 성격유형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전까지 꽤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됐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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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인 건 좋지만 외로운 건 싫어
황솔아 지음 / 모모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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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의 뒷통수를 보면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눈을 등지고 있는 그 뒤통수에서 그가 평생 보지 못할 우주의 끝 같은 존재를 내가 보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우스께소리로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정말 훌륭한 '장총'이면 자신의 뒷통수를 저격할 수 있단다. 우주도 결국은 지구처럼 '구' 모양을 하고 있을진데, 어쩌면 가장 먼거리라고 하면 어설픈 '안드로메다 은하'가 아니라 눈 뒤에 달린 '뒷통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거울'과 '거울'로 내 뒷통수를 구경하는 일을 '취미'삼아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이론상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곳을 들춰 보는 일은 상대의 눈에 비해 희귀한 일이다. '관찰하면 존재하고', '관찰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라더니, 나의 뒷통수는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상대의 뒷통수를 보면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의 뒷통수라하더라도, 그에게 철저히 '무지'의 영역이 되는 그 '구역'을 면밀히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남모를 우월감이나 연민의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상대의 완전한 '나체'를 관찰하는 듯, 완전히 벗겨져 있는 상대의 모습을 보는 듯. 그의 완전한 무지의 영역을 훔쳐보면서 나또한 누군가에게 뒷통수를 내보인다. 나의 뒷통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마 흰머리가 약간 있을 수도 있고, 삐친 머리가 불완전하게 달려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내 뒷통수를 살폈던 것은 언제인가. 가만 살펴보니, 나는 남들을 관찰하며 남에 의해 관찰된다. 그러며 정작 내가 나를 가장 모른다. 나는 나에게 단 한번도 면밀한 360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살다보면 상대의 표정과 말투, 숨소리를 관찰하게 된다. 나또한 그랬다. 직장 상사의 숨소리가 어땠는지, 그의 표정은 어떻고 목소리는 어떤지. 그 작은 변화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며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물리며 증폭해 나간다. 상대 눈썹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아주 사소한 억양과 말투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머릿속은 끝없이 상대의 모습을 되뇌인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말투와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목소리는 어떠하면 말의 빠르기와 높이는 어떠한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나. 상대의 한숨에 부여하는 큰 의미만큼 나의 숨에도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가. 숨을 단 한번이라도 조절해 보거나, 관찰해보려 노력은 한 적 있는가.

입술 주변의 근육은 어떤 긴장상태에 있는가. 이마의 근육은 어떻고. 발이 닿고 있는 바닥의 감촉에 대해서는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나의 왼쪽발 세번째 발가락의 촉감은 어떠한가. 그것을 지금에서야 느껴본다면, 그것이 남의 발가락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살다보면 참 다양한 사람의 인간이 존재한다. 이런 인간들은 각자마다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라벨링'을 하면서 정작에게 자신의 등에 붙어 있는 '라벨링'은 보지 못한다. 눈에서 가장 먼거리인 뒷통수에 달려 있으니 보지 못한다. 가깝고도 멀다는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우리가 가장 모르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일지 모른다.

혼자라는 것은 때로는 가장 낯선 이와 함께 하는 일일지 모른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모든 나를 대표할 자신은 여전히 없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단 한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존재이며, 더욱이 관찰해 본 적은 없다. 낯선 땅에 있을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당연히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 인간이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가장 낯선 자신과 일대일로 마주할 때가 아닐까. 우리는 가장 낯선이들과 만남을 피하고자 결국은 가장 익숙한 누군가를 밖으로 찾아나선다.

황솔아 작가의 '혼자인 건 좋지만 외로운 건 싫어'는 작가가 서른 여덟살 동안 겪은 다양한 생각과 삶이 그려져 있다. 주변에 존재할 만한 누군가의 이야기이며, 쉽게 나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데 황솔아 작가가 말하는 것 처럼, 겉을 보여지는 나와 내면의 내가 각각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다면화된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현대인이 생존 본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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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국사 2 경제.사회편 - EBS 이희명 선생님 고등 생강 시리즈
이희명 지음 / 스터디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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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쇄국정책'을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는 조선의 근대화를 늦춘 인물로 묘사할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살피면 '쇄국정책'이 '그나마의 최선'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둔 사회다. 이는 조선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연관있다. 조선 후기의 조세 체계는 주로 '토지'를 기반으로 했다. 다시말해, 세수 확보를 위해 정부는 농업을 적극 장려하고 지원했다. 반면 상공업의 발달은 자본과 자원의 분산을 의미하며 중앙 집권 통제력을 약화 시키는 요인으로 여겼다. 상공업이 발달하면 경제의 중심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다. 이는 새로운 사회 계층의 출현을 의미한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 상공업이 발달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발생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단순히 기술의 발달이 끝이 아니다. 이는 영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만들었다. 영국은 도시화가 가속화 됐고 중산층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688년에는 명예혁명을 통해 절대 왕정이 제한되고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로 전환됐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혁명의 배경에는 경제적 변화가 우선한다. 프랑스도 상공업과 제조업이 발달하며 '부르주아'라는 신흥 계급이 생겨난다. 이들은 자신의 경제적 지위에 맞는 정치적 권리를 주장한다. 이런 결과로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우리가 말하는 시대는 '조선왕조시대'다. '조선왕조'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부분은 '왕조'의 몰락이다. 상공업을 발달하고 서양과 무역을 하며 근대화를 이루는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인 조선'과 결이 맞지 않는다. 결국 조선이 건국 당시부터 갖고 있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았을 뿐이다.

'중앙집권체제'가 '상공업의 발달'을 막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중앙집권체제는 국가의 정책과 법률을 일관적으로 시행할 수 있다. 또한 내부적으로 일관된 규범과 기준을 확립하도록 한다. 대규모 프로젝트와 안보 정책에 효율적이고 빠른 의사결정 능력과 표준화 시스템을 가질 수 있다. 실례로 봉건국가였던 네덜란드가 중앙집권국가였던 영국에게 패권을 넘겨 주었던 사례를 본다면 정치체제는 그 시대에 따라 장단점이 있을 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흥선대원군 시대의 조선은 상공업이 구조적으로 발달할 수 없는 '농업 기반 사회'였다. 이런 농업 기반 사회에서 외국과의 무역은 자칫 중대한 안보적 위기를 만들어낸다.

공급과 수요의 법칙

공급보다 수요가 많으면 가격은 올라간다. 다시, 수요보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은 내려간다. 이 법칙에 따라 쌀 가격은 크게 요동친다. 농업 기반 사회인 조선의 '쌀 생산량'은 거의 정해져 있다. 게다가 19세기 조선은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유지되던 시기다. 분쟁이 줄고 중앙 권력의 안정화가 이루어졌다. '세도정치'하면 정치적 불안감이 커졌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극소수의 권력이 국가를 운영되면 정치적으로는 안정화에 접어든다. 이런 이유에 조선 후기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즉,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농업생산량은 정해져 있는데 수요가 폭발하는 것이다. 이는 쌀값폭등으로 이어진다. 당시의 쌀은 지금의 쌀과는 다르다. 당시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쌀'이다. 노동력이나 군운용도 모두 쌀로 지급한다. 고로 '쌀값폭등'은 현대로 치자면, '오일쇼크'나 '하이퍼 인플레이션'와 비견할 수 있다. 조선의 주요 생산품이 '쌀'인 와중에 '외국'과 교역을 한다면 조선 내부의 '쌀'이 외부로 반출된다. 쌀이 반출되면 수요 공급 법칙에 따라 쌀값이 폭등한다. 쌀값이 폭등하면 국가 운영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친다.

일단 '군 운용비용이 증가'한다. 쌀값이 폭등하면 국가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 증가한다. 당시 군인들에게 지급하던 임금은 '쌀'이었다. 또한 군인들의 식량 조달에 대한 비용이 상승하고 전체 국방 예산에 대한 부담이 높아진다. 또한 중앙 집권 국가의 큰 장점이던 대규모 사업 또한 불가능해진다.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임금 부담'도 대폭 높아진다. 또한 '서민들의 생활비 부담'을 가중시키고 사회적 불안과 불만을 증가 시킨다. 상류 계급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라도 도시 빈민이나 농민들의 반란이나 소요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필사적으로 개항'을 막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생겨난다. 반면 조선과 교역상대는 어떤가. 교역 상대국은 '기계를 통한 엄청난 생산성'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 들어오는 저렴한 상품들은 국내 산업을 위협한다. 즉,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그가 단순히 고지식한 '노인'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조선의 정치인으로써 굉장히 합리적인 선택인 셈이다.

실제로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맞는다. 부산, 인천, 원산 등 3개의 항구를 개항하면서, 일본 외에도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수교를 시작한다. 실제로 교역이 시작되면서 대량의 곡물이 항구를 통해 수출된다. 반대로 값싼 공산품이 수입된다. 이런 상황은 결국 '조선내부의 쌀부족' 현상으로 이어진다.

흥선대원군이 우려대로 쌀이 부족해지자, 쌀값이 상승했고 물가는 폭등했다. 게다가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아, 귀금속이 대량으로 해외에 유출된다. 일부 지주는 쌀 수출에 적극 가담하여 엄청난 이득을 남겼다. 그 이익을 다시 토지 매입에 투자되어 대지주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쌀에 대한 '시장독점'과 '수요폭발'이 일어나자, 국가는 '군인'에게 지급할 '임금'인 쌀을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1882년 쌀겨와 모래가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좋지 못한 급여를 받은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그것이 임오군란이다.

임오군란의 진압과정에서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다. 이로써 조선의 내정에 대한 청의 간섭은 더 커진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군대는 조선에 주둔하게 된다. 이후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이 점차 확대된다. 그 과정에서 고종 황제는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했는데, 외국 공사관은 해당 국가의 영토로 간주하기 때문에, 실제로 고종이 직접 러시아로 간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외교 관례와 영토의 개념으로 볼 때, 조선의 황제가 러시아의 영토로 피신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로 인해 로시아는 러시아인을 조선의 재정, 군사 고문으로 앉히고 광산 채굴권이나 삼림 벌채권을 얻었다. 그러나 쌀유출은 계속 이어졌다. 철도가 놓이며 더 많은 식량과 자원이 철도와 항구를 통해 수출된다. 쌀값 폭등은 더 가속화된다. 뒤늦게 '방곡령'을 통해 쌀의 유출을 막아보려고도 했으나, 이미 구조적으로 경제적 파탄이 났기 늦은 상황이었다.

일본 또한 조선의 쌀값폭등이 달갑지는 않았다. 그들 또한 수입국이었기에, 조선의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한다. 조선의 쌀을 증식하여 쌀 생산량을 높이는 정책이다. 이 과정에서 증산에 필요한 시설을 확대하고 화학비료를 사용을 권장한다. 실제로 더 많은 쌀이 생산되었으나 수확량에 비례하여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쌀값이 안정되지 않았다. 식량 사정도 악화됐다. 쌀값이 높아지자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을하고 낮은 임금을 받는 처지에 쳐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항이 불러 일으킨 연쇄적인 불행의 도미노는 국가의 재정과 안보를 파탄시키고, 결국 '경술국치'까지 이어진다.

가만 보면, 중앙집권국가인 조선의 멸망은 시대적으로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다만 그 과정에서 '경제'가 '안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지독한 방식으로 학습했다. 어느 통계를 보니 한국인이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돈'과 '경제'에 삶의 촛점을 맞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삶'에 직결된다는 위기감을 우리 모두가 역사를 통해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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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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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막한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설명.

다자이 오사무, 그는 1909년 일본 아오모리 현에서 태어난다. 집안은 부유했으며, 그는 그 사실을 부끄러워 한다.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이루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도교제국대학에 입학한 후 좌익활동을 시작한다. 날 때부터 정해진 자신의 정체성과 내면의 신념의 충돌은 그의 삶 전반에 존재한다. 이런 내면과 갈등은 그의 삶을 내면과 외면으로 분리했다. 물론 어떤 사건이 기폭제로 작용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겪는 다양한 사건은 모두 서로 그러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다자이 오사무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끊임없는 자기비하와 비난을 하던 그는 1930년에 다나베 아쓰미라는 연인과 투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연인인 아쓰미는 사망했으나 그는 살아 남았는다. 이후 연인의 자살을 방조한 혐의를 받던 그는 이후로도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한다. 이런 비극은 다른 비극을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불러 일으킨다. 결국 그는 약물 중독에 시달린다. 중독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그가 가게 된 병원은 '정신병원'이다. 몇 번의 비운과 고통이 그들 찾으며 그는 생애 동안 총 다섯번의 자살을 시도한다. 끊임없이 자기자신과 인간에 대한 고뇌를 멈추지 않던 그는 마침내 1948년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던 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는 '인간실격'이 발표된다. 다자이 오사무의 삶은 극적이고 복잡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소설'이지만 작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깊은 내면의 고뇌와 인간의 약점을 탐구한다.

우울하고 침울하고, 고통스러운 그 소설을 읽으며 누군가는 마음이 '오염되는 감정'을 느낀다. 다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가 느끼는 일부 감정에 있어서 철저한 공감을 갖는다.

그가 가진 고민들, 사회적 부적응과 자아 상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괴리감, 외로움, 자신의 본성에 대한 불안과 혐오, 끊임없는 자기와 세상에 대한 비판, 의심, 좌절. 그것은 소설을 읽기 전에도 내 안 어딘가 존재하는 감정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장난기 많고 농담 좋아하는 밝은 사람이지만 그 속은 정반대이다. 겉으로 가면을 쓰고 솎으로 그 빛에 준하는 그림자를 가지는 것을 보면 페르소나와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페르소나와 그림자는 '구스타프 칼 융'의 심리학 이론 중 하나다. 사회적 상황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선택적으로 가짜 자아를 만들어 나간다. 그것을 가면, 즉 페르소나라 부른다. 반면, 우리의 의식적 자아가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특성, 부정적인 사고와 욕망, 감정 등 무의식의 일부, 타인에게 숨기고 싶어하는 내면. 그것은 그림자이다.

인간실격에서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여러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는 진짜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는 페르소나를 연출한다. 모두를 철저하게 속이며 이러한 개념은 융의 페르소나 개념와 매우 일치한다. 융의 심리학에서 페르소나와 그림자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은 개인의 성장과 자아 실현에 매우 중요하다. 이런 페르소나와 그림자 사이에서의 갈등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조금 더 직관적으로 그려진다. 다만 '인간실격'에서 주인공은 이 균형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그림자에 짓눌려 고뇌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하고 이를 수용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할 기회를 가질 수 있던 주인공은 자신의 내면의 여정을 완성하지 못하고 결국 '인간으로써 자격의 실격'을 선언한다. '소설 데미안'과 대비적으로 그는 결국 열리지 않은 결말로 끝을 낸다.

이 소설은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는 불안과 외로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며, 이 고뇌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페르소나와 그림자, 선과 악 사이의 고뇌를 열린 결말로 이야기 했던 '헤세'의 '데미안'과는 다르게, '인간실격'은 종결된 결말로 끝을 낸다. 결국 우리 모두는 '페르소나'를 집어 삼키는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고뇌가 멈추기 위해 결국은 그 간격을 줄여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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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연대기 - 조선을 뒤흔든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건 80
유정호 지음 / 블랙피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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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 될 상인가?"

세조는 자신의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다. 영화 '관상'으로 유명한 '계유정난'이다. 그는 '성공적인 반역자'로 역사에 기록된다. 반정의 성공 이후, 그는 자신의 반정에 대한 역사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그래서 그런지 세조는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한다. 그렇게 역사는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세조의 이야기는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조의 '성공적인 반역'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의 공과 과를 모두 알고 있으며, 그 평가가 각각의 개인마다 다를 수 있음도 알고 있다. 세조 뿐만 아니다. 선조의 몽진, 광해의 폐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해석은 일방향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대체로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조선왕조실록'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원치 않는 기록이나 불리한 기록이 있을 수 있다. 하물며 왕의 기록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실록은 왕명에 반하는 내용까지 기록한다. 시대가 흘러 가치관의 차이가 발생해도 우리가 그 사건을 오해없이 바라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객관성 때문이다.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정도전과 새 국가를 건설했을 때부터 순종시대의 '경술국치'까지 500년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보면 꼭 잘 짜여진 한편의 드라마 같다. 만들어지고 흥하고 쇠하고 망하기까지의 전 과정이 한 사람의 인생과도 닮았다.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부분이 많다. 육아는 사람이 완성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 일부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사람이 성장 과정을 배우며, 느끼는 바는 우리 모두는 환경도 어찌할 바 없는 '내재적 성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기본 '시스템'은 그게 DNA에 각인이 되었는지 어쩐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설정된 시스템에 따라 같은 환경에서도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배운다. 쌍둥이를 키우며 같은 환경에서 자라는 두 아이의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에 '내재적 시스템'의 역할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처럼 어찌할 바 없이 정해진 무언가를 '숙명'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초에 조선의 건국부터 짜여진 '숙명' 같은 시스템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떤 연유로 조선의 흥망성쇠를 이끌었을까.

조선이 건국되기 전, 고려는 봉건주의 국가였다. 군사적 공로에 따라 토지를 수여하고 토지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공로자가 취하는 구조다. 그러다보니 귀족이라는 강력한 권력이 탄생했다. 귀족과 무인은 점차 세력이 확장되며 중앙 정부보다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조선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폐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하다보니 지방 호족의 세력이 강해졌고 각각이 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도도 낮았다. 그 결과, 국제적 이벤트에 대한 대응이 약하고 비효율적이었다. 이성계는 이런 봉건제도의 폐해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런 폐해에 대해서는 최근 방영하고 있는 '고려거란전쟁'을 보면 알 수 있다. 외침에 대한 대응 전략 부재, 귀족 간의 권력 다툼, 내란 등 고려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시스템의 한계는 혼란스러운 사회를 야기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전 후, 고려의 군사력은 명과 큰 차이가 있었다. 이성계의 눈에 해당 출정은 비합리적인 봉건제도의 결정판이 었을지 모른다.

이로써 태조는 중앙집권된 체제를 꿈꿨다. 군사력을 효율적으로조직하고 지위하는데에는 중앙집권 체제가 필수적이었다. 봉건국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이후의 왕들은 짜여진 시스템에 걸맞는 성장을 촉진한다.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토지 관리를 정비하며 세수를 확보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유교를 받아들인다. 이처럼 사회가 통합하면서 조선은 '안정적인 국가'로 거듭난다.

파편적인 '불교'의 성향을 벗어버리고, 질서정연한 '유교'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조선은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장려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유교의 이념에 따라 조선은 왕과 신하 사이의 도덕적 관계와 책임을 강조한다. 즉, 왕은 신하의 조언을 경청하고 정치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이 강조됐다. 그 결과 조선은 '신하'들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게 됐다. 현대의 민주주의가 삼권분립에 의해 국가 권력을 분산하고 약화시키는 것처럼 왕권과 신권은 서로 견제하고 화합하며 국가를 운용해 나갔다.

정도전이 제시한 이념은 당시 혁신적이었는데,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명명하며 국왕은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대표라는 인식을 갖는다. 이런 인식은 조선 500년 간 꾸준했다. 중종반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종은 스스로 반정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신하들에 의해 왕이 된 인물이다. 또한 조선 후기 철종은 정치란 아무것도 모르는 가난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신하들에 의해 왕위로 추대된다. 그런 의미에서 제아무리 '왕'이라 하여도, 신하에 의해 제거되고 추대되기도 했다. 반대로 왕들은 왕위에 있으며 신하들의 반정을 언제나 견제하고 경계했다. 이런 시스템은 조선의 전근대까지 잘 이끌어 왔다. 다만, 중앙집권 체제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국가 운영은 가능했지만 외부적 환경과 내부적 변화에 대응하는 유연성은 부족해싸. 경직된 중앙집권 체계는 사회 내부적으로 다양한 정치 세력에 대한 투쟁을 더 중시하게 됐다. 즉, 내부적으로 살아남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국가가 되어 결과적으로 외부 위협에 대한 효과적 전략을 갖지 못했다. 중앙집권적 체계는 외부 세계와 교류를 업격하게 통제했다. 통제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통제 하다보면, 새로운 지식이나 아이디어에 대한 유입, 새로운 세력과 부에 대한 견제가 따라온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 '무역'은 '사형'에 처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중범죄다. 이런 조선의 '내재적 DNA'는 산업혁명을 저해했다. 그저 조선의 정책 결정자들은 '산업'보다 '농업'을 중시했으며, 이는 '변화'보다 '유지와 질서' 그리고 '안정'에 더 촛점을 맞추게 되는 '조선의 태생적 DNA'였다.

결론적으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의 협력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탄생에 결정적이었으나, 봉건적 국가인 고려가 중앙집권적 국가인 조선에 멸하고, 다시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이 시대에 다시 흥하는 것 처럼, 모든 것에는 흐름이 있으며 절대적이고 완전한 정답도 오답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 역사 500년을 살피면 하나의 왕, 하나의 세대, 하나의 시대가 스치듯 지나가지면, 결과적으로 인생 100년과 너무도 닮아 있다. 고로 삶을 살 때, 우리는 그것을 떠올릴 수 있다.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 즉, 나를 흥하고 망하게 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그것이 맞나게 되는 시대와 타이밍이다.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언젠가, 나를 흥하게 할 무기가 되어 줄 어느날을 기대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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