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창조한 나 세기의 책들 20선, 천년의 지혜 시리즈 6
제임스 앨런 지음, 서진 엮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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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한 친구를 알게 됐다. 이름은 'John'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했고 나보다 서너살은 많았다. 국적은 뉴질랜드 였으나 그는 대만계 출신이었다. 키가 작고 생머리에 피부는 하얗고 가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피부는 하얗다기 보다 투명했다.

John은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이곳 저곳을 다녔다. 오클랜드 대학교에 있는 잔디 정원에 누워 낮잠을 잤고 가끔은 바닷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엄청난 '육식꾼'인 나와 반대로 '채식주의자'였고 소식가였다. 한번은 Sal's Pizza에 방문했다. 어퍼퀸스트리트에 위치한 Sal's Pizza는 뉴욕식 피자를 파는 곳이었다. 거기서 존은 피자를 주문했다. '치즈피자 한 조각'과 '물'.

'한 조각?'

한 판은 시켜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John은 일단 한 조각을 먹으라고 했다. 치즈피자 한조각과 제로콜라. 이렇게 주문했다. 꽤 맛있는 식사였다. 배는 적당히 든든했다. 피자를 먹고 '알버트 공원'으로 갔다. 수백 년은 넘어 보이는 나무 그늘로 갔다. 나무 그늘에 앉았다. 적당히 배가 불렀고 존은 나를 보며 말했다.

자신은 언제나 정화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대만계라고 해도 결코 대만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뉴질랜드는 깨끗한 곳이며, 자신의 정화된 몸이 오염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가 말한 '오염'은 일반적 '오염'이 아니었다. '정신적 공해'를 포함한 오염을 말했다. 시간이 나면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눈앞에 지나가는 '상'을 지켜 본다고 했다. 그것을 그저 바라 보라고 했다.

그때 아마 나의 나이가 스물 셋.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존은 지나가는 관경을 붙잡지 말고 따라가지도 말고 그냥 바라보라고 말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면 머리는 정화된다고 했다. 그 뒤로 무슨 말을 한참을 했는데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다.

그런 행위는 자신의 '에너지'를 키운다고 했다. '에너지를 키운다.'

나이가 어렸던 나에게 '에너지'라던지 '상'이라는 말은 '사이비'스러웠다. 자꾸 그러한 주제로 빠지는 '존'에게 말장난을 하며 주제를 바꾸려 했다.

그때 왜 나는 그랬을까. 그의 말을 잘 귀 기울이고 들었어야 했다.

다시 상기시켜 보건데, 그의 말은 이랬다. 눈을 감고 자신의 상을 지켜보면 내부에 있는 에너지는 확신한다.

내부의 에너지, 그것은 자아.

외부의 에너지, 피부 밖의 에너지.

더 나아가 한 겹, 두 겹, 세 겹으로 에너지층이 넓어진다고 했다. 그때 첫번째, 에너지가 '자아'라는 것은 기억이 난다. 이 에너지층을 확산하여 가장 끝에는 '사랑'이라고 했던 부분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몇 겹의 에너지가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크리스천'이었고 그가 설명한 행위는 '메디테이션' 혹은 '마인드풀니스'로 불리는 명상이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사람의 감정에는 차원이 존재한다. 1차원, 2차원, 3차원처럼 물리학에서 말하는 차원이 아니라 각 감정은 저마다 수준이 다르다. '제임스 앨런'의 '스스로 창조한 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마음이 걱정이라는 낮은 차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다시 마음을 끌고 와 평화와 힘의 영역으로 자신을 다시 세우십시오.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속에서 빛을 발하는 명확한 비전과 완전한 판단력으로 올바른 길과 그것으로부터 얻게 될 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목을 보는데 벌써 20년 가까이 된 인연이 떠올랐다. 걱정과 염려, 불안, 공포 이것은 차원 낮은 감정이다. 꾸준히 노력을 통해 우리는 자아의 차원을 높여야 한다. 이렇게 높아진 차원은 일시적으로 회기본능이 있어, 언제든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 디폴트값이 변경되기 전까지 꾸준한 노력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의 차원은 자꾸 저차원으로 돌아간다. 꾸준한 반복과 정화를 통해 우리가 고차원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다면 앞서 말한 '회기본능'은 우리가 '저차원'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떠받는 요긴한 무기로 변신한다.

나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환경'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환경은 '외부'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도 비몰아치는 환경과 포근하고 따뜻한 환경이 존재한다. 같은 환경에서 어째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 남는가. 어쩌면 내부의 환경에 차이가 있어서는 아닐까. 쉽게 변화하는 내면의 노예가 되면 다른 사람들과 바깥 세계에 휘둘리게 된다. 확신에 찬 발걸음은 어떤 성취를 이루게 하고 어떤 성장을 가능하게하는 초월적인 능력이다.

누가 나를 만드는가. 밖에서는 외부적 환경이 있다면 안에서는 누구인가. 회사도 51%의 주식을 소유하면 지배력이 생긴다. 내가 나를 지배 한다면, 환경은 1%만 있어도 충분히 내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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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불안을 이기는 작은 습관들 - 우울과 불안을 끌어안는 심리학
임아영 지음 / 초록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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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무소유'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누군가는 장미를 보며, '저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돋았구나'하고

누군가는 장미를 보며, '저 날카로운 가시에도 장미가 피는구나'한단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아닐지라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것을 본다는 것.

그냥 해골 바가지라도 '원효대사'에게 '깨달음의 날'을 줬고 누군가에게 '재수없는 날'을 줬을지 모른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빌게이츠의 말에 따르면, '삶은 원래 불공평하다. 그것을 받아 들어야 한다.' 그렇다. 시작은 '받아들임'에서 부터다. 인류 역사상, 단 한순간도 그 어떤 장소에서도 '평등'은 존재한 적 없다. 불가능한 것을 좆으면 자괴감만 커저간다.

불평과 불만을 쌓는 것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카드 게임의 묘미는 블러핑으로 좋은 패의 상대를 이겨 냈을 때다. 단순히 운에 좌우되는 게 카드 놀이라면 참여자의 역할이란 관찰 밖에 없다.

왜 사람들은 카드 놀이를 하는가. 그것은 거기에 불확실성이 있으며 우리에게 '좋은 카드'가 올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카드'만 선택적으로 얻을 수는 없다. 나쁜 카드도 나올 수가 있다. 우리는 그 법칙을 이해하고 카드게임에 참여한다. 고로 나쁜 카드가 나왔을 때는 그냥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가 가난해서, 학력이 좋지 않아서, 남자라서, 아시아인이라서, 21세기에 태어나서... 크기를 막론하고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중해서는 '열등감'만 쌓인다.

'하루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실제 하루살이가 하루만 사는 것은 아니다. 대략 2~3일 정도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하루살이가 하루만 살거나 2~3일만 살거나 결과적으로 하루살이는 계절을 모르고 죽는다. 낮과 밤은 알 수 있으나, 그들은 계절을 모른다.

우리도 그렇다. 알고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다만 대체로 우주가 이루고 있는 법칙은 크기와 상관없이 적용된다.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러첨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예외가 있다 해도 예외가 법칙이 될수는 없다. 작은 예외로 보편적 법칙을 모르쇠 할 수는 없다. 밤낮이 있다는 것은 여름과 겨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좋음과 나쁨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차가움과 뜨거움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전체를 보면 밤은 영원하지 않고 겨울은 영원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낮과 봄도 영원하지 않다.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점묘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은 작은 점을 찍어 전체의 그림을 완성한다. 우리가 이 그림에 앉은 무당벌레라면 고작 보이는 것은 내가 앉은 작은 점과 양 옆에 놓여진 작은 점들 뿐이다. 다만 조금만 떨어져 바라보면 이 그림에는 다양한 색깔이 존재하고 점의 의미는 전체를 나타내는 작은 조각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있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이란 '가까이에서 보기에는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너무 작은 것에 연연해하면 결국 전체를 놓친다. 이것은 불안을 만들어낸다. 검정색 그리고 그 뒤에 검정색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검정색.

그러나 그 검정색 점들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자면 전체 그림은 눈사람의 어느 부분일지 모른다.

'임아영 작가'의 '우울과 불안을 이기는 작은 습관들'에서는 '초코파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사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정' 문화는 우리를 불안으로 몰았다.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 들어야 하는 우리 문화는 상대의 기분 알아 맞추기식으로 발전했다. 상사의 기분을 알아 맞추고 배우자나 자녀, 부모의 기분을 알아 맞춘다. 이것은 좋게 포장하기에 '정문화'이고 나쁘게 보기에 '눈치문화'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는 모호한 소통법으로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도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불안해하며 상대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립과 외로움도 함께 느낀다. 결과적으로 모두는 비슷하다. 임아양 작가의 글을 보건데 우리는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으면 모두 그렇지 않은 척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그렇다. 고로 비극에서도 희극을 찾고, 불안 속에서 최소 고립될 필요는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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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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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다'

어떤 이유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에 나머지가 이유가 된 것이다.

'불행하다'

어떤 이유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기에 나머지가 이유가 된 것이다.

최근 읽은 '미움받을 용기', 이후 소설이라 그 연장선에서 이해가 됐다. 과거를 반추해보면 꽤 괜찮을 법한 결말이 보이는 선택이 있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은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돌이켜 보건데, 어떤 선택을 했건 행복과 만족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선택으로 생겨난 다른 '우주의 나' 또한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며 '지금의 나'를 떠올려보고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축구 경기가 되면 자신이 원하는 곳에 공을 차는 친구의 능력은 '신의 능력'이었다. 그는 항상 원하는 곳에 공을 찼고, 그 공은 여지없이 그곳에 떨어졌다.

친구의 능력을 부러워하던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원하는 곳에 공을 차는 방법이 궁금해.'

친구는 답했다.

'원하는 곳에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공이 간 곳에 만족하면 된다.

그랬다.

친구와 나의 가장 큰 차이는 '결과'를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결과'를 해석하는 능력에 있었다. 나의 불만족은 아주 높은 확률로 정해져 있었다. 내가 '메시'나 '호날두'가 아닌 이상, 내가 찬 공에 만족할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상대적 능력치를 비교하기에 친구와 나는 물론 실력차이는 있으나, '메시'나 '호날두'처럼 프로 선수에 비교하기에, 그 절대적 능력치는 '오차범위'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제 '실력'을 높이거나 혹은 '만족'을 높이거나 둘 중 하나다.

축구라는 것이 어쩌다 한 번 친구들과 체육시간 혹은 취미 생활로 볼 한 번씩 차는 일인데 프로 선수만큼의 능력은 필요 없다. 고로 '실력'을 높이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만족'을 높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선 '실력'을 높여야 한다. 다만 삶에서 범인이 천재만큼 능력을 갖는 것은 가당키나 할까. 대체로 능력은 그만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능력이 '최상'이면 좋겠지만 세상에는 '최상'의 능력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일회용 커피 믹스를 '잘 젓는 능력'은 완벽하게 프로 수준에 닿고 있으나, 약간의 녹지 않은 알갱이가 떠 있으나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우리를 이루고 있는 삶의 전반은 '완전한 수준'이 아니라, '적당한 수준'의 능력만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배우게 된 것이 '만족하는 능력'이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수 천번은 돌려봤던 '세븐틴 어게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과거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은 선택의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살아가는 영화다. 주인공는 항상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러다 다시 '운명'이 그에게 다시 선택할 기회를 줬고 이유야 어찌됐건 주인공은 다시 같은 선택을 한다.

후회해봐야 부러워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돌아가더라도 상대가 되더라도 나는 다시 지금의 나의 자리를 찾을 것이다. 고로 지금의 나는 언제나 '최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불운과 불행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지도 않고 실수와 잘못으로 채워져 있지도 않다. 그냥 그러한 것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 연필로 쓴 무언가를 지우는 물체에 '지우개'라는 이름을 짓고 얼굴의 양쪽에 붙어 청력을 담당하는 기관에는 '귀'라는 이름을 지었다. 다수가 합의한 것에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빨강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파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빨강'이라는 이름은 맞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파랑이라는 말이 맞을까. 아니다. 그것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빨강일수도,파랑일수도 있으며 더 깊게 생각해보기에, 누군가에게는 빨강이고, 누군가에게는 파랑일수도 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말을 잃어버린 노인의 이야기다. 잃어버린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돌아온다거나, 그 말을 타고 놀다 떨어진 아이가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부러진 아이가 군대에 면제가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모든 상황은 '좋음'과 '나쁨'으로 번갈아가며 이름을 바꾸는데, 거기에 '좋음'과 '나쁨'이라는 이름이 과연 존재하냐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름'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저 그 자체이지는 않을까. 초나라 시대, 무엇이든 막는 방패와 무엇이든 뚫는 창을 팔던 장사꾼은 결국 자신의 말에 모순을 발견한다.

모순은 결국 어느 하나가 진실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는다. 둘다 진실이라는 것도 아니며 둘다 거짓이라는 것도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진실이 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모순이 되기도 한다.

뚫리지 않는 방패와 무조건 뚫는 창의 이야기는 결국 두 창과 방패가 만나야만 증명할 수 있다. 전장에서 만날 두 병사가 초나라 한시장 바닥에서 같은 무기장수에게 각각 방패와 창을 사지 않는다면 증명이 어려운 이야기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지 않기에 누군가를 부러워 할 수 없다. 과거에 다른 과거를 선택해 보지 않았기에 다른 현재를 생각해 볼 수 없다.

고로 어찌됐건 지금과 여기는 '나'의 최선이고 비교 대상이 없는 이상, 그 누구도 그 어떤 예상도 '나'보다 나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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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양육자 - 아이와 함께 사는 삶의 기준을 바꾸다
이승훈 지음 / 트랙원(track1)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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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멀리 아프리카까지 갈 것도 없다. 과거만 해도 사회는 함께, 아이를 '양육' 했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작은 아버지댁'에서 자랐다. 학교를 마치면 '작은아버지댁'에서 저녁식사를 했고 해가 질 때까지 놀다가 어두워지면 어머니가 데리러 오셨다. 이 기간은 꽤 길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 거의 일상이 그랬던 듯 하다. 농사일이 바쁘셨던 부모님을 대신해서 그랬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아이를 내 생계를 위해 '동생의 집'에 맡길 수는 없다. 사회는 꽤 파편화 됐고 개인화 됐다. 어쩌면 흔히 말하는 '뺑뺑이 돌리기'에 적합한 학원을 알아보는 편이 맞을 지 모른다.

그렇다면 학원은 아이를 '양육'할까. 아니다. 친척은 아이에게 '양육자'이지만, 학원 입장에서는 '고객'이다. 즉 아이는 '소비자'로써 서비스를 이용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 사촌형은 한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다. '한자교실'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명확하진 않다. 다만 한자교실은 '노인회관'에서 했다. 매주 1회 한자를 공부하곤 했다. 한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와 간단한 명심보감이나 논어의 한문장을 공부했던 듯 하다.

당시 나와 동생은 다른 사촌들을 데리고 '한자교실'을 다녔다. 교육비는 따로 없었다. 어른들은 각자 시간이 되는데로 자가용을 이용하여 노인회관과 집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곤 했다. 그게 당연한 사회였다. 키즈카페가 아니라 사촌네가 놀이터였다. 학교 또한 다른 의미의 교육을 했다.

'국어, 영어, 수학'이 아니라 사회성과 예절을 배울 수 있었다. 얼마나 잘 가르치냐보다 얼마나 존경할 수 있는지가 좋은 선생님의 기준이었다.

사회가 도시화 되면서 많이 달라졌다. 아이를 옆집에 맡기거나 친척에 맡기는 것은 꽤 염치없는 행동이 됐다. 한 두번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이를 길러내는 '양육'의 관점에서 장기적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아이는 대체로 '양육'되지 않고 '서비스 소비자'로써 존재를 갖는다. 서비스 소비자는 '갑'의 입장에 서 있다. 언제나 선택하고 평가하게 된다.

'어떤 학원보다는 어떤 학원이 낫다.'

'어떤 선생님보다는 어떤 선생님이 낫다.'

평가하는 입장에서 길러지는 아이에게 '교육'은 어떤 의미일까. 양육과 교육은 기본적으로 '동경'과 '존경'을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 닮고 싶다는 내부적인 존경이 없이 아이는 길을 잃는다.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최소한의 모델이 있어야 아이는 올바른 정체성을 형성하며 나아간다.

도시의 양육자들은 아이를 '양육'한다기 보다 길러낸다.

길러낸다. 교육하고 성장시키고 길러낸다. 이것은 물론 사전적 의미의 양육이지만 인류 보편적으로 사람을 길러내는 방식과 크게 다르다. 우리는 소와 돼지, 양을 길러낸다. 키우고 성장시킨다. 때로는 훈련견을 교육한다. 다만 이런 행동에 '양육'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서적, 정신적 성장을 돕는 것에 '양육'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서비스를 이용하다보면 우리는 묻는다.

'선생님 어땠어? 바꿀까? 마음에 들어?'

마치 옷이나 신발을 고르듯 '스승'을 취사선택하고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며 '스승'을 평가한다. 사회가 분업화되며 당연히 '육아 서비스'도 분업 대상 중 하나다. 아이를 길러주는 보모와 유치원, 키즈카페, 학원 등은 서비스업으로 치열하게 경쟁한다. 고객을 모시기 위한 싸움에서 '친절', '평가'는 필수다. 아이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서비스업체'에 좋은 관점을 가지기 힘들다. 실수는 당연히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봐야만 하는 문제일까.

우리는 아이를 '애완'으로 길러내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반려동물'로 사용하는 말이 과거 '애완동물'로 사용됐다. 보기 좋고 사랑을 주는 대상으로써의 장난감처럼 여기는 것이다. 현재의 육아 또한 '애완'의 의미로 많이 바뀌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머리를 하고 좋은 교육 서비스를 받게 하고 있진 않은가. 표면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들을 선택 함으로써 우리는 점점 '육아'를 '선택적 소비 활동'으로 여기고, 취향껏 원하는 이들이 골라 하는 '행위'로 보고 있다. 어쩌면 '산업화의 끝'은 저출산, 저소비, 저공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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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 현대 문명의 본질과 허상을 단숨에 꿰뚫는 세계사
수바드라 다스 지음, 장한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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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은 20세기 초반에 여러나라에서 널리 받아 들여졌다. 특히 독일과 미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정 유전적 특성을 장려하거나 억제함으로써 인류의 유전적 구성을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얼핏 보기에도 그럴듯 해보이나, 이는 비인륜적이고 인종차별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강제적 불임 혹은 결혼 제한을 통해 우월한 유전자만 남기는 일 말이다. 열등한 유전자는 강제 낙태하고 우등한 유전적 특성을 가진 사람들의 결혼과 출산을 장려한다. 결과적으로 전인류적 유전적 품질을 향상시킨다. 꽤 이상적인 생각이다. 실제 이는 법률로 제정되어 선진국에서 많은 인구가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았다. 독일에서도 유대인과 집시, 장애인 등 수 백만 명을 학살하는 홀로코스트의 기반이 된다. 우생학은 과학 혹은 윤리적으로 심각한 비판을 받는다. 그렇다면 우생학은 나쁜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생학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우생학의 아버지인 '프랜시스 골턴'은 영국의 통계학자이자 인류학자다. 그는 현대 우생학의 개념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인물이다. 비인륜적 사상의 시조, 그의 어머니 '비거 다윈'은 '로버트 다윈'의 여동생이다. '로버트 다윈'은 누구인가. 바로 '찰스 다윈'의 아버지다.

'찰스 다윈?'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설을 주장한 '진화론'의 아버지다. 진화론의 아버지와 우생학의 아버지는 '외사촌 지간'이다. 진화론과 우생학 또한 과학적으로 비슷한 뿌리와 출발점을 갖고 있다. 열등한 인자는 줄고 우수한 인자가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은 원인론적이다. 반대로 '열등한 인자는 줄이고 우수한 인자는 살아 남긴다는 '우생학'은 결과론적이다. 비슷한 근거로 시작했으나 완전히 다른 결과가 된다. 이러한 '우생학'은 불행히도 '제국주의 시대'에 꽃을 피웠다. 인간이 열등과 우월로 나눠지며 어떤 민족은 어떤 민족에 의해 지배를 받아도 된다는 의식의 기초가 됐다. 우수한 자는 열등한 자를 정당한 명분으로 지배할 수 있었고 개체수를 줄일 수 있었다.

수바드라 다스의 '세계의 열 가지 프레임은 역사, 과학, 사회 전반에 걸친 '백인 중심 세계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담은 책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의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은 다수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성을 갖는다. '비가 올 것 같기 때문에 비가 온다.' 가 아니라 물리학과 대기역학으로 설명한다.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다. 반박할 수 없는 논리성은 '힘'을 갖는다. 다만 결과적으로 이는 인종차별의 합리성을 제공했다.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맞는 것인가.

우생학을 통해 강제 불임, 강제 낙태, 인종청소 등의 비인륜적 행위는 역사에서 일어났다. 과학은 정당화의 기반이 되었다. 대체로 서구 문명에 대한 변호사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희생되었다.

수바드라 다스의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백인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의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과학이 항상 옳은 방향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편견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적 근거가 제시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윤리를 해치지 않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과학의 힘은 그 논리적 근거에서 나오지만, 그 힘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인간성을 해치는 논리와 근거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우생학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과학적 진보와 인간의 존엄성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이 인류의 일부를 열등하다고 규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비판해야 한다.

결국, 우생학은 진화론과는 달리 비윤리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사상으로 귀결되었다. 과학적 이론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것이 인류에게 도움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러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배워야 한다.

수바드라 다스의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진정한 과학의 힘은 인간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고, 보호하며, 나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있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얻은 지식을 인류의 공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명심해야 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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