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머리 키우는 기적의 독서 습관 - 단 10일이면 저절로 되는 내 아이 독서 습관 기르기
김기용 지음 / 미디어숲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캐나다 요크대학교 심리학자 레이먼드 마 연구원은 말했다.

"우리는 두뇌가 경험한 것과 책에서 읽은 것과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효과는 있을 수 있다. 다만 드라마와 영화는 대체로 3인칭 시점으로 상황을 표현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의 1인칭 시점을 경험 해보지 못하고 죽는다.

작가 레베카 솔닛는 글쓰기에 대해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말하는 행위다.'

즉, 글쓰기는 온전히 혼자하는 행위이면서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위다. 그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는 '비언어적 소통'에 영향을 받는다. 듣는 사람의 기분, 날씨, 그날의 건강상태 등.

다만 글쓰기는 온전히 혼자가 되는 시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 사색하며 나온다. 가장 솔직하고 그 어떤 표면적 대화보다 깊을 수 있는 이유다. 고로 대화를 많이 하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솔직한 감정은 혼자 있을 때만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런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인생을 꽤 다채롭게 사는 일이다. 본인이 직접 경험한 일도 기록하지 않으면 완전히 잊어 버리는데, 남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며 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나'는 지금의 '타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로 '과거'에 경험했던 것만큼 중요한 것이 '지금' 읽는 것이다.

때로 꽤 괜찮은 스토리는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로보트태권V가 서울 한복판에 나타나 63빌딩을 끌어 안고 있다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표현력이 풍부한 작가는 이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으며 이때 필요한 인력은 '작가' 한 사람 뿐이다. 심지어 제작비나 시간도 소요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이야기를 '영상화' 한다고 해보자. 여기에는 꽤 적잖은 제작비가 투여된다. '제작사'는 투자대비 효용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다양한 광고와 장치가 들어가고 그래픽디자이너, 감독, 배우 할 것 없이 너무 많은 인력이 고용되어야 한다. 또한 제작 시간도 적잖게 들어간다. '자본'에 의한 검열이 존재할 수 있고 구현 과정에서 퀄리티에 따라 몰입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혹은 지나친 몰입으로 '기술'에만 집중하고 더 많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

고로 '글'은 더 많은 상상력을 저렴하게 대량 생산해 낼 수 있다. 이러한 태생적 특징으로 'TV나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글'에 비해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부 '만화 영화'는 '경제성'의 이유로 비슷한 유형의 '인형'이나 '장난감'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다.

시크릿쥬쥬나 콩순이, 또봇의 경우에는 '영실업'이라는 완구 제조사의 캐릭터다. 터닝메카드와 헬로카봇은 손오공이라는 제조사의 캐릭터이고 로보카폴리와 베이비버스는 '아카데미과학'이라는 완구 제조사의 캐릭터다. 즉 자연스럽게 '영상'은 제품 홍보 광고가 될 수 밖에 없다.

최근 넷플릭스가 인기가 있는 이유도 사실 비슷하다. PPL이라고 부르는 광고가 때로는 작품의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까지 오고 있기에 다수의 사람들은 이 노골적인 '광고'에 불만을 품기도 했었다.

사실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다수의 플랫폼들은 '무료'인 경우가 많다. TV, 게임, SNS 등 이들이 '무료'로 제품을 이용하게 하면서 세계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 되는 이유는 이들의 영업구조가 '광고'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고로 스마트폰과 TV는 필연적으로 '거대자본'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또한 표현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독서는 이런 면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방 통행적인 다른 매체에 비해 꽤 능동적인 행위다. 언제든 멈출 수 있고 앞과 뒷페이지를 마음껏 오고 갈 수 있으며 읽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거나 앞부분을 훑어 볼 수도 있다. 읽던 도중 작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고 목차를 확인하면서 큰 흐름을 파악할 수도 있다.

결국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꽤 자유도 높은 방식으로 다른 이가 혼자한 사색을 훔쳐보는 일이고 다시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실제 경험과 구분해 낼 수 없다. 10살 아이도 하버드 대학교 교수의 생각을 훔쳐다 볼 수 있고 21세기에 사는 사람도 14세기 전쟁하는 장군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런 완전한 도구를 익히는 것은 꽤 좋은 스승 열댓명과 쪽집개 학원을 소개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이크와 팩트 - 왜 합리적 인류는 때때로 멍청해지는가
데이비드 로버트 그라임스 지음, 김보은 옮김 / 디플롯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실이란 무한한 길 속에 놓인 쉼표와 같다.'

끝없는 길 위에 잠깐의 멈춤 정도. 진실의 위치는 그 정도다. 언제나 '완전'하지 않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는 정도가 '진실'이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밖에 없다.'

'진리'가 변화 무쌍하다는 것은 고대 인도철학에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등장했는데 그것을 담은 글이 '금강경'이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한때, '우주의 법칙'으로 여겨졌다. 또한 수백 년 동안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했다. 더 나아가서는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뉴턴의 법칙은 우주를 설명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 졌다.

진리라고 여겼던 어던 법칙도 때로는 '영속' 중의 쉬어가는 '쉼표'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찾아 다니고 있지만, 절대적이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지식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고로 언젠가는 상대가 맞고 언젠가는 내가 맞는 수레바퀴와 같은 진리의 삶을 살고 있다. 언젠가는 평평한 지구가 맞고, 언젠가는 둥근 지구가 맞다.

다시 말해, 진리란 '하나의 완결한 결론'이 아니다. 진리는 '끊임없는 의심과 탐구, 재고찰의 여정 중에 잠시 도달하는 '찰라'와 가깝다. 가끔 너무 쉽게 가짜 정보에 휩쓸린다. 그리고는 그것이 진리에 가깝다고 여긴다.

다만 진리는 모두에게 주관적인 것이며 모두는 '진리'를 가장한 오류 속에서 속거나 속이고, 때로는 믿거나 신봉하기까지 한다.

고로 상대의 진리가 맞을 수도 있고 나의 진리가 맞을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으되, 나의 진리가 맞다는 나만의 철학이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철학과 상대의 철학을 모두 비판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도 갖고 있어야 한다.

'방사능 공포'라던지, '물이 모든 걸 알고 있다던지', '지구가 평평하다' 던지 하는 착각도 모두 그렇다.

과학적 '진리'라고 부르는 것들은 꽤 진리와 닿아 있지만 그 자체도 '과학적 권위'에 의해서만 '증명'되는 모순을 갖는다. 우리가 스스로 '비판적 사고'를 가져야 하는 이유다.

얼마 전, '지구가 평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관한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분명 현대 과학에서 말도 안되는 오류투성이다. 다만, 뇌로 들어오는 오감 자체가 화학으로 결과로 만들어진 '전기 신호'의 해석 뿐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 자체의 '진위'도 모두 '믿음'의 영역이다.

조현병 환자의 뇌속에서는 '환청과 환시'가 모두 실재한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은 컴퓨터 프로그램 상의 오류처럼 오류 투성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손이 솜뭉치처럼 둥글다고 여긴다. 그것을 확신한다. 어떤 사람은 지하철에 자신의 다리를 두고 왔다고 확신을 하고 어떤 사람은 여든이 된 실제 나이와 다르게 8살까지의 기억만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국정원'에서 자신을 감시한다는 완전한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그 사람들에게 '진실'은 거기까지다.

제3의 시선에서 '병'이 있다고 진단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완전한 세계다.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은 언제든 수정될 수 있다. 때로는 과학이 그것을 속일 수도 있고 정부나 신앙이 그것을 속일 수도 있다. 그것이 수정될 수 있음을 언제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병식없는 망상장애자처럼 완전한 세상을 깨지 못해 치료받지 못하는 것은 때로는 상대적 진리가 절대적 진리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모두 상대적 진리' 속에서 삶을 살며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절대적 접점'을 찾아 '공유 진리'로 설정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에서 모두는 끝없는 질문을 통해 상대가 가진 진리와 지신이 가진 진리를 비교하며 비판적 사고를 갖고 상대의 것과 나의 것 모두 진리일 수 있고 모두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결국 지구가 평평할수도 있다. '누군가의 진리'에 귀를 열고 자신만의 철학과 비판적 의식을 통해, 거짓과 진짜를 판가름 할 수 있는 다양한 사고를 해야 함이 틀림없다.

꽤 잘 만들어진 책이고 생각할 거리가 풍부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자백가, 인생 불변의 지혜 - 공자·맹자·순자·묵자·노자·장자·한비자
옥현주 지음 / 유노책주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자백가'란 중국 춘추전국시대 동안 나온 다양한 학파의 사상가들이다.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 이를 정리하기 위해 다양한 천재들이 고민했고 이후 그들은 인류의 스승격으로 지금까지 가르침을 준다.

대표적으로 학파와 사상가를 분류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가, 유가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예와 인을 강조했다. 대체로 '질서'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즉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소임에 최선을 다하면 세상은 저절로 질서를 잡고 아름답게 운영된다는 의미다.

이후 맹자와 순자가 이 유가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 시킨다. 개인적으로 성선설의 맹자와 성악설의 순자를 보면 '붓다'와 '애덤 스미스'가 떠오른다.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대체로 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역시나 모든 철학은 곧 하나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커다란 흐름을 이제 말하게 될 '도가'의 사상과 연결해 볼 수 있다.

도가, 도가는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한 학파다. '아이에게 평생 딱 한 권의 책을 읽힌다면 무슨 책을 읽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노자'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도가는 '무위자연' 즉 모든 것에는 순리가 있고 모든 것은 순리대로 움직인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이 꽤 수동적인 태도처럼 느껴질수도 있으나 원래 인위적인 것은 항상 힘을 잃고 순리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면 인생에 대한 능동적 행동과 수동적인 인정이 공존하도록 한다. 참고로 비틀즈의 'Let it be'를 보면 도가의 철학과 닮은 부분이 많다고 느낀다.

법가, 법가는 한비자의 사상을 대표한다. 한비자는 엄격한 법률과 통치를 통해 국가의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여겼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이기적이기에 상과 벌을 통해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자백가 사상 중에 가장 늦게 출현했으며 현대인들이 생각하기에 '합리성'과 맥을 같이 한다.

묵가, 묵가는 묵자를 중심으로 사랑과 평등을 강조한다. 묵자는 동양의 예수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사랑'을 강조했는데 그가 '묵'이라는 글자가 말하듯, 그는 출신 신분과 관련 없이 만인에 대한 사랑을 말했다.

제자백가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사상적인 틀은 우리 삶과 사회 구조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들의 탄생 배경에는 '혼란스러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태평성대 시대에는 아무도 고민하지 않던 것들을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고민하게 된다. 인간은 보통 '상처'를 입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쟁 이후에는 항상 커다란 번성이 있었고, 혼란 이후에는 이처럼 철학적 성장도 있었다.

제자백가는 단순히 중국에서만 중요한 철학은 아니다. 이는 같은 문화를 공유하던 일본과 한국 등에 영을 끼쳤다. 특히 유가의 덕치는 동아시아에서 오랜 세월 지배적인 통치 이념이었다. 또한 법가는 중앙집권 체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진나라와 한나라 법 제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런 학파들은 현대의 동아시아 문화에서도 교육, 정치 시스템, 윤리 기준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데, 현재 동아시아의 문화적 혹은 경제적 영향력을 감안했을 때, 그들의 영향력이 현대 '사피엔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자백가는 단지 오래된 사상이 아니다. 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혈관을 타고 직렬로 연결된 우리 조상들의 살았던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이었고 그것은 우리에에 전달되어 아이들에게 넘겨주는 중요한 철학적 유산이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수백년 혹은 천년도 훌쩍 넘은 오랜 선인에게 맡기고 우리는 지금의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범한 게 참 어렵더라
송인창 지음 / 온화 / 2024년 10월
평점 :
절판


루틴을 하나 만들었는데 하루 두 번을 헬스장을 가는 것이다. 가서 대단한 것을 하진 않는다. 그냥 트레드밀 한 시간 씩 걷고 오는 것이 전부다.

한번도 가져 보지 않은 루틴을 가지며 느낀 점이라면, 생각보다 이미 그러한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일과를 마치면 캔맥주를 따서 마시는 일상은 모두가 공유하는 삶이라 여겼다. 그것이 일반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각은 환경이 바뀌며 알게 됐다.

그렇다.

이미 그것이 루틴인 사람은 차고 넘쳤다. 건강한 루틴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비슷한 곳에 모여 있었다. 나의 루틴 중 그들을 만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 삶이 그러지 않은 사람들과 환경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랬다.

아침 일찍, 저녁 늦게 두 번을 운동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사람들은 과연 직업이 뭘까.’

대부분 무엇하는지 정확히 파악되진 않았지만, 벌써 알게 된 일부는 강사나 의사, 치과의사, 사업가 등이었다. 어쨌건 대부분 꽤 넉넉한 소득을 갖고 있을 법한 직업군들을 알게 됐다.

몇 명을 그렇게 알게 된 뒤에 옆에 운동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저 사람도 자기관리라면 꽤 하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일까.'

그러며 스스로를 보았다.

나의 경우에는 의지가 약한 탓에 거창한 '자기관리'를 목표로 운동을 시작하진 않았다. 그저 하루 시작과 끝에 샤워하러 가는 분위기로 루틴을 잡았다. 어차피 샤워는 해야 하고, 그냥 씻기는 뭣하니, 운동이나 좀 하다가 씻자는 꽤 엉터리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저 사람들이 나를 볼 때도 비슷하게 생각할까.'

송인창 시인의 ‘평범한게 참 어렵더라’를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우리는

공간, 공기, 환경이 같아도

각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오직 본인만의 관점이고

나의 색깔인 것이다.

파란색이어도 좋고,

빨간색이어도 좋다.

색이 섞여도 좋고,

단색이어도 좋으니

나를 나타내는 색깔로

살아갔으면 한다.

어떤 색깔이든

조화를 이룰수 있는 색깔이기에.

다른이들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트레드밀만 60분씩 두 번 타고 집으로 가는 ’나’ 라는 사람의 존재는 어떻게 비칠까.

어느 집단에 속해 있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겠다. 기본적으로 '나'의 속성은 '촌스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단한 환경에 있어도 '나'는 꽤 촌스러운 사람이다. 남들처럼 거창한 의지와 목표를 가지고 실행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꽤나 촌스러운 이유로 시작하고 마무리 짓는 사람이다.

아직까지도 소주보다는 콜라를 좋아하고 고급진 뷔페나 레스토랑보다는 죠리퐁에 우유를 말아 먹는 편을 '맛있다'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본질이 그렇다보니 나이가 먹을수록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평범함'과 거리가 멀어지는 사람이다.

책을 좋아하지만 방대한 지식인과는 거리가 멀고 10년 동안 해외에서 유학과 취업을 했지만 TV에서 보이는 잘난 '유학파'들과도 거리가 멀다. 어느 집단에 속해 있어도 항상 '이색적'인 것이 '고전적 의미'의 어떤 것과 괴리가 있다.

사람마다 색깔이 달라서 이런 사람도 분명 있겠으나 거시적으로 나와 닮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시기가 되면 '콜라'보다 '술'이 좋아야하고, '사이다'보다 '커피'를 좋아해야하고, '나이키'보다 '루이비통'을 선호해야 하겠으나, 나에게 술, 커피, 루이비통은 제 나이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위장하는 주변 아이템들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바쁘게 남들이 말하는 '보통'에 다가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삶을 낭비해 내고 있는 듯 했다. '나이값'하기 위해, '평범'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스스로를 보고 가끔은 안타깝게 여길 때가 있다. 송인창 시인은 '태권도'라는 진로에서 다른 진로로 삶의 배경을 바꾸었다. 그 과정에 다양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지나오며 했던 삶과 오버랩 된다.

생각해보면 너무 '스스로'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도 참 주책 맞을 때가 있고, 그렇다고 '평범'하고자 목숨거는 것도 참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냥 그 중간 적정선에서 걸쳐져서 마음속에는 스스로의 촌스러움을 가지고 겉으로 얌전 빼는 '인지부조화'의 삶이 '숙명'인 것 같다.

애초에 '평범'이라는 것은 워낙 쏜살같이 움직이는 과녁 같은 거니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 2장 수학의 힘 - 지방대 나온 엄마가 두 아이 서울대 보낸 방법
진미숙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앎'에는 '명시적 앎'과 '암묵적 앎'이 있다.

자전거 타기를 예로 들어보자.

명시적 앎이란 이런 것을 의미한다.

1. 자전거에 올라탄다.

2. 오른발과 왼발로 패달을 밟는다.

반대로, 암묵적 앎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0. 언어로 설명할 수 없으나 자전거를 탈 줄 안다.

그렇다.

'명시적 앎'이란 표면적 지식이다. 그 또한 아는 것이다. 그러나 '명시적 앎'만 가지고 자전거를 잘 탈 수는 없다. '암묵적 앎'으로 '앎'의 형태가 변화하기까지 '명시적 앎'의 도움을 받을 지언정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즉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에게 '한국어를 할 줄 아나요?'라고 묻는다면 '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한국어를 잘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자.

그 순간부터 엄청난 사족이 달리기 시작한다.

'매일 꾸준히 해라' 혹은 '드라마를 봐라', '일기를 써라' 등등

암묵적 앎은 '무의식'에 내재된 앎을 말한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언어화'할 수 없다.

고로 '암묵적 앎'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언어화'해야 한다. 이때 '암묵적 앎'은 '명시적 앎'의 형태로 변환된다. 그러나 '명시적 앎'은 '암묵적 앎'의 형태로 변환되어 저장되지 않는다.

'명시적 앎'은 그저 표면일 뿐이다.

2024년 올 여름은 꽤나 무더운 편이다. 자, 이 무더위를 언어를 언어를 통해서 '단 한번도 더위를 겪어보지 못한 '알레스카의 어린이'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온갖 수식에, 예시에, 설명들이 덧붙겠지만 상대는 스스로 경험했던 '암묵적 앎'을 다시 '명시적 형태'로 만들어 '상'을 지을 것이다.

고로 '안다'라고 하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다.

'학습'이라고 하는 것은 '배울 학', '익힐 습'의 한자를 사용한다.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다. 여기서 '학'은 명시적 앎을 아는 것이고, '습'은 암묵적 앎을 아는 것이다.

명시적 지식은 원래 일회만 얻어도 얻을 수 있다. 물론 '망각'에 의해 서서히 잊혀지겠지만 그래도 쉽게 얻을 수 있다. 언제나 책을 펴거나 인터넷을 열면 존재한다. 그러나 '암묵적 지식'은 쉽게 망각하지 않지만, 쉽게 얻지도 못한다.

해외로 여행을 가서 한달 간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어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유는 몸에 익은 '암묵적 앎'의 형태로 '한국어'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원이나 학원은 '명시적 앎'을 얻는 장소다. 이곳에는 당연히 분야의 전문가가 존재한다. 이들은 '암묵적 앎'이 충만한 인재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이 '암묵적 앎'을 명시적 앎의 형태로 바꾸어 전달하면, 학생들은 명시적 앎의 형태로 정보를 받아들인다. 고로 이것은 스승만큼이나 제대로 된 정보로 자리 잡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것이 암묵적 형태로 저장이 되는가.

바로 익히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학습'에서 학은 배운다는 의미이고 습은 익한다는 의미다. '학'은 즉각적이고 일회적이고 쉽고 빠르고 언어적이다. 반면 '습'은 지연적이고 지속적이고 느리고 경험적이다.

고로 모든 학습에서 '학'이 1이고 '습'이 99다. 그것은 경험적으로만 쌓이고 지속해야하고 느리고 경과는 지연적으로 나타난다.

'익힌다'라는 말은 '익다'를 기본형으로 갖는다. '익다'는 것은 '소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변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치가 익거나 과일이 익거나 삶은 고구마가 익는 것 모두 딱딱하거나 덜 성장한 어떤 것이 '성숙'의 단계로 시간과 과정에 의해 '소화가능 수준'으로 물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익히는 것'이다.

김치가 익고, 고구마가 익고, 과일이 익는 것처럼 어떤 것이 익혀지는데는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학습도 마찬가지다.

학습에서 '학'은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학습에서 '습'은 가져 온 재료를 익히는 과정이다.

소화할 수 없는 재료만 잔뜩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우리 몸에 쌓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몸에 쌓이기 위해 그것은 반드시 특정한 시간을 가지고 익어야 하며 그것은 반드시 경험에 의해 축적된다.

'고로 모든 지식은 경험에 의해 쌓여야 한다.

누구의 말처럼 실패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실패를 해보는 것이고, 실패는 거듭할수록 성공의 확률이 높아진다.

주사위를 던져서 6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주어진 6분의 1의 확률에서 하나를 사용했다는 의미이고, 그 다음의 도전 확률은 3분의 1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꾸준히,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고로 '방법'을 논하는 모든 자기계발서는 '작가'의 '진짜 진심'이 담겨진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