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트 인생 - 다정한 고집과 성실한 낭만에 대하여
문선욱 지음, 웨스트윤 그림 / 모모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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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위병소 근무는 지옥 같았다. 아침 일찍 시작해서 저녁까지 위병소를 지켰다.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부대 정문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일이던가.

다른 병사들은 무엇으로 시간을 채웠는지 모른다. 방탄모를 눌러 쓰고 K2 소총을 들고 말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하루를 보낸다. 앞은 심심함 그 자체였다. 구경거리는 흔들리는 나무 밖에 없었다. 기껏해봐야 관리되지 않은 '임야지'가 있을 뿐이었다.

가끔 재밌는 선임을 만나면 '너는 뭐하다가 왔냐?'며 주거나 받았다. 친구와 사업하던 고참, 여친과 동거하던 후임, 연예계에서 활동했다던 이까지.

그들의 인생은 다양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나면 어느새 3시간, 4시간이 지나갔다. 여행 간 일, 이별 이야기, 사랑 이야기, 사기 당한 이야기, 불행했던 가정사 등. 갓 스물이 넘은 청년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흥미로웠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나는 말 없이 '임야'만 바라봤다. 떠올릴 추억이 많지 않음을 깨달았다.

학창시절은 기껏해봐야 '학교', '집'이었다. 가정사는 아쉽게(?)도 화목한 가정이었으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왕따를 시키지도 않았다. 큰 이탈을 하지도 않은 무난한 삶이었다. 일상의 가장 큰 '이탈'이라면 '군입대'를 했다는 것 쯤일까.

함께 '근무' 서던 선임들은 '그 새끼, 참 더럽게 재미없게 살았네...' 했다.

이후부터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그림자를 봤다. 내리 6시간 이상을 봤다. 그러던 것이 나중이 되면 아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 한곡이 3분이면 스무 곡이면 한 시간'

알고 있는 모든 노래를 마음속으로 다 불러도 1시간을 채우지 못함을 깨닫고 머릿속에 무얼 채우고 살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떠올릴 추억도 크지 않다. 아는 바도 많이 없다. 그 후회감에 전역 후를 다짐하게 됐다.

100일 휴가를 받고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무릎이 좋지 않으셨다. 하루종일 방에만 계셨다. TV는 채널 9번을 항상 고정하고 보셨다. 일병 휴가를 받고 할머니를 뵀을 때도 할머니는 TV채널 9번에 시선을 고정하셨다. 가만히 하루를 보내셨다. 상병 휴가 때에도, 전역을 앞둔 말년 휴가 때에도 그러셨다.

부대 복귀를 하고 내무반 천장을 바라봤다. '거참 시간 더럽게 안가네...'하고 푸념을 하는데 문뜩 할머니가 떠올랐다. 아마 지금도도 9번을 고정하시고 계실 것만 같았다.

몇 시간의 근무, 군생활 2년 조차 견디기 무서울 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내성적인 손자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설 향수의 주인공이 '자신의 몸'에는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처럼, 나는 존재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휴가차 할머니댁에 갔을 때, 함께 TV를 말없이 보며 시간 때우고 왔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선임들에게도, 할머니께도 향기 없는 사람인듯 했다. 그만큼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자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병상에 누워 보낼 노후를 생각하면 쓰지 못해 죽을 '통장 잔고'보다 떠올릴 추억이 많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 '스릴러', '코미디'. 뭐든 추억이라면 쌓고보자.

그것이 내 20대의 '철학'이다.

'문선욱'작가의 '저스트 인생'을 보니, 지나치게 '현실'에 몰두하던 30대 후반의 스스로가 보였다. 또다시 '일', '집', '일', '집'하며 재미없는 시간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 보게 됐다.

20대의 나의 선택은 그런식이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을 것을 선택해보자.' 나는 나를 너무 잘안다. 스무 살의 나는 '학교와 집'의 반복이었다. 나는 루틴을 지키며 재미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특별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평범한 사람이 나는 너무 쉽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 뒤로 내가 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습관이 생겼다. 20대에 JYP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노래와 춤을 추고 인기상을 받았다. 과묵하고 내성적인 내가 하지 않을 선택이지 않은가. 난데없이 가방하나 들처매고 유학을 떠나고 구글에 노출된 세계 바이어들에게 메일을 보내 컨테이너 단위의 상품을 수출하기도 했다.

20대에 나를 움직이던 생각은 '언제 해보겠어?' 였다. '언제 해보겠어?'는 꼭 좋은 모습으로 결과를 만들진 않았다.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서른 넘어서 삶이란 '즐기는 것'에서 '생존해 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하다보니 뭘하고 있는줄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김영하 작가가 중국으로 글을 쓰러 갔을 때, 비자 문제로 되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며 '이 또한 소재가 되겠네' 했단다. 번뜩이는 말이다.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은 소재다. 문학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일상을 빼다박은 지지부진한 이야기에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공포', '스릴러'와 같은 '극적인 상황'을 모두는 선호한다. 누군가는 돈주고도 구경하는 그 일을 직접 체험 해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지 않을까.

잊혀졌던 나의 철학이 스믈스믈 살아난다. 삶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재밌고, 보는 것 보다는 해보는 것이 재밌다. 그런 의미에서 희노애락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같은 일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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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주다 - 사이비 종교 전문 탐사 기자의 국내 최초 잠입 취재기
장운철 지음 / 파람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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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철' 작가는 30년간 사이비, 이단 현장을 취재, 분석 보도한 전문기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에 '밥 먹고 X싸는 신'은 50명 가량된다.

스스로 '신'을 자처하는 '인간' 말이다.

과거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 있다. '우리나라가 맞나?' 싶은 이야기가 적잖게 쏟아졌다. 허구를 이야기한 페이크 다큐인가 싶을 만큼 놀라웠다.

가끔 취재 프로그램이나 뉴스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내용이긴 했으나 그토록 적나라하게 보여진 다큐는 처음이었다.

심신이 나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믿음'을 인질삼는 이단 종교는 당사자 뿐만아니라 그 주변을 초토화 시켜 버린다.

비슷한 경험은 여럿있다. 신논현역에서 강남역 방향으로 걸어 가다보면 몇번 씩 길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교보문고가 어디에 있나요?'

직선거리로 수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의 '장소'를 묻는다.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키면 '감사합니다.'하며 이내 본색을 드러낸다.

'혹시 인상 좋다는 이야기 안 들으시나요?'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조상 '덕'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스토리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끝까지 들어 본 적은 없다. 다만 지인에 따르면 그들을 따라 끝까지 가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결국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차림비용'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차림비용은 50만원에서 200만원 정도되고 형편에 따라 더 내거나 덜 낸다고 했다.

'정운철 작가'의 '나는 교주다'에 이 같은 사이비, 이단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개 기독교나 불교의 이단과 사이비를 다룬다. 어쨌건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흔하다.

사이비 이단은 아니지만 혹은 알 수 없지만 비슷한 경험은 있다.

지인을 따라 소규모 교회를 간 적이 있다. 교회는 당구장과 노래방 위와 아래로 위치한 빌딩에 자리했다. 규모는 크지는 않았고 3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설교'를 들었다. 설교가 끝난 뒤, 목사 님은 지하 주차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함께하는 교인들이 함께 했다. 지하 주차장에 억소리나는 검정색 고급 세단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목사님의 고급 세단 자동차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공단 지역으로 갔다.

'흰가운'을 입으라고 하셨다. 가운을 입고 성큼 성금 바닷가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허리까지 잠기는 곳에 이르자, 목사님은 주문했다. 목사님 말씀이 하시고 머리를 밀면 머리 끝까지 바닷물에 담구라는 지시였다.

그 의식을 3~4회를 하고 돌아왔다.

일부는 사진을 촬영했고 얼마 후 내 사진이 해당 교회에 동의없이 걸렸다.

나중에 듣기로 '침례교'라고 했다. 침례교에서는 머리가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의식을 진행한다고 했다.

내가 다녀온 교회가 이단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만나는 교인 중 일부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네'하는 쪽과 '그럴 수도 있어'라는 쪽으로 나눠졌다.

이에 관해 가치판단하지 않겠다. 어쨌건 독특한 경험인 것 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사이비'이건,아니건 개인적 믿음에 관해서는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헌금을 얼마를 하고 종말설을 믿거나 말거나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만 어떤 단체는 '치유'나 '치료'를 행한다. 거기서부터는 분명한 반감이 생긴다.

유튜브 어느 채널을 보니 목사가 '조현병', '정신질환', '자폐', '암'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얼핏 목사가 뭐라고 주문을 외우고 이마에 십자기를 긋거나, 소리를 지르도록 요한다. 규모가 작지도 않다. 이 장면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한다.

개인적으로 그때부터는 강력한 반감이 든다.

단언컨데 '병에 관해서는 '목사'가 아니라 '의사'의 몫이다. 병원을 다니며 영적치유던 믿음치유건 병행하는 것은 괜찮다고 본다. 다만 어떤 목사는 '의사'를 불신하고 '교회'에서 치유하는 것만을 강요한다.

어떤 질병은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치료기간을 놓치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교회' 내에서 이뤄지는 치료는 때로 효과가 있기도 하다. 이는 '플라시보'라고 알려진 '위약효과'와 비슷한다. 플라시보에 해당되는 질환들은 때로 치료자에 대한 강한 믿음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자연치유되는 질병들이 포함된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약은 '플라시보'가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치료는 때로 입소문을 타기도 한다. 다만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에는 강한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장운철 작가의 '나는 교주다'에는 다양한 사이비 이단이 등장한다. 피가 거꾸로 솟는 거짓 사기꾼들의 만행과 이해가 어려운 단체와 사람들이 이야기는 흥미롭게 읽히다가도 강한 호기심이 불러 일어난다. 그러면서 가끔은 몹시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모아보니 먼 이야기 같으면서, 어쩌면 흔한 이야기 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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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배우는 시간 - 말이 넘쳐나는 세상 속, 더욱 빛을 발하는 침묵의 품격
코르넬리아 토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서교책방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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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의 최악의 적은 '선의(善意)'다. '말'은 '의도'는 좋았으나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선의(善意)는 그런 의미에서 선(善)과 가장 먼 어떤 것일지 모른다.

요즘은 컨텐츠가 넘쳐 말하고자 하는 사람도, 말도 많다. 예전 같으면 귀를 기울여야 할 정보가 흔하다 못해 독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말할 창구가 많아졌고 들을 창구도 많아졌다. 고로 쉬운 인스턴트 말들이 너무 가볍게 오고 간다.

좋은 의도로 입을 벌렸으나 그것은 누군가를 죽이기도 한다. '좋은 의도'를 가장한 '악플'이다. 이것의 가장 나쁜점은 '선의(善意)'를 가졌다는 '의도' 때문이다. 한번은 아이의 교육에 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댓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자란 아이의 미래가 걱정스럽네요. 잘못 키우시고 계신 것 같아서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서 댓글 남겨요.'

아이의 교육에 관한 글은 아이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있다는 글이었다.

해당 글에 댓글 작성자는 말했다. 요즘 시대에 '한자'는 중요하지 않고 한자를 배우는 것은 사대주의적 사고 방식을 강제 주입한다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디지털교과서'가 도입되는 시대에 '스마트 기기'를 하루라도 빨리 사용하게 하는 것이 미래 세대에 좋다는 이야기였다.

진심으로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어 장문의 글을 쓴다는 댓글 작성자의 '선의(善意)'가 느껴졌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형식적인 답변을 달았다. 몇분 뒤에 다시 댓글로 '성의 없는 답변이네요. 안 바뀌실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라고 달렸다.

본문에는 꽤 많은 응원의 글이 달렸으나 '선의'를 가졌다는 하나의 댓글은 집요하게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라는 말로 나를 설득하고자 했다.

사람의 종류는 워낙 다양하여 생각도 다양하겠지만 '누군가의 선의'가 반드시 좋은 의도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고로 내가 믿는 진리가 비록 객관적 진리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할 때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는 나의 교육철학을 비판하며 끝까지 나의 교육관이 바뀌기를 기대했다. 몇번의 대화를 하다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다면 그것은 상대의 의견일 뿐 진실은 아니다. 고로 상대의 말은 상대의 말대로 두고 스스로가 가진 생각을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모든 말에 귀를 닫는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독서의 가장 좋은 점이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독서는 입을 닫고 듣는 행위다. 책을 읽을 때 모든 사람들의 입을 닫는다.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하여 동영상을 채보기도 전에,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스크롤을 내려 '답글'부터 다는 세상이다. 수학자 파스칼 또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오로지 방 안에 조용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했다.

세상의 템포가 빨라지면서 그곳에 함께하는 나의 템포도 조급해짐을 느낀다. 최근들어 '유튜브 영상'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당연히 책을 보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 들었다. 아마 정신적 피로도가 높아져 넋놓고 볼 수 있는 매체를 찾아서 그런 듯 하다. 다만 아이러니하게 그렇게 영상을 찾아 볼수록 점점 정신이 '멍'해짐을 느낀다. 영상이 끝나면 이어지는 다른 영상, 그 영상이 추천하는 다른 영상을 쫒다보면 어느새 꽤 많은 시간이 흘러 버린다. 다시 스마트폰을 내려 놓고 책을 든다.

TV 생방송은 잠시 쉬어가는 그 1분의 짧은 시간에도 '휴식'이 아니라 '광고'를 집어 넣는다. 즉 우리 현대 사회에서 휴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코르넬리아 토프'의 '침묵을 배우는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물론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도 가능하다.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 빵에 잼을 바를 수도 있다. 다만 그때조차 입을 다물면 더 빨리 골고루 잼을 바를 수 있다.'

TV를 보면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거나 스마트폰을 볼 수도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책이 사람을 조용하게 만드는 것은 니체의 말처럼 책이 가진 꽤 괜찮은 장점인 것 같다.

'귀인이론'에 따르면 말이 적으면 더 똑똑하고 교양 있고, 유능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실제로 어떻든 말이다. 게다기 여기에 미소까지 더해지면 20%는 더 지적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최근 머릿속이 꽤 시끄럽고 어지러운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나의 입은 다물어 있었다. 워낙 내향형 인간이라 불필요한 말은 애초에 많이 하진 않지만 그래도 지나고나서 '그 말은 왜 했을까' 싶은 순간들이 있다.

최근 새로운 앨범을 발매한 '지드래곤'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말투가 바뀌었다'라는 댓글이 많다. 이에 대해 그는 '말에 무게'를 알게 되어 조심스러워졌다고 답했다. 그렇다.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에는 '말'의 '꼬리'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이들이 많다. 그러다보면 '본질'이 흔들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고요한 사회가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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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로 살 뿐 1 - 원제 스님의 정면승부 세계 일주 다만 나로 살 뿐 1
원제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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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할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원제 스님'이 하는 말이다. 말에 따르면 영원한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러한 사랑을 찾는 사람의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고 뒤바뀌기 때문이다.

스님의 '세계여행기'라는 꽤 독특한 소재의 에세이를 서점에서 골라왔다. '술술' 읽히다가 어느 순간에는 '스님'이라는 '작가'의 특성과 '세계여행'이라는 소재 때문에 적잖은 의문을 받을 듯였다.인터넷 서칭을 해보니 실제로 그랬다.

수필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모두는 다만 스스로를 살 뿐이다. 다만 직업이 주는 정형화 된 틀에 적확한 인물이 되기를 사람들은 바라는 모양이다. '선생'은 용모 단정하고 바른 삶을 살고 '스님'이라면 '속세'와 '욕'에 먼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강박은 모두 가지고 있다.

물론 그런 모습이 직업의 본질에 가깝다. 다만 과연 '직업적 본질'에 '자아'를 일치하는 삶이 스스로의 선인가는 생각해볼 만하다.

글을 쓰다보면, 우연히 알고리즘에 노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기회를 얻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적잖히 놀란다. 생각보다 생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프로불편러'들도 많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악플'이나 '욕설'도 많다. 그들이 존재하는 바와 같은 이유로 '나' 또한 다만 '나'로 존재할 이유가 된다.

얼마전 지인과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담배피는 학생을 보았을 때, 훈계를 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로 지나가다가 중학생 무리가 담배피는 모습을 보고 훈계한 적은 있다. '훈계'라기보다 '끊으라고는 안 할테니까, 어른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피우라'고 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담배끊어'라고 한다고 그들이 끊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학생의 흡연은 '불법'도 아니다. 그들을 보며 '어짜피 본인 인생'이라고 답한 적 있다. 어른으로써의 무책임일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모든 일에 훈계할 수는 없다.

공부는 왜 안하니, 집에는 언제 들어가니, 집에 들어가면 손은 씻었니, 등

학창시절 친구들과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어른에게 훈계를 받은 적 있다. 늦은 시간도 아니고 친구들과 축구 게임 2시간 했을 뿐이다. 그 훈계를 받았다고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의 인생에 관여하려면 겉으로 드러나는 이상의 책임을 지어야 한다. 대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만큼 묵직한 책임을 갖지 않으면 스스로 질 수 있는 책임 정도까지만 관여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쨌건 삶의 종류는 워낙 다양하다. 고로 '저런 삶'도 '삶이다'하고 관용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통계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하루 한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고로 매일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고 누군가는 살해 가족이나 지인이 된다. 다시 누군가는 당사자가 된다

극단적인 '살인'을 예로 든 것은 그런 극단적인 일조차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라는 일이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여기는 일과 '보통', '평범'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며 움직일 수 있는지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개성있는 스님을 알았다. 세상을 보며 자기 공부를 하고, 세상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자아에 내가 담겨 함께 세계를 여행한 느낌이다.

책에는 '차경'이라는 '모자'가 등장한다. 원제 스님은 여행 중 구매한 모자에 '차경'이라는 한자로 된 이름을 지어준다. 모자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소지품에 모두 이름을 짓는다. 이름이 지어지고 거기에 인격을 부여하면 비로서 관계가 형성된다. 단지 '도구'에서 '관계'가 형성되니 꽤 인간과 닮은 추억거리도 만들어진다. 이를 보며 스스로도 주변 소지품을 '도구' 이상으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본적으로 여행 서적을 좋아하지만 이번 여행책은 꽤 매력적인 소재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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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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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외부의 것들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다. 동시에 스토아 학파 철학자다. 그가 통치하던 로마는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 말년에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으로 제국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어려움 속에서 그는 황제의 의무를 다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쓴 '명상록'에는 '외부의 평가나 물질적 풍요로움'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를 보는 일을 강조한다. 실제로 명상록 자체가 누군가를 위해 썼다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쓴 글의 모음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삶에 대한 접근 방법이 극명히 다르다. '개츠비'는 외부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자 했다. '청교도'가 세운 국가에서 '물질'의 풍요가 주는 가치는 중요했다. 신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청교도인들은 절제와 성실, 금욕과 같은 덕목을 강조하는 경건한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 다만 이런 청교도적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성공'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이후 경제적 성공이 내면적 가치를 넘어서는 지경에 이른다.

청교도의 신념에는 '소명의식'과 '세속적 성공의 표지'라는 개념이 있다. 이들은 '부유함'은 하늘이 주신 사명으로 보았다.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은 신앙적 가치와 일치한다고 봤다. 고로 경제적 성공은 '신'이 준 축복으로 해석하면서 '부유함'이 도덕적 타락이나 탐욕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즉 청교도에서 '풍요'는 내면에서 차고 넘쳐 외면으로 현상이 발현되는 일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여지는 '외면'만이 주목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인지부조화' 같은 혼란을 겪는다. 본질을 잃고 '물질적 풍요'에만 집중하는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를 '위대한 개츠비'는 보여준다.

개츠비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사회적 성공과 부를 강조한다. 당시 그에게 이는 사랑과 인정을 얻는 꽤 그럴싸한 방법이었다.

화려한 저택, 사치스러운 파티는 자신을 포장하는 수단이다. '개츠비'는 이러한 '겉포장'이 '본질'에 닿을 것이라 여겼다. 데이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결국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하고 공허하게 만든다. 그것이 소설의 핵심이다.

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가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내면의 안정과 자아의 충실함을 외부적인 인정이나 물질적 성공보다 더 강조했다. 그는 스스로가 황제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자신을 더 성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면에서 개츠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멀리서 보기에 완벽한, 그러나 가까이 보기에 공허한,

꽤 그럴싸한 모습을 보이며 사는 삶.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대의 우리는 앞서 말한 '청교도'의 이념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웠던 철학적 배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 또한 유교가 만들어 둔 틀에서 '미국'이 발전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적당히 섞으며 살아간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는 처음에는 완벽해 보였다. 그녀는 우아했고 상류층의 품격을 갖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개츠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부와 명성을 쌓는다. 비로소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개츠비'라고 브리기도 한다. 다만 데이지와의 만남이 현실로 다가갈수록 그는 점점 그가 사랑했던 실체가 아니라 허상을 깨닫는다.

데이지는 '인격'으로써 한 여인일지 모른다. 다만 비교해 보건데, 우리가 어쩌면 '세속적 성공' 뒤에 얻게 될지 모른다는 '본질'을 닮았다. '세속적 성공'을 얻고나면 우리는 '그것'에 조금 더 가까워 질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다만 실제 '성공'에 이르면 우리는 '허망함과 공허함'을 느낀다.

멀리서 보기에 완벽한 그것들은 가까이에 다가갈수록 허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현대 SNS를 보고도 느낀다. 개츠비가 그의 전 재산을 걸고서라도 데이지와 진정한 사랑을 하고자 했던 것 처럼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만족감을 위해 하는 행위일 뿐이다.

한 사람의 성공이나 행복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장식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 내재된 의미와 가치를 통해 완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 '외면을 채울 것이 아니라, 차고 흘러 넘쳐서 외면조차 가득 메우는 내면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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