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가 묻고 니체가 답하다 - 비관마저 낙관한 두 철학자의 인생론
크리스토퍼 재너웨이 지음, 이시은 옮김, 박찬국 감수 / 21세기북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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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욕구'로 움직인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고, 외로우면 이성을 만나고 싶어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갖기 위해 움직인다. 이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하고 이루려고 노력한다.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다. 이를 '욕구' 혹은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원하는 것을 이루면 우리는 만족감을 늘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우리는 잠시의 기쁨을 느끼지만 다시 공허함을 느끼고 다른 '원함'을 갖게 된다.

즉, 인간은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끼고 항상 공허함을 갖는다. 결국 완전한 만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고로 삶이 끊없는 고통이라고 봤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채우는 어떻게 보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저주 받은 챗바퀴를 돌리는 삶과 같다.

우리를 소진시키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 챗바퀴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쇼펜하우어는 답했다. '의지', 즉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는 삶을 살면 된다. 다시말해서, '바람'이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움직이지말고 그저 그 자체가 의미가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그냥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을 하되, 성취를 위한 무언가를 내려 놓는 것이다. 타인을 돕거나 자연을 감상하는 일은 '성취'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고로 '성취'를 목표로 하는 삶은 '고통'을 필연적으로 만들기에 '성취'라는 '욕구'를 덜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쇼펜하우어를 가장 평면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럼 니체는 어떤 사람인가.

그 또한 아주 평면적으로 설명해보자.

니체는 '삶의 방식'에 대한 정의를 부정했다. 즉, 니체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삶에 정의'가 필요했다. 대개 그 '정의'는 '신'께서 내려 주신 경우가 많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신'은 '인간'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이 많다. 정해진 법칙이 존재하며 그 법칙에서 어긋난 삶을 '오류'로 정의 했다. 니체는 '이 생각'에 의문을 품었다. 종교나 전통적인 가치가 삶에 피로도를 준다고 봤다.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

즉, 자신의 의지가 '신'이 내린 '삶의 정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초인'에 대한 언급을 했다. '초인'이란 누군가가 정해준 길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을 뜻한다. 가령 아무개가 '어떠한 삶을 살아라'라고 말해도 흔들림 없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택하는 사람이다. 이런 삶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초인'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만나는 '고통'에 맞서라고 말한다. 고통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초인'으로 가도록 만들어주는 '주재'가 된다. 쇼펜하우어가 피해려 했던 그 '고통'이라는 '소재'를 니체는 직면해야 할 과제로 여겼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여겼다. 힘든 일을 겪을 때,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삶은 끝없는 고통이고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봤다. 고로 삶에서 '고통'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니체는 답한다. '고통'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다. 피하지 말고 부딪쳐라.

쇼펜하우어는 '행복'하기 위해,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려 놓으라고 말한다.여기에 니체가 답한다. 더 강한 욕망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얼핏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 '어떤 삶을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여기서 의문은 '삶'은 '성장'보다 '행복'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는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다만 '니체' 또한 '행복'을 말한다. '니체'는 진정한 행복이란 '편안함과 즐거움'이 아니라 극복과 성장에서 얻어지는 기쁨이라고 봤다.

성취를 했을 때 얻어지는 '성취감', '자부심' 이런 것들이 진짜 행복이고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피하고 도망가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우고 도전하면서 얻어진다고 봤다.

누구의 행복론이 정답인가.

그런 것은 없다. 철학은 '답'을 내놓는 학문이 아니라 그저 '질문'을 내놓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의 답도 옳지 않고, 누구의 답고 그르지 않다. 거기에는 애초 '답'도 없고 두 철학자 또한 답을 내린 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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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 - 茶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0
라오서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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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서'는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찻집'이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 '50여 년의 중국 역사를 압축적으로 볼 수 있다.

극은 총 3막으로 이뤄져 있다.

제1막은 청나라 말기인 1898년 무렵이다. '왕이발'이 운영하는 찻집이 배경이고 찻집이라는 공간에서 다양한 손님들이 모여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제 2막은 군벌 시대인 1916년 무렵이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새로운 군벌들이 나타나면서 사회가 혼란스럽고 찻집도 쇠락하기 시작한다.

제 3막은 국민당 통치기인 1945년 이후다. 찻집은 거의 망하길 확실해졌다. 찻집 주인 '왕이발'도 몰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3막으로 희곡은 마무리 된다.

희곡은 중국 근대사를 축소판으로 보여준다. '찻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으을 통해 50년의 중국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 근대사에 대한 단면을 '개인'의 일생으로 다룬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는 '중국 역사'를 다루고 있지 않다. '푸이'라는 '개인'의 서사를 담는다. 그 개인이 겪는 파고 속에 중국 역사가 모두 담겨져 있다.

개인의 '삶'과 '정치'가 분리된 듯 하지면 분명하게 이어져 있다는 인상을 두 작품 모두에서 가질 수 있었다.

극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고위 관리, 상인, 거지, 군인, 관상가 등. 등장하는 인물들이 오고 가고, 사건을 주고 받으며 당시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중국을 배경으로한 영화의 '마지막 황제'와 비슷하게 '미국'을 배경으로 하며 개인의 삶이 역사를 훑고 지나가는 '포레스트 검프'와도 겹친다.

소설의 배경을 다시 톺아보면 이렇다.

제 1막 청나라 말기는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하고 서태후가 권력을 장악하던 시점이다. 당시 중국 사회는 봉건 체제의 붕괴 조짐을 갖고 있어다. 서구 열강의 침탈이 가속화된다. 극에서 적잖게 '정치 이야기를 하지말라'거나 '서양'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을 보자면 1957년 극이 발표된 시점이 '중국 공산당' 집권 시기와 겹치기 때무느로 보인다.

찻집은 여전히 번성한다. 내부에는 개혁과 보수 사이의 갈등이 표출된다. 개혁에 대한 범위와 속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던 구한말 우리 모습도 떠오른다. 왕이발의 찻집은 앞서말한 바와 같이 고위 관리나 상인, 거지, 군인 등이 어우러져 시대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제 2막은 군벌 시대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위안스카이가 제정을 선포하려다 실패한다. 중국은 군벌들이 각지에서 권력을 차지하는 혼란기에 접어든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가운데 찻집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왕이발 역시 변하는 시대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찻집을 찾는 손님들의 모습에서도 사회적 계층의 이동이 보여지고 신흥 세력의 부상도 보여진다. 기존의 질서는 붕괴도고 새로운 권력이 등장한다.

제 3막은 국민당 통치 시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일본이 패망하고 중국은 국공 내전으로 치닫는다. 국민당 정부는 부정부패로 신뢰를 잃는다. 공산당은 세력을 넓혀가며 찻집은 거의 폐업 상태에 이른다. 왕이발 역시 몰락한다. 50년의 시간이 흐르며 찻집은 더이상 과거의 활기를 찾지 못한다. 희곡은 찻집의 쇠락과 함ㄱ ㅔ중국 사회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끝을 낸다.

찻집이라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작은 공간에서 여러 인간 군상의 대화를 통해 정치적 변화와 개인의 삶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현대 우리도 미래에서 보건데 '역사'의 한 중심에 있다. 먼 이야기가 아니라 '스타벅스'를 가면 다양한 사람들이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 모두가 '역사'와 '정치'를 대변하는 이야기들이다.

'비트코인', '트럼프', '러우전쟁', '비상계엄'은 적잖게 우리 일상 대화에 스며들어 있고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찻집'인 '스타벅스'에 방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한민국과 세계사'의 단편을 나타내기도 한다.

극은 짧지만 강렬하다. 찻집이라는 희곡은 단순 문학이 아니라 시대를 증언하는 한편의 기록이자 중국 역사를 이해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깊으면 더 흥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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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분을 찾습니다 - 나치를 피해 탈출한 유대인 아이들의 삶
줄리언 보저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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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되지말고, 피해자가 되지도 말되, 절대, 결단코 방관자가 되지도 말라."

홀로코스트 학자 예후다 바우어의 말이다.

2020년 12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서아프리카 국가 출신 망명 신청자들을 대규모 추방했다. 서아프리카 국가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사회다. 고로 당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언론과 인권 단체의 비판이 거셌다.

줄리안 보저 역시 당시 그들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었다. 망명 신청자들을 다시 카메룬으로 추방 시키는 것은 직접적인 위협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비판을 기사화 하던 중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던 법학교수를 알게 된다. '루스 하그로브'다. 줄리안 보저는 그렇게 그와 연락을 주고 받는다.

연락을 주고 받으며 그의 아버지가 1938년 빈이 게슈타포에 넘어간 후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그의 외가도 1906년 오데사에서 유대인 학살을 피해 탈출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 과정에서 줄리안 보저는 자신의 조부모가 나치 치하의 빈에서 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멘체스터 가디언'에 광고를 실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멘체스터 가디언'은 현재 그가 일하고 있는 '가디언'의 전신이다.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과거 조부모의 광고'의 이야기는 그렇게 '루스'에게도 전했다. 그러자 '루스' 또한 자신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같은 방법으로 탈출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줄리안 보저'는 자신의 직업의 장점을 십분활용한다. '가디언'의 기록 보관 담당자에게 자신과 '루스'의 이야기를 전한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탈출시키기 위해 '가디언'에 실었다는 광고를 찾을 수 있는지 말이다. 그렇게 '기록 보관담당자'는 1938년 8월의 광고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교습'이라는 여섯개의 토막광고가 있었는데, 개중 그들의 '성'을 찾는다.

"훌륭한 빈 가문 출신의 제 아들, 총명한 11세 남자아이를 교육시켜줄 친절한 분을 찾습니다. 보거 가. 빈 3구, 힌처슈트라세 5번지 12호"

기재된 주소지를 보고 그는 확신을 했다. 그의 가족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이다. '총명한 아이'란 '아버지'를 가리킬 것이다. 광고주는 자신의 조부모일 것이다. 역사적 배경에서 자식을 탈출시키기 그 흔적이 '광고' 속에 그대로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광고'는 '나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절한 사람'을 찾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이렇게 광고에 실린 아이의 숫자는 총 여든 명이었고 이들 전부가 빈 출신이었다. '줄리안 보저'는 그들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이미 100년이 된 이야기, 당사자들을 찾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한 그는 당사자의 자녀를 찾기로 한다. 이렇게 3대에 걸친 흔적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

현대에서 시작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고 다시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로 거슬러 내려가는 이 추리 속에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인간성'에 대한 공감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친절한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여섯 다어 속에서 시작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오스카 쉰들러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유대인을 고용하면서 구햇던 것 처럼 줄리안 보저는 자신의 조부모가 남긴 흔적으로 과거 난민과 현재 난민이 겪는 공통된 운명을 발견한다.

2025년 다시 트럼프 행정부가 취임하면서 어쩌면 과거의 기억이 다시 새롭게 떠오르는지도 모른다. 난민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인류의 문제다. 우리 대부분은 1938년 빈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 대해 '참혹한 역사'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현대'에 벌어지는 '난민 추방'에 있어서는 '국익'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다. 과연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며 미래를 결정하는 나침반이다. 줄리안 보저와 루스 하그로브가 그들의 가족사를 좇아가며 발간한 것은 단순한 광고나 기록이 아니라 인간성과 연대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는 가해자가 될 것인가, 피해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방관자로 남을 것인가.

그도 아니면 100년 전 작은 신문 광고 속처럼, 어떤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았음에도 행동하고자 하는 '친절한 사람'이 될 것인가.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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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 신의 실수
류시은 외 지음, 연상호 기획, 최규석 만화 / 와우포인트 퍼블리싱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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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중 '지옥'의 세계관을 그대로 두었다. 다섯 소설가가 같은 세계관으로 글을 집필한다. '지옥 세계관'이라는 플랫폼을 이용하는 다섯 작가의 글이다.

지옥 세계관은 이렇다. 갑자기 천사가 커다란 얼굴을 보이며 등장한다. 이들은 특정인에게 죽음을 예고한다. 그리고 떠난다. 예고된 시간이되면 사자들이 나타나 끔찍한 방식으로 대상자를 죽인다. 그리고 지옥으로 보낸다. 사람들은 '예고'를 받은 이들의 삶을 비난한다. 문제가 있지 않고서 심판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종교적 심판으로 해석한 '새진리회'란 종교가 생기고 이들은 사회를 장악한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와 광신 사이에 갈등한다. 다시 여기에 반기를 드는 단체인 화살촉이 등장하고 대상자들에 대해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신의 심판을 옹호한다.

드라마에서 플롯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장면이 있다. 천사가 '아무개'에게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아무개'가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갓난 아이라는 사실이다. 갓난 아이가 '도덕적 죄악'을 저지를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는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심판'받는 사람에게 회개하라, 말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심판'의 기준이 '임의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즉 죄 있는 대상이 아니라, 아무나 심판 받는다.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한 '새진리회'와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 그것이 '지옥'의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을 그대로 두고 각기 다른 다섯 소설가가 글을 쓴다. '지옥'의 세계관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을 그려낸다. 개중 기억나는 것은 '조예은 작가'의 글이다. '조예은 작가'는 최근 몇 작품으로 익숙해졌던 인물이다. 읽으면서 꽤 반갑다. 판타지에 가까운 세계관에서 '조예은' 작가의 시각은 벗어나 있다. '세계관'이 아니라 '사람'에 맞춰져 있다. 실제 그렇다.

넷플릭스 작품을 볼 때만 하더라도 '신'이라고 하는 존재나 그래픽, 액션을 기대하고 본 것이 사실이다. 사람에 대한 감정과 관계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고 보진 않았다. 그것을 글로써 보며 여러 느낌을 갖는다.

이렇게 한 세계관을 여러 작가가 공유하여 글을 쓰는 것을 '공유세계관'이라고 한단다. 분명 얼핏 비슷한 형식을 본 기억이 나질 않는다. 꽤 흥미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 들어가기 전에 짧게 몇줄 짜리 작가의 소개가 있다. 어떤 글을 쓰던 사람인지를 살피면서 글을 읽는 것도 재미다. 사실 소설이나 드라마 할 것 없이, 괜찮은 세계관을 확장하여 여러 각도로 보는 것은 꽤 안정적인 작법 같다.

어렵고 복잡하게 세계관을 설명할 필요도 없고 설득할 이유도 없다. 단 실제로 다섯 단편에는 '새진리회'가 어떻고, 박정자라는 최초의 피해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독자가 이미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에 단순히 에피소드를 더 할 뿐이다. 이로써 짧게 몰입하여 읽기 쉽고 좋다.

넷플릭스에 지옥1을 다 봤는데, 이미 지옥2도 나와 있는 모양이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만 월별로 넷플릭스를 결제하고 보는데 이번 주말은 지옥2를 보기 위해서 넷플릭스를 결제해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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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눗방울 퐁
이유리 지음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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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비눗방울'이 되는 약을 먹었다. 점차 몸이 투명해지더니 가벼워서 자꾸만 하늘로 날아가려고 한다. 날아가는 것을 묶어 잡아 두고 짧게 여행을 한다. 생각지 못한 어느 순간, 꽤 경쾌한 소리 '퐁!' 하며 그가 터져 버린다.

이런 허무맹랑한 소재를 참고 읽어 낼 수 있는가. 소재만 듣고서는 그렇지 못한다. 다만 '이유리 작가'의 '글'은 다르다. '황당무계'한 소재지만 '소재'의 참신함이 소설의 매력이 아니다. 소재는 배경이다. 소설의 매력이라면 관계와 감정이다. 소설에 깊이 공감하며 읽는다. '논리'와 '개연성', '설득력'이 아니라, 감정과 관계, 상황에 충분히 공감하고 납득하며 읽는다.

며칠 전, 유튜브에서 '차인표 배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같은 일상을 반복한단다. 항상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며 살게 된단다. 고로 어제와 같은 하루를 오늘 반복하고 그것을 내일도 반복할 것이라는 특별함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기대감은 10대, 많아도 20대 초반 정도에 끝난다. 삶을 즐거운 '연극'처럼 하던 호기심은 완전히 사라진다. 30대가 접어 들면 사람들은 안정적인 삶의 단계로 들어간다. '꿈', '일', '사랑'은 모두 반복되는 루틴에서 빛을 상실하고 일상의 색깔을 갖게 된다. 어제가 오늘과 같고 내일도 같은 그런 삶을 반복하면 자기 세계에 점점 갇힌다.

비슷한 사람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비슷한 생각만 한다. 나이가 들면 '선택'이 빨라진다고들 한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내리는 선택이 과거에 이미 판단 내린 경험이 있어서 그렇다.

비슷한 선택에 대한 과거 결론이 데이터가 되어 점점 질문에 골똘해지는 진중함이 없어진다. 반사적이고 충동적이고 관성적이게 된다. 그냥 그래왔듯 그렇게 선택하게 되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이미' 판단 내려진대로 행동한다. 생각해 볼 일이 점차 줄어든다. 편협해지고 자기 세계가 확고해진다. 그것이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차인표 배우는 반복적인 일상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나보는 일이 독서라고 말했다.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 그것이 타인과 사회에 대한 공감력을 불러 일으킨다.

'이유리'작가의 글은 소재의 스펙트럼이 꽤 넓다. 중년 레즈비언의 이야기도 그렇다. 확률적으로 있을 수 있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 역시 내가 만든 세계에 빠져 다양한 생각을 하지 않고 살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서 소매업 가게 매니저로 일한 적 있다. 당시 한국인 아르바이트생을 채용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캐셔'를 하며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물건을 내주었다. 그때 직원들이 하던 말이 있다.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장애인들이 많아요?'

실제 뉴질랜드에서 장사를 하다보면 이상하리만큼 '장애인'들이 많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 정신 지체,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사람들... 그러나 장애인 비율은 실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크게 다른 것이라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다. 이런 시선의 차이가 그들을 밖으로 나다닐 수 있게 하는지, 그렇지 못하게 하는지를 만들 뿐이다.

'동성애'에 대해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하던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사랑 방식에 가타부타할 일이 뭣이 있을까.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비슷하고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이 어쩌면 우리 사회를 공감결여 상태로 만들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우리 역사가 통일된 왕조를 오래 지속했기 때문일까.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며 사회를 안정적으로 지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상황에 매번 부딪치던 매너리즘이 결국 획일화가정답처럼 했을 것이다. 나이 든 사람처럼 어제가 오늘과 같고, 내일도 같을 사회를 500년 간 유지하다보니 사회가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변해 간듯 하다.

'킹크랩'을 먹고 싶었던 한 젊은 부부가 '킹크랩'을 훔쳐다가 라면에 넣어 먹는 이야기.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적 없으면서도, 마치 난 지난 추억을 상기하듯 읽었다. 논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공감하며 읽었다. 먹기 위해 살려두던 녀셕에게 정이 들고, 그러나 그것을 결국 쩌먹는 이야기. '환경'이나 '동물'이런 거창한 것을 떠나, 그냥 상황과 내용이 아니라 상황마다의 생각과 감정을 공감했다. 관련 생각은 스치면서 누구든 해볼법하다. 죽어 있는 남의 살갖을 뜯어먹고 삶을 유지하는 우리의 '생'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본 적 있나. 혹은 그런 표현을 읽어 본 적 있나. 모든 일상은 표현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표현하기에 따라 맛있는 식사가 되고 때로는 공포물의 한 장면도 된다. 어미닭이 사랑과 정성으로 품던, 병아리 되지 못한 알을 꺼내다가 달군 후라이팬에서 볶아 버린다는 묘사 정도라면 충분히 '계란후라이'도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묘사하는지 그 방식만 다르게 해석해도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꽤 다양한 삶을 사는 셈이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이야기하기 나름이고, 보기 나름이고, 말하기 나름이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르게 표현할 수 있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 표현을 한번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는 같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은 굉장히 단조로워 보이지만 사람들마다 다른 이야기를 머릿속에 품고 살아간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보는 것이 어쩌면 독서의 매력이다. '이유리 작가'의 글은 흥미로운 소재를 '대단하지 않은 일 마냥' 배경에 넣고 감정과 묘사를 서술한다. 서술자가 담담한 표정을 가지니 독자도 저절로 담담하게 읽힌다. 그리고 생각해보지 않고 살아 본 적 없는 많은 사람과 생각을 만나게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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