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국 지구를 위한 답을 찾을 것이다 - 지구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가장 쉬운 기후 수업
김백민 지음 / 블랙피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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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공포를 낳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넓혀 공포를 줄이는 것이다. 본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며 멀미를 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어떤 장애를 만날지, 우측과 좌측 중 어느 쪽으로 핸들을 틀지 아는 사람에게는 공포나 두려움은 쉽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에게 하늘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농경사회에서 날씨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가물고 비가 오는 일은 일반 백성들에게 예측 불가했다.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인류의 농업은 큰 발전을 이뤘다. 천문학은 하늘을 먼저 아는 일이었다. '천문학'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몫이 었다. '하늘의 뜻'을 먼저 아는 이들은 즉, 하늘과도 같은 권력을 가졌다. 먼저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모르는 이들보다 두려움이 적으며 모르는 이들로부터의 권력이 생기는 일이다. 5월이 되면 극심히 가물어가는 날씨보다, 예측 불가능한 내일의 날씨를 더 두려워 했다. 가뭄이 극에 달하는 5~6월에 국가는 '기우제'를 지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억수와 같은 비가 쏟아졌다. 국가는 권력 유지가 가능했다. 우리나라 연간 강수량 중 60%가 쏟아지는 6~9월에 쏟아진다. 국가가 지내는 기우제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어두운 밤에 불을 끄고 걸어가는 것이 무서운 이유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건, 대게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1,000톤짜리 배가 물 위를 떠 있는 것을 보고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1톤도 되지 않는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건, '초능력'이라고 부른다. 400톤이 넘는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면서 1톤이 되지 않는 사람이 하늘을 나는 건,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어떤 것을 마주하는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걸' 알고 있느냐 이다. 앎고 앎지 못함은 비록 그것의 크기와 규모가 대단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엄청나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미래와 가장 근접한 연관이 있는 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회와 경제를 비롯해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에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환경문제'다. 요즘처럼 환경문제가 이슈화된 적도 없었다. 10~20년 전까지 환경 문제란 '과학잡지'에서 다루는 공상의 이야기에 가까웠다. 지구온난화와 식수부족문제, 식량부족문제의 글은 '정치', '경제'와 맞닿아 있기 보다는 'SF영화'나 소설에 맞닿아 있다. 이제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환경에 관한 이슈를 접하곤 한다. 친환경 산업 기업에 큰 투자를 하고 국가 정책도 환경이 크게 좌우하곤 한다.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공포'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여러 주장과 생각이 대립되며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것의 중요한 이유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조금씩 무지의 영역이 걷혀간다는 사실이다. 먼저 이것에 관심을 갖고 '앎'의 영역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권력'을 갖는다.

최근 읽었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라는 책과 '2050거주불능지구'는 완전히 대립된 주장을 갖고 있다. 이 둘 중 내가 환경에 갖는 입장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고학의 과학자들도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를 내가 결론을 낸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기 때문이다. 이 책 또한 분명한 한쪽에 열렬하진 않다. 과학자로서 정치, 경제, 사회의 견해를 모두 차치하고 이야기한다. 과학이란 객관적일 거라는 인식과는 다르게 '단정 짓지 않는다.' 어떤 오류로든, 언제든 틀릴 여지가 있다는 가정을 항상 열어 놓는다. 어린 시절 봤던 뉴스기상일보에서 캐스터는 '내일은 비가 올 예정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요새는 "강수확률이 70%정도로 예상됩니다."로 수정됐다. 태풍의 경로 또한 콩알만한 점에서 시작해 원뿔모양으로 커져간다. 이는 실제 태풍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범위가 넓어진다는 확률을 표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이 언제든 자기 모순을 인정할 자세가 있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환경에 대한 입장은 외골수가 되선 안된다. 양쪽의 주장을 모두 듣고 '판단'이 아닌 '앎'이 더 중요하다.

산업혁명 이후에 하키스틱 모양의 그래프는 굉장히 인상적이다. 평균을 오고가는 그래프가 산업혁명 이후 하키스틱의 모서리처럼 급격하게 상승하는 모양은 상당히 자극적이다. 통계와 숫자가 말하는 거짓말이 정치에 주로 쓰이는 것처럼 이 그래프는 많은 이들을 선동했다.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를 떠나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이 소비와 생산 과정에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환경을 이해'라는 틀을 넘어 '도덕적 관념'으로도 옳지 못하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인류는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을 찾아 나선다. 모두가 상대성 이론이나 타임머신에 집중했지만, 이 영화는 '잃어버린 환경'과 '무책임한 인간'을 더 깊이있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플라스틱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다, 쓰다버린 일회용품처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책임을 갖고 있는가를 반성해야한다. 혹여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일회용으로 생각하고 쓰고 버리고 있진 않은가. 환경의 문제가 조금 더 괜찮은 상황이라면 지금의 삶을 유지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인류가 바꿔야 하는 건, 석유를 얼마나 사용하는가나, 고기를 얼마나 먹느냐가 아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가 갖고 있는 '도덕'의 문제로 생각해 봐야한다. 통계를 살펴보니, 환경피해에 우리가 가해하는 부분이 적으니, 지금의 생활 패턴을 유지하자는 것은 인간다운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산업혁명 이래로 10배가 많은 인구를 만들어 냈다. 1900년에는 전 세계 인구가 16억에 불과했다. 16억이면 현재 중국인수와 같다. 인간 한 명이 나고 자라며 일생동안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은 엄청나다. 2050년에 인류는 100억 인구수를 돌파한다. 인류가 만들어내는 앞으로의 인구 대다수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극빈곤 계층이다. 이들은 앞으로 인류가 개발하게 될 '그린 에너지'나 '비싼 친환경 상품'과 무관한 계층들이다. 그들은 석탄을 태우고 값싼 플라스틱을 사용할 것이며 배기가스배출이 많은 오래된 자동차를 타고 다닐 것이다. 극수만의 친환경 산업이 앞으로 탄생할 20억에게 무슨 의미를 줄 것인가.

사실상 인구와 탄소배출 그래프가 비례하고 이에 따라 지구의 기온 변화 또한 영향을 주고 있다. 중국의 산아제한정책을 '인권문제'에 엮으면서도 동시에 환경을 걱정한다.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인권과 환경의 문제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것을 선으로, 혹은 악으로 택해야 할지 정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환경을 선택하면 인권탄압이 되고 인권을 생각하면 환경오염이 문제가 된다. 이처럼 환경 문제가 '정치'와 '외교'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 인류는 아직 경각심을 갖지 못하고 있다. 물은 99도까지 끓지 않는다. 99도에서 1도만 높아져도 끓기 시작한다. 그리고 끓은 후에는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기 시작한다. 단, 1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은 상대적이다. 단순한 1도는 액체를 기체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범위가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남은 온도가 1,2도라는 과학 잡지의 이야기를 무한 신뢰할 수 없다. 상당히 많은 변수와 복합적 사안들로 그 시기는 더 빠르거나 늦을 수 있다. 1도의 변화가 당장 내일이 되거나 이미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티핑포인트를 넘어서는 순간 액체가 기체가 된 것 처럼 우리가 지금껏 겪었던 것들과 다른 상황을 겪게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역사에서 과학을 만나며 세상에 대한 오만한 자세를 갖게 됐다. '모든 문제에 해답이 있을 거라는 착각' 그것이 그렇다. 가령 '불을 얼리는 법'이나 '얼음으로 종이를 태우는 법'처럼 세상에는 정답이 존재할리 없는 문제들도 상당히 많다. 우리가 환경을 대하는 태도는 어쩌면 정답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정답이 없는 문제는 가차 없이 내려쳐질 오답의 회초리를 담담하게 맞이하는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가 아니라, '어떤 결과가 나오던 우리를 위해 변해보자'에 가깝다. 우리는 모르는 사안에 더 큰 두려움을 갖는다.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아는 것이다. 알기 위해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자세를 살피며 지금과는 다르게 변해가는 것이다. 인간다운 해결책을 얻기 위해선 '지구를 위해서'라는 타이틀이 아닌 '인간을 위해서'라는 타이틀이 필요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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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성 - 우리는 얼마나 선량한가?
크리스찬 B. 밀러 지음, 김태훈 옮김 / 글로벌콘텐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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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의 함정은 언제나 우리를 따라 다닌다. 과연 어릴 때 부터 듣고 자란 '탁하다'는 '선'과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우리가 하는 '선'은 '이기심'과 완전히 독립적인가. 우리는 얼마나 선량한가. '알고보면 착하다'라는 말은 어디서나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지내는 친구와 가족, 지인들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인가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까. 나도 모르게 5살 아이를 키우면서 하게 되는 말이 있다. '아이고! 착하네' 별 뜻없이 하던 이 말버릇에는 대단히 좋지 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스스로 치우거나, 심부름을 잘할 때 부모의 나는 아이에게 '착하다'라는 말을 자주하곤 한다. 하지만 이 말을 부모에게 적용한다면 어딘가 어색하다. '아버지, 착하시네요' 혹은 '어머니 착하시네요'라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착하다'가 갖고 있는 어감은 사전적 의미로 정확히 묘사하긴 어렵지만 위에서 아래로의 칭찬이라는 점은 사용하는 모두가 알고 있다.

이것은 '도덕'과 '선'과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선하게 생기셨어요'라는 어감에는 생김새가 모나지 않을 듯 하고 둥글둥글할 것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에게 '쓴소리' 못하고 설령 누군가로부터 비합리적인 대우를 받더라도 군소리 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말한다. '착하다'와 '선하다'는 사전적 의미로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방어'를 하지 못하고 언제든 '막 대해도 괜찮은 사람' 정도의 어감을 갖는 것은 이 용어가 갖고 있는 원초적 의미를 넘어 실제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이 그렇다. 과연 '착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교정기관을 막 출소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내부에는 '억울하게 들어온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사법기관의 판단 실수로 억울하게 형을 받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서로를 '알고보면 착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착할까. 혹은 반대로 어떤 형을 받고 난 이들, 즉 범죄자나 범법자들은 정말로 '악'한 사람일까.

나의 고정관념이 확실하게 깨주었던 소설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가 그렇다. 살인자의 동생이 일본사회를 살아가며 겪는 '살인자 가족'으로써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세상에는 정말 '쳐 죽여야 속이 시원할 범법자들'이 많다. 그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변'을 그들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그럴법도 하네'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것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사실 의미가 없다. '기부포비아'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사건들이 있었다. 선한 얼굴로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던 이들에게 마찬가지 선한 동조의 마음들은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얼마 뒤, '선'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악'들이 세상에 알려진 뒤, '선해보이던 그 얼굴'에서 사람들은 악마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그의 얼굴은 선한 얼굴이었을까. 악한 얼굴이었을까. 그의 행동은 선했을까. 악했을까. 선과 악은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당골 소재다. 이처럼 수 천 년 간 현자들이 고민해 온 철학 문제를 책 한 권 읽었다고 이해했다 할 수는 없다.

다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선의 상징'인 예수와 '배신자의 상징'인 유다가 결국 같은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보자면 '선과 악'은 분리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마음 먹먹한 어느 가을 날, 문뜩 그 낙엽이 하는 일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떨어지는 낙엽에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다. 그저 자연의 이치대로 나뭇가지에 매달렸다가 적당한 시간에 떨어져 내려지는 현상일 뿐이다. 이 낙엽을 보고도 누군가는 '아~아름다운 가을 이구나'를 생각하고, 누군가는 '저 떨어지는 낙엽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지는구나'를 느낀다. 여기서 낙엽의 역할은 무엇일까.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성'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선'을 보고 '악'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고, '악'을 보고 '선'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마치, 애호박부침을 보면서 '맛있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맛없겠다.'라고 생각하는 두 부류가 존재하는 것처럼 선과 악은 그 대상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에게 존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사회에서 명확한 기준점은 없으나, 누구에게나 권하고, 누구에게나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이런 '선'이라는 용어를 이용하면 다른 누군가를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쓰레기 좀 버려줄래?' 아이에게 말한다. 아이가 쓰레기를 버린다. '아이고! 우리 아이 착하구나.'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이뤄진 명령과 복종은 비단 아이에게만 이어져 있지 않다. 이렇게 자란 법의 테두리 밖에서 해서는 안되는 일과 해야 되는 '도덕의 영역'에서 '질서'가 존재한다. 이런 질서는 법처럼 객관적이지 않고 바라보는 이의 주관에 철저하게 달라진다. '악'이라고 바라보는 관점과 '선'이라고 바라보는 관점 중 다수결에 의해서 '악'과 '선'이 나눠진다. 다만, 피사체 자체는 그저 '존재'일 뿐, 악도 아니오 선도 아닌 상태가 된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일은 어찌보면 철저히 '상대적이며', 절대 다수의 가치관에 맞추는 일은 아닐까 생각한다.

유학하던 시기, 나는 '헤이즐넛 초콜렛'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지금 찐 살의 가장 큰 원인이던 그 초콜렛을 함께 살던 플랫메이트의 몫도 함께 샀었다. 초콜렛 하나의 가격은 꽤 비쌌다. 정말 큰 맘 먹어야 2개를 살 수 있는 고급 초콜렛을 나는 무리하며 그의 방 앞에 항상 두었다. 그리고 2달을 지낸 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는 초콜렛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까지, 나는 초콜렛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의 가치가 그 쪽으로 가서는 값어치가 적어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취향'이라는 것은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초콜렛이 맛있어야 하는 이유를 아무리 설명해도 상대가 초콜렛을 좋아하긴 쉽지 않다. 반대로 학창 시절 내가 가장 싫어하던 반찬은 '가지무침'이었다. 학교 급식에서 억지로 다 먹어야 급식실 밖으로 통과를 시켜주던 이상한 교칙 덕에 나는 초등학교 시절 가지 무침이 나오는 날이면 한바탕 오바이트를 하고 교실로 돌아 가곤 했다.

영양사 선생님이 가지 무침이 건강이 얼마나 좋고, 그 말캉 말캉한 식감을 아무리 설명해 줘도 도무지 흐물흐물하고 미끄덩거니는 가지무침이 잘 넘어가지지 않았다. 당시 트라우마 때문인지, 나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 가지무침을 먹어본 적이 없다. '선과 악'이란 그런 개념과도 같다. 맛있는 음식이 왜 맛이 없냐고 취향이 다른 이들에게 물어봐야 의미가 없다. 흡연자에게 왜 담배를 피우냐고 묻는 것은 비흡연자에게 왜 담배를 피우지 않느냐고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우리는 각자 개인만의 모호한 잣대를 가지고 세상과 사람을 판단한다. 그 잣대는 스스로에게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또한 자기 자신과 친구, 가족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 잣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이들은 당연히 자기 친구와 가족들이다. 조금 살아가다보면 마치 자신이 정답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가르치른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기껏해봐야 100년도 살지 못한다. 많아봐야 50살도 차이나지 않는 서로가 서로를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미안마에서 100년을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국에서 30년 산 사람이 보고 겪었던 일들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없다. 1만년을 먼저 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20대가 말하는 '어플 개발'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스마트폰 어플 개발로 돈을 벌겠다는 젊은이에게 노인은 야단 칠지도 모른다. '젊은놈이 땀흘려 돈 벌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게을러 터져서 어디에 쓰겠누!', 이 노인의 조언에 따르면, '페이스북'과 '에어비엠비', '우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조금 더 알 것이라는 오만과 착각으로 상대에게 함부로 조언을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인생은 당신이 생각한 것 보다 더 다양하고 싶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모든 이들이 가치관이 따로 존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관점을 항상 갖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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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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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살지 않는 아파트를 짓는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도로를 건설하고 아무도 건너지 않는 다리를 연결한다. 과연 우리는 불필요한 지출을 왜 하는 것일까. 일본이 장기 불황을 탈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건설경기 부양을 선택했다. 1992~1995년 간 일본은 곳곳에 의미를 알 수 없는 투자를 했다. 부동산 버블 붕괴를 막기 위해 무려 73조엔에 이르는 경기 부양대책이었는데 이는 1994년 일본 정부 예산 규모와 비슷하다. 정부 주도의 의미없는 투자는 경기를 부양시키는 경제 정책은 일본말고도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지방의 유령도시나 공항 혹은 아무도 다니지 않는 도로가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실례로 중국의 네이멍구 사막 지역에 '어얼둬스'라는 신도시가 그렇다. 이 지역은 5년이라는 시간에 걸처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설립된 도시다. 하지만 이 지역에 실제 거주자는 건설 노동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빈도시'가 되었다. 어째서 단기적으로 경기를 부양시키기 위해 각국은 건설업을 활성화 시키는가. 건설경기 부양은 낙수효과가 가장 크고 확실한 사업이다. 이런 이유로 정부가 대규모 투자를 통해 경기를 일시적으로 부양시키는 효과를 보여준다. 건설의 본질이 사라지고 국가가 개입하여 시장에 수요자 역할을 해 주는 것으로 시장은 활성화 된다.

그린뉴딜은 무엇인가? 왜 갑작스럽게도 사회는 내연기관차를 전기차로 바꾸고 전력을 친환경으로 바꾸는데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가. 어째서 원전을 없애고 풍력과 태양열 산업을 활성화하고자 하는가. 석유산업을 줄이고 수소산업을 키우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산업이던 기술의 보편화가 이뤄지면 경쟁자들이 많아진다. 더 많은 경쟁자들이 생기다는 건 상품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상품성을 갖기 위해선 기술력이 비교적 덜 필요한 산업을 규제하고 고도기술을 갖고 있는 고도산업을 육성시키는 것이다. 기존 판을 깨부수고 자신들만의 시장을 만드는 것은 개도국의 추격을 저지하고자 하는 선진국들이 내새우는 방식이다. 지금껏 탄소배출의 책임이 있는 선진국은 갑작스럽게 그린에너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개도국의 탄소배출량을 문제 삼는다. 자신들은 국토개발이란 명목으로 벌채와 산업화를 하던 선진국은 브라질이나, 인도, 중국의 무자비한 벌채를 규탄한다.

먼저 올라선 자들의 '사다리 걷아차기' 게임 처럼, 자본력과 기술력을 갖고 있는 선진국들은 많은 자원과 노동력을 갖고 있는 국가들의 견재가 필수적이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기존 산업으론 경기 부양을 할 수 없다. 정부는 시장에 적극투자하여 시장활성화를 할 수 없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도로와 도시가 넘처나는 건설업은 더이상 명분이 없다. 조금더 고학력 인재를 활용하여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시장산업이 필요하다. 1929년 10월 시작된 대공항은 공급과잉에서 출발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미국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는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제반 정책인 뉴딜정책을 실시했다. 이처럼 정부는 시장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인위적인 부양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효과적이었다. 이 후로 각국은 자본주의 구조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런 경기 침체를 위해 종종 큰정부가 되곤 한다.

대공황을 탈피했던 뉴딜정책처럼 현재는 그린뉴딜이 실행되고 있다. 그린뉴딜을 통해 엄청난 재원을 투입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 낸다. 기술력이 없는 개도국을 크게 따돌리고 선진국가들 간의 리그가 형성되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서 '환경오염은 없다. 더 에너지를 태우고 더 산업을 개발하라'라는 주장이 아주 부도덕하다는 것은 상식과도 같다. 과연 아무도 이에 이의를 제의할 수 없는 분위기가 옳은 것일까.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이야기를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야 했던 중세의 심판과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인간이 지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치 십 수년 혹은 수 십 년 내로 지구가 종말할지도 모른다는 자극적인 미래예견은 과연 꼭 옳은 일일까.

엄청나게 많은 식품이 시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미국인의 비만문제는 자본주의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식품산업이 포화상태가 됐을 때, 자본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까? 그렇다. 다이어트 식품이다. 많이 먹고 이번에는 헬스클럽이나 다이어트 보조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많이 먹어서 생긴 비만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해선 절식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산업은 '다이어트 시장'을 창출해냈다. 환경오염 문제를 줄이자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간이 택해야할 문제는 에너지 사용량 감소다. 하지만 인간이 택한 또다른 해결책이란 가히 인간답다. '친환경 산업'이다. 과연 친환경 산업은 환경을 위한 것일까. 아님 포화에 이른 기존 산업을 대체할 새로운 시장 개척일 뿐일까. 어째서 철저히 이윤추구를 해야 할 기업이 '전인류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기업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 철저히 '표'와 '정권유지'를 위하는 '국가정부들'은 마찬가지 '전인류적 문제'에 골똘히 고민하는가. 담배피는 국민을 걱정한다는 이유로 담배값을 올리는 것은 과연 흡연자의 건강을 위한 정책일까. 탄소세를 걷어 환경을 위한다는 정책은 과연 환경을 위한 일일까. 과학자들이 내놓는 그래프는 기껏해봐야 100년짜리 자료다. 4,500,000,000년의 역사 중 100년의 그래프를 가지고 인류의 산업화가 지구를 종말로 이끌어간다고 말을 하는 것일까.

1월 기온이 -2.5도였다. 그리고 6개월 간 30도가 올랐다. 그렇다면 추세로 보자면 앞으로 6개월 후에는 60도가 되어야 하는가. 인류가 파악 가능한 지구의 기온중 인류가 살기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기온이 어떤 규칙을 가지고 그 파동을 만들어내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자극적인 그래프와 숫자를 가지고 대중에게 이목을 집중받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자본주의'의 선택받는 방법 중 하나다. 상품판매 시에, 우리는 이런 방법을 마케팅이라고 부른다. 더 자극적일 수록 선택받는 기사나 잡지, 책의 제목은 모두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주제를 내놓고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사람은 공포에 더 쉽게 자극을 받는다. 앞으로 더 잘될거라는 점쟁이의 말보다, '귀신이 씌였다'거나 '삼재가 들었다'의 말에 더 많은 부적이 팔리는 법이다.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못해 찔러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대답일 수 있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크게 '돈의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과학자이던, 종교인이던, 심지어 자원봉사자들도 말이다.

1920년대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540만명이었던 반면 2010년대에는 40만명에 불과하다. 이 사망자 수의 감소가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 기간동안 인류 전체의 수가 4배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92%의 감소가 아니라 그 이상의 감소라고 볼 수 있다. 과연 인간은 산업화하며 환경오염으로 부터 더 큰 위협에 빠지고 있는가. 유엔식량농업기구는 2050년까지 식량생산은 30%가 늘어나고 제속 가능한 방식이 도입될 경우에도 20%가 증가한다는 발표를 했따. 그 밖에 인류가 환경문제로 겪게 될 많은 문제에 대한 오류도 이후 보고서에서 발견 후 수정되는 경우도 많았다. 미국 기준으로 1900년부터 1959년까지 플로리다에 상륙한 대규모 허리케인은 18건이었던 반면 1960년부터 2018년까지는 11건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중국, 인도, 호주 등 다른 나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불이나 재산피해, 인명피해 또한 작은 오류로 인해 부풀려진 경우가 많았으며 현재 홍수, 가뭄, 허리케인, 토네이도의 빈도와 강도가 치솟았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언론은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이어진 화재를 호주 역사상 가장 큰 화재라고 묘사했지만, 실제 1974년, 1975년의 화제에 비하면 6분의 1 수준이다. 또한 1926년 화재에 비하면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폭염과 강수량은 늘어난건 사실이지만, 실상을 놓고 보자면 우린 지금 기상 이변의 피해를 크게 보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편이다.

AP 기사에 따르면 유엔 고위 관료가 2019년 6월, 인간이 통제 가능한 범위는 10년 후에 닫힌다는 종말론적 예언을 내어 놓았다고 했다. 이는 2030년 종말론을 더 욱 부축였다. 하지만 이 발언은 2019년이 아닌 1989년 6월에 한 발언으로 이미 그의 예언이 있었던 2000년은 이미 20년이나 지난 상태다. 세상은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이뤄져 있다. 본의가 없는 날조와 선동이 판을치고 어쩌면 이 내용도 모두 사실여부에 대해 논의해봐야하는 지도 모른다. 어쨌건 균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는 이야기 덕분에 실제 선진국들의 탄소배출량이 줄어들고 IEAsms 2040년 탄소 배출 현황을 기후 변화정부간 협의체의 모든 시나리오보다 낮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로 인해 우리는 기후 변화를 적극적으로 방어했고 성공적이었다고 책은 말한다.

팩트풀니스가 날조된 위기를 설명했던 것 처럼 이 책은 날조된 환경 위기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실제로 1981년 부터 2016년까지 지구의 40%는 '녹화'되었다. 숲이 더 넓어지고 있으며 바이오 매스가 증가하고 있다. 사라진 숲보다 생겨난 숲이 훨씬 더 많으며 지구의 북극의 빙하는 얼마 전, 최대 팽창을 하기도 했다. 아마존이 만들어내는 산소는 전 세계의 20%라는 이야기는 선진국에서 브라질의 개발을 저해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실제 아마존 산림에서 생산되는 산소는 5% 내외정도로 사실과는 다르다. 플라스틱은 분해가 잘 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여러 야생동물들이 이를 삼키고 희생당한다. 하지만 플라스틱 개발 이전 우리는 코끼리의 상아를 비롯해 거북이, 고래를 포함하여 여러 동물을 소비재로 활용하고자 죽였다. 또한 플라스틱은 햇볕에 의해 비교적 쉽게 분해가 되기도 하고 그로 희생되는 동물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꽤 많은 동물이 살아나고 있는 샘이다.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폐플라스틱의 양은 100배 이상 부풀려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석유와 플라스틱이 꼭 환경에 나쁘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 석유가 발견하기 전 고래의 기름은 사치품으로 불을 밝힌느데 사용되곤 했다. 그 밖에 식품, 비누, 기계윤활유, 향수의 베이스 오일로 쓰이기도 했고 고래 수염은 우산산, 코르셋, 낚시대의재료로 사용되곤 했다. 고래사냥이 정점일 때, 고래기름은 매년 60만 배럴에 달했지만, 유전 개발 후 석유산업이 이를 3년만에 같은 양을 만들어 냄으로 인간은 엄청나게 효율적인 에너지를 생산하게 됐다.

이 책은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한다는 다른 책들의 이야기를 조목 조목 반박한다. 마치 세상이 더욱 안좋아 지고 있다고 믿고 있던 이들에게 '세상은 긍정적으로 변했다'라고 말하던 팩트풀니스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 '믿고 싶은 진실인지', '실제 존재하는 진실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나는 이 책의 내용에 일부 동의하기도 하고 일부 불편하기도 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꼭 '악'이라고 보여지는 것들이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는 문제인가는 꼭 생각해 볼 문제이다. '사회통념에 맞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1633년 종교재판이 열렸다. 우주 만물이 인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교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한 사람에 대한 재판이었다. 그 시기 우리가 살던 지구라는 행성이 하늘 위 수많은 행성 중 하나일 뿐이며 우주의 중심이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싶은 진실'이었을 뿐이다. 물론 진실일리 없지만 갈릴레이가 재판장을 나오면서 했던 '그래도 지구는 돈다.'의 말처럼 이제 우리는 우리 통념에 맞지 않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만큼 문명화된 사회가 되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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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경제 101 - 고객만족·미래예측·현금흐름 왜 기업은 구독 모델에 열광하는가
심두보 지음 / 회사밖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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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탱해오던 자본주의가 사회주의화되고 있다.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상징이던 '소유'의 개념이 모호해진다. 우리가 플랫폼 기업이라고 부르는 기업들의 대부분은 '소유'를 통한 수익 창출을 하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를 공동화 함으로써 누구의 소유가 아닌 일종의 제3지대를 공유하는 형식을 취하며 이를 이용한 광고 수익을 주로 하고 있다. 시가총액이 2200조가 넘는 애플은 자사의 하드웨어 상품을 판매하며 시장 점유율을 올렸지만 해가 거듭할 수록 OS와 컨텐츠 플랫폼 에 투자를 하고 수익 구조의 비중에서 소프트웨어의 수익 비중을 높혀가고 있다. 그 밖에 1750조의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익은 클라우드의 비중이 꽤 크다. 개인이 각자 소장해야 했던 저장공간을 공유하여 저렴하게 나눠주는 사업이 이처럼 커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대부분의 수익은 소프트웨어나 서버 솔루션 등에서 나오고 있다. 페이스북 또한 무료로 온라인 활동공간을 제공하고 이에 따른 광고 수익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밖에 아마존, 구글, 알리바바, 테슬라 모두가 추구하는 산업의 구조는 '소유종말의 시대'이다. 이들 모두는 각자 시가총액 1000조가 훌쩍 넘는다.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시장에서 '공유경제'가 주춤하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차량을 소유하지 않은 차량해사 우버의 시총이 100조가 넘는다. 그 밖에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쿠팡의 시총은 상창초기 100조를 돌파(현재 78조)이고 숙소를 소유하지 않은 숙박사업의 에어비앤비의 주가 또한 100조다. 현재 우리나라 코스피, 코스닥 상장사 기준으로 시총이 100조가 넘는 회사는 삼성전자가 유일하다. 이처럼 실제 상품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의 판매실적이 높은 이유는 사람들이 '소유'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인간의 '소유욕'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다른 누구보다 풍족하게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런 본능을 자극하여 산업화는 공급의 혁신을 통해 일어났다. 가내수공업으로 시작하던 상공업이 '기계'의 계발과 함께 공급력의 폭발이 일어나고 이는 곧, 시장 진출이 성장으로 이어졌다. 서구 선진국이 자국에서 생산된 완제품을 가지고 대양을 넘어섰던 이유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값싼 원자재 공급과 판매처 확보 때문이었다. 제국주의가 막을 내리고 세계는 '식민지'가 아닌 판매처 확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더 많은 생산품을 더 많은 소비자에게 공급하기 위한 그들의 경쟁은 꾸준히 가속되었고 과소비나 낭비, 사치, 허세라는 문화를 만들어 냈다.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 가져야 한다는 인식을 통해 생산량에 맞는 수요를 꾸준하게 맞추었던 자본주의는 결국 '공급력 폭발'이라는 이슈와 함께, 세계 대공황을 맞이 했다.

물품의 수요는 한정적인데 생산력만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탓에, 불가피한 경쟁과 가격 폭락은 기업의 재정을 악화시키고 많은 실업률을 만들었다. 이런 현상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수요를 국가에서 만들어내자는 '뉴딜정책'을 통해, 국가가 기업의 공급력을 일부 해결해주는 방향으로 시장주의의 변화도 일어나게 됐다. 국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주는 수요도 임계치에 오른 현대사회는 이런 공급력 폭발을 어떤 방식으로 해소할까? 그 탈출구는 당연히 '무소유'다. 유튜브는 아무런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대량 생산으로 인한 가격하락이 존재할리가 없다. 대부분의 플랫폼기업의 특성 또한 마찬가지다. 많이 생산해도 재고가 남지 않는 혁신적인 사업 구조에 기업은 물론 시장도 반응했다. 소유에 대한 피로도가 지극히 수 백 년이 쌓여있던 시장이 무소유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소유'하지 않고 '대여'하는 방식의 산업의 변혁을 맞이하고 있다.

구독은 꽤 큰 장점이 있다. 커다란 목돈이 한번에 들어 오진 않지만 꾸준한 매출을 지속시킬 수 있다. 이는 기업 매출의 변동성을 줄이고 안정적 수익구조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이는 회사의 신용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기도한다. 이처럼 구독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이점은 기업 측면 뿐만 아니라 소비자 측변에서도 크다. 꾸준함은 고객의 개인 니즈파악이 쉽다. 다양한 선택의 데이터를 꾸준하게 모을 수 있다는 것은 이를 활용한 알고리즘을 활성시킬 요건이 되고 이는 상대의 니즈에 적합한 상품을 기업이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처럼 빅데이터가 하는 역활이 명확해지는 시대에 맞는 수익 구조이기도 하다.

책은 여러가지 구독 경제나 공유경제를 활용하고 있는 회사들을 소개해준다.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이를 활용하여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크고 작은 회사에 대한 소개를 보며 생각보다 빠르게 사회구조가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심지어 수요가 있을까하고 고민을 하게 되는 전기톱 구독이나 꽃구독, 샴푸구독부터 시작해서 테슬라나 넷플릭스처럼 거대기업까지 크고 작은 구독기반 수익 창출회사를 소개한다. 이런 회사의 특징들은 포디즘으로 시작한 대량생산 구조가 아니 소수 소비자를 위한 맞춤형 공급 기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빅데이터를 안정적으로 쌓고 이를 토대로 고객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해주는 '알고리즘'이라는 AI의 탄생으로 봤을 때, 소매업, 제조업회사가 아닌 '4차산업혁명의 핵심인' IT기업으로 보여진다.

사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여러가지 사업 모델 중 나 또한 유심하게 고민했던 사업이 있었는데, 이는 다름아닌 '과일 구독 사업'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인 문제에 당착하게 된다. 실제로 과일 구독 사업은 존재한다. 하지만 과일 이라는 특성상 일정한 퀄리티의 상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같은 나무에 열리는 과일이라고 하더라도 더 큰 과일이 있고 작은 과일이 있으며, 모양이 둥근 것도 있고 울퉁불퉁한 것도 있다. 하지만 대게 소비자들은 일관적인 상품을 꾸준하게 받기 위해 구독상품을 구매한다. 농산물은 바로 여기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일관적인 상품을 구독하기 위해선 대량공급이 가능한 업체에서 1차 선과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비용이 일차로 크다. 또한 각 과일마다 제철이 존재하고 수확량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것은 과일이라는 특성이라기보다 1차 산업의 구조적 한계라고 보여진다. 그런 이유로 국가 성장의 단계를 보자면 1차산업(농업)에서 2차산업(공업)으로 그리고 3차 산업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며 현금유동성에 유리하고 변동성이 적은 산업으로의 진화가 '선진산업'으로 가는 길이라는 인식이 생기는 듯 하다.

실제로 크기와 맛, 생산량이 일정하지 않은 과일을 가지고 즙으로 만들어 2차 가공품으로 만들기만 해도 앞서말한 1차산업의 구조적 한계를 쉽게 벗어날 수 있으며, 2차 가공품을 쉽게 배송해 먹을 수 있는 서비스 즉, 3차로 진화시킨다면 더 큰 이익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 산지에서 1kg에 2,000원 내지 3,000원에 판매하는 과일이 시장으로 넘어갔을 때, 그 두 배인 4,000~6,000원의 가격이되고 이것이 다른 서비스 산업과 만나면 8,000원 내지 12,000원의 형식으로 가격이 뛰는 것을 보자면 단순히 '과일을 먹어야겠다'라는 것 만이 고객의 니즈가 아니라는 것 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실제 고객이 과일을 접하기에는 2,000원을 들이면 되지만, 편하게 위험부담 적은 과일을 먹는다는 댓가로 생산품의 4, 5배가 넘는 가격을 지불한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가끔 우리 농장에 직접 연락을 주시는 고객분들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2~3,000원의 산지 공급 가격을 원하면서 12,000원 짜리 품질을 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하지만 여기서 들어가는 9,000원은 리스크에 대한 값어치기 때문에 산지에서 주문해먹는 과일일수록 어느정도의 리스크는 감안해야한다. 어쨌건 세상의 패러다임이 구독경제로 바뀜에 따라 우리도 또다른 문화에 적응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 산업구조는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애플이나 페이스북처럼 공유, 구독경제를 이용해 직집적으로 이익을 창출해내는 회사를 보조하는 역할로 삼성과 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회사들이 있다. 또한 배터리, 액정화면 제조도 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최근 급등하고 있는 다음카카오와 네이버, 쿠팡과 같이 거대한 '공유기업'이 존재하기도 한다.

어쩌면 제조업이 무너진 미국보다 우리 산업구조가 더 기반이 탄탄하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점점 소유에 피로도를 느낀다. 이는 나또한 마찬가지다. 핸드폰을 열면 공짜 투성이에 소유를 하지 않으면서도 만족가능한 컨텐츠가 쏟아진다. 결국, 어떤 사회변화를 이해하고 그 변화에 맞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돈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어떻게 돈을 지불하는가를 보기에 앞서 자신이 어떤 곳에 가장 큰 돈을 사용하는가를 보자면 사회 전반의 구조와 산업구조의 변화 전체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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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파도에 빠지다
아오바 유 지음, 김지영 옮김 / 시월이일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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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행'이라는 말은 근래에 들어 종종 들어보곤 한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역주행'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알고리즘'의 개념이 보편화 되고 난 뒤 부터다. 엄청나게 많은 정보는 서로 비슷한 키워드로 얽히고 섥히며 유기체처럼 연동하다가 특정 시기에 우연하게 다수에게 노출된다. 잊혀졌던 기록과 영상이 다시금 다수에게 노출됨으로써 타이밍의 문제로 묻혔던 진실들은 다시 표면 위로 솓아 난다.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 등 수많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데이터는 정보의 호수에 순식간에 묻힌다. 지금 이 글 또한 발행된 즉시, 일부 소수에게 소비되고 사라질 것이다. 숨겨져 있는 이런 데이터는 언제고 적절한 시기와 상황이 되면 불현듯 솟아난다. 이렇듯 알고리즘은 타이밍에 의해 묻혔던 진짜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제공하곤 한다. 개봉한지 10년이 넘은 조연 배우의 대사가 현 시대에 다시 유행이 되며 잊고 지내던 배우에게 제2의 기회를 주는 것처럼 소설은 우연한 기회에 추천 영상을 보게 된 한 직장인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참, 괜찮다.'라고 생각했던 영상이나 노래의 주인공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섬뜩하고 때론 씁쓸한 일이다. 0과 1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디지털 신호뿐인 실체에 우리는 '죽은자'의 묘한 채취와 흔적을 느낀다. 실제로 누군가 남긴 글과 영상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런 시기의 역사는 30년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많은 정보 중 어떤 글과 영상이 산 사람의 것이고, 죽은 사람의 것인지 디지털 신호는 감지해 내지 못한다. 죽은자들의 생각과 흔적이 마음껏 온라인 상을 떠돌며 불현듯 불쑥 불쑥 우리의 삶에 나타날 것이다. 아마 30~40년만 지나도 온라인 상에서 검색되는 정보의 대다수는 죽은자들의 것으로 넘처날 것이고 우리는 감정 없는 '2진법 계산기'에 의해 죽은자들의 생각과 흔적을 끊임 없이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주인공 줏타는 밴드를 하고 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노래는 우연하게 한 직장인에게 노출된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또다른 방향이 된다. 줏타가 죽기 전, 그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네트워크와 같이 얽히고 섥힌다. 한 음악이 완성되고 다른 누군가에게 갑작스럽게 소개된다. 온라인은 다시 오프라인으로 섥히고 얽힌다. 오프라인은 다시 온라인으로 얽힌다. 이런 역할을 하는 매개체로 소설은 '음악'을 택한다. 음악은 여러사람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영향력을 끼친다. 사람의 감정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것은 직간접적으로 여러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죽음은 과거의 죽음과는 다르다. 보통의 죽음은 모든 것이 사라진다. 장례를 통해 죽은이의 흔적을 지워주는 것은 죽은자에 대한 예의이자, 산 사람에 대한 배려다. 죽은자의 주변의 슬픔을 최대한 빨리 잊게 하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장례식'이면 되려 술판과 도박을 하며 웃고 떠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죽은자의 흔적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가며 죽은자는 산자의 적당한 추억이 되고 서서히 잊혀진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이런 정보화 사회에 대한 반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죽은 밴드의 주인공의 삶을 역으로 돌아보는 소설의 구성상 죽음의 가치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죽어서도 끊임없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각을 전파하고 감정을 자극하며 살았을 때와 똑같은 활동을 하게 됐다. 어쩌면 철학적인 의미로 넘어갈 수도 있는 '영생'을 살게 되는지도 모른다.

줏타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는 아이를 남긴다. 사람이 남기는 흔적이란 죽음으로 모두 지울 수 없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마 아이는 계속 자라나며 유튜브 속의 줏타의 나이까지 찰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오면 아버지의 나이를 넘기게 될 것이고 온라인 속에서 늙지 않고 항상 청춘인 아버지를 평생을 바라보고 노파의 날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남기는 모든 글 또한 나의 죽음을 뒤로하고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알고리즘에 의해 노출되고 발간될 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가 내 나이를 넘어서며 내가 쓴 글을 보고 '한 젊은이의 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누구나 무언가를 포기한다. 그걸 어른이 된다는 말로 포장하며 태연하게 살아간다. 그런 법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큰 흐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을 포기하며 아무렇지 않은척 하는 것이고 말한다. 우리가 마주해야하는 큰 흐름이란 운명이며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큰 힘을 우리는 매순간 마주해야 하는 작은 입자에 불과하다. 정보의 바다가 출렁거리면서 의도하지 않는 순간, 나의 기록이 수면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영향력을 남기며 살아간다. 또한 소설의 말처럼 그것들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미 사라져버린 명곡들이 다시 역주행하며 순위권으로 언제든 올라가는 것처럼 어쩌면 알고리즘은 우리가 포기했던 것들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비록 그 기회가 죽음 이후라고 하더라도 분명 우리의 영향력은 조금도 노화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으며 최초의 모습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는 노래의 제목이다. 잔잔한 파도란 큰 바다가 만들어낸 일종의 출렁거림이다. 그것이 비록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적절하게 잔잔하게 움직인다. 바다는 엄청나게 방대한 부피와 질량을 갖고 있는 덩어리로 때로는 묵직하고 방대하지만 잔잔하게 흐르는 관대함도 가지고 있다. 소설은 일본 소설의 특유의 장점 처럼 술술 읽히고 쉽다. 책의 표지가 우리나라 수필같아 반전스럽기도 하다. 때론 자극적일 것 같고, 때론 잔잔한 이런 수필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듯 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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