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순간 - 사진작가 문철진 여행 산문집
문철진 지음 / 미디어샘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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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로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전에도 여행을 별로 다니지 않았지만, 어쩐지 '가지 못하는 것'과 '가지 않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행서적을 좋아했지만, 근래들어 부쩍 여행서적을 자주 읽는다. 가지 못하는 마음을 대신 위로 받는 듯하다. 책을 읽다보면 여행 서적마다 특별하게 다른 부분은 없다. 비슷한 나라에 비슷한 경로로 간다. 거기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생각의 차이가 조금씩 있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편지형식을 띄고 있다. 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처럼 여행에서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경로에 따른 순서도 없다. 일본을 갔다가 갑자기 브라질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 페이지에는 태국이 나오는 것 처럼 사건의 순서와 시간에 관계없이 나온다. 어쩐지 진짜 친구의 편지를 읽는 듯 하다. 문철진 작가는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벌써 십 수 권을 출판한 그는 최근 코로나의 여파로 해외로 나가는 일에 부담감을 가졌다. 중독이란 이런 것일까. 그는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몸에도 흘러나와 마치 담배나 마약과 같이 금단 증세가 일어난다고 했다.

여행다운 여행을 가 본 기억은 드물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관광'과는 다르다. 삶과 마음에 여유가 있지 않은 이상 훌쩍하고 여행을 떠나버리긴 쉽지 않다. 대게 여행을 하게 되면 여럿이서 함께 다니며 맛있는 것을 먹고 유명한 관광지를 도는 것을 생각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의 로망은 조용히 재밌는 소설책을 가방 가득하게 갖고가서 혼자 사색하고 글쓰고 읽고 하는 여행이다. 누구와 생각의 차이로 다투고 싶지도 않고 무얼 먹을지 고민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챙기거나, 눈치를 살피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낮선 곳에서 조용히 사색하고 싶은 욕심이다. 대게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추억'을 만들고 오겠다는 강박증 같은 각오를 하고 떠난다. 언제 다시 살펴보지 모를 사진을 마음껏 찍고 SNS에 남기게다는 일념을 갖는다. 추억을 갖는다는 것은 내부가 아닌 외부의 사건이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외부의 일이 너무 복잡하여 쉬며 충전하러 떠나는 길에 굳이 찾아 추억을 만들 욕심은 없다. 예전 '김영하' 작가 님의 글에서 중국을 떠나는 길에 '예기치 못한 사건을 맞이 한 적이 있다'고 읽은 적이 있다.

여행에서의 추억은 굳이 찾지 않더라도 발생하기 마련이다. 조용히 사색을 하며 글을 쓰려던 여행에서도 어떤 무언가의 사건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다만 글쓰는 사람에게는 불쾌한 사건도 좋은 사건처럼 하나의 이야기 거리가 된다는 점에서 없어도 괜찮고 있으면 더 괜찮은 일이 될 것이다. 여행에서 사진은 몹시 중요하다. 사실 말은 추억을 하고 싶지 않다고 표현했지만, 오래 전 떠났던 여행을 복기하는데는 사진만 한 것이 없다. 예전 어린시절에 가족 여행에서 아버지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계셨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의 갯수가 정해져 있던 필름카메라는 가장 소중한 순간을 담기 완벽했다. 다만 요즘처럼 어제든 수 배 장을 찍을 수 있는 시대에서는 가장 소중한 시간을 깨닳으려는 여유가 사라지게 된다. 가장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을 포착하여 단 한 컷을 찍어내려는 미세한 마음의 작동과, 언제 우연히 행복한 표정이 찍힐지 몰라서 마구자비로 찍어대는 사진과는 분명 본질의 차이가 발생한다.

사람은 미묘한 감정을 파악하려는 노력으로 굉장히 기민한 감각을 소유하게 된다. 빌어먹을 하루 중에서도 분명 감사할 일은 엄청나게 많다. 다만 내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쌓여 온순하고 예민한 그 행복의 감정이 숨겨 보이지 않게 될 뿐이다. 책에서는 그야말로 글보다 사진이 많다. 하지만 글보다 사진에 더 오랜기간 시선을 머물려 사색했다. 작가가 나와 같은 장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의미없는 한 컷을 찍고 다음 컷을 준비하는 인스턴트 같은 감정은 아니였다는 것은 사진과 함께 하는 편지글에서 읽힐 수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10년 가까운 기간동안 살면서, 제주에서 20년 가까운 기간을 살면서 여행에 굶주려 있는 내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며 나에게 일상이었던 곳을 특별한 감정을 갖고 방문하고 추억과 사색하는 이들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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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줄 인문학 Q&A Diary - 3년 후, 내 아이를 위한 특별한 기록
김종원 지음 / 청림Life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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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선생님은 '세상 그 어떤 완벽한 문제집보다 꾸준히 모아둔 오답노트 한 권이 더 완벽하다'고 하셨다. 이는 탄생 원리가 '나의 약점'에 최적으로 보완토록 되어 있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문제집 한 권을 여러 번 보는 것보다, 꾸준히 모아왔던 '오답노트 한 권'을 꾸준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15년 전 사용하던 일기장을 본 적이 있다. 그거에는 하루를 살면서 내가 느꼈던 내용이나 고쳤으면 하는 버릇, 사람을 만나면서 했던 실수 등이 투박하게 적혀 있었다. 시간 활용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다짐이나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많이 해줘야 하는지, 부하직원으로써 어떤 자세를 해야하고 리더로써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그날 그날에 따라 좋은 명언과 참고할 만한 글, 내가 해왔던 생각들이 정리없이 적혀 있었다. 그 것을 지금에서 보면 내가 읽어왔던 어떤 책들보다 가장 완벽하게 나를 보완하고 있다는 생각이들때가 있다. 자기계발서를 읽다보면 수 백 장의 내용 중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과 해당되지 않는 내용들이 있다. 아주 오래된 위인들의 격언 중에는 시대에 맞는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는 내용도 있다. 계발을 위해 읽어가는 그런 내용은 완전히 나에게 맞아 떨어지는 경우는 쉽지 않다.

가장 완벽하게 나의 단점을 저격하는 자기계발서는 내가 써야 한다. 보통이 작가들은 글을 읽는 것을 몹시 좋아하며,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이 세상에 없다는 답답함에 직접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다른 이유로 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보기에 세상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을 것 같은 완벽한 책 한 권을 낸다. 하지만 그런 큰 포부를 갖고 집필한 책들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책이고 다시 누군가에는 '뻔한 말들'이 가득한 책인 경우가 많다.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고 살아왔던 인생과 보고 들었던 것들의 차이가 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가장 완벽하게 공감되는 책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를 완전하게 알아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 이유로 꾸준한 글쓰기는 가장 나를 잘 아는 책을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시절, 손바닥에 30cm짜리 자를 후려맞으며 써야 했던 일기의 기억은 어쩐지 많이 왜곡되어 있다. 일기를 숙제와 같은 업무로 만들어버렸던 어린 시절 교육 방식이 맘에 들지 않다. 선생님에게 사생활을 공개하고 '참잘했어요' 도장을 받거나 손바닥을 맞거나, 택1의 교육법으로 어쩐지 한국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일에 거부감이 강하다.

길고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나면 개학 2~3일을 앞두고 연필을 쥔손이 노랗게 될 때까지 일기를 썼던 기억이 있다. 너무 단조롭지 않게 하루 하루의 이야기를 지어내며 적었던 일기의 기억을 되돌려 볼 때, 그런 식의 교육을 할 것이라면 '일기'가 아니라 차라리 '소설 쓰기'를 가르치는게 더 좋았을 법 하다는 생각도 한다. 나의 오래된 일기 방식은 '기록'이 아니다. '시'가 되기도 하고 '메모'가 되기도 하며, '편지'가 되기도 하고, '고민'이 되기도 한다. 형식은 없다. 그냥 하루 하루 기록을 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2010년 어느날에 나는 친구에게 500불을 빌렸던 기억이 있다. 그날 일기에는 '00에게 500불을 빌림'이라는 한 줄이 적혀 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건데, 그 돈을 왜 빌렸는지, 어디에 썼는지는 있지 않다. 그날 돈을 빌렸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오랜기간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던 희안한 습관 때문에 15년 전의 외국 친구들과 한국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날것 그대로 적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갑과 핸드폰을 자주 잃어버렸다. 그런 이유로 나의 수첩에는 얼마를 사용했는지, 얼마를 벌었는지,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 그의 전화번호와 생일은 언제인지가 모두 적혀있다.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던 함께 학교를 다니던 친구의 이름과 생일 전화번호를 보면 어쩐지 소름이 끼친다. 에빙하우스의 망각의 곡선 끝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과 그들과 내가 친하게 지냈음을 암시하는 여러 글들을 보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쓴 일기에는 여러 인문학적 내용들이 적혀 있기도 하다. 혼자 쓰고, 혼자 읽는 빈 노트에 왜 그런 것들을 적어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쩐지 그것들을 모아서 책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곤 했다. 이렇게 글을 모으고 쓰고 생각하는 작업은 꽤 시간이 지날 수록 '출판'의 욕심이 생긴다. 이런 출간 욕심은 세상에 없는 완벽한 책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바뀐다. 그렇게 완전한 책을 냈다고 다짐했어도 책의 평가는 다양하게 엇갈린다. '어디서 본 글들이 가득한 책입니다.'부터 '완전 제게 딱 맞는 책입니다'까지 사람들 중 나와 생활 방식과 삶의 방향이 비슷한 이들은 공감하고 완전히 다른 이들은 공감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와 일상을 함께하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먹으며 같은 곳에서 잠을 자던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매일 기록할 수 있는 빈 공간에 커다란 주제를 던져 주고, 하루의 생각을 짧게 기록하게 한다. 이것은 완전한 인문학 책, 자기계발서가 되며 동시에 일기이며, 커다란 선물이자, 교육서적일 수 있다. 예수가 아닌 이들이 그의 가르침과 그외의 것을 담은 성경이나 부처가 아닌 이들이 그의 가르침과 그외의 것을 담은 불경 등을 포함하여, 공자가 남긴 이야기를 그저 문자로 남긴 논어, 여러 성인들이 남겼다는 글들을 보면 대부분 자신이 아닌 이들이 글을 써서 남긴다. 이 또한 나에게 완전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 줄 가장 완전한 책을 3년에 걸쳐 집필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좋은 선물이자 교육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다시 글들이 출판되어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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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인문학을 먹고 산다 - 인문학으로 인공지능 시대를 주도하라
한지우 지음 / 미디어숲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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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100m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술은 이미 수 백 년 전에 완성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빠르게 100m 목적지에 도착하는 훈련을 이어간다. 이미 42.195km를 지치지 않고 완주할 수 있는 기술 또한 오래 전에 완성됐으나, 우리는 기계에 감동받지 않는다. 알파고는 이세돌 9단을 꺾었지만, 실제로 다시 한 번 스타의 자리를 확인하고 많은 광고와 협찬을 받아 상품성을 인정받은 쪽은 알파고가 아니라 이세돌 9단이다. 기계는 항상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듯 하지만 한 번도 인간을 위협해 본 적이 없다. 인간은 언제나 시대에 따라 기계를 능숙하게 이용하는 능력을 길러냈으며 이를 확실하게 잘 다뤄 더 많은 부와 편리를 이뤄냈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의 발전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시장이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무차별적이지 않는다. 어린시절 동네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보통 비디오와 만화책을 함께 대여해 주곤 했는데, 지금 스마트폰으로 영화와 만화책을 모두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자 비디오 대여점은 찾아보기 힘든 곳이 되었다. 어떻게 보자면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쇄소에서 원고대로 활자를 골라 뽑는 일을 하던 문선공은 현재 컴퓨터와 인쇄술의 발전으로 사라졌다. 이 또한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았던 것 처럼 보인다. 대체로 반드시 직업이 생겨나고 사라져가는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전문직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직업 이동성을 갖고 있다. 가령, 식품회사에서 경리업무를 하던 사람이 유통회사의 인사담당자 될 수 있으며, 텔레마케터가 치킨집 사장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과거에도 충분히 존재해왔다. 넷플릭스는 원래 DVD를 대여해 주던 대여점이 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들은 망거나 사라지지 않고 더 큰 번영을 이뤘다. 기술을 이용하여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된 것이다. 간혹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미래에 사라질 직업 순위'와 같은 기사를 보곤 한다. 그것이 사라진다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으로 그 직종의 모든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에 나가게 된다는 불안감은 옳지 않다. 기술이 발전하면 시장과 사회는 그것을 충분한 시간을 주며 받아들인다. 즉, 점차 수익성이 없어지거나 문화적인 도퇴를 알리는 여러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넷플릭스 서비스가 하루 아침에 기술의 발전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 지구상의 모든 비디오 대여점주들의 생존에 위협을 준 것이 아니다. 비디오 대여점은 점차 수익성이 떨어지고 시장은 새로운 기술에 점차 노출되며 공급자들은 여러 차례 더 큰 시장으로의 진출 기회를 얻기도 한다.

AI는 앞으로 인류를 지배할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져 잘못된 선택을 통해 우리 아이와 내 직업이 사라지는 경험은 아마 갖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동네에 하나도 없던 치킨집의 가능성을 보고 선점을 했더라도 그 외 많은 경쟁자들이 치킨집을 하거나 치킨 사업의 수익성이 없어졌다면 빠르게 다른 직종으로의 연구를 통해 발빠른 대처를 해야한다. 이것은 4차 산업혁명을 앞둔 우리에게만 있던 현상이 아니다. 삼성은 쌀농사를 짓던 회사에서 정미소, 유통 등 시대와 상황에 맞춰 나가며 발전해 왔고 현대나 애플 또한 그렇게 진화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사실상 1분 사이에도 꾸준하게 움직이는 주가 그래프를 보자면 우리의 미래는 어느쪽으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을 꾸준하게 갖고 있다. 여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특별한 직업을 선택하여 평생 편안하게 살겠다는 생각은 '공무원'이나 '농사'와 같이 일부 직종에서만 가능하다. 현재 택시를 운전한다고 앞으로 10년과 20년의 미래도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자만이다.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워렌버핏 또한 당장의 미래를 예측하는데 실패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십 수년의 미래를 확신하는 이들 대비 없이 자신의 인생을 불투명한 미래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가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할까. 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자기관리'를 말하고 싶다. 세상은 아주 빠르게 변한다. 핸리 포드는 자동차를 개발할 수 있는 개발자들이 5시간 50분에 한 대를 생산하던 일을 여러 사람들이 단순 업무를 나눠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1시간 33분으로 단축했다. 이런 생산성 확장은 사실상 자동차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전문가는 관리자가 되고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근로 시간을 단축하고 제품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누구나 탈 수 없는 비싼 사치품이었던 자동차를 쉽고 싸게 구매할 수 있는 필수품으로 이 됐다. 이처럼 사회의 변화는 무차별적인 폭력성을 갖는다기보다 수요와 공급의 라인을 왔다갔다하며 적정가격과 시장에서의 상품성에 의해 흥망이 정해진다. 대체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자동차 산업의 예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면 유럽은 앞으로 24년 뒤인 2035년에는 내연기관인 신차 판매가 중지된다. 사회가 내연기관에서 전기 혹은 수소차로 탈바꿈하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다. 여기에 기술의 발전에 따라 내연기관 자동차 산업이 모두 죽는다고 볼 수 없다. 이 중 일부는 더 커다란 시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런 흐름을 읽는 시선은 보통 독서로 길러진다. 대부분의 성공한 사업가들의 갖는 습관이 전통적으로 독서였던 이유도 이런 맥락과 관련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석유 고갈'에 대해 꾸준하게 들어왔다. 이런 기사는 수 년 내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석유가 고갈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대부분의 매체는 대중에게 이런 불안감을 이용한다. 대중 매체가 대중으로부터 선택 받기 위해 이용하는 최고의 감정은 바로 '불안감'이다. 우리는 언제 맹수에게 공격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밤잠 설치고 경계를 서곤 했던 DNA를 갖고 있다. 우리가 다시 매체에 눈을 때지 못하게 하여 광고 수익을 얻는 단순한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는 것도 독서의 대단히 중요한 효과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발달할 수록 인문학의 중요도는 더욱 커질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할 미래는 분명 불투명 했지만, 그것은 과거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을 바라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 오늘날이건 과거던 미래는 언제나 불투명했으며, 인문학과 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승리했다는 것은 지나온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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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 사물에 관한 散文詩
류성훈 지음 / 시인의 일요일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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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던 시기가 있었다. 나의 눈에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가장 완벽하게 모사하는 것이 곧 정답이던 시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는 것을 가장 완벽하게 담아내고자 했다. 그렇게 3차원의 어떤 것을 2차원의 평면 위에 모사하는 작업에 커다란 의미는 있지 않았다. 철학이나 사유보다는 가장 완벽한 모방만이 답이던 시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고민했다. 과연 3차원의 세상에 있는 것을 2차원으로 옮겨 담는다면 본질의 어떤 것이 누락되고 있지는 않는가. 미술은 그렇게 발전했다. 빛에 의해 가려지는 부분과 각도에 따라 숨겨지는 부분까지 묘사하고자 하는 것의 본질에 최대한 가까운 것을 담고 표현하고자 했다. 그렇게 예술은 점차 고차원적이게 변해갔다. 글도 그렇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숙제로 작성했던 방학 일기장에는 내가 그날 무엇을 했는지가 적혀져 있다. 차원 높은 인간의 하루를 어떤 행동을 했는지로 기록하는 것이 고작 일기에 담는 모든 것이었다. 그날 무엇을 했는지는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보다 중요했던 시기가 있다. 생각해보면 3차원의 것을 2차원에 옮겨 담거나 24시간을 한 장 남짓으로 옮겨 담을 때, 꽤 많은 정보가 누락된다. 이 중에서 가장 낮은 차원의 것만 옮겨 담는 것이 본질을 얼마나 담아내고 있을까.

우리가 갖고 있는 주변의 모든 것에는 '사유할 명분'이 있다. 사유해야하는 이유나 구실이 분명하게 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것과 나만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면 함께 사용하던 물건이 나를 당시로 되돌리곤 한다. 21세기 현대과학은 아직 타임머신을 개발하지 못했지만 언제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물건들은 이미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사물들을 가진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는 소유욕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법정 스님 조차 여러 '사물'에 흔적을 묻히며 살아왔으니, 현대인들에게 사물이란 더 많은 흔적을 남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대체적으로 오래된 물건을 좋아한다. 그것이 담고 있는 철학을 좋아한다. 새것이 갖고 있는 순수함보다는 오래된 것이 갖고 있는 철학에 조금 더 매력을 느끼는 편이다. 순수함이란 앞으로 철학이 남을 수 있는 빈자리가 많은 상태임으로 이것에 대한 기대감과 오래된 것의 철학은 분명 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에는 '정체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정체성은 '흔적'을 통해 발생한다. 인간도 정체성과 자아는 '흔적'에서 출발한다.

흔적은 그래서 몹시 중요하다. 이 사람이 어떤 생각과 경험을 가졌는지는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그 것은 그 사람의 미래를 대략 가늠해 보게 한다. 사물에는 흔적이 잔뜩 묻어 있다. 한 사물을 보고 과거와 미래를 보며 끝없이 사유하는 이 책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나 또한 이런 비슷한 훈련을 재미삼아 하곤 한다. 나는 보통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새로운 것을 접하기보다 이미 봤던 영화나 들었던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경향이 있다. 하나를 무한대로 반복해 보는 이런 습관은 자칫 누군가에게 '지겹다.'라는 감정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다른 시선과 방향을 찾는 놀이를 한다. 가령 영화를 본다고 할 때는 감독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기도 하고, 배우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기도 하며, 주인공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기도 한다. 또한 악당의 시선이나 작은 역할의 조연의 시선에서 보기도 한다. '이런 장면에서는 무슨 생각을 했을가'라는 질문을 하나 던지면 시선에 따라 엄청나게 많은 해석이 발생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작곡가의 시선, 작사가의 시선, 가수의 시선, 가사의 이야기나 리듬을 듣기도 한다. '가수는 이 구절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며 녹음을 했을까' 이런 사유의 놀이는 쓸때없지만 참 오래된 나의 생각 놀이법이다.

항상 잔뜩 쌓여 있는 정보의 책과 1차원의 행동을 담아둔 이야기 책을 보다가 사유할 수 있는 책을 오랫만에 접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생각이 드는지를 고민하고 생각해본다. 앞서 말한 미술처럼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 뒤로 보여지지 않게 숨겨져 있는 것을 말한다. 나에게 찌그러진 만년필이 있다. 가족여행을 가던 도중 안 주머니에 넣어둔 만년필이 실수로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며 뚜껑 윗부분이 찌그러진 것이다. 이 만년필은 몰블랑의 제품으로 공항에서 구매했던 것이다. 반짝 거리는 새 제품을 아껴 쓰느라 항상 조심하게 사용했다. 하지만 이것이 바닥에 떨어지고 난 뒤에는 완전한 나의 흔적이 묻어버렸다. 깨끗하게 새 것 처럼 쓰겠다는 마음은 어디에도 있지 않고 완전히 편하게 이것을 사용하게 됐다. 사실 원래 사물의 본질은 사용에 있다. 그리고 그것과 나의 관계는 흔적에 있다. 나는 새로운 수첩이나 노트를 받으면 언제나 첫번째 페이지에 더러운 글씨로 지저분하게 메모하곤 했다. 가급적 새것에서 멀어질수록 편해졌고 내 것임이 확실해졌다. 깨끗하게 사용하고자 했던 노트나 수첩은 항상 '북!'하고 찢어 '새거다움'을 유지하고자 했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고 십 수 년 뒤에 앞 장이 수장이나 찢어진 노트를 볼때면 내가 찢었던 종이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몹시 궁금할 때가 있다.

사물은 내가 잊어버릴 기억을 흔적이라는 방식으로 저장하는 메모리 같은 것이다. 앞만 달려가던 세상에 주위를 둘러보면 내가 사용하고 있거나 사용했던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이 여러 기억의 흔적을 묻혀두고 나의 선택을 받길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분명 재밌는 사유 놀이다. 오랫만에 조용한 시간을 내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짧은 글을 만난 것 같아 기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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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 -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최인철 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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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에 빠진 남편', '술을 좋아하고 항상 늦은 시간까지 밖을 돌아다니는 남편'. 여성은 남편의 고쳐지지 않는 도박과 술버릇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갈등이 발생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도박을 즐겨하는 남편의 나쁜 습관과 술을 좋아하고 항상 늦게까지 밖을 돌아다니는 나쁜 버릇에 속이 썩을 만큼 썩었다고 말한다.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음을 인식한 아내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이혼의 유책이 남편에게 있다고 한다. 법적인 유책을 찾는다면 남편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부부의 실제 이혼 사유는 '남편'이 아니다. 남편에게는 죄가 없다. 이 부부의 이혼 사유는 '공감 부족'이다. 만약 아내가 함께 도박에 빠져있고 술을 좋아하며 함께 늦은 시간까지 밖을 돌아다닌다면 이 둘은 '천생연분'이 된다. 경제적으로 파산이 되거나 몸 건강이 나빠지는 일을 차치하고 부부 사이는 매우 좋을 수 밖에 없다. 혐오의 반의어는 '사랑'이라고 한다. 자신과 닮지않음에는 혐오의 감정이 생기고, 자신과 닮음에는 사랑의 감정이 생긴다. 세상에는 고양이를 끔찍히 좋아하는 부류도 있지만 고양이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부류가 있다. 매콤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매운 맛을 극도로 꺼려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자신과 공감대를 형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대감을 갖는다. 또한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이질감을 갖는다. 그렇게 공감과 사랑의 파이가 커지면 반댓쪽에서는 혐오의 파이도 함께 커진다.

해외에서 10년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언어'는 나의 장애물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도 '원어민'과 비즈니스하고 생활해야하는데 모르는 단어나 깊이있는 대화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같은 조건으로 한국에오니 '언어'는 나의 강점이 됐다.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주변 환경이 달라질 뿐이다. 혐오는 특별한 이들에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라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크기가 커지기도 한다. 독일계 미국인 정치 철학자인 '안나 아렌트'는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당연하고 일상을 살던 폄범한 사람이 하는 일들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굉장히 나쁜 사람들이 자행할 것 같은 혐오의 감정은 사실상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다. 1960년 이스라엘의 첩보기관이 나치의 친위대 장교이자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기소했다. 이후 공개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사악한 악마가 아니라 몹시 친절하고 평범한 공무원이었을 뿐이었다. 어떤 특별한 이들이 악을 저지를 것이라는 생각은 생각보다 쉽게 깨진다. 단순히 조국을 위한 애국을 행하던 공무원은 상황에 따라 반댓쪽에서는 악의 상징이 된다. 조국에 충성도가 강할수록 이런 감정은 커진다.

내부적 결속이 잘 된다는 것은 '외부에 대한 혐오 감정' 또한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로 독재정권이나 전체주의 국가들은 내부적 결속이 뛰어났고 외부에 대한 혐오도 함께 켜졌다. 자신과 닮아 있는 것들에 대해 결속하고 다른 것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한민족'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이런 교육은 혼혈에 의해 '한민족'이라는 순수함이 오염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곤 했다. 어린 시절 받은 이런 교육은 한민족으로의 결속을 다진다. 또한 이민자에 대해 철저하게 경계한다. 우리의 인구가 비교적 작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15억 중국인들을 보면 실제로 매우 결속이 잘 돼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혐오의 감정이 결속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잖이 있었다. 정치인들은 떨어진 지지율을 급하게 올리기 위해 '일본'과 '북한'을 바꿔가며 이벤트를 진행했다. 이벤트는 혐오를 조장할수록 지지율이 올라갔다. 나치 또한 내부 결속을 위해 외부의 적이 필요했다. 망가진 독일의 경제에서 유일하게 대금업을 하며 부를 쌓아올리던 유대인이 그 표적이 됐다. 일본 관동지진에서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갔다.

'악'처럼 보이는 이런 '혐오'의 감정은 사실상 '사랑'이다. 내부적 사랑의 크기가 커지면 그만큼 혐오의 감정은 커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대체로 자신과 다른 이를 경계하려고 한다. 페루 남부의 잉카제국은 스페인 군대가 침공해왔을 때, 처음에는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나가기도 했다. 이런 환영의 끝에 잉카제국은 멸망했다. 인간에게 '혐오'란 '경계'를 의미하고 꽤 긴 시간 동안 이런 경계는 우리의 생명을 살려냈다. 혹여 잉카제국과 같이 '혐오'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은 빠르게 멸망하여 그 유전자를 후대에 넘기지 못했으니, 혐오의 감정이 극심한 생존자들의 자손인 우리의 유전자 또한 혐오의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가 다 다르다. 혐오의 감정은 힘의 균형이 엇비슷할 때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서로 견제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천하삼분지계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이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면 혐오의 감정은 노골적이게 된다. 상대적 다수는 상대적 소수에게 노골적인 표현과 행동을 취한다. 이런 행동들은 다수에 대한 결집을 돕는다.

누구나 강점과 단점이 있다. 나는 한국인이다. 주변에 한국인이 많은 환경에서는 내가 절대적 다수가 되지만, 제주도 출신이다. 절대 다수가 서울 출신인 한국에서 제주는 소수에 속한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내가 다수다.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책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서 절대적 소수다. 하지만 서점에서는 내가 절대적 다수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소수이자 약자이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다수이자 강자이다. 우리가 강한 부분과 다수인 부분에서 혐오의 감정을 나타내면 반드시 다른 부분에서 소수이자 약자로서의 불이익을 얻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사라지지 않은 감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의식하고 교육하는 것과 전혀 무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다른 일이다. 혐오의 감정이 사랑의 감정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함은 다양한 관점에서 알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혐오한다면 우리는 그와 다를 뿐이다. 단지 내가 그와 다를 뿐이라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충분히 내 의지로 그와 닮아지는 노력을 통해 바꿀 수 있다. 이는 나의 잘못일 수도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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