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병 - 공감 중독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나가이 요스케 지음, 박재현 옮김 / 마인드빌딩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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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푸틴을 옹호하는 겁니까?'

'그래서 일본이 옳았다는 겁니까?'

'그래서 중국이 맞다는 겁니까?'

적잖이 이런 글을 맞이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올리거나, 한일합방이나 중국의 역사, 문화공정에 대한 어떤 글을 올리면, 이런 글이 달린다. 대중의 생각에 다른 시선을 올리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공감을 강요한다. 글은 차가워 보이지만 논지는 이렇다. 모든 일은 '있을만 해서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즉, 어떤 일이든 있을 법했기에 일어난다. 발생할 확률 49대, 일어나지 않을 확률 51이었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양쪽 균형이 완벽하게 같은 양팔 저울에서 한쪽으로 기울였다면, 단지 한쪽에 어떠한 무게가 더해졌을 뿐이다. 저울이 기울여지는 현상은 한쪽으로 무게가 더 실렸을 때 일어난다. 모든 일은 일어나야 할 필연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것은 선과 악을 따지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중력은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을 따지지 않는다. 그냥 기본적이 일정 원칙을 따를 뿐이다. 그것은 종교, 문화의 용어에 따라 '순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신의 계획'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연에서 존재해서는 안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49대 51의 극미한 차이가 있고 그것으로 현상은 일어난다. 존재할만하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다. 공들인 농사물이 갑작스러운 가뭄에 모두 시들어 버리거나, 존경할만한 이가 허망하게 죽거나, 내가 응원하는 정당이나 스포츠 경기가 이기고 지는 모든 일들, 내가 살고 있는 국가가 누군가에게 침공을 받거나 침공하는 일들, 노력에 대한 실패나 잔혹한 살인범이 무고한 아이를 죽이는 일들. 그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는 '가치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일어날 법한 일들만 일어날 뿐이다.

'공감'은 집단을 결집시킨다. 내부 결집은 다른 말로 외부적 배타성을 갖는 말이다. 자석의 한쪽 극이 강력해질수록 반대쪽 극은 극심하게 강력해진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을 같은 편으로 둔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작게는 '반대편'으로 두기도 하고 극심하게는 '적'으로 간주한다. 역사에서 결집과 공감은 곧 '전쟁'을 야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랬다. 내부가 통일되고 안정되고 결집되면, 이 에너지는 '공감'을 명분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고 '혐오'를 키웠다. 1467년과 1493년 '오닌'과 '메이오'의 반란으로 일본은 춘추전국 시대를 맞는다. 일본 내부에서 분열되어 각기 다른 세력을 갖던 시기는 100년 가까이 지속하다가 일본 전국이 통일되는 시기를 맞이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몽고의 징기스칸 또한 여러 유목민족을 통합하고 결속한 뒤, 세계로 뻗어 나갔다. 2차 세계대전의 히틀러 또한 공감과 유대를 명분으로 '혐오'의 감정을 갖고 밖으로 뻗어나갔다. 안타깝게도 공감은 배타성을 갖는다. 배타성은 혐오감정을 유발시킨다. 이것이 폭력의 원천이다. 어떤 전쟁도 명분이 없지는 않다. 현대 서구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라는 명분으로 여러차례 침략전쟁을 벌인다. 이것에 공감하지 않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배타성의 대상이 된다. 내가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현상에는 이름이 붙는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있을 수 없다', '나쁘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왜곡시킬 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어떤 현상이던 일어날만 했다.'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왜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지, 한국은 왜 일본에 병합됐는지, 중국은 왜 공정을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는 시도는 분명 가치 있다. 그런 시선을 갖는 것 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 그 행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언젠가 '황사'라는 현상에 놀라운 '언어유희'를 발견했다. 황사먼지가 중국에서 부터 날아온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다. 황사 먼지의 입자는 지름 1,000μm정도 된다. 이런 미세한 먼지가 기관지에 들어가면 병을 유발한다고 했다. 얼마 뒤, 황사보다 더 미세한 먼지에 대해 메스컴은 떠들었다. 바로 '미세먼지'다. 미세먼지는 지름 10㎛이하의 먼지를 이른다. 이처럼 미세한 먼지는 아이러니하게도 2.5㎛이하의 초미세먼지보다 크다고 했다. 즉, 더 가는 초미세먼지가 더 작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년부터 '극미세먼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는 0.1㎛이하의 크기라고 했다. '작다', '미세하다'는 것은 결국 '상대적'이다. 어떤 것을 '작다'라고 표현하기 위해선 '기준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애초에 '황사'를 기준으로 비교를 시작했으니, 더 작은 덩어리를 발견할수록 점차 용어가 희귀해진다. 만약, '극미세먼지'를 먼저 비교대상에 뒀다면, 황사의 명창은 '거대입자먼지' 쯤 됐을 것이다. 즉, 미세먼지 자체는 '미세하다'하지 않다. "무언가에 비교했을 때, 미세하다"라고 보는 것이 맞다. 모든 것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커다란 바퀴벌레를 보더라도 '명왕성'과 비교하면 '극미세'하고, 명왕성이라고 하더라도 '은하'에 비교하면 극미세하다. '공감'은 상대적이다. 어떤 것에 공감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가치판단을 요구하고, 공감하지 않는다고 정의하면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공격성을 갖는다. 지난 2022년 2월 24일부터 2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물론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같은 시기, 대한민국 남성 1400명 이상이, 여성 700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망'에 대해 돕지는 못할 망정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시나요?"하는 글에 대답하자면 이렇다. 물론 안타깝다. 다만 메스컴이 어떤 쪽을 비추느냐에 따라 더 극적이고 더 안타까운 것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망자보다 대한민국 자살자가 더 큰 관심이 필요할 수 있다. 모든 것은 '황사'와 '극미세먼지'와 같은 상대적 판단일 뿐이다.

모든 현상은 현상일 뿐이다. 그것에 공감하느냐 공감하지 않느냐를 강요하는 것 또한 다른 방식의 폭력이다. '선'과 '악'을 구분 짓는데, 자신이 '선'이라는 명확한 잣대를 이미 세워두고 상대의 가치 판단을 시험한다. 이런 행위 또한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모든 현상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냉철하게 그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훨씬 더 그 일에 대해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다. 내가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는 어떤 해결책도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일 뿐이다. 간혹 내가 이해범주 내에서 일어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상식불가', '이해불가'라고 말하지만 그 또한 일어날법한 일이들이고 그 문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현상이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내 이해 범주가 그곳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상을 현상으로 바라보는 일은 불필요한 '공감과잉'을 멈추고 세상을 폭력에서 부터 멀어지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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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국어1등급으로 만들어주마 비문학편(독서) - 최신 개정판 너를 OO1등급으로
김범준 지음 / 메리포핀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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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언어 영역 1등급을 받기 위해 읽기는 너무 아쉬운 책이다. 책은 문해력을 키워주는 책으로 더 가치가 있다. 후반부에는 기출문제를 맞출 수 있도록 나와 있지만, 전반부에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에 대한 설명은 너무 좋다. 같은 글을 읽어도 누군가는 이해를 하고 누군가는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다. 글을 읽었음에도 글이 머리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겉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해력의 차이는 '언어영역' 뿐만 아니라, 교과과목 대부분에서 성적차이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교과과목은 교과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서도 문해력의 차이는 다른 능력의 차이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같은 글을 보고도 누군가는 이해를 하고 누군가는 이해를 하지 못한다. 행정의 하달은 '공문'으로 이뤄진다. 규모있는 조직은 업무를 안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결정권자가 있는 위가 좁고 명령을 하달 받는 아래가 넓은 '관료제' 형식을 갖는다. 결국 소수가 다수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인 '문자 전달'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문자해석 능력은 조직관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모든 실무 공무원에게 전화를 통해 행정업무를 내리는 것이 아닌 것 처럼, 명령을 하달하는 자는 '글쓰는 능력과 읽는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상위 계층일수록 문자 이용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하다. 다음은 2022년 3월 고등학교 3학년 언어영역의 지문중 발췌다.

'행위자 인과 인론에서 리드는 원인을 '양면적 능력'을 지녔으며 그 변화에 대한 책임이 있는 존재로 규정하였다. 양면적 능력은 변화를 산출하거나 산출하지 않을 수 있는 능동적인 능력이다. 그리고 행위자는 결과를 산출할 능력을 소유하여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 변화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이다. 리드는 진정한 원인은 행위자라고 주장한다.'

눈으로 스쳐지나가거나 음성신호로 바꿔 놓는 단순 작업이 아니라, 그 의미가 이미지로 들어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마 위 예시를 한 번에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글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 '음독, 묵독, 시독' 등의 읽는 법을 사용한다. 자. 이제 내가 보여주는 3가지 단어를 살펴보자. 1번 'scrupulous', 2번 'precipitate', 3번 'daring'. 3번까지의 글을 여러분들은 눈으로 살폈지만,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있냐고 묻는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혹여 영어 능력이 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4번 'δικαιοσύνη'를 포함해서 들여다보자. 우리는 1번부터 4번까지 그 문자를 들여다 봤다. 다만, 그 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파악하지 못했다. 1번의 뜻은 '세심한', 2번은 '재촉하다', 3번은 '용감한', 4번은 '정의'라는 단어다. 이제 우리는 이 문자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대부분 문자의 활용은 '의미전달'있지 그것의 뜻을 번역해 내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는 신호등에 있는 빨간색 신호를 보고, '저것은 멈추라는 신호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즉시 멈춘다. 우리의 뇌는 '문자'를 인식하는 능력이 애초에 없다. 뇌의 처리 방식은 기본적으로 '이미지화'다. 즉, 빨간 불을 보면 즉각적으로 멈추는 동작을 취하는 것처럼, 'Stop'이라는 표지판을 보고서 즉각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Stop의 스펠링이 Stup!!이라고 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상황에 맞게 끔, 즉각적으로 멈추는 행위를 한다. '사랑한다'라는 단어를 보면 사랑의 감정을 이미지화 시키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보면 그 부정적인 이미지를 이미지화한다. 다만 앞서 말한 1번 'scruplous'를 다시보고도 세심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저 그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래 반복적으로 노출된 것에 익숙해진다. 즉, 자동차 양쪽 측면의 사이드미러를 살피고 왼손으로 기어 조작을 하며 오른 발로 '엑셀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밟는 동시적인 행위도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즉각적'으로 움직인다. '브레이크를 밟아야지'라는 의식보다 먼저 내 몸처럼 차를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자도 마찬가지다. 해외에서 10년을 살고 한국으로 왔을 때, 사람들의 인식은 대부분 이렇다. '영어 잘하시겠어요'. 하지만 나는 대답한다. '제가 사용하던 분야에서는 잘하고 그러지 않은 부분은 못하죠.'

얼마 전, 내 휴대폰 요금 서비스 중에 '선택약정할인제도'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뭔지 잘은 모르지만, 할인을 해준다니 신청했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선택약정할인제도'로 할인을 받고 있다고 상담사는 몇 번의 설명을 해주었으나, 수 년 째 나는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스마트폰을 변경하면서 수차례 내가 '선택약정할인제도'에 대해 읽고 찾아보고 묻고를 반복하다보니, 이제는 그게 뭔지 이해가 가능하다. 그전 까지는 내 머릿속을 겉돌던 '선택약정할인제도'가 나의 머릿속에 장착된 것이다. 이렇게 들어 앉은 단어는 마치 의식없이 여러 조작을 하며 복잡한 운전을 하는 운전자의 뇌와 비슷해졌다. 브레이크를 얼마나 밟아야 하는지, 핸들은 얼마나 틀어야 하는지, 주차 시에 좌측은 몇 번 봐야하고, 우측은 몇 번을 봐야하는지, 수첩에 적어놓고 하나씩 행하던 행동들이 모두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움직여진다. 이제 '선택약정할인제도'는 나에게 쉬운 단어로 인식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선택약정할인제도'처럼, '아 그런가보구나'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왜 그것을 해주고 있는지, 그것의 뜻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음' 정도를 눈으로 읽어 넘어간 것은 '읽음'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책을 읽을 때, 충분한 시간을 갖고 천천히 읽고 이해가 안되면 몇 번을 되뇌라고 말한다. 엄청나게 공감한다. 문장을 읽을 때, 한 번에 들어오지 않은 문장을 여러번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그 문장이 서서히 해체되어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얼마 전, '성경'에 관한 글을 썼던 적이 있다. 이 글에 기존 기독교를 믿는 분들은 되려 '쉬운말'로 바꾼 성경이 더 어렵다고 했다. 더 쉽게 바꾼 글이 더 어려운 이유도 이미 익숙해진 글에 대한 이질감일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는다. 문자를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저 묵독으로 '음'을 숨겼을 뿐, '음독'의 절차를 했을 뿐이다. 이는 구글번역기가 들려주는 영혼없는 '소리'일 뿐이다. 구글 번역기는 문자를 '소리'로 바꿔 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번역기가 읽어주는 글은 '감정'이 없고 '딱딱하며' 어감이 없다. 글을 쓴 사람은, 절실하게 글을 읽는 사람에게 무언가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럼에도 글을 읽는 사람은 그것을 전달받지 않고 구글 번역기 처럼 음성신호로 바꿔내기만 한다. 이것은 책읽기가 아니다. 사실 이것은 수학에서도 적용된다. '원주율'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주율을 이야기 하면 '파이'를 이야기한다. 파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3.14...'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원주율은 원의 지름이 길어질수록 원의 둘레도 함께 길어지는 일정 비율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은 그것을 모른다. 그저 그런게 있다고 겉으로 아는 척하며 넘어갈 뿐이다. 중학교 사회교과서에는 '로컬푸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분 사람들은 '로컬푸드'를 보고 '그냥 지역 식품인가' 하겠지만, 정확한 의미는 반경 50km이내에 생산된 농산물을 의미하며 장거리 운송을 거치지 않아 신선도를 극대화시키고 운송에너지를 최소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도 우리는 대부분 '내가 추측하는 범주'로 해석하고 이해해 버린다.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은 다음으로 넘기고 넘기다 보면 점차 부정확하게 문자를 이해하는 일이 많아지게 된다. 정말 오랫만에 공감되는 책이다. 단순히 수험생뿐만아니라 글과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읽어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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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공부 - 개나 소나 자유 평등 공정인 시대의 진짜 판별법
얀-베르너 뮐러 지음, 권채령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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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없이 어떻게 합의에 이를수 있는가? 갈등은 열린 사회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를 악보로 표현하자면, 주요 테마의 화성은 불협화음일 것이다. 모든 변화는 움직임을, 움직임은 갈등을, 갈등은 열기를 의미한다' -솔 앨린스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 민권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솔 앨린스키는 '민주주의'를 '갈등'과 '불협화음'의 체제라고 언급했다. 누군가는 그를 대중을 선동하는 좌파 선동가라고 불렀지만, 이런 모든 모습을 수용하는 것조차 어쩌면 민주주의일 것이다. 국민의힘 상임고문이자 전 새누리당 대표최고의원인 김무성 전 대표는 당내 계파갈등에 대해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란 원래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민주주의의 불완전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에 완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끊임없이 진보합니다." 이 두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고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것이다. 대단한 정당이 집권하거나 훌륭한 지도자가 탄생한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완성은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항상 다리 길이가 달라 삐끄덕 거리는 의자 위를 조심스럽게 앉아 있는 것과 같다. 마치 어느 쪽 방향으로든 쓰러질 것 같은 곡예사의 막대기 위에 접시가 겨우 균형을 잡으며 돌고 있는 것이다. '국민대통합'이란 말은 사실상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른 여러 '자유의사'들 이곳으로 힘이 왔다갔다 번갈으며 반복한다. 그러나 이런 불완전한 체제임에도 민주주의는 현 세대의 대세가 됐다. 이에 유시민 작가는 민주주의가 대세가 된 이유는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6세기 조선에서 대단히 위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하는 공공의 물건이고, 특정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이다. 그는 '천하가 임금의 것'이어야 하는 대세를 거스렀다. '황해도 관찰사'가 선조에게 올리며 이 '사상 다른 이'를 고발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사건의 시작되자, 정여립은 체포 직전에 자살한다. 그러나 선조는 정여립과 연관된 이들을 모두 제거하기 시작했다. 2년 간 약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생각 다른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체제안정'을 하는 것은 전체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즉, '국민대통합'이라는 말은 자칫 위험하게 해석될 여지도 있다. 민주주의는 효율적이거나 안정적인 제도는 아니다. 5년에 한 번 씩 전임 통치자가 했던 정책을 싹다 갈아 엎어 새로 시작한다. 사회적 비용이나 시간, 노력을 생각하자면 이처럼 비효율적인 정치방식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다. 생각 다른 이들과 공존하며 너 한 번, 나 한 번, 권력을 이양하고 양도 받는다. 이는 스포츠 경기와 비슷하다. 상대방의 골대로 골을 넣는 방법은 상대 선수를 모두 총으로 쏴버리고 터벅 터벅 걸어가 넣는 일이다. 그러나 스포츠 경기의 공은 일정한 규칙을 지키며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바쁘게 왔다갔다 하며 승리를 한다. 심지어 같은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 같은 팀의 다른 포지션 누군가에게 서스름없이 공을 넘겨 준다. 우리 팀끼리도 서로 공을 주고 받길 바쁘게 하다가 결국 한 골 넣고, 한 골을 먹히길 반복하며 경기는 진행된다. 이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 심판, 관중, 선수들이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뉴스에 아름답거나 멋진 이야기는 실리지 않는다. 그들은 보통의 대중보다 더 선한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욕을 먹는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후진적이거나 나쁘다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지만, 그 또한 '민주주의'의 한 조각이다. 지난 2021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워싱턴 DC의회의사당에 난입하는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었다. 이에 주 방위군의 투입됐다. 민주주의는 약속과 합의를 통해 비폭력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그나마 인류가 발견한 가장 선진적인 방식이다. 물론 우리의 과거 민주주의도 '폭력'과 '강요'로 얼룩져 있지만, 최소한 지금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동경해오던 여타 선진국만큼이나 성숙해지고 있다고 믿는다. 지난 민주당 경선에 졌던 이낙연 후보는 상대 경선 후보였던 이재명 후보에 지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불만이 있어도 약속은 약속이고 합의는 합의입니다.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어떤 스포츠 경기더라도 '목적'에 '맹'자가 붙는다면 어김없이 '폭력'으로 이길 수 있다. '축구경기'에 몽둥이를 지참하지 않는 이유는 상대도 나와 같이 규칙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경기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에 의해 감시를 받아야하고 이를 중재하는 심판이 있어야 하며, 경기의 룰을 최대한 따르겠다는 플레이어의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야 한다. 언제든 대통령을 욕할 자유가 있고 실행하는 권력에 반대할 권한을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며 표현과 사상의 자유 등 다양한 다양성을 인정하되 '법치'에 따른 규칙을 지키는 '문명'적인 권력이양 체제다.

도서는 대한민국의 정치보다는 미국 혹은 유럽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책이 말하고자하는 '민주주의'는 특히나 우리에게도 이미 적용되는 이야기들이었다. 포퓰리즘이나 독재와 같이 민주주의는 언제나 경계해야 할 내용들이 분명하게 있다. 지난 브렉시트 때, 나는 투자하던 회사의 주가 하락으로 꽤 큰 손해를 봤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될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지금에서야 그럴 수 있을 법한 일들이지만, 당시에는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거나, 트럼프가 힐러리를 이기는 일이 당연한 일은 아니였다. '설마, 그래도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언제나 틀릴 수 있음은 '민주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국가를 운영하는 '행정가'들은 가끔 '엘리트주의'를 말하곤 한다. 플라톤 역시 포퓰리즘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순수한 엘리트 주의를 이야기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교육'에 의해 가장 잘 정제되어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에 그 원리와 역사 등을 알아보고 살펴보는 것은 우리 대중이 앞으로 어떤 국가와 국민이 되는지 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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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코드 - 고통의 근원을 없애는 하루 10분의 비밀
알렉산더 로이드 지음, 신동숙 옮김 / 시공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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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는 '인생은 고통이고 슬픔으로 가득 찬 감옥'이라고 했다. 고통의 본질을 고민하던 사상가는 그 밖에도 많다. 석가모니와 쇼펜하우어 역시 고통의 본질을 고민하였다. 인생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움보다 '고통'을 더 깊게 느낀다. 염세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라는 것은 아니다. 본질을 직시하는 것은 그저 다가 온 고통을 모르쇠로 일관하여 외면하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그러지 않다고 곱씹고 되뇌여도 우리의 대부분은 인생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모두 겪을 것이며, 그 중, 희(喜: 기쁨)와 락(樂: 즐거움)보다는 노(怒: 성냄)와 애(哀: 슬픔)를 더 크게 인식을 할 것이다. 원래 인간은 그렇다.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기본 원리는 생존지향성(survival orientation)이다. 인간은 종족과 개체보존의 법칙을 철저하게 지켜내기 위해, 위협에 기민하게 진화해왔다. 우리가 겪어오는 수 많은 기억은 모두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지 않고 일부는 단기기억이나 외현기억, 암묵기억으로 넘어간다. 그중 생존에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기억은 반드시 장기기억으로 전송시킨다. 그것이 우리를 생존케 하는 '본능'이다. 결국 우리의 머리속 해마 옆에 있는 편도체는 공포와 두려움 등의 고통의 감정에 반응한다. 이것이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줘야, 우리는 맹수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두려움을 이용하여 '조심'히 행동하고 움추려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은폐한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칭찬받은 기억보다 혼난 기억이 더 먼저 떠오르는 이유도 사람은 대게 나쁜 일을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기억의 내용이 상실되더라도 감정과 불안, 공포라는 아주 효율적인 압축파일로 저장됐다가 불현듯 떠오르게 한다. SNS를 들여다보면,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곳에서 혼자만 고통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좌절하거나 우울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우리의 사피엔스 종은 참 어리석게도 가장 행복한 순간을 '인터넷 클라우드 서버'에 남기고, 가장 불행한 기억을 '자신의 편도체'에 남긴다.

책은 과학과 오컬트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모든 내용에 공감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책은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분명 던졌다. 어떤 책이던 읽다보면 작가와 생각이 다를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 책이 잘못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흥미롭게 읽어 내려갔다. 한때, 나 또한 어떤 작가의 책을 평가했던 적이 있다. '상당히 실망스러운 책입니다.'라는 평을 달았던 적이 있다. 그것에 굉장히 큰 후회를 한다. 나 또한 내 집필서적에 대한 리뷰를 꼼꼼하게 챙겨본다. 그럴때면 당연하게 좋은 이야기만 적혀 있지는 않다. 어떤 누군가는 부끄럽게도 '인생 책 중 하나'로 꼽기도 하고, 너무 좋았다며 여러 권을 더 구매하여 주변에 선물하기도 했다고 했다. 반면 다른 누군가는 되려 '인쇄된 종이가 아깝다'고 하거나 '작가에게 속았다'라며 평가하기도 한다. 같은 글을 보고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책'이 '상대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같은 거울을 들여다 보고도 '남자'가 서 있기도 하고, '여자'가 서 있기도 하며, 멋있는 사람이 서 있기도하고, 그렇지 않은 이가 서 있기도 하다. 이유는 '거울'이 잘못 만들어진 이유도 간혹 있겠지만, 보통 '거울'이 '상대적인 도구'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어디를 비췄느냐', '누구를 비췄느냐'에 따라 거울은 완전히 다른 결과물을 보여준다. 1548년 생인 조르다노 브루노라는 이탈리아의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무한 우주와 세계에 관하여'에서 교황청에 반하는 주장을 했다. 그 주장으로 인해 그는 교황청에서 이단으로 분류됐다. 그는 당시 '성경'의 해석에 불만이 많았다. 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그리스도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런 그에게 교황청은 불순한 해석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사형시키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나 그는 철회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그는 화형당했다. 그가 사망하고도 수 백 년 간, 그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았다. 20세기나 되서야 이 종교 재판의 잘못됐음이 인정되고 1979년에서야 사형판결이 취소 됐다. 내가 믿는 진리는 결코 영혼불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나 종교에서도 분명하다. 내가 중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중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해 활짝 열어 두고 상대의 이야기에 일말이라도 재고할 필요는 있다. 즉, 나쁜 책은 없다.

우리가 겪었던 기억들이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그중 장기기억으로 넘어간, '부정'의 감정들은 다시 현재의 나에게 간섭할 것이다. 오래된 기억을 잘 정리하고 다듬지 않는다면 이 기억들은 분명 '독'이 될 것이다. 같은 샘물을 마셔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젖소는 '우유'를 만든다. 우리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독성'을 만들어낸다. 그 독성으로 상대를 죽이기도 하고, 가끔은 '자신'을 죽여 '나는 맛없는 고기입니다'라는 신호를 뿜어내기도 한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극하게 받아 독성을 스스로에게 투여하고 있다면 그것을 멈춰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기억은 그 고통의 원천이 된다. 그 기억을 잘 다듬고 직시하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아무리 되돌리고 떠올려봐도 도대체 고통의 근원이 자신이게 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 백 년 전, 내 조상의 기억이 유전적으로 되물림 될지도 모른다는 시선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조상의 업보'를 '후대'가 받는다라는 '비과학적'인 말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는 우리 조상이 나무 위에서 내려 온 업보 때문에 '직립보행'하는 진화를 겪었다는 것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조상과 내가 전혀 다른 개체라고 여기는 것도 사실상 굉장히 비과학적인 접근이다. 수백년 전 조상의 과보를 후대가 받는다는 '영적'인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분명 우리 모두는 조금씩의 진화를 거쳐 성장해왔고 인간의 역사 대부분은 철저하게 '가문'만의 직업과 역할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점이다. 수 만 년을 올라갈 것도 없이 동양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불교' 또한 '고(苦: 괴로움)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다. 그것을 피하지 말 것이며, 부정하지 말 것이며, 인정하되 사로잡히지 말고 받아들이되 빠지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를 객관적인 입장으로 바라보고 그 현상에 대해 냉철하게 바라보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 오랜 동양 철학의 사상이다. 오래 전 부터, 동양은 밀농사를 짓는 서양과 다르게 '관계'를 중요시 했다. 집중호우기에 풍부한 강수량으로 벼농사를 짓던 동양인들은 보를 짓거 관개사업을 할 때, 항상 공동체적으로 움직여야 했음으로 관계설정은 굉장히 중요했다. 아들러의 말처럼 관계설정에서 부터 열등감이나 우월감 등 다양한 감정이 생겨남으로, 동양의 이런 철학의 뿌리는 역사적으로 신임이 가기도한다.

두고 두고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다. 인생의 고락이 어디서 부터 출발했는지, 그리고 지금의 나는 과연 과거와 그 윗대에서 부터 완전하게 분리 독립된 객체인지를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 잠들어 있는 기억들로부터 고통으로 해방되고 다시 오늘과 내일을 다르게 살 수 있게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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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미 이치로의 삶과 죽음 - 나이 듦, 질병, 죽음에 마주하는 여섯 번의 철학 강의
기시미 이치로 지음, 고정아 옮김 / 에쎄이 출판 (SA Publishing Co.)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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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난 그날이 바로 죽기 시작한다. 병들지 않으면 좋지만, 병에 드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조각이다. 이별하지 않으면 좋으나, 만남은 동시에 이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삶과 죽음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하면 할수록 인생을 옭아 매는 사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사랑은 좋은 것이나, 돌아설 때는 '원수'의 모습을 하고, 존경과 감사는 긍정적인 것이나 돌아서면 증오나 실망으로 한순간에 바뀐다. 어린 아이를 달래는 방법은 간단하다. '초콜렛'이나 '사탕'을 들고 서면 된다. 혹은 '큰 소리'로 호통을 치거나, 기쁨 마음으로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추게 한단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통해 회유하거나,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통해 공포심을 주면 된다. 그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 다 자란 성인에게는 그깟 '초콜렛'과 '사탕'이 회유의 미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 자란 성인에게는 그깟 '큰 소리' 호통 정도는 공포감을 주지 못한다. 사람을 나이가 들면서 '초콜렛'과 '사탕'보다 달콤한 것을 알아가고, '큰 호통'보다 무서운 것들을 알아간다.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피하고 싶은지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데, 가장 어려운 상대는 무엇도 원하지 않고, 무엇도 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이 마흔이 '불혹'이라고 했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마흔이란다. 나이 마흔이 되면 사람들은 웬만한 '미끼'를 물지 않는다. 달달한 사탕이면 언제든 꿸 수 있는 어린 시기를 지나고 '돈' 몇 푼에 '청춘'도 내다파는 젊은 시기를 지나, 웬만한 일을 다 겪고나면 나이 마흔 쯤에는 꿸만한 미끼도, 위협할 공포도 많이 사라지는 모양이다. 사람이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겪게 되는 네가지 고통인 생로병사, 그나마 다 자란 어른을 움직이는 유일한 공포다.

기쁨은 '마약'과 같다. 약물을 더 많이 쓸수록 내성이 생겨 쾌감이 줄고 더 많은 사용량이 필요하다. 어린시절 어머니는 분홍 소시지 전을 종종 해주셨다. 아무때나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였고 대부분의 우리집은 김치찌개가 식사 매뉴였다. 김치찌개에서 고기나 두부를 건져 먹는 일 말고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은 그닥 없었다. 내 기억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어린 시절 반찬은 '분홍 소시지'다. 이 반찬은 나를 움직이는 아주 좋은 자극제였다. 이 반찬이 나오는 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안좋은 일들도 금새 잊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 적게는 몇 만원에서 수 십 만원을 하는 한끼를 먹는 날이 생기기도 했다. 세상 맛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짜장면 한 그릇값이라는 5,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먹어도 그닥 큰 기쁨이 몰아오곤 하지 않았다. 1,500원이면 거의 일주일을 먹던 분홍소시지라는 적은 투여량으로는 나를 만족 시키지 못했다. 담배농사는 옛부터 벼농사보다 수지가 맞는 사업이었다. 사람들은 배부름보다는 쾌락을 선택하곤 했다. 사람들이 쌀보다 담배를 더 많이 찾기 시작하자, 농사꾼들은 당연히 벼농사를 지어야 할 농지에 담배농장을 지었다. 그러자 국가에는 조세 문제가 발생했다. 중세부터 동양에서는 점차 이 것에 위험을 감지했다. 17세기 일본에서는 담배 금지를 수차례 내렸고, 명나라나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담배는 꽤 질이 좋았는지 조선인들은 대부분 담배를 사랑했다. 중독의 파멸은 '청나라 말기'에서 노골적으로 들어났다. 청나라가 담배를 금지하자, 담배대신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아편을 찾아 피웠다. 처음 작게 시작한 사건의 발달은 청나라 경제를 무너뜨리고 급기야 청의 몰락까지 이어졌다.

대부분의 쾌락은 항상 이처럼 극도의 중독성과 함께, 그 투여양이 늘어난다. 부자가 되길 원하는 마음은 1억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10억과 100억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이 것이 결국 파멸로 가는 것을 경계 많은 성인들은 '쾌락' 사용의 위험을 이야기 하곤 했다. 얼마 전, 아이와 한라산 근처에 있는 '관음사'를 방문했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병들어 죽는 일'에 대해 '불행'이라고 여기지 마라. 얼핏 표면적으로 다가오지 않던 그 말의 진위가 보였다. 병들어 죽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며,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나이들어감, 병듦,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면 사람은 자신을 위협하던 공포에서 자유롭게 된다. 채찍질하는 마구에게 말이 노예처럼 쓰여지는 이유는 등을 후려치는 '매질'이 두려워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후둘겨 패도 꼼짝도 하지 않는 말은 마구에게 쓸모가 없어 버려진다. 그로써 말 듣지 않는 말은 '자유'를 얻는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개인심리학'을 수립했다. 그는 인간의 행동과 발달을 결정하는 것이 열등감과 무능력이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열등감과 무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보상 욕구는 그 사람을 움직인다. 또한 권력에 대한 의지 또한 사람을 움직인다. 원인론 적인 측면에서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아들러는 인간의 번뇌의 시작이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봤다. 즉,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대성'에 비교 기준을 두면서 '절대성'이 생긴 것이다. 지나가며 마주한 10층짜리 빌딩은 굉장히 높다고 보여지나, 50층 짜리 빌딩 옆에서는 작은 건물일 뿐이다. '관계설정'과 같은 '비교'가 사라지면, 인간은 자유를 얻는다.

'미움받을용기'를 집필한 '기시미 이치로'의 조금더 철학적인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굉장이 얇다. 진리와 철학은 굉장히 고차원적인 것 같지만 사실상 단순하다. 세상 만물을 모두 더하면 '1'인 것과도 같다. 책은 생각할 거리를 충분하게 주면서도 어렵지 않고 대화 형식을 적당히 섞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역시나 '미움 받을 용기'에서 처럼 그의 철학의 대부분은 '아들러 심리학'에서 출발한다. 일본어를 하는 그의 철학 이야기를 이처럼 서재 자리에 앉아 읽어 낼 수 있다는 행운은 일종의 독서가 주는 '축복'에 가깝다. 책의 마지막에 그는 '한국 영화'에 대한 도서 집필을 했다고 한다. 다만 마침내 한일관계가 악화되어 출간되지 않은 모양이다. 어떤 형식으로 출간될지 모르지만, 그의 철학과 적절하게 섞어 한국 영화에 대한 평이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그의 새로운 책 또한 한국어로 번역되길 고대하고 기대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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