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를 위한 변론 - 지속가능한 지구생태계와 윤리적 육식에 관하여
니콜렛 한 니먼 지음, 이재경 옮김 / 갈매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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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평균 소 한마리당 고기 약 215kg이 나온다. 닭은 한 마리당 1.8kg이고 이중 70%가 고기다. 즉 소 한마리를 죽이고 생기는 고기의 양을 위해, 닭은 150마리를 죽여야 한다. 윤리적으로 '소고기'만을 비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급작스럽게 부양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가축의 수가 늘었을 것 같지만, 지구에 있는 가축의 수는 오늘날이나 100년 전이나 비슷하다. 적색육과 동물성 지방의 소비도 줄었다. 인류의 비만에 대해서는 '적색육'이 아니라, '설탕'이나 '가공식품'이 훨씬 더 영향이 크다. 소들은 지구의 광활한 대지를 무차별적으로 초토화하고 훼손할 것 같지만 실제 방목은 녹지화에 기여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소를 이야기 할 때, 이산화탄소나 메탄, 이산화질소를 언급한다. 기후변화에 목축업이 커다란 영향이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이산화탄소배출량(미국기준 전체 58%)은 개인 차량에서 발생한다. 또한 브라질의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목축을 한다는 생각도 잘못됐다. 열대우림이 파괴된 자리는 초원이 아니라 밭으로 변했고 마트그루수주는 대략 70%가 대두즐 재배한다. 대두는 돼지의 사료로 사용된다. 또한 20세기 후반에 인간이 유발한 메탄의 전세계 총량중 29%는 논농사가 야기 했다. 현재도 전세계 메탄 배출의 대략 10%가 쌀 농사가 야기한다. 즉, 윤리적인 이유에서, 환경적인 측면에서 '적색육'을 먹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장주의로 보기에 인간의 대부분의 것들은 오묘한 흔들림을 겪으며 균형을 찾는다. 사람들은 '중론'에 '시장'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투자자'들은 이미 '규모'가 아니라 '성장 가능성'에 투자를 한다. 즉 자본이 '환경'에 투자하는 것은 '성장 가능성'에 있지 '규모'나 '중론'에 있지 않다.

얼마 전, '빌 게이츠'의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을 읽었던 적이 있다. 다독가답게 훌륭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다른 기사를 보자면 빌게이츠가 만든 민관 합적펀드가 미국과 유로, 영국의 청정기슬 프로젝트에 18조원을 투자했다고 한다. 일론머스크라는 세계 최대 부자는 '친환경 자동차'를 만들고 그 밖에 대부분의 '자본'은 '친환경 기술'에 집중 투자한다. '그들의 선의'를 깍아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은 '기성 산업'에서 '성장 동력있는 신산업'으로 이동할 뿐이다. 기후와 환경을 위하는 자본 중에는 태평양의 플라스틱 쓰레기섬의 쓰레기를 매입하거나 궤도권의 우주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자본은 성장과 비전에 움직일 뿐, '지구'와 '환경'을 위하는 이타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사실이다. 성장동력이 있다는 것은 '산업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즉 인간의 식문화의 주류인 '적색육'에 대한 위기가 '홍보'되면 성장동력있는 산업 블루오션은 꿈틀거린다. 유튜브를 보면 어렵지 않게 '채식'을 독려하는 영상을 보게 된다. 가령 병아리감별사가 병아리의 성별을 감별하고 그자리에서 숫병아리를 분쇄기로 던져 넣어 갈아버리는 영상이라던가, 제조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움직이는 컨베이어벨트에 돼지를 올려놓고 자동 도축하는 공장도 그렇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한지에 대해 알리려는 동영상을 보면서 끔찍했지만 아이러니하게 나는 그날 저녁에도 친구와 삼겹살을 먹었다. 불필요하고 과도한 살육은 마땅히 피해야 한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피치못할 일에 대해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 또한 맞는지 모르겠다. 맹수의 왕 호랑이는 초식을 하지 않는다. 무조건 육식만 하며 사냥감에 올라타서 물고 뜯고 찢어버린다. 한 생명을 통채로 죽였음에도 한 끼에 배가 부르면 더이상 먹지 않고 자리를 떠버린다. 그렇다고 호랑이에게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 대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생명'은 고귀하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다른 '생명'의 '생명'을 앗아가지 않는 방법말고는 없다. 생물은 '섭취'를 통해 생명의 에너지를 지속시킨다. 즉 내가 살아있음은 어떤 누군가의 '생명' 위에 지속된다는 것이다. 동양에서 특히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생명을 함부로 앗아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를 언급했더 붓다 또한 육식을 피하지 않았다. 간혹 '원죄'를 말하는 '성경'의 이야기를 거북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다만 '성경'의 말씀도 '불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냐'는 질문에 '성경'은 대답한다. 우리는 피치못하게 어떤 생명을 '죽이며' 생명을 영위한다. 그것에 특별하게 감사해야하고 자신의 삶에 책임 의식도 가져야 한다. 축산업이 마치 환경을 파괴하는 죄업이고 비윤리적인 산업이라는 프레임은 사실상 모두 틀렸다고 할 수도, 모두 맞다고 할 수도 없다. 사실 축산업은 앞에서 말한 내용 외로 환경에 피해를 주고 있는 부분도 분명하게 있으며 비윤리적인 부부도 분명하게 있다. 특별히 소고기를 키우는 것이 기후변화에 극적인 영향을 줬고 물과 지구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건강에 치명적이라고 하기에, '소'는 단순 '고기'뿐만 아니라 '뼈', '우유', '가죽', 농업보조, 이동 수단 등으로 특별하게 활용된다. 특히나 가난한 나라에서 이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높다는 것을 봤을 때, 인류에게 중요한 동물이다. 책은 변호사이자 작가이자 농업인인 '니콜렛 한 키먼'의 글이다. 두꺼운 책에 역시나 묵직한 무게로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소고기에 대한 변론'을 펼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진실이며 선동과 조작에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지 깨달아야한다. 물론 이 책이 말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특히나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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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 쌓일 만두 하지? - 일상의 빈틈을 채워주는 세상의 모든 지식
팀 교양만두 지음 / 다산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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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서 '하늘 아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학자'라고 불리던 '하국주'가 조선의 '홍정하'에게 문제를 냈다.

"360명이 1인당 1냥8전씩 냈다. 모두 합하면 얼마일까"

너무나 쉬운 이 수학 문제를 홍정하는 단숨에 답하고 하국주에게 되물었다.

"둥근 옥이 있다. 이 옥에 내접하는 정육면체 옥을 뺀 껍질의 무게는 256근 50냥 5전이다. 껍질의 두께가 4촌 5푼이라고 하면 이 둥근 옥의 지름과 정육면체 옥의 한 변의 길이는 얼마인가?"

17세기 '홍정하'와 '하국주'는 같은 시대 수학자다. 조선의 수학자는 꽤 생소하지만 앞선 문제에서 하국주는 바로 풀 수 없으니 다음에 풀겠다고 대답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홍정하는 두 수의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의 수학적 구조를 얻어낸 조선 최초의 수학자다. 조선에도 역시 이런 수학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세종 시대에는 이처럼 수학과 천문학이 발달했다. 농업기반사회에서 수학과 천문학은 역시나 굉장히 중요했다. 세종 역시 수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행정가가 이처럼 본질을 깨치고 있을 때, 그 사회의 생산력은 늘어난다. 고, 중세를 통틀어 조선의 생산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가 세종시대라는 것은 이처럼 수학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수학은 물론 '투자법'도 있었다. 퇴계 이황 선생은 굉장히 성공적인 '투자'를 한 인물로 보여지는데, 노비와 전답을 통해 자산을 늘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모계혈통을 계승하는 노비법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여성 노비들을 평민들과 혼인시켜 노비의 수를 늘렸다. 그렇게 보자면 사람사는 곳은 여기나 저기나,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더럽기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진 콜레라병은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의 하수시스템을 발전시키고 공공의료법과 공중위생법을 만들어냈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의 병은 '식수'와' 변소'를 구분하지 않는 단순한 생활 방식에서 시작했다. 위생의 개념이 부족했던 중세에는 '종교'에서 질병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아주 사소한 생활 방식의 변화가 중요했었다. 사실 인간의 역사를 변하게 했던 이벤트 중 상당수는 이처럼 '전염병'에서 시작했다. 1차세계대전을 종식시켰고 세계질서를 변화시켰다. 20세기 최악의 전염병이라는 이 병은 무려 5천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1차 세계대전 전사자보다 훨씬 많은 죽음을 만들었다. 패스트를 포함해 인간이 전염병의 위협에 노출될 때마다 사회와 경제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식수와 변소를 구분하는 생활 습관만으로도 인류의 상당수가 질병에서 해방됐고 손씻는 문화를 선전하는 일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병에서 자유로워졌다. 패션의 상징으로 자주 여겨지는 우사나 모자, 하이힐은 중세 프랑스인들이 요강을 길거리에 투척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여인들이 머리를 30~60cm까지 위로 높이고 풍선처럼 부풀려 꾸미던 '푸프' 머리는 보기에는 아름다웠으나 위생상 굉장히 취약했으며 머리에 쥐가 드나들기도 하고 썩은 과일에 의해 냄새가 나기도 했다. 과거인들의 위생관념에 대해 들여다 볼 때, 지금 어딘가를 입장할 때마다 손을 소독하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질병이 유행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센고쿠 시대, 에도시대에 일본 남자들의 상투법인 '촌마게'는 지금 보기에 굉장히 우스우 보인다. 이마와 정수리까지 훤하게 밀어버리고 주변머리를 뒤로 묶은 이 헤어스타일은 사실 일본의 기후와 '시대적 배경' 때문에 만들어졌다. 투구를 자주 사용하던 그들은 열을 쉽게 방출할 수 있는 헤어스타일이 필수적이었다. 통풍이 되지 않는 투구와 무겁고 더운 갑옷은 열기 배출이 반드시 필요했다. 청나라 여진에게도 비슷한 상투법이 있다. 이들 또한 변발을 하여 머리의 뒷부분만 묶어두고 전체를 밀었는데, 이는 말을 탈 때 최대한 편하기 위한 상투법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런 머리관리법은 위생적인 모습일 수도 있어보인다. 오늘 날 남성들이 면도를 하는 것처럼 깔끔하고 위생적이여 보인다는 인상을 그 당시 상투에서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실 수염을 기른다는 것도 생각보다는 어렵고 까다롭다. 가장 까다로운 것은 위생관리인데 머리카락과 같이 깔끔하게 잘 씻어주지 않으면 기름이 생기고 벌레가 꼬일 수 있음으로 씻기 어려웠던 과거에는 머리를 오히려 밀어버리는 편이 훨씬 더 낫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두발규제는 대략 6mm쯤 됐던 것 같다. 주먹으로 머리를 쥐고 잡히는 경우에는 가차없이 불려가곤 했다. 머리를 검사하는 날에는 학교 0교시를 빼먹고 미용실로 몰려가는 모습이 지금도 훤하다. 사실 군인이나 승려처럼 '두발'에 대한 획일화는 필요에 따라 존재하기도 한다. 지금은 자유로워진 '학생 두발'이지만 사실, 두발은 인상을 크게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임으로 쉽게 말하면 '번뇌'를 일으키기 쉽다.

실패한 임금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연산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잔혹하고 포악했다. 사실 '베토벤'이나 '고흐', '칸트', '피카소' 등의 성격도 그닥 유순하진 않다. 다만 업적에 따라 '존경'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인성에 대해서 보자면 '목적지향'이 얼마나 옳지 않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만하다. 많은 자기계발서에서는 '아인슈타인'이나 '베토벤' 등의 성공한 명사를 거론하지만 사실 그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사회적 업적 외에 행복이나 인격 적인 부분에서 '성공'을 이뤘다고 보기는 힘들다. 책은 중간 중간 재미난 만화와 이야기를 섞으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60만 이상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는 유튜브 채널 '교양만두'의 도서다. 솔직히 아직 그들의 영상을 본 적은 없으나 분명 호기심 가득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은 채널처럼 보인다. 꼭 성인이 아니더라도 청소년들이 보기도 쉽고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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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뇌에 행동 스위치를 켜라
오히라 노부타카 지음, 오정화 옮김 / 밀리언서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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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본질은 간단하다. '행동'. 그것이 전부다. 자기계발서의 좋은 내용들도 모두 그렇다. '행동'. 그것이 전부다. 언젠가 누군가가 물었던 적이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는 법은 무엇인가요?' 그는 아무리 알람시계를 여러 개 맞춰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늦잠의 버릇이 '질환'이나 '병'에 기원한 것이 아니라면 '일찍 일어나는 법' 따위는 없다. '그냥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전부다. 100도의 끓는 물에 손이 닿았다고 해보자. 여기에 손을 빼는 법은 무엇일까. 그렇다. 그냥 빼는 것이다. '하긴 해야하는 데...' 싶은 일을 하는 법은 원래 그렇다. 그냥 하는 수 밖에 없다. 알람소리를 못듣는 누군가도 옆에 폭탄이 터진다면 틀림없이 일어난다. 이른 시간에 일어날 경우 100억을 준다고 약속하면 일어날 것이다. 결국 이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행동력'과 '의식'의 차이다. 예전 '5초의 법칙'이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그저 무언가 해야겠다고 여긴다면 그 어떤 생각도 접어두고 카운트 다운을 센다는 것이다. 그리고 '0'이 되는 순간, 그냥 실행한다. 즉, 5... 4... 3... 2...1 '실행', 그것이 전부다. 대부분 '실행'을 하지 않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을 들여다보면 그저 습관처럼 당연하게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여러 생각을 한다. '공부가 잘 되는 시간대', '인간의 집중력은 최대 몇 분', '두뇌회전에 좋은 음식', '뇌 활성화를 위한 최소한의 휴식시간'. 이를 바탕하는 여러 논문과 실험 결과가 있기에 그들의 변명은 과학적 근거를 갖는다. 다이어트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먹어도 되는 음식', '먹어도 되는 시간대', '스트레스가 더 비만에 안좋다는 심리적인 요인들'. 이 또한 여러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 이런 과학적 근거는 '하지 말아야 할 좋은 근거가 된다.

두 번 말해도, 세 번 말해도, 행동할 수 있는 법은 '그냥' 행동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여러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에도 굉장히 괜찮은 방법이 꽤 있다. 가령 '첫 걸음이 힘들 때는 10초만 움직여본다'가 그렇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일을 그만두고 설령 그것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제의 몸을 움직여 보는 것이다. 이는 일리가 있다. 굉장히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이불 밖으로 꼼짝도 하기 싫다. 그런 날에도 해야 할 일들이 있고 머리로는 몇 번이나 일어나야지 하면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원래 '불필요한 위험'보다는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를 선호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즉, 가만히 있는 일이 더 위험한 상황이라는 판단이 들어서는 경우, 우리는 무조건 움직인다. 이 유전적 디폴트값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분명 일단, 움직여 더이상 안전하고 편한 위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뇌와 몸에 일러줘야 한다. 우리 인간은 원래 '지구력'의 동물이다. 지구상 그 어떤 종의 동물보다 지구력에서는 월등하다. 그 것을 반증하듯 우리는 포유류 중에서 희안하게 '털'이 없다. 털이 없으니 땀이 배출되고 금새 증발한다. 땀이 증발하면서 체온을 함께 앗아가면 피부표면은 빠르게 냉각된다. 이런 지구력의 동물이 점차 산업화를 겪으면서 움직이지 않는 쪽으로 변화해 오고 있다. 사실상 생존과 위협에서 '지구력'이 강한 무기였던 시기는 지나갔고 우리는 역시나 다른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아야 오래 생존하는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무늘보' 또한 비슷한 진화의 과정을 겪었다. 나무 늘보는 덜 움직이는 방식으로 생존하여 왔으나,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면서 멸종위기를 맞이했다. 반대로 인간의 경우에는 민첩하고 높은 지구력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환경에 적응해 왔다.

지난 환경에 최적화 된 종이 다음 환경에 멸종하는 상황은 인간을 보더라도 이처럼 도돌이표처럼 돌아온다. 나또한 행동이 망설여질 때 사용하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나와 같이 '게으르고 수동적인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방법인 것 같다. 스스로 나는 '굉장히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주도적으로 리드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그런 스스로의 성향을 잘 파악해서 보기에 가장 확실한 나를 움직이는 방법은 바로 '내가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을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다. 가령, 환불이 되지 않는 티케팅을 해버리거나, 약속을 지켜야만 하는 누군가에게 다음과 같이 확언을 하는 것이 그렇다. "너 내가 하나, 못하나 봐바. 나는 원래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혹은 인터넷에 거부할 수 없는 공약을 걸어 버리는 것 또한 그렇다. 예전 나는 오전 6시에 맞춰진 알람시계를 6시 2분, 6시 5분, 6시 7분으로 조금씩 늘리며 더 잠을 잤던 기억이 있다. 늘어져 있는 신체와 머리속에서도 그 짧은 순간 엄청난 회전력을 발휘하여 준비 시간과 이동시간을 계산하고 조금 더 자도 좋다는 계산을 한다. 편하게 자지도 못하면서 그처럼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이유는 당연하다. 원래 '자연'에는 '몇 시에 일어나야지?' 하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게 자연에는 눈부신 햇볕에 눈이 떠지거나 포식자의 위협에 눈이 떠질 뿐이다. 스스로 자신의 수면시간을 의무에 의해 조절하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다. 즉,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현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생체 리듬이 그렇다. 혹은 창이 있는 방에 침실을 두는 것도 방법이다. 예전 학창시절에 굉장히 독한 우등생이 있었다. 그녀는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부모님께 자취방 TV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몇 번을 이야기 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에게 말했다. "의지력의 문제지, 네가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TV가 있던 없던 보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뒤 그 TV의 브라운관을 장도리를 가지고 깨버렸다.

굳이 불필요한 '의지력' 테스트는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일어날 수 있는 의지를 가졌는지, 가지지 못했는지를 굳이 테스트 할 필요가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과 현실을 만들어 간다면 우리는 시키지 않더라도 의무감에 찌들어 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사실상 그 밖에 좋은 말들은 많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행동'하지 않은 지식은 가치 없는 '지식'일 뿐이다. 나의 책인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 6시에 시작된다'에서도 언급했지만 '행동'은 거의 모든 것이며 그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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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윤여사
최은정 지음 / 자상한시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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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내 문제 상황만이 극단의 크기로 보일 때가 있다. 그냥 고개를 들고 주변만 살피면 되는데, 티끌만한 상처에 시선을 못 떼다보니 자신의 상황이 최악이라고 여겨버린다. 마침 나에게 필요한 적절한 타이밍에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이야기. 귀여운 그림체와 읽기 쉬운 문자체로 이 책은 시종일관 밝고 명랑하다. 책에 담지 못한 감정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보자면 가늠도 되지 않는다. 알츠하이머와 같은 뇌질환은 여타 다른 병과 성격이 다르다. 눈을 들여다보면 어제와 같은 얼굴에서 나와는 다른 시간과 세계로 떠나버린 이를 바라보는 것은 당사자만큼이나 주변인을 힘들게 한다. 어쩌면 당사자보다 더 주변인이 더 힘든 병이다. 상대에게는 모든 기억을 외부에 남겨두고 내면만 홀로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난 이를 바라보면 매일 이별하는 느낌이 든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가족 중, 가장 힘든 일은 바로 '치매'와 함께 찾아오는 '난청'이다. 나긋 나긋하게 말을 해도 부아가 치미는 상황이지만, 대게 환자들의 대부분은 '난청'이 함께 있다. 큰소리로 대화를 해야한다. 언젠가 '치매' 환자의 가족을 본 적이 있다. 환자에게 구박하듯 '반말'과 '고함'을 쳐대는 모습을 보고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것은 내 작은 시선이 만들어낸 오만한 착각이었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기에 '큰소리'로 말해야하고, 그렇게 같은 말을 반복하다보니 뒷말이 짧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다른 병과 같이 서로에게 충분한 대화를 나눌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과 달리 '치매'는 참 가슴 아픈 병이다. 주변인에게 점차 구박받고 무시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병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고통'에 심히 공감하지 못한다. 책을 써주신 작가님의 끝까지 긍정적인 성향에 존경심이 든다.

자기 부모라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제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라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은 아니다. 보살피고 말벗이 되고 또, 상대가 기억하지 못할 기억과 추억을 대신 기억해주는 일... 젊은 며느리가 한다는 것은 대단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상황에 비관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와의 이야기는 멋진 책으로 출판됐다. 보통의 사람들의 기억이 조그만 신체에 갇혀 사라지는 것과 달리, 신세대 며느리와 치매 시어머니와 이 이야기는 출판되어 여러 사람의 기억 속에 함께 이식됐다. '반짝 반짝 윤여사'라는 제목을 집었을 때, 치매 노인에 관한 글일 것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더군다나 그냥 치매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들도, 딸도 아닌 며느리의 글일 것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이런 반전은 되려 읽기 편한 구성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은 만화와 그림이 함께 있다. 상황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섞여 있다. 그 내면을 직접 들여다 보자면 유쾌하지만은 않을 일일 것이다. 다만 명량드라마의 주인공이야기처럼 이 글은 재밌다. '치매'에 걸리신 시어머니가 불쑥 불쑥 던지시는 한마디도 꽤 묵직하다. 그저 '치매노인의 말'이라고 우습게 넘어갈 만한 하지않다. 사람이 시간에 함께 쌓아놓은 철학은 '기억'이 사라져도 '말'과 '내면'에 녹아져 있는 모양이다. 나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어느 날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일. 그것은 그냥 '질환'이라고 보기에 사무칠 정도로 슬프다. 양쪽에서 서로 공유하던 기억 중 한쪽 고리가 끊어졌을 때 느껴지는 공허함과 끊어진 실타래가 의미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허무함은 더욱 그렇다. 나와 다른 기억을 가진 상대를 마주하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사라지는 기억, 왜곡되는 기억' 뇌사 판정을 받는 것처럼 함께 있는 것 같지만 최대한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에는 자세하게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남편(아들)'의 심경 또한 간접적으로 느껴진다. 이제는 갓 6살이 된, 쌍둥이를 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말이 조금 통하는가 싶다가 어떤 날은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 같은 말을 되풀이 해야하고 '당연히 혼자 하겠지...' 기댄다. 어쩐지, '일부러 저러나' 싶은 얄궂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러려니 한다. 아이가 커가면서 '알법한 나이'가 될수록 기대치는 더 높아지고 반대로 일부는 기대고 싶은 마음도 생겨난다. 반대로 외적으로 성숙한 노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마 육아의 감정의 100배를 곱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안타깝게도 치매는 퇴행성 질환이다. 진행을 늦출 수는 있지만, 한 번 진행되면 회복하는 것은 어렵다. 책에서도 뒤로 갈수록 '윤여사'께서 잃어가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나를 보살피던 이를 보살펴야 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가족들은 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치매 환자의 가족에 대한 안타까운 이들도 어렵지 않게 소개 되곤 한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는 참 유쾌하고 기특하고 귀엽게 읽어 내려갔다. 작은 에피소드들의 모음에 괜히 흐믓해지기도 한다. 씻기고 먹이고 벗해주는 여러 일들의 고됨을 생각하자니 느끼는 바는 복잡했지만, 대게 아름다워보이고 유쾌하고 씁쓸하고 안타깝고 귀여운 복합적인 감정이 모두 드는 글이었다. 책의 구성이나 디자인도 독특해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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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 재활용 시스템의 모순과 불평등, 그리고 친환경이라는 거짓말
미카엘라 르 뫼르 지음, 구영옥 옮김 / 풀빛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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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고 아무것도 새로 생겨나지 않는다." 물질의 성질이 분자나 원자 구조의 변화로 변화하는 것을 연구하는 '화학'이라는 분야에서의 '친환경'이라는 말은 어떤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 화학물'들도 모두 '환경'에서 얻었다고 볼 수 있다. '환경'에 관심은 최근들어 많아졌다. 선진국에서는 친환경 기술 사회를 지향하며 '개발도상국'이 엄두를 낼 수 없는 '성장 전략'을 취한다. 말 그대로 '친환경', '클린 에너지'는 '산업의 한 부류'가 되어 '투자대상'이 됐다. 민간과 공공의 투자는 반드시 성장과 '수익'을 보장해야 한다. 친환경이라는 멋진 프레임에 씌워 있지만 결국 '자본주의'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환경에는 여러가지 맹점이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의 대부분은 '도덕적 비판'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환경보다 개발 우선'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언급마처도 분명 지탄의 대상이 된다. 과연 친환경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냄새가 나는 것은 뚜껑을 덮는다' 본질에 대한 고민보다 먼저 현상을 제거 하는 것은 우둔한 일이다. 환경오염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플라스틱 사용'이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플라스틱'은 사실상 다수의 인류를 편리하게 만들었다. 이 저렴한 고분자 화합물은 소수의 인류들에게만 주어졌던 편의성을 저렴하게 빈곤한 다수에게 보편화시켰다. 플라스틱에 죄를 물어 플라스틱이 '환경 파괴범'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일본의 속담에 따르면, 냄새가 나는 것은 덮는다. 즉 냄새의 본질을 해결하지 않는다. 플라스틱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과 우리 사회가 가진 속성'이다. 자본주의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상 '간편하고 경제적인 방식'으로의 진화는 어쩔 수 없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없애더라도 다른 무언가를 사용할 것이다. 환경 문제에서 우리 인간이 가장 피하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플라스틱 사용'이냐 '육류 섭취' 혹은 '석유사용'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폭발'이다. 산업화 이후에 탄소배출량이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도 환경오염물질을 과도하게 생성해냈던 산업구조의 역할도 있지만 부양해야 할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원인이었다. 인구 증가는 자본주의를 언제나 밑받침해주는 역할을 했다. 언제나 생산보다 소비가 많아지며 적당한 인플레이션을 발생하면 경제는 긍정적인 지표를 만들어내곤 했다. 머지않아 급격한 인구감소를 보일 일본과 한국 등의 탄소 배출량은 산업 구조 변화가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김상욱 교수 님에 따르면 '친에너지'라 부를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조금더 효율적인 에너지 활용은 있을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쓰지 않는 것이 가장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 표면적인 문제 해결을 하려든다. 환경을 위해 원시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가령 세계 최대 부자 100인이 모여 친환경적 농법을 사용한 식물이나 식물이 아니고선 섭취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든다면 어떨까. 인도나 아프리카에 있는 빈민들의 삶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친환경'의 강요는 과연 맞는 것일까.

서구에서 사용한 쓰레기들은 대부분 아시아로 수입된다. 아시아의 빈민들은 이것들을 세척하고 분류한다. 베트남에서는 말랑말랑 덜 굳은 녹은 플라스틱을 맨손으로 만지며 커피 한잔 안되는 일당으로 안전을 담보힌다. '친환경', '재활용'이 '선'에 속한다고 여기는 것에 이런 '맹점'이 있다. 살만한 사람들의 일종의 '기호'이자 '컨텐츠'가 되어버린 '친환경'이라는 타이틀에 의해 또다른 불평등과 계층차이가 발생한다. 경제 성장과 환경보존은 불가능하다. 또한 인권과 환경에 대해서도 공존이 힘들다. 원래 인간은 태어나면서 끊임없이 열량소모를 한다. 신체적 소모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 석탄과 우라늄을 태워 생산 시설을 가동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런 열랑 소모에 동참하는 인류의 숫자가 80억이다. 2067년 세계인구는 100억을 돌파할 예정이다. 즉, 현재 사용하는 에너지 수준을 유지만 하더라도 25%이상의 에너지를 더 소비하게 될 예정이고 25%이상의 플라스틱을 더 사용할 예정이다. 상충하는 두 가지 현상을 모두 해결하는 것을 '모순'이라 한다. 인류는 현재 '모순'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렇다고 더 많은 환경파괴와 오염을 방관해서는 안된다. 다만, 자신이 행하고 있는 철학과 사상이 '선'이라고 믿는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강요 할 수는 없다. '환경 문제'는 자칫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공급조절이 옳을 수 있다는 '정치사상'의 문제와 연결될 수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그렇다. '환경보존', '친환경'은 소비자의 가치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른 또하나의 비즈니스이고 '환경과 에너지'의 본질이 '재활용'된다는 심적 안도감보다 '덜 사용하는 소비 감소'가 우선되야 할 것이다. 수익성 없는 사업은 '자본주의'에서 퇴화된다. 결국 불필요한 과소비, 특히 일회용 플라스틱 등을 줄이는 것이 더 높은 확률로 환경을 살리는 길일지도 모른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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