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 삶의 변곡점에 선 사람들을 위한 색다른 고전 읽기
최봉수 지음 / 가디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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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세기 1-3)" 태초에 '카오스(Chaos 혼돈)가 있었다. 모든 천지창조는 '공'에서 시작하여 '무(無)'와 '유(有)'로 생겨났다. 어둠에서 시작해 세상에 빛이 생겼다. 빛은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의 시작점이다. 구약은 그렇게 빛이 탄생을 만물의 근원으로 봤다. 빛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생명'이 탄생하듯, 빛과 어둠이 만나야 천지 만물이 탄생된다. '카오스(Chaos)는 점차 조화롭게(Cosmos) 번영해가며 행태를 갖춘다. 그리스 로마에 따르면 카오스는 '대지(가이아)와 암흑(에레보스)로 이어진다. 대지는 다시 하늘(우라노스)와 바다(폰토스)로 나눠지고 에레보스(암흑)은 '아이테르(천공)'과 '헤메라(낮)으로 나눠진다. 우라노스(하늘)은 가이아(땅)과 열여덟의 자식을 낳는다. 천지만물은 '공'에서 시작하여 '무(無)'와 '유(有)' 즉, 빛과 어둠으로 나눠지지만 이 둘은 각자 둘로 쪼개지고 다시 그 둘은 둘로 쪼개진다. 마치 분열하는 원자가 에너지를 가지듯 수없이 '신'들의 가계도가 조개지며 우주만물이 생겨난다. 서양 신화와 철학, 세계관은 이처럼 신의 가계도에 의해 만물이 정의된다. 창세기 1장과 같이 '천지창조'와 '신화시대'는 서양 고전의 뿌리다. 그리스 로마 속의 고전들은 '역사'와 '신화' 사이를 오간다. 그 경계선에 걸쳐 있는 전쟁이 '트로이 전쟁'이다. 역사는 이 전쟁을 기록하고 있으나 이 전쟁에는 '신'의 개입이 있다. 이것의 역사성에 대해 고민이 되는 이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 건국에 '신'이 개입이 있다. 환인, 황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가계도가 건국신화에 등장한다.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은 국가구성원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확립시킨다. 사피엔스를 집필한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다수를 결집시키는 상상의 매개물은 국가와 국민을 결집시킨다.

서양과 동양에서 '신'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 비슷한 시기에 역사에서 종적을 감춘다. 기원전 2333년, 하늘을 다스리는 신의 아들인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쑥 한줌과 마늘 20알을 주고 100일간 굴 속에서 빛을 보지 말라고 한다. 이를 성실하게 지킨 곰은 삼칠일(21일)만에 인간 여성(웅녀)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를 믿거나 말거나 인간의 역사는 고대가 지나며 '신'의 개입이 사라진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 받는 여러 문학과 예술 작품 중, 동서양을 막론하고 큰 특징이 있는데,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며 '신'의 개입이 사라지고 '이상 자연 현상'이 극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건데 이야기 전달 방식의 변화 때문으로 보여진다. 문자가 없던 시기, 기록 방식이 온전치 못할 때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역사와 이야기를 전했다. 세세한 사항을 모두 전달하기는 어려웠음으로 상징적인 형태로 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야기는 극적으로 변하고 단순화되고 상징성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다 중국 후한 중기의 환관으로 알려진 '채륜(50년?~121년?)을 기점으로 이야기는 절차 상징성보다는 사실에 관한 역사의 기록으로 변해 간다. 채륜이 관직에 있을 때, 만든 황실이 물건 중에는 '종이'가 있었다. 그렇게 사실 기반의 역사가 기술됐다. 지금 시대에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보급 됐다. 그럼에도 '고전'이 주는 '축약성', '상징성'에 대한 향수는 있다. 보여지는 사과를 '보여지는 사과 그대로'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추상표현'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감상하는 이의 영역으로 넘겨버리는 추상파 미술처럼 말이다. 곧이 곧대로 작가가 절대적인 해석을 강요하는 미술보다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미술이 더 각광받는 세상에서 무궁무진한 해석의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고전은 더 매력적인 기술법이다. 이름 어려운 서양 고전에 대한 거부감이나 모호하고 추상적인 동양 고전의 불편함도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문학적인 가치로는 충분하다.

구성원을 통합하는 정당성은 그 자체로만 사용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국뽕'처럼 마치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사상은 '선민의식'으로 발전해서는 안된다. 뉴질랜드 마오리 신화에도 그들만의 정당성은 있다. 그들은 하늘의 신, 랑기(Rangi)와 대지의 신, 파파(papa)에서 시작한다. 일본 신화에서는 아마테라스라는 태양신이 등장하고 아프리카 동부 케냐와 탄자니아 사이에 있는 '마사이족'은 세상을 창조한 엔카이(신)의 자손이라고 스스로를 믿는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만이 옥새를 사용했다. '옥새'는 '하늘의 뜻을 대신 이행하는 결재 도구'다. '동아시아'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이 '최고통치자'의 권한을 '하늘'로 두었는데 이로써 '옥황상제'의 아들인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고로 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랑케로 분류되었다. 그 뿌리를 '하늘'에 두는 것이야 말로 '세상 만물'의 기원이라는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고전은 이처럼 '구전된 이야기'와 '기록된 이야기'의 중간 어딘가에서 '문학적 가치'를 만들어냈다.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무한대로 열리는 '피카소의 그림'처럼 고전은 읽는 사람과 해석하는 사람에게 그 여지를 얼마든지 열어둔다. 고대의 지혜들은 후대에 반드시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로 넘쳐났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신'의 이야기가 적혀 있지만,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양과 서양의 이야기는 거리나 시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약 3만 년 전에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했다고 한다. 문자가 발견된 것은 고작 5천년 전이다. 자그마치 인류의 지혜 중 85%는 기록으로 전달하지 못했고 이라크 지역 우르크에서 고작 점토판에 갈대로 긁어 회계를 기록한 것이 고작 남루한 시작이다. 그마저도 5천년 전이다. 제대로 된 문자가 발견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며 고작 10%만이 기록으로 담아 냈다. 고전이 담고 있는 삶의 지혜가 얼마나 심오하고 깊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14가지 키워드에 따라 서양고전과 동양고전, 중국, 한국, 일본의 고전을 해석하고 그에 따른 교훈을 담아 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일상과 고민을 조금 위로해 준다. 역사는 반복한다. 지금 일어난 일들은 옛 조상들이 이미 겪었던 일들의 변주이고 반복이다. 고전을 이해하는 것은 더 넓은 세계를 통해 지금을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아직 내 나이는 50이 되지 않았지만 이 책은 어느 시기에건 인생을 돌아보고 준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고전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열린 해석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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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어가 재미있다 - 궁금했지? 알려 줄게! 영어와 친해지는 비법
이선미 지음 / 북앤미디어디엔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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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그렇게 안했잖아. 근데 애들한테는 그렇게 가르쳐?"

제일 친한 친구(동생)이 어느 날 말했다. 망치로 세게 한 대 맞은 것 처럼 멍했다. 대충 이 물음에 둘러대긴 했는데 오랫동안 친구의 말이 떠나지 않는다. '읽고 해석해봐!', '문제 풀고 틀린거 다시 풀어봐.', '동사랑 전치사 앞에서 사선으로 긋고 접속사는 세모 표시하면서 읽어!' 왼쪽에는 영어, 오른쪽에는 빈 칸이 적혀 있는 종이를 나눠주고 한국어 뜻을 적도록 한다. 영어 단어 암기할 때는 '어원'으로 암기한다. 교육업을 하면 학생들의 요구나 학부모의 요구를 듣게 된다. 그들의 요구를 듣다보면 강의 방식은 옆에 있는 공부방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설명한 공부법이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만 생각하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친구의 말이 옳았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서 상대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학습법이 바뀐 이유는 이렇다. 학생과 학부모의 '요구'에 충족하기 위해서다. 학부모들은 대게 자기 아이의 부족한 점을 학원으로 가지고 온다. 그 부분을 채우면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 아이가 문법이 약해서요. 독해하는 법이란 문법 체계 좀 잡아 주세요.' 학생들 또한 자신들이 요구를 가지고 온다. '이번 중간고사 시험 범위가 교과서 4단원까지에요.' 혹은 '빈칸 채우기 문제 유형이 약해요.' 이런 '니즈'를 맞추려다보니 결국의 최선은 '남들이 가르치는대로'가 됐다. 학원을 개업할 때 초심은 이랬다. 지금 우리 쌍둥이 아이들에게 가르칠 방법으로 가르쳐야겠다. 다만 학생과 학부모들이 원하는 '영어'는 내가 바라는 '영어'와 달랐다. 그들은 '점수'에 목을 메고 있었고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영어를 했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단 한가지 결정적 이유나 방법은 없었다. 어학연수를 떠난지 6개월 후, 나는 정규 유학을 결정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생각보다 엄청난 학비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연히 시작한 'Bar/Club'의 아르바이트는 저녁 10시부터 아침 10시까지 12시간 일하는 곳이었다. 한인 커뮤니티에서 찾았으나 실제로 사장 님의 와이프가 한국인이었을 뿐이지, 그곳에 일하는 직원, 손님, 사장님 모두가 현지인들이었다. 사장님의 한국인 와이프는 일하는 2년 간, 두어번 본 게 고작이었다.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배경이었다. 한 백인 여자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클럽 음악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아 음악만큼 큰소리로 나를 바라보고 물었다. "Where does it call?(웰 더짓콜!)" 그녀는 '영어를 알려주던 원어민 선생님'처럼 다정한 눈빛이 아니었다. 급하게 나에게 진심으로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나의 고개가 자라처럼 한 뼘 이상 그녀에게 다가가서 물음표 눈동자를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미국인 'Andy'가 대신 대답했다. 'It's **te'. 내가 일하는 곳의 이름이었다. 내가 아는 원어민 선생님들은 친절한 눈빛과 또박또박한 말투였다. '여기가 어디죠?라고 묻는다면 'where is here?'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Where does it call?(웰 더짓콜!)"이라니... 한 차례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암기하진 않았지만 잊혀지진 않았다. 지금까지 말이다. 어느 날은 영국인 친구들과 당구장을 갔던 적이 있다. 포켓볼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함께 오기로 했던 '마오리 친구'가 일 때문에 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마오리 친구는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나는 당구장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보다 큰소리로 직원에게 물었다. "Where does it call?(웰 더짓콜!)" 직원은 당구장 상호를 알려줬다.

어학연수를 시작하기도 전, 3주 정도 '홈스테이'를 했던 적 있다. 홈스테이 맘(mom)은 독립시킨 친 딸을 둔 이혼녀였다. 그녀는 홈스테이로 들어오는 어리거나 젊은 아시아 학생들을 친 자식처럼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그곳에 도착한 첫 날 점심식사를 해 주겠다고 했다. 유리컵에는 싸구려 오렌지 쥬스를 비우고 버터를 두른 후라이팬에 베이컨과 계란 스크램블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Where did it go?(웰디릿고)" 그러다니 "Got it(가릿)"하며 나이프를 꺼냈다. '나이프'를 찾는 것이었다면 'where is the knife?'라고 해야 하는거 아닌가? 다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외우진 않았지만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모르지만 해외 생활하면서 한국인과 자주 접하진 못했다. 한국인이 득실거리는 도시라는데 이상하게 내가 학교를 가면 그곳에는 한국인이 없었고, 아르바이트하면 그곳에는 동양인이 없었고 취업을 해도 한국인이 없었다. 유학을 마치고 취업을 했다. '한국인'이 아니라 '동양인'을 보기 힘든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매장 관리'를 맡은 '관리직'을 일하던 내가 있던 업종은 '소매업(retail)'이었다. 점장이 되기 전, 아르바이트 시절의 이야기다. 한 백인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창고 재고를 확인하러 가는 나를 잡고 물으셨다. "듀예붸니 코행?" 멀뚱 멀뚱 쳐다봤다. 그녀에게 기다려달라고 하고 상사에게 달려갔다. "코행이 뭐에요?" 상사는 교포로 한국어 만큼이나 영어가 편한 사람이었다. 그는 되물었다. "정확히 뭐라고 말했어?","'듀예붸니 코행?' 이라고 했어요."이에 상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혼잣말을 했다. '뭔 말이지? 그럴리가 없는데...?' 상사는 직접 할머니를 찾아갔고 할머니가 다시 묻자. 상사는 웃으며 '옷걸이 Coat hanger'를 찾아 주었다. 이렇게 실수했던 영어의 흔적은 공부가 아니라 기억으로 남았다. 한 번은 말투에 관해 지적 당했다. 한 할머니를 보고 내가 "Hi", "See you, bye"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혹은 물건을 알려 줄 때는 "Here you go"라고 했다고 했다. 이것은 반말이라 나이 많은 어르신들께 쓰지 말라고 혼이 났다.

영어는 '공부'가 아니라, '기억'이다. 소매점에서 나는 접해야 하는 아이템의 종류가 수 천에서 수 만 가지가 됐다. 손톱깎이, 화장솜 뿐만 아니라 개목줄이나 운전연습스티커까지 아주 사소한 아이템을 모두 접해야 했다.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투를 써야 했고 그들은 '이름모를 무언가'를 찾기도 했다. 가령 물음표 모양의 갈고리라던지, 반짝거리는 풀 처럼 모호한 것을 찾을 때는 그들조차 영어 이름을 몰랐다. 거기서 10년을 생활하면서 나는 한국어보다 영어로 처음 접하는 물건들도 생겨났다. 가령 스마트폰 액정필름이 그렇다. 이것을 거기서는 'screen protector'라고 했다. 지금도 보호필름이라는 말을 할 때, 머릿속으로 Screen protector를 떠올린 후 '보호필름'으로 바꾸는 한단계를 거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언어가 절박하던 시절, 나는 '공부'가 아니라 어쩌면 자의적으로, 저쩌면 타의적으로 환경을 바꿔야 했다. TV를 틀면 도무지 공감 안되는 재미코드의 방송이 흘러나왔고 매장에서는 현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컨츄리음악이 흘러나왔다. 클럽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젊은이들이 즐겨듣던 음악이 나오곤 했다.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12시간 씩, 그 노래에 노출해야 했고 나중에 물건을 주문할 때는 영어를 사용해야 했다. 비즈니스를 영어로 해야하자, '영어를 못한다'라는 인식은 철저하게 감춰야 했다. 최대한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말투를 쓰려고 했다. 대화 상대가 말을 하면 항상 그 말을 이어서 따라했다. "Are you sure?"이라고 물으면 "Am I sure? yes. I'm sure."처럼 말이다. 유학 시절에는 교수가 영어로 말하면 스펠링이야 어찌됐건 필사적으로 받아적어야 했고 집에가서는 그것을 인터넷에 검색하여 수 십번씩 읽어봐야 했다. 그런 환경이라도 영어는 생각보다 쉽게 늘지 않는다. 그런데 난데 없는 '어원암기'라던지, '단어시험'이라던지, 동사, 전치사 나누고 접속사 세모라니... 친구가 나를 보기에 어떻게 보였을까. 영어는 생활이고 즐거움이고 환경이어야 한다. 이선미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은 어쩐지 좋은 환경에서 학습하고 있다고 본다. 얇은 책이지만 지난 나를 돌이키며 다시 반성하게 된다. 지난 추억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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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청춘에게 주기 아깝다
조수빈 지음 / 파람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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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극작가 겸 소설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젊음을 젊은이에게 주기 아깝다.'라는 말을 했다. 젊은이들이 젊음을 제대로 즐기고 활용하지 못함을 지적한 말이었을 것이다. 노인처럼 시간 죽여 육체와 정신을 소진 시키기에 젊음을 젊은이에게 주는 것은 정말 아까울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있다. 그 아까운 젊음을 늙은이에게 준다고 알차게 사용할 거라는 확신이 들지도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후회를 하는 동물이다. 후회는 가장 마지막에 남는다. 학창시절로 돌아가면 공부 좀 해둘걸 하는 어른들의 하소연은 실제도 돌려주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습'이 결정하는 인생에서 아마 같은 실수를 반복할 확률이 높다. 젊은 시절을 돌이켜 후회하는 늙은이에게도 그 젊음은 적당한 값어치를 하지 못할 것이다. 가수 유승준의 '비전'이라는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타시 태어난다해도 자신이고 싶은, 그런 모습의 삶을 위하여."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자신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당당히 '그렇다'라고 대답하기에는 여러가지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다.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잘난 사람도 있다. 내게 느껴지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잘 보인다. 다만 오랜기간 이 질문에 고민하다 답을 내렸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자신으로 태어나되 조금더 먼저, 조금더 일찍, 조금더 빨리 경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는 흘러가는대로 살았던 것 같고 고등학교 때는 생각없이 살았던 것 같다. 스무살에는 닥치는대로 살았던 것 같은데, 서른이 가까워져가며 겨우 '꿈'이라고 부를만 한 것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조금 먼저 알았으면 좋았을 법 했던 것. 물론 지금이라도 알게 되서 참 다행인 것들. 후회없는 지난 날들을 고대로 답습하더라도 조금 빨리 하고 싶다는 생각말이다.

'주체적인 삶'. 꿈을 이야기 하라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 '하위'에는 '긍정', '감사', '균형'이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결국 '주체적인 삶'이다. 누군가에 의해 휘둘리거나 어떤 상황에 의해 휘둘리는 삶이 아닌 스스로 주체성을 쥐고 있는 삶 말이다. 직업이야 뭐가되던 상관없다. 직업은 그저 '돈벌이' 아니던가. 고등학교 진로시간에는 학생들에게 '꿈'에 대한 이야기를 써오라고 시키는 모양이다. 장담컨데 그 과제를 제출시키는 선생 쪽도 꿈을 이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른들은 참 이상하게도 자신도 못한 일을 아이들에게 바라곤 한다. 자신들은 학창시절 꿈꿔왔던 삶을 살고 있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에게는 '꿈'을 꾸라고 말한다. 단 한번도 학교 밖에서 어떤 식으로 사회가 굴러가는지 경험해보지 않았던 아이들은 막연하게 주워들은 직업을 '꿈'이라고 착각한다. 이들이 꾸는 꿈이란 대부분 자신의 능력 범주에서 최대한 지원 가능한 직업군인 경우가 많다. 그 꿈이 이뤄지느냐, 이뤄지지 않느냐는 대게 열 아홉, 11월에 결정된다. 인간의 꿈이 이뤄지든 말든, 그 기한이 고작 19년에 결정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백범 김구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를 꿈꿨다. 만약 백범 김구 선생의 꿈이 '대통령'였다면 역사는 얼마나 허무하게 그를 바라보겠는가. 꿈은 그런 성격이 아니다. 평생을 가로지르는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루고 이루지 못하고를 떠나 갖고 있는 것만으로 방향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꿈이나 장래희망에는 '돈벌이'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따위 직업으로 인간의 꿈을 한정 시켜버릴 수 없다. 우리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나 '주체적인 삶' 등의 인생 가치관을 학창시절 동안 잃게 된다. 꿈은 철학을 담고 있어야지, 연봉을 담고 있어서는 안된다.

많지 않은 나이이지만 조금 살아보니 그 시절에 속한 이는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있다. 조수빈 아나운서의 말 처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얼마나 빛나는지 말이다. 다시 돌이켜보면 대략 서른, 마흔 정도면 그래도 적당히 어른의 태가 잡혀야 있어야 했다. 다만 지금의 나를 돌이켜 보건데 아직도 나는 이 시절에 속해 있으면서 지금이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 덜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예순이나 일흔정도가 되면 느끼려나. 아니다 여든이 되면 느끼려나, 아니다 그 때도 10년 만 더 젊었으면 날아다녔다는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 아까운 것이 아니라,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이에게 주기 아까운 것일 지도 모른다. 누구의 말마따나 '실패를 하지 않는 방법은 실패를 해보는 것이다.' 실수를 줄이는 방법은 실수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 시절 그것도 모르던 '나'를 비웃을 것이 아니라, 그 실수와 실패를 했던 젊은 시절 덕분에 내가 겨우 그것을 깨닫고 있다고 감사하는 것이다. 조수빈 아나운서는 어린시절부터 꿈이 아나운서라고 했다. 그렇게 명문대를 졸업하고 KBS 9시 앵커로 얼굴을 알렸던 성공적인 아나운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퇴사를 결정했다. 우리는 마주하기 전까지 그 내면을 알 수 없다.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 아나운서, 방사선사, 환경미화원, 컴퓨터 공학자 등 직업들은 그 직업을 실제 가져보고 겪어보기 전까지 고충이나 장점, 단점을 알기 어렵다. 막연히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과 대중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가지고 '꿈'을 결정한다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나의 직업은 '학원 원장'이면서 '강사'이고 '강연가'이며 '작가'이면서 '농부'이기도 하고 '사업가'이기도 하고 또 여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유현준 교수 님은 건축가이면서 강연가이고 작가이면서 방송인이시고 교수이기도 하다. 가수 아이유 님은 가수 이면서 작사가, 작곡가이고 연기자 이기도 하다. 직업은 칼처럼 구분지어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성향의 것이 아니다. 니체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교수'였고 공자는 '사상가'로 알려졌으나 일종의 '강사' 혹은 '정치인'이 였다.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은 어설프게 쌓여 있는 젊음의 흔적들일 것이다. 청춘은 청춘에게 주기 아깝지만 그래도 그나마 청춘에게 줘야지 별 수 없이 낫다. 어차피 할 후회라면 실패건, 실수건 많이 쌓아둬라. 팔순에 남는 건 통장의 잔고가 아니라 언제나 눈 감으면 떠올릴 수 있는 경험과 기억들일 것이다. 청춘, 이게 우리에게 와 있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실패하고 실수하고 경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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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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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야기 속에 의미를 숨겨 놓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찾아보는 재미는 독자 몫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 님의 소설이다. 숨긴 의미를 찾으려 작정하진 않았으나 '봉준호 감독' 살인의 추억, 마지막 대사처럼 '해석하는 재미'는 무궁무진하다. 왜 책은 '작별인사'가 아니라 '자ㄱ벼ㄹ이ㄴ사'인가. 그냥 읽기 어설픈 이 단어는 '자악벼열이인사'로 읽힌다. 감정없는 '로보트 음성'에 어울리지 않는 감성적인 단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배경지식 없이 들여다보고 대략 열 페이지 정도 넘겨야 알 수 있다. 그냥 씁쓸한 사랑 이야기나 이별 이야기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고 서점에서 집어들지 않은 책이었다. 책은 첫 문장부터 두 번째 문장까지 흡입력 있으며, 두 번 째 문장부터 세 번째 문장까지 호기심을 자극하고 세 번째 문장부터 다섯 번째 문장까지 생각거리를 준다. 그리고 그것들이 '쭉~'이어지며 마지막 문장까지 이르게 만든다. 왜 여러 분야의 책을 많이 읽은 작가의 글을 읽어야 하는가.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작가의 배경 지식과 인성, 가치관이 투영된다. 속빈 강정처럼 밍밍한 글은 아무리 장황해도 읽기 지루하다. '작별인사'는 얼핏 누구나 생각해왔던 소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만 그 이야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흡입력있는 이유는, 가짜 이야기를 읽어내면서 인문학과 자기계발을 함께 읽게 되는 이유는 '작가'의 것들이 투영되어서다. 지금 이 문장 뒤로 이어지는 말들은 소설의 '스포일러'가 된다. 여기까지 읽고 흥미가 생긴다면 어서 서점으로 가서 책을 구매하고 읽던지 아니면 이 글을 읽은 것을 후회하며 서점으로 가서 책을 읽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을 읽고 싶다면 '내 서평'을 여기까지만 읽고 빠르게 서점에 달려가서 소설을 완독 후에 두 번째 문단을 읽기를 권유한다.

'인공지능'을 보며 인간은 '인간화'되는 인공지능에 두려움을 느낀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쓴다거나, 인공지능이 노래를 부른다거나 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점차 인간 공포를 느낀다. 다만 무서운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거나 '휴머노이드'가 '인간'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들을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꽤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야생이었으나 우리는 그들을 길들였다. 바로 '고양이와 개'다. 우리는 그들을 가축화하면서 그들의 성격과 습성은 바뀌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야생의 다른 것들과 다르게 눈 흰자위가 생기기도 하고 몸집이 작아지는 등 변화를 겪었다. 다만 이 변화에 인간도 함께 했다. '고양이와 개'만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 또한 그들에 맞게 진화했다. 모든 진화는 상호적이다. 뉴턴의 말을 빌리자면 태양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태양도 지구를 끌어당기고 지구도 태양을 끌어당긴다고 했다.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이 '인력'은 물리계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인간과 가축 사이에서도 서로 끌어당김이 있었다. 이 상호인력의 법칙에 중요한 점은 '질량'이 큰 쪽으로 끌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엄청나게 성숙한 성인들이 '아기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맘마 먹어야 아야하지 않아!"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다만 이 이야기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30대 여성이 친구에게 했다고 가정해보자. 얼마나 어색한가. 우리는 상대에 맞춰 간다. '안녕하세요. 빅스비에요', "오.늘.날.씨.알.려.줘.". 조금 어눌한 인공지능의 말에 그보다 더 어눌한 인간이 물음이 이어진다. 우리는 아기에게 맞추는 '엄마'와 같이 '인공지능'에 맞추고 있다고 여기지만 진화의 속도는 매순간 제곱으로 키워나가며 언젠가 진화한 인공지능과 퇴화한 인간만 남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부턴가 '초인류'가 됐다.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눈을 감고 마음 속 이야기를 떠올리면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떠올리는 '텔레파시(Telepathy)'는 '초능력'이었다. '존재할 수 없을 이 초능력'이 이제는 누구나 가능하다. 우리의 '전달능력(Pathy)'는 5G의 속도로 지구 반대편을 날아가 '이야기'는 물론 '사진'과 '영상'을 전송해버린다. 꿈의 색깔 같은 몽롱하고 흐릿한 모양이 아닌 '깊은 색상', '넓은 시야감', '무한대의 명암비', '잔상없는 화면'의 OLED로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앉아서 수 백 킬로의 사람과 소통하고 선물을 보내며 돈과 물건을 주고 받는다. '스마트폰과 함께'라는 말만 빼면 이것은 '초능력' 수준이다.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를 전달받고 주기도 한다. 잘 때도, 먹을 때도, 씻거나 심지어 대소변을 보는 순간까지 스마트폰은 인간의 몸에 붙어서 인간의 오감에 연결된다. 진동이라는 촉감, 알림이라는 청각, 화면이라는 시각이 모두 스마트폰에 물리적, 비물리적으로 '도킹(결합)'되면 된다. 사실상 스마트폰의 배터리는 인간의 배터리나 다름없다. 스마트폰 배터리에 빨간 불이 붙으면 인간은 스마트폰과 함께 전기선에 연결되어 한참을 이동하지 못한다. 기계가 인간화 되어간다는 세상에 가장 큰 위협중 하나는 떠올려보자면 인간의 기계화다. 우리는 반 정도 기계화되어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신'을 버리고 '기계'로 갈아탔다. '산업혁명', '르네상스' 인간을 단합시키는 힘이 '종교'에서 '기계'와 '돈'이 되면서 기계는 곧 신이 됐다. 신을 소유(?)하던 이들이 독식하던 권력이 기계를 '소유'하는 이들이 권력을 독식하는 시대가 되면서 기계가 우리를 지배할까봐 걱정하는 것은 우습다. 우리는 이미 기계이거나 기계에 지배 당하고 있다.

'선', '달마', '철', '민'는 도가적, 불가적 사상을 의미하는 선과 달마, 기계를 뜻하는 철을 의미한다. 인간다움과 기계다움이 조화롭게 섞여 이름을 짓는다. 인간은 기계처럼 되어가고 기계는 인간처럼 되어간다. 기계스러움이 인간스러움이 되고 인간스러움은 기계스러움이 된다. 인간과 기계는 하나이면서 분리되고 분리되어있으며 하나다. 삶과 죽음은 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가, 만남은 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가. 이는 동양의 음양이론과 비슷하다. 섞이면서 분리되고 분리되면서 섞이는 이 철학이 담겨져 있다. 작가는 작품 속에 의미를 숨겨놓지 않는다고 했으나 등장인물 작명을 위해 인위적으로 작품에 생겨날 인격을 이름을 통해 투영한다. 숨겨놓지 않아도 숨겨진 것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이 재미다. 개인적으로 너무 재밌는 소설이라 주변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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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 - 물이 평등하다는 착각
맷 데이먼.개리 화이트 지음, 김광수 옮김 / 애플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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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이아와 홍역, 에이즈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아동들이 '설사'로 죽는다. 수도 꼭지만 틀면 콸콸 나오는 물은 현대 사회에서도 역시나 불평등하다. 우리에게는 하찮게 흘러가 버리는 물이지만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는 물을 길러 가기 위해 적게는 1~2시간에서 많게는 6~8시간을 걸어가야 한다. 물을 길러가는 쪽은 대게 여성들이다. 그렇게 물을 구한다고 해도 물을 깨끗하지 않다. 오염된 물은 병의 원인이 된다. 역시 '설사'를 포함한 다양한 병의 원인이다. 소녀들은 하루 상당한 시간을 물 길러가는데 사용한다. 때문에 학교에 가기 힘들다. 물 부족으로 인해 욕실과 위생용품 사용에도 제약이 있다. '물'은 단순히 '식수'로 역할을 다하는 것만은 아니다. 생리기간 중 여러 날을 외출을 하지 않고 집에 머문다. 수인성 질병으로 한해 4억 4,300만 건이나 학교를 결석한다. '물'은 '물'로 시작했으나 '교육의 문제', '위생의 문제', '남녀 차별의 문제'를 더불어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국제 기구에서 우물을 만들어 준다고 해도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우물은 2~5년 사이에 약 30~50%가 고장이 난다. 그 많은 우물들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 된다. 유지관리비는 꿈도 꾸지 못한다. 미국산 부품으로 만들었거나 유럽의 부품으로 만들었다면 이것을 수리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가난하기에 더 가난해 질수 밖에 없다. 가난하면 돈이 많이 든다.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 되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비싼 돈을 들인다. 한 빈민촌에서는 병원을 방문하는데 15불이 든다. 지역 사람들의 하루 생활비가 2불이라고 하니 터무니 없는 금액이다. 물부족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는 당연히 지원국의 제품이나 부품을 이용해야 한다. 은행 계좌도 없는 이들이 과연 어떻게 고장난 부품을 수리하고 전문가를 부를지 생각해보지 않는 모양이다. 고민해보지 않은 탁상공론의 결과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의 결과다.

자본주의는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돈 없고 신용등급 낮은 이에게 '고리'를 받고, 돈 많고 신용등급 높은 이에게게 '저리'를 제공한다. 은행의 입장에서 '상환' 받지 못할 '리스크'에 대한 대안이겠지만 냉정하게 '돈' 없는 사람이 더 가난해 질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반대로 돈 많은 이들은 투자 기타 자금 운용을 통해 더 큰 수익을 얻는다. 이런 경제적 논리는 '물부족'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일부는 자기 수입의 10분의 1을 물값으로 지불하기도 했다. 이는 얼핏 적잖은데 월 200 받는 직장인이 물 값으로만 20만원 씩 쓰는 것과 다름 없다. 매년 물부족에 시달리는 이들의 상당수는 '화장실'이나 '상수도' 설치에 '고리대금'을 빌려 쓰고 이를 갑지 못해 자살하는 사건하기도 한다. 인도나 아프리카 등에서 최소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삶의 여건에 대해 '세상'은 야박하다. 세상이 이런 것에 대해 비판하거나 고치려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세계인 다수가 합의한 일종의 약속이다. 그나마 인류가 찾아낸 가장 합리적인 사회 유지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알면서 방치하는 일도 쉽지 않다. 조그만 어떤 노력이라도 이쪽에서 취할 것은 없을까. 영화 127시간에서 주인공은 편안한 가정집에서 쉽게 물을 사용하고 여행을 나선다. 그리고 그랜드캐년에서 엄청나게 많은 물이 꾸준하게 화면에 노출된다. 주인공이 사고로 암벽에 팔이 끼이는 사고가 일어나고 그 순간부터 영화는 '물'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영화를 보고 나또한 물 한모금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영상을 제작하고 연기하는 것은 이처럼 어떤 영향력을 누군가에게 행사하고 세상을 바꾸는 아주 작지만 큰 일이다.

2003년 독일에서 특이한 사건이 있었다. '로텐부르크'에 사는 '아르민 마이베스(42)'는 인터넷에 사람고기를 먹고 싶으니 지원자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광고를 냈다. 자발적 희생자를 찾는 광고에 놀랍게도 많은 지원자들이 자신이 잡아먹히고 싶다며 신청서를 냈다. '아르민 마이베스'는 그중 하나를 골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와 함께 '오션스 일레븐'이라는 영화를 봤고 결국 신청자는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잡아먹지 말아달라고 아르민 마이베스에게 말했다. 그렇게 그 둘은 헤어졌다. '오션스 일레븐' 출연한 '맷데이먼'은 이 뒤로 자신이 하나의 생명을 살렸다고 농담처럼 말하고 다녔다. 우스께스러운 일이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의 생명이 살아나고 죽어가는데 미세한 영향은 있다. 매달 카드값처럼 저도 모르게 빠져나가는 기부금이 있다. 푼돈일지라도 그 기부금을 납부함으로 투박한 '반지' 하나를 받았다. 반지를 착용하면 '나 이런데 기부하는 사람입니다'라는 의미없는 허영심을 부릴 수 있다. 그 허영심의 값으로 어쨌건 누군가는 생명을 구했다. '나비효과'라는 말을 좋아한다. 뉴욕 센트럴파크에 있는 작디 작은 나비의 날개짓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커다란 태풍이 만들어진다는 이론으로 사소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이 산꼭대기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커진다는 의미다. 물부족은 이처럼 엄청난 나비 효과를 만들어 부정적인 사건을 크게 만들기도 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했던 아주 작고 사소한 행동도 다시 반대편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어린시절부터 내 꿈은 '아프리카'였다.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를 가는 것이 오랜 꿈이다. 이유는 특별하게 없다. 다만 돈만 있으면 누구나 다 갔다오는 여행지가 아니라 '철학'이나 '사연'이 있어야만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돈'만 있다고 '아프리카'를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아프리카를 가기 위해서는 유럽에 가는 것 이상의 경비가 든다. 시간과 철학, 그 밖에 삶을 바라보는 여유와 어느정도의 호기심과 인류애 등 좀처럼 거창한 것들을 함께 들고 있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호기심이 있다. 맷데이먼은 오래전 부터 내가 좋아하던 배우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를 다닌 수재이며 젊은 시절부터 화려한 외모를 가진 배우다. 심지어 엄청난 연기력과 철학이 있는 배우다. 그런 배우가 '아프리카'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그럴만도 하다'라는 생각과 함께 일종에 동질감이 들기도 한다. 글은 얼마 전 읽은 '뉴호라이즌'이라는 책이 생각나게 한다. 한 프로젝트를 성장시키는데 일어나는 헤프닝이 담겨져 있다. 다만 미지의 세계와 과학 문명의 발전, 우주의 탐구라는 신비롭고 화려한 주제가 아니라 안타깝게도 이는 인류가 겪는 어떤 위협과 불행에 대해 공유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한 쪽에서는 그저 의미없이 뿌려던지기도 하는 '물'이 어느 한쪽에서는 삶과 행복에 치명적인 위협을 줄 만큼 부족하다는 데에서 얼마나 우리 인간이 무섭고도 어리석고 위험한지 알게 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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