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을 좋아하게 될 당신에게 - 미술전시 감상에서 아트 컬렉팅까지 예술과 가까워지는 방법 뉴노멀을 위한 문화·예술 인문서 4
김진혁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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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바닥에 총 7,000개의 사탕이 깔려 있다. 사탕의 총 무게 34kg. 누구나 이 사탕을 먹을 수 있다. 심지어 가지고 나갈 수도 있다. 그냥 관람객에게 사탕을 제공하기 위해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탕은 '무제'라는 이름의 설치 미술이다. '무제'는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의 작품이다. 그는 단조로운 설치와 조각으로 유명하다. 토레스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사탕은 그의 애인을 이야기한다. 1991년 그의 애인이 죽음과 가까워 졌을 때 몸무게는 34kg이다. 애인은 참여자들에 의해 죽음처럼 사라져 간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사탕은 여지 없이 다시 채워 진다. 사라진 연인의 존재를 매번 재생시키는 설치 미술이다. '김진혁 작가'는 이런 설치 미술을 '문학적 예술'이라고 말한다. 은유의 특성이 가득 담긴 예술이라는 말이다. 무게, 달콤함, 재생까지. 설치 미술은 단순히 전시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를 배경으로 다양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예술적 가치'는 '작가'가 아니라 '감상자'에 의해 달라진다. 난해하기만 한 현대미술은 어떻게 즐기는 것일까. 설치 미술이 난해한 것은 '작가'가 숨겨 놓은 무언가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기계가 담지 못할 '내면'을 담아야 했다. 사진기보다 정교하게 사물의 겉모습을 표현할 수 없다. 기술은 예술을 더 인간다워지게 바꾸어 놓았다.

일부 사람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공공미술'에 의문을 갖는다. 소중한 세금이 건축비와 설치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을 경제적 손익으로만 따지기에 우리는 인간이다. 공공미술은 환경을 쾌적하게 하고 서민의 정서에도 효과적이다. 파리 한복판에 지어진 볼품없고 쓸모없는 철제 탑을 사람들은 '세금 낭비'이자 '인간의 욕심'의 신물인 '현대판 바벨탑'이라고 불렀다. 다만, 이제와서 이 철제탑은 굉장히 중요한 '파리'의 상징이 됐다. 인간은 '의식주'만 가지고 살 수 없다. 매슬로의 욕구위계이론에 따르면 가장 하단에는 '생리적욕구'가 있다. 그 위로 안전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 '의식주'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 등 결핍 욕구는 충족시키지만 그 상단에 있는 성장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예술은 당연히 생리적 욕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예술은 인간이 의식주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상위 욕구를 충족한다.

꽤 값비싼 스테이크 집을 아이와 먹으러 간 적이 있다. 아이는 자신의 앞에 놓인 한 접시의 가치가 얼마인 줄 모르고 투정을 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계란 후라이에 간장, 밥을 비벼 먹었다. 가치라는 것은 가치를 알아 볼 때 생겨난다. 얼마나 훌륭한 요리사의 작품인지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맛을 얼마나 음미하고 가치를 알 수 있는지다. 단순히 대단한 사람의 작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인다. 가끔 7살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가지고 올 때가 있다. 혼자 보고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때도 많다. 단순히 유추할 뿐이다.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다가와 자신의 그림을 해석해 준다. 무엇을 그렸으며, 무슨 생각을 했고, 무엇으로 그렸는지를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한다. 듣고 있으면 내가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들이 나올 때가 있다. 꿈 이야기를 그렸을 때도 있고 가끔씩은 호랑이를 잡아먹는 토끼도 있다. 그것을 보고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반응한다. 그런 반응을 몇 차례하고 나면, 아이가 어떤 것에 영감을 받고 어떤 걸 주로 그리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아이의 그림에는 유독 의미가 없던 것들이 '내 아이'의 그림일 때는 그 의도와 생각이 궁금해진다.

'의도와 생각을 궁금해 보는 것'. 그것은 몹시 인간적이고 예술을 감상하는 주 포인트다. 건축가 페터 춤토르는 '페터 춤토르 분위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엇이 나를 감동시켰을까? 전부 다 이다. 모든 사물 그 자체. 사람들, 공기, 소음, 소리, 색깔, 물질, 질감, 형태."

조명은 어떻게 비치했고 색깔은 어떤 색을 사용했는지, 주변 음악은 어떤지. 그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그냥 '현상'이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의도를 가지는 행위. 그것이 예술이다. 작가의 의도가 가끔 해석자와 다를 수도 있지만, 그 의도를 생각해보는 행위가 예술이다.

미술 전시 감상에서 아트 컬렉팅까지 예술가 가까워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고로 '관심'이다. 내 아이의 그림이 다른 아이들의 그림보다 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내 아이의 그림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이의 그림에서 의도를 찾아 생각해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미술과 예술에 대한 관심은 작가와 큐레이터, 전시관의 의도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다. 음악과 미술 등 예술은 가끔 아무 말도 없이 사람을 위로 한다. 누구도 정확히 누군가의 마음을 정확히 위로하지 못한다. 다만 오로지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이다. 그 해석은 언제나 자신이 열어 두고 자신을 위로한다. 고로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많은 위로를 준다. 근처를 지나면서 한 번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제주도립미술관'을 아이들과 한 번 방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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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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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던 것을 잃는다. '상실'이라 한다. 상실은 '소유'을 전제로 한다. 소유하지 않으면 '상실'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면 끝에는 언제나 '상실'이 있다.

사람은 나면 죽는다. 극단적으로, '출생'의 방향은 '죽음'이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때와 장소, 이유와 방법만 다를 뿐 목적지는 같다.

태어나면 '하나'가 생겨난다. 죽으면 '하나'가 없어진다. 태어남이 '1'이고 죽음이 '-1'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만남이 '1'이고 이별이 '-1'이 되는 것 처럼 말이다. '태어남'은 반드시 '죽음'을 함께 한다. '만남'은 반드시 '이별'을 함께 한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다만, 모든 인간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었으며, 만나고 반드시 이별했다. 그것은 붙어다니는 두 개의 다른 점이 아니다. 하나의 직선이다. 기하학에서 물체를 늘리거나 구부려 모양을 바꾸는 것을 '위상동형(位相同型)'라고 한다. 쉽게 말해 반지를 양쪽으로 길게 늘려 빨대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빨대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입으로 빨아 들이는 구멍과 빨려지는 구멍이 있다. 분명 위와 아래에 구멍이 있지만 실제로 빨대의 구멍은 하나다. 빨대의 구멍이 '반지'와 위상동형이기 때문이다. 만남과 이별, 태어남과 죽음은 두 개의 다른 모양 같지만 공(空)이라는 비어있음의 위상동형(位相同型)이다. 모든 극단은 하나이지만 둘이고 반대이지만 붙어 있다. 이것이 '음양론'이다.

애초 모든 것은 공(空)하고 무(無)하다. 부처가 공(空)하다 하고, 노자가 무(無)하다한다. 그러함을 깨닫는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즈음에'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대목이 있다. 삶이 끊임없는 이별의 연속이라는 말이다. 이별에 촛점을 맞추니 삶이 온통 이별하는 것다. 다만 빨대의 반댓쪽 역시 하나의 구멍이라는 것을 보자면 삶은 끊임없는 만남의 연속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이처럼 공(空)과 무(無)의 위상동형(位相同型)이다. 전체를 보면 하나의 덩어리다. 그것을 길게 뽑으니 한 쪽만 부각되어 보인다. 태어날 때, 실 한오라기 갖고 나지 않는다. 죽을 때도 그렇다. '무소유'로 태어나고 '무소유'로 죽는다. 고로 삶에서 얻게 되는 것 중 속옷 한 장까지 모두 빌려쓰고 갚아 내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믿던 것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빌린 것들' 투성이다.

그것을 '자연'에서 빌렸든, '신'에게서 빌렸든, '내 것'이 없다. 잘 사용하고 돌려주려면 빌린 기간, 잘 활용하고 깨끗이 쓰다 돌려줘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빨대 반댓쪽 구멍이 여지없이 커진다. 상실감이 그만큼 커진다.

참 오만하고 무지하게 인간은 빠진 물에서 구해주면 '보따리'를 내놓으라 한다. 빈손으로 와서 '인연', '삶', '가족', '사랑' 모든 것을 빌려쓰면서 '감사하다'는 말 한 번 없다. 이러니 세상이 '다신 빌려주나 봐라' 괘씸히 생각해도 싸다. 받을 때의 감사함을 모르니, '상실감'만 커져 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여기서 색(色)은 존재(Thing)을 말한다. 공(空)은 비어 있음을 말한다. 즉 존재하는 것은 비어있는 것이고, 비어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쾌락이건, 사랑이건, 삶이건, 기억이건 모든 것은 현상하고 존재하지만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억울해 할 것도 없다. 빌려 썼으면 불평불만하고 후회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것에 감사하고 만족해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로 '소유'와 '상실'을 이야기했다. 소설이 가슴 먹먹해지는 이유는 후반부에 이어지는 '상실'들 때문이다. 따지고 들자면 소설의 전반부는 온통 '만남'과 '소유'가 이어진다. 누군가를 만나고, 인연이 된다. 그것은 인과관계다. 시작을 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많은 상실은 많은 만남과 인연을 뜻한다. 상실감이 많다는 것은 인생의 색(色)이 풍부하다는 것을 말한다.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하면 뿌린대로 거둔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이를 나쁜 쪽으로만 생각한다. 꼭 나쁜 짓을 하고 벌을 받을 때 사용한다. 다만 인과응보(因果應報)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는 원인이 있으면 그에 합당한 결과가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만남을 하면 이별을 하고, 태어나면 죽음을 맞이한다. 빨대의 윗구멍과 아랫 구멍처럼 이것은 이름을 두 개로 부르지만, 원인과 결과는 하나의 구멍일 뿐이다. 책을 읽고 먹먹하다. 인간의 감정이라 그렇다. 원리를 모른다면 자신만의 상실감에 사로잡힐테지만, 원인을 알고나면 담담하게 받아 드릴 수 있게 된다.

감사하게도 물건을 빌려 쓰게 된다면 비록 주인이 일찍 돌려 달라고 하더라도, 빌린 물건이 아무리 탐난다고 하더라도, 감사하게 썼다고 말하며 돌려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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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클래식 1포옹 - 하루를 껴안는 음악의 힘 1일 1클래식
클레먼시 버턴힐 지음, 이석호 옮김 / 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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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는 '바스켓볼(Basketball)'이다. 직역하자면 '바구니에 공 넣기 게임'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농구에는 바구니가 없다. 농구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캐나다 출신의 29살 미국 체육 강사, 제임스 네이스미스(James Naismith)가 1891년 미식축구 실내 버전으로 만들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복숭아 바구니 2개를 3미터 높이에 못으로 고정한다. 고정된 바구니에 축구공을 집어 넣으면 된다. 농구는 그렇게 시작했다. 다만 문제가 발생했다. 골이 들어가면 사다리를 타고 3미터를 올라가 바구니 속 축구공을 꺼내와야 했다. 이로써 경기의 흐름이 끊겼다. 바스켓볼은 지금처럼 대량 득점이 가능하지 않은 게임이었다.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됐다. 바로 바구니 밑을 뚫어 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농구는 조금 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클래식이 이렇게 확장될 수 도 있구나'

누군가의 간단한 아이디어는 이처럼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고정된 관념을 깨부수는 간단한 아이디어는 때로는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어렵고 복잡한 것들을 수월하게 하는 것은 '클래식'에서도 있다. 품격있는 사람들만 즐기는 '저들만의 리그'라는 '클래식'의 이미지는 위와 마찬가지로 '고정관념'이다. 바구니에 공을 집어 넣는다는 '바스켓볼'에 '구멍'을 뚫어 '바스켓'을 없애 버린다. 스포츠의 본질은 '시작'이 아니라 '즐김'이다.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신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었거나, 인간의 본성과 감정을 노래 했거나, 자연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왜 꼭 바구니어야 하지?'

간단한 질문은 바구니 없는 농구를 만들었다. 클래식은 반드시 '클래식'할 필요 없다. 영어에서 Classic은 '일류의', '최고의', '고전, 명작', '모범' 등의 뜻이 있다. 그것이 주는 강박관념과 고정관념이 클래식에 대한 접근성을 어렵게 한다면 바로 그거부터 버려도 괜찮다.

'테세우스의 배'에 관한 역살이 있다. '테세우스의 배'에 있는 부품을 하나씩 고쳐나가면서 사용하다보니, 어느새인가 원래 '테세우스의 배'를 구성하던 부속품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테세우스의 배'인가?

'바스켓볼'에 바스켓이 없다면 그것은 '바스켓'인가. 클래식이 클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는 이미 정답이 내려졌다. 그렇다. 바스켓볼은 바스켓없이도 바스켓볼이고 클래식은 굳이 클래식하지 않아도 클래식이다.

교회에서 신과 자연을 찬양하지 않아도 클래식이다. 비교적 최근에 작곡되어 과학과 여성, 흑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클래식이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모든 것이 바뀌고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만 남았더라도 그것은 '테세우스의 배'다. 인간도 매일 3300억 개의 세포가 태어나고 죽는다. 고로 모든 인간은 7년마다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것이 테세우스의 배와 무엇이 다를까. 클래식이 더이상 클래식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나아간다. 이 클래식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비백인'를 이야기 한다. '테세우스의 배'는 그럼에도 '테세우스의 배'이고 이 클래식은 그럼에도 '클래식'이다. 뿐만 아니라 '바스켓볼'처럼 이름을 벗어나 더 많은 것을 포옹한다. 무엇을 담을 수 있는가. 단순히 이름에 갇혀 더 많은 것을 포옹하지 못하는 것은 그 본질적 의미를 상실하게 한다.

운동, 음악은 즐기는 것이 본질이다. 이름에 갇혀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더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더 평범하고 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클래식'을 듣고자 한다면 '클레이먼시 버틴힐'의 '1일 1클래식 1포옹'을 들어보는 것이 좋다. 너무 많은 정보를 공부하려 들기 보다는 차근 차근히 하루에 하나 정도를 즐기며 그 배경을 알아가는 재미를 갖는 것이 나와 같은 비주류 인간도 꽤 즐겁게 클래식을 즐길 수 있는 노하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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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학교 폭력 일기 쿤룬 삼부곡 2
쿤룬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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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다만 남이 나를 괴롭히면 배로 갚아준다."

한강 몸통 시신 살인사건의 피의자 장대호의 말이다. 그는 언론에 얼굴이 공개되면서 일관적인 말을 했다.

"유족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다. 상대방이 죽을 짓을 했다."

내성적이고 주변인들과 마찰을 빚은 적 없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범죄 전력도 없었으며, 정신과 치료 기록도 없다. 되려 하는 일에 성실한 편이었다. 그가 자수를 하고 인터뷰를 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이번 사건은 흉악범이 양아치를 죽인 사건입니다. 나쁜 놈이 나쁜 놈을 죽인 사건이에요."

피해자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다음 생에 또 그러면 넌 또 죽어"

평소 사회면 뉴스를 굳이 찾아보지 않기 때문에 해당 사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스치듯 지나갔던 인터뷰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복수는 왜 더 잔인해지는가.

1968년 발표된 '박태순'의 '무너진 극장'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는 4월 25일과 26일의 풍경을 이야기한다. 4.19 혁명 당시 시민들의 저항을 이야기 한다. 소설 주인공은 시위 과정에서 군중 심리를 말한다. 초점은 '폭력'과 '무질서'다. 군부독재에 저항한다는 명분이지만 시위는 폭력적이로 무질서했다. 명분이 있으면 행위는 정당화 되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대부분의 전쟁과 테러, 범죄는 명분이 있다. 학대 피해자가 모두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가능성으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학교 폭력'이 위험한 이유다. 보복성 학폭으로 받은 것을 배로 돌려준다. 이 악의 순환고리 때문에 폭력은 더 잔인해지고 무자비해진다. '따돌림'은 대체로 '공감부족'에서 생긴다. 대상의 심리를 공감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따돌리는 이들은 그렇다면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 일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공감 부족은 '공감 능력' 때문에 생긴다.

자석에서 S극이 강하면 반대로 N극도 강해진다. 이는 상대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개인으로서의 정체성 뿐만아니라, 집단을 형성하면 집단에서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 경기가 있다고 해보자. 한국 선수가 경기력 좋기를 바랄수록, 일본 선수의 경기력이 나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다수'와 '다수'가 대립하는 것은 '따돌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체로 따돌림의 경우에는 '다수'가 '소수'에게 향한다. 인간은 비슷한 이들끼리 몰려 다닌다. 취미가 비슷한 이들끼리 몰려 있거나, 성격이 비슷한 이들끼리 몰려 다닌다. '취미, 성향, 말투, 성격' 등. 자신과 비슷한 이들이 다수가 되면, 이들의 입장에서 '소수'는 '비정상'이 된다. 소수에 대한 증오는 '청소년'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인간 다수에게 일어난다.

각자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지역과 나이에서 무작위로 섞여 언제든 자유롭게 상하좌우로 이동하는 '성인'과 다르게,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집단 선택이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에서는 '골프'를 좋아하는 이, '테니스를 좋아하는 이', ' 포켓볼을 좋아하는 이' 등 자신과 비슷한 이들을 찾아 뭉칠 수 있다. 다만, 그저 '나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뭉쳐진 '무작위 집단'에서는 소수가 '따돌림'의 타겟이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넷플릭스의 드라마 '더 글로리'라는 영화를 봤다. 꽤 재밌게 봤다. 다만, '선생님이 알아서는 안되는 학교 폭력 일기'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몰입해서 봤던 것 같다. 학교 폭력을 당하던 여중생의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과 드라마는 모두 이를 '통쾌한 복수'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두 작품을 볼 때, 통쾌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학교 폭력 가해자들이 더 처참하고, 더 불쌍해지기를 바라게 된다. 다만, 명분이 있다고 행위가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학교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도 가해자가 되는 서로가 피해자가 되는 구조다.

개인적으로 학교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밈'으로 돌아다니는 '학교 폭력 멈춰!'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반편성이 아니라, 특정한 '다수'가 생기지 않도록 '고교학점제'를 확대하여 학생이 자율적으로 과목을 선택하여 이동 할 수 있는 교육과정 편성이 낫지 않을까.

한 번 읽기 시작하니, 몰입도가 너무 좋았던 책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하드코어'해지고 잔인해지기는 한다. 한 편의 고어 공포물을 본 것 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시리즈로 알고 있는데,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 할 듯 싶다. 몰입하여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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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지도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1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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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삼(三)자를 보면 동양 철학을 알 수 있다. 가장 위에 있는 선은 '하늘', 가장 밑에 있는 선은 '땅'을 의미한다. 여기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다. 천지인(天地人)은 하늘과 땅, 인간이 어울어고 각각 대등한 위치에 존재한다. 어느 하나가 독보적이지 않고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 삼재(三才)는 오래부터 한반도에서도 사용됐다. 얼핏 기억하기에 부채나 대문, 북 등에서도 보인다. 태극기의 둥근 원에 음과 양으로 나눠진 '태극'이 있다. 이 태극문양은 음양태극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노란색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 삼태극(三太極)이다. 예전부터 일본과 한국에서는 이런 삼태극을 자주 사용하곤 했다. 삼태극은 셋이 서로 균형을 이룬다. 서로 조화롭다. 여기서 하나만 빠지더라도 그 균형은 무너진다.

예전 정치인들은 이 삼태극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늘과 땅, 인간의 조화 말이다. 그래서 임금 왕(王)자는 석 삼(三)자를 위에서 아래로 관통한다. 현재 정치는 다르다. '인간'만 중요하게 생각할 뿐이다. 임금 왕(王)에서 하늘을 의미하는 하나가 빠졌다. 이를 걷어내면 흙 토(土)가 된다. 진정한 '정치'는 땅과 사람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하늘과 땅, 인간의 조화로움은 '자연스러움'을 말한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이치에 맞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단군 건국 이념을 보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라는 의미가 있다. 왜 단군은 '조선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포괄절인 관념을 사용했을까.

국가주의 이념은 '국가'를 가장 우선시 한다. 가령 '의사'가 전쟁 중 적군을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애국'과 '인간' 중 무엇이 옳은 일일까. '이어령' 선생은 '한국'과 '일본'이 축구경기를 빗대어 이를 말했다. 두 국가가 치열하게 경기를 한다. 한국이 골을 넣으면 기뻐한다. 반대로 골을 먹히면 분해한다. 이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이 있다. 스포츠에서 국가를 빼면 모든 기쁜 일도 분할 일도 없다. 인간이 골을 넣고 골을 먹는다. 어느 인간이 골을 넣던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민주주의의 정신과 기본 원리를 밝혔다. 여기서도 국가주의가 빠진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번역된 표현에서는 '국민'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다만 에이브러햄 링컹의 원어 표현은 다르다.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국민이 아닌, 사람'이 들어간다. 홍익인간의 건국이념과 닮았다.

'공자가어', '여씨춘추' 등의 책에 '형나라 사람이 활을 잃어버린 이야기'가 나온다. '형나라 사람'이 활을 잃고 찾지 않았다. 그러니 말했다.

"형나라 사람이 잃은 것은 형나라 사람이 주울 것이다. 그러니 찾아서 무엇하겠는가."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거기에 '형나라'을 빼는 것이 옳다."

사람이 주울 것이니 괜찮다는 의미다. 여기에 '노자'는 다시 말했다.

"거기에 사람도 빼는 것이 옳다."

경계선을 하나씩 해체할 때마다 포용성이 높아진다. 그것이 가족이고, 친구이고, 한국인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은 포용성이 적어진다. 경계선을 모호하게 선택하는 일은 포용성을 높인다. 인간을 넘어서 생명을, 생명을 넘어서 존재를 포괄하는 사랑이 더 포용적이다. 어느 한쪽을 명확하게 선택하는 것이 아닌 '모호함'이 아니라, 어느쪽도 포용할 수 있는 '위대함'이다.

이어령 선생에 따르면 나그네에게 신념은 버려야 할 짐이라고 한다. 신념에 사로잡혀 답이 정해져 있는 사람과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길을 떠난 나그네는 어제와 오늘, 내일이 달라야 한단다. 이 철학이 나와 매우 닮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분명한 자기 신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긴 하다. 다만 양쪽 패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상황마다 대처하는 이와, 무조건적으로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지는 것은 다르다. 예전에는 어떤 목표를 가질 때, '배수의 진'을 치곤 했다. 퇴각로 없이 뒤로 물러서면 '죽음' 뿐이다라는 결심은 때로 목표를 강력하게 이루게 하기도 한다. 다만, 언제부턴가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될 수도 있지..뭐..'

항상 플랜B를 가지고 여유있게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렇다. 살다보면 실패할 수도 있다. 실패할리 없다는 생각, 자신의 신념이 잘못될리 없다는 확신에 빠지면 꽤 고통스러운 시간을 갖게 된다.

학교와 책,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이라도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구온난화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봤다가,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본다. 정치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해봤다가, '보수'적인 생각도 해본다. 서로 상충되는 여러가지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분명 서로 다른 주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찌보면 일관적이지 않다. 다만 언제나 일관적이라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순풍이 불 때는 돛을 올렸다가, 역풍이 불면 돛을 내리기도 하는 것이다. 최초에 내린 결단을 바꾸는 것은 상황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달라야 한다. 어떻게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그 둘을 조율하는 중요한 위치가 되는가. 아마 절대적 존재인 '하늘'과 '땅'에 비해 유연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하늘과 땅 중간에서 이 둘을 모두 포용하고 넓게는 횡으로 종으로 포용하며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두 눈은 이상을 향해 두고, 두 발은 현실을 향해 두어야 한다고 한다. 하늘과 땅의 적절한 조화로움을 알고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은 역시 삶을 지혜롭게 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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