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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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언어다. 서양 철학과 문학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언어다. 다만 희랍어는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사어'가 되었기에, 그 소리는 이미 사라졌고 의미만 남아 있다.

마치 시간이 흐르며 목소리를 잃는 주인공을 닮았다. 소리는 잃지만 의미만은 남아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때로 우리는 백년도 안 된 '한글 소설'을 읽고도 의미를 파악할 수 없지만 천년도 넘은 '한문 소설'을 읽으며 의미를 알 수 있는 바와 같다. 어떤 문자는 '소리'를 담고, 어떤 문자는 '의미'를 담으며, 어떤 것이 더 우수하다고 할 수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소리'보다 '의미'가 '의미'있는 경우도 있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익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과 사상을 탐구하는 일이다. '공자'의 말과 '플라톤'의 말은 '의미 문자'로 남아 있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희랍어 시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제 한강 작가 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희랍어의 시간을 다시 읽었다. 그 순간 이 책이 나에게 전하는 의미가 더 선명해졌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소리를 잃으면 의미를 얻는다. '시소'라는 단어에는 분명 'ㅅ'이 두 번 들어 가지만, 첫번째 시옷과 두번째 시옷을 발음 할 때, 혀의 위치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게 된다. 이미 익숙해져 문자로만 존재하던 '소리'가 그 모양을 들추고 나온다. 그러한 깨달음은 과연 '소리'에만 집중했을 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의미에 집중하느라 소리를 잊고, 소리에 집중하느라 의미를 잃는다.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빛이 만나는 이야기다. 주인공 여자는 희랍어를 연구하며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 그 문자 처럼 말이다. 다만 '소리'를 잃은 침묵한 문자인 '희랍어'를 통해 여자는 잃어가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내면을 마주한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며 세상의 빛을 잃으며 어둠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진실을 발견한다.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어루만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소리'를 통해 소통한다. '의미'를 상실한 '소리'가 말과 글로 전달되며 진실하게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생각치 않는다. 이 책을 덮으며 마음속에 남은 묵직한 여운은, 결국 우리 모두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들을 마주하며 가진 것에 대한 깊은 탐구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짧다. 선 없이 그림을 그리는 수채화처럼 문장과 문장이 구분없이 전체 화풍을 완성한다. 희랍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언어다. 서양 철학과 문학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언어다. 다만 희랍어는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사어'가 되었기에, 그 소리는 이미 사라졌고 의미만 남아 있다.

마치 시간이 흐르며 목소리를 잃는 주인공을 닮았다. 소리는 잃지만 의미만은 남아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때로 우리는 백년도 안 된 '한글 소설'을 읽고도 의미를 파악할 수 없지만 천년도 넘은 '한문 소설'을 읽으며 의미를 알 수 있는 바와 같다. 어떤 문자는 '소리'를 담고, 어떤 문자는 '의미'를 담으며, 어떤 것이 더 우수하다고 할 수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소리'보다 '의미'가 '의미'있는 경우도 있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익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과 사상을 탐구하는 일이다. '공자'의 말과 '플라톤'의 말은 '의미 문자'로 남아 있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희랍어 시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제 한강 작가 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희랍어의 시간을 다시 읽었다. 그 순간 이 책이 나에게 전하는 의미가 더 선명해졌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소리를 잃으면 의미를 얻는다. '시소'라는 단어에는 분명 'ㅅ'이 두 번 들어 가지만, 첫번째 시옷과 두번째 시옷을 발음 할 때, 혀의 위치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게 된다. 이미 익숙해져 문자로만 존재하던 '소리'가 그 모양을 들추고 나온다. 그러한 깨달음은 과연 '소리'에만 집중했을 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의미에 집중하느라 소리를 잊고, 소리에 집중하느라 의미를 잃는다.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빛이 만나는 이야기다. 주인공 여자는 희랍어를 연구하며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 그 문자 처럼 말이다. 다만 '소리'를 잃은 침묵한 문자인 '희랍어'를 통해 여자는 잃어가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내면을 마주한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며 세상의 빛을 잃으며 어둠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진실을 발견한다.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어루만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소리'를 통해 소통한다. '의미'를 상실한 '소리'가 말과 글로 전달되며 진실하게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생각치 않는다. 이 책을 덮으며 마음속에 남은 묵직한 여운은, 결국 우리 모두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들을 마주하며 가진 것에 대한 깊은 탐구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짧다. 선 없이 그림을 그리는 수채화처럼 문장과 문장이 구분없이 전체 화풍을 완성한다.

말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와 여자는 점차 의미를 분명히 한다. '소리'와 '형상' 뒤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말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와 여자는 점차 의미를 분명히 한다. '소리'와 '형상' 뒤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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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러브, 좀비 (리커버)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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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 어플리케이션에 들어가면 항상 이 '소설'이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몇 번을 모르쇠하다가 선택했다. 모르쇠했던 이유는 '표지' 때문인데 어쩐지 '좀비'와 '로맨스' 적절히 섞인 소재가 아닐까 해서다.

소설이 단편집이었다는 사실은 첫 단편이 끝나고 조금 지나서 알았다. 단편소설인지, 장편의 한 챕터가 끝났는지 모르고 두 번째 소설을 읽었다. 내용은 연결되지 않았다. 단편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짧게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다.

책을 읽을 때는 나만의 방식이 있는데, 장편 소설은 짧게 끊어 읽지 않는다. 소설을 읽어야 할 시간을 정하고 자세히 읽는다. 규칙을 정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다보니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이들은 '다독'하다보면 빠르게 플롯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소설을 읽다보면 특히 '외국 소설'의 경우에는 이름이 다 비슷비슷하기도 하고 관계가 얽혀 있다보면 누가 누군지 자꾸 헷갈린다. 그런 경우에는 누군가가 정리해 둔 관계표를 검색해 놓고 보면서 읽거나 직접 관계표를 작성하며 읽기도 한다.

단편의 경우에는 관계라고 할 것이 없다. 캐릭터 등장이 적고 에피소드도 복잡하지 않다. 간단히 짧게 몇 분 씩 끊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예은 작가의 '칵테일, 좀비, 러브'는 이 단편집에 나오는 한 소설이 이름이다. 아버지가 좀비가 되는 괴기한 내용의 소설인데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밌는 소설은 아니였다.

소설에는 부모의 불행을 막기 위한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단편은 '소포'없이 봐야하기에 자세히 설명은 하지 않겠다. 다만 이 소설을 읽으며 조금더 내용을 풀어서 장편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물'과 '숲'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오컬트적인 소설도 흥미롭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언젠가 읽었던, '구의 증명'이 떠올랐다. 글의 문체는 '무라카미 하루키' 같다 느껴지기도 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 특유의 문체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다만 이 소설집을 읽으며 '작가'의 문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기에 그렇다고 보여진다. 소설은 모두 각자 다른 사람이 쓴 글처럼 개성있다.

소설은 '짧고 가벼워' 짜투리 시간에 읽기 좋았다. 다만 소설에 '아버지'가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아서... 현 '아버지' 역을 맡은 1인으로써.. 조금 생각이 복잡해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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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 브라더스 -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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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겪어봄직한 사소한 이야기다. 작가를 잊고 있다가 다시 확인하니, '불편한 편의점'을 쓴 '김호연 작가'의 글이다. '작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잊혀질 만큼 누군가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예전 친구와 '영화'나 '소설'의 관전 포인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대체로 재미있다는 평을 받은 작품은 모두에게 비슷한 재미를 줄 것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네이버 평점'이 나의 견해와 다른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대체로 그 작품에 대한 가늠이 가능하기도 했다.

다만 친구와 내가 느끼는 '재미있는 작품'의 기준은 꽤 달랐다. 친구의 경우, '해피앤딩' 작품을 좋아한다. 모든 갈등이 시원하게 해결되며 영화가 끝나는 작품을 선호한다고 했다. 실제 어떤 작품은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꼬와두었던 모든 갈등을 너무 싱겁게 해결해 버리며 마무리 해 버린다.

그런 작품에 나는 '최악'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우리 삶에서 그처럼 어떤 시점으로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에게 나는 그런 '해피앤딩'은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것 보다 더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친구의 주장은 이랬다. 현실을 표현하려면 '현실'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비현실을 '대리만족'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도 그렇다. 나의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지나치게 '선과 악'이 구분된 경우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보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분명하지 않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면 '살인자'라는 인물에 대해 '악'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어떤 범죄를 옹호하고 싶진 않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만의 선을 행하고 살아간다. 어떤 행위이던 거기에 당위성이 스스로에게 부여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동하지 않는다. 고로 어떤 의미에서 모든 행동은 '선'을 동반한다. 악이 왜 악이 됐는지, 행위자의 선은 어떻게 '악'으로 비춰지는지, 그것을 관찰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포인트는 '관계'에 관한 포인트다.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중 하나는 '허준'이다. 허준을 볼 때도 여러 포인트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관계'다. 완전히 외지에서 온 '허준'이라는 인물이 '유의태', '유도지', '임오근', '구일서', '안광익'이라는 인물과 꾸준하게 인연을 맺어간다. 이 과정에서 서로서로가 '잘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렇게 인물이 얽히며 인연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프리즌브레이크'나 '포레스트 검프'를 비롯해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은 이렇게 인연이 얽혀지는 관전 포인트를 담고 있다.

'망원동 브라더스'는 이런 의미에서 굉장히 취향저격한 소설이다. 모든 일이 각본처럼 목표를 향해 흘러가지도 않고 적당히 비극과 희극이 섞여 있으며 관계가 얽혀진다. 나중에 안 사실은 이 소설이 지극히 작가 경험담이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진실을 넘어서는 허구는 존재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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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인생공부 - 인간의 마음을 해부한, 67가지 철학수업
김태현 지음, 블레즈 파스칼 원작 / PASCAL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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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Blaise Pascal)은 17세기 프랑스 수학자이자 철학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의 아버지는 파스칼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의 아버지 역시 세무관련 일을 하는 사람으로 '수학'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서 수학을 가르치지 않으려 했다.

수학이 너무 재밌기에 아들이 다른 공부를 잊어버릴까 걱정해서였다. 요즘 학생과 학부모가 들으면 기가 찰 이야기다. 그러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파스칼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형을 그리며 수학의 규칙을 독자적으로 발견하며 수학적 탐구를 이어나간다.

그는 단순히 수학에만 관심이 많았던 건 아니다.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세계 최초의 계산기 중 하나를 발명했다.

파스칼은 젊은 시절 어떤 사건을 겪고 삶과 신앙에 큰 관심을 갖는다. 이때 파스칼은 '신앙을 믿는 것'에 대해 흥미로운 철학적 물음과 답을 내린다.

"나는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모른다. 다만 믿는 것이 더 선택이라면 나는 기어이 신을 믿도록 하겠다."

그의 초년시절이 지식에 대한 탐구시기였다면 그의 삶 후반부는 철학적 성찰에 대한 탐구 시기였다. 그는 과학과 신앙, 수학과 신을 동시에 탐구했다. 그렇게 그의 저서 '팡세'에 인간의 고통과 한계,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을 다룬다. 단순히 '숫자'에가 아니라 존재에 의문을 가지며 여러 도덕적 딜레마에 대하해 철학적 '물음'을 찾고 답을 구했다.

그의 삶을 보면 수학, 과학, 철학, 신앙 등을 통합하는 대통합적 철학을 찾고자 했다. 그의 철학적 화두와 답은 여러 통찰을 담고 있다.

앞서 말한 '팡세'가 대표적인 그의 철학을 담은 저서다. '팡세'는 프랑스말로 '생각들'이라는 의미다. 이 저서에 그가 가졌던 철학적 단상과 성찰이 모여 있다. 다만 이 책은 '파스칼'이 출판을 목적으로 작성한 글은 아니다. 팡세는 자신의 생각을 이곳 저곳에 기록하고 메모하곤 했는데 사후에 사람들의 그의 생각들을 묶어 출판물로 제작한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그는 '신앙'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면 '믿어 손해 보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접근으로 신앙에 대한 탐구를 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이며 이를 초월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얼핏 이렇게 보기에 '파스칼'이라는 인물이 '고뇌하는 천재 철학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파스칼은 굉장히 인간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꽤 괜찮은 유머감각을 가졌고 주변 인물들과 수다떠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그가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여겼던 것처럼 그는 자신에 대해 절대적인 잣대를 두지 않았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소박한 삶을 꿈꾸고 인간의 고통이 허영심과 세속적인 욕망에서 온다고 여겼다. 그럼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소박한 행복을 찾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현대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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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 - 10주년 개정증보판
오프라 윈프리 지음, 송연수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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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 윈프리의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에 보면 굉장히 의미 있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탐구자로 간주해왔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기 자신을 탐구자로 간주해왔다.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 신에게 물으며 스스로에 대해 알기를 갈구해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굉장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항상 자신보다 남을 관찰하며 살아가며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이의 '숨소리'와 얼굴 표정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과 숨소리에 눈과 귀를 닫는다.

인간은 시간당 평균 720번. 하루에 1만 7천번 이상의 들숨과 날숨의 순환을 겪는다. 적어도 하루 몇 번, 타인의 날숨과 들숨에 의미를 부여하며 단 한번도 자기의 호흡에 대해 관찰하지 않는다. 타인의 호흡과 표정 감정을 관찰하는 일도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지만 어쩐지 그 일은 상대를 부담스럼게 하는 일이다. 언제나 아무곳에서나 관찰할 상대가 존재하는 일도 아니다.

누군가를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일은 인간의 작동 매커니즘을 탐구하는 일이다. 그런 일은 타인을 통해서든 자신을 통해서든 일어나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관찰하기에 타인보다는 자신이 수월하지 않겠는가.

언젠가 '라이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라이벌은 '경쟁심'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장하게 만든다. 고로 건강한 열등감과 승부욕은 자신을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다. 다만 이 라이벌이라고 하는 관계는 상대와 내가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 그 선한 영향력을 주고 받아야 하는 일이다. 자신보다 항상 못나서도 안되고 자신보다 너무 잘나서도 안된다. 겨우 넘길 수 있을 정도의 경쟁심을 유발하는 '상대'가 나를 발전시키는 법이다.

이런 라이벌은 '외부'에서 찾으면 좋다. 다만 그런 라이벌이 항상 내가 성장한 만큼 비슷하게 성장하라는 법은 없다. 언제, 어디서나 그를 찾아낼 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라이벌'로 여길 가장 좋은 상대는 바로 '나 자신'이다. 어제의 '나'는 내가 겨우 넘어설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며 언제든 약점과 강점을 파악하고 공략할 수 있는 좋은 상대다.

결국 '평온과 안정'을 위해서나, '경쟁과 성장'을 위해서나 '나'와 친해지고 가까워지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는 '별에서 온 존재'다. 스스로가 작은 존재라고 믿어질 때, 다시 우리의 존재를 깨울 수 있을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한다.

태양은 우리로부터 가장 가까운 '별'이다. 태양의 74%는 수소, 24%는 헬륨으로 이뤄져 있다. 태양의 98%가 헬륨과 수소다. 2%가 탄소나 철, 산소다. 가벼운 원소는 중력에 의해 이끌려지며 더 무거운 원소로 결합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원소가 되려면 '태양'은 아직 너무 '아기 항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어디서 왔나.

바로 '태양'이 비할 바가 되지 않는 엄청난 '초신성'에서 왔다. 우리는 엄청난 중력이 폭발하는 초신성 폭발로 흩뿌려진 무거운 원소 덩어리들이 우주 공간을 항해하다가 우연히 '유기체'의 모양으로 결합된 존재다.

수백만 개의 비행기 부품을 한 자루에 넣고 마구 흔들어 '상업용 비행기 한 대'가 우연히 만들어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 기적적인 확률로 '시간도 흐르지 않는 무생물', 원자 덩어리가 우주 공간에서 기가 막히게 결합되어 잠시 우리의 형체로 생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5,000,000,000년이라는 우주의 광대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우리는 100년도 되지 않는 '생명'이라는 유기체로 찰라의 순간 존재하고 사라진다. 이 위대한 기적의 순간을 어찌 단 1초, 1분이라도 낭비할 수 있겠는가.

이 위대한 기적과 놀라움은 매순간 관찰해도 지겹지 않고 그 기적이 언제나 나의 주변에 흔하게 널려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간혹 우리는 너무 당연한 주변과 자신에 대해 하찮게 여기고 있다. 다만 우주 전체로 볼 때, 우리가 매일 아침 화장실 변기에 누는 '대소변'이나 '방귀'조차 우주 전체에서 다이아몬드보다 가장 희소한 가치가 있다. 내뱉는 호흡과 '영'과 '혼'이라 부르는 정신적인 작동들.

그 사소하고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모두 기적이라는 사실을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이 아는 것이 많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작은 인터뷰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녀는 점차 자신이 확실히 하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다시 돌이켜 보건데 그 불확실한 것들 중에 확실하게 알만한 것들이 몇가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가 확실히 알만하다고 한 그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나또한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분명히 알만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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