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 자서전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지음, 김명신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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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19개월 만에 열병으로 눈멀고 귀먹어 말조차 못하지만 그녀는 낙관주의자였다. 1968년, 여든 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녀는 정싱인보다 더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서전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적었다.

눈 뜨고 감사함 없이 사는 우리에게 생각할 꺼리를 준다. 그녀는 눈이 보이는 친구들을 시험해 보곤한다. 숲속을 오래 산책하고 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 묻는다. 친구는 '별거 없었어'라고 답한다. 눈이 멀쩡한 사람도 보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이 보는 것에 전부인 사람들에게 본다는 것은 그저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녀는 점자로 글을 읽었으나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많은 문학을 읽고 철학서를 읽었으며 더 많은 간접 경험을 했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만나고 가보지 못한 세상을 봤다. 과연 누가 눈을 감고, 누가 귀를 닫고 있는가.

철학에서 보는 건 그림자고 아는 것 역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은 진리를 파악하고 우주를 그대로 포착한다. 그림자는 실재다. 즉, 실재라 믿는 것은 대체로 그림자다.

인간은 굉장히 희한한 포유류다. 포유류는 다양한 색을 볼 수 없다. 이것이 호랑이가 빨간 이유다. 무슨 말일까. 원래 호랑이는 은폐를 위해 보호색을 가져야 한다. 녹지에 숨기 위해 호랑이는 초록색 털을 가져야 한다. 초록은 보호색이 되며 다른 동물들에게 잘 보이지 않도록 감춰준다. 그러나 호랑이는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이렇다. 유전적으로 '초록'을 만들어 내는 것은 '빨강'을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또한 호랑이가 사냥하는 대부분의 동물이 '적록색맹'이다. 우리 눈에는 붉은색으로 보이는 호랑이가 대부분의 초식동물에게는 녹색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다.

'조류'는 육안으로 비가시광선을 본다. 자외선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먹이를 찾거나 방향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육안'을 사용한다. 직접 두 눈으로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하여 방향을 찾아간다.

그 말은 세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가시광선'이라는 의미다. 대부분의 동물은 가시광선을 훨씬 뛰어넘는 빛을 본다. 고로 그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히 덜 보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아주 극일부다.

우리 조상은 채집 생활을 했다. 과일을 먹는 생활 습관 덕분에 조상들은 붉은 원추 세포를 부활시켰다. 우리는 그렇게 붉은색을 볼 수 있게 됐다.

이것은 말한다. 즉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가시광선을 넘어 볼 수 있는 감각, 그것은 아마다 '글을 해석하는 감각'이지 않을까 싶다. 글을 통해, 타인과 과거, 미래, 철학을 모두 볼 수 있다면 과연 '헬렌켈러'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책을 읽으며 세상을 봤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굉장히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책에서 본 것인지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어하는 상황까지 온다. 독서는 간접경험이다. 다만 대부분의 직접경험도 차츰 퇴색되면 간접경험과 비슷한 형태로 기억이 저장된다. 그녀는 실제로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표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하기도 한다. 시각이 퇴화한 동물이 후각에서 뛰어난 감각을 나타내거나, 그마저 퇴화한 동물이 청각에서 뛰어난 것 처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더 많이 보게 한다. 그녀는 남들이 보는 것을 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부분부터의 본질을 살핀다. 그녀는 머그컵에 담긴 물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애를 먹었다. '머그컵'은 물을 담는 그릇이고 '물'은 그 안에 담겼다. 설리반 선생이 머그컵의 물을 '물'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가르킨 것이 '머그컵'인지 물인지 몰랐다. 그녀는 그것을 머그컵이라고 이해했다. 이 둘은 이것으로 고군분투한다. 가르킨 것이 '물'인지 '머그컵'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설리번'은 얼마나 '물'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했을까.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그녀는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볼 수 있게 됐다. 출애굽기 19장에는 '아는 것이야 말로 사랑이요, 빛이요, 비전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아는 것은 사랑이고 빛이고 비전이다.

이렇게 본질을 탐구한 그녀에게서 '삶'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아 어둡고, 들리지 않아 적막하고, 말하지 못해 답답한 그녀에게 '삶'은 밝고, 경쾌하며 넓게 펼쳐진 것이었다. 주어진 것에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생긴 새로운 것에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녀는 최고의 '낙천주의자' 였다. 삶은 오르막길 뒤에 내리막길 같은 것이며, 내리막길 뒤에 오르막길 같은 것이 었다. 모두가 그녀의 삶이 내리막길이라고 정의할 때, 그녀는 자신의 삶이 오르막길이라고 바라봤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왕의 조상들 가운데 한 명 쯤은 노예가 있을 수 있고, 노예의 조상들 가운데 한 명 쯤은 왕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라고 정의하는 것은 과연 '우리'인가. 혹은 어쩌면 우리가 우리를 정의하기에 앞서, 혹은 그 훨씬 뒤에도 우리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나게 많으며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낙천주의'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삶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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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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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짓다보면 나무 모양이 여럿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똑같은 토양, 기온, 강수인데도 그렇다. 같은 종자인데도 그렇다. 종자 내에 DNA 설계 때문일까. 농부의 손이 다르게 닿아서 그럴까.

같은 씨앗이라도 크기와 모양 때로는 색깔이 다르다. 이유는 생물의 다양성만큼이나 동종 내에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같은 부모 사이에서도 다른 형제가 태어난다. 하나의 세포에서 분열된 일란성 쌍둥이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우주 내에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돌연변이'가 생기는 이유다. 다만 사피엔스 종인 비슷한 것에 '보통명사'를 붙였다. 완전히 똑같지 않더라도 비슷한 것들끼리 '가르기와 모으기'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일반화한다. 우리가 대상을 일반화하는 이유는 독립적으로 기억하기에 우리 지성이 작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호한 것에 일반화하고 같은 것이라 인지한다. 앞집에 있는 돌이나 뒷산에 있는 돌이나 우리는 그것을 '돌'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같지 않다. 이름만 같을 뿐, 질량도 부피도, 모양과 색깔, 심지어 성분도 다르다.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예로 들어보자.

두 국가의 국경은 분명 존재한다. 과연 그럴까. 국경은 관념에만 존재할 뿐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계는 지구적 관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미시적 관점에서 아주 모호하다. 국경선 근처에 놓인 모래 분자가 원자 단위로 쪼개질 때, 원자핵 주변에 전자는 독일의 것인지, 프랑스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전자의 존재는 정의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지성 범주로 대상을 일반화하는 것은 왜곡을 필연적으로 불러 일으킨다. 비슷한 것에 '명사'를 만들어 부르는 것은 우주 만물을 우리 멋대로 이름 지은 것에 불과하다. 인간과 숯은 모두 '탄소' 덩어리이고 그 함유량과 불순물로 그것의 이름을 구별하는 것처럼 정의는 그저 관념의 약속일 뿐이다.

1789년 프랑스는 혁명 중 인권선언을 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그 권리는 불가침하다.'

평등에 대한 명시적인 선언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이 선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또한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고로 누군가가 개인은 자신의 역량만큼의 성과를 얻어간다.

'능력주의'의 탄생이다. 능력주의는 말한다.

'모두는 같다. 누구든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시대가 흐르며 '신분'으로 존재하던 우열이 사라졌다. '능력'으로 '우열'이 결정된다. 그것은 열등감을 만들었다.

과거에 '우열'의 존재는 '태생'부터 정의됐다.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천자'가 되고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노비'가 된다.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신'이 정해준다. 고로 자신의 위치는 '신의 계획'이지, 자신의 잘못은 아니다.

고로 이 시대에는 태어나면서 부여되는 '불안'이 적었다. 열등의 근원은 '자신'에게 없다. 달이 달이고, 태양이 태양인 것 처럼, 노비가 노비인 이유는 그냥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는 다르다. 빈곤한 자가 빈곤한 이유는 철저하게 자신 때문이다. 심지어 '신'은 평등한 기회를 만들어 주었음에도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 되도록 했다. 이 사회는 필연저긍로 '열등감'을 만들어 냈다.

지구 반대편에서 '빌 게이츠' 자산이 수십조가 늘어나는 것보다 함께 하는 '동료'가 월 100만원 더 버는 것에는 조바심 난다. 열등감이란 비슷한 수준에서 뒤쳐질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사회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평등하고 비슷하다. 고로 우리가 뒤처진 이유는 우리가 열등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칭송의 대상이 된다. 비교대상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사회적 존경과 풍요로움을 동시에 얻게 한다. 단순히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뛰어남을 증명한 결과물이다. 전략적 사고, 근면함, 뛰어난 지적 능력 혹은 인간성과 인관관계 등 어떤 부분에서 남들보다 우월함을 보장한다.

반대로 '빈'이란 '게으름', '우둔함', '고립', '빈곤한 지적능력'을 대변한다. 즉 지금의 위치와 자리는 모두 '스스로의 탓'이 된다. 현대 사회의 발전은 '정보의 속도'를 향상 시켰다. 사회가 진보할수록 우리는 알 필요가 없는 정보를 알게 됐으며 동네에서 뛰어난 이를 만나는 일로 벅찬 개인은 '세계적으로 우월한 이들'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낀다.

'사회'는 태생적으로 '상하좌우'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자원과 위치는 원래 '한정적'이다. 그것을 나눠가져가는 '제로섬 게임'에서 모두가 많이 가져가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나누는가의 문제만 남았을 뿐이다. 둘 이상이 되는 순간, '비교대상'이 생기며 '주관적 잣대'는 만들어진다. 인간 사회는 완전한 '평등'이 불가능하다. 고로 승자와 패자의 싸움에서 과거에는 존재감이 약한 '열등감'과 '불안'이라는 감정이 상대적 다수에게 퍼져 나간다.

원래 사람은 각자 차이가 존재한다. '사람'이라고 정의했으나 모든 이들은 신체적 능력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며, 성장배경과 인지능력, 인종과 언어가 다르다. 이 모든 것을 두고 '같다'고 정의한 순간 모순이 발생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에 '차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비문명인으로 정의한다. 이런 사회에서 낙오되는 자는 '자책'과 '불안'을 감내해야 하는 운명을 받게 된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열면 학창시절 나보다 덜 떨어졌다고 여겼던 이들이 더 행복해 하고 더 맛있는 것을 먹으며 더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뒤쳐졌다는 불안은 증폭되고 사회적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레버리지'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무언가를 자랑삼아 올린다.

불안은 이런 능력주의 사회에 게임 참여자로 발을 들이는 순간 시작한다. 그렇다면 불안은 개인의 탓인가. 사회의 탓인가. 누구의 탓이라는 것을 탓하기 전에,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고,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가 어떻게 할 수 없다면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도 몰아 붙이지 않은 경쟁의 게임에 한 발 벗어나 관전을 하게 되면 결국 뒤쳐짐과 앞섬은 결국 하나의 오락이 되기도 한다.

불안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생각할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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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산책시키기 - 당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10가지 방법
벤 알드리지 지음, 김지연 옮김 / 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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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어린 시절 고생은 사서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연습'이 되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만나지 않으면 좋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될 수 있다면 어릴 때 만나봐야 한다. 뭐든 그렇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두 번 부터는 쉽다.

바나나를 산책 시켜보자.

바나나를 산책시키는 것은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다. 여기에 산책하는 바나나를 쓰다듬어 보라고 주변인에게 요구까지 해보자. 더할 나위없이 이상한 의미다. 사람들은 거절하거나 피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거절 당하거나 실패해 보는 일은 일부러 많이 겪어본다. 겪으면 겪을 수록 담담해진다.

실패에 담담해 질수록 나아갈 수 있다.

실패는 성공을 향하는 카페트 같은 것이다. 즈려 밟고 나아가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밟지 않고 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다.

네모난 피자를 요구하거나 낯선이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이런 행동은 '거절'을 당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고로 거절을 당하면 좋다. 실패하면 성공하는 꽤 승패 없는 목적이다. 무언가를 해도 달성한다. '승낙'을 받아도 좋다. '승낙'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네모난 피자'를 얻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며, 실제 네모난 피자를 먹을 수 있게 된다.

20대 초반 수첩에 적어 두었던 글이 있다.

'평소에 다니지 않는 길로 다녀본다.'

인생이 새로워지는 방법 중 하나다. 너무 당연해서 일고의 가치도 없던 것에 '예외'를 두어 보는 것이다.

'자동차'를 처분했다. 가장 좋은 것은 '평소'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이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수 있다. 아이가 말했다. 빨리 갈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 한걸음 한걸음 꼭꼭 아이의 머릿속에 추억을 심어 놓을 수 있었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손으로 양치질을 하거나,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그렇다. 나이를 쌓아가면 새로운 것들이 사라진다. 실제 새로운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습관처럼 엄청나게 내리는 많은 선택들로 단순해지는 것이다. 행동에 온통 무의식적 흔적이 생긴다. 삶을 무의식에게 맡기고 나니, 의식이라는 녀석은 잡생각을 하느라 고통스러워진다.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구름 모양을 관찰하곤 했다. 바닥에 타일 무늬를 세밀하게 살펴 본 적 있다. 성인이 되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것은 아무 자극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을 할 때, 패달과 핸들을 어떻게 작동하는지, 숟가락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온 신경을 집중했던 기억이 있다. 인생 초보 시절이다. 지금은 아니다. 모두 무의식의 역할이다. 시간이 지나면 노래를 부르거나 라디오도 들으며 운전 할 수 있다.

잡생각이 일상에 끼어들 여지가 많아진다. 습관적으로 밥을 먹고 무의식적으로 샤워를 하며, 생각없이 운전을 한다. 무의식에게 일을 밑기니, 자아는 과거나 미래를 혼자 떠나고 망상을 만들어 걱정을 안고 산다. 얼마 전, 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어떻게 주문해야 하는지 어리버리 했다. 경험 없는 일을 하는 나의 서투름이 어색했다. 나이가 많으면 점차 스스로 익숙한 것들로 채워 나간다. 결국 벗어나지 않는다. 고로 고립된다. 나또한 그렇지 않은가.

난데없이 '새빨간 소지품'을 사거나, 황당하게도 생전 배달주문 해 본 적 없는 샐러드보울을 주문하는 것도 그렇다. 한번의 일탈로 인생은 '무' 경험자에서 '유' 경험자로 엄청난 정체성을 획득한다. 고로 그것이 싫었던 이유를 재확인하거나 그것을 다시 좋아 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넓어진다. 삶이 다채로워진다.

세네카의 말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당신의 패기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일주일 동안 가장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연명하며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생활해보라.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당신이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인지 자문해 보라. 상황이 좋을 때 앞으로 닥쳐올 나쁜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행운의 여신이 상냥하게 구는 동안 우리 영혼은 그녀가 돌변할 때를 대비해 방어벽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이 망하더라도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았다고 하던 '일론 머스크'의 일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자기계발서나 철학서에서 많은 배움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정보로 흘러가버릴지 삶이 될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스토아학파의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지 마라. 몸으로 살아 내라."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최근 손웅정 작가의 글을 보고 삶으로 철학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 것인지를 배웠다.

가끔 혼자 적막한 시간이 올때면 가끔 불평과 불만이 쌓일 때가 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상념에 젖어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긍정'을 권유하며 나는 그렇지 못할 순간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의 마음에 와닿는다.

"소리 내어 불평하지 말라... 혼자 있을 때도 하지 말라"

조용히 스스로 자신을 다잡고 천천히 자신의 철학을 삶으로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은 무의식에 쌓여 생으로 나오고 그것은 삶이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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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창조한 나 세기의 책들 20선, 천년의 지혜 시리즈 6
제임스 앨런 지음, 서진 엮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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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서 한 친구를 알게 됐다. 이름은 'John'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했고 나보다 서너살은 많았다. 국적은 뉴질랜드 였으나 그는 대만계 출신이었다. 키가 작고 생머리에 피부는 하얗고 가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피부는 하얗다기 보다 투명했다.

John은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이곳 저곳을 다녔다. 오클랜드 대학교에 있는 잔디 정원에 누워 낮잠을 잤고 가끔은 바닷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엄청난 '육식꾼'인 나와 반대로 '채식주의자'였고 소식가였다. 한번은 Sal's Pizza에 방문했다. 어퍼퀸스트리트에 위치한 Sal's Pizza는 뉴욕식 피자를 파는 곳이었다. 거기서 존은 피자를 주문했다. '치즈피자 한 조각'과 '물'.

'한 조각?'

한 판은 시켜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John은 일단 한 조각을 먹으라고 했다. 치즈피자 한조각과 제로콜라. 이렇게 주문했다. 꽤 맛있는 식사였다. 배는 적당히 든든했다. 피자를 먹고 '알버트 공원'으로 갔다. 수백 년은 넘어 보이는 나무 그늘로 갔다. 나무 그늘에 앉았다. 적당히 배가 불렀고 존은 나를 보며 말했다.

자신은 언제나 정화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대만계라고 해도 결코 대만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뉴질랜드는 깨끗한 곳이며, 자신의 정화된 몸이 오염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가 말한 '오염'은 일반적 '오염'이 아니었다. '정신적 공해'를 포함한 오염을 말했다. 시간이 나면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눈앞에 지나가는 '상'을 지켜 본다고 했다. 그것을 그저 바라 보라고 했다.

그때 아마 나의 나이가 스물 셋.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존은 지나가는 관경을 붙잡지 말고 따라가지도 말고 그냥 바라보라고 말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면 머리는 정화된다고 했다. 그 뒤로 무슨 말을 한참을 했는데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다.

그런 행위는 자신의 '에너지'를 키운다고 했다. '에너지를 키운다.'

나이가 어렸던 나에게 '에너지'라던지 '상'이라는 말은 '사이비'스러웠다. 자꾸 그러한 주제로 빠지는 '존'에게 말장난을 하며 주제를 바꾸려 했다.

그때 왜 나는 그랬을까. 그의 말을 잘 귀 기울이고 들었어야 했다.

다시 상기시켜 보건데, 그의 말은 이랬다. 눈을 감고 자신의 상을 지켜보면 내부에 있는 에너지는 확신한다.

내부의 에너지, 그것은 자아.

외부의 에너지, 피부 밖의 에너지.

더 나아가 한 겹, 두 겹, 세 겹으로 에너지층이 넓어진다고 했다. 그때 첫번째, 에너지가 '자아'라는 것은 기억이 난다. 이 에너지층을 확산하여 가장 끝에는 '사랑'이라고 했던 부분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몇 겹의 에너지가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크리스천'이었고 그가 설명한 행위는 '메디테이션' 혹은 '마인드풀니스'로 불리는 명상이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사람의 감정에는 차원이 존재한다. 1차원, 2차원, 3차원처럼 물리학에서 말하는 차원이 아니라 각 감정은 저마다 수준이 다르다. '제임스 앨런'의 '스스로 창조한 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마음이 걱정이라는 낮은 차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다시 마음을 끌고 와 평화와 힘의 영역으로 자신을 다시 세우십시오.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속에서 빛을 발하는 명확한 비전과 완전한 판단력으로 올바른 길과 그것으로부터 얻게 될 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목을 보는데 벌써 20년 가까이 된 인연이 떠올랐다. 걱정과 염려, 불안, 공포 이것은 차원 낮은 감정이다. 꾸준히 노력을 통해 우리는 자아의 차원을 높여야 한다. 이렇게 높아진 차원은 일시적으로 회기본능이 있어, 언제든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 디폴트값이 변경되기 전까지 꾸준한 노력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의 차원은 자꾸 저차원으로 돌아간다. 꾸준한 반복과 정화를 통해 우리가 고차원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다면 앞서 말한 '회기본능'은 우리가 '저차원'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떠받는 요긴한 무기로 변신한다.

나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환경'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환경은 '외부'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도 비몰아치는 환경과 포근하고 따뜻한 환경이 존재한다. 같은 환경에서 어째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 남는가. 어쩌면 내부의 환경에 차이가 있어서는 아닐까. 쉽게 변화하는 내면의 노예가 되면 다른 사람들과 바깥 세계에 휘둘리게 된다. 확신에 찬 발걸음은 어떤 성취를 이루게 하고 어떤 성장을 가능하게하는 초월적인 능력이다.

누가 나를 만드는가. 밖에서는 외부적 환경이 있다면 안에서는 누구인가. 회사도 51%의 주식을 소유하면 지배력이 생긴다. 내가 나를 지배 한다면, 환경은 1%만 있어도 충분히 내편이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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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불안을 이기는 작은 습관들 - 우울과 불안을 끌어안는 심리학
임아영 지음 / 초록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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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무소유'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누군가는 장미를 보며, '저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돋았구나'하고

누군가는 장미를 보며, '저 날카로운 가시에도 장미가 피는구나'한단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아닐지라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것을 본다는 것.

그냥 해골 바가지라도 '원효대사'에게 '깨달음의 날'을 줬고 누군가에게 '재수없는 날'을 줬을지 모른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빌게이츠의 말에 따르면, '삶은 원래 불공평하다. 그것을 받아 들어야 한다.' 그렇다. 시작은 '받아들임'에서 부터다. 인류 역사상, 단 한순간도 그 어떤 장소에서도 '평등'은 존재한 적 없다. 불가능한 것을 좆으면 자괴감만 커저간다.

불평과 불만을 쌓는 것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카드 게임의 묘미는 블러핑으로 좋은 패의 상대를 이겨 냈을 때다. 단순히 운에 좌우되는 게 카드 놀이라면 참여자의 역할이란 관찰 밖에 없다.

왜 사람들은 카드 놀이를 하는가. 그것은 거기에 불확실성이 있으며 우리에게 '좋은 카드'가 올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카드'만 선택적으로 얻을 수는 없다. 나쁜 카드도 나올 수가 있다. 우리는 그 법칙을 이해하고 카드게임에 참여한다. 고로 나쁜 카드가 나왔을 때는 그냥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가 가난해서, 학력이 좋지 않아서, 남자라서, 아시아인이라서, 21세기에 태어나서... 크기를 막론하고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중해서는 '열등감'만 쌓인다.

'하루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실제 하루살이가 하루만 사는 것은 아니다. 대략 2~3일 정도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하루살이가 하루만 살거나 2~3일만 살거나 결과적으로 하루살이는 계절을 모르고 죽는다. 낮과 밤은 알 수 있으나, 그들은 계절을 모른다.

우리도 그렇다. 알고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다만 대체로 우주가 이루고 있는 법칙은 크기와 상관없이 적용된다.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러첨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예외가 있다 해도 예외가 법칙이 될수는 없다. 작은 예외로 보편적 법칙을 모르쇠 할 수는 없다. 밤낮이 있다는 것은 여름과 겨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좋음과 나쁨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차가움과 뜨거움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전체를 보면 밤은 영원하지 않고 겨울은 영원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낮과 봄도 영원하지 않다.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점묘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은 작은 점을 찍어 전체의 그림을 완성한다. 우리가 이 그림에 앉은 무당벌레라면 고작 보이는 것은 내가 앉은 작은 점과 양 옆에 놓여진 작은 점들 뿐이다. 다만 조금만 떨어져 바라보면 이 그림에는 다양한 색깔이 존재하고 점의 의미는 전체를 나타내는 작은 조각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있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이란 '가까이에서 보기에는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너무 작은 것에 연연해하면 결국 전체를 놓친다. 이것은 불안을 만들어낸다. 검정색 그리고 그 뒤에 검정색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검정색.

그러나 그 검정색 점들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자면 전체 그림은 눈사람의 어느 부분일지 모른다.

'임아영 작가'의 '우울과 불안을 이기는 작은 습관들'에서는 '초코파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사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정' 문화는 우리를 불안으로 몰았다.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 들어야 하는 우리 문화는 상대의 기분 알아 맞추기식으로 발전했다. 상사의 기분을 알아 맞추고 배우자나 자녀, 부모의 기분을 알아 맞춘다. 이것은 좋게 포장하기에 '정문화'이고 나쁘게 보기에 '눈치문화'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는 모호한 소통법으로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도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불안해하며 상대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립과 외로움도 함께 느낀다. 결과적으로 모두는 비슷하다. 임아양 작가의 글을 보건데 우리는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으면 모두 그렇지 않은 척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그렇다. 고로 비극에서도 희극을 찾고, 불안 속에서 최소 고립될 필요는 없는 듯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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