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를 걷는 여자
거칠부 지음 / 더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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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적을 좋아한다. 하지만 많이 읽지는 못하는 편이다. 대략 10권을 읽으면 1권 정도가 여행 서적이다. 평균의 사람보다 독서량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보니, 실제 남들보다 여행서적을 많이 읽는 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책은 기행문이다. 기행문은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을 적는 글로 대체로 일기체이거나 편지형식, 수필, 보고 형식 따위로 쓴다고 한다.

이 책은 '일기체'로 보면 된다. 대체적인 글이 보고, 듣고, 겪은 일에 대해 직관적인 시선으로 쓴다. 보통 기행문은 수필의 형식이 많아서 읽다보면, 저자의 전반적인 생각이나 인생에 대해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시작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그 시점이 여행이다. 시점의 변화는 거의 없이 여행 시작과 끝으로 마무리 된다. 여행에서 있었던 객관적인 사실들과 본 것, 들은 것들을 위주로 쓰여지다 보니, 아쉬운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있다.

작가가 여행 전에 있던 전반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나 자신의 철학이 담겨였지 않기 때문에, 나는 책을 읽으면서 '거칠부'라는 이름의 검색어를 여러 번이나 확인했다. 블로그의 글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나는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나 또한 '행동파'이다. 성격이 매우 급하기 때문에, 결정을 내린 것을 지금 바로 하지 않으면 몹시 조급해하는 성격이다. 이 점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바로 하게 해주지만, '조금 더 고민해 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를 같이 동반하기도 한다.

그녀는 17년을 다닌 회사를 퇴직하고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간 모와둔 돈으로 여행을 다니며 살고 있는 듯 하다. 내가 가장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다. 경제적인 부분이 해결되야 하지 않을까하는... 히말라야를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시절, TV에서 고산을 등반하는 탐험가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의 직업, 즉 본업이 탐험가라고 생각을 막연히 했지만, 그들이 어떤 형태로 재화를 발생시키는지 궁금해 본 적이 없다. 어른이 되고 다시 보게 된, 그들에 대한 첫 번째 궁금증이 너무나 세속적이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 진다.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하고 싶을 때 하지 못하면, 할 수 있을 때 하지 못한다.'

머리가 띵~ 해진다. 나는 왜 모든 행위를 '돈'에 연관 시켰을까?

내가 움직이는 이유도 모두 다 '돈' 때

문 이라면, '마음'을 따르는 이들은 얼마나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고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이든다.

분명 그러한 이들은 자존감이 남 다를 것이다.

'산을 왜 오르나요?'

라는 질문에 '돈 때문이요.' 보다는 '오르고 싶어서요'가 훨씬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지하에 있는 공중 화장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공중 화장실에는 엄청나게 많은 파리가 바글 바글 했다. 평소 그냥 '파리가 날리네?'하고 지나가는데 어느날은 가만히 생각이 들었다.

'쟤들은 할 일도 없는데, 가만이 있으면 되지, 뭐하러 의미 없이 빙글 빙글 돌고 있지?'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철학적인 생각으로 넘어갔다.

'의미 없이....?'

내가 말하는 의미란 무엇일까?

어릴 때는 시골에서 달다보니, 곤충이나 미물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때마다, 가만히 있는 애들은 극히 드물었다. 꼭 내가 지켜보고 있거나 위협을 주거나 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꾸준하게 움직였다. 그냥 아무 의유없이 앞으로 행진하는 개미들이나, 이 나무 저 나무를 의미 없이 뛰어다니는 다람쥐, 큰 이유를 모르겠으나 아침마다 지저귀는 새들...

그들의 행동을 움직이는 '의미'가 뭘까?

'왜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돈'일까?

아무 의미 없이 행동하면 안되는 것일가? 꼭 목적이나 방향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아침에 눈뜨고 아무 의미없이 서울에서 전주나 충주로 가는 것은 안될까?

아무 의미 없이 하염없이 걷거나 뛰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정의하는 '의미'라는 것은 뭐지? 인생에서 의미를 찾는 다는 것은 참 고상한 것 같지만 사실 부질 없는 것이다. 같은 자리를 빙글 빙글 돌고 있던 파리나, 나무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다람쥐나 '나'나 똑같은 삶과 생명을 스스로 부여 받고 모두가 객관적인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인간만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들 처럼 단백질을 포함한 수많은 고분자 화합물의 조합일 뿐이다. 조금 더 복잡한 형태의 조합이 덜 복잡한 조합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 없다. 시선의 확대가 지구와 우주에 다달으면 우리는 모두 한낫 미물에 속할지도 모르니까.


아기를 키우다보니, '정적'이라는 시간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쌍둥이들은 삶의 축복이지만, 어쩔때는 정신이 없게 한다. 항상 차를 타면, 습관적으로 음악을 켰었다. 나의 귀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음이 채워지는 일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느 덧, 정적의 시간이 소중해졌다. 아무런 소음이 없는 정적의 시간을 만나면,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어진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마저 소음이 될 정도로 머리 속에 아무것도 집어 넣고 싶지 않을 때, 소리를 없애는 것은 그나마 도움이 된다.

책의 표현은 참 시적이다. 침묵을 경청한다.

이는 명상법에 있는 명상의 방법 중 하나 이기도 하다. 가만히 침묵을 경청하는 행위... 일상에서 언제나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쉽지 않다.

뉴질랜드에서 크라이스트 처치로, 수 시간을 차를 타고 이동하면 퀸스타운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 수시간을 버스로 이동하다보면, 자연의 경의로움이 저절로 느껴진다. 문명화된 국가 중 인간의 손의 거의 닫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장소를 갖고 있는 나라가 뉴질랜드다. 그 나라는 어디서나 '무음'을 들을 수 있다. 완벽한 자연의 소리가 당시엔 지루 했다.

항상 음악을 키지 않고는 안되는 우리는 왜 이토록 시간에 강박을 느끼고 있을까?

아무 것도 안하는 일을 굳이 음악이라도 들으려는 행위는 우리가 우리 인생에 강박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무 목적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살아가는 것.

삶을 부여 받은 생명체로써, 전혀 부끄럽지 않고 잘못되지도 않은 일이다.


유학할 때, 가장 친한 친구와 아르바이트를 하러 버스를 타고 이동한 적이 있다. 이동 중 잠에 들었기 때문에 깨어난 곳은 도통 모르는 곳이었고, 주머니 사정이 딱했기 때문에, 우리는 걸어서 시내로 이동했다.

어차피 의미를 두고 있던 두고 있지 않던, 우리가 해는 행동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계획이나 목표를 도달하기도 하고 도달하지 못하기도 한다. 잘못된 목적지에 도착하기위해 버스에서 잠든 것도 아니고, 걸어가기 위해서 주머니 속을 비워 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목적을 두고 행동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방향은 우리가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 서쪽으로 세차게 흐르는 강물에 살면서, 동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헤엄치고 싶다면, 아마도 우리는 세찬 강물의 강도만큼이나 더 강한 힘을 들여야 겨우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세찬 강물의 방향이 내가 가고자하는 방향과 같다면,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 까지는 강물의 도움을 받고 수배, 수십배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어쩌면 아무 행위를 하지 않고도 이동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강박적으로 갖고있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목적지라는 곳에는 과연 '무.엇.'이 있다고 기대하기에 그토록 목숨을 걸까? 고작해야 더 큰 먹이감이나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고 느끼겠지만, 세상의 강물이 이끈 곳에 더 큰 먹이와 좋은 장소가 있을 수도 있다.

무지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그냥 내가 모르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겠다고 발버둥 칠 뿐이다. 세상이 흘려다 주는데로 흘러가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빗물이 하늘에서 아래로 흐르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는 것 자체 모순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도 바람을 견디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흔들 거리는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그것을 버텨내는 것이 곧 '승리'일 것 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의미'에 따르면 과연 그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작가는 아마도 엄청나게 많은 광경을 보면서 히말라야를 걸었을 것이다. 처음 갔을 때 보던 광경과 두번째 갔을 때 광경이 모두 같다고 우리가 모두 다 보았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녀의 책에 있는 이 구절 처럼 이미 걸었던 길이라도, 다시 걷거나 반대로 걸으면 완전히 새로운 길이 된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내일과 오늘이 같을 것이라고 느껴지는 일상에서 우리는 똑같은 하루의 반복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의미 없는 삶'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결국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똑 같은 삶'이란 없다. 같아 보이지만, 항상 다르고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세상에 단정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어떤 길이 유독 힘들 거나 편한 건 길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구절 역시 참으로 되뇌이게 된다.

'길의 문제가 아니다.'

'길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날, 공항을 가는데, 차도 막히고 멀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타고 있는 자가용을 이리저리 운전하다보니 피곤함도 쌓이는 것 같았다. 온갖 불만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어느 날인가, 자동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날이 온 적이 있다. 엄청나게 큰 트렁크 가방과 백팩을 매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 전혀 일면식도 없는 타인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앉아 놓고 서로 창문을 보며 외면하는 일... 더 고된 일이 많다.

그 뒤로부터 차로 이동하는 일이 고된 일이라 불평이 들때는 버스를 타고 가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이동할 수 있는 자동차가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느껴진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은 그렇다. 우리가 불만하고 있는 일들은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삶에 비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삶은 항상 지금보다 낫은 삶이다. 당연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인생 전체가 불행으로 뒤덮혀진다. 얼마나 풍족하던과 관계없이 우리는 매순간 불행하고 불만스러운 삶을 살게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속담은 어린시절, 막연하게 들렸다.

하지만, 붓따는 왕자의 신분을 내려놓고 일부러 고행길을 선택했다. 인생은 지금을 상대적으로 표현한다. 때문에 지금을 좋게 평가하기 위해서 더 나쁜 비교대상이 필요하다.

'그때에 비하면 얼마나 천국인가'를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필요한 고생을 어느정도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소모된 기억에 대해서 반복으로 상기 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히말라야를 걷는 것은 고행이다. 아마도 그녀가 한국에서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그 고난과 역경에 비할 수 있는 고행의 기억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행복한 천국을 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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