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낸 시간만큼 오래 곱씹었을, 그만큼 조심스러웠을 비밀의 누설이 속도감 있게 숨가쁘게 읽힌다는 건 무슨 아이러니일까. 하나의 물줄기만을 최대한 집요하게 들여다본 그는 지겨울만큼 느린 그 물의 흐름이 정지되어 썩어가는 건 아닌지 상념에 휩싸였다. 너무 오래 지켜본 후 결국 먼지를 훌훌 털면서 잠시 일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나에게 자신이 본 바를 전했다. 사실의 조각이기도, 오해이기도, 마모된 거짓이기도, 반듯한 이해이기도 한 이야기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야기의 마침표를 만나고 나는 마치 물에 빠진 기분이란 걸 깨달았지만 젖은 채 우두커니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물기가 마르는 동안 생각했다. 미쳐버릴 정도로 느렸다고 들었던 물줄기가 나에겐 왜 폭포수가 된건지를. 그 비밀은 뭔지를. 멀리 가지 않고 주위를 맴돌 것이다. 결국은 바삭하게 말라버린 몸으로도 결코 잊지 못하는, 내가 목격한 그의 표정과 풀풀 날리는 먼지의 정체에 대해서를. 내가 여전히 물줄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파편적으로 남은 기억을 만지작거리면서 또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 건 분명하다는 믿음을. 









구술 문학의 문체를 지닌 영화감독 샹탈 아케르만의 자전적 소설. 

인터뷰이의 자리를 서로 경쟁적으로 차지하려고 드는 여러 여자들의 목소리는 거미줄처럼 직조된다. 아니 그 거미줄안에 모두 갇혀있는 꼴이다. 자리 바꿔보기는 너무 뻔하고 그 한계가 명확해서 지루하기까지 한데 샹탈의 문장은 끊김으로서 리듬을 만들고 읽어내게 한다. 한 문장 안에서 발생하는 기이한 읽기의 중단은 삶의 고비마다 발생하는 단절과 닮았다. 단절 속에서 서로를 닮아가는 가족의 모습은 너무 괴기하고 평범하다. 


한 자리에 앉아 글을 쓰기보다는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만들었던 샹탈 아케르만의 첫 소설은 짧고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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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 안에서 조용하게 일어나는 반항으로 인해 만들어진 확신의 흔적이다. 어제보다 선명하다 여겼다가 쓱쓱 없애기 위한 의미 없어보이는 반복이다. 습관처럼 읽고 쓰는 건 흔적을 만들기 위한 방편 중 하나일 뿐이다. 산책 중의 우연한 만남처럼, 오늘의 커피를 마시면서 이어지는 헝클어진 생각처럼. 나만 아는 수치심을 지워나가기 위한 멀고 먼 길이다. 형체 없는 믿음을 끌어안는 일은 손톱을 물어뜯는 막막함과 같다.  


한 사람을 봤다. 삶은 언제나 다양한 종류의 불안으로 가득하지만 어떤 종류의 두려움은 스스로 없앨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안도했다. 그건 어떤 거창한 해방도 대단한 풍요로움도 아니라고 했다. 그저 두려움의 일부를 없애나가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인생을 긍정하는 방향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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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만에 잠잠해진 바다가 낯선 아침이었다. 잦아든 파도가 따뜻함의 징표가 아니었다. 나에게 가까운 바닷물은 꽁꽁 언 하얀 얼굴이었다. 밤새 식었던 방안의 온기는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차갑게 돌아선 이가 돌아보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란 걸 아는 마음 한구석을 무용하게 헤집어보는 시간을 보냈다. 짠 바닷물이 얼 정도로 추운 날이다. 어제까지 찢어질 듯 펄럭이던 깃발도 얼어버린 듯 움직임이 없다. 요란하고 소란했던 바람소리와 파도의 난리법석이 끝난 후엔 얼어붙은 고요가 도착한 것이다. 온기일 줄 알았는데 잔인한 차가움이었다. 차가운 바닥에 미동 없이 누워있는 길고양이의 죽은 몸을 본 오늘 밤 밝은 달 주위에서도 반짝이는 많은 별들이 내 눈에 박혔다. 차마 보지 못한 얼굴, 다시는 보지 못할 것들은 결국 별이 되길 바란다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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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온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아우성은 나에게 소문일 뿐이었다. 꾹꾹 찍히는 눈 위의 발자국도, 눈오리도, 거대하고 괴이한 눈사람들도 모두 과거의 기억에 불과했다. 눈이 오면 고요에 휩싸였던 풍경을 아직은 잊지 않았다. 


눈이 오지 않아도 적막한 공간에서 호수같이 고요한 바다를 내내 바라본다. 분명한 다른, 우유를 부어놓은 것 같은 아침바다를 봤다. 서늘하게 쨍한 파란빛이었던 바닷물이 파스텔톤의 하늘과 색을 맞춘 듯 하나로 보였다. 구름을 바닷물에 담가놓은 듯 부드러워진 바다는 점점 부옇게 부옇게 하늘과 닮아갔다. 그리고 솜털같은 눈이 바람과 함께 창문 틈으로 날아들었다. 바람을 타는 눈의 양이 점점 늘어 거대한 스노우볼 형상이었다. 내리는 눈이 아닌 날리는 눈을 목격하며 즐겼던 건 순간이었다. 스노우볼을 잠깐 흔들어 내려놓았을 때처럼, 짧은 축제는 금세 끝이났다. 흔적을 남기지 않은 첫눈의 축제. 목격하지 못한 사람은 믿지 않을 소문같은 눈을 봤다. 

눈이 귀한 바다에서 나는 눈을 기다렸던가. 한국이지만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아 타국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즐기고 있었던가. 어쩌면 오늘의 짧은 만남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을 비밀이 될지도 모르는 일. 감쪽같이 고요한 스노우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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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젊은 작가상 대상을 받은 이미상 작가의 글은 소설집에서 먼저 읽었지만 인터뷰가 궁금해서 샀다. 인터뷰어 '이소'의 질문이 정말 좋았고 좋은 질문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이미상 작가의 말이 좋았다. 


이야기의 강렬함에 비해 쉽사리 외워지지 않아 '모험'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제목이었는데 닮은 네모들이 

굴러가고 있는 모양으로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젠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과연 모난 부분이 있고 덜커덩 굴러가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기차의 형상인 거 같아 내 마음에도 들었다. 


인터뷰 글의 지루한 질문과 뻔한 답을 싫어하는 나에게 이 인터뷰는 좋고 또 좋았다. 좋다는 표현을 반복하는 건 게으른 일로 보여 싫어하지만 내가 써보니 확실해지는 마음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글쓴이인 나에게만큼은. 

그래서 다들 좋음을 전시하겠지. 지겨울만큼





이미상 작가의 단편들 중 '여자가 지하철 할 때' 만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역시 전부를 좋아할 순 없다.    

홈스쿨링으로 소설 공부하고 썼다는 이미상 작가만의 경쾌한 문장으로 이어지다 뭔가 서늘해지는 이야기를 요즘 가장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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