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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
정희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평점 :
밤은 캄캄하고 근방의 개는 컹컹 짖고 깜박이는 붉은 신호는 규칙적이다.
어떤 종류의 소음은 다가왔다 멀어진다.
소통을 원한 적이 있었나?
아니.
전혀?
아마도. (어쩌면 지워진 기억) 많은 종류의 인연이 있었고 그중 소수가 남았으니.
그중 사라진 인연들이 남긴 흔적을 떠올려보니
권력을 잡고 있을 땐 나보다 어린 학생에게 쓸데없는 말을 내뱉었고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친구와는 서서히 멀어졌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윗사람의 지시는 걸러서 듣다가 탈출했다.
이런 관계들은 결국 한쪽으로 흐르다 막다른 길을 만나는 물줄기의 꼴이다.
순간 예민하지만 대체로 둔감하고
억울한 상황을 맞닥뜨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니 빨리 잊고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해도 품고 있는 생각은 확고한 형체로 존재하고
상대를 설득하고 싶은 의지가 없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었다.
도리어 너무 차가운 이기적인 인간인가 생각할 때가 많은 나.
타인과의 사이에 내가 좀 엄격한 선을 그어놓았던 걸까
미련은 없지만 의문은 남았던 과거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세월호 언설’에 대한 작가의 의문은 오래 곱씹어 볼 것이다.
“잊지 않겠다”라고 유가족 앞에서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사회적으로 충분히 치유받지 못한 사건이기에 내 안의 어떤 선언처럼 품고 있던 말이었다.
잊지 못해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폭력일 수도 있는 말.
결국 나는 잊을 것이다. 기억의 힘이 있다는 사실까지 나는 잊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기억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 나는 그편에 서고 싶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고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내가 쓰는 가면과 폭력성을 아는 채로.
표지 그림은 체리로 보인다. 한 눈에서 나온 꽃자루 중 두 개가 나란히 열매를 맺었다.
관계를 맺은 타인과 나의 관계를 대입해 볼 때 나는 침묵하는 쪽이기도 하고 떠드는 쪽이기도 하다.
종국에는 더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한다. 우리의 공통점은 애초에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지만 가끔은 애정으로 우리가 체리처럼 퍽 닮았다고 오해하기도 하니 우스운 일이다.
오해의 간극이 팽팽한 긴장 속에 유지된다면 우리는 멀어지지 않겠지.
완독한 책을 덮고 멀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관계들에 집중할 힘을 움켜쥔 기분이라면 믿어줄래?
책 띠지에 정희진의 공부 오디오매거진 큐알코드가 있다. 구독을 추천한다.
2023년과 2024년에는 매달 올라오는 내용을 최소 두 번씩 들었다.
산책하면서 한번, 책상 앞에 앉아 메모하면서 한번.
2년 동안 무리하셨던 선생님은 2025년 한해를 쉬셨다.
발붙이고 있는 현실이 푹푹 꺼지는 상황에서, 확실한 미래는 없는 암울한 내 안의 고요 속에서
매달 지난해와 지지난해 같은 달의 공부 내용을 다시 들었다.
뒤집힌 현실에 헛웃음이 나왔고 기쁘다가 슬펐고 여전히 유효한 난제들과 함께 지속되는 일상을 통과했다.
선생님, 구독자들과의 소통이었다. 결국 나를 알게 되었다.
고작 나를 알게 되었을 뿐인데 그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