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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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만들어질 당시 참여한 저자가 영화보다 풍부하게 쓴 마르탱 게르라는 사람의 실화.   

1540년대 남서프랑스 랑그독 지방에서 아내와 가족을 떠난 바스크 족 출신의 마르탱 게르.

몇 년 후 1556년 자신을 마르탱 게르라고 칭하는 자가 돌아온다. 그는 아내와 함께 딸까지 낳고 살아가다가, 작은 아버지 피에르 게르와 재산 문제로 분쟁을 겪은 후 가짜 마르탱 게르라는 이유로 소송을 당한다. 당시의 소송 형태는 민사와 형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것인지 아내와 검사가 청구인이 되어 마르탱 게르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하였는데, 결국 마르탱 게르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툴루즈 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을 맡았던 판사 장 드 코라스는 이 사건에 대해 <잊을  수 없는 판결>(Arrest Memorable)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크게 히트를 친다. 코라스는 그 책에서 자신은 항소심 재판에서 여러 증거들을 종합하여 본 결과 무죄로 심증이 기울었는데, 극적으로 진짜 마르탱 게르가 의족을 하고 나타나 결국 재판을 받는 마르탱 게르에게 유죄를 선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징벌은 절름발이의 형태를 하고 오지만 가장 민첩한 범죄자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호라티우스), 절름발이가 된 진짜 마르탱 게르가 나타나 가짜 마르탱 게르를 징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통쾌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 진짜 마르탱 게르는 아내를 버리고 떠난 무책임한 사람이었지만 가짜 마르탱 게르는 아내에게 훨씬 다정한 사람이어서, 아내는 가짜 마르탱 게르를 남편으로서 받아들이고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그를 돌보았던 것이다. 재판에서는 그녀를 '가짜에게 속은 순진한 여자'로 보아 처벌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아내인 그녀가 속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한 기록자들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비극인 결말이다.

저자는 이를 '창안된 결혼'이라고 칭한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규범이 되던 가톨릭교에서 정한 결혼의 교리를 넘어는 것이어서(중혼일 수도 있으므로), 저자는 이들 부부가 신교를 믿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없이 신에게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신교 신자인 장 드 코라스 판사도 이들에게 동정심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그 후 장 드 코라스 판사는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 직후 체포되어 군중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에는 주목되지 않았으나 저자가 특히 주목하여 주의깊게 서술한 부분은 아내 베르트랑드의 독립적인 성격과 결혼생활, 그리고 소송에서의 이중 게임이다. 그녀는 원고로서 마르탱 게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사실은 작은 시아버지의 종용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소송을 제기했다는 진술을 하였다(이로써 결혼생활 동안에는 마르탱 게르가 진짜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을 호소하여 남편이 진짜가 아닐 경우 자신의 안전망을 확보하면서도, 소송에서의 태도로 가짜 마르탱 게르를 도울 수 있었다). 

또 흥미로웠던 것은 재판 부분이다. 150명이나 되는 증인들을 불러 꼼꼼하게 증언을 듣고, 증언의 신빙성을 분석하여 판단을 내리려 하였다(결과적으로는 진짜 마르탱 게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잘못된 판단이었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한번 더 확인하게 되었다. 아직 고문이 심문방법의 하나로서 남아 있던 시절이었지만, 고문은 생각만큼 '자유롭게' 사용되지는 않았고, 그것이 사용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요건이 필요했다. 이 사건에서도 고문은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이례적일 수도 있는 사형이라는 형량. 혹시, 만에 하나라도 정말 피고가 마르탱 게르였다면. 장 드 코라스가 자신의 책 수정판에서 마르탱 게르가 사형집행장으로 가기 전에 범행을 자백했다는 진술을 추가했다고 하나, 그 부분을 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몽테뉴는 이 재판을 실제로 보고 재판에서 밝혀지는 진실의 불확실성과 불완전성, 그럼에도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의 대담함에 대해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500년대 구교와 신교의 갈등 양상(제네바에서는 신교가 우세했고, 프랑스에서도 점차 신교가 지지를 얻어가던 시기였다고 한다), 당시 농민들의 삶(가제유 계약 등), 바스크 족과 프랑스 랑그독 지방 농민들의 재산상속 형태의 차이, 상속토지 매각 방식, 조세제도, 영주와 농민들의 관계, 결혼 풍습, 교회법이 규율하였던 혼인(당시 구교에서는 남편이 부재한 경우 그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아내가 자유롭게 재혼할 수 없다고 주장-유스티니아누스 법. 당시 관습법은 당사자들의 동의가 있다면 혼인이 성립한다는 것이나, 1564년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혼인 예고와 본당 사제의 결혼 주관을 요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기존의 결혼풍습이 지속되었다. 한편 신교 도시 제네바에서는 더 이상 결혼이 성사가 아니었고 이혼과 재혼에 대한 요건도 완화되어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 아내에 대한 상속관습,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풍습에 대한 구교와 신교의 태도, (사진도 없던 시절) 사람들의 기억의 불완전함, 150명이나 되는 증인이 나섰지만 저마다 증언이 달랐던 재판에서 판단을 내린 방식(로마법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었고, 변호사의 조언을 얻을 권리가 있었다), 아이가 적출인지 서출인지 결정하는 방식(아마도 상속에서 차이가 있는 듯), 공증인, 혼인계약서, 지참금 제도 등의 내용들이 많지 않은 분량의 이 책에 빽빽하게 압축되어 서술되어 있다.    

 

 

 

그때 "기적처럼" 나무 의족의 사나이가 법정에 나타났다. 그것은 피에르 게르를 보호하고 장 드 코라스에게 그가 틀렸음을 보여 주기 위한 섭리이자 신의 은총이이었다. 코라스는 2년 전 하드리아누스와 에픽테투스 사이의 대화를 번역하면서 거짓말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에픽테투스: 다른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입니다.
판사는 "우리들의 시대는 불행하게도 어떤 지위에 있든 자신의 거짓말, 구실, 위선을 가장 잘 그럴듯하게 꾸밀 줄 아는 사람이 흔히 가장 존경받는 시대이지만, 사실상 사람들 사이에 속이고 숨기는 것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고 주석을 달았다.

변호사, 관리, 판사 지망자들은 모두 16세기에 새로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라면 다 그렇듯이 자기 형성(self-fashioning)-스티븐 그린블랫의 용어를 빌자면-즉 자신들의 출세를 도운 화법, 예절, 태도의 연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디에서 자기 형성이 끝나고 거짓이 시작되는 것일까? 몽테뉴가 자책이 담긴 에세이에서 이 문제를 독자들에게 제기하기 오래 전에 팡세트의 창안의 능력이 판사들에게 그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몽테뉴는 진실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 이성이 얼마나 불확실한 도구인지를 강조한다. "진실과 거짓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 우리는 하나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본다."...분별없이 확신하기보다는 주저하는 것이, 열 살에 박사로 자처하기보다는 나이 예순에 견습공이 되는 것이 낫다.

해명할 수도,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소송에 말려들었을 때 소송당사자들에게 100년 후에 다시 와 재판을 받으라고 명령한 아레오파고스 회의(고대 아테네 귀족정 시기 핵심 기관)의 재판관들보다 더 자유롭고 솔직하게 다음과 같은 형태의 판결문을 용인하도록 하자. "법정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몽테뉴)
- 우리의 추론이 불완전하다는 것, 상상력이 우리를 압도하기도 한다는 것. 당연한 판결만이 존재해야 하며 그 이상 나아가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나 같은 괴물, 나보다 더 불가사이한 것을 본 적이 없다. ...... 나 자신에 대해 숙고하고 알면 알수록 더욱 나의 기형성에 놀라게 되고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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