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1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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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매컬로의 카이사르 1권 가제본..

 

 

 

 

 

 

 

유명한 명언이 많긴하지만.. 주사위는 던져 졌다 가 기억에 남는다.

제 4부 카이사르의 여자들 이후의 콜린 매컬로의 카이사르 1 ..

 

카이사르 1 목차는..

- 브리타나아 - 기원전 54년 11월.

- 장발의 갈리아 (갈리아 코마타) - 기원전 54년 12월 부터 기원전 53년 11월까지.

- 로마 - 기원전 52년 1월부터 4월까지.

 

카이사르가 주요 부대들을 이끌고 브리타나아에 가 있는 동안에는 꼭 긴급한 전갈만 그리고 보내라는 명령이 있었다.

심지어 원로원 명령서도 카이사르가 돌아올  때까지 갈리아 본토의 이티우스 항에서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로마의 일인자 이자 카이사르의 사위 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편지였다.

 

 

 

 

 

 

 

 

나는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  이것은 내 존업이 시켜는 일이다. 지난해에 이 미개한 땅의 미개한

민족은 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완전히 물리쳤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카이사르를 이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도 카이사르를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려는 일념으로 이곳에 돌아왔다.  나는 장발의 갈리아에

돌아가서도 그것의 모든 이들이 나를 - 그리고 로마를 - 인정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왜냐면 내가 로마이니까. 하지만 나보다 여섯 살이 많은 내 사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로마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착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여, 문단속 잘하시오. 당신이 로마의 일인자로 남아 있을 기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카이사르가 간다.

 

카이사르는 자리에 앉아다. 그리고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8월. 9월에 쓴 편지를 펼쳤다.

편지에는 시인 카툴루스가 죽었고, 율리아가 아이를 낳고 죽었다는 소식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카이사르.

하지만, 장비를 절대 소홀히 하지마 라고 이른다. 카시족의 창이 날아올 때 자네를 지켜누는 건 그것뿐이니까.

 

카이사르는 성벽의 양옆을 동시에 공격했다. 군단병들은 두 발로, 아이두이족은 말을 타고 함성을 내지르며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카시족은 사방으로 달아났지만 대부분 붙잡혀 죽었다. 이제 카이사르가 성채의 주인이었다.

막대한 양의 식량 역시 그의 차지였다. 트리노반테스족에게 빌린 곡식을 갚고 브리타니아를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 군대를 먹이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함께 왔던 트리노반테스족은 기쁜 마음으로 말을 몰고 떠났다.

 

카이사르의 배가 이티우스 항에 도착하자 동이 텄고, 그 뒤로 함대가 여전히 가지런하게 진영을 이루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운이 돌아왔다. 단 한 명의 사람도, 단 한 마리의 가축도, 단 한 대의 대포도 넵투누스에게 희생되지 않았다.

 

 

 

 

 

 

 

장발의 갈리아(갈리아 코마타) - 기원전 54년 12월부터 기원전 53년 11월까지.

 

카이사르는 아내의 편지에 율리아가 죽자 어머님이 거의 두 달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혼자 방에 계시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카이사르는 이렇게 끝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율리아 없이 살아간다는건 있을

수없는 일이라고. 모리니족은 주둔지을 세우고 있던 로마군을 덮쳤고, 카이사르는 자칫하면 패할 뻔했다.

모리니족이 좀더 뛰어난 지휘관을 두었더라면 장발의 갈리아 전쟁은 거기서 끝나고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도

그때 전부 죽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리니족은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고 자기네 떡갈나무 숲으로 철수했다.

카이사르가 사태를 추수르고 적의 칼에 쓰러진 전사자들을 화장했을즈음 그는 그만의 차갑고 냉철한 방식으로

맹렬히 분노했다. 카이사르는 후퇴하지 않기로 했다.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모리니족 영토의 연안에 자리한 해수 소택지까지 전진할 작정이었다.

모리니족은 네메르 떡갈나무를 가장 신성시 했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그들의 가장 강한 떡갈나무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자고 병사들에게 말했다. 소문은 퍼져나갔다.

도대체 저들은 누구기에 나무들을 죽이고도 밤에 자고 낮에 웃을 수 있을까?

카이사르는 전쟁을 적의 머릿속에서 치른다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매료되었고, 전쟁을 벌이는 새로운 방식을 깨달았다.

 

카이사르가 새로 지은 석고 주택에 아특하게 들어앉은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카르누테스족 원로들이

드루이드들의 충동질에 넘어가 타스게티우스 왕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보통때 같으면 우려할 일이 아니겠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크게 달랐다.

타스게티우스를 새왕으로 옹립하기까지 카이사르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날이면 날마다 네르비족은 공격을 감해해 도랑에 나뭇가지를 채우고 방벽을 창으로 찍으며 올라왔고,

날이면 날마다 9군단은 적군을 물리치며 갈고리로 도랑의 나뭇가지를 걷어내고 네르비족을 죽였다.

밤이면 밤마다 퀸투스 키케로는 카이사르에게 그리스어로 편지를 쓴 뒤, 큰 보수를 약속받고 편지를

배달해주기로 한 노예나 갈리아인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

령은 네르비족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퀸투스 키케로은 전령을 네르비족과 닮은 사람으로

구해 창에 편지를 달아 카이사르에게 전하기로 했다. 네르비족 농노는 네르비족 전선을 뚫었고,

이틀 후 카이사르는 그 창을 손에 넣었다. 카이사르는 즉각 10군단을 데리고 떠났다.

파비우스와 카이사르는 일사불란하게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이틀이 지나서야 마침내 때가 되자

10군단과 7군단은 네르비족에게 참패를 안겼다. 카이사르는 만족하고 사마로브리바로 떠났다.

 

카이사르가 6개 군단을 이끌고 나타나자 세노네스족은 힘없이 무너지며 저항 없이 항복했다.

세노이족에 대해 카이사르에게 선처를 부탁한 이들은 아이두이족이었다.

이제 레미족이 카르누테스족을 봐달라고 사정했다. 사마로브리바를 채 떠나기도 전에,

카이사르는 세노네스족 지도자 아코가 불과 며칠 전에 체결한 조약을 벌써 위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졸렬한 갈리아 귀족들을 어찌해야 할까.? 갈리아인에게 신용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갈리아에게 신용은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 하지만 먼저 벨가이족을 손봐야 했다.

콤미우스는 5개 군단을 데리고 메나피족의 영토로 갔다. 메나피족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5년간 갈리아 땅을 휘젓고 다녔는데도 갈리아인들은 대처를 못했다.

 

지금의 나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최고의 영예를 누렸을 때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다.

온 로마가 내 발밑에 있다. 내게 필요한 일이라면 뭐든지 하고,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다.

 

 

 

 

 

 

 

로마 - 기원전 52년 1월부터 4월까지.

 

새해 첫날이 밝았지만 정무관 직은 한 석도 채워지지 않았고, 로마는 원로원과 호민관 열 명의 변덕에

힘없이 휘둘렸다. 카이사르는 자기 재종질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총애하지 않는 걸까.? 어째서.?

이 모든 인물들의 중심에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있었다. 클로디우스이 가장 큰 약점은 복수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존엄을 모욕하거나 손상시키면 그를 복수 대상 명단에

올린 뒤 자신이 당한 그대로 되갚아줄 완벽한 기회를 기다렸다. 클로디우스는 로마를 떠나 있던 한 해 동안

많은 돈을 벌었고 로마에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잠잠했다. 하지만 지난 7월 말에 칼비누스와 메살라 루푸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클로디우스와 밀로의 전쟁이 새로이 시작된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생각한다. 카이사르는 줄곧 승승장구해왔다. 카이사르는 어떻게 그리한 걸까?

모든 것이 폼페이우스가 해적 소탕 작전을 나가기 전에 시작된 삼두연합을 통해서였다.

삼두연합이 시작될 때만 해도 카이사르는 마치 그에게 부하 같은 존재였다. 폼페이우스는 단 한 번도

카이사르를 잠재적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스물두 살에 자기 수하의 군단들을 직접 이끌고 로마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과 대등한 협력관계를 맺은 자가 카이사르가 아니었다.!  원로원 의원 자격을 얻기도 전에 그 존엄한

원로원으로부터 집정관으로 인정받은 자는 카이사르가 아니었다.! 동방을 정복하고 로마의 공세 수입을 두 배로

불려준 자는 카이사르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폼페이우스의 살갗이 이리도 따끔거릴까.?

어떻게 해서 카이사르는 온 로마가 자신을 흠모하게 만들었을까?

카이사르는 로마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클로디우스가 법무관에 당선되는 것을 반대한다고. 당선되서는 안된다고.

밀로가 클로디우스를 죽였다. 밀로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3월 초 위대한 폼페이우스는 동료 없는 집정관이 되었고 갖가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스무 살 된 딸로 남편과 사별한 코르넬리아 메텔리아와 결혼했다.

밀로는 마실리아 추방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밀로는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낸다.. 

 

카이시르 1권 끝.. 카이시르 2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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