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로메 ㅡ 아, 저 사람 무서워, 저 사람 무서워!
젊은 시리아인 ㅡ 이 자리를 뜨십시오. 공주님. 간청합니다.
살로메 가장 무서운 것은 저 사람의 눈이야. 튀루스의 태피스트리를 횃불로 태워 뚫은 검은 구멍 같아. 용이 사는검은 동굴, 용이 자기 거처로 삼은 이집트의 검은 동굴같아. 환상적인 달빛에 일렁이는 검은 호수 같아••••••.
저 사람이 또 말을 할까?
젊은 시리아인 ㅡ 이 자리를 뜨십시오. 공주님. 간절히 말씀드립니다. 어서 이 자리를 뜨세요.
살로메 ㅡ저 사람 몸, 정말 쇠약해졌네! 가냘픈 상아 조각 같아.
저 사람은 은으로 만든 것 같아. 틀림없이 달처럼 순결할 거야. 달빛 같아, 은빛살 같아, 살갗은 아주 차가울거야, 상아처럼 차가울 거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젊은 시리아인 ㅡ 안 됩니다. 안 돼요, 공주님! - P162

헤롯 ㅡ 오늘 밤에는 달이 이상해 보이는군. 이상해 보이지 않소? 미친 여자 같아. 사방에서 연인을 찾는 미친 여자.
게다가 벌거벗었어. 홀딱 벗었어. 구름들이 벗은 몸을가려 주려 하지만 그냥 놔두지를 않네. 하늘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 술 취한 여자처럼 비틀거리며 구름 사이를 헤매고 있어••••••. 연인을 찾는게 틀림없어. 술 취한 여자처럼 비틀거리지 않소? 미친여자 같아, 안 그렇소?
헤로디아 ㅡ 아뇨. 달은 그냥 달 같아 보여요. 그뿐이에요. 안으로 들어가요••••••. 여기서는 할 일이 없어요. - P171

헤롯 ㅡ 아, 맨발로 춤을 추는구나! 좋구나! 좋아! 너의 귀여운두 발이 하얀 비둘기 같겠구나. 나무 위에서 춤을 추는 작고 하얀 꽃 같겠구나••••••. 아니야, 아냐. 저 아이는 피 위에서 춤을 추겠구나! 바닥에 피가 쏟아져 있으니 저 아이가 피 위에서 춤을 추면 안 되는데, 그건 나쁜 징조였어.
헤로디아 ㅡ 저 아이가 피 위에서 춤을 추든 말든 그것이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당신은 이미 그 피 속에 발을 깊이 담그고 걸어 다니기까지 했잖아요••••••.
헤롯 ㅡ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아! 저 달을 봐! 붉은빛으로 변했어. 피처럼 붉어졌어. 아! 저 예언자가 제대로예언을 했구먼. 저 사람은 달이 피처럼 변할 것이라고예언했소. 저 사람이 그렇게 예언하지 않았던가? 여기있는 사람들 모두 저 사람이 그렇게 예언하는 소리를들었어. 이제 달은 피처럼 변했어. 저게 보이지 않소? - P194

살로메 ㅡ (무릎을 꿇으며) 지금 바로 은 쟁반에 가져왔으면 좋겠어요.......
헤롯 ㅡ (웃음을 터뜨리며)은 쟁반에? 그러고말고, 은 쟁반에이 아이는 매혹적이야, 그렇지 않소? 네가 은 쟁반 위에 올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오, 착하고 아름다운 살로메 유대의 그 어떤 딸보다 아름다운 아이야. 은 쟁반에 무엇을 가져와 주기를 바라느냐? 말해 보렴. 그것이 무엇이든, 너는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내 보물들은 다 네 것이다. 네가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살로메?
살로메 ㅡ (일어서며) 요카난의 머리예요.
헤로디아 ㅡ 아! 말 한번 잘했구나, 내 딸아.
헤롯 ㅡ 안돼 안돼!
헤로디아 ㅡ 말 한번 잘 했어, 내 딸아.
헤롯 ㅡ 안 돼, 안 된다, 살로메. 네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야. 네 어미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네 어미는 늘 너에게 나쁜 조언만 하는구나. 그 말에 귀 기울이지마라.
살로메 ㅡ제가 귀 기울이는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제가 은 쟁반에 요카난의 머리를 달라는 것은 제 즐거움을 위해서예요. 전하는 맹세를 하셨습니다. 맹세를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 P198

살로메 ㅡ 요카난의 목을 주세요!
헤롯 ㅡ(의자에 주저앉으며) 저 아이에게 달라는 것을 주도록 하라! 결국 저 아이는 제 어미의 자식이 아니더냐! (첫 번째 병사가 다가온다. 헤로디아가 왕의 손에서 죽음의 반지를빼 병사에게 준다. 병사는 바로 그것을 사형 집행인에게 가져간다. 사형 집행인의 얼굴이 겁에 질려 있다.) 누가 내 반지를 가져갔는가? 내 오른손에는 반지가 있었다. 누가 내 포도주를 마셨는가? 내 컵에는 포도주가 있었다. 포도주가 가득 차 있었다. 누가 그것을 마셔 버렸구나! 아!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생길 거야. (처형관이 우물 안으로 내려간다.) 아! 내가 왜 맹세를 했던가? 이후로는 어떤 왕도 맹세를 하지 못하게 하라. 맹세를 지키지 않는다는 건 무시무시한 일이고, 맹세를 지키는것 또한 무시무시한 일이다.
헤로디아 ㅡ 내 딸아, 장하구나
헤롯 ㅡ 틀림없이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살로메 ㅡ (우물에 몸을 기대고 귀를 기울인다.) 아무 소리도 나지않아.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왜 소리를 지르지 않을까,
이 사람은? 아! 누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는 소리를 지를 텐데, 몸부림을 칠 텐데, 괴로워할 텐데••••••. 쳐라,
쳐라, 나아만이여, 쳐라, 어서••••••. 아니야, 아무 소리도안 들려, 침묵, 무시무시한 침묵뿐이야. 아! 땅에 뭔가 떨어졌구나.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 사형 집행인의 칼이로구나. 두려워하고 있어, 이 노예는 칼을 떨어뜨렸어. 감히 그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있어. 겁쟁이야, 이 노예는! 병사들을 보내야 해. (헤로디아의 시동을보며) 이리 와, 너는 죽은 사람의 친구였지, 그렇지 않아? 자, 네게 말하겠는데, 죽은 사람 수가 충분하지 않아. 병사들에게 아래로 내려가 내가 청한 것, 전하가 나에게 약속한 것, 이제 내 것이 된 것을 나에게 가져오라고 해. (시동은 뒷걸음질 친다. 그녀가 병사들을 돌아본다.)여기 봐요, 병사들, 우물로 내려가서 그 사람의 목을 가져와요. 전하, 전하, 병사들에게 요카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하세요. - P206

살로메 ㅡ 아! 당신은 당신에게 입 맞추지 못하게 했지, 요카난흠! 이제 나는 당신에게 입 맞출 거야. 잘 익은 과일을깨물 듯이 내 이로 당신 입술을 깨물 거야. 그래, 당신에게 입을 맞출 거야, 요카난 내가 그렇게 할 거라고말했잖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렇게 말했어. 아! 이제 당신에게 입을 맞출 거야••••••. 하지만 어쩨서 나를 보지 않는 거지, 요카난? 그렇게 무시무시하던 당신의 두 눈, 분노와 경멸이 가득하던 두 눈이 지금은 감겨 있네. 왜 두 눈이 감겨 있지? 눈을 떠! 눈꺼풀을 들어 올려, 요카난! 어째서 나를 보지 않는 거지? 당신은 나를 두려워하나, 요카난, 그래서 나를 보지 않으려는 건가? 그리고 당신의 혀, 독을 쏘는 붉은 뱀 같던 그 혀가 이제는 움직이지 않네. 아무 말도 하지 않네, 요카난, 나한테 독을 뱉던 그 주홍색 독사가. 이상하네, 그렇지 않아? 어째서 그 붉은 독사가이제 꿈틀거리지 않는 거지? •••••• 당신은 내 어떤것도 가지지 않으려 했지, 요카난. 당신은 나를 거부했지. 당신은 나에 대해 악한 말을 했지. 당신은 창부를 대하듯 나를 대했지, 음란한 여자를 대하듯이 나를 대했지, 살로메를, 헤로디아의 딸을, 유대의 공주를! 자, 나는 지금도 살아 있지만 당신은 죽었어. 그리고 당신의머리는 내 것이 되었어. 나는 당신의 머리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개한테 던져 버릴 수도 있고, 공중의 새한테 던져 버릴 수도 있어. 개가 남기면 공중의 새가 먹겠지. 아, 요카난, 요카난, 당신은 남자들 가운데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었어! 다른 남자들은 모두 가증스러웠지. 하지만 당신은 아름다웠어! 당신의 몸은 은 받침 위에 세워 놓은 상아 기둥이었어. 은으로빚은 비둘기와 백합이 가득한 정원이었어. 상아 방패들로 장식된 은 탑이었어. 당신의 몸처럼 흰 것은 세상에 없었어. 당신의 머리카락처럼 검은 것은 세상에 없었어 온 세상에 당신의 입술처럼 붉은 것은 없었어. 당신의 목소리는 묘한 향을 흩날리는 향로였어. 당신을 보면 묘한 음악이 귀에 들렸지. 아!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보지 않았나, 요카난? 손이라는 망토로, 독설이라는 망토로, 당신의 얼굴을 가렸지. 당신은 자신의 눈에 신을 보려는 자의 덮개를 갖다 댔지. 그래, 당신은 당신의신을 보았지, 요카난. 하지만 나는 나는, 절대 보지 않았지. 나를 보았다면 당신은 나를 사랑했을 거야. 나는 당신을 보았지.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어. 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 요카난, 나는 당신만을 사랑해••••••.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에 목말라 있어. 나는 당신의 몸에 굶주려 있어. 포도주도 사과도 내 욕망을 달랠 수 없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요카난? 홍수도 큰물도 내 뜨거운 감정을 끌 수가 없는데, 나는 공주였어. 그런데 당신은 나를 경멸했지. 나는 처녀였어. 그런데 당신은 나한테서 순결을 빼앗았지. 나는 정숙했어. 그런데 당신은 내 핏속에 불을 채웠지••••••. 아! 아! 어째서 당신은 나를 보지 않았나? 나를 보았다면 당신은 나를 사랑했을 거야.
틀림없이 나를 사랑했을 거야. 사랑의 신비는 죽음의 신비보다 위대하지. - P208

(노예들이 횃불을 끈다. 별이 사라진다. 커다란 구름이 달을 가로질러 완전히 감추어 버린다. 무대는 어두워진다. 왕은 계단을 올라가기시작한다.)살로메의 목소리 아! 나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었어. 요카난,
당신 입에 내 입을 맞추었어. 당신 입술에서는 쓴 맛이 나네. 피의 맛인가? •••••• 아니, 어쩌면 사랑의 맛일지도 몰라••••••. 사람들은 사랑에서 쓴 맛이 난다고 하지••••••.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무슨 상관인가? 나는당신에게 입을 맞추었는데, 요카난, 당신의 입에 내 입을 맞추었는데.

(달빛이 살로메에게 떨어지며 그녀를 환하게 비춘다.)

헤롯 ㅡ (빙글 돌아 살로메를 보며) 저 계집을 죽여라!

(병사들이 앞으로 달려 나가 헤로디아의 딸, 유대의 공주 살로메를 방패로 눌러 뭉갠다.)

(막)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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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동안, 메리는 자신이 보기에는 가슴아프고 쓰라리게 여겨지는 경험들을 리처드 본인은 고난을 딛고일어선 성공담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자신이 지금 앉아 있는 곳은 이 집이 아니고 자신이 함께 있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메리는 자신이 옛날로 돌아가서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으며, 어머니가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메리의 아버지가 마치 무덤 속에서 농간이라도 부려 지금 자기 딸이 옛날 그녀의 어머니처럼 비참한 생활을 하도록 손을 쓰고 있는 것과도 같은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비극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농장에 도착한 메리는 암울한 현실을 직감했다. 메리에게 리처드는 제2의 아버지였고, 자신은 제2의 어머니로서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어두운 비전을 말이다. 농장 생활이 시작되자마자 메리가 리처드에게 반감을 갖게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리처드의 나약함과 소시민성이 언젠가 자신의 삶에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와 우울함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메리가 결혼 전에 리처드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본 것은 그의 소시민성을 친절로 해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메리는 그것이 단지 자신의 삶을 궁핍하고 무겁게 만드는 그의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의 다른측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남겨 준 삶의 칙칙함을 피하려고 홀로 생활하다가 끝내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 자신을 엄청난 삶의 무게로 짓누르게 될 제2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리처드에게 반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반감(aversio)이란 우연적으로 슬픔의 원인인 어떤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ㅡ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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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리아인 -오늘 밤에는 살로메 공주님이 유난히 아름다워!
헤로디아의 시동 - 달 좀 봐. 정말 이상해 보여! 꼭 무덤에서 일어나는 여자 같아. 죽은 여자 말이야. 꼭 죽은 것들을 찾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걸.
젊은 시리아인 -  과연 이상해 보이는군. 노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어린 공주 같아. 발이 은으로 빚어진 공주, 발이 아니라 자그마한 흰 비둘기가 달린 것 같아. 꼭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이 드는걸.
헤로디아의 시동 - 꼭 죽은 여자 같아. 아주 천천히 움직여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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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담당 장관‘이
된다면

영국에서 ‘외로움 담당 장관 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했다는 소식이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처음에는 기사 제목만 흘깃 보고 넘어간지라, 한동안 영국에 ‘고독부‘ 같은 정부부처가 생긴 줄 알았다. 그 부처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 걸까, 혼자 상상하기도 했는데 실체는 내 공상과는 조금 달랐다. - P17

곧 이 문제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됐다. 대인 접촉이 끊긴 이들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물질적 사회적으로지원하는 일은 물론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듯하다. 삶이 곧 외로움이고 그럼에도 우리 모두 살아가야 한다면,
그만큼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는 뜻 아닐까. 사람들틈바구니에서 복작거리며 하루를 보낸 뒤에도 헛헛함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그 의지가 소진됐기 때문 아닐까.
「수선화에게는 그 답까지 제시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더 외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살아갈 용기 역시 함께 얻는다. "울지 마라"라는 첫 행보다는 시의 마지막 부분 때문인 것 같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지구를 움직이고 음파를 전달하는 어떤 섭리 속에 내가 있다. 그 거대서사에서 나는 소외당하지 않는다. 내가 외롭다는 게 그 증거다. 그래서 나는 비록 외로울지라도 내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지는 않게 된다. - P18

그래서 현대인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 무력감을 느낀다. 고대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고대인에게는 시스템이 없었고, 대신 변덕스러운 신과 정령, 광포한 자연과 폭군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들은 세상이 이치에 맞게 돌아간다는 생각 자체를 품지않았다. 사방을 향해 생존을 빌며 살았다. 폭력적인 죽음과 신비로운 현상들이 너무 많았기에 역설적이게도 짜릿한 투쟁과 영광, 환희, 영적 충만의 순간을 현대인보다 더 자주 경험했다.
현대문명은 점점 더 정교하고 복잡하고 자체적인 작동 원리를 지닌 기계가 되어간다. 우리는 생존과 안전에 대한 걱정을더는 대가로 그 회색 기계 속 부품으로 살기를 선택했다. 변덕쟁이 신과 사나운 야생보다는 그편이 좀더 우리의 이치에 가까우리라 믿고,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다른 부품들 사이에 옴짝달싹 못한 채 서서, 이 무표정한 기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리자가 있기나 한 건지를 궁금해한다. 그러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런데 이 기계는 늘 어딘가 고장이 나 있는 것 같아‘ - P24

배달 기사의 안전 운행은 오로지 그 자신이 신경써야 할 몫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배달 기사가 빗길을 달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 음식을 주문했다면, 그의 안전에 대해우리도 약간은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만약 후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면, 같은 맥락에서 대만 폭스콘 공장의 비인간적인 노동 실태가 폭로됐을 때 우리는애플 제품도 거부해야 하는 걸까? 내가 잠시라도 어떤 사회 시스템에 간여한다면, 그 시스템 전반이 공정하고 정의로운지, 누군가를 착취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걸까?
이런 질문을 고민하다보면 우리는 금세 무력감에 빠진다. 세계는, 현대사회는, 너무 복잡하다. 우리가 모든 산업부문의 근로조건과 하청 구조에 대해 샅샅이 공부하고 자신만의 견해를지녀야 하는 걸까? 온실가스 배출이나 동물 실험, 이른바 ‘공정무역‘ 같은 이슈에 대해서도? 하지만 그게 과연 한 개인이 할수 있는 일인가? 공부하려 한들, 그 실태가 다 조사되어 드러나있기나 한가?
누군가는 그런 문제를 조사하고 있을 테고, 그 결과를 통해법이나 협약이 개정되겠지. 나는 그 법이나 충실히 따르면 되지. 하다가 혹시 그게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의 논리 아니었나싶어 불안해진다. 전체 시스템이 사악할 때 나는 정해진 법대로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평범한 악‘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속한 시스템을 의심의 눈초리로 봐야한다. - P31

한데 지식은 대개 짧지 않다. 지식이란 정보들이 논리에 따라 연결되어 있는 구조물이다. 깊은 지식일수록 규모가 크고 구조가 복잡하다. 따라서 문맥이 중요하다. 책 한 권을 문장 단위로 분리해서 마구 흐트러뜨린 뒤 순서 없이 읽는다면, 그 책의 모든 글자를 다 본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는 내용은 아주 적을 게다. 그게 인터넷이고 소셜 미디어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서 빠르게 복제되어 퍼져나가는 자극적인 정보를 최근에는 ‘밈meme‘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훨씬 전에 ‘밈‘이라는 단어를 만든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이 창시자임에도 그 개념을 마뜩지 않아했다. 인터넷에서 번지는 맥락 파괴적 유행 요소를 밈이라고 부르는 건한 겹 더 부적절하게 들리는데, 그럼에도 그 현상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밈과 가장 가까운 현실의 물건은 아마 감자칩 아닐까? 감자칩은 얇고, 자극적이고, 한번 포장지를 뜯으면 먹는 것을 멈추기 어렵다. 여기서도 ‘얇다‘는 말과 ‘자극적‘이라는 말은 얼마간 동어반복이다. 감자칩을 자극적으로 만들려면 기름에 코팅된면적을 넓혀야 하고, 소금을 비롯한 양념을 최대한 많이 뿌려야한다. 즉, 얇아야 한다. - P51

다만 세상에는 겪을 때에는 엄청나게 괴롭지만 그 시기를 넘기면 의외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충격도 있다. 외과 치료로 완치되는 단순골절 사고처럼. 나는 코로나19 범유행도 큰 차원에서는 그리되는 것 아닐까 싶고, 그렇게 되길 바란다. 한편으로는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도 매년 한국에서 1200~1500명가량 나오는 걸로 추정되지만(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이재갑 교수) 그게 사회구조를 바꾸지는 못한다.
반면 세상에는 충격의 단기적인 강도는 약해도 사람의 삶을 서서히, 그러나 지나고 보면 완전히 바꾸는 질병도 있다. 신경쇠약 같은 것들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최근 십 년 사이에 그런 새로운 바이러스에 걸려서 대단히 심오한 변화를 겪는 중이라고 느낀다. 병의 이름은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병을 옮기는 매개체는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들이다. 미래의 역사가들이 이걸 최소한 TV의 보급보다는 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할거라 확신한다. - P72

도박장에서는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런데 세상 전체가 카지노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미래세대의 가치관을 진심으로 염려한다. 검소한 생활과 자기 절제, 노동, 꾸준한 노력이 보답받고 또 찬미의 대상이 되는사회에서 인간이 비로소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 거품이 언젠가 꺼지면 그때는 또 얼마나 파괴적인 절망과환멸이 우리를 휩쓸 것인가. 그렇다고 거품을 꺼뜨리지 말고 이대로 놔둬야 하나? 한데 그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기는 한가.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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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평소의 소신이나 가치관, 심지어 종교마저 기꺼이 내던져 버린다. 이것만큼 우리가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증표가 또 있을까? 자발적인 노예 상태에 빠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보다 위대한 감정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의지, 지성, 신념처럼 인간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들도 사랑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기때문이다. 노예가 어떻게 자신의 의지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자발적인 포기가 가능할까? 스피노자의 통찰이 절실히 필요한 대목이다.

사랑(amor)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ㅡ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바로 이것이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기쁨의 감정은 "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결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 충만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 기쁨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사랑에는 외부 원인이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감정은 특정한 외부 대상을 전제로 하는 기쁨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 누군가를 만나 과거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기쁨을 느낄때, 우리는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 P79

대담함(audacia)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정의는 지나치게 평범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는 것이 대담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만 대담함을 일종의 욕망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비범함에 다시 한번 탄복하게 된다. 스피노자에게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기쁨의 증진을 도모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살아가는 힘과 기쁨을 증폭시키는 경험이 또 있을까? - P89

20세기 위대한 작가 F.스콧 피츠제랄드가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민음사)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아니겠는가.

개츠비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형씨."
"데이지의 목소리에는 신중함이 없어요. 그 애의 목소리에는 뭔가 가득••••••." 나는 머뭇거렸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 갑자기 개츠비가 말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전에는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끝없는 매력, 그 딸랑거리는 소리, 그 심벌즈 같은 노랫소리•••••• 하얀 궁전 속 저 높은 곳에 공주님이 그 황금의 아가씨가••••••."

지금 방금 우리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탐욕과 관련하여 셰익스피어의 대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만큼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읽었다. 표면적으로 소설의 줄거리는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진부한 멜로드라마처럼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부와 관련된 인간의 탐욕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어도 읽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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