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 혼자만의 고독과 증오심과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서 모의하는 범행이 아니었다.
한 여인과 이제 겨우 아빠, 아빠 하고 말할 줄 알고 걸음마를 시작하는 그의 아들과 곧 태어날 갓난아이의 우유가 걸린 생사의 문제였다.
그것은 고독과 허영과 영웅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연극이 아니었다. 그에겐 이미 아무런 증오도 적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생존의 문제였다. 그가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그의 아들은 굶어죽고 그의 아내는 밑구멍으로 피를 쏟다가 그만 죽을것이다.
태어나지도 못한 아기는 탯줄을 목에 감고 죽을 것이다.
그는 보다 큰 생존을 위해 보다 큰 악과 결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수년 동안 몸부림쳤다.
그것은 엄살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에 매어 달렸다. 한 여인과 살림을 시작하자 그는 비로소 남 앞에 머리를 굽혔으며, 아이가 태어나자 그는 비로소 남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법과 질서속에서 노예처럼 순종하면서 살았다. 그는 스페어 운전사로 하루에 삼천 원씩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의 일 주일분 분유값에 지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생명의 탄생을 위해서는 또 하나의 악과 결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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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른네 살 동안 뱃속에서 잉태되었다가 서른네 살의 의식을갖고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에 불과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꿈꾸고 기대했던 자유의 거리는 그가 꿈꿔온 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무섭고 두려웠다. 그가 알고 있는 거리는 전란과 양갈보와 달러장사와 양키들이 들끓던 회색의 거리였다. 그가 지나온 과거의 세월들은 죽음과 피와 살인과 방화가 자행되던 살육의 계절들이었다. 그러나 십 년 만에 본 거리는 전혀 달랐다.
그곳에는 이미 전란도, 양갈보도, 양키도, 죽음도, 피도, 살인도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번뜩이는 풍요와 안락한 삶과 넘치는 쾌락과 비대해져가는 물질이 범람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무서웠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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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적 지향성과 파생적 지향성
존설(John Searle)을 대표로 하는 일군의 철학자들에 따르면지향성은 본래적 (intrinsic)인 것과 파생적(derived)인 것 두 가지로나뉜다. 본래적 지향성은 우리가 지닌 생각, 믿음, 욕망, 의도의 겨냥이다. 이것은 말, 문장, 책, 지도, 그림, 컴퓨터 프로그램 같은 인공물처럼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고 파생적 성격을 가진 겨냥의 명백한 원천이다. 인공물이 지향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이베푼 보시 덕분이다. 인공 표상물의 파생적 지향성은 그 창조의 밑바닥에 깔린 참다운 본래적 지향성 위에 얹혀 있다. - P95

지향성과 관계된 이런 문제의 해결책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방금 우리는 인공 표상물(문장이나 그림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활동 안에서 그것이 맡는 역할 덕분에 파생적 지향성을 갖는다는데 합의했다. 종이쪽지에 적혀 있는 쇼핑 목록은 그것을 쓴 사람의의도에서 파생적 지향성을 얻을 뿐이다. 동일한 사람의 기억에 담긴 쇼핑 목록이라 하더라도 사정은 같다! 이 경우의 지향성은 종이에 적힌 목록의 지향성과 같은 이유에서 똑같이 파생적이다. 마찬가지로 어머니 (혹은 마돈나)에 대한 마음의 상은 여러분이 그리는그림과 똑같이 파생적 방식으로 대상을 겨눈다. 그것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뇌가 만들어 낸 인공물이며 그것의 의미는 뇌의 내부 활동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경제성 안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와, 뇌의 내부 활동이 주변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의 복잡한 활동을 다스리면서 맡는 역할에서 비롯된다. - P99

가상의 로봇은 한낱파생된 지향성, 밖에서 주입된 지향성을 밑천으로 삼아 세상을 누비고 다니면서 자신의 과업을 처리하고 위험을 피해 나갈 것이다.
처음에는 공학자가 넣어 준 내용이 로봇이 가진 지향성의 주류를이루겠지만 세상에 대한 정보가 하나둘 쌓이면서 로봇은 지향성의 내용을 스스로 바꿔 나갈 것이다. 어쩌면 인간도 로봇처럼 ‘한낱 파생된 지향성을 등불로 삼아 삶을 꾸려 나가는 존재일지도모른다. 우리를 자연이 진화를 통해 설계한 인공물이라고 치면 본래적 지향성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것은 우리가 진화의유산으로 물려받지 못한 그 어떤 혜택을 우리에게 줄 수는 없을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허깨비를 좇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전망이 우리 앞에 열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지향성 덕분에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세상의 온갖 경이에 놀라움을 느끼지만 이런 지향성은 진화의 길에서 뒤늦게 나타난 아주 복잡한 현상이다. 우리가 가진 지향성의 조상은 더 투박한 종류의 지향성들(설을 비롯한 일부 철학자들이 ‘어설픈 지향성‘으로 깎아내리는 것들)이었고 그것들은 지금도 우리의 지향성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우리는 로봇의 후예이며 로봇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지향성은 실은 이 수십억에 달하는 투박한 지향계에 깃든 기초적 지향성에서 비롯되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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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1968년 1월 12일 저녁 일곱시 안양교도소의 정문 옆 철문이 열렸다.
몹시 추운 날씨였다.
싸락눈이 땅거미와 더불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허허벌판에 세워진안양교도소 앞 공터에는 대낮처럼 밝은 불빛이 켜져 있었고, 하루살이 날벌레와 같은 눈발들이 칼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몇 분 간격을 두고 교도소 철문이 열리며 머리 깎은 죄수들이 두명씩 짝지어서 교도소 벽으로 비척비척 걸어나왔다. - P9

형기를 끝마치고 출감하는 만기 죄수들을 맞기 위해 미리 교도소쪽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와서 기다리고 있는 죄수들의 가족들이었다.
경축일이나 신정 같은 새해 원단을 기해 일시적으로 시행하는 특사일이 아니고 오로지 몸으로 때운 형기를 끝낸 죄수들만을 골라석방하는 날마다의 일상행위였으므로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한 사람씩, 혹은 두 사람씩 짝지어 석방되는 교도소 앞의 풍경은 은밀하고, 무슨 음흉한 또 하나의 범죄행위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병원에서 죽은 시체들이 뒷문을 이용해서 은밀하게 실려나가듯 야밤을 이용해서 풀려나는 죄수들의 모습은 그토록 오랜 형기를 끝내고 비로소 삶의 자유를 획득했다는 기쁨과 해방의 환희도 엿보이지 않고 차라리 죽은 시체들이 어두운 후문을 통해 달려나오듯 음울한 상여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끌면서 녹슨 빗장소리와 함께 구토하는 오물처럼 토해져나오고 있었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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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완벽한 기술자였다.
그에게는 재미있고 아슬아슬한 게임이며, 장난과 같은 유희에 불과했다. 소매치기들로부터 터부시되고 있는 작업 전에 우연히 거리에서 장님을 만나거나, 어쩌다 이야기 끝에 ‘원숭이‘ 란 단어가 나온다 해도 거리낄 것은 없어 보였다.
기술자 안씨가 작업 전에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불안한 심장을달래기 위해 독한 소주를 마시는 대신 약방에서 싸구려 각성제를사서 대여섯 알 한꺼번에 먹고, 몽롱한 환각상태 속에서 공사를 벌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종세는 언제나 맑은 정신 속에서 당당하게 작업을 해치워버리곤 했다.
그는 이미 불안과 공포에 면역이 되어 있었다.
애초부터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죄의식과 죄책감과는 담쌓은 담력을 종세는 갖고 있었다.
그에게는 즐거운 놀이에 불과했다.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고 야유회 같은 데에서 끼리끼리 모여앉아 수건돌리기를 하거나 박수치며 노래 부르는즐거운 게임 같은 느낌으로밖에 느껴지질 않았다.
그것이 만약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로, 비양심적인 소매치기행위로 느껴졌다면 종세는 불안과 공포로 손이 떨리고 한 번쯤 실수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날마다의 재미있는 유희에 불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 P359

종세가 종대를 떠올린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는 종대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배가 다르긴 했지만 유일하게 피를 나눈 형제로서 종세보다 나이가 일곱 살 위인 형이었다.
배고프면 들고양이라도 잡아먹을 본능으로 그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 그는 사람까지 잡아먹을 식인종이 되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아아, 언젠가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스쳐지나듯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잘 있어, 이종대, 종대형, 이 미친새끼야. - P367

"알 살려주세요."
말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디만 그것은 마음일 뿐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누운 시야로 수직으로 솟은 창경원 담 너머로 고개를 내민 벚꽃이 흰 눈처럼 난분분 난분분 바람에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쑤와와.
머릿속을 꿰뚫고 바람소리가 스쳐갔다. 철커덕철커덕 협궤를 달려가는 기차의 수레바퀴 소리도 들려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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