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라빌 부인은 우리가 오늘 일로 얼마나 받을지 물어볼 엄두를내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과 똑같이 주근깨가 난,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계산을 해봤다. 쉬발 블랑에서 매번 최소한 5시간은 작업하는데ㅡ때때로 그 이상-계약서상으로는 단지 3시간 15분만 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마티유 사장이 우리에게했던 말, 즉 어떤 경우라도 초과 작업 시간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더 지급되지 않는다는 말을 상기시킨다. 툴라빌 부인은 자기가 짐작했던 게 아닌가 하며 한숨을 내쉰다.
"내가 잘못 이해했었기를 바랄 수밖에."
어쨌든 그녀는 항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걸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 P212

옆 사무실의 한 남자가 그녀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자, 이제 우리 둘뿐이야"라고 말했다.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어깨 위에 놓였고, 역시 재빠른 동작으로 익숙하게 책상과 의자 사이에서 편안하게 그녀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그녀는 조용하고, 남자는 마치 연극 속의 독백처럼 계속 지껄여대는데, 자세히 들리지는 않고 그저 낮은 음악소리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눈에 띄는 위치에서 시끄러운 진공청소기를돌리면서 그들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는 사람이 있다는기척을 내려고 일부러 가구들에 부딪히고 쓰레기통도 흔들어 대면서 소음을 더 크게 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들은 그 소리를 애써 들으려 하지 않고, 나를 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나같은 존재는 그저 진공청소기의 연장일 뿐이며, 고무장갑에 청소작업복을 걸친 진공청소기 같은 기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창문 가까이에 있는 철망 바구니에 그녀의 암탉이 낳은 달걀들을 놓고 부엌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빅토리아를 생각했다. 그녀는 반짝이는 녹색,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알게 될 거야. 청소부가 되면 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거야. 사람들이 말하거나 한 짓들을 알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절대알아서도 안 되는 거고. 그 외에 네게 해줄 조언은 없어."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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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간에, 그것도 청나라의 일방적인 승전으로싱겁게(?) 끝난 전쟁이어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1644년 이전, 즉 중원 정복 이전의 청나라 역사 연구에서 조선과의 관계 자체가 기껏해야 주변적인 문제로 취급된 탓이 큰 것 같다. 명나라와의 관계가 ‘주(主)‘, 몽고와의16) 관계가 ‘부(副)‘였다면, 조선과의 관계는 간혹 등장하는 ‘에피소드‘ 정도로 취급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식에서라면,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명나라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배후의 위협을 먼저 제거한 전쟁 정도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병자년에 한정해보자면, 정작 홍타이지는 조선과의 전쟁을 명과의 전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위에서 강조했듯이, 병자호란을 친정으로 치렀다. 배후에 명나라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본국을 비우고 조선에 출정한 셈이니, 종래의 인식으로는 이해 불가이다. 게다가 병자년의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공하기에 앞서 명나라를 먼저 쳤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 P40

그렇다면, 1636년경 청나라 팔기의 인구 총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입관 전 팔기의 인구 규모를 구체적인 수치로 전하는 기록은 현재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팔기의 인구 조사 결과로 시기가 가장 앞선 것은관으로부터 4년이 지난 1648년의 통계이다. 1648년의 인구 조사에서 팔기의 성인 남자 총수는 34만6,931명으로 집계되었다.34) 이 숫자를 토대로표준인구이론(Standard Population Theory)을 써서 전체 인구를 추산한 연구에 따르면, 1648년 팔기의 인구는 적게 잡아 130만 명, 많게 잡아 240만명으로 추정된다. 35) 명나라 말기 약 1.5억 명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중국 인구의 1퍼센트 안팎에 불과하다.
게다가 1648년의 성인 남자 34만6,931 명 가운데 전체의 약 63퍼센트에달하는 21만6,967 명은 자유민이 아닌 노복(奴僕)이었다. 만주어로 ‘아하(aha)‘라 불리던 노복들은 대부분 한인 출신이었으며, 그들은 일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군역 의무를 지지 않았다. 따라서 1648년 팔기에서 갑병으로 차출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최대치는 12만9,964명에 그쳤다고 보아야한다. 성인 남자가 약 13만 명 있었다고 해서 이 모두를 실제 갑병으로 출정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1648년의 통계만으로는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의 동원 가능 병력 총수를 계산할 수 없다. 병자호란 무렵 팔기의 인구는 아마 입관으로부터 4년이지난 1648년의 인구보다 적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통계는 유념해둘 가치가 충분하다. 입관 전의 청이 결코 대국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숫자로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농업 위주의 경제에서는 인구가 곧 경제 규모의 대리지표가 된다. 입관 전의 청은 인구로 보나 경제 규모로 보나 명나라의 약 100분의 1에 불과한 소국이었다. - P46

16세기 말 누르하치 세력이 흥기할 무렵의 만주 땅은 단지 여진인들만의 세계가 아니었다. 만주의 남부와 동부는 여진인들의 영역이었지만, 서남부의 요동 지역은 명나라의 영토였다. 만주 서북부와 북부에는 흥안령(興安) 산맥의 동남 사면을 따라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초원은 흥안령 산맥의 서북 사면과 고비(Gobi) 사막의 남북 지역과 더불어 유목민들의 터전이었다. 당시 초원의 유목민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된 상태에 있었지만, 옛날 몽고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대칸이 여전히 존재하여 ‘차하르‘라고불리던 유목민 집단의 수장이 그 지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르는 16세기중엽 세력이 악화되어 흥안령 산맥 동쪽 요하 상류의 초원 지역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1620 년대에 이르러 대칸 릭단(Ligdan) [1588~1634년, 재위 1604~1634년이 초원의 재통일을 꿈꾸며 세력을 급속히 키웠고, 마침내 내몽고초원의 중심지였던 후흐흐트[和浩特]까지 점령했다. 지리적 근접성만 놓고 보더라도 누르하치가 일찍부터 여러 유목민 집단들과 적대적 또는 우호적 관계를 맺은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누르하치는일부 유목민 집단과 군사적으로 충돌하는 가운데, 혼인 등의 수단을 써서유목민 수장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1620 년대 후반 차하르의 대칸 릭단이 패권 추구를 본격화하자, 홍타이지는 릭단과 적대 관계에 있던 유목민 수장들과의 연대를 강화했다. 홍타이지는 자기편으로 넘어온 유목민 수장들과 맹약을 체결하고 겹겹의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을 군사동맹의 파트너로 삼았다. 홍타이지의 동맹 집단들은 때로는 차하르, 때로는명나라에 대한 전쟁에 동참했다. 마침내 1634년 릭단이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차하르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고, 1635년에는 릭단의 처자(妻子)들이 투항함으로써 홍타이지가 내몽고 초원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 P52

따라서 외번몽고란 홍타이지에게 복속한 몽고 유목민 집단이었다고 할수 있다. 단, 홍타이지에게 복속한 모든 유목민이 전부 외번몽고가 된 것은아니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누르하치 시기에 일찌감치 복속하여 최종적으로 팔기만주에 편입된 유목민들도 있었다. 또한 1635년 홍타이지에 의해 팔기몽고로 조직된 사람들도 있었다. 외번몽고는 이들과 달리 홍타이지에게 복속한 이후로도 팔기에 편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초원에서의 독자적인 생활을 이어간 유목민 집단이었다. - P55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투입했느냐는 질문에 대한지금까지의 고찰 결과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홍타이지는 팔기만주 · 팔기봉고에서 약 1만 명을 우전 하에서 전 병력인 약 1만 명을 조선 침공에투입했고, 천우병과 천조병에 대해서는 상례보다 많은 약 1,900명의 동원을 요구했다. 따라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청나라 국내의 정규 병력은 약 2만2,000명으로 계산된다. 여기에 더하여, 홍타이지는 외번몽고 각 집단에 합계 1만2,000명 남짓의 갑병을 출전시키도록 했다. 결론적으로, 동맹군으로 참전한 외번몽고 병력까지 합해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 총수는약 3만4,000명 정도였던 셈이다. - P56

그러나 청군 병력의 많고 적음에 대한 판단은 당시 홍타이지의 동원 가능 병력을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병자호란 무렵 팔기만주·팔기몽고, 우전 초하, 천우병, 천조병의 동원 가능 병력 총수는 3만1,000~3만2,000 명 수준이었다. 병자호란에 참전한 팔기만주·팔기몽고, 우전 초하, 천우병 · 천조병의 총수는 약 2만2,000명이므로, 홍타이지는동원 가능 병력 총수의 약 70퍼센트를 조선 침공에 투입한 셈이 된다.
게다가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위한 사전 준비로 아지거의 약탈전을 벌인바 있다. 홍타이지가 이 약탈전에 투입한 병력의 총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전쟁의 규모로 보아 결코 적지 않은 병력을 투입했을 터인데, 장거리 원정에서 귀환한 지 얼마 안 된 일반 갑병들을 재차 조선 원정에 출정시키기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또한 명나라와의 국경 및 수도 심양을 위시한 여러 요충지에 적지 않은 수의 수비 병력을 유지해야 했다. 이러한 요인들을 감안하면, 홍타이지가 국내의 가용 군사 역량을 거의 전부 조선 침공에투입하는 총력전을 준비했다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홍타이지가 조선 침공을 앞두고 외번몽고 회맹을 개최하여 합계 약 1만2,000명의 병을 할당한 조치 또한 과거 만주와 몽고 간 군사동맹의 실태와 비교하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홍타이지는 1629년 유목민 집단의 수장들과 체결한 맹약에서 명을 상대로 한 출병에는 각 집단이 100명씩의 병력을보내고, 차하르에 출병할 때에는 각 집단의 수장급 인사 전원이 참전하라고규정했다. 후자의 경우 파병 규모는 수장들의 성의(誠意) 여하에 맡겨져있었다. 병자호란의 경우에는 사전에 각 집단의 파병 규모가 구체적으로정해졌다. 예컨대, 호수가 2,900가였던 한 집단은 936명의 병을 부담했는데, 이는 1629년의 맹약에서 규정한 부담의 아홉 배가 넘는 것이었다. 각 집단의 부담 수준은 집단마다 편차가 작지 않았지만, 전체 평균은 3.4~3.5가에 1명꼴이었다.  - P58

 이밖에 피로인의 총수를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청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이 "날마다 천(千)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정축년 삼월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기사나,  심양에서 도망치는 피로인이 "날마다 천(千)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심양장계(瀋陽狀啓)』의 정축년 팔월 19일 기록 등은 최명길의 "50여만 명"이나 나만갑의 "60만 명"이사실일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나만갑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조선 출신 노예만 해도 "60만 명"에 달했던 심양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로 꼽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1590년대 햇수로 7년이나 지속되었던 왜란 기간에 발생한 피로인의 숫자가 5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 마당에, 겨우 두 달의 전쟁에서 50만 명 또는 60만 명의 피로인이 발생했다는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최명길의 50여만 명은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입은 피해를 명에 알리는 문서에 등장하는 숫자이다. 명나라에 조선의 전쟁 피해를 강조하기 위한 외교적 동기에 추동된 과장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날마다 천(千)으로 수를 헤아린다"는 말은 ‘수가 많다‘
는 것을 강조할 때 쓰는 수사적 관용구이다. 액면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표현인 것이다. - P61

병자년 사월 11일, 홍타이지는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심양의 남문 밖에 쌓은 제단으로 나아가 먼저 하늘에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렸다. 이때 읽은 축문에서 홍타이지는 자신이 "조선을 정복하고 몽고를 통일했으며 옥새를 획득했기에 "존호를 받는다고밝혔다. 아울러 명나라가 여전히 적국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감히 "존호"
를 칭할 수 없어 거듭 고사했지만 결국에는 사람들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천자의 자리"에 오른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고천의 의식을 마친 홍타이지는 이어서 "수존호례(受尊號禮)", 즉 존호를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홍타이지는 이 의식을 위해 따로 쌓은 단에 올라 자리를 잡았고,
좌우로 서열에 맞추어 늘어선 사람들이 모두 그를 향해 삼궤구고두의 예를올렸다. 이어서 조선 정복, 몽고 통일, 옥새 획득 등 세 가지 위업을 다시강조하면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선포했다. 이처럼 병자년 사월 11일 홍타이지가 존호를 받으면서 내건 명분은 ‘조선정복‘, 몽고 통일, 옥새 획득‘이었다. 몽고 통일과 옥새 획득은 차하르 정복의 업적을 가리키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복‘은 그렇지 않다. ‘조선 정복‘이란 정묘호란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묘호란은 비록 조선이 수세에 처한 상황이었을지라도 쌍방의 맹약으로 화의가 성립함으로써 끝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타이지는 자신이 이미 조선을 정복했노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홍타이지가 "인성황제"라는 존호를 받은 의식, 편의상 앞으로 ‘황제 즉위식‘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장엄한 의례를 거행하던 현장에는 조선의 사신 나덕헌과 이확이 있었다. 홍타이지는 마침 심양에 와 있던 나덕현과 이확을 ‘황제 즉위식‘에 데려와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신에게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릴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두 사람은 홍타이지에 대한 배례(拜禮)를 목숨을 걸고 거부함으로써 한바탕의 ‘소동‘을 야기했다. 두 사람의 저항은 항마디로 장엄한 ‘황제즉위식‘에 흙탕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 P65

여기서 ‘절화교서‘는 아니었다고 치더라도 나덕현과 이확의 의례 참여 거부가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면 역시 조선이 전쟁을 자초했다고 말할 수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당시의 조선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의 국력 쇠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병자년의 시점에서 명과의 관계를 끊고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라는 요구는 절대 수용 불가였다. 단지 대명의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력이 예전만 하지 못했을지라도 병자년의 명나라가 여전히 대국으로 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무렵의 명나라는 멸망을 코앞에 둔 처지였으니 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무슨 대수이냐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청의 입관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 홍타이지조차도 명이 곧 멸망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644년 청에게 입관의 기회를제공한 이자성(李自成)의 북경 점령은 문자 그대로 돌발 사태였다. - P66

어느 쪽이 문제였는지 사실을 엄밀히 따지자면, 홍타이지야말로 애초에 정묘년 이래의 양국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홍타이지의 존호는 논의 당초 조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문제였다. 병자년의 전년인 을해년 십이월 말 홍타이지가 이제 존호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의 신하들이 내세웠던 명분은 차하르 정복과 옥새 획득이었다. 그런데 존호를 칭하라는 요청을 수락하는 자리에서 홍타이지가 돌연 "조선국의 왕은 (나의) 형제가 되어 있다. 그에게 상담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제 사신을 보내어 이 이야기를 조선 왕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존호 문제가 홍타이지에 의해 조선과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에게 존호를 바치는 대열에 조선의 왕을 동참시키자는 발상을 내놓은 장본인은바로 홍타이지였던 것이다.
정묘년의 맹약은 어디까지나 형제처럼 잘 지내자는 것이었다. 인조에게 명과의 관계를 끊고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라고 요구한 것이 오히려 그 자체로 맹약 파기 행위였다. 인조가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병자년 십일월 25일 홍타이지는 ‘절화교서‘를 내세우며 조선이 맹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늘에 고했지만, 정작 ‘절화교서‘
가 나온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칭제‘ 과정에 동참하라고 요구한 일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이 자신의 ‘칭제‘를 인정하지 않은 일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 P68

여기서 홍타이지가 자신의 ‘희망사항‘ 때문에 굳이 조선을 끌어들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까닭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 조선이 홍타이지의 ‘칭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병자년 사월 11일의 ‘황제 즉위식‘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직접 목도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홍타이지가 내세운 명분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사원 11일의 장엄한 의식은 기껏해야 ‘미완의 황제 즉위식‘에 그치고 만 셈이다. 이왕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상 그가 자신의 ‘칭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정묘년의 ‘조선 정복‘은 사실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조선이 ‘배신‘했을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침 그는 ‘배신‘의 증거로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인 ‘절화교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배신‘을 주장한 이상, 홍타이지로서는 ‘조선 정복‘을 위한 전쟁 발동이 당위이자 필연이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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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겨울

곧 눈이 내릴 것 같다. 그애는 병실 창문을 통해 첫눈을 보겠지.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는 그애를 상상할 수 있다. 찬 유리에 이마를 갖다대는 그애의 작고 창백한 얼굴, 무표정함. 여윈 두 팔목은 헐렁한 환자복 윗도리의 주머니에 찔러넣었을 테고, 그리고 물에 젖은 듯 윤기가 나는 긴 속눈썹을 조금씩 깜박이며 창 쪽으로 고개를 내밀 때에, 그리핀 메달이 달린 가느다란 은색 목걸이 줄이 그애의 쇄골을 가볍게 스칠 것이다. 그애의 등 뒤로 보이는 병실은 청결하고, 가습기에서 뿜어져나와 일정한 지점에 이르러서 흩어져 사라지는 희뿌연 물방울의 띠가 실내의 정적을 강조한다. 잔뜩 흐린 날, 천장에서 반사되는 백색 형광등 불빛때문에 그애가 있는 3층 병실은 허공에 떠 있는 차가운 온실처럼 보일 것이다. - P9

해질 무렵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다가 무심코 보도블록이 움푹 팬 자리를 잘못 딛고, 다음 순간 이내 균형을 잡았을 때의 가벼운 어지러움 같은 것이랄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전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온 것처럼 주변의 공기가 낯설고 어색하고 귀가 멍한 느낌.
그래서 생각했었다. 세계라는 공간은 시간의 파이프가 물샐틈없이 친친 감긴 기계장치로 둘러싸여 있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서그 파이프로 시간이 공급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어느 찰나에 그 시간의 파이프가 아주 잠깐 이탈했었고, 그 짧은 순간 히말라야의 크레바스 같은 끝없이 깊고 좁은 틈 같은 게 생겨났으며, 거기로소중한 무언가가 빨려들어가서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면, 선로를 이탈한 시간은 문득 휘어졌다가 다음 순간 곧바로 다시 궤도로 들어섰지만, 분명 그전과 같은 시간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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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죽고 싶지 않았다면 왜 자기 자신을 쏘았을까? 앨버말에서 벌어진 상황은 악몽 같은 것이었으나 나는 상황을 어느 정도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같다. 헨리가 자신을 쏜 것은 절망 때문이 아니었다. 공포 때문도 아니었다. 줄리언과의 이별이 헨리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은 헨리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우리와 자기 자신에게 줄리언이 가르쳤던 의리, 경건, 성실, 희생 같은극도로 차가운 원칙은 따를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어떤 고상한 제스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앨버만의 벽거울에 비치던 헨리가 권총을 자기 관자놀이에 갖다 대던 모습을 잘 기억한다.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정신은 승리의 순간을 향한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얼굴은 흡사 도약대 끝으로 다가가는 하이 다이버의 얼굴과 같았다. 눈을 꼭 감은채 도약대 끝으로 다가가면서 물을 가르고 뛰어들게 될 순간을 기다리는환희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 나타나던 표정을 이따금씩 생각한다. 그리고 그 표정의 언저리에서 벌어지던 수많은 일도 이따금씩 생각한다. 나는 처음으로 햄든의 자작나무 숲을 보았을 때의 일, 처음으로 줄리언을 만났을 때의 일, 햄든에서 처음으로 배웠던 그리스어 문장, ‘아름다움은 공포다(Kalepa taCala)‘도 이따금씩 생각한다. - P413

하기아 소피아...... 베니스에 있는 산마르코 성당……찰칵찰칵
"여기가 어디야?"
"비밀이야."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문객은 나뿐인 것 같았다.
"구경꾼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곳 아니야?"
"아니라고 해야겠지."
나는 헨리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물을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없었다.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질없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행복하니?"
마침내 내가 물었다.
헨리는 잠깐 생각해보고는 대답했다.
"별로, 너도 네가 있는 곳에서 행복하지 않겠지?"
찰칵찰칵...... 모스크바에 있는 성 바실리우스 성당.…… 샤르트르 대성당...... 솔즈베리와 아미앵...... 헨리는 시계를 보았다.
"미안해, 약속에 늦을 것 같아서."
그는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아득히 뻗어 있는 희미한 복도 저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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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조선의 인조(仁祖) 14년이자 청의 숭덕(德) 원년이었던 병자년(丙子年)십이월 8일(1637년 1월 3일). 청군의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정축년(丁丑年) 정월 30일(1637년 2월24일), 남한산성을 나선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의 태종(太宗)에게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전쟁이 터진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
을 겪었던 것이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치욕 중 하나로 기억되는 참패였기에 이런 의문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전쟁 준비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어찌 이렇게 참담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왜란(倭亂)의 참화를 겪은 지 50년도지나지 않았건만, 심지어 약 10년 전에는 똑같은 적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었건만, 그사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왜란이나 정묘호란은 사전에 적의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치자. 그러나 병자호란의 경우는 겨울의 전쟁이 터지기 한참 전인 병자년 봄 척화론(斥和論)이 들끓는 가운데 전쟁 불사의 의지를 천명하지 않았던가? 조선의 위정자들은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말인가? - P9

서론

조선의 제16대 국왕 인조(仁祖)[1595~1649년 재위 1623~1649년]가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光海君)을 몰아내고 보위(寶位)에 오른 지 햇수로 14년째였던 병자년(丙子年)의 십이월, 청(淸) 태종(太宗) 홍타이지(Hongtaiji,
皇太極)[1592∼1643년 재위 1626~1643년 청의 대군(大軍)을 직접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우리가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고 부르는 전쟁이터진 것이다.
병자호란이 터지기 10년 전에도 전쟁이 있었다.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1627년의 정묘호란은 두 나라가 이른바 ‘형제 맹약‘이라고 불리는 화의(和議)를 체결함으로써 끝이 났다. 정묘호란 때의 홍타이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금국(金國)[만주어로는 ‘아이신 구룬(Aisin Gurun)]의 한(汗)이었으며, 형제 맹약 이후의 10년 동안 후금의 한 홍타이지와 조선의 왕 인조는 상호 대등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병자년(1636) 이월에 이르러 양국 관계에 매우 심각한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후금이 사신을 파견하여 이제 명(明)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홍타이지의 ‘칭제(稱帝)‘ 과정에 동참하라는 요구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론(斥和論)이 들끓었다. 후금의 요구를 단호하게 물리친 것은 물론이다. 삼월 1일에는 인조가 정묘년 이래의 양국 관계가 이제 파국에 이르렀으니 조만간 닥쳐올 적의 침공에 대비하라는 취지의 이른바 ‘전화교서(絶和敎書)‘를 팔도에 하달했다. 그러나 후금과의 관계를 당장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을 사신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 P21

농성 개시 후 한 달이 지날 무렵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은 글자 그대로고립무원에 빠져 있었다. 조정은 ‘항전론‘과 ‘항복론‘으로 분열되었다. 전쟁발발 전의 ‘척화론‘을 이은 ‘항전론‘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자는 주장이었다. ‘주화론(主和論)‘에 맞닿아 있었던 ‘항복론‘은 옛날중국의 춘추(春秋) 시대의 월왕 구천(句踐)처럼 어떻게든 이번 위기를 넘겨야만 훗날의 와신상담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언뜻 ‘항복론‘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항복을 한들 과연 청군이 국가의 지속과 군신(君臣)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인가? 반면에 적지 않은 근왕병이 아직 미원에 남아 있지 않은가? 설사 그들의 근황이 끝내 실패한다고 할지라도나라와 운명을 함께하여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면 천하 후세의 역사에 떳떳하기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강화도로 들어간 원손(元孫)과 두 대군(大君)이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이어갈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은 결국 항복을 선택했다. 단, 그 항복은 청 측에서 ‘평화적‘ 철군의 조건을 내걸면서 전개된 종전(終戰) 협상의 결과였다. 정축년 정월 20일, 홍타이지는 인조가 출성(出城)하면 바로 전쟁을 끝내고 철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출성 시 국왕의 안전 보장을 확신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정월 26일, 청군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남한산성에 알렸다. 나흘 전인 정월 22일에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확실한 증인과 증거까지 제시하며 통고한 것이다. 충격에 휩싸인 인조는 그날 저녁 출성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이튿날 이를 청군에 알렸다. 정월28일, 홍타이지는 국왕의 안전 보장을 재확인하면서 종전 이후 조선이 이행해야 할 의무사항을 전달했다. 정축년 정월 30일, 날수로 47일 만에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는 한강 남안의 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三궤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오늘날의 달력으로 1637년2월 24일의 일이었다. - P26

통설의 서사에는 간혹 근거가 될 만한 사료를 전혀제시하지 않은 막연한 주장들이 발견된다. 설사 근거 사료를 제시했더라도그 사료를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과거의 기록이라고 해서 모두 믿어서는 안 된다. 앞뒤의 상황과 부합하지 않거나 상식을 벗어나는 돌출적인 ‘증언‘에 대해서는 그 신빙성을 면밀히 따지는 검증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어떤 기록의 ‘증언‘이 다른 기록의 ‘증언‘과 모순될 때에는 어느 쪽이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 엄밀히 따져야 한다. 조선의 기록뿐만 아니라 청의 기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쪽 기록이든 간에 와전, 오류, 왜곡 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마련이므로, 주요 문헌 기록을 면밀히 대조하고 검토하여 허구나 왜곡 및 과장을 최대한 걷어내야 한다. 이러한 사료 비판을 거쳐 사실(史實)을 확정한 뒤에는 합리적인 추론으로 사실과사실의 관계를 정합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 P30

병자호란이 홍타이지의 親征이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넘길 성질이 아니다. 친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병자호란의 중대특징이다. 병자년의 시점에서 보자면, 홍타이지의 조선 친정은 당연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외의 선택이었다. 그는 얼마든지 다른 왕공이나 장수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병자호란을 치를 수도 있었다. 많은 사례가 있지만, 자신의 형제와 조카들에게 맡겼던 정묘호란을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심지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로 나가기 전날 밤까지도 조선 조정이 홍타이지의 친정을 반신반의한 것 역시 당시 시점에서 친정의 의외성을 방증한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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