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조선의 인조(仁祖) 14년이자 청의 숭덕(德) 원년이었던 병자년(丙子年)십이월 8일(1637년 1월 3일). 청군의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정축년(丁丑年) 정월 30일(1637년 2월24일), 남한산성을 나선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의 태종(太宗)에게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전쟁이 터진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
을 겪었던 것이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치욕 중 하나로 기억되는 참패였기에 이런 의문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전쟁 준비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어찌 이렇게 참담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왜란(倭亂)의 참화를 겪은 지 50년도지나지 않았건만, 심지어 약 10년 전에는 똑같은 적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었건만, 그사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왜란이나 정묘호란은 사전에 적의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치자. 그러나 병자호란의 경우는 겨울의 전쟁이 터지기 한참 전인 병자년 봄 척화론(斥和論)이 들끓는 가운데 전쟁 불사의 의지를 천명하지 않았던가? 조선의 위정자들은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말인가? - P9

서론

조선의 제16대 국왕 인조(仁祖)[1595~1649년 재위 1623~1649년]가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光海君)을 몰아내고 보위(寶位)에 오른 지 햇수로 14년째였던 병자년(丙子年)의 십이월, 청(淸) 태종(太宗) 홍타이지(Hongtaiji,
皇太極)[1592∼1643년 재위 1626~1643년 청의 대군(大軍)을 직접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우리가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고 부르는 전쟁이터진 것이다.
병자호란이 터지기 10년 전에도 전쟁이 있었다.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1627년의 정묘호란은 두 나라가 이른바 ‘형제 맹약‘이라고 불리는 화의(和議)를 체결함으로써 끝이 났다. 정묘호란 때의 홍타이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금국(金國)[만주어로는 ‘아이신 구룬(Aisin Gurun)]의 한(汗)이었으며, 형제 맹약 이후의 10년 동안 후금의 한 홍타이지와 조선의 왕 인조는 상호 대등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병자년(1636) 이월에 이르러 양국 관계에 매우 심각한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후금이 사신을 파견하여 이제 명(明)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홍타이지의 ‘칭제(稱帝)‘ 과정에 동참하라는 요구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론(斥和論)이 들끓었다. 후금의 요구를 단호하게 물리친 것은 물론이다. 삼월 1일에는 인조가 정묘년 이래의 양국 관계가 이제 파국에 이르렀으니 조만간 닥쳐올 적의 침공에 대비하라는 취지의 이른바 ‘전화교서(絶和敎書)‘를 팔도에 하달했다. 그러나 후금과의 관계를 당장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을 사신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 P21

농성 개시 후 한 달이 지날 무렵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은 글자 그대로고립무원에 빠져 있었다. 조정은 ‘항전론‘과 ‘항복론‘으로 분열되었다. 전쟁발발 전의 ‘척화론‘을 이은 ‘항전론‘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자는 주장이었다. ‘주화론(主和論)‘에 맞닿아 있었던 ‘항복론‘은 옛날중국의 춘추(春秋) 시대의 월왕 구천(句踐)처럼 어떻게든 이번 위기를 넘겨야만 훗날의 와신상담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언뜻 ‘항복론‘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항복을 한들 과연 청군이 국가의 지속과 군신(君臣)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인가? 반면에 적지 않은 근왕병이 아직 미원에 남아 있지 않은가? 설사 그들의 근황이 끝내 실패한다고 할지라도나라와 운명을 함께하여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면 천하 후세의 역사에 떳떳하기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강화도로 들어간 원손(元孫)과 두 대군(大君)이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이어갈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은 결국 항복을 선택했다. 단, 그 항복은 청 측에서 ‘평화적‘ 철군의 조건을 내걸면서 전개된 종전(終戰) 협상의 결과였다. 정축년 정월 20일, 홍타이지는 인조가 출성(出城)하면 바로 전쟁을 끝내고 철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출성 시 국왕의 안전 보장을 확신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정월 26일, 청군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남한산성에 알렸다. 나흘 전인 정월 22일에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확실한 증인과 증거까지 제시하며 통고한 것이다. 충격에 휩싸인 인조는 그날 저녁 출성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이튿날 이를 청군에 알렸다. 정월28일, 홍타이지는 국왕의 안전 보장을 재확인하면서 종전 이후 조선이 이행해야 할 의무사항을 전달했다. 정축년 정월 30일, 날수로 47일 만에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는 한강 남안의 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三궤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오늘날의 달력으로 1637년2월 24일의 일이었다. - P26

통설의 서사에는 간혹 근거가 될 만한 사료를 전혀제시하지 않은 막연한 주장들이 발견된다. 설사 근거 사료를 제시했더라도그 사료를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과거의 기록이라고 해서 모두 믿어서는 안 된다. 앞뒤의 상황과 부합하지 않거나 상식을 벗어나는 돌출적인 ‘증언‘에 대해서는 그 신빙성을 면밀히 따지는 검증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어떤 기록의 ‘증언‘이 다른 기록의 ‘증언‘과 모순될 때에는 어느 쪽이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 엄밀히 따져야 한다. 조선의 기록뿐만 아니라 청의 기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쪽 기록이든 간에 와전, 오류, 왜곡 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마련이므로, 주요 문헌 기록을 면밀히 대조하고 검토하여 허구나 왜곡 및 과장을 최대한 걷어내야 한다. 이러한 사료 비판을 거쳐 사실(史實)을 확정한 뒤에는 합리적인 추론으로 사실과사실의 관계를 정합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 P30

병자호란이 홍타이지의 親征이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넘길 성질이 아니다. 친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병자호란의 중대특징이다. 병자년의 시점에서 보자면, 홍타이지의 조선 친정은 당연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외의 선택이었다. 그는 얼마든지 다른 왕공이나 장수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병자호란을 치를 수도 있었다. 많은 사례가 있지만, 자신의 형제와 조카들에게 맡겼던 정묘호란을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심지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로 나가기 전날 밤까지도 조선 조정이 홍타이지의 친정을 반신반의한 것 역시 당시 시점에서 친정의 의외성을 방증한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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