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겨울

곧 눈이 내릴 것 같다. 그애는 병실 창문을 통해 첫눈을 보겠지.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는 그애를 상상할 수 있다. 찬 유리에 이마를 갖다대는 그애의 작고 창백한 얼굴, 무표정함. 여윈 두 팔목은 헐렁한 환자복 윗도리의 주머니에 찔러넣었을 테고, 그리고 물에 젖은 듯 윤기가 나는 긴 속눈썹을 조금씩 깜박이며 창 쪽으로 고개를 내밀 때에, 그리핀 메달이 달린 가느다란 은색 목걸이 줄이 그애의 쇄골을 가볍게 스칠 것이다. 그애의 등 뒤로 보이는 병실은 청결하고, 가습기에서 뿜어져나와 일정한 지점에 이르러서 흩어져 사라지는 희뿌연 물방울의 띠가 실내의 정적을 강조한다. 잔뜩 흐린 날, 천장에서 반사되는 백색 형광등 불빛때문에 그애가 있는 3층 병실은 허공에 떠 있는 차가운 온실처럼 보일 것이다. - P9

해질 무렵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다가 무심코 보도블록이 움푹 팬 자리를 잘못 딛고, 다음 순간 이내 균형을 잡았을 때의 가벼운 어지러움 같은 것이랄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전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온 것처럼 주변의 공기가 낯설고 어색하고 귀가 멍한 느낌.
그래서 생각했었다. 세계라는 공간은 시간의 파이프가 물샐틈없이 친친 감긴 기계장치로 둘러싸여 있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서그 파이프로 시간이 공급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어느 찰나에 그 시간의 파이프가 아주 잠깐 이탈했었고, 그 짧은 순간 히말라야의 크레바스 같은 끝없이 깊고 좁은 틈 같은 게 생겨났으며, 거기로소중한 무언가가 빨려들어가서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면, 선로를 이탈한 시간은 문득 휘어졌다가 다음 순간 곧바로 다시 궤도로 들어섰지만, 분명 그전과 같은 시간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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