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렇다고 이주 물결이 끊어지는 게 아니었다. 가문끼리의 재결합은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같은 지역에 같은 성씨가 많으면 서로 더 많이 도움을 주고, 더 많은 문화 전통을 함께 행하고, 공동체가 더 안정되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2차 이주를 불안정과 의존의 증거로 보았다. 드와이트 캉커굿은 미국인의 억센 개인주의라는 이상과 몽족의 무리 내 상호의존이라는 이상의 간극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의 분리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윤리는 수많은 방법으로 선전되고있다. 이를테면 식사 때 개인에게 한 벌의 식기를 주는 것, 아이들한테도 자기만의 공간이 중요하다고 인식시키는 것, "자기 식대로 하라."라는 광고 노래가 모두 그렇다. 반면에 몽족의 문화는 교향곡이 연주되는 것과도같다. 각자가 나누어진 부분을 돌이키고, 떠올리고, 되살리고, 재결합시키는 주제를 연주하여 하나의 총체적 동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 P324

생활보호대상자가 된 것을 비난하는 것만큼 몽족을 화나게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몽족이라면 누구나 ‘약속‘이란 것에 대해 나름대로 할 말이 있다. 그것은 라오스내전 당시 CIA 요원들이 서면 또는 구두로 했던 계약으로, 미국인을 위해 싸워주면 인민군이 전쟁에서 이길 경우 불리해질 몽족을 도와주겠다고 한약속이었다. 몽족은 불시착한 미국인 조종사를 목숨 걸고 구했고 미국인의 폭격으로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감내하며 ‘미국의 전쟁‘을 도왔기때문에 살던 나라를 탈출해 미국에 오면 영웅 대접을 받으리라 기대했다.
몽족 대부분의 말에 따르면 첫 번째 배신은 미국 비행기가 롱티엥에서 장교들만 구출해주고 나머지 사람들은 버리고 간 일이었다. 두 번째 배신은 태국 난민캠프에서 미국으로 오고 싶어 한 몽족이 전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일이었다. 세 번째 배신은 자신들이 참전 용사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 배신은 미국인들한테 "복지 기금 잡아먹는다."라는 비난을듣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 배신은 그들에 대한 복지 혜택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듣는 것이었다. - P330

알고 보니 타오 씨는 빌이 그로부터 3년 동안 줄줄이 만나야 했던 우울한 동족 환자 행렬의 시작이었다. 빌은 그의 심각한 ‘고향‘ 상실증을 규명하면서 문제의 본질까지 파고들었다. 사회 관습뿐만 아니라 새소리도, 나무나 꽃도, 공기 냄새도, 땅의 질감도 전부 다른 미국에 사는 몽족에게 향수의 아픔은 더 가혹한 것일 수 있었다. 몽족 시인인 두아 허는 「내 나라를떠나는 애통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우린 일출의 새소리를 기억한다.
우린 일몰에 뛰어다니던 메뚜기를 기억한다.
우린 나뭇잎에 떨어지던 굵은 빗방울 소리를 기억한다.
우린 긴팔원숭이 수컷 우는 소리를 기억한다.
우린 파인애플, 바나나, 파파야 과실수들을 기억한다.
우린 우리처럼 서로 소리 지르던 올빼미들을 기억한다. - P335

나이 많은 몽족 어른들이 돌아가고 싶은 고향은(그들은 우히 밭, 우리 땅이라는 의미의 ‘페이 루 테이초(peb lub tebchaws)‘라 부른다.) 전쟁 이전의 라오스다. 전쟁 당시 라오스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대부분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다른 모든 스트레스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과도한 사별의 부담이었던 것이다. 보스턴에 ‘인도차이나인 정신 치료 병원‘을 설립하는 데 공헌한 정신과 의사 리처드 몰리카는 전쟁과 그 여파로 몽족 난민들이 살인이나 고문 같은 ‘중대한 외상적 사건‘을 평균 열다섯 건 정도 경험했음을 알게되었다. 몰리카는 그런 환자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들의 심리적 현실은 꽉 차 있기도 하며 텅 비어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꽉 차 있으며, 새로운 생각이나 새로운 경험에 대해서는 ‘텅 비어 있지요."
과거의 충격이나 갈망으로 ‘꽉‘ 차 있는 몽족은 옛 정체성으로 인해 현재의 위협을 대처하는 게 특히 어렵다.  - P337

"아이가 그렇게 큰 걸 보면 부모가 엄청 잘 돌본 게 틀림없어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식물인간이 되면 바짝 말라서 뼈하고 가죽만 남거든요. 제가 본 열일곱 살짜리 애는 네 살짜리만 해보였어요."
닐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가 띠로 리아를 업고 진료실에 올 때마다 리아는 언제나 깨끗하고 잘 차려입은 빈틈없는 모습이었어요. 정말 흠 하나 잡을 데가 없었지요. 대단히 인상적이었어요."
페기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백인 부모보다 아이한테 잘했어요. 백인 부모였다면 아이를 당장 시설로 보냈을 거예요."
푸아와 나오카오는 왜 진료실 의료진들이 입원 당시 의료진들보다 훨씬 더 잘 대해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딸은 분명히 변했지만 부모로서 그들의 행동은 변한 게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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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로 대표되는 미국의 과시적 이상을 더 유지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것은 공통의 국민 정체성을 위해 이민자들에게 본인들의 문화를 감•출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건국 정신인 ‘여럿이 하나 된다.‘가 뜻하는 바에 따르려고 말이다.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초, 미시건주 디어본의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는 이민 노동자들에게 무료이면서 의무적인 미국화 수업을 했다. 영어 외에도 작업 방식이나 개인위생, 식사 예절에 대한 강의를 했다. 이민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배운 문장은 ‘나는 훌륭한 미국인입니다.‘였다.
졸업식 때 그들은 거대한 나무 솥 앞에 모였고 강사들은 길이가 3미터인 국자로 젓는 시늉을 했다. 학생들은 각각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자기네 말로 노래를 부르며 한쪽 문을 통해 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분 뒤 반대쪽에서 나올 때는 모두 양복과 넥타이 차림으로 미국 국기를 흔들고 미국국가를 불렀다.
포드 자동차 회사의 ‘도가니(melting pot)‘에서 나온 유럽 이민자들이미국에 온 것은 미국의 주류 사회에 동화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족이 미국에 온 것은 19세기 중국을 떠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즉 동화에 ‘저항‘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인류학자 자크 르모안이 본 바와 같이 "그들이 우리가 사는 여러 나라로 온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것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즉 몽족의 민족성을 구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라오스에서 몽족의 정체성을 안전하게 지킬 수있었다면 조상들이 끝까지 중국에서 버티려고 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라오스에 남아 있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주는 언제나 문제 해결의 방편이었지 매이기를 싫어하는 충동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 P304

몽족은 관료를 별로 존경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몽족 속담에 ‘호랑이를 만나면 죽는 법이고, 관료를 만나면 털리는 법이다.란 말이 있을정도다. 인도차이나계 난민들의 적응 문제를 다룬 한 연구에서 몽족 응답자들은 ‘전쟁의 기억‘이나 ‘가족과의 이별‘보다 ‘미국 기관과의 갈등‘을 더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또한 VOLAG 중에는 종교 단체와 관련된 곳이 많아 몽족 난민들은 개신교 목사들과 접할 경우가 많았는데, 목사들은 당연히 무속적 정령신앙을 좋게 보지 않았다. 난민을 지원하는 미네소타의 한 목사는 어느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을 여기로 데려와서 먹이고 입히기만 하고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두는 건 죄악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들이 개종하길 바라십니다. 교회가 그들에게 주님을 증거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것입니다."
개종 작업은 당장 부작용을 일으켰다. 몽족의 정신건강 문제를 다룬한 연구에 따르면 이 목사가 소속된 종교 단체의 지원을 받은 난민들은 다•른 난민들에 비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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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부부가 전후 체험을 얘기해주던 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마나 힘드셨겠어요."라고 했다. 그러자 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나를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래요. 많이 슬펐지. 하지만 라오스를 떠나올 때만 해도 사는 게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리아가 프레즈노에 가서 더 심해진 때처럼슬프진 않았지."
처음에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3년 동안 푸아와 나오 카오는 라오스에서 아이 셋을 잃었다. 또 총탄과 지뢰와 불의 장벽을 헤쳐나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살던 마을과 나라를 떠나기까지 했다. 제일 아끼는 아이가 치명적인 병을 앓는다 한들 어찌 그때보다 더 나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폭력도, 기아도, 결핍도, 망명도, 죽음도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적어도 그들이 알고 이해할 수있는 비극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리아에게 일어난 일은그 영역 바깥의 것이었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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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외에도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파고들려는 여러 미디어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히로시마 폭격 20주년을 맞던 1965년에 NBC는 원자 폭탄사용 결정 (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체트 헌틀리가 해설자를 맡았고, 오펜하이머의 7월 16일트리니티 실험에 대한 회고와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이제 나는 죽음이되었다. 세계의 파괴자")을 낭송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터뷰어가존슨 대통령이 소련과 핵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회담을 시작해야 한다는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파이프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서 "이미 20년이나 늦었습니다∙∙∙∙∙∙. 그것은 트리니티 바로 다음 날 했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P877

그들의 대화가 철학적인 주제로 넘어가면서 오펜하이머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모건은 그가 그 단어를 거의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이에 동의하며, 그것은 "종교적인 개념을 초월적인 존재에 연결시키지 않으면서 사용할 수 있는 세속적인 장치"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 ‘윤리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싶군요. 나는 윤리적인 질문들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명료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내가 폭탄을 만들 때 역시 나를 강하게 지배했지만 말이지요. 나는 이제 내 인생을 묘사하면서 ‘책임감‘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않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선택과 행동, 그리고 선택들이 해소될 수 있는 긴장과 관련된 말입니다. 나는 지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행동에 대한 제약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이없이는 의미 있는 책임감도 있을 수 없지요. 우리는 스스로 행하는 행동에 대해서만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지식, 부, 여가는모두 우리가 책임감을 가져야만 하는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 P885

호크네스트 만의 오두막집은 허리케인에 휩쓸려 이제 없어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주민 회관이 세워졌고, 그 부근은 오펜하이머 해변이라고 불리고 있다. - P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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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인사들은 재판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를 미국이 비이성적 공포에 사로잡혀 있음을 확증하는 증거라고 보았다. 크로스먼(R. H. S. Crossman)은 영국의 주요 진보주간지 <뉴 스테이츠맨 앤드 네이션(The New Statesman and Nation)》의 기고문에서 "이와 같은 환경에서 독립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파리에서 슈발리에는 오펜하이머가보낸 청문회 녹취록을 받고 앙드레 말로에게 일부분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두 사람은 오펜하이머가 심문자에게 보여 준 이상한 소극성에충격을 받았다. 말로는 특히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친구들과 동료들의 정치관에 대한 질문에 스스럼없이 대답했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여겼다. 청문회를 통해 그는 밀고자가 되었던 것이다. 말로는 슈발리에에게 "문제는 그가 처음부터 고발인의 논리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애초부터 그들에게 ‘내가 바로 원자 폭탄이오!(Je suis la bombeatomique!)‘라고 말해 주었어야 했어요. 그는 자신이 원자 폭탄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어야 했습니다. 그는 과학자이지 밀고자가 아니라고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 P840

연구소는 1930년대의 배클리처럼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곳은 다양한 연령대와 여러 전공 분야의 총명한 학자들의 집합소였다. 뛰어난 젊은 수학자인 존 내시(John Nash)는 1957년 고등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내시는 하이젠베르크가 1925년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쓴 논문을 읽고 양성자 이론에서 해결되지 않은 모순점들에 대해 베테와 여러 물리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처럼 내시 역시 양성자 이론의 깔끔함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1957년 여름에 그가 자신의 이단적인 생각을 오펜하이머에게 제기하자, 오펜하이머는 성급하게 그의 질문들을 일축했다. 하지만 내시는 고집을 부렸고 오펜하이머는 곧 그와 심각한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내시는 그에게 보낸 사과 편지에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교조적인태도를 가지고 있다."라고 평했다. 
내시는 그해 여름 고등 연구소를 떠났고, 이후 여러 해 동안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다가 결국 얼마간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오펜하이머는 내시가 겪어야 했던 시련을 동정했고, 그가 정신 분열 증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하자 연구소로 다시 초청했다. 오펜하이머는 인간 정신의 허약함에 대해 관용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광기와 총명함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인식에 바탕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시의 의사가 1961년 여름 오펜하이머에게 전화를 걸어 내시의 정신이 여전히 또렷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의사 선생, 그 질문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 P850

이어진 수상 연설에서 오펜하이머는 전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종종 ‘과학의 형제애 정신‘에 대해 쓰고는 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나는 우리가 이와 같은 과학의 형제애 정신에 항상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공통의 과학적 관심을 갖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인류가 자유와 행복 추구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늘려 가며, 전쟁이라는 중재자 없이도 살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는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작업에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종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존슨을 향해 "대통령 각하, 당신이 오늘 이 상을수여하는 데에는 약간의 동정심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좋은 전조가 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P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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