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인사들은 재판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를 미국이 비이성적 공포에 사로잡혀 있음을 확증하는 증거라고 보았다. 크로스먼(R. H. S. Crossman)은 영국의 주요 진보주간지 <뉴 스테이츠맨 앤드 네이션(The New Statesman and Nation)》의 기고문에서 "이와 같은 환경에서 독립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파리에서 슈발리에는 오펜하이머가보낸 청문회 녹취록을 받고 앙드레 말로에게 일부분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두 사람은 오펜하이머가 심문자에게 보여 준 이상한 소극성에충격을 받았다. 말로는 특히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친구들과 동료들의 정치관에 대한 질문에 스스럼없이 대답했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여겼다. 청문회를 통해 그는 밀고자가 되었던 것이다. 말로는 슈발리에에게 "문제는 그가 처음부터 고발인의 논리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애초부터 그들에게 ‘내가 바로 원자 폭탄이오!(Je suis la bombeatomique!)‘라고 말해 주었어야 했어요. 그는 자신이 원자 폭탄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어야 했습니다. 그는 과학자이지 밀고자가 아니라고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 P840

연구소는 1930년대의 배클리처럼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곳은 다양한 연령대와 여러 전공 분야의 총명한 학자들의 집합소였다. 뛰어난 젊은 수학자인 존 내시(John Nash)는 1957년 고등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내시는 하이젠베르크가 1925년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쓴 논문을 읽고 양성자 이론에서 해결되지 않은 모순점들에 대해 베테와 여러 물리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처럼 내시 역시 양성자 이론의 깔끔함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1957년 여름에 그가 자신의 이단적인 생각을 오펜하이머에게 제기하자, 오펜하이머는 성급하게 그의 질문들을 일축했다. 하지만 내시는 고집을 부렸고 오펜하이머는 곧 그와 심각한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내시는 그에게 보낸 사과 편지에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교조적인태도를 가지고 있다."라고 평했다. 
내시는 그해 여름 고등 연구소를 떠났고, 이후 여러 해 동안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다가 결국 얼마간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오펜하이머는 내시가 겪어야 했던 시련을 동정했고, 그가 정신 분열 증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하자 연구소로 다시 초청했다. 오펜하이머는 인간 정신의 허약함에 대해 관용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광기와 총명함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인식에 바탕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시의 의사가 1961년 여름 오펜하이머에게 전화를 걸어 내시의 정신이 여전히 또렷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의사 선생, 그 질문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 P850

이어진 수상 연설에서 오펜하이머는 전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종종 ‘과학의 형제애 정신‘에 대해 쓰고는 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나는 우리가 이와 같은 과학의 형제애 정신에 항상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공통의 과학적 관심을 갖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인류가 자유와 행복 추구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늘려 가며, 전쟁이라는 중재자 없이도 살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는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작업에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종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존슨을 향해 "대통령 각하, 당신이 오늘 이 상을수여하는 데에는 약간의 동정심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좋은 전조가 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P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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