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대선도 과거 선거처럼 집권 세력에 의한 각종 용공음해와 불법·탈법 선거운동이 자행되었다. 특히 김대중 후보에 대한 극심한 매카시즘 공세가 전개되어 선거전을 정책 대결이 아닌 색깔론으로 몰아갔다. 보수 언론사는 기사와 논평을 통해 노골적으로 특정인을 지지하거나 배척하면서 정치문제로까지 비화시키는 등 낯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대규모 청중동원 연설회 대신 몇 차례에 걸친 TV 토론회를 통해 유권자들이 후보를 직접 검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위기를 맞아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김대중의 역량이 높이 평가되었다. 여기에 DJP 연합과 여당의분열이 작용해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이 땅에서는 창업과 쿠데타 · 혁명 · 정변 · 반정 등 여러 가지형태의 권력 변환이 있었지만, 피지배 계층이 평화적 방법으로 권력을 교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60년 민주당의 집권은 4월혁명 이후 ‘혁명 과정의 선거‘로 취득한 정권교체이고, 1992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은 3당 야합으로 얻어진, 군사정권의 모태에서 발생한 것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 P282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약체였다. 국회는 여전히 한나라당(대선 과정에서 신한국당이 이미지 쇄신을 위해 바꾼 당명)이 지배하고 지난 반세기 이상군사정권과 유착하면서 성장해온 거대 족벌신문과 지식인 그룹, 그리고 "정권을 빼앗겼다"고 앙앙불락하는 특정 지역의 기득권 세력이 버티면서 사사건건 새 정부를 헐뜯었다.

‘국민의 정부‘의 권력은 탄생 때부터 많은 고민을 안고 출발했다. 김 대통령은 유효 투표의 40.3퍼센트의 지지로 당선되었다. 이회창 후보보다 겨우 39만표 앞선 것이었다. 승부를 가른 이 39만 표는 김종필 총리의 지지기반인 충청권에서 나타난 김대중- 이회창 후보 간 표차와 정확히 일치하는 수치다. 김 총리가 공동정권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이드러나는 부분이다.
이회창 총재가 이끄는 한나라당은 야당으로 입장이 바뀌었지만 여전히원내 제1당으로 막강한 국회 권력을 갖고 있었다. 39만 표의 격차에서 짐작되듯 표의 동서 양분 현상은 과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지난해 6월의 지방선거와 두 차례의 재·보궐선거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말하자면 김대중 대통령의 권력은 소수정권인데다 그나마 권력이나뉜 연합정권의 구조적 취약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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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선조들은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처마에 예쁘게 색칠한단청을 만든 것이다. 창문 밖으로 경치를 보았을 때 시야에서 윗부분을 프레임하는 것이 서까래와 처마다. 처마 부분은 외부 자연 경관을 담는 액자의 프레임이니, 장식이 들어간다면 이 부분에 했어야 했던 것이다. 재미난 것은 단청을 구성하는 색깔이다. 우리나라는 특이하게 대부분이 녹색 계통이고 강하게 보색이 되는 자줏빛을 사용한다. 이 색깔은일본이나 중국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자연을 더 확장돼 보이게 하려는의도로 추측된다. 여름철에 처마에 서서 주변 산을 바라보면 자줏빛은 나뭇가지처럼 보이고, 녹색은 나뭇잎으로 보여서 주변 풍경이 연속되어 건축물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우리나라 단청이 왜 그렇게 명도가 높은 색상으로 된 것인지도 이해가된다. 처음에 서양인의 시점으로 건물을 밖에서 바라보면 단청의 채도가 너무 눈에 띄게 높아서 거슬린다. 그러나 안에서 밖을 바라보게 되면 이해가 된다. 어두운 실내에서 밖을 보면 자연은 밝고 처마 부분은그림자가 져서 어둡게 된다. 이때 녹색과 자줏빛을 채도가 낮은 차분한톤으로 칠하면 그림자 진 상태에서 칙칙해 보이고 자연과 건축의 경계가 명확해진다. 하지만 우리나라 단청 색깔처럼 채도가 높은 밝고 선명한 톤으로 칠하면 단청이 그림자에 들어가 있어도 밝은 바깥 경치와 연결돼 보인다. 나는 이런 경험을 불국사의 어느 처마 밑에서 할 수 있었다. 단청의 색깔만 보더라도 우리 선조들은 자연과 건축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건축물이 자연에 흡수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것은 건물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제3자의 시각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사람의 1인칭 시점에서 디자인적 판단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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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강이가 죽을 것 같아."
나의 귀가시간이 늦어질 때마다 엄마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허겁지겁 집에 달려갔다. 강이는 현관까지 뛰어와 엉덩이가 실룩거릴 정도로 꼬리를 흔들었다. 엄마의 말이 거짓말이어서 좋았다. - P9

꺼진 텔레비전 앞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의 미래처럼 캄캄했다. 나는 미래를 예측해본 적이 없었다. 미래를 다짐해볼 때는 많았다. 언젠가 먼 곳까지 가볼 것이다. 먼 곳에서 더 먼 곳을 향해 가며 살 것이다. 이불속에서 얌전하게 죽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다짐이었다. 다짐으로 점철된 미래를 펼쳐놓았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예언이 내게는 다짐뿐이었다.
엄마는 크기가 다른 냄비를 써도 라면 물의 양을 정확히 예측했다. 반장은 중간고사에 어떤 문제가 나올지 정확히 예측했다.
선생은 무슨 말을 해야 아이들이 웃을지 예측했고, 아이들은 어떤 말을 해야 선생이 화를 낼지 예측했다. 그렇지만 나는 예측할수 있는 게 없었다. 읍내동에서 쌓아왔던 예측의 기술은 전민중학교에서 번번이 빗나갔다. 읍내동 중학교의 영어시간에는 유창한 발음으로 영어 교과서를 읽는 아이가 놀림의 대상이 되었지만, 전민중학교의 영어시간에는 모두가 원어민이 되었다. 내가읍내동에서 선행학습반에 뽑혀 한 학년 위의 수학 문제를 풀고있을 때, 전민동 아이들은 미분이니 적분이니 하는 두세 학년 위의 수학 문제를 풀었다. 이해받을 거라는 예측으로 던진 말에 선생들은 화를 냈고, 화낼 거라는 예측으로 던진 말에 친구들은 옷음을 터뜨렸다. 읍내동에서 그나마 똑똑한 아이로 취급받던 나는 전민동에 오자 멍청한 아이가 되었다. 달라지는 상황 앞에서도 예측이 정확한 사람은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은냄비를 써봐야 어느 냄비를 쓰든 라면 물을 정확히 맞출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문제를 풀어봐야 어떤 선생이든 무슨 문제를 낼지 알아맞힐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꽃을 키워봐야 얼마나 많이 꽃을 죽여봐야 다짐을 더 자주 다지는 것밖에는 내가 나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다짐에 골몰했다.
소영의 예측 방식은 달랐다. 내 방식이 먼 곳에 놓인 돌멩이를보려는 거라면, 다른 사람들의 방식이 쥐고 있는 돌멩이를 꾸준히 쥐고 있는 거라면, 소영은 돌멩이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바둑을 두는 방식이었다. 현실에 두는 돌 하나로 미래의 돌의 위치를바꿔놓았다. 소영의 곁에서 나는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미래가 현실을 향해 마구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했다. 막연한 단어로만 꺼내보았던 미래가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것을 목격했다. 소영은 현실이라는 그물로 미래를 포획하는 유일한 아이였다. 제 마음대로 꽃을 피우고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아이였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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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마음 한구석에 그물을
드리우는 것과 같아서
그 그물을 건드릴 때마다
예기치 않게 온갖
감정과 기억이 죄다끌려나오는데...
그때그때 밀려오는 것에
제대로 이름을붙여주지 않으면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대로 휩쓸리기마련이거든요.
이름을 붙이면
마주할 수 있고,
마주할 수 있으면
다른 감정과 슬픔을구별할 수 있어요.
그 모든 걸
슬픔으로 뭉뚱그리면
슬픔의 총량만 한없이
불어나거든요.
무엇보다소중한 사람을 슬프게만
기억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요. - P125

원래방두 개를 채울 만큼
많았는데 그나마다 정리한거야.
왜 정리하신거예요...?
좋아했던 마음이무거워서…
지나간 일은그리워하기
적당한 무게로남겨두는게 좋겠다고생각했거든.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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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이야기

아주 오래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죽음이 또다른 생으로 가는 첫번째 단계라고 믿었어요.
사람이 숨을 거두는 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기나긴 여정을 떠나는 거라고요. - P8

네가 뭘 선택하든
그게 널 해치는 일만아니면
엄마는 상관없어.
나는 그냥 이모나 주연의 영화가
걸리는 상영관 맨 앞에 앉아서
응원봉이나 흔들게.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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